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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일성록
김노응이 황해도 암행어사를 제수받아 1808년(순조 8년)에 황해도의 금천, 배천, 봉산, 옹진, 평산 등지를 다녀와 이 서계를 바쳤으며, 각 추생지역의 전현직 수령들에 대하여 상세한 보고를 올리고 있다.
황해도(黃海道) 암행어사(暗行御史) 김노응(金魯應)과 평안남도(平安南道) 암행어사 서능보(徐能輔)가 서계(書啓 : 보고서)와 별단(別單 : 첨부문서)을 올렸다. 김노응의 서계는 아래와 같다.
서계(書啓)
금천 군수(金川郡守) 박남원(朴南源)은 관직에 이른 후 법규를 다스림에 자못 조리가 있어, 재판을 함에 백성들이 모두 가혹한 일들을 모조리 말하였고, 서리들은 스스로 그칠 줄 알았습니다. 또한 천재(天災)나 인재(人災)로 인한 재앙을 조사하거나 부정한 짓을 저지른 것을 적발할 때에 엄중하고 신중하게 하여 감색(監色)들이 폐해를 저지를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칭송함이 있습니다.
배천 군수(白川郡守) 김재삼(金在三)은 임지에 부임하여 귀를 기울여 보니 칭찬이나 비방하는 풍문이 없습니다.
봉산 전 군수(鳳山前郡守) 홍윤복(洪允復)은 사람이 진실로 달통하고 노련하여 다스림 또한 부지런하고 유능하였습니다. 창고 폐단의 경우 창고지기의 손을 거두어 들여[倉吏斂手] 함부로 농간하지 못하게 했으며, 군정(軍政)의 경우 군색(軍色)들이 위엄을 거두고는 멋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외에도 분명하게 송사(訟事)를 들어서 심리하고, 은혜롭게 백성들을 어루만지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금년 봄에 객사(客舍)를 중건할 때에는, 수천 금의 창고 곡식을 꺼내어 비록 한 개의 재목이나 한 개의 기왓조각처럼 자잘한 것도 모두 제 가격을 주고 사서 쓰도록 하였습니다. 운송할 때에도 모두 품삯을 주되 하나하나 균등하게 지급하였으며, 백성들 중에 혹 받지 못하고서 떠나는 사람이 있으면 다시 불러들여 반드시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뭇사람들의 칭송이 길에 가득하여 이웃 지방에게까지 퍼졌습니다. 그리고 그가 다른 임지로 떠나갈 때에는 크든 작든 백성들의 마음에 그가 떠나감을 애석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잘 다스린 수령은 아마도 포상의 은전(恩典)이 없을 수 없을 듯합니다.
옹진 부사(瓮津府使) 오문상(吳文常)은 정치를 함에 강직함과 엄격함을 숭상하여 다스림 또한 자세하고 분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크고 작은 일에 반드시 몸소 스스로에게 비춰보고 검증하고 난 이후에 비로소 결정을 하여, 군인과 백성을 아끼고 보호한다는 칭찬이 있었으며, 공금(公金)을 축내는 폐단은 없었습니다.
평산 부사(平山府使) 정희는 부임한 지 겨우 한 달이고 백성을 대한 것이 열흘을 넘지 않아, 별다른 칭찬이나 비방이 없습니다.
서흥 부사(瑞興府使) 홍인모(洪仁謨)는 다스림이 관대하고 자애로워 정치에 가혹하고 자질구레함이 없었습니다. 횡령한 자들을 조사할 때에는 창고의 폐단을 힘써 없앴으며, 환곡을 받아들이는 것을 검사함에 있어서는 대부분의 백성들이 은혜롭게 여겼습니다.
곡산 부사(谷山府使) 조흥진(趙興鎭)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뜻이 간절하였으며, 정치 또한 부지런히 힘썼습니다. 재판을 듣고 판결을 내릴 때에는 너그럽고 공평하다는 칭찬이 있고 여러 건물들[?宇]을 수리하거나 세운 것들이 많습니다.
안악 현감(安岳縣監) 윤우열(尹羽烈)은 정사(政事)와 다스림이 너그럽고 공평하며 순후하고 정성스러워 도리에 걸맞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올 여름 보리를 거두어 받아들일(捧上) 때에 친히 조사하고 검사하여 백성들이 스스로 곡을(斛) 잡고서 바치는 곡식의 양을 재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나누어 줄 때에는 수량을 고쳐서 나누어 주어 자못 백성들의 칭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봄에 환곡을 나누어 줄 때에는 대(大)ㆍ중(中)ㆍ소(小)의 호(戶)에 따라 말[斗]의 수를 헤아리지 않고 한결같게 똑같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한쪽으로 치우치게 많이 주거나 적게 주는 폐단이 있을 것을 고려해서 한 행동이지만, 소호(小戶)나 가난한 백성들은 힘써 길쌈을 하더라도 상납(上納)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없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해주 판관(海州判官) 심능악(沈能岳)은 치밀하고 상세하게 법규를 수행하고 은혜롭고 어질게 정치를 하여 관직에 이른 초기부터 볼 만한 업적이 있었습니다. 친히 군적(軍籍)을 집행하여 바로잡음에 뜻을 두어 서리들의 횡령[吏逋]을 엄격하게 조사하여 이웃과 친족들에게서 세금을 걷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였던 까닭으로 떠나가더라도 다시 오기를 기약할 수 있었습니다.
신계 현령(新溪縣令) 박제일(朴齊一)은 임지에 도착한 후 바로 서울로 올라가 벼슬을 돌려주어 귀를 기울여 살펴보았지만 아직 들은 바가 없습니다.
장련 현감(長連縣監) 이동환(李東煥)은 관직에 부임한 후 하는 일마다 정성을 다하여 횡령한 것을 거두고 정역자(丁役者)들을 기록하였으니[徵逋簽丁] 자못 숭상할 만하였습니다. 다만 다스림을 구하였으나 아직 잘 다스려지지 않자 가혹하고 사나우며[束濕] 엄중하게 처리하기를 요구하여 간혹 실정(實情)을 지나치기도 합니다.
송화 현감(松禾縣監) 이경수(李敬脩)는 성격이 나약하고 다스림 또한 어두워 고을의 모든 일을 향리에게 맡겨두고는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이에 모든 폐단들이 몰래 불어나 진실로 손으로 꼽기가 어려웠으며, 그 중에 가장 심한 것을 거론하여 말한다면, 와환(臥還 : 봄에 관아에서 백성들에게 대여하였던 還子 곡식을 가을에 거두어 들이지 아니하고 해마다 耗穀만을 받아들이던 일)이 이것입니다. 이 현은 와환(臥還)의 폐단이 다른 읍들보다 더욱 심하고 또한 모조(耗條 : 耗穀에 해당하는 몫)에 작전(作錢 : 田稅를 받을 때 쌀ㆍ콩ㆍ무명 대신에 換價하여 돈으로 내게 하는 일)을 덧붙인다는 소문이 길가에 시끄럽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臣)이 출두했을 때 먼저 창고지기의 문서[文簿]를 취하여 상세하게 조사를 해보니, 와환(臥還)의 곡식이 2,621섬인데 작전(作錢)을 더한 수가 또한 430여 냥이 됩니다. 간혹 이것을 어기면 또한 불법으로 연루시키는데 하물며 두 가지 죄가 모두 드러난 자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그 실정(實情)에 어둡고 어그러져 직분을 더럽힌 죄는 엄하게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강령 현감(康翎縣監) 정조영(鄭祖榮)은 관직에 이른 이후에 비록 개혁한 것은 없지만 시행한 것들은 사람들이 진실로 편안하게 여기며, 정치 또한 치밀하고 분명하였습니다. 창고 곡식의 경우 엄격하게 단속하니 아전들이 함부로 농단(壟斷)하는 병폐가 없었으며, 군정의 경우는 엄하고 신중하게 하니 해당 관리들이 다른 것으로 대신 채워 넣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은율 현감(殷栗縣監) 남달손(南達孫)은 새로 부임하여 폐국(弊局)을 개혁하는 데 뜻을 두었습니다. 환정(還政)의 폐단은 엄격하게 단속하니 감색(監色)들이 간악한 짓을 할 수 없었고, 군정의 경우 엄하고 신중하게 하니 방리(坊里)에서 그 누구도 어지럽히지 못했습니다. 또한 재판을 듣고 심리(審理)하는 것이 공평하여 대부분의 백성들이 칭찬하였습니다. 전 현감 이영하(李泳夏)는 3년 동안 관직에 있었지만 별도의 드러난 공적은 없었습니다. 아전들을 단속하는 것이 엄격하지 않아 창고에 일어나는 폐단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작년에는 창고지가 환곡 200석을 훔쳐 몰래 다른 지방에 팔아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낭자하였고 백성들의 원망이 벌떼처럼 일어났습니다. 관직의 우두머리 된 몸으로 그 병폐를 확실하게 다스리지 못하고 살피지 못한 죄는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장연 현감(長淵縣監) 양완(梁?)은 사람됨이 편안하고 세심하며 정치 또한 노련하여 바야흐로 오래 된 병폐를 개혁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습니다. 군포가 체납된 폐단과 시장의 돈을 각리(?利 : 관청에서 물품을 전매하여 수입을 늘림)하는 습속을 엄중하게 금지시켰습니다.
전 현감 최익(崔翼)이 재임할 때에는 선정(善政)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본 읍은 작년 추수 때 곡식이 덜 익음을 면치 못했는데 순영(巡營)에서 삼분의 일을 대봉(代捧)하도록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값의 환산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단대봉(單代捧 : 쌀 대신 다른 물건으로 받는 경우, 값을 쳐서 상당한 값의 다른 물건으로 대신 바치게 하지 않고, 단지 수량만을 따져서 다른 물건으로 바치게 하는 일)하였으며, 따라서 당미(糖米)를 정한 액수 외에 더 거두어들인 것[加捧]이 모두 3,000여 섬이나 되고 또한 아직 봉상하지 못한 수가 또한 870여 섬이 될 정도로 많습니다. 환정이 문란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팽배함이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으나 그치게 할 수 없었습니다.
토산 현감(兎山縣監) 이영현(李英顯)은 새로 부임한 후에 서리들의 일에 힘써 아문(衙門)을 열고 소송장을 처리함[開衙題訴]에 조금의 지체됨이 없었습니다. 시장 돈의 무거운 이자[場錢重邊]를 통렬하게 금단하게 하고 창고지기[倉色]의 횡령을 엄중하게 사정(査正)하였습니다. 새로운 칭찬이 자자하여 한 등급 위의 읍 수령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監司) 이희갑(李羲甲)은 널리 익히고 배우는 사람으로 담담하게 검약하는 지조가 있어 행동하는 것이 모두 법도에 합당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공정하면서도 분명하여 위엄과 은혜로움이 길에 두루 퍼져 있었습니다. 관찰사는 존귀한 몸이니 그의 행적 중 큰 것 몇 가지만 거론하였습니다.
병사(兵使) 박기풍(朴基豊)은 정치를 하는 것이 번거롭거나 어수선하지 않으며, 게으르지 않게 하였습니다. 부지런히 위로하고 어루만져 장군과 병사들이 은혜롭게 여기고 형벌을 잘 사용하지 않아 서리나 백성들이 또한 편안하게 되었습니다.
중군(中軍) 성하진(成夏鎭)은 부임하여 귀를 기울여 보니 칭찬이나 비방하는 풍문이 없습니다. 전 중군 이진항(李鎭恒)은 본래 비루하고 자잘한 성격으로 공무를 받드는 도리에 유념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를 살찌우는 방법만을 일삼았습니다. 관리하는 일이 기찰(譏察)하고 달아난 자를 잡는 일[規捕]에 불과한데, 심복하는 교졸(校卒)들로서 별도로 채무를 걷는 사람을 삼아 채무를 받아도 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 관계 없이 대략 반으로 나누어 취하고서 엄중한 형벌로 위협하여 징봉(徵捧 : 나라에서 백성에게 세금 따위를 물리어 받아들임)하였습니다. 또한 성(城)의 안과 밖, 먼 동네 가까운 동네뿐만 아니라 4~5명이 모이는 곳을 ‘잡기(雜技)’라고 일러, 시도 때도 없이 패를(牌) 내밀고 흉악하고 간교한 교졸(校卒)들을 시켜 속박하고 구타하게 하여 속전(贖錢)을 강제로 빼앗게 하였습니다. 그 수가 330여 냥이나 되는데 모두 개인 주머니로 착복하였고 인부(印簿)에 자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이외에도 탐욕스럽고 추악한 폐단이 하나 둘이 아니어서 추잡한 소문이 길거리에 낭자하게 서로 전하는 것이 이와 같으나 불법적인 행위를 그치게 할 수가 없습니다.
병우후(兵虞候) 심홍조(沈弘祖)는 달아난 이를 잡아들이는 정치나 기찰(譏察)하는 방법이 번거롭거나 느슨하지 않아 칭찬만 있고 비방이 없었습니다.
수우후(水虞侯) 제경욱(諸景彧)은 소, 술, 소나무의 세 가지 금기 사항을 각별히 금지시켜 반드시 자신의 직분을 다하고자 하였으니 그의 의지를 높이 살 만합니다.
이상은 본도의 감사(監司), 병사(兵使), 수사(水使), 중군(中軍), 우후(虞候)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연안 전 부사(延安前府使) 김복순(金復淳)은 지조가 청렴하고 신중하였으며 다스림이 자애롭고 어질어 3년 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법도를 이루어, 서리들을 다스림에 번거롭게 형벌이나 위엄을 가하지 않았으며 백성을 사랑하여 실제적인 혜택을 누리도록 강구하였습니다.
재령 군수(載寧郡守) 박삼원(朴參源)은 관직에 부임한 후 서리들의 일에 힘써 속된 아전들에게도 단속함에 가혹한 태도는 없었으며, 옛 사람의 순후하고 신중한 유풍이 있었습니다. 다만 재판하여 심리할 때에 엄하고 강한 면이 조금 부족하였습니다.
신천 군수(信川郡守) 이희(李?)는 형벌과 정사(政事)가 법도에 맞고 일을 처리하는 것이 적당하여 경계 안의 모든 지역이 간절하게 바라고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문화 현령(文化縣令) 심능술(沈能述)은 신중하고 졸박한 법도로 조용하게 다스려 정치를 하는 3년 동안 정치를 함에 한 번도 나태하지 않았습니다만, 만약 완벽한 면을 따져보자면 자애로움과 어짐이 조금 지나치긴 합니다.
수안 군수(遂安郡守) 민장혁(閔章爀)은 관직에 부임한 초기에 소송을 판결함에 불분명하여 이미 백성들의 신망을 잃었으며 또한 천재나 인재로 인한 재앙을 조사하여 부정한 짓을 저지른 것을 적발할 때에 비록 하나하나 친히 집행하더라도 속임을 당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았습니다. 하물며 명령을 내린 후에 곧장 상경(上京)하고는 모두 감색(監色)들이 하는 대로 맡겨 마음대로 폐단을 일삼도록 하였습니다. 허다한 명목으로 핑계를 대는 것 외에도 세금을 징수함에 일정한 법칙 없어, 마을마다 혹 세 냥, 혹 두 냥 다섯 전, 혹 한 냥 다섯 전씩 하나도 남김없이 색출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거리에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우두머리 아전(首吏)을 잡아와 조사를 해보니, 해당 아전들이 과연 민간에서 개인적으로 착복한 것이었습니다. 그 수가 300여 냥이 되어 본 고을의 수령이 관직을 떠난 뒤에도 또한 과도하게 세금을 징수한다는 폐단을 들었습니다. 그 삼분의 일을 추산하여 105냥을 백성들에게 돌려주었으니, 본 군(郡)의 아전들의 간교하고 교활함은 해서(海西) 지방에서 가장 심합니다. 이런 것이 폐단의 단초가 됨을 생각하지 못하고 관아를 비울 때 감색들의 손에 맡겼으니, 흐리멍덩하여 제대로 살피지 못한 죄는 형벌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기린 찰방(麒麟察訪) 박규수(朴奎壽)는 마정(馬政)에 큰 잘못이 없고 임기가 거의 끝나가기 때문에 크게 비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금교 찰방(金郊察訪) 김형린(金亨麟)은 마정(馬政)에 임하여 부지런하고 유능했지만 상세하거나 분명함이 조금 부족하여 자잘한 비방이 없지는 않습니다. 청단 찰방(靑丹察訪) 이달순(李達純)은 망아지 기르는 것을 열심히 하여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백령 첨사(白翎僉使) 이유수(李惟秀)는 다스림이 근면하고 백성을 위무(慰撫)하는데 뜻을 두어, 요역(?役)을 감면하자 진졸(鎭卒)들이 편안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오차포 첨사(吾叉浦僉使) 황재중(黃在中)은 산에 대한 금기사항[山禁]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바다의 방비[海望, 海防]도 부지런히 다스리고 있습니다.
문성 첨사(文城僉使) 이봉의(李鳳儀)는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비방이나 칭찬이 없습니다.
용매 첨사(龍媒僉使) 김학렴(金學濂)은 직분을 수행하는 것이 근면하지만 별도의 공적이나 흠은 없습니다.
선적 첨사(善積僉使) 한흥국(韓興國)은 부임하여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칭찬이나 비방이 없습니다.
역산 첨사(○山僉使) 김상열(金尙說)은 사람이 순후하고 신중하지만 일처리는 간혹 나약합니다.
동리 첨사(東里僉使) 주덕광(朱德光)은 2년 동안 진(鎭)에 있었으나 일을 시킴에 혁신한 점은 조금 부족합니다.
등산 첨사(登山僉使) 윤홍정(尹弘鼎)은 근간(勤幹)을 귀하게 여긴 바, 어리석음이 지나치지만 마땅히 용서할 만합니다[宜恕癡濫].
조니 만호(助泥萬戶) 조언기(趙彦基)는 잔진(殘鎭)에 새로 부임하여 소나무 벌목을 금지하는 것에 뜻을 두고 있습니다.
위라 만호(位羅萬戶) 유상일(柳相一)은 두루 일처리를 잘 하여 진졸(鎭卒)들이 자못 칭찬하고 있습니다.
문산 만호(文山萬戶) 김양곤(金養坤)은 직분을 이행함이 부지런하나 별도의 칭찬이나 비방은 없습니다.
소기 만호(所己萬戶) 김인환(金仁煥)은 부임한 지 오래 되지 않아 칭찬이나 비방이 없습니다.
장수산성 별장(長壽山城別將) 오의철(吳義喆)은 삼가고 신중함은 높이 살 만하며 부지런함은 칭찬할 만합니다.
수양산성 별장(首陽山城別將) 이의담(李儀聃)은 성을 순시하고 창고를 관리함이 처음부터 끝까지 나태하지 않습니다.
대현산성 별장(大峴山城別將) 박도행(朴道行)은 진(鎭)에 부임한 초기에 먼저 묵은 횡령을 조사하였습니다.
구월산성 별장(九月山城別將) 김효재(金孝載)는 두루 편안하기에 힘을 쏟아 진졸(鎭卒)들의 원망이 없습니다.
정방산성 별장(正方山城別將) 이인창(李寅昌)은 연름(捐? : 公益을 위하여 자신의 俸祿의 일부분을 덜어 보태는 일)과 방역(防役 : 시골의 백성들이 賦役 대신 돈이나 곡식을 미리 바치고 立役을 면제받는 일)하여 자못 칭송함이 있습니다.
이상은 본도(本道) 해안 길 주변의 수령과 찰방, 변장(邊將)들에 대한 보고였습니다.
개성부 경력(開城府經歷) 홍병신(洪秉臣)은 부임한 이후 술에 절어 있는 날이 많고 깨어 있는 날이 적어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 죄의 경중에 관계 없이 한결같이 무거운 장형(杖刑)으로 다루어 정치가 어그러지고 원성이 거리에 자자합니다.
장단 부사(長湍府使) 유상엽(柳相燁)은 본래 스스로 단련하여 상세하고 분명함을 이루어 백성들을 다스림에 크게 드러난 공적은 없지만 또한 흠이나 비방하는 논란거리도 없습니다.
파주 목사(坡州牧使) 이인식(李寅植)은 자질이 어리석고 미숙하며 정령(政令)이 생소하니, 환곡을 돈으로 대신 받는 일[錢還]은 조정에서 엄중하게 금하는 것이로되 이번 여름에 환곡 조세[還租] 한 섬의 가격을 9전으로 정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시중의 가격이 아니었으며, 또한 민가에 너무 야박하게 굴어 원성이 없지 않습니다.
고양 군수(高陽郡守) 서교수(徐敎修)는 정치에 노련하고 다스림이 강직하고 분명하여 아전들이 스스로 자제할 줄 알아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