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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구간을 양정 고개에서 산행을 마쳤기에 이번 산길은 신들이 떠나버린 계룡산 구간을 진행하기 위해 대전역에서
구름님 차편으로 엄사리 "빛과 생명교회" 앞에서 산행을 시작하기로 한다.
오늘 산행도 역시나 부산의 희야 지부장님과 함께 이어 가기로 하고
구름님 늦은밤 차편 이용 감사 드리며 이제 산길로 이어 갑니다.'
엄사리에서 오르는 등산길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지 등로가 좋게 이어진다.
신들이 노닐다 떠난 계룡으로 가는길에 안개가 자욱하고
워밍업 하기에는 최고의 산길
안개가 모든걸 삼켜 버렸다고 해야하나
바람이 조금씩 불때마다 안개가 소리없이 물러가고 하늘에 달빛이 곱게 보인다.
안개가 물러나고 밝은 달빛을 벗삼아 렌턴을 끄고 조용히 진행한다.
군부대 출입제한 안내판이 가끔 보이지만 별 신경 안 쓰이는것이고
향적봉 가는 우회길과 정맥 마루금으로 가는길 조금 헷갈려 잠시 향적봉 가는길로 진행 하다가 아닌듯해서 돌아 나온다.
마루금 대로 오르면 만나는 전망바위
지난번 대둔산 조망 좋은 구간도 야간이더니 이곳에서 보는 계룡은 좋은데 야간이라 뵈는게 없다.
계룡으로 오지 말라는 나무 울타리를 넘어 진행
진행 하다가 바위 전망대에서 본 야경이 좋았는데 사진으로는 별로 볼것이 없다.
계룡산 정상 바로 안부 큰 사찰의 사천왕처럼 양쪽에 커다란 바위가 노려 보는것 같다.
이곳 계룡의 지킴이 천왕문을 지나서 트레버스길로 돌아나와 계룡의 정상으로 가보지만 군부대 철조망이 길을 막는다.
다시 돌아나와 오래된 산성길이 편안하게 다가오는데 뭐 보이는게 있어야지
지나는곳 모두가 출입제한 구역이지만 야간이니 눈에 뵈는것도 없는 국립공원 계룡을 지나게 된다.
계룡산은 동학사.신원사.갑사를 중심으로 관음봉.삼불봉.금잔디 고개까지만 개방되어 있고 나머지 구간은
걸리면 벌금이다.
그리고 계룡 정상에서 관음봉 구간은 바위구간이라 주능선 종주나 정맥꾼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라 할 수 있는곳이다.
계룡 통천문
예전 정맥길때는 이곳부근에 철조망이 있어 오르지못한 구간인데 철조망은 철거가 된듯 몰래 쌀개봉으로 오른다.
쌀개봉에 올라서니 내려가는길이 절벽이다.
렌턴빛으로 보는 절벽은 높이가 꽤 되는것 같고 가느다란 자일이 하나 있어 산객들이 여기로 내려가는 모양인지라
여길 어떻게 내려가나 싶어 만사성 대장님께 연락을 드리니 내려가면 된단다.
헐!~~
관음봉 아래 연천봉 갈림길에서 잠시 휴식을 하며
이대로 진행한다면 계룡에서 눈뜬 장님인듯 아무것도 못볼것 같아 연천봉에 다녀 오기로 한다.
연천봉
방백마각 구혹화생(方白馬角 口或禾生)이란 글씨가 바위에 세겨져있다.
조선왕조가 482년만에 망하고 새로운 새상이 열린다는 측자파자(더하고 빼고해서 점을 치거나 예언하는)비결이 담겨 져있다.
조선이 500년을 못넘긴다는 글인데 누가 쓴글인지 모르겠으나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바라는 어느 민초가
혼신의 힘을 다해 새겨놓은거라 믿어본다.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 영일루에서 이곳 연천봉의 일출을 감상 했다는데 오늘은 안개가 있고
이른새벽이라 사비성은 보이지 않는다.
안개로 일출도 물건너 가고
연천봉에서
계룡산 주능선
계룡산은 통일 신라시대의 오악중 서악으로 그리고 조선시대때는 삼악중 중악으로 자리 잡았던 명산이며
지리산, 경주에 이어 국립공원 3호로 지정될 많큼 신이 모여 있었던 신비로움의 산이다.
무학대사가 말한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과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의 두 주제 계(鷄) 룡(龍)을 따서 부르게 된
산이름이며 닭인지 용인지 계룡 정상은 군사시설로 오르지 못하고 관음봉에서 금잔디 고개까지만 허용된 법정 탐방로다.
금닭이 알을 낳는 형상이며 비룡이 승천 한다는데 용의 머리부분은 정상에서 남쪽으로 가면 머리봉이 자리한다지만
가보지 못한곳이니 용머리가 있어 본들 무엇하랴
계룡은 주봉인 천왕봉-쌀개봉-관음봉-삼불봉으로 이어진 능선이 닭의 벼슬을 한 용을 닮았더고 붙여진 이름
연천봉에서 본 삼불봉 방향
한때 신들이 모여 있었던 계룡산 신도안에는 200여개가 넘는 종교집단이 있었고
신들이 떠난 자리에는 육,해,공 삼군 본부가 자리하는 계룡대가 터를 잡았다.
계룡산 관음봉
계룡은 온통 부처님과 연관된곳이며 학문을 하는곳인가.
봉이름이 부처와 관련있고 학문과 관련있는듯하다.
문필봉,장군봉 임금봉.신선봉...삼불봉 관음봉
바람 차가운날
희야 지부장님.
삼불봉 방향
일출이라고 한장 담은 사진인데
계룡산 정상 방향
일출
삼불봉 방향에서 금잔디 고개로 이어져 만학골재로 가는 마루금
철계단길과 자연 성릉길을 걸어가는 희야누님
자연성릉 겸 용의 등줄기을 이어가는 마루금이다.
지나온 계룡의 자연성릉
삼불봉
금잔디 고개를 지나 수정봉에서 본 삼불봉
금잔디 고개에서 오르면 만나는 수정봉에서 마루금은 내리막길로 3분정도 내려가 우측으로 트레버스해서 이어진다.
무작정 내려가면 급경사 알바
갑사가 보이고
갑사는 백제 구이신왕 1년(430년)때 고구려에서온 아도화상이 창건한 절
만학골재 2차선 도로
도로 건너 시멘트 옹벽을 올라서 진행
짧은 된비알길 한번 거친 숨소리와 함께 오르고
324봉 삼각점봉
잘 정돈된 무덤가에서 잠시 휴식을 하고
324봉
인증담고
윗장고개
윗장고개 건너고
팔재산까지 해발 200을 치고 올라야 하지만 금방 오를 수 있는 구간이다.
한성질 하는 팔재산 하지만 쉽게 오른다.조망도 없고 사방 꽉 막혀 있다.
팔재산 이후로 벌목한 구간과 오래된 밤나무를 베어 내고 새로 심은 나무가 자리한다.
예전 한여름 금남 할때 팔재산 이후로 정맥길이 그렇게 알려지지 않았을때는 완전 지맥길 더러운 곳 같았는데 지금은
나름대로 고속도로가 다 되어있다. 물론 여름이라면 다르겠지만
팔재산 내려오면 밤나무 단지를 지나고 최근에 한 벌목지역을 지난다.
전주 이씨 무덤을 지나면 널티재다.
널티재에 전에없던 4차선 도로가 새로 생겨있다
왼쪽 아니면 오른쪽
무단 횡단하기에는 교통량이 많은편이고
왼편으로 가서 4차선 굴다리 아래로 지나 예전 2차선 도로옆 고물상을 지나 인삼 밭옆 임도길로 올라 어느 문중의
무덤으로 오른다.
예전 2차선 도로 무단횡단해서 산길로 올랐지만 지금은 어느 문중 무더가로 오르니 좀 더 편하다.
밤 사시요 밤을 사
본격적인 밤나무 단지가 자리하는 곳인데 여름에는 지맥길 보다 못한 길이 이어지는 곳
정맥길 중에서 가장 잡풀이 많아 한여름에는 피해야 할 곳이 금남길이다.
어쨋거나 지금은 이보다 좋을 수 없는 구간.
어느 마을 임도고개
여기서도 안골산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성질 부리는 안골산이지만 쉽게 올라 잠시 휴식을 한다.
한쪽팔이 떨어진 표지판 새로 보수 공사를 해두고
오래된 규화석 같은데
사진으로는 별로
노성지맥 분기봉
이곳에 시그널 한장 달고 언젠가 다시 오겠노라 다짐을 한다.
또 다시 밤나무 단지가 눈에 들어 온다.
전에 없던 길이 자꾸만 생기니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
2차선 포장 도로
이인면 반송리 계룡면 발양리 두아리 마을을 잇는 고개
이곳에서 정맥꾼 한분 만나고
성향산 도착
금남정맥길에 기억할것 밤나무
그리고 공주 밤막걸리 이것만 기억하면 금남길 편안한 산길이 된다.
성향산에서 밤나무 단지를 지나면
마루금은 문중묘터로 가야하지만 묘터 관리인이 문중묘터로 못들어 오게 마루금을 살짝돌려 놓은 구간을 만나게 된다.
표지기따라 가면 작은 계곡을 건너서 철대문으로 나오게 된다.
천안 논산간 고속도로 건너기전에 만나는 697번 국도
이곳에서 대전의 무한질주님의 차량으로 대둔산 인근 배티재로 향해 충남제일 산길 105km를 즐기시는 분들과 만나러 가고
무한질주님께 감사드립니다.님 덕분에 편안하게 올 수 있었습니다.
성향산에서 밤나무 구경을 잘 했지만 가을철에는 밤나무 주인이 산객들의 방문을 좋아하지 않은곳이다.
이제 다음구간은 꿈꾸는 백마강이 기다린다.
지난주에 섰던 그곳에 오전 9시 07분
새벽 첫 기차를 타고 대전역에 오니 폴모리님과 구름님을 만나 구름님 애마로 이곳에 다시 서게 됩니다.
그동안 택배 기사를 해주신 구름님 폴모리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훗날 다시 대전에 올때 택배 지원 부탁드립니다.
두분은 댁으로 가시고 오늘 산행도 밤밭 탐구와 마지막 사비성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오늘은 초반에는 제가 리딩으로 시간을 당겨 봅니다.
고속도로 절개지 오르는 철계단
잠시 워밍업이죠
누님이 제게 앞장서서 좀 당겨보라고 하시니 일단 당겨 봅니다. 시간당 5키로 속도로
1시간이 지날무렵
아하!~ 나는 남자고 누님은 여자
이렇게 무작정 가다가는 안되겠다 싶어 누님을 앞장서게 하면서
누님 편한 걸음으로 가시면 제가 뒤에서 따라 갈께요" 하고 사진 찍으며 뒤 따라 진행
엄청 빠르게 진행하니 오늘 산행 3시쯤 마칠듯
걸음이 비슷하니 참 편하고 좋다.
밤나무 단지
예전 금남정맥 할무렵 한여름에 지나갈때는 온통 잡풀이 무성하더니
지금처럼 봄철에는 이렇지만 여름에는 엄청 고생할 구간이다.
진고개
공주 밤나무 단지
공주는 밤막걸리로 유명
흙이 황토흙이다 보니 밤이 잘 되는듯
이번구간에서 가장 힘든 망덕봉 이건만 삼각점이 어느구석에 처박혀 있는지 아무리 찾아도 안보이고
멀리 지나온 망덕봉
한여름에 이곳에 서면 잡풀때문에 고생 좀 해야 하는곳이다.
물론 예전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깃대봉 삼각점
벌목구간
감나무골 고개
언제나 내림길과 평지에서는 멀어지는 희야누님.
오늘 산길의 최고 난이도 있는 감토봉이건만 오름은 별로다.
정상에 풀안난 무덤 하나가 인상적이고
가자티 고개
예전에는 철조망을 타넘고 진행 했는데 지금은 철조망 휀스 큰부분으로 가면 된다.
가자티 고개 금남정맥 안내도
전에없던 안내판이 보이는걸 보니 등로가 좋아지겠구만
정맥이건 지맥이건 이맘때가 가장 좋다.
청마산성 동문 역할을 하던곳
백제의 마지막 방어선이라 할 수 있는 백제시대 최대의 성터이며 성터 둘레는 6,5km이다
이곳 동문부터 청마산성 복원문제로 능선 주변의 나무는 모두 벌목한 상태
신라와 백제 그동안 서로가 변방의 성뺏기 싸움을 했지만 660년 나당 연합때 백제와의 전투는
공성 싸움이 아니 탄현을 넘어 백제의 수도에서 의자왕을 사로잡는 전투를 시도 한다.
백제와 신라의 군사력은 다 모아봐야 5만 대 5만 병력 규모
신라는 5만 규모의 병력으로 백제로 진군
백제 뒤늦게 황산벌로 5천 결사대
사비성을 지키는 군사 1만명 기벌포 4-5천 병력
나머지 군사는 백제 여러곳 있어 중앙으로 불러 모으지 못함
당나라 군대 13만
1천 척의 배는 천리에 달할 정도로 이어져 금강하구로 들어옴
182봉
잠시 휴식겸 점심 식사
조석산인가
멀리 지나온 청마산성 동문
길게 이어지는 청마산성 복원으로 벌목을 한 성터 주변
훗날 가 보면 청마산성을 복원해서 보기 좋을듯하다.
멀리 금강이 보인다.
금남정맥은 호남정맥과 금남호남 분기봉인 조약봉에서 분기되어 연석산-운장산-인대산-대둔산-계룡산-부소산까지의
도상거리 127km의 산길이며 금강 발원지 뜬봉샘에서 시작 군산 앞바다까지 401km의 강줄기이다.
금강을 모두감싸 안은 산줄기라기 보다 삼국시대 백제 700년 역사성을 예우한 산길이라 봐도 무방할듯한 금남정맥 길이다.
영조때 만들어진 신경준의 산경표에는 역사성을 예우한 정맥길은 한북정맥길의 한양이 내려다 보이는 수도 서울의 삼각산
(북한산 상장봉) 그리고 낙남정맥( 조선시대 성종 임금의 명으로 만들어진 동국여지승람에는 낙남정간이라 되어 있음 영조
때 만들어진 산경표의 원조격)은 500년 도음지이며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탄생된 구지봉이 자리하는 김해의 분산을
예우한것도 그렇고 지금 이자리에서 금남정맥길의 금만봉(싸리봉)있는곳에서 좌측 산길은 남당산-미륵산-봉화산 -금성산
-장계산이 자리하는 금강 하구로 산자분수령 원칙을 안고 이어진다.
금강을 고스란히 감싸고 흐르는 산줄기인 셈이지만 산경표에는 이곳에서 백제의 수도가 자리하던 곳으로 산길을 이어간다.
700년 역사를 잊지 못해서 아니면 조선 영조시대 힘있는 사대부의 힘있는 외침이 부여로 향하게 했을까
영조때 사대부들의 사치풍조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었지만 영조는 언제나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했을터 산경표 역시 농업의
기반이 되는 10대강 (압록강-낙동강-두만강-한강- 대동강-금강-임진강-섬진강-청천강-예성강)아마도 산경표의 저자는
이곳에서 농업의 기반이 되는 금강의 물줄기를 안고 끝부분 군산으로 가고자 하였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자연적인 산길과 인간적인 산길 그가운데 인간이 살수 있었던 역사속의 산길
그리고 신라 오악중에서 서악이라는 계룡산을 따라 부여의 부소산으로 지나는 금강정맥길을 만들어 내며
700년 역사성을 예우 하느라 금강을 온전히 둘러싸는 산길을 포기한다.
부여 청마산성 내력 읽어 보시죠
부여 청마산성 비석
서문에 해당하는곳
몇몇곳 사진 담고보니 희야누님은 어디까지 가셨는지
시야에서 완전 사라짐
부여산성중 동 나성 삼거리 현재 발굴중이며
이곳에서 왕릉은 지척인데 희야누님이 어디까지 간건지 모르니 왕릉은 포기하고 정맥길을 따른다.
멀리 금강이 보이니 마음은 벌써 날머리에 선듯
금남정맥과 함께하는 금강은 뜬봉샘에서 발원 용담호를 거쳐 대청호에서 보다 큰 물길로 미호천 갑천물과 합쳐 흐르다가
이곳 부여에서 백마강이 된다.
백마강이란 이름은 그렇게 좋은 유래는 아니지만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소정방과의 무용담이 얽혀있는 이름이다.
소정방이 부소산성을 공격할때 강에는 안개가 자욱하여 강을 건너기 어려웠고
그때 백제의 무왕이 호국용이 되어 강을 지키고 있어 안개가 자욱하게 걷히지 않았다 한다.
이 말을 들은 소정방이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용을 낚아 올리자 짙은 안개가 걷히고 백제를 공격할 수 있었다
이때 부터 부여를 흐르는 금강을 백마강으로 소정방이 용을 낚아다는 강가운데 바위를 조룡대라 불렀는데 지금은
사대강으로 바이는 물속으로
동나성 안내문
통훈대부 정3품 당하관 벼슬
부인이 두분 계시는데 한분은 한씨 또한분은 전씨
정맥길에 변하지 않은것중에서 유일하게 이런 오래된 비석이다.
sk주유소 석목고개 왕복 6차선 도로를 건너고
금성산 통수대로 오르는 등로
금성산 통수대 8각정자.
무로정 팔각정자
무로정 팔각정자에서 우측길로 내려와 계백문위에 야산 이생달선생 강역사적비가 있고
생태이동 통로를 지나니 부여군민 공원에 독립운동 애국지사비와 각종 비석들이 눈에 들어 온다.
마루금은 활쏘는곳 앞을 지나는데 예전에는 부여여고 운동장을 지난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주택지로 변한 곳이라 마루금은 힝단보도를 건너 부여여고 옆 부소산성 입구에서 입장료를 내고 들어 가야한다.
드디어 신라인의 한사람으로써 옛백제의 수도에 도착했다.
마음이 무겁고 답답하다.
뭔 죄를 지은것도 아닌데 마음은 이토록 무겁고...
궁녀와 백제인이 흰꽃잎 처럼 떨어진 낙화암과 불탄 군장터를 어찌 본단말인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부소산성 안내판
의자왕은 백제의 31대의 왕이며 마지막 왕이다
태어난 연대는 알길 없고 641년에 재위-660년 초기에는 해동증자라 불리며 적극적인 정책을 하였으나 말년에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당나라로 끌려가 그해에 죽음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신라 진골(부모중 한분만 왕족 출신) 귀족의 후예 삼국사기는 신라 중심으로 쓴글이기에 백제의
의자왕을 나라를 망친 무능하고 궁녀와 놀아난 부패한 임금으로 써 놓았다.
실제로 의자왕은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고 성군중의 성군이었다고 전해지는데
641년 왕위에 올라 군사.백성 민심까지 안전 시키면서 성군으로써 기반을 다지며 언제나 라이벌인 신라와의 싸움에서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해 40개의 성을 함락했고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인 대야성을 공격
김춘추의 딸과 사위를 죽게한다.
이때 김춘추는 사흘동안 눈한번 깜박이지 않았다는 기록이 전해지며 이전쟁 이후 신라는 당나라와 외교를 통해서 백제를 공격하자고 무려 16년이나(643년 660년) 공을 들인다.
의자왕 밤마다 삼천 궁녀와 노느라 힘들어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의자왕이 되었다는 소문도 있으나
의자(義慈)의롭고 자애로운 임금이란 뜻의 왕이다.
부소산성 정문에서 인증담고
잃어버린 왕국의 의자왕과 낙화암 고란사를 무거운 마음을 안고 찾아간다.
백제는 660년 7월 나당연합군 18만 대군앞에 힘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체 무너지게 되는데
의자왕이 죽음은 ?
의자왕은 이곳 사비성을 둘째-세째 왕자들에게 지키게 하고 첫째아들과 함께
사비성에서 직선거리로 26km정도 되는 웅진성으로 몸을 피한다
이때 금강하구 전투에서 백제군 1천명 전사 이후 금강으로 올라오는 13만대군의 당나라 군대를 본 세째 왕자가 당나라에
투항을 하면서 사비성은 함락는데 이때 죽은 백제군사는 약 1만명에 달한다.
웅진성으로 피신한 의자왕은 그곳에서 의이없게 항복을 하는데 항복인가 포로인가?
의자왕은 웅진성을 지키던 장수 예식진에게 배신을 당해 포로가 되어 잡혀 웅진성을 나오게 되었지만
우리가 알고있는 것처럼 고스란히 나라를 내준건 절대 아닌것 같다.
포로가 된뒤 의자왕은 소정방과 신라의 무열왕에게 술잔을 올리는등 굴욕을 격게되고
대신과 백성 약 1만 2천명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가 포로로써 문책을 당하다가 그해에 병사를 하고 만다.
700년 백제의 역사는 무너지고 의자왕이 망국의 주범이 되었지만 역사는 이긴자가 쓰는법
삼충사를 모신 사당
외국인들이 문화 해설사분이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고
내용은 백제의 멸망과 의자왕 낙화암에서 떨어진 궁녀에 관한 이야기다.
백제의 충신인 성충.흥수.계백 장군을 모신 사당
성충과 흥수
656년 좌평으로 있을때 의자왕이 산라와의 연승으로 자만과 주색에 빠지자 국운이 위태로울것 같아 극간을 하다가 옥에 투옥된다.
옥중에서 단식을 하다가 죽음이 임박하여 의자왕에게 상소를 올린다.
충신은 죽더라도 임금을 잊지 못하는법 신이 항상 시세의 흐름을 볼 적에 멀리않아 반드시 전쟁이 일어나니 강상류에서
적병을 맞이하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으니 육로로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에 못 들어오게 한뒤 험한
지형에서 싸우면 반드시 이길것이라 하였다.
성충은 옥중에 투옥된뒤 그해 656년에 죽음을 맞이한다.
의자왕이 흥수와 상의를 하니 흥수가 기벌포와 탄현만 지키면 된다고 하자
신하들이 흥수는 오랫동안 귀향을 가 있어 왕을 원망하여 거짓으로 고할수 있다고 간언을 해서
흥수의 말을 듣지 않는다.
계백 처자식을 모두 죽이고 나온 5천 결사대의 장수로써 관창을 두번이나 사로 잡았다 놓아주는
살생분별의 모범을 보이나 세번이나 찾아온 관창의 목을 베어 돌려 보낸다.
지금의 연산면 사칭벌에서 5천결사대와 전사
영일루
이곳에 오르면 신라오악중 서악인 계룡산의 연천봉에서 뜨는 해를 볼수 있다는 곳인데
나무에 가려 계룡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군창지 700평 규모
백제군의 곡식을 저장하던 곳인데
단기 2993년 서기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불에 타고
지금은 터가 남았으나 발굴 당시에 쌀 보리 콩 조 등이 불에타서 숯이되어 지금까지도 흙속에 묻혀 있다고 하는곳이다.
주춧돌과 군장터 불탄 군량미가 백제의 흙한줌으로 기억되는 곳인데
희야님은 먼저가고 경상도가 고향인 나로써는 신라인의 후손 잠시 이곳에서 흙한줌 움켜쥐 본다.
ㅠㅠ
백제시대의 사비성
다정 다감했다던 백제인이 만든 부소산성터
성터길을 걸으니 고즈넉한 성터와 소나무가 참 잘어울린다는 생각과 함께
이 길위에 얼마나 많은 백제인이 숨져 갔는가 생각도 해보고
부소성터 소나무
부소란:소나무를 뜻하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가 이곳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고 멋지게 다가온다.
이런날은 서두를것도 없고 그저 느낌이 오는대로 걸으며 생각할뿐
고란사 약수 이야기
이곳에서 공주 밤막걸리 한잔씩 마시고
사자루
목책 넘어로 금강이 한눈에 펼쳐 시야에 들어온다.
시퍼런 강물이 내려다 보이는 사자루에 올라보니
예전에 없던 금강의 콘크리트 다리가 어지럽게 눈앞으로 다가와 마음속에서 자리잡았던 금강의 맑은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리고 강물과 함께 사라져간 궁녀와 백제인들
이곳에서 낙화암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린다.
고란사 가는길에 낙화암이 옆이지만 먼저 고란사로 가서 약수물 한잔하러 내려 간다.
고란사
꿈꾸는 백마강에 자리하는 고란사
그이름과 사뭇 다르게 작고 초라한 절이지만 법당뒤 절벽 아래에 솟아 오르는 고란사 약수물이 답답한 마음을 씻어 주는듯
시원하게 가슴속으로 쓸려 내려가는데 옆이 글귀에 석간수가 백제 임금들이 즐겨 드시던 약수라고 써 있다
백제 임금들은 고란사 약수물이 아니면 마시 않았으며 진짜 고란사 약수물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고란초 한잎을 띄워오게
했다는 이야기를 생각하니 물맛이 싹 달아나는것 같은데
아무 물이나 퍼 드시지 않으시고...
약수터옆 바위로 가서 고란초가 있나 살펴보니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바위만 차갑게 보인다.
고란사 약수물 내력
임금이면 가장 높은 자리지만 또 가장 낮은 자리임을 알아야 한다.
백성을 위하고 백성들이 신음하는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자리
임금이 특별한 존재라 여기고 특별한 물만 찾고 그것도 모자라 신하와 백성을 못믿어 고란잎까지 띄워오게 하였으니
삼국중 백제가 가장 먼저 망한것은 임금이 이곳 고란사 약수물맛을 제대로 몰랐기에 그런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며
이후 신라의 패망 935년(건국한지 992년 - 약 천년) 역시 포석정에서 돌아가는 술잔 그술맛을 제대로 몰랐기에 패망을 한건지
금강(백마강)의 황포돛대
낙화암 바로아래 자리하는 고란사 삼성각
이곳에서 누님과 한장 담고 슬픈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꽃잎이 되어 떨어진 낙화암으로
무거움 발걸음을 돌린다.
백화정
백마강이 내려가 보이는곳에서 꽃이 되어 떨어진 곳이다.
이곳에서 숨진 궁녀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
희야누님
지금까지 많은분들과 산행을 했지만 가장 편안한 발걸음으로 발걸음을 맞추어 주신 희야지부장님.
낙화암에서
궁녀가 꽃잎처럼 몸을 던져 백제의 최후를 더 가슴 아프게 했던 곳이다.
과연 3천명의 궁녀가 백제 궁안에 존재했을까.
3천 궁녀
이말은 과연 어디서 나온 말일까
조선중기 시인이었던 민제인의(백마강부)란 시에서 처음 사용
"궁녀 수 삼천"이라는 말이 처음 나오는데 실제로 숫자를 헤아린게 아니라 많음을 표현한 글이라 볼 수 있다.
이곳 사비성은 성의 규모로 볼때 궁녀 3천명이 궁안에 살만한곳이 없으며 그런 공간 조차로 없는 곳이다
그당시 백제 수도 부여에는 5만의 인구중 여자 비율 2만 5천, 아이.노인 제외한 성인 여성 1만 2천명
잘나가던 조선시대 궁녀 수는 최대 600명 이른다는걸 감안 한다면 백제 의자왕의 3천 궁녀는 모순이라 볼 수 밖에없고
삼국사기에도 의자왕은 주색에 빠졌다는 말만 있을뿐 3천 궁녀에 대한 글은 언급이 없다.
조선시대 한 시인(민제인)의 쓸때 없는 문구 하나가 삼천궁녀와 노닐다가 망국의 주범으로 만들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이곳 낙화암에서 떨어진 궁녀의 혼이 있다면 흐르는 강물과 함께 태어나고 자란 고향집으로 흘러 갔으면 하고 빌어보며
낙화암에는 꽃은 없지만 꽃보다 더 하려하게 진 백제인이 있다는 것만 기억하고 금강 강가로 자리을 옮긴다.
백제인의 시각에서 본 역사서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3천 궁녀에 대한 진실, 기록에도 없는 3천 궁녀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은 오류라는 것만 알고
의자왕과 3천 궁녀에 대한 오해가 풀리기만 바래본다.
아름다운 금강을 기대했건만 낙화암의 맑은 백제인의 영혼은 어디로가고
사대강 사업으로 썩은듯한 냄새가 나는 강물에 손만 담궈보고 훗날 다시 이곳에 왔을때 강물은 어떤색을 띄고 있을지
상상하지 말아야 할 상상을 해보며 아름다운 백제의 혼을 담은 금남정맥길을 마친다.
금남산길에 도움주신 폴모리님.구름님,무한질주님께 감사 드리고
함께 해주신 부산의 희야 지부장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다음 산길은 독립운동가 분들이 가장 많이 태어나 주신 금북정맥 2차 준비를 해본다.
첫댓글 역사가 흐르는 금남정맥 꿈꾸는 백마강
산행기가 아니라
역사책 읽었다는 생각이 들어요......ㅋ
방장님! 봄이오니 벌써 반바지차림 시원합니다..
오래전부터 꼭 남기고 싶었던 산길 이야기인데
나이가 더 들기전에 처음부터 하나 하나 다시 한다는 생각으로 대간이며 정맥이며 자료를 남기고 싶네요
산길 이야기 지켜봐주세요
올해한여름 걷게될 금남정맥길 미리 역사공부하며 예습잘하고.... 어서 고즈넉한부소성터길 걸어보고싶은맘이 듭니다. 희야지부장님과 발걸음맞은 산행 글과사진만으로도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금남은 역사가 살아 숨쉬는 이야기가 많은 곳입니다.
소스님이 살고 있는 마산은 가야국의 애환이 서린곳이기도 하고
올해 몇몇 정맥을 다시 하는데 낙남도 다시 이어 가려고 하는데
가야국에 대해서 공부 해보고 낙남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집근처로 가면 잡체 부탁드려요
@배병만 날짜만 알려주시면 잡채대령하겠습니다.ㅋㅋ 세째주는 빼고... 방장님 역사공부 재미나요...
@페가소스(안정미) 6월쯤 될것 같습니다.
이곳 저곳 벌려 놓은게 많아서 좀 미루어 지네요
잡체는 소스님표가 제일 맛있음
금남정맥 두번으로 졸업을 하셨군요, 고생 하셨습니다



거운 산행이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ㅇㅅ 老 松
희야님이 함게해 주셔서
다음에는 어느 정맥길을 가실런지...함게할수 있으면 좋은데
화성이라는
금남은 백제의 멸망과 관련된 산줄기이다 보니 한동안 공부를 한게 있어서
부득이 가보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이런 역사에 대해서 알았더라면 한번더 갈일이 없었을텐데
다음 정맥 이야기는 독립운동가분들이 가장 많이 태어나 주신 금북정맥길로 다시 갑니다.
저 또한 시간만 할해가 된다면 방장님과 역사 공부도 좀 하면서 편안하게 마루금길 누비고 싶어지네요.
수고 많으셨고 정성이 담길 글 되세겨 봅니다,
역사는 어느 산이건 다 있죠
조금씩 알아보고 가시면 많은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
늘 고맙습니다.
산행기에서 땀흘리며 걸었을 산꾼의 열정과 함께 황산벌,사비성에서 천오백년 역사를 거슬러 그길에서 벌어졌을
군사들의 함성들리는듯하고 처자를 베고 전장에나선 계백의 붉은 충혼이 느껴지는듯합니다.
산행기를 쓰려 책을사서 한달동안 공부했다고 한 열의에 뜻한바 목적을 관철하려는 고수의 집념이 짙게묻어납니다.
야밤에 섬뜩한 쌀개봉 직벽 내려오시느라 진땀흘렸겠고 연천,관음,장군봉 계룡주릉은 제가 거의주말마다 가는 제 나와바리라 더 정겹게 와 닿읍니다.
방장님, 희야지부장님과 밤샘하며 함께했던 산길 아련하며 열정으로 이룬 금남정맥 역사탐방길 완주 진심 축하드립니다. 두분 고생많이하셨읍니다.
금남길에 많은 도움 주셨던 폴님,구름님.바닥지님 감사드립니다.
대전 어느 닭도리탕에서 막걸리 마시던 생각이 많이 납니다.
몇몇곳 역사 이야기 끝내고 대전으로 지맥 구경 갈때 택배지원 부탁드립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두분 수고많으셨습니다
클럽의 모든 행사에 참여해야 하는 입장인데도 요즘 그렇게 되었습니다
죄송하구요
예전에 지난 금남정맥 방장님께서 사진으로 올려주셔서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밤나무단지 밑을 지나다 떨어진 밤을 주워 배낭에 넣고 지나다가
밤 나무 단지 지나 입구에서 주인에게 배낭까지 조사받고 신고를 한다고 하기에 그 밤을 돈주고 사고 ㅎ
방장님의 역사기행 너무 너무 잘쓰셨습니다
그중 3천궁녀에대한글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시는군요
사진 잘보고 잘읽고 갑니다
희야지부장님 예전에 울트라 할때의 인연으로 알게되였지만 아직도
왕성하시고 청춘이십니다
날아다니시는 방장님과 발을 맞추시다니 대단하십니다
10년도 넘은 여름에 밤나무 단지 지났는데 어디가 어딘지 모르고 알바는 수없이 하면서
찌끔 뻐금 지났던 산길
나이가 들어서 산길에 역사가 있는걸 알았으니
저도 참 미련하죠
다음 산길은 금북정맥 독립운동가 분들이 가장 많이 태어나주신 산길을 찾아 보고 자료를 모아 볼까 합니다.
이제부터라도 좋은 자료 남기고 싶네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금남정맥도 이렇게 마치시는군요... 사진과 상세한 설명의 글 잘 보았습니다. *^^*
글 감사합니다.
나이가 들어가니 이제서야 산이 제대로 보입니다.
미련스런 돌팔이 산꾼이죠
방장님 9정맥 중 금남 하시고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수고 많이 하셨구요.금남 날머리 백마강의 황포 돗대 함 타보시고 오시지요. ㅎㅎ
땅끝할 시간이 금방은 힘드실것 같으네요..
방장님 항상 늘 즐산 하시길 바라겟슴니다.
금남 잘보고 갑니다.
계획은 금북.낙남 대간...
다시한번 더 자료를 남기고 싶네요
더이상 나이가 들면 자료 찾기도 힘들것 같구요
지맥길 멋지게 이어 가시는 모습 보기 좋습니다.
방장님 산행기는 늘 논문 수준이여서~~
모든 자료가 저희들에게는 소중한 정보이며, 역사가 될 그런 기록들을 쓰시는 것을 보고 존경합니다.
저도 산행전부터 사전 정보와 사후 정보를 늘 수집하고 자료를 정리해야될텐데, 산도 어쩌다가 갈 수 있으니...
수준차이가 커서 댓글 달기가 쉽질않아요.
산에서는 몸도 머리도 안되어서 오로지 걷기에만 집중하니 , 방장님 눈높이는 상상도 못하겠지만, 변화를 해봐야겠습니다.
늘 감사드려요.(^^)
글 감사드립니다.
신학기라 많이 바쁘셔서 산행 하시기도 힘들듯 한데
제가 대신해서 이곳 저곳 많은곳 다녀와서 그림 올려 드리도록 할께요
좋은 시간에 산으로 나들이 가시기 바랍니다.
반쯤 읽어 내려가다가 졸았어요 ㅋㅋ
반은 나중에 다시 읽어볼게요..
그래도 마지막 사진은 참 인상 깊네요..
수고하셨습니다..
금강의 아름답던 풍경중에서 맑은물이 참 좋았는데 지금은 너무 더럽더군요
손만 겨우 담궈보고 왔습니다.
에고 이리 날라다니시니 어디한군데 따라가보고싶어도 입도뻥끗못하겠습니다
너무정성들여 적어내려오신산행기라서 짧은글재주로는 댓글달기도 송구하구요
다음주가게될 금남길 산행기 몇번 읽어보고 가야겠어요
이주동안 먼거리 오가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다음주에 마무리 하러 가시죠
등로가 좋으니 일직 마치실것 같은데
부소성에서 여기 저기 천천히 둘러 보고 오시면 참 좋겠습니다.
조심해서 잘 다녀 오세요
우리가 먼저 금남 시작 했는데 금남 마무리는 방장님이 먼저하셨네요
방장님 사진 글 보다보니 금남 다한거 같습니다
방장님 수고하셨습니다
금남은 여름에 해야 제맛인데 봅철에는 진도가 빠르게 되더군요
다음주 금남 마무리 잘하고 낙동에서 뵙겠습니다.
방장님과 함산은 꿈도 안꿀랍니다.
함께시작하믄 뭐하노 따로 다닐꺼~ㅋㅋ
긴 거리 희야지부장님과 함께 잘 마무리 하셨네요~
산행보다 산행기 올리는게 정말 더 힘든데~~
방장님 산행기는 특히나 더 하실듯~아무쪼록 아픈곳 무리 없이 다니시길 바랍니다.
대장님과 함산해야죠
언제 될지 모르겠지만
이번주 토요일날 기쁜 마음으로 뵙겠습니다.
아참 산행기 쓰는데 2주일 걸립니다.
방장님 , 희야지부장님 수고 하셨습니다.
산행기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
글 감사합니다.
인사는 이번주 부산에서 하겠습니다.
작년에 부여에 다녀왔었지요.
역사는 이긴자의 손으로 쓰여지는 것이니 오롯이 맞지는 않을 겁니다.
산행기 보면서 역사공부 다시 해봅니다.
두분 수고많으셨습니다.
역사는 이긴자의 손으로 쓰여지는건 맞죠
이후 신라의 패망도 이긴자의 손으로 쓰여지다 보니 마지막 경순왕부터
신라의 포석정 술판만 기억되니...
이번주에 뵙겠습니다.
제가 알지 못했던 역사를 배우고 갑니다.
삼천궁려에 대한 잘못된 백제의 인식과 함께
또한 대중가요로 인해 오해가 생긴 부분이 바로 잡혔으면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요즘 충청권에 발걸음을 자주 하시는군요.
늘 무탈하게 지맥길 개척하시기 바랍니다.
궁여네 대한 이야기는 잘못된것이기에 정맥을 다시하면서 글을 써 보았습니다.
한달간 책을 통해서 배운건 역사보다 시력이 많이 안좋아졌다는거네요
대전으로 지맥길 가면 연락 드릴께요
글 감사합니다.
희야지부장님과 함께 하신 산행
수고많으셨습니다
회사에서 쉬는시간에 짬짬이
보느라고 무려 4번에 걸쳐 산행기를 보았습니다^^
산행보다 힘든 산행기가
방장님표 산행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덕분에 클럽회원님들은
역사를 되새길수 있을것 같습니다
저 또한 몰랐던 역사를
배우게 되네요~~
늘 산행기를 통해 많이 배우고 갑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역사에 대해서 조금이라 배울 수 있었다니 고맙습니다.
대부분 글이 길면 그냥 쭉 내리고 마는데
금남길에는 백제 최후의 충신 흥수.성충.계백 그리고 아름다운 백제인들이 있었다는걸 꼭
기억 해주시구요 봄철안전산행 하시기 바랍니다.
방장님 덕분에 아름다운 추억을 하나또 핳았네요
한달이상 공부하고 금남길에 올라서 걷는 내내 야무진 역사공부 많이했네요
진짜루 즐거웠던길입니다
붕대투혼 아파유
얼른 낫기를 바라면서 다시 공부잘합니다
누님과 함께한 금강의 역사 찾아보기 정말 재미있었구요
특히 마지막 구간은 그렇게 편할 수가 없는 멋진 산행 이였습니다.
훗날 부소산성에 또 한번 더 설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누님과 함게한 시간 꼭 기억 할께요
금북길 마무리 꼭 같이가요
울 고향땅을 지나갔는데 회사출근한다고 고향땅 밟을기회을 놓쳐서 아쉽네요
계롱산구간을 지나 공주 부여까지 지나는동안 역사를 한눈에 보는듯한 자세한
산행기를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희야지부장님과 방장님 두분 고생하셨습니다
젊을때 산행기 써둔거 컴 몇번 바꾸고 나니 이제는 기억에도 없는 산이 되어버린 흔적들 다시 찾아 보려하니
다리도 아프고 눈은 침침하고
좀더 젊을때 다시한번 더 걸어본 길이 추억길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번주 모임에서 반가운 마음으로 인사 드리겠습니다.
산을 다니는게 아니라 역사 공부하러 수학여행 다닌듯 하니..
그많은 이야기들 풀어 놓으니
하나의 대하 드라마를 보는듯 합니다.
언제쯤 이런 경지에 오를지..
역사를 잘 모르는 저는 그져 읽고 지나가는것 뿐이네요..
보다 젊은 시절에 산을 오래 안다닐거라 생각을 했는데
벌써 나이가 반백을 지나 버렸습니다.
기억에서 멀어진 찌끔 버끔 산행이 그산행이 정석임에도
장거리 산행을 하면서 부터 한번에 끝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모든게
엉망이 되어 버렸네요
기록에 조금만 더 충실 했으면 자료를 어떻게 하던 남겼어야 했는데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현실
지금이라도 부지런히 기록을 남겨야 할듯해서 당분간 지맥은 접어 두고
대간.정맥을 다시해보려 합니다.
물론 쉬운건 없겠지만 대장님은 기록을 꼭 남겨 두시고 잘 보관 하시기 바랍니다.
글 감사드리구요 토요일날 부산에 꼭 오십시요
꿈꾸는 백마강 물결위로 달빛이 곱게
내려앉는다면 금상첨화요
백마강 달밤도 어울릴듯 합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백제의 마지막
장면들을 두루 답습하신 기록을 보자니
머릿속에서 병사들의 창칼활이 허공으로
한바탕 난리가 났습니다.
생생한듯 다가오는 산행기속에서 백제의
혼이 다시살아 나옵니다.
역사의길을 걸으신 방장님 지부장님
고생하셨습니다.
다음 산길은 금북으로 가신다고 하셨죠
금북은 예전보다 등로가 좋아서 진행이 아주 좋으니 여름에 진행 하셔도 괜찮으나
금남길은 여름에 가시면 밤나무 단지 잡풀속에서 고생 하실듯 합니다.
다음 산길을 금남으로 먼저 하시어 부소산성에서 시원한 막걸리 한잔 하시면
딱 좋을듯 ...
금북을 하시려면 독립운동가분들에 대해서 조금 알고 가시면 도움 될듯하구요
글 감사드리며 한구간 따라가고 싶어도 창원지부분들의 발걸음이 무서워 눈치만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