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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명길 시조문학 인상기 강 희 근 1. 기리(麒里) 리명길(1928-1994)은 진주시 동성동에서 출생한 시조시인이다. 진주농고와 성균관대학 정치과, 건국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시인 김여정은 “기리 선생은 학교 다닐 때 스포츠에 두루백군이었고 공부도 잘하고 리더십도 뛰어난 진주의 걸출한 인물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1960년 시조집 ‘생명’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내일의 길가에서’, ‘푸른 역정의 황지’ 등과 ‘어린이 시조 첫걸음’(시조론), ‘문학과 정치’(박사논문집) 등의 저술을 남겼다. 국립 경상대학교에서 거의 평생을 몸담아 강의했고 전공은 정치학이었지만 대학 초창기와 발전 단계에서 체육, 문화사 등의 교양과목을 맡기도 했고 그 스스로 노력하여 경상대학교에 지역사회학과를 창설했으며 그 학과가 뒤에 행정학과가 되었다. 법경대학 학장을 역임했고, 진주문인협회 회장, 진주예총회장, 진주문화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지역사회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필자가 진주중고등학교를 다닐 시기 리명길은 진주배구 대표팀 선수, 진주야구 대표팀 선수, 진주축구 대표팀 선수 등 모든 종목에 우뚝 선 선수였다. 2. 리명길은 시조시인으로 중앙에 활동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꺼렸던 지역의 시조시인, 문단의 재야인사로 일관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만큼 언어와 시조세계가 저돌적이기도 했는데 이는 얌전하게 양반들 여기의 문학으로 지탱해온 시조 장르에 샅바를 차고 한 판 승부를 겨루려는 그런 자세였던 것으로 보인다. 가을이라 서릿발 내리는 소리는 信號에 맞추어 祈禱하는 人間 안에서 끝이다‘ 고 내가 느꼈다 그도 느낀 것이다 몇 年을 두고 참은 孤獨한 密閉가 뻥! 하고 깨어지는 성난 슬픔으로 되어 季節을 陰鬱하게 가르는 獨斷의 時間이다 오른 손에도 왼손에도 아무것도 쥐지 않았다 壁에 부딪친 마즈막 잎새처럼 過去는 죽었고 想像의 來日도 말랐다 툭 불거진 유리눈알(義眼) 넘어서 보이는 그림자가 없는 끝없는 길바닥에 體溫은 추위와 외로움과 무서움이 깔린다 왜 그런지 왜 그런지 외로워지는데 내 곁에서만 바람이 불고 있다 오늘도 孤獨하다고 느낀 것은 人間뿐이다 -<斷片 1> 전문 따옴시조는 절망과 고독의 정서를 노래하고 있다. 그것은 가을이라는 계절, 기도하는 인간, 독단의 시간, 그림자가 없는 끝없는 길바닥 등을 통해 질정하기 힘드는 상황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체온은 추위와 외로움과 무서움이라는 공포를 내포하는데, 도대체 시인은 무엇으로 그런 상황을 맞고 있는 것일까? 전통 시조의 그 정물화적 점잖음으로서는 그려내기 힘드는 세계에 봉착해 있는 시인이요 화자다. 그러니까 리명길은 시조로서 삶의 전방위를 드러낼 수 있다는 자각을 가지고 시조를 쓰고 있는 셈이다. 리명길은 두 가지 면에서 시조를 자유롭게 쓰고 있다. 하나는 형식면이다. 하나의 음보 안에서 ‘뜻 따라가는 말’의 질서를 보이는 것이다.그러니까 형식에 지나치게 매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끝이다‘ 고 내가 느꼈다 그도 느낀 것이다”에서 종장 첫구 3자를 지키면서 뜻을 따르는 “’고”의 돌출을 보라. 절묘하다. 한 음보가 3자 아니면 4자인데 “뻥! 하고/ 깨어지는/성난 슬픔으로/ 되어”에서는 5자까지 늘여내고 ‘뻥!’이라는 것도 돌출이다. 뭔가가 전통시조의 말법과는 상이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그 다음은 한자어를 정제없이 그대로 쓰고 있음이 어쩌면 희귀하다는 느낌을 준다. 信號, 祈禱, 孤獨, 密閉, 過去, 想像, 體溫, 人間 등등 언어를 빚는다는 의식으로부터는 떠나 있어 보인다. 기존 시조시인들은 한자어를 쓰더라도 간간 자별난 토속어를 섞어서 미학적 측면을 돋우기 마련인데 그런 점에서 리명길은 무표정하다. 리명길은 ‘어린이시조’(동시조)의 제창자다. 리명길 세대의 시조시인들끼리 더러 쟁론에 빠져드는 자리에 곁돌이로 몇 번을 앉아 있어 보았는데 그때마다 제창자의 선후를 놓고 다투는 것을 보긴 했는데 어쨌든 경남 지역의 동시조 운동에서만은 확고부동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사실이다. 백일장에서 초등학생 시조부를 개설하는 등의 공적은 필자가 알기로도 선구적 지도자임에 틀림이 없다. 다리 다리 종다리 하늘하늘 날고 보리 보리 보리싹 파릇파릇 솟는다 오월은 우리들의 달 씩씩하게 자라자 달래 달래 진달래 불긋불긋 피며는 푸릇 푸릇 나뭇잎 싱싱하게 짙는다 오월은 희망 드는 달 슬기롭게 자라자 -<오월은-어린이날에 붙임> 전문 동심이 잘 스며든 작품으로 읽힌다. 의태어와 되풀이의 어법으로 어린이들의 감성에 쉽게 다가가고자 함을 알 수 있는 동시조다. 다만 “씩씩하게 자라자”나 “슬기롭게 자라자”는 교가투의 교훈성이 드러나 어린이들에게 뭔지는 모르나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불어넣고 있어 보인다. 그렇지만 이 작품이 어린이동시조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할 때 이 작품이 주는 파급효과는 대단히 큰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니까 이 작품에서 접근성이 용이하게 눈에 빨리 들어오는 쉬운 기법을 쓴 것을 두고 하나의 계도형 창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리명길은 교수이기 때문에 시조를 직접 가르치는 국문학이나 문창과 교수는 아니더라도 시조를 이론적으로 바라보거나 이해하는 것에 익숙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시조가 전통시조와는 달라야 한다는 발상도 비판적 치원에서 시조를 접근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리명길은 비평적 사고로 시조를 정리하거나 이론을 세우게 된다. 그가 제창한 이론은 어린이시조에 그치지 않는다. 절장시조(絶章時調)의 제창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이은상이 시조의 3장에서 1장을 줄여 2장으로 쓸 수 있다고 보고 양장시조(兩章時調)를 제창했는데 리명길은 한 술 더 떠서 종장 한 장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고 보고 종장 한 장을 절장이라 한 것이다. 일테면 리명길의 시조 <보이는 것은>의 넷째수를 보면, 묘하게도 그릇에 제자리가 있었다 손때가 묻어올 적마다 모질게 살아온 흔적 사이로 아프게 나의 선반에는 情도 사랑도 얹혀 있지 않았다 여기서 종장인 “아프게 나의 선반에는 情도 사랑도 얹혀 있지 않았다“ 만 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종장 곧 절장을 시조 한 수로 친다는 것 아닌가. 리명길은 또 첩시조(疊時調)를 제창했다. 이 시조는 이른바 비빔밥 시조론이다. 평시조, 양장시조, 절장시조, 엇시조 등을 자유자재로 섞어서 쓰는 시조를 말한다. 이것이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왜 하필 시라고 하면 되지 시조로 우길 이유가 있는가. 이런 문제점이 생긴다. 그리고 주장도 필연적인 주장이라면 하나를 주장해야지 정반대로 가는 흐름인 절장시조와 첩시조를 동시에 주창하는가? 모순이 있다고 바락 바락 대드는 후배들을 진주 화랑집(실비집의 원조)에서 자주보곤 했다. 이 화랑집은 좁은 집이면서도 문청들의 아지트였다. 박용수, 최용호, 강동주, 조정남, 김영화,신찬식, 정목일, 김호길, 이영성 등 시인들이 주당들인데 이들이 주석에서는 언론의 자유를 리명길에게 일찍이 허락 받아내었던 당찬 시인들이었다. 박용수시인이 그 무렵 연일사진관 영업을 접고 서울로 솔가해 간 때였다. 박용수의 이향은 설창수 선생의 주선 아래 화랑집에서 시화전을 여는 것으로 공식화되었다. 이들은 제야문학의 밤 같은 것도 했는데 조금 후에 진주를 떠난 소설가 강남구, 김상남 등도 합류했는데 박용수 시화전 본부는 남산여인숙이었다. 그림은 진양고등학교 미술교사 정준상이 그렸고, 저녁마다 리명길은 여인숙을 방문해 격려하는 마음으로 술을 사고 또 자기 시조론을 불태우곤 했다. 리명길의 이론은 대체로 문학 행사 후렴잔치때 단련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진주 술꾼 시인들이 그만큼 실력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4. 리명길은 건국대 대학원 박사과정 정치학 전공을 수료하고 논문은 정치와 시조를 통합하는 학제학류 논문을 썼다. 논문을 단행본으로 낼 때는 <문학과 정치>라는 제목이었다. 리명길은 서두에서 “정치적 문화라는 말은 우리들의 이상생활의 정치용어로서는 귀에 설익은 낱말이다. 구미 각국에서는 정치적 문화에 대한 강좌로서 문학과 정치, 연극과 정치 등 학과목으로써 개설되어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이 분야는 미개척의 분야인 것이다.”라 밝힌 대로 그의 논문은 다분히 개척적인 것이었다. 논문 차례를 보면 논문의 성격이 쉽게 드러난다. 제1장 왕조 교체기 집정자들의 정치심리 제2장 유학정치이념의 분열 제3장 당파정치 제4장 세도정치와 개화 장별 목차만 보더라도 논문은 조선의 정치 흐름을 시조로써 풀어낸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제1장 제1절 어머니의 시국관>에서 정몽주의 어머니가 읊은 시조를 예로 든다.
가마귀 싸우는 골에 白鷺야 가지마라 성낸 가마귀 흰빛을 새올세라 淸江에 일껏 씻은 몸을 더러일가 하노라 여말 충신 정몽주 어머니가 읊은 시조인데 자식인 정몽주를 통해서 어수선하고 복잡미묘한 정치사회의 기미를 알고 경계한 것이었다. <제2절 두문파의 정치심리>에서는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이몸이 죽고 죽어>와 이색의 시조 <백설이 자자진 골에>, 길재의 <오백년 도읍지를> 예로 들어 두문파들의 정치 심리를 정리하고 있다. <제3절 건국 화평파의 정치사회관>에서는 정도전의 <선인교 나린 물이>, 이지란의<초산에 우는 범과>, 이직의 <가마귀 검다 하고>, 조준의 <술을 대취하고>, 변계량의 <치천하 오십년에>, 맹사성의 <강호에 봄이 드니> 를 인용하여 적절히 시국을 설명한다. 리명길은 결론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참여문학이요 정치문학의 소재인 시조는 이조정치의 이면에 존재하면서 지혜로운 증거를 제시하여 주고 있다. 비록 시조는 사십자 내외의 짧은 시요 노래이지만 조정정치의 전반에 걸쳐 正史가 말하지 않는 특수한 사실마저 해석하여 주고 있음을 지적하며 강조하는 바다. 이조실록의 정사는 집권한 당파에 따라서 판이하게 왜곡되게 기록되어 있음을 안다. 정사보다 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시조라 강조하고 있다. 리명길이 시조를 통해 조선정치를 구명하는 의미와 본질이 인용문 속에 들어 있다. 여기서는 리명길이 논문에서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공식적인 정치사에 작품을 작위적으로 편입하는 점이 없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한데 인상기 수준에서 그치기를 전제로 쓴 글에서는 역부족이라 하겠다. 어쨌든 리명길은 스포츠, 문화, 예술운동, 정치학, 시조창작, 시조론 등의 광범위한 영역에서 모두 합당한 실적을 남겼다. 적어도 문화적 자장의 영역 위에서는 앞으로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자리를 확보했다고 말할 수 있다. 기리 리명길 박사는 지역을 각별히 사랑했다. 책 한 권 내는 일에도 지역의 출판사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가 우리 곁에 아직 살아있노라고 말한다면 그는 지역사회의 기쁨이나 눈물 안에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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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형식에 얽매이다 보면 내용이 부실해지고
내용에 충실하다 보면 형식이 흐트러지고
다리 다리 종다리 하늘하늘 날고
보리 보리 보리싹 파릇파릇 솟는다
오월은 우리들의 달 씩씩하게 자라자
달래 달래 진달래 불긋불긋 피며는
푸릇 푸릇 나뭇잎 싱싱하게 짙는다
오월은 희망 드는 달 슬기롭게 자라자
절창이다. 이건 누가 곡을 붙여 동요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리명길 선생의 다른 시조는 독단에 가깝다고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