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란? - 인지와 감성의 해체
동국대(경주) 불교학과 김성철
1. 쌓는 것은 지식, 허무는 것은 지혜
“학문을 하면 나날이 늘어나고, 도를 닦으면 나날이 줄어든다(為學日益,為道日損).” 노자 도덕경의 가르침이다. 많이 보고, 많이 읽고, 많이 체험할 때 우리의 지식은 늘어난다. 박학다식을 지향하는 것이 학문의 길이다. 그러나 깨달음의 길은 그 방향이 정반대다. 선천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든, 세간의 교육을 통해 배운 것이든 모두 비우고 버릴 때 우리에게 지혜가 생긴다. 지식은 쌓아서 이룩되는 반면에, 지혜는 허물어서 만난다.
앎의 영역에서 지식은 양적(量的) 개념이고 지혜는 질적(質的) 개념이다. 지식을 의미하는 ‘알 지(知)’자 밑에 날 일(日)변이 붙으면 ‘지혜 지(智)’자가 된다. 지식은 그저 아는 것일 뿐이지만 지혜는 태양(日)처럼 밝은 앎이다. 새벽에 해가 뜨면서 삼라만상이 보다 뚜렷하게 보이듯이, 지혜의 세척을 거쳐야 지식은 보다 분명해진다. 삼라만상이 그러하듯이 지식은 다양하지만, 태양빛이 그러하듯이 지혜는 단일하다.
2. 반야의 지혜와 색즉시공
인도(印度)인들은 지식을 즈냐(jñā)라고 불렀고, 지혜를 쁘라즈냐(prajñā)라고 불렀다. ‘jñā’라는 단어 앞에 ‘뛰어남’을 의미하는 접두어 ‘pra’를 덧대어 만든 말이다. 중국의 번역가들은 쁘라즈냐를 반야(般若)라고 음역하였다. 반야는 ‘가장 뛰어난 앎’을 의미한다.
궁극적 지혜인 반야를 발견한 중국의 혜능 스님은 “원래 아무 것도 없다(本來無一物).”고 노래하였다. 원래 없다는 반야의 조망은 공(空)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텅 비었다는 뜻이다.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가장 짧은 불전(佛典)인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는 이러한 반야의 핵심을 가르친다. 형상도 공하고, 느낌도 공하고, 생각도 공하고, 의지도 공하고, 마음도 공하다. 깨닫고 보니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 우리가 체험하는 모든 것이 사상누각과 같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반야심경에서는 “형상이 공하다.”는 조망을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표현한다. “재색(才色)을 겸비했다.”거나 “색스럽다.”라는 말에서 보듯이 일반적으로 색이란 말은 미모나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의미한다. 수 년 전 영화의 제목으로 사용된 ‘색즉시공’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색즉시공의 원래 의미와 아무 관계가 없다. 색즉시공이란 말은 “모든 형상은 실체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3. 형상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공하다
간단한 예를 들어 색즉시공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막대기를 보고서 “참으로 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막대기가 ‘긺’이라는 형상을 갖는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 막대기가 원래, 항상 길기 때문에 ‘길다’는 생각이 든 것은 아니다. 어떤 짧은 막대기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그 막대기에 대해 ‘길다’는 생각을 떠올린 것이다. 만일 더 긴 막대기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그 막대기에 대해 ‘짧다’는 생각이 떠올랐을 것이다. 동일한 길이의 하나의 막대기인데도,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가에 따라 그 길이가 길게 생각되기도 하고 짧게 생각되기도 한다. 그 막대기는 원래 긴 것도 아니고 짧은 것도 아니다. 이런 조망을 한문으로 ‘비장비단(非長非短)’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막대기든 원래 짧지도 않고 길지도 않다. 그 어떤 막대기든 그 길이에 실체가 없다. 즉 모든 막대기의 길이는 공하다. 이것이 “형상은 공하다.”는 조망의 한 예이다.
큼과 작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떤 방에 처음 들어가 “방의 크기가 참으로 크다.”는 생각이 들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그 방의 크기가 원래 크기 때문이 아니라, 방에 들어가기 전에 작은 방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쁨과 못생김도 마찬가지다. 잘남과 못남도 마찬가지다. 부유함과 가난함, 머리가 좋음과 나쁨, 건강함과 허약함, 빠름과 느림 등등 모두 상대적 비교를 통해 떠오르는 생각들일 뿐이다. 원래 큰 방도 없고, 원래 작은 방도 없는데 우리의 인식에 큰 방과 작은 방이 동시에 출현한다. 하나는 생각 속에 염두에 두고 있던 작은 방이고 다른 하나는 눈앞에 보이는 큰 방이다. 우리의 생각을 구성하는 그 어떤 개념들도 홀로 발생한 것은 없다. 반드시 대립쌍과 함께 발생한다. 이렇게 상대적 비교를 통해 발생하는 과정을 불교전문용어로 ‘연기(緣起)’라고 부른다. 얽혀서[緣] 발생한다[起]는 의미이다. 형상만 공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 등 모든 것이 공하다. 실체가 없다. 세상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4. 공을 체득한 선승의 깨달음
공에 대한 조망이 깊어질 때 세상이 무너진다. 그 전까지 실재한다고 생각했던 세상만사가 모두 사상누각과 같은 것이었음을 자각하게 된다. 도덕경에서 노래하듯이 줄어들고 줄어들어서 결국 세상의 끝인 무(無)와 만나는 것이다[損之又損 以至於無爲].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최초로 판사에 임용되었다가 홀연 출가하여 구도자의 삶을 살았던 효봉 스님은 자신의 깨달음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海底燕巢鹿胞卵 바다 밑 제비 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火中蛛室魚煎茶 타는 불 속 거미집에 물고기가 차를 달이네
此家消息誰能識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白雲西飛月東走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
물고기가 사는 바다 밑에 공중을 나는 제비의 집이 있고, 그 집에서 포유류인 사슴이 알을 낳아 품고 있으며, 활활 타는 불 속에서는 바다 속에 사는 물고기가 거미줄을 치고 앉아 녹차 물을 끓이고 있다는 말이다. 언어가 무너지고, 세상이 무너져 있다.
과거 선승들의 문답 역시 기상천외하다.
부처님은 어떤 분인가? → 마른 똥 막대기다!
달마스님이 인도에서 오신 목적은? → 뜰 앞의 잣[측백]나무다!
개에게도 부처의 성품이 있는가? → 없다!
제자는 부처의 자비와 지혜에 대해 물었다. 부처의 위대함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스승은 의외의 답변을 한다. “마른 똥 막대기다[乾屎橛]!” 부처에 대한 모독이다. 지독한 우상파괴적 발언이다.
달마는 인도 왕자 출신의 승려로 중국에 건너와 선종을 개창한 성인이다. 제자는 이런 달마 스님이 중국에 온 목적[達磨西來意]에 대해 물었다. 장황한 답을 기대했는데, 스승은 의외로 뜰 앞의 측백나무[庭前柏樹子]를 가리킨다.
열반경이라는 불전에서는 모든 생명체에게 부처의 성품이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이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개[犬]에게도 불성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제자는 개와 같은 짐승이 갖춘 불성이 무엇인지 물었다. 스승은 열반경의 가르침을 뒤엎으며 ‘무(無)’라고 답한다.
도대체 상식적인 대답이 하나도 없다. 그야말로 ‘선문답(禪問答)’이다. 지금이야 이런 선문답들이 전문수행자들의 ‘상식’이 되었지만, 과거에는 선승들의 답변 하나 하나가 모두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문답의 공통점은 질문자의 의도가 스승에 의해 묵살되고 있다는 점이다. 스승의 충격적 답변으로 인해 제자의 세계관이 무너지면서 스승의 깨달음이 제자에게 전수된다. 일종의 ‘내림굿’이다.
5. 눈도 없고, 죽음도 없고, 시간도 없다
1) 눈도 없고 시각대상도 없다
앞에서 공(空)에 대해 설명하면서 긺과 짧음, 큰 방과 작은 방, 예쁨과 못생김, 잘남과 못남, 부유함과 가난함, 머리가 좋음과 머리가 나쁨, 건강함과 허약함, 빠름과 느림 등과 같은 생각들이 모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개념들 모두가 비교를 통해 떠오르는 것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는 조금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공사상에서는 그런 상대적 개념들뿐만 아니라 우리 생각의 토대가 되는 모든 개념들이 실체를 갖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반야심경에서는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코도 없고, 혀도 없고, 몸도 없고, 생각도 없다[無眼耳鼻舌身意].”고 가르치며, 깨달은 선승(禪僧)들은 심지어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고 토로한다.
눈이든, 귀든, 코든, 삶이든, 죽음이든 우리 생각의 토대가 되는 이런 모든 개념들은 이 세상에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한 것들이다. 서로 서로 얽혀서 발생한 것이란 말이다. 그래서 실체가 없고 공하다. 마치 꿈을 꿀 때 모든 일들이 실재하는 것 같지만, 원래 있는 것이 아니듯이, 세상만사 역시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하다. 잠에서 깨어남으로써 그 전까지의 꿈이 허구였음을 알듯이, 세상만사가 축조되는 원리인 연기의 법칙에 대해 숙달할 때 우리는 세상만사가 꿈과 같은 허구임을 알게 된다. 공함을 알게 된다.
불교학의 여러 분야 가운데 ‘공(空)의 조망’과 공의 근거인 ‘연기(緣起)의 법칙’에 대해 논리적으로 가르치는 분야가 중관학(中觀學)이다. 중관이란 “중도(中道)를 관찰한다.”는 뜻인데, 여기서 말하는 중도란 가운데의 그 무엇이 아니라 ‘양 극단에 대한 비판’을 의미한다. 양 극단이란 흑백논리의 양 극단이다. 형식논리의 양 극단이다. 중관이란 일종의 ‘순수이성비판’이다. 우리의 ‘따지는 능력(Reason)’에 대한 비판이다. 중관의 비판은 그 자체가 궁극이다. 이를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고 부른다. 흑과 백의 이분법에 대한 비판[破邪] 그 자체가 궁극적 깨달음을 드러낸다[顯正]는 의미이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하며 생활한다. 불전에서는 이런 체험을 일으키는 지각기관을 순서대로 안근(眼根), 이근(耳根), 비근(鼻根), 설근(舌根), 신근(身根), 의근(意根)라고 부르며, 그 각각의 대상을 색경(色境), 성경(聲境), 향경(香境), 미경(味境), 촉경(觸境), 법경(法境)이라고 부른다. 우리 몸에서 눈을 제거하면 시각의 세계 전체가 사라지기에 눈은 시각 세계에서 뿌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 감관의 이름에 ‘뿌리 근(根)’자를 붙인 이유다.
이 세상은 이러한 여섯 가지 지각기관과 여섯 가지 지각대상의 열두 가지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를 십이처(十二處)라고 부른다. 이 세상에 이 열 두 가지 이외의 것은 없다. 봄의 영역은 이 가운데 ‘눈[眼根]’과 ‘시각대상[色境]’이 만나서 이루어진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눈으로 시각대상을 본다거나 눈에 시각대상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야심경에서는 눈도 실재하지 않고, 시각대상도 실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중관학의 전범(典範)인 중론(中論)에서는 눈이 실재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눈이란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
스스로를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
- 중론, 제3장, 제2게 -
내 눈을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다. 내 손도 보이고, 나의 콧등도 보이지만 아무리 보려 해도 내 눈만은 보이지 않는다. 요리용 칼날로 두부도 자르고, 감자도 자르지만 칼날 그 자체만은 자를 수 없으며, 손가락으로 모든 사물을 다 가리키지만 손가락 그 자체만은 가리킬 수 없는 것과 같이, 눈에 온갖 사물들이 보이지만 눈 그 자체만은 보이지 않는다. 나의 눈이 있는 줄 알고 살았는데, 그런 내 눈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다. 내 눈이 없다.
혹자는 거울에 비추어 보면 내 눈의 존재가 확인된다고 반박할지 몰라도, 거울에 비친 눈은 진정한 눈이 아니다. 눈에 비친 시각대상이다. 불교용어로 표현하면 안근이 아니라 색경이다. 또 혹자는 손가락으로 만져보면 나에게 눈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할지 몰라도 손가락에 만져지는 눈동자의 감촉은 열두 가지 영역 가운데 촉경에 속할 뿐 안근은 아니다. 안근은 ‘보는 힘’을 의미하는데, 이런 보는 힘은 손가락에 만져지지 않는다. 또 다른 사람의 눈도 진정한 눈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눈 역시 거울에 비친 나의 눈과 마찬가지로 시각대상인 색경의 영역에 속한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보는 힘’으로서의 안근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반야심경에 등장하는 “눈이 없다[無眼 …].”는 경문에 대한 중관학의 논증이다. 이렇게 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눈에 비친 시각대상에 대해서도 시각대상이라고 이름 붙일 것도 없다. 눈이 있어야 시각대상이 있을 수 있는데 눈이 없기에 시각대상도 없다. 긴 것이 있어야 짧은 것이 있을 수 있는데, 긴 것을 배제하면 어떤 막대기에 대해 “짧다.”고 이름 붙일 일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눈도 없고, 시각대상도 없다는 조망을 터득했다고 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 전까지 시각대상인 줄 알았던 눈앞의 풍경이 ‘대상성(對象性)’을 상실한다는 말이다. 공성의 조망을 통해 시각의 세계에서 눈과 시각대상이라는 개념이 증발한다. “눈으로 시각대상을 본다.”는 말 역시 이 세상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 만든 허구다. 상기한 중론 인용문에서 “스스로를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라고 반문하는 이유가 이에 있다.
이렇게 우리가 체험하는 ‘시각의 세계’에 원래 ‘눈[眼根]’이랄 것도 없고 ‘시각대상[色境]’이랄 것도 없으며 ‘무엇을 보는 일[眼識]’도 없는데 우리는 그런 한 덩어리의 시각의 세계에 분별의 선을 그어 “눈으로 시각대상을 본다.”고 생각을 하고 말을 한다. ‘눈’이 있다고 설정하게 되면 ‘시각대상’과 ‘보는 작용’이 출현한다. 그 세 가지 모두 원래는 없는 것들인데 우리의 생각 속에서 서로 얽혀서[緣] 발생[起]하는 것이다. 연기(緣起)하는 것이다. 비단 눈이나 시각대상, 보는 작용뿐만 아니라 이 세상 만물이 모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선긋기’를 통해 연기한 것들이다. 이 세상 만물은 모두 생각이 만든 것으로 원래 단 하나도 실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공(空)하다. 모든 것은 연기한 것들이기에 모든 것은 공하다.
2)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
앞에서 눈과 시각대상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 중론에 의거해서 설명해 보았다. 긴 것과 짧은 것, 큰 방과 작은 방 등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점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과 시각대상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철저하게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중론이라는 문헌에 의거할 때 “눈도 없고 … 시각대상도 없다.”는 반야심경의 경문이 비로소 이해된다. 우리는 갖가지 개념들을 소재로 삼아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런 개념들에 대한 고착의 정도는 천차만별이다. 긺이나 짧음, 큼이나 작음과 같은 개념에 대해서는 고착의 정도가 약한 반면, 눈과 시각대상과 같은 개념들에 대해서는 고착의 정도가 강하다.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 가운데 고착의 정도가 가장 강한 것이 ‘삶’과 ‘죽음’일 것이다. 많은 철학자, 종교인들이 ‘권력과 금력을 지향하는 동물적 생존’ 이상의 삶을 추구하는 이유가 바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깨달은 선승들은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고 선언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있고, 언젠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죽음을 자각할 때 우리는 종교에 의지하게 되고 철학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그러한 ‘살아 있음’의 정체를 추구한 대표적 철학자들이 하이데거와 같은 실존주의자들이었다. 자연과학이나 과거의 철학은 존재하는 개개의 것들, 즉 ‘존재자’를 탐구하였는데 실존주의자들은 존재(Sein) 그 자체를 탐구하였다. “도대체 왜 세상 만물은 없지 않고 있는가?”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평생 품고 다녔던 존재에 대한 물음이다. 나는 지금 살아 있다. 그리고 언젠가 죽을 것이다. 나는 지금 존재한다. 그리고 언젠가 나의 존재는 사라질 것이다. 왜 나를 포함한 모든 생명은 죽어야 하는가?
그런데 이런 의문을 해결하고자 할 때 불교의 접근방식은 독특하다. 의문에 대해 답을 내려 하지 않고, 의문이 타당성 여부를 점검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에서 보듯이 우리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승이 좋은 이유는 죽음 후의 세계가 두렵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지금 없지 않기 때문이다. 탄생하기 전에 나는 없었고, 죽음 후에 나는 없을 것이라는 점만이 우리 생각으로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인 듯하다. 탄생 전의 ‘무(無)’와 죽음 후의 무(無)를 염두에 두고서 우리는 지금 존재한다[有]고 생각하고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곰곰이 생각해 보자. 탄생 전의 무(無)를 내가 만난 적이 있는가? 죽음 후의 무를 내가 만날 수가 있을까? 그렇지 않다. 탄생 전의 무는 나와 대면한 적이 없고, 죽음 후의 무 역시 나와 대면할 수가 없다. 그런데 마치 ‘탄생 전의 무’와 ‘죽음 후의 무’를 내가 체험했거나 체험할 수 있는 것처럼 전제하고서, 지금의 이 순간에 대해 ‘유(有)’라거나 “살아있다.”고 규정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탄생 전의 무를 체험한 적이 없고, 죽음 후의 무 역시 체험할 수가 없다. 따라서 지금 체험하는 이 순간이 ‘유’일 것도 없고, ‘삶’일 것도 없다. ‘무’를 체험한 적도 없고 체험할 수도 없기에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유’를 체험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나는 지금 살아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확고하게 살아있어야 나의 죽음이 있을 수 있는데, 지금 살아있는 것도 아니기에 죽을 것도 없다. 삶도 원래 없고 죽음도 원래 없다. 삶과 죽음 모두 우리의 생각이 만든 이름일 뿐이다. 죽음을 염두에 두기에 지금 살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지금 살아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 죽을 것을 두려워한다. 긴 것과 짧은 것이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緣起)한 것이듯이 삶과 죽음 역시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한 개념일 뿐이다. 삶도 공하고 죽음도 공하다.
비트겐슈타인 역시 죽음에 대해 이상의 논의와 유사한 내용의 글을 남기고 있다. 논리-철학 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록 죽으면 세계는 바뀌는 것이 아니라 끝나는 것이기는 하지만(6.431), 죽음은 삶의 사건이 아니다. 죽음은 체험되지 않는다(6.4311).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다른 저술 어디에서도 죽음에 대해 이 이상 논의하지 않는다. 누구든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신의 죽음을 체험할 수 없다는 비트겐슈타인의 통찰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는 선승의 토로가 비트겐슈타인을 통찰보다 더 깊은 이유는 그 바탕에 ‘연기(緣起)의 법칙’이 깔려 있다는 점에 있다. 큰 방과 작은 방이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한 것이듯이, 삶과 죽음 역시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한 것이다. 석가모니에 의해 발견된 연기의 법칙에서는 불교의 종교성은 물론이고 세계관, 윤리, 실천, 수행론 모든 것이 연역된다. 삶과 죽음이 원래 없다는 선승의 통찰은 연기법에 근거하여 도출되는 불교적 세계관에서 하나의 작은 조각일 뿐이다.
하이데거의 경우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는 점에서는 불교적 수행과 그 출발을 같이 하지만 종착점은 다르다. 하이데거의 철학에서는 ‘존재감’을 더 강화시키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 모든 것이 없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자각하고 사는 사람을 하이데거는 ‘현존재(Dasein)’라고 불렀다. 라이프니츠와 같은 철학자가 현존재로서 살아간 사람이며 고흐나 세잔느와 같은 예술가의 그림에서도 ‘존재’에 대한 자각을 읽을 수 있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유(有)와 무(無)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유를 더욱 강화시킴으로써 자신의 철학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불교적 수행에서는 유를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유와 무에 대한 의문을 해소시킨다. 유와 무,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생각 모두가 허구임을 자각함으로써 존재에 대한 의문을 해소시키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의문이 허구의 의문이었음을 폭로한다. 지금의 우리는 살아 있다고 할 것도 없다. 따라서 죽을 것도 없다. 긴 것도 없고 짧은 것도 없으며, 큰 방도 없고 작은 방도 없으며, 눈도 없고 시각대상도 없듯이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
3)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공하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체득하고자 할 때 어떤 심오하거나 난해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방법은 단순 명료하다. 그저 ‘있는 그대로’ 보면 된다. 시간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통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시간의 정체에 대해 그저 있는 그대로 보면 된다.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세 가지 시간대로 구성되어 있다. 흘러 지나간 것은 과거(過去)이고, 아직 오지 않은 것은 미래(未來)이며, 지금 존재하는 것이 현재(現在)이다. 세 가지 시간대를 부르는 한자어에 그 의미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러면 이러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실재하는지 하나하나 검토해 보자.
우리는 과거를 만난 적이 있는가? 과거를 대면한 적이 있는가? 내 면전에 과거가 놓인 적이 있는가? 결코 그런 적이 없다. ‘흘러간 것’이 과거이기에 항상 현재 속에 사는 내가 과거와 대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과거 그 자체는 체험되지 않는다. 과거는 내 면전에서 존재한 적이 없다.
미래 역시 마찬가지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는 시간대이기에 우리는 미래를 대면할 수가 없다. 미래를 만날 수가 없다. 미래 역시 내 면전에 존재할 수가 없다.
과거는 지나가서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아 없기 때문에, 과거의 성현들은 “오직 현재에 충실하여라!”는 격언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들 성현의 말씀처럼 과거와 미래는 없고 오직 현재만 있을 뿐인가? 현재는 지금 이 순간을 가리킨다. 필자에게는 자판(字板)을 두드리는 바로 지금의 이 순간이 현재이고, 독자에게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바로 이 순간이 현재이다. 그러면 바로 이 순간인 현재는 그 길이가 얼마일까? 지금 이 순간의 몇 초 정도에 대해 현재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현재의 길이가 1초 정도 될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초침의 소리를 ‘똑~딱’이라고 흉내 낼 때, ‘똑’ 하는 순간에 ‘딱’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이며, ‘딱’하는 순간에 ‘똑’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가 된다. 따라서 ‘똑~딱’ 하고 발화하는 시간 전체가 현재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더 짧게 ‘똑’이라는 한 글자를 발화하는 순간을 현재라고 규정할 수도 없다. ‘똑’이라는 소리를 ‘또~옥’이라고 풀을 때 ‘또’ 하는 순간에 ‘옥’은 미래이고 ‘옥’ 하는 순간에 ‘또’는 과거가 된다. 현재의 길이는 0.1초일 수도 없고, 0.01초일 수도 없고 … 0.00001초일 수도 없다. 그 어떤 시간도 다시 과거와 미래로 양분되기 때문이다. 결국 현재는 증발하고 만다. 현재는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틈에 끼어 있을 곳이 없다! 이런 조망을 중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미 가버린 것은 가고 있지 않다. 아직 가지 않은 것도 역시 가고 있지 않다.
이미 가버린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떠나서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은 가고 있지 않다.
- 중론, 제2장, 제1게 -
과거는 지나가서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아 없으며, 현재는 과거와 미래 틈에 끼어 있을 곳이 없다.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성되어 있는데, 과거와 미래와 현재 각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금강경에서는 이런 통찰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과거의 마음도 포착할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포착할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포착할 수 없다.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금강경, 제18 一切同觀分)
우리는 현재와 미래를 염두에 두고서 과거를 떠올리고, 과거와 미래를 염두에 두고서 현재를 떠올리며, 과거와 현재를 염두에 두고서 미래를 떠올린다. 이 모두 ‘생각’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체험’의 세계에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현재도 없다. 따라서 과거, 현재, 미래로 구성되어 있는 시간 역시 실재하지 않는다.
6. 모든 개념에는 테두리가 없다
긺과 짧음, 큼과 작음, 예쁨과 못생김, 잘남과 못남, 눈과 시각대상,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 등은 실체가 없다. 이런 개념들은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낸 것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 속에는 이런 개념들을 떠올릴 수 있어도, ‘체험’의 세계에서 이런 개념들에 대응하는 고정불변의 사태(fact)나 사물(thing)을 만날 수가 없다. 생각 속에 떠오른 것이 모두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 속에서는 ‘토끼의 뿔(兎角)’도 떠올릴 수 있고, ‘거북이의 털(龜毛)’도 떠올릴 수 있지만 체험의 세계에는 이 모두가 실재하지 않는다. 긺과 짧음 …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두 토끼의 뿔이나 거북이의 털과 같이 실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사물이나 사태에 대한 고정관념이 허구임을 자각하게 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화엄학(華嚴學)의 조망이다. 화엄학이란 화엄경에 근거한 절대긍정의 사상이다. 앞에서 소개했던 반야심경에서는 이 세계에 대한 절대부정의 통찰을 노래하는 반면, 화엄경에서는 절대긍정의 통찰을 노래한다. 절대부정의 통찰에서는 모든 것이 다 공하지만[一切皆空], 절대긍정의 통찰에서는 하나를 들면 그대로 모든 것에 해당한다[一卽一切]. 화엄적 조망으로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개념을 예로 들어 그 ‘테두리[外延, 범위]’가 실재하는지 검토해 보자.
‘이마’에는 테두리가 없다. 이마 한 가운데가 이마인 것은 분명하지만, 주변으로 갈수록 이마의 의미가 흐려진다. 이마와 관자놀이의 경계부가 어디인지 확정할 수 없다. 코도 마찬가지고, 귀도 마찬가지고, 입술도 마찬가지다.
‘아침’에는 테두리가 없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지가 아침인지 단정할 수 없다. ‘점심’에는 테두리가 없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지가 점심인지 단언할 수가 없다. ‘정오’라는 개념의 경우는 ‘태양이 상공의 정 중앙에 뜰 때’라는 약속이 되어 있기에 테두리가 있다. 그러나 약속은 생각이 만든 것일 뿐이며 체험의 세계인 자연(自然)에는 그 어떤 약속도 없다.
모든 개념은 테두리가 없기에 곰곰이 생각하면 그 외연이 무한히 확장된다. 그 어떤 개념이라고 해도 그 범위가 무한하다는 조망을 화엄학에서는 “하나가 곧 모든 것이다(一卽一切).”라거나 “하나 속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一中一切).”고 표현한다. 이제 몇 가지 개념을 예로 들어 그 외연에 대해 검토해 보자.
‘우주’에는 테두리가 없다. 푸른 하늘 저 먼 곳을 우주라고 부르지만,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이곳도 우주가 아닐 수 없다. 내 뱃속도 우주이고 지구의 내부도 우주다. 이 세상에 우주 아닌 곳이 없다. 모든 곳이 우주다.
‘시계’라는 개념 역시 테두리가 없다. 시침과 분침이 있어야 시계인 것만은 아니다. 디지털시계도 있고 모래시계도 있다. 1분 1초도 틀리지 않아야 시계인 것만은 아니다. 하늘의 달도 시계, 별도 시계, 해도 시계다. 달의 모양을 보면 날짜를 알 수 있고, 위치를 보면 시간을 알 수 있다. 별과 해의 위치를 보면 시간을 알 수 있다. “시계가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 모든 것이 시계가 아닐 수 없다. 내 육체도 시간을 나타낸다. 나이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있는 이 방도 시간을 나타낸다. 준공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시간을 나타낸다. 나의 컴퓨터, 전화기, 책, 볼펜 내 주변에 시계 아닌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시계다.
‘욕심’ 역시 테두리가 없다. 식욕도 욕심이고 성욕도 욕심이고 명예욕도 욕심이고 재물욕도 욕심이지만, ‘공부를 잘 하려로 하는 것’ 역시 욕심이다. ‘바르게 살고 싶은 것’도 욕심이고 ‘차카게 살고 싶은 것’도 욕심이다. 남에게 베풀고자 하는 것도 욕심이고, ‘깨달으려고 하는 것’도 욕심이다. 나쁜 욕심도 있고 좋은 욕심도 있지만, 이 세상에 우리의 욕심이 개입되지 않은 일은 없다. 고개를 들어도 들고 싶은 욕심 때문이며, 수업 중 졸아도 자고 싶은 욕심 때문이며, 자다가 깨도 깨고 싶은 욕심 때문이며, 심지어 ‘욕심을 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 역시 욕심에 속한다. 일거수일투족 욕심 아닌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욕심이다.
‘물질’에는 테두리가 없다. 모든 것이 물질이다. 서구의 유물론자들의 통찰이다.
‘마음’에는 테두리가 없다. 그래서 불전에서는 “모든 것을 마음이 만들었다(一切唯心造)”거나 ‘오직 마음만 있을 뿐(唯識)’이라고 가르친다.
‘시작’에는 테두리가 없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나의 몸과 마음은 물론이고 산하대지, 우주만물의 모습이 모두 새롭게 시작되고 있다. 어떤 것은 시작하지 않고 어떤 것은 지금 시작하고 있고 어떤 것은 앞으로 시작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이 시작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이 천지창조의 순간이다. 모든 것이 ‘시작’하는 순간이다.
‘종말’에는 테두리가 없다.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은 종말을 고하고 있다. 나의 몸과 마음은 물론이고 산하대지, 우주만물의 모습 모두 찰나찰나 완전히 종말을 고하고 있다. 모든 것이 끝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이 천지종말의 순간이다.
지금 이 순간이 천지창조의 순간이면서 지금 이 순간이 천지종말의 순간이다. 창조의 순간이 종말의 순간이다. 창조가 종말이다. 시작이 끝이다. 언어가 무너진다. ‘창조’나 ‘종말’이라는 개념이 무의미해진다.
“모든 것이 살[肉]이다.” 내 눈에 보이는 풍경은 모두 내 망막의 살이다. 시각의 세계는 모두 내 망막의 살이다. 나에게 무엇이 보일 때, 사실은 그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동공을 통해 들어온 빛이 망막의 스크린에 그린 무늬를 보고 있는 것이다. 밖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 안을 보고 있는 것이다. 바닷가에서 아무리 너른 대양을 바라본다고 해도 그 모두가 내 눈동자 속의 돈짝 크기의 망막을 보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돈짝만하다. 나는 내 망막의 살을 보고 있다. 피가 흐르고 신경이 통하는 내 살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귀에 들리는 소리는 소리가 아니라 내 고막의 진동이다. 들리는 소리 모두는 내 고막의 살의 느낌이다. 냄새도 그렇고 맛도 그렇고 감촉도 그렇고 모두 나의 살의 느낌이다. 나는 나의 살로 이루어진 바다에 빠져 있다. 갑갑하다. 너른 세상에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곰곰이 생각하니 내 살의 감옥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이 살이다.
“모든 것이 과거다.”, “모든 것이 현재다.”, “모든 것이 미래다.”
“모든 것이 과거다.” 밤하늘에 보이는 북극성은 사실은 과거 몇 백 년 전의 북극성의 모습이라고 한다. 빛의 속도 때문이다. 북극성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별과 심지어 태양이나 달의 모습도 모두 과거의 모습들이다. 빛이 지구에 도달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엄밀히 보면 이뿐만이 아니다. 나에게 보이는 코앞의 물건도 사실은 엄밀히 말하면 과거의 모습이다. 그 물건에 반사된 빛이 나의 눈까지 도달하는데 다만 얼마라도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각정보가 신경망을 타고서 나의 대뇌 후두엽의 시각중추에 도달하려면 다시 약간의 시간이 경과해야 한다. 들리는 소리도 그렇고 냄새도 그렇고 맛도 그렇고 감촉도 그렇고 지금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은 과거의 것들이다. 모든 것이 지나간 과거의 일들이다. 모든 것이 과거다.
“모든 것이 현재다.” 지금 나에게 느껴지는 것은 모두 현재 이 순간 느끼고 있는 것들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사물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모든 것이 과거의 일들이었는데 나의 감관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모든 것이 현재의 일들이다. 보이는 것이든, 들리는 것이든, 생각하는 것이든 모두가 현재 이 순간의 일들이다. 모든 것이 현재다.
“모든 것이 미래다.” 지금의 북극성의 모습은 아직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아직 내 눈에 도달하지 않았다. 아직 오지[來] 않은[未] 것을 우리는 미래(未來)라고 부른다. 지금 이 순간의 모든 별의 상태는 아직 나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의 해의 모습도, 달의 모습도 아직 나의 감관에까지 도달하지 않았다. 빛의 속도 때문이다. 모두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들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 책상 위의 볼펜의 모습도, 컵의 모습도 그리고 이 순간 내 손가락을 자극한 키보드의 촉감 자체도 아직 나에게 오지 않고 있다. 빛의 속도와 신경의 전달속도 때문이다. 모든 것이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들이다. 모든 것이 미래다.
나에게 지각된 외부 사물의 모습은 그 사물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과거의 모습들이지만 내 감관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현재의 느낌들이다. 아울러 지금 이 순간의 외부 사물의 상태는 아직 나에게 느껴지지 않기에 모두 미래의 일들이다. 모든 것이 과거이고 모든 것이 현재이고 모든 것이 미래이다. 과거가 현재이고, 현재가 미래이고, 미래가 과거이다. 언어가 무너지고 생각이 무너진다.
이 뿐만이 아니다. “모든 것이 기호다.”, “모든 것이 부처님이다.”, “모든 것이 기(氣)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것이 밥이다.”, “모든 것이 똥이다.”, “모든 것이 나의 뇌(腦)다.”“모든 것이 미술이다.” (이들 개념이 해체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독자 스스로 연구해 보기 바람)
이상 몇 가지 개념들에 대해 화엄적인 절대긍정의 조망을 적용해 보았다. 모든 곳이 우주이고, 모든 것이 시계이며, 모든 것이 욕심이고, 모든 것이 물질이고, 모든 것이 마음이며 … 모든 것이 살이고 … 모든 것이 미래이다.
그런데 여기서 논의를 한 단계 더 진전시키면 앞의 반야심경에서 노래하듯이 절대부정의 조망 역시 가능하다. 예를 들어 모든 곳이 우주라면 모든 곳에 대해 우주라고 이름 붙일 것도 없다[無, 空]. 우주 아닌 것이 있어야, 그것과 대비하여 이곳은 우주라고 명명할 수 있는 법인데 우주 아닌 것이 없기에 우주라는 말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시계라면 이 모든 것에 대해 시계라고 이름 붙일 것도 없다[無, 空]. 시계 아닌 것이 있어야 어떤 것을 시계라고 부를 수 있는데, 시계 아닌 것이 없다면 시계라는 말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 모든 것이 마음이라면 모든 것에 대해 마음이라고 이름 붙일 것도 없다[無, 空]. … 모든 것이 미래라면 미래랄 것도 없다[無, 空]. 이것은 절대긍정의 조망에 의거한 절대부정의 조망으로 “우리가 체험하는 모든 것은 우주랄 것도 없고, 시계랄 것도 없고, 욕심이랄 것도 없고 … 현재랄 것도 없고, 미래랄 것도 없다.” 이상의 논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첫댓글 어~휴~! ㅋㅋ
자비와 지혜로 귀결되었습니다.
생수일체!!!통찰과 나눔이 처음이요 끝인것 같습니다.
겨우 한번 다~ 읽었습니다. 시간날때 다시 정독 해야겠어요. 엄청난 내용이네요.. _()_
1. 쌓는 것은 지식, 허무는 것은 지혜
선천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든, 세간의 교육을 통해 배운 것이든 모두 비우고 버릴 때 우리에게 지혜가 생긴다
2. 반야의 지혜와 색즉시공
“원래 아무 것도 없다(本來無一物).”
텅 비었다는 뜻이다.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형상도 공하고, 느낌도 공하고, 생각도 공하고, 의지도 공하고, 마음도 공하다.
깨닫고 보니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
우리가 체험하는 모든 것이 사상누각과 같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3. 형상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공하다
부유함과 가난함, 머리가 좋음과 나쁨, 건강함과 허약함, 빠름과 느림 등등 모두
상대적 비교를 통해 떠오르는 생각들일 뿐이다
이렇게 상대적 비교를 통해 발생하는 과정을 불교전문용어로 ‘연기(緣起)’라고 부른다.
얽혀서[緣] 발생한다[起]는 의미이다. 형상만 공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 등 모든 것이 공하다. 실체가 없다. 세상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4. 공을 체득한 선승의 깨달음
제자는 부처의 자비와 지혜에 대해 물었다. 부처의 위대함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스승은 의외의 답변을 한다.
“마른 똥 막대기다[乾屎橛]!” 부처에 대한 모독이다. 지독한 우상파괴적 발언이다.
공에 대한 조망이 깊어질 때 세상이 무너진다. 그 전까지 실재한다고 생각했던 세상만사가 모두
사상누각과 같은 것이었음을 자각하게 된다.
줄어들고 줄어들어서 결국 세상의 끝인 무(無)와 만나는 것이다[損之又損 以至於無爲].
스승의 충격적 답변으로 인해 제자의 세계관이 무너지면서 스승의 깨달음이 제자에게 전수된다
지금 이 순간이 천지창조의 순간이면서 지금 이 순간이 천지종말의 순간이다. 창조의 순간이 종말의 순간이다. 창조가 종말이다. 시작이 끝이다. 언어가 무너진다 _()_
. 우리에게 떠오르는 종교적 철학적 의문들은 ‘나’, ‘삶’, ‘죽음’, ‘우주’, ‘세상’, ‘창조’, ‘내생’ 등과 같은 개념들을 조합하여 만든 허구의 의문들이다. 생각의 속임수다. 반야학을 통해 절대부정의 통찰을 체득하고 화엄학을 통해 절대긍정의 통찰을 체득할 경우 더 이상 생각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다.
깨달음에서는 분별적 인지(認知)와 애증의 감성(感性) 모두를 해체하지만,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는 모습은 ‘이타(利他)의 감성’과 ‘절묘한 분별’이다. 이를 ‘자비’와 ‘지혜’라고 부른다.
감사합니다... 올려 주신글, 읽고 또 읽어도 맛이 다릅니다. ()
어느 목사님 말씀 같습니다! 단상도 한번 꽝~! 치시죠!((
한데, 더 어렵습니다!^^
화두공부(禪)를 할수록 삶을 바라보는 각도가 점점 더 단순명료 해져 감을 느낍니다.
선사들의 삶의 그 모든 여유가 어디서 나오는지도 조금씩 이해가 되어집니다. 禪은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의 허상을 여지없이 깨어버립니다. 그러고나서 드러나는 티없이 맑은 우리의 본래심으로 회복시켜
순수하면서도 단순한 .... 그리하여 진정한 자유의 삶을 살게 만드는것 같습니다.
대형서점이나, 큰 도서관에 있는 수많은 책들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저는 <생각 덩어리>라고 말하고 싶네요.^^
그러고보면, 괴로워서 찾아오는 제자들에게 "망상 피우지 말라" 고 했던 스승들의 말씀이 얼마나 압축적 표현인지..!
청연님! 열 받지 마십시요!^^
책 안 팔리면 경제가 안 돌아 갑니다!ㅋㅋ
그런 분들도(큰 스님) 그러면서도 책 한두권씩은 다 지어 놨습니다!
부처님 말씀도, 책으로 안 나왔으면 밥줄 떨어지는 사람들 많습니다!ㅋㅋ
청연님도 나중에 이런 얘기들 책으로 만드실 것 같습니다!
망상을 쓰시렵니까? 모두 지 잘난척 하다가 떠나는 것같습니다.
망상 떨다 떠나나, 망상 안 떨고 떠나나 뭐가 다르겠습니까?
저는 정말 소원이 있다면, 이리 낄낄대는 남은생 이었으면 합니다!
수 많은 책들 생각 덩어리라 하셨습니까?
청연님도 그 많은책, 사다리 밟고 올라 가셨듯이 그들 책, 신세 지었을 것 같슴니다.
지금 책을 보며 공부 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뒤 딸아오고 있는 후배 도반님들도 많습니다. 모두 청연님 부러워 하고 있습니다.
이런 글들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공부 하시던 방법, 이런 글들이 필요 합니다.
법장 법사님, 병 문안을 갔을 때, 하신 말씀이 생각 납니다.
"얼마나 아픈데요!"
‘생각덩어리’, ‘잘난 척하다가 떠난다.’ 좋은 말씀들입니다.
나날이 깊이 있는 토론이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공부도 많이 하시고 계시고요. _()_
많은 유인원들 중에 인간들만이 유일하게 가르치려고 하고 배우려고 한다고 합니다.
새로 발견한 것 깨달은 것들을 후대에게 전하는, 그래서 지식을 축적할 줄 아는 유일한 유인원도 인간 뿐입니다.
그 차이가, 유전자로 보면 거의 비슷한 침팬지와 인간을 현재의 엄청난 간격으로 벌려 놓았습니다.
그러니 유전적으로 보면 아는 것을 책으로 남기고 잘난척하다가 가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면서 한편으로는 강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산(潙山) 스님은 앙산(仰山) 스님에게 “너는 경(經)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앙산 스님이 “평소에 경을 보지 말라 하시더니 어찌 저에게는 경을 보라 하십니까?” 하고 묻자,
위산 스님이 “너는 다른 이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제 할 일도 못하지만 너는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어야 할 사람이다”
라고 하셨답니다.
어느 날은 위산스님이 경을 보고 있노라니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저희들에게는 경을 보지 말라고 하시더니 스님은 왜 경을 보십니까?” 했습니다.
그러자 위산 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경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고 눈가림하고 있는 거야.(只圖遮眼)”
“그럼 저희들은 무얼 하고 있는 겁니까?"
“너희들은 소가죽도 뚫는다(牛皮也透得).”
그만큼 문자에 집착하고 내용에 현혹된다는 뜻이겠지요.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1210)국사는
'人因地而倒者 因地而起, 땅에서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난다.’ 라고 하셨습니다.
생각을 통하지 않고는 문자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깨달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생각, 망상까지도 모두 공부이고 도움이 됩니다.
땅에서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한다.
생각과 감정으로 낭패를 본 자는 그 생각과 감정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러야 한다.
- 대혜종고 -
전원 합장
예! 말씀 잘 들었습니다!
작은 녀석이 오이 냉국을 만들어 놨습니다!
맛이 영~ 없었습니다! 하여,식초도 많이 넣고, 설탕도 넣을 만큼 넣었습죠!
그래도 맛이 안 나기에, 소금을 더 넣었더니 제맛이 낫습니다!
제맛? 애초부터 제맛이라는 기준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있을 것은 제 자리에 다 있어야 하나 봅니다.
득 로 합장
이 글은 시간 날때마다 저도 모르게 되풀이해서 다시 읽고, 다시 읽게 됩니다.. 요긴한 내용들을
함축적이며, 자세하고 쉽게 잘 풀어 놓으셔서 공감을 느끼게 해주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마지막 이 구절이....
<깨달음에서는 분별적 인지(認知)와 애증의 감성(感性) 모두를 해체하지만,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는 모습은 ‘이타(利他)의 감성’과 ‘절묘한 분별’이다. 이를 ‘자비’와 ‘지혜’라고 부른다.>. . . 법사님! 귀한자료 올려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_()_
법사님 귀한자료 올려주셔서 정말감사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도 쉬지않고 읽었습니다 계속해서 읽으면 남는게 있겠죠
제삼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