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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흑인 이윤택
강철흑인
마침내 너는 이 낡은 세계에 진력이 났구나
기구를 타고 하늘을 날으던 생각
지칠 줄 모르던 강철흑인
너는 어떤 형태의 집을 짓고 살림을 차렸느냐
6월에 아내를 얻고 그해 가을 옥동자라도 보았는가
이사를 갔다면 연락이라도 해주렴
내 편지가 공중에 떠 주소불명으로 헤맨다
혹시 수취거절은 아닌지
의심하는 시간 속에 나의 정맥은 망가진다
원고지 빈 칸들의 투덜거림
툭 투욱 부러지는 연필심 다시 깎으면
기구를 타고 날으던 생각 지칠 줄 모르던 너의 꿈
그리운 성욕으로 일어선다
어디 있는가
문이란 문 죄다 닫힌 거리 어슬렁거리며
두드린다 세 번 네 번 한 번 여섯 번
낮게 길게 빠르게 다급하게 다시 낮게
어디서 너의 신음 한 웅큼 잡힌다
무제한 난타로 띄워 보내는 이 구조신호를 들어라
자․신․의․집․으․로․부․터․떠․날․것
너가 다시 이 도시에 출현하여
젖이 퉁퉁 불은 여자들 꿀통 일시에 쥐어 터뜨려
맨발로 뛰쳐 나온 사내들 지금 이 땅 배불리 핥으며
자유로이 거처를 마련케 하라
막연한 기대와 몽상에 대한 반역, 세계사, 1989
개꿈 이윤택
개꿈
우리는 길들여져 있다고 믿는 자들을 위해
신경 몇 대 분질러 넣고 다닐 수 있지
술김에 방만한 말씀 슬쩍 흘리며 반칙을 범할 수도 있다네
그러나 자네 밤마다 속옷 차림으로 모터 사이클 타고 집 떠나는 사내를 본 일은 없나?
개꿈 같은 걸 주의깊게 관찰해 보게
퇴근길 잰 걸음으로 지나치는 처녀에게 최면술을 걸면서
생각할 수 있지 나는 짐승이다 으르릉
나는 화가가 될 수도 있어
연기 같은 몸짓으로 담배 피우며 오늘은 카사블랑카로 가볼까
구획정리된 대낮 내가 자주 만나는 세계는 이유 없음
폐기처분당한 생각들이 꽤 쓸만한 식량이 된다는 사실
교통순경이 어깨를 칠 혐의도 없잖아
오늘 저녁 지하철을 타고 내 중고 아파트로 향하면서
한 편의 멋진 필름을 완성하겠어
마침내 사람들이 스트리킹을 벌이는,
춤꾼이야기, 민음사, 1986
깽판 이윤택
깽판
사람들이 조금씩 뻔뻔스러워지면서
게임의 규칙은 무너졌다
뻘밭이 펼쳐지고
개처럼 싸운다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일은 깽판을 치는 일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식량이라면
죽을 쑤는 일이다
춤꾼이야기, 민음사, 1986
나는 차라리 황야이고 싶다 이윤택
나는 차라리 황야이고 싶다
너는 왜
지상의 풍경 속에 집을 짓고
봄날을 만끽할 수 없니
네 집을 지키며
현실을 접수할 수 없니
왜? 나는……
차라리 황야이고 싶은가
밥의 사랑, 고려원, 1994
막연한 기대와 몽상에 대한 반역 1 이윤택
막연한 기대와 몽상에 대한 반역 1
그렇다, 현실 그 자체가 체포되었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체포된 상태 그대로 내일 아침 출근할 것이다
체포된 현실 속에서 제 밥그릇들을 챙겨야 한다
(이대로 물러서서는 안 된다)
막연한 기대와 몽상에 대한 반역, 세계사, 1989
막연한 기대와 몽상에 대한 반역 2 이윤택
막연한 기대와 몽상에 대한 반역 2
부제: 중생들 사이 떼밀려 자빠지지 않으려고 찰싹 달라붙은 시인
저것 보십시오, 지하철 4호선이 달리고 있지요, 저기 중생들 사이 떼밀려 자빠지지 않으려고 출입구 쇠봉에 찰싹 달라붙은 사내가 하재봉입니다. 저 인간은 아직 아침도 제대로 챙겨 넣지 못했습니다. 보십시오, 입가에 젖물 같은 게 허옇게 말라붙어 있지요. 아파트에서 급히 뛰쳐 나오면서 찬 우유를 밥통에 냅다 들이붓다 보니 콧구멍이고 바지 가랑이고 할 것 없이 그냥 철철 흘리면서 7:30에 매달린 것입니다.
막연한 기대와 몽상에 대한 반역, 세계사, 1989
막연한 기대와 몽상에 대한 반역 3 이윤택
막연한 기대와 몽상에 대한 반역 3
왼쪽 어금니를 중심으로 도합 여섯 개의 치아가 썩고 있다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나와의 키스를 거부했다
앓고 있는 이빨이 사랑까지 침해시킬 정도라면
심각한 상태다 인간의 위대한 성욕까지 감퇴시킬 지경이라면
치과에 가야 한다 하면서
치과에 당도하지 못하는 것은?
앓는 이빨은 어느새 내 면상을 상심하는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그녀가 나와의 키스를 거부한 것은 시국 탓이다
가두투쟁 중 이마가 깨진 남학생과 나 사이에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리라
세상은 일방적이고 단호하다
이제 치과에 가야 한다?
앓던 이빨을 뽑으면 새로운 세계가 환각처럼 다가온다고 노래한 시인이 있었다
그는 텔레비전 쇼 프로 담당 PD가 되었다
새로운 세계가 환각처럼 다가설까봐
나는 아직 이빨을 뽑지 못한다?
막연한 기대와 몽상에 대한 반역, 세계사, 1989
맑은 음에 대한 기억 이윤택
맑은 음(音)에 대한 기억
내가 휘파람을 배운 건 일곱 살 때다
여름이었다
맑은 음이었다
나는 휘파람으로 이 세상을 유혹하고 싶었다
역시 일곱 살인 내 사랑…… 천변 건너 그 여식애의 집…… 그 주변다리 밑 동천강
동천강의 피라미 떼
내 맑은 음(音)이 닿는 세상은 둥글고 따뜻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논리를 익히고
내 사랑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난 휘파람을 잃었고
우린 심심찮게 말다툼을 했고
그 때부터 난
염증을 앓기 시작했다
밥의 사랑, 고려원, 1994
밥의 사랑 이윤택
밥의 사랑
아침 잠이 유난히 많은 희(姬)는
내 사랑을 받지 못했다.
언제 훌쩍 새벽길이 될지 모를 남자에게
아침 밥을 먹이려고
잠이 덜 깬 얼굴로 몇 번 이부자리에 앉았다가 꼬꾸라졌다가
아침 밥 아침 밥 하면서
도수 높은 돋보기 안경 주섬주섬 걸쳐 끼고 부엌으로 나가는가 싶더니
아이고 아파라 싱크대에 이마를 들이받으면서
쏴아― 내 머리맡에 냅다 쏟는 물소리
희(姬)는 지금 변기통에 궁둥이를 까고 앉은 채
돌아온 남자의 아침 밥상을 꿈꾼다
십년이 넘는 새벽 출정
휘파람처럼 지나쳤던 여인들
내가 경험했던 싸움과 도박판에서 예언은 발견되었는가
희망은 준비되었는가
한 줄의 느낌도 구하지 못하고
뻘밭의 개 행색으로 찾아든 집구석
희(姬)가 쌀을 씻고 있다
눈 화장을 지우고 콘택트 렌즈도 뽑아내 버린 부스스한 얼굴로
끓는 밥솥을 확인한다
잠에 취해 비칠비칠 방문 안으로 걸어들어와
잠든 체 하는 남자 머리통 꼭 끌어안고
다시 엎어져 잠드는 여자
밥의 사랑, 고려원, 1994
봄소풍 1 이윤택
봄소풍 1
아이들이
봄소풍을 간다
잘난 권세도 학문도 닿지 않는 곳으로
민들레 풀씨처럼
움직이는 세계의 느낌처럼
철 지난 역사를 뒤켠으로 밀어 내면서
밥의 사랑, 고려원, 1994
살아 있다, 난 이윤택
살아 있다, 난
살아 있다, 난 아침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살아 있다, 난 공복의 담배를 깊숙이 들이마시면서
살아 있다, 난 진한 커피를 마시면서
오늘이란 시간이 할애해 줄 좋은 일을 생각한다
그래, 살아 있다,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
산책을 나간다, 긴 장마 사이 얼핏 비치는 한 평 반 푸름을 위안 삼고
아파트 옆 개천 위로 둥둥 떠 밀려가는 저 찌꺼기들까지 아름답게 느끼려 한다
창(窓)을 열고 젖은 이불을 널어 말리는 사람들
모두 용케 살아 있다. 유리창을 닦고 전구를 갈아 끼우면서
이런 식으로 살아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이 매일 조금씩 불투명해지는 창(窓)일지라도
매일 화분에 물을 주는 사람들
살아 있다는 것이 즐거운 건지 쓸쓸한 건지
한때의 반짝임인지
어느 순간 맥없이 부서지는 오르간인지
잘 모른다. 알고 보면 가혹한 시간, 그러나
이 가혹함을 견디면서
살아있다, 난
밥의 사랑, 고려원, 1994
상황극 이윤택
상황극
이건 분명 만성우울증이다
단원들은 날더러 편집광이라고.
그러나, 심심찮게 극장 불을 끄는 작자는 도대체 누구냐?!
막연한 기대와 몽상에 대한 반역, 세계사, 1989
수자의 편지 이윤택
수자의 편지
시집을 왔다 맹숭맹숭하다
내 위에 포복한 남편 괜스리 심각한 표정 참을 수 없어 쿡,
웃다가 뺨따귀를 맞았다.
거의 혼자 방에서 지낸다
책/헤드폰/거울, 그리고 시간은 무제한 방출
그냥 이대로 지워 간다는, 어쩌면
지당한 생각. 네 볼품없는 옆모습이라도 떠올려야겠다
솜씨없는 연애법이랑 그 잘난 시 나부랑이까지
나에겐 세일러복 시절의 사진첩 같은 것인가
감상에 빠져 있군/이라든지
누구나 가끔은 그럴 때가 있어/따위 몰상식한 답변은 사양하겠다
국제시장 골목서 칼국수 사 먹으면서
너가 부자랬음 좋겠다/고 한 말을 기억하니? 그때
선생님의 눈길을 끌기 위해 과도한 모험을 서슴지 않고 연출하는 아동처럼
너에게 헌납했던 골목에서의 키스
연극이었다. 부산 앞바다 너절하게 떠다니는 걸레조각처럼
나는 가진 게 없어서 늘 죄송했다
도시 집단 이주촌 제 1종 생활보호 대상자
밀떡 먹고 검은 똥 누면서 필사적으로 2년제 교육대학 천상의 밧줄처럼 매달려야 했던 여자에게
이 시대는 처음 눈뜬 사랑을 허락할 능력이 있니?
너는 땡전 한푼 없이 날 불러내었고
커피 한잔 마시며 숙녀 흉내라도 내기 위하여
나는 전날 밤 3백개의 플라스틱 꽃술을 더 달아야 했다.
밤새워 2십원짜리 조화를 만들면서
세 번 네 번 눈을 감았다 떠도
아니다, 이건, 맹목이다
나는 문이란 문 죄다 열어 제쳐놓고 일기장 속 고이 찔러넣은 감정들 날려 버리기로 했지
지하다방 희미한 등불 아래 기억을 씻고
광복동 밤길 갈 곳 없이 떠도는 너의 발자국 지우고
한 해 다 지나도 소식 없는 2급정교사 자격증 따위 믿지 않기로 하고
당신, 나의 권리자가 되어 주겠어요?
교육대 졸(卒)/보조개 소유 332333인치 신부 값은 얼마쯤 할까
철지난 사내들에게 추파를 던졌지
지금 잠옷까지 그럴 듯하게 걸친 채 얼음 채운 잔 `현실적으로' 들고 있다
경탄할 만한 세상 아니니?
아침마다 한강을 넘는 단조로운 어깨들 꿀꿀거림 속에서
힘차게 승용차 기어를 밟는 남편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으니
잘들 해 보라지
내가 보여주는 한 편의 멜로드라마 또한
한강의 기적처럼 새로운 미덕(美德)으로 떠오를 것이니
너 같은 철지난 사림(士林)들은 상처를 내보이며 엄살떨다가
자식새끼 하나 없이 일찍 죽어라
내 그때, 너에 대한 기억들로 밤치장 하고 불 밝힌 강변로
제법 우아한 모습으로 울리라.
춤꾼이야기, 민음사, 1986
시간 이윤택
시간(時間)&
전염병이 번진 집 출입문은 검은 페인트칠로 격리되었다
얼굴에 반점이 불거진 아이들은 허수아비 탈을 쓰고 놀아야 했다 곧 죽어갔지만 아이들은 최후까지 놀았다.
시민, 청하, 1983
시민 이윤택
시민(市民)
거울을 보면서 머리칼을 한 움큼 건져 낸다 쇠 냄새가 난다. 아랫도리에 곰팡이가 하얗게 슬어 있다 지하철을 탄다 신경 툭 잘라 호주머니에 넣고 색안경을 낀다 길들지 않으면 외롭다.
육교를 오르면서 마라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어젯 밤 통금에 쫓긴 발자국을 미행한 것일까 금가는 아파트 벽 사이 새어들어와 잠든 이마 한가운데 면도날 쓰윽, 끼워 넣던 웃음소리 웃음소리 끝에 묻어 온 그녀의 저주가 출근길을 망칠지 모른다. 천만에, 마라의 웃음소리는 환청이다 22,000V 고압전류로 차단된 하늘 속을 그녀의 영매(靈媒)는 날 수 없다 도시의 절반을 뒤덮고 있는 소문과 함께 마라는 살 섞고 살 수 없는 것이다 밀림을 떠나 도시 가장 어두운 곳을 향하는 기차표를 끊을 때 투명한 눈물 끝에 터뜨린 웃음소리 웃음소리 끝에 묻어온 그녀의 저주 밤마다 생생이 살아나 병(病)이 되고 나는 매일 색깔 고운 알약 한 움큼씩 삼킨다. 항상 미열과 편두통을 동반한 출근길 곳곳 그녀의 조소는 잠복해 있다. 지금쯤 마라는 울울한 삼림에 누워 내 늑골 속에 찔러 넣은 저주의 전파와 교신하고 있는 것인가
외투 깃에 입술 묻고 지나는 저들에게서 문득 살의(殺意)를 느끼는 것은 눈빛 탓이다 나의 눈빛은 17층 국제회관 유리창 쯤 가벼이 박살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시멘트 속에 감춰진 도시의 뼈, 그 쇠막대기가 얼마만큼 녹슬고 있으며 시민(市民)들의 눈물의 농토가 이미 70ppm까지 묽어져 있다는 것을 안다 나의 눈빛은 매일 밤 복개천을 꺾어 도는 집 앞 골목 도사린 거대한 그림자를 보았고 나는 매일 녀석의 허리춤을 안고 넘어진다.
(누군가를 불러야 한다)
끝없이 푸른 담배연기 속으로 잠입하는 얼굴 한쪽 소리 없이 갈라진다. 절개된 틈 사이 열리는 밤. 그는 검(劍)을 닦고 있다. 칼끝 세워 알전등 불빛에 비춰 보면서 금속 강도를 확인한 후 끝없이 푸른 담배연기 속으로 잠입했던 얼굴 한쪽 소리 없이 닫는다 가자 날 세운 검(劍) 눈빛 속에 묻고 우리들 남근(男根) 무력하게 만드는 도시의 질 깊숙이 암행하면서 한탕 질펀하게 벌이는 피의 숙청 집과 집 사이 목숨과 목숨 사이 도사린 복면 짓쳐 나가며 싱싱한 비명 거두어 들일 것
시민, 청하, 1983
우리들의 학사 위에... 이윤택
우리들의 학사(學舍) 위에...
원제 : 우리들의 학사(學舍) 위에 세울 새로운 도시
우리는 여기를 떠나지 않기로 했다
형들이 뛰쳐 나간 학사(學舍) 한 모서리 추위에 떨며 화학방정식을 풀었고
형들이 남기고 간 공책―미증유의 분노로 휘갈겨 쓴 고백체 필서
남은 부분에 소프트웨어 회로를 그려 넣기도 하고
시험에 잘 나오는 정언(定言) 삼단논법이랑 잉여기생계층이 경제에 미치는 분배불평등지수를 수치로 계산해 보기도 했다
우리는 형들이 찾아나선 율도국이 어느 위도상에 있는지 모른다
간혹 다리를 절며 학사(學舍) 근처 술집에 나타나 무용담을 털어 놓거나
아직 소식이 없는 형들의 행방에 대해 관심없다
우리에게 지금 절실한 것은 탄환
저 오십 센티미터 두께 콘크리트 벽 뚫고들어가
구체적으로 몸 부딪칠 수 있는 과녁
밤 깊은 도서관 생라면 씹는 우리들 궁상맞은 표정
단단하게 여문 정신이 될 때
우리는 프랑스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은 연애사건도 없이
팔뚝 걷고 시가지를 질주했던 형들의 사자후도 없이
단조로운 악수 짤막한 눈웃음으로 학사(學舍)를 떠날 것이다
일 년 내내 걷히지 않는 안개, 그리고 도시
곳곳 부비추랩이 눈 뜨고 있는 정글 속으로
숙달된 조교의 시범을 보이며 잠입해 들어갈 것이다
한 치의 오차도 허락치 않는 정보 분석 초읽기
3개 국어 정도는 훑어내릴 수 있는 독도법
최신 정밀장비를 갖춘 우리는 이 땅의 안개와 살 섞으며
위장된 평화까지 접수하면서
밑에서부터 기둥뿌리 하나씩 갉아먹을 것
아버지의 식민지 체질은 철거시킬 것
형들의 율도국 사상도 폐기처분
우리의 율도국은 마라도 그 남쪽 이하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이 여기를 지날 때
우리는 헤엄치는 한 마리 짐승이었으므로
빚이 없다 우리는 상처가 없다
상처가 없음에 대해 유감을 표시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스켈링할 필요가 없는 순백의 치아
우리의 턱은 하루 10시간 정도 풀 가동될 수 있다
우리는 유언비어로 혹은 선언문 정도로 참여하지는 않는다
정언(定言) 삼단논법과 소프트웨어 기술로 여기를 교통정리할 것
우리에겐 지금 흰 와이셔츠 단색 넥타이 그리고
한 벌 제일모직 기성복이면 족하다, 아
잘 닳지 않는 금강제화 구두 한 켤레도 마련해야지
이외 모든 것은 우리들 두개골에 고스란히 이전된 학사(學舍) 속에 있다
가슴에 정밀하게 그려 넣은 설계도 속에
책상 위 열려 있는 성서 속에
새로이 배수로 파고 자유도시 권리장전 만들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위장된 평화 속에서
우리들의 사랑을 건설하는 일
춤꾼이야기, 민음사, 1986
인사동 부루스 이윤택
인사동 부루스
인사동 부근 까페에서 잠이 들었다
개꿈을 꾼 것 같다
날번개 같은 것이 몸에 닿으면서 색전등 조명이 바뀌고
외간여자가 실내로 들어온 것 같다
누드였을 것이다
직설적인 세상은 쓰레기장 아니에요?
하면서 복숭아 술을 잔뜩 바가지 씌우고
자동차 열쇠를 건네 주었는데
오리무중(五里霧中)
나는 나트륨 등불 밑
무심히 바라보이던 우주의 순행표지를 따라
차를 몰기 시작한 것이다
내 피는 푸른 연기
결코 데워지지 않는 투명한 질서
일찍 자살을 꿈꾸는 이 무모한 폭주 또한
개같은 청춘을 팔아 즐기는 도락
계산된 피의 드라이브
핸들을 꺾어 낯선 밤길로 급커브를 그으면
비명을 지르며 이륙하는 영동대교
엄청난 파열음으로 내 귓전을 때리면서
오리무중(五里霧中)
우리가 당도해야 할 독립 가옥은 어디에?
막연한 기대와 몽상에 대한 반역, 세계사, 1989
제 3세계 시민을 위한 독서법 안내 이윤택
제 3세계 시민을 위한 독서법 안내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자를 일깨우기는 어렵다
글을 읽을 줄 알면서 책을 읽지 않는 자를 일깨우기는 더욱 어렵다
글을 읽을 줄 알면서 책만 읽는 무지몽매를 일깨우기는 정말 어렵다
당위형 어법을 허물고
우리의 체험과 단어를 결합시키는 기술
―{벽돌}을 예로 들면,
벽돌/1. ㅂㅕ ㄱ 으로 조립된 음표를 해체
2. 직육면체로 떠오르는 이미지를 공중분해
(벽돌만으로는 어떤 의미도 떠올릴 수 없다는 생각으로부터의 출발)
3. 벽돌은 자신이 놓일 장소를 갖는다
4. 벽돌은 자신을 놓을 손을 갖는다
5. 그러니까 벽돌은 장소와 손에 의해 움직이는 풍경이 된다
6. 그러니까 벽돌은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
7. 우리는 벽돌을 읽는다
8. 우리는 현실을 읽는다
9. 비로소 벽돌은 읽고 쓰는 기술의 대상이 된다
10. 비로소 벽돌은 우리의 손에 단단하게 쥐어지는 힘이 된다
춤꾼 이야기, 민음사, 1986
천체수업 이윤택
천체수업(天體修業)
지구본이 돌고 있다.
영사막(映寫幕)의 한 점 속에 빨려 들어가는 지구.
하나 둘 별이 보이기 시작한다.
보이지 않는다.
교사의 안경테 속에 담긴 영사막(映寫幕)
교사는 집게 손가락으로 우주(宇宙)를 가리킨다.
빈 교실
시민, 청하, 1983
춤꾼 이야기 이윤택
춤꾼 이야기
슬픈 노래가 너를 천국에 데려다 주지는 않는다
슬픈 노래 흐를 때 슬픈 노래 지긋이 밟고 빙글 멋지게 스테이지 한가운데로
이 세상과 우리 사이 발이 있다
하나님은 발이 없지
막달레나 마리아도 내 발을 닦아 주었다
미스터 J 춤을 추세요
당신의 발 너무 날렵해 날아다니는 것 같애
나는 날지 않았다
스탭을 밟으며 욕심 없이 발자국 지우며
슬픈 노래 가득 찬 세상 손을 내밀었지
한번 추실까요, 아가씨?
춤꾼이야기, 민음사, 1986
친구의 시신 옆에서 불 밝히고 이윤택
친구의 시신(屍身) 옆에서 불 밝히고
일단, 오징어는 맛나게
잘 섞은 오입담(誤入談) 날리며 날리며
화투짝 신나게
신(神)도 죽음도
땡 잡는 황홀함 알 턱 없다
시민, 청하,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