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다섯 손가락
김00
오후 3시가 조금 지났을까? 원장님이 급하게 찾았다. 어리둥절 영문도 모른 채 사무실로 달려가서 전화를 받았다. 말소리는 안 들리고 여자의 흐느끼며 우는 소리만 들렸다. 순간 불안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확 올라왔다. 어떡하면 좋으냐는 큰 언니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아차 무슨 일이 있구나! 직감적으로 느낌이 왔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느냐며 차분한 목소리로 안심시키듯이 물었다. 그제야 아기가 다쳐서 지금 영대병원 응급실에 와 있다고 했다.
순간 다리에 힘이 쫙 풀리고 앞이 캄캄해지면서 현기증이 났다. 정신을 가다듬고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지 최대한 낮고 태연한 소리로 물었다. 왼쪽 손을 많이 다쳤다고 했다. 어디에 어쩌다가 다쳤는지 묻고 싶었지만, 목소리로는 나오지 않았다. 괜찮을 거라며 진정하라고 말했지만, 아기가 너무 걱정되었다. 25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도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가슴이 꽉 막힌다.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어떻게 병원까지 갔는지 모른다. 두렵고 무서운 마음을 안고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아이 손은 커다란 수건으로 덮여 있었다. 아이는 울다 지쳤는지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퉁퉁 부은 얼굴로 엄마만 찾았다. 겨우 15개월 된 아기였다. 나를 쳐다보는 아기 얼굴은 눈물범벅 땀범벅이었다.
아이가 태어나던 해에 IMF가 터졌다. 남편이 운영하던 작은 무역회사는 부도가 났다. 검은색 양복 입은 사람들이 날마다 찾아와서 남편이 어디 있는지 말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너무 무서웠지만 애써 태연하게 나도 모르니 좀 찾아달라고 매몰차게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무슨 일이든지 해야 했다. 겨우 12개월 돌 지난 아기를 시댁에 맡기고 취직했다.
취직한 곳은 유치부와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종합학원이었다. 그 시절에는 종합학원이 대세였다. 오전에 유치부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초등부 저학년 한 타임, 고학년 한 타임을 맡았다. 중 노동이었다. 그러다 보니 목이 남아나지 않았다. 목소리는 매일 쉬어있고 감기는 달고 살았다. 보다 못한 시댁 어른들은 나가서 벌면 얼마 번다고 그 고생하느냐며 당장 그만두고 아이나 데리고 가서 잘 키우라고 했다. 서운한 마음도 있었지만, 어른들께는 감사한 마음이 더 크게 자리 잡았다. 주말에나 아이를 볼 수 있어 집 근처 놀이방에 보내기로 하고 데리고 왔다.
출근 전 이른 시간 놀이방에 보낸 아이는 거의 매일 아팠다. 아이가 아프니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아이와 나는 점점 지쳐서 살이 쏙 빠졌다. 언니가 보기에 안쓰러웠는지 아이를 봐 주겠다고 했다. 언니 집에서는 거짓말처럼 감기도 하지 않고 건강하고 밝게 지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한테 좋은 음식은 손수 만들어 주었다. 토마토주스를 특별히 좋아하니 매일 토마토를 녹즙기에 갈아서 먹였다. 그날도 토마토주스를 만들고 뒤돌아서서 칼과 도마를 싱크대에 올리는 순간 아이가 자기 손을 넣고 버튼을 누른 것이었다.
녹즙기를 매단 채로 119구급차에 실려 응급실로 실려 왔다. 차마 내 눈으로는 볼 수가 없었다. 아이를 안고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 외에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정형외과, 신경외과, 피부과, 성형외과 등 많은 선생님의 회의 끝에 내린 결론은 왼손을 절단하자는 것이었다. 절대로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일단 수술해보고 안되면 차선책을 택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인맥을 총동원해서 수소문했다. 때마침 우리나라 손 수술의 권위자라 할 만큼 유명한 교수님과 형부가 연결되어 손 절단은 면할 수 있었다. 일차적으로 수술해보고 안되면 다른 방법을 생각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네다섯 시간에 걸친 대수술이 시작되었다.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완전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손가락 다섯 개가 붙어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 후 6개월 넘게 병원 생활을 하면서 아이는 여러 번의 수술을 더 했다. 그리고 성인이 될 때까지 주기적으로 진료와 검사를 받았다. 다행히 성장점에는 이상이 없어서 울퉁불퉁 삐뚤삐뚤한 손가락은 오른손과 같은 크기로 자랐다.
비록 손가락 모양은 좀 다르지만, 이 세상 그 어느 손가락보다 더 귀하고 사랑스럽다. 수차례의 수술과 힘든 병원 치료를 잘 견뎌내 준 아들이 너무 고맙다. 아들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