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산서원
경주 가는 길이 가까워졌다.
충주에서 경주에 가려면 옛날에는 대구를 지나서 갔다. 그런데 이제는 영천을 지나서 간다. 상주-영천 고속도로가 생겼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의 목적지는 옥산서원이다. 경주시 안강읍에 있다. 동영천 IC를 나온 차는 28번 지방도를 타고 고경, 안강, 포항 방향으로 달린다. 고경면까지는 영천시고, 안강읍부터 경주시다. 그러므로 안강은 경주의 북동쪽에 위치한다. 생활권은 경주라기 보다 포항이다. 그것은 포항까지 거리도 가깝고, 인구와 경제력도 포항이 더 많고 크기 때문이다.
충주에서 옥산서원까지 2시간 30분이면 간다. 28번 국도에서 좌회전해 옥산리로 들어가는 길에 제초작업이 한창이다. 그러잖아도 좁은 길이 더 좁게 느껴진다. 마을 안쪽으로 가까이 가자 멋진 소나무가 반긴다. 옥산2리 마을회관을 지나면, 길은 두 갈래로 갈린다. 오른쪽으로 가면 옥산서원이고, 왼쪽으로 가면 옥산1리 독락당으로 간다. 우리는 옥산서원을 보고 옥산천을 따라 독락당으로 이동하려고 한다. 옥산서원에서 독락당까지는 700m쯤 된다고 한다.
주차장 주변에 유물전시관이 있는데 문을 닫았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서원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그 대신 옥산천에서 물놀이 하는 아이들을 볼 수 있다. 오늘 낮 최고기온이 35℃까지 올라간다고 하니, 막바지 여름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셈이다. 사실 이번 옥산서원과 양동마을 답사에 땀 깨나 흘렸다. 시내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서원 출입문인 역락문(亦樂門)이 나온다.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에서 나온 말이다.
옥산서원 구인당을 독점하다.
역락문 앞에서 우리는 먼저 옥산서원의 구조를 개관한다. 역락문, 무변루, 구인당, 체인묘가 경사진 공간을 따라 순서대로 이어진다. 이들을 차례로 살펴볼 것이다. 문에 들어서기 전 역락과 관련된 옛 문헌과 기록에 나오는 내용을 설명한다. 역락문이라는 편액 이름은 노수신 선생이 짓고, 한석봉이 글씨를 썼다. 노수신 선생은 ‘도를 찾아오는(望道而來)’ 데서 즐거움을 찾고 있다.
옥산서원에 올 때 마다 답답한 것은 2층 누각인 무변루(無邊樓)다. 1,2층 모두에 폐쇄적인 문이 있기 때문이다. 누각을 통해 전면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 수 있도록 열려있는 게 아니라 닫혀 있다. 강당인 구인당(求仁堂)으로 들어가는 문도 겨우 하나만 개방해 놓았다. 또 무변루가 앞쪽 옥산천을 향하고 있는 게 아니라 강당인 구인당을 향해 있다. 손님을 맞는 게 아니라 등지고 있다. 무변루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아 유감이다.
그런데 무변루 2층에 올라 구인당을 바라보는 모습은 정말 훌륭하다. 무변루, 동서재 그리고 구인당이 만들어내는 사각형의 중정(中庭)이 반듯하다. 그리고 구인당 가운데 마루 뒷문을 통해 보이는 체인문(體仁門)을 보는 맛이 대단하다. 우리는 회원들과 함께 구인당에 오른다. 평상시에는 관광객이 많아 그곳에 올라 내부를 살펴보는 일이 쉽지 않다. 구인당에는 유달리 많은 편액과 현판이 걸려 있다.
당호 현판 두 개, 건물 양쪽 방 위에 붙은 편액 두 개, 역사를 기록한 ‘옥산서원기(玉山書院記)’, 원규(院規), 잠(箴), 전교서(傳敎書), 어제제문(御製祭文) 등 다양하다. 이러한 현판이 많다는 것은 서원의 역사가 오래되고, 명문서원이라는 뜻이다. 옥산서원이라는 당호는 이산해(李山海)와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다. 옥산서원기는 허엽(許曄)이 찬했다. 전교서는 숙종이 내렸고, 어제제문은 영조가 내렸다.
구인이라는 당호는 회재 이언적 선생의 저술인 『구인록(求仁錄)』에서 따왔다. 회재는 사람의 본성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을 인으로 보았다. 그리고 인이 심덕(心德)의 완성(全)이고 만선(萬善)의 근본(本)로 보았다. 구인당이라는 당호를 지은 노수신 선생은 심덕의 온전함인 인을 추구하는 것이 배움의 목표임을 말하고 있다. 방 입구에 있는 양진(兩進)과 해립(偕立)이라는 편액은 명성(明誠)으로 나가고 경의(敬義)를 세움을 말하고 있다.
허엽 선생의 옥산서원기는 옥산서원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 선생이 강학하던 자옥산(紫玉山) 자락 세심대(洗心臺) 옆에 세워졌다. 경주부윤과 경주 유림이 회재선생을 기리기 위해 1572년 8월 사당과 강당 등 40여칸의 당우를 마련했다. 1573년 옥산이라 사액을 받았다. 이곳이 추로지향이 되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기 바란다. 1574년 봄에 성균관 대사성 허엽이 기문을 썼다.
신도비를 통해 본 회재 이언적 선생
구인당 왼쪽으로 돌아가면 문원공(文元公) 회재 이언적선생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처음 행장을 지은 이황에게 의뢰되었으나, 선생의 성덕(盛德)을 한 사람이 기술해서는 안 된다고 해서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기대승(奇大升)이 찬하게 되었다. 글씨는 이산해(李山海)가 썼고, 전액을 쓴 사람은 나와있지 않다. 비석이 세워진 것은 1577년(만력 5) 4월이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도(道)에 가까웠고 남달리 영민하였다. 그리하여 속학(俗學) 이외에 이른바 위기지학(爲己之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추구하고자 하여, 강구하여 밝히고 체득하여 실천하면서 치지(致知)와 성의(誠意) 공부에 힘을 썼다. 27세에 〈오잠(五箴)〉을 짓고 30세에 또 〈입잠(立箴)〉을 지었는데, 그 말이 모두 옛 성현들이 가르침을 남긴 절실하고도 요긴한 뜻이었다. 대개 마음을 보존하고 성찰하며 감정과 욕망을 징계하고 잘못을 고쳐 선으로 옮겨 가는 데에 실제로 종사하는 바가 있었던 것이요 빈말이 아니었다. 파직되어 향리로 돌아와서는 자옥산(紫玉山)에 집을 짓고, 한 방 안에 고요히 앉아 좌우의 도서를 정밀히 연마하고 깊이 사색하기를 오로지 하고 오래도록 지속하니, 소견이 비로소 더욱 친절(親切)해졌다.”
신도비 오른쪽 구인당 뒤에는 사당인 체인묘(體仁廟)가 있다. 체인은 인의 본체와 그 쓰임을 밝히려는 『구인록』의 핵심사상이다. 회재는 『구인록』 3-4권에서 인의 본체와 그 쓰임새(體用)를 경전, 명(銘), 잠(箴)을 인용하여 구체적으로 논술하고 있다. 체인묘 액찬(額讚)에서 노수신은, “인을 몸으로 체득할 때 다른 사람을 다스릴 수 있다”고 말한다.
독락당 둘러보기
옥산서원에서 서북쪽으로 700m 떨어진 곳에 회재의 별장이자 서재였던 독락당(보물 제413호)이 있다. 옥산서원에서 이곳에 가려면 자계천(현재명: 玉山川) 계류를 건너야 한다. 이 맑은 옥류 주변에는 징심대, 탁영대, 관어대, 영귀대 및 세심대 등의 바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작은 규모의 폭포와 용추(龍湫)가 있다. 이 계류를 건너 북쪽으로 가야 독락당에 이를 수 있다.
독락당은 1532년(중종 27) 이언적 선생이 벼슬을 그만 두고 자옥산 자락으로 돌아온 후 거처한 유서 깊은 집이다. 원래는 현재 계정 자리에 3칸의 띠집(茅屋)이 있었다. 뒤에 정혜사 주지의 도움을 받아 옥산정사, 계정, 양진암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언적의 문집인 『회재집』 연보 1532년 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자옥산(紫玉山)에 독락당(獨樂堂)을 지었다. 바로 양좌동(良佐洞)에서 서쪽으로 20리 되는 곳이니, 선생의 고정(考亭)이다. 선생이 젊어서부터 자옥산의 산과 골짝이 아름답고 시내와 못이 맑은 것을 사랑하였는데, 이때 와서 비로소 시냇가에 수십 칸의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가난해서 비용을 마련하지 못하였으므로 오랜 뒤에야 완성하고, 독락당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회재는 이곳에 살며 〈임거십오영(林居十五詠)〉〈지비음(知非吟)〉 같은 시를 지었다. 〈임거십오영〉은 독락당 숲속에 살며 즐기는 정서와 풍류를 읊은 15편의 시다. 그 중 ‘계정(溪亭)’에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한가한 삶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계정은 현재 물을 향해 있는 사랑채로 옥산천을 내려다볼 수 있다.
가까운 숲 그윽한 산새 소리 기쁘게 들려 喜聞幽鳥傍林啼
초가 정자 새로 짓고 작은 시내 굽어보네. 新構茅簷壓小溪
홀로 술을 마시면서 밝은 달을 맞이하고 獨酌只邀明月伴
한 칸 집에 흰 구름과 함께 깃들어 산다. 一間聊共白雲棲
대청마루 2칸으로 이루어진 계정(溪亭)은 본재인 양진암(養眞菴)과 ㄱ자형 건물을 이루고 있다. 계류 쪽으로 대청을 내어 자연을 건물 안으로 끌어들였다. 이것은 인간과 건물 그리고 자연이 하나임을 보여준다. 계정과 붙어있는 방에는 인지헌(仁智軒)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또 다른 시 ‘독락(獨樂)’에서는 산새, 물고기와 어울리며 홀로 살아가는 즐거움을 노래했다. 현재 독락당은 계정 앞 건물로 옥산정사(玉山精舍)라고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