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은 파도의 기억에 잠겨 / 김혜순
나는 조용히 편지를 씁니다
검은 스웨터를 뚫고 수박 냄새가 만개한다고 씁니다
사실 이 나이의 여자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선 죄를 짓는 일과 같습니다
수박에게나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세상의 저속을 생각해 봅니다
눈을 감으면 눈 속의 눈을 감으면 눈 속의 눈 속의 눈을 감으면
하늘보다 더 어두운 바다가 거기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 깊은 바다를 두 주먹으로 텅 텅 두드리며 불러 봅니다
밤바다여 태풍을 보신 밤바다여
그렇게 이름을 부르자 그 파도가 나에게 와서 하나의 수박이 되었습니다
밤에는 수박이 더욱 커집니다
숨어서 혼자 익는 수박의 당도는 매우 높습니다
나는 수박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습니다만
수박에게 나의 파도여 그렇게 이름을 붙이지는 않습니다
다만 입을 꾹 다물고 러닝머신 위를 달릴 때는
마치 파도 위를 뛰는 여자처럼
수박이 헬스클럽까지 따라오게 해서는 안 되었다고 되뇌고 되뇝니다
나는 수박을 품고
수박 향기 자욱한 저녁에
깊은 파도 소리를 듣습니다
그 검은 큰 밤바다가 실내를 가득 채우는 걸 바라보며
가슴에 박힌 수박을 조용히 끌어안습니다
그리고 나는 편지를 보내지 않기로 합니다
찢어진 편지의 찢어진 영혼에게 조용히 두 손을 합장해 봅니다
―월간 《현대시》 2013년 3월호
[약력]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 박사.
1979 『문학과 지성』으로 등단.
2001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시전문 계간지 포에지 편집위원.
[상훈]
1978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평론 「시와 회화의 미학적 교류」.
1994 제9회 소설문학상 우수상.
1997 제16회 김수영 문학상 「불쌍한 사랑기계」.
2000 제1회 현대시 작품상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제15회 소월 시문학상 「잘 익은 사과」.
[수상]
2008 제16회 대산문학상
2006 미당문학상
2000 현대시작품상
▪ 시 읽기
추상적인 내용을 구체적인 대상을 이용하여 표현하는 비유법이 알레고리이다.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음으로써 다중적인 의미가 발생하게 되고 시대에 따라 개개인에 따라 재해석이 가능하여 의미가 풍부해진다. 맨몸으로가 아닌 옷을 입어 알몸을 가리고 체온을 유지하며 삶을 영위하는 것처럼 날선 현실을 의식한 요식행위라고 하겠다. 알레고리즘은 발화자를 보호하고 청자나 독자들을 교훈의 대상으로 몰아가지 않으면서 공감하도록 이끌고 설득하는데 긴요하다. 충격완화요법인 것이다.
수박에 대한 소설가 김훈의 묘사는 새삼스럽고도 충격적이다. “수박은 천지개벽을 하듯이 갈라진다. 수박이 두 쪽으로 벌어지는 순간, ‘앗!’ 소리를 지를 여유도 없이 초록은 빨강으로 바뀐다.” 수박은 빨간 사과의 흰 속살과는 사뭇 다르다. 손으로 쪼개기가 쉽지 않은 사과에서 청순한 이미지를 찾아볼 수 있다면, 무르고 과즙이 흐르는 달디 단 수박의 도발적인 색채에서 관능적인 시간을 통과하는 여인이 연상된다. 달덩이만한 초록덩이를 주의하여 다루지 않는다면 저절로 갈라져버린다. 쩍 소리와 함께 드러나는 붉은 속살의 의외성이 그렇거니와 까만 씨가 촘촘히 박힌 밤하늘의 별의 변주, 수박을 베어 무는 찰나에 붉은 과즙을 흘리지 않고 먹기란 쉽지 않은 것이 마치 리비도처럼 흥건하다.
김혜순 시인의 시,「수박은 파도의 기억에 잠겨」가 위에서 기술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보았다. 기존의 개념이나 단어가 때에 절어 시어로 적절하지 못할 때 시인은 의미들을 충돌 시켜 신선한 시어로 리뉴얼한다. 시 속의 화자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데 “검은 스웨터를 뚫고 수박냄새가 만개한다고 쓴”다. 이어서 “사실 이 나이의 여자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수박에게나 말해야 하는 것/ 이라고 함으로써 ‘수박’과 ‘이 나이의 여자’의 상관성을 시사한다. 수박은 문자적으로 은유적으로 꼴을 달리한다. 이 시에서 수박은 단일한 의미에 봉사하지 않는다.
하루라도 면도를 하지 않으면 덥수룩해지는 남자의 턱수염과도 유사하게 에스트로겐은 그리움으로 증수되는 것일까. 편지를 쓰고, 쓴 편지를 붙이지 않더라도 태풍을 본 밤바다의 이름을 부르는 날이면 “그 파도가 나에게 와서 하나의 수박이 되”는데 “밤에는 수박이 더욱 커집니다/ 숨어서 혼자 익는 수박의 당도는 매우 높습니다” 라고 시인은 고백한다. 그러나 시인은 수박이 헬스클럽까지 따라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다짐은 의지의 산물이다. 삼십팔만 사천 여 킬로 떨어진 달의 인력에 이끌려 썰물과 밀물로 연주하는 것을 바다는 좋아하거나 싫어할 무엇이 아닌 무위이며 그냥 그런 것이다. 수박의 향기가 자욱한 저녁은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 있는 취향의 목록이 아닌 생명운용의 비밀스러움이다. “그 검은 큰 밤바다가 실내를 가득 채우고” “수박이 파도의 기억에 잠”기는 시간은 달의 인력에 밀물이 들어오는 시간이며, 당신을 생각하며 그녀가 감성의 활로 몸과 마음을 조율하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