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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및 반민주 민족의 반역자
김창룡 과 유학성.안현태 파묘 퍼모먼스 행사
장소: 대전 현충원
서울에서 대전현충원으로 출발시간:
6월 5일 오후 3시출발- 강남터미널 역 8-1번 출구
행사 시간 6월 6일. 9시~12시 판넬전시 및 홍보
10:40 규탄대회
11:30~ : 퍼포먼스
국립묘지법 개정 및 반민족·반민주행위자 김창룡, 안현태 묘 이장 촉구대회
∎장소 : 대전국립묘지 입구 다리 (현충교)
∎일시 : 2014년 6월 6일(목) 오전 9시 ~ 12시
∎주관 :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주최 :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전국유족회, 대전산내사건 희생자유족회, 평화재향군인회, (사)518구속부상자회 대전충청지부
1. 가두전시
∎시간 : 오전 9시 ~ 12시
∎내용 : 현수막 및 김창룡 그림판 전시
2. 국립묘지법 개정 및 김창룡 묘 이장 촉구대회
∎시간 : 오전 10시40분 ~ 11시
∎사회 : 가명현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운영위원
- 인사말 : 이규봉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 발 언 : 김종현 대전산내사건 희생자 유족회 이사장
최사묵 평화재향군인회 공동대표
김병국 (사)5.18유공자동지회 대전충청지부장
이대식 대전민중의힘 상임대표
- 성명서 : 이순옥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장
- 구호 : 사회자
3. 퍼포먼스
∎주관 : 평화재향군인회
∎장소 : 대전국립묘지 김창룡 묘(장군1묘역 69호) 주변
∎시간 : 오전 11시30분 ~ 11시40분
∎내용 : 묘지 이장하는 시늉
4. 마무리 참배 및 헌화
∎시간 : 오전 11시50분 ~ 12시 10분
∎장소 : 김구선생 모친 곽락원 지사(애국지사묘역 771호)부민관 의거 조문기 지사(애국지사묘역 3-705)
∎사회 : 가명현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운영위원
∎헌화 : 박광옥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사무국장
∎추도사 : 유조웅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운영위원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 김 창룡 누구인가? -----
김창룡 金昌龍│1916~1956
일본군 헌병 오장
1916년 7월 18일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났다. 사립 덕성보통학교와 영흥공립농잠실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인이 경영하는 가다쿠라(片倉)제사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했다. 만주국 신징(新京)의 만주철도회사로 옮겨 창춘(長春)역 직원으로 근무하다 일본관동군 헌병대 군속으로 들어갔다. 1941년 4월 신징에 있는 관동군 헌병교습소에 입소해 교육을 마친 후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하며 주로 조선과 중국의 항일조직을 정탐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1941년 10월 중지군(中支軍)의 아마카스(甘粕)사단 파견헌병대에 배속되었으며, 소만(蘇滿) 국경 부근에 파견되어 중국공산당과 소련에 대한 첩보활동에 종사했다.
1943년 싱안베이성(興安北省)을 중심으로 지하공작을 펴던 중국공산당의 거물 왕진리(王近禮)를 검거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관동군 헌병대는 왕진리를 이용한 역공작으로 소만 국경지대에서 활동하던 9개 지하조직을 색축하고 조직원 50여 명을 체포했다. 이 공로로 헌병 오장(伍長)으로 특진했다. 1943년 9월 만주리(滿洲里)헌병대와 면도하(免渡河)헌병대분견(分遣)을 겸무(兼務)했다. 2년 동안 공장지대를 중심으로 암약하면서 50여건이 넘는 항일조직을 적발했다.
일제가 패망하자 곧바로 고향에 돌아왔다. 1945년 11월과 이듬해 4월 소련군정에 의해 거듭 전범(戰犯)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결국 탈출에 성공하여 월남했다. 월남 직후 만주군 출신으로 국방경비대 사령부 부관으로 있던 박기병 소위의 추천으로 국방경비대 제5연대에 사병으로 입대했다. 가혹한 훈련에다 관동군 헌병 출신이라는 이유로 연대의 경비사관학교 지원 추천을 받지 못한 불만이 겹쳐 근무지를 이탈했다. 다시 박기병이 근무하던 국방경비대 제3연대의 사병으로 재입대해 정보하사관으로 복무하던 중, 만주군 대위 출신인 부연대장 (金白一)의 추천으로 1947년 1월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에 3기로 입교하였다. 단기교육을 마치고 그해 4월 소위로 임관했으며, 국방경비대 제1연대 정보주임 보좌관으로 임명되어 일제 경찰과 헌병 출신들로 정보소대를 편성하고 연대 내외의 사상사찰을 전담했다. 이때부터 ‘숙군(肅軍)’사업을 벌여 국방경비대 제7연대장으로 부임하던 이병주를 검거한 것을 시작으로 국방경비대 내부에 침투한 좌익세력을 숙청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1948년 1월 중위로 진급하고 정부수립과 함께 대위로 진급했다. 8월 말 육군본부 정보국에 배속되어 방첩대(CIC)의 전신인 정보국 3과(SIS : 특별조사과) 과장인 김안일(金安一) 소령과 함께 숙군을 주도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숙군사업을 본격 전개해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 이재복, 박정희 등을 검거하여 군내의 좌익세력을 대거 색출 처벌하는 공을 세워 소령으로 특진했다. 1949년 4월에는 남로당 조직부 책임자인 이중업(李重業)을 검거해 육군참모총장 표창을 받았다. 그해 7월에 막을 내린 숙군작업에서 군병력의 5%에 상당하는 4749명의 장병이 처벌되었다. 이 과정에서 극단적인 반공의식과 성과주의에 사로잡혀 무고한 사람들을 고문·조작 등의 방법으로 좌익으로 몰아 비난을 받았다.
1949년 6월 육군정보국 방첩대 대장으로 임명되었고 7월 중령으로 진급했다. 방첩대장으로 임명된 직후인 6월 26일 김구 암살사건이 일어나자, 범인 안두희를 범행 당일 특무대 영창으로 이감해 특별 배려하면서 배후 은폐에 가담했다. 안두희의 감형과 군 복귀에 직접 관여하였으며 대령으로 예편한 뒤에도 후견인 역할을 자임했다. 1949년 10월 우익단체인 서울시 동대문 민보단(民保團)의 단장 고희두가 사망한 사건과 관련해서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제3과 이등중사 도진희가 징역 3년형을 선고받자 상관으로서 문책을 받아 공군본부로 좌천됐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8월 경남지구 방첩대(CIC)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뒤 10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취임했다. 10월 말 대령으로 진급해 서울을 중심으로 부역자 처벌을 주도했으며, 그로 인해 이승만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군·검·경 합동수사본부는 야당의원들로부터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만들어졌으며 많은 사건을 조작하여 선량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비판을 받아 1951년 5월 해체되었다. 곧바로 육군 특무부대장으로 부임한 후 이승만 대통령의 각별한 지원 아래 각종 공안사건을 처리했다. 1953년 5월 육군 준장으로, 1955년 1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정보장교로 시작해 특무부대장으로 재직할 때까지 수많은 공안사건을 처리했지만, 상당 수는 정치적 목적이나 개인적 성과주의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1949년 인민해방군사건, 1950년 여간첩 김수임사건, 대구 관(棺)사건, 부산 금정산 공비위장사건, 1953년 국제간첩 정국은(鄭國殷)사건, 동해안 반란사건, 1955년 개천절 이승만암살음모사건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육군특무부대장으로 군대 내의 후생차량 부정과 군장병 월동용 원면 불법 매각사건을 조사하던 중, 1956년 1월 30일 출근길에 과거 부하였던 육군 대령 허태영의 지시를 받은 특무부대 출신자들의 저격으로 사망했다. 사망 당일 육군 중장으로 추서되고 2월 3일 최초의 국군장으로 장례식이 치러진 뒤 안양의 사설 묘역에 묻혔다. 묘비 앞면의 묘주명(墓主名)은 이승만 대통령이 썼으며, 묘갈명(墓碣銘)은 사학자 이병도(李丙燾)가 지었다. 비문에 이르기를 “육군본부 정보국 방첩과장에 취임하여 이래 누차 숙군을 단행하여 군의 육성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특히 동난 중에는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으로 맹활동을 개시하여 간첩오렬 부역자 기타를 검거 처단함이 근 2만 5천 명 전시 방첩의 특수 임무를 달성하였다. …… 그는 이렇듯 나라에 유공하였다. 그 사람됨이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또 불타는 조국애와 책임감은 공사를 엄별하여 직무에 진수하더니 급기야 그 직무에 죽고 말았다. 아 ― 그는 죽었으나 그 흘린 피는 전투에 흘린 그 이상의 고귀한 피였고 그 혼은 기리 호국의 신이 될 것이다.” 라고 했다.
1998년 2월 특무부대의 후신인 국군기무사령부의 노력으로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됐다. 1954년 11월 미국 대통령이 수여하는 공로훈장을, 1955년 12월 정부로부터 은성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참고문헌]
「김창룡 묘갈문」(1956.2.3) ; 「김창룡 비밀유고①~⑤」(京鄕新聞, 1956.2.3~2.7) ; 동아일보 1954.12.1, 1955.12.27, 1956.1.3, 2.1 ; 한국전쟁사: 해방과 건군(1968) ; 韓國戰秘史(1977) ; 창군전사(1981) ; 創軍(1984) ; 陸士卒業生(1984) ; 군과 나(1989) ; (실록) 지리산(1992) ; 군번 1번의 외길 인생(1993)
출 처: http://blog.daum.net/jen-koje/52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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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사에서 일제강점기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도 문제이지만, 일본이 강제로 점령하는 시기에 같은 민족끼리 너무 큰 아픔과 고통을 주고, 그 일로 인해 민족의 분열과 가치관, 그리고 국가의 원칙이 무너졌다는 사실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에 충성을 다했던 친일파를 대거 등용했습니다.
정부수립 후에 경찰은 일본 경찰과 헌병 출신을 임명했고, 육군 총장과 합참의장을 비롯한 군 조직에는 일본군과 만주군 장교를
등용해,이승만 정권 = 친일 내각이라는 공식을 성립시켰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일제강점기에서 이들이 행했던 극악한 죄를 사죄하는 자도 없었고, 오히려 당당하게 자신의 친일 행적을 고발했던 사람을 좌익으로 몰아 일제강점기처럼 고문하고 투옥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승만을 비롯한 친일파 정권은 자신들의 정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온갖 불법과 비리를 자행했으며, 그중에서도 김창룡은 이승만의 앞잡이로 그 역할을 너무나 완벽하게 수행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북풍이라고 부르는 정치가 있습니다. 국내 정치 문제가 있을 때, 북한에서 간첩이 내려오거나 북한의 위협이 있던지,
남북 문제가 경색되어 온 국민의 관심이 북한 문제에 휩쓸려 정치 현안이 소멸하는 현상입니다. 이런 일은 위정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난국을 해결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었습니다. 북풍의 원조는 이승만과 김창룡입니다.
1952년 5월24일 무장공비가 부산 금정산에 출현하여 총격을 가합니다. 이승만은 부산도 위험하다는 핑계를 대고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국회를 강제로 해산시키기 위해 5월26일 직선제를 반대하며 내각제를 주장하던 야당 의원 50여 명을 헌병대가
연행합니다.
이런 일련의 파동을 부산정치파동이라고 하는데, 무장공비는 김창룡이 대구형무소 중형수에게 석방 조건으로 공비로 위장시킨 후
사살한 가짜였으며 계엄령을 선포하기 위한 구실이었습니다. 계엄령을 통해 이승만은 전쟁에 대한 책임과 국민을 버리고 도망친
문제,대통령 재선 불안을 일거에 해소시켰습니다.
부산정치파동 이후에 이승만은 친일파 백선엽을 육군총참모장으로 임명했습니다.
[韓國/정치] - 일본특수부대출신 백선엽 장군이 한국의 영웅?
김창룡은 이전에도 이와 같은 유사 사건을 조작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조작한 '혁명의용군' 사건은
이승만과 함께 친일파들이 어떻게 부정과 부패 속에서 권력만을 유지하려고 애썼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
소위 혁명의용군 사건은 그 주모자 최능진, 오동기, 서세중, 김진섭 등이 남노당과 결탁하여 무력혁명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고
김일성 일파와 합작하여 자기들 몇 사람이 숭배하는 정객을 수령으로 공산정부를 수립하려고 공모했다"(동아일보 1948. 10.
23)
여기서 우리는 오동기라는 인물을 주목해야 합니다. 오동기 소령은 일제강점기 중국으로 건너가 강무당에 입교(낙양군관학교
전신)하였고, 상해사변시 제19로군에 소속되어 일본육전대와 항일전을 펼쳤습니다. 중일전쟁 때는 한국인 2개 대대를 조직하여
일본군과 싸우다가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고,해방 이후 경비 사관학교를 거쳐 제14연대장으로 부임하였습니다.
오동기 소령은 연대장으로 부임한 후 부대 내 식량급식의 부당함을 해결하기 위해 부식을 공개 입찰하였고, 장교들이 착복하던 부식비를
사병들에게도 균등하게 지급했습니다. 또한, 여수시내에 부대원의 외상값을 조사하여 모두 갚아주었고,철저하게 군인을 훈련
시켰습니다.
이런 진정한 군인을 김창룡은 왜 공산당으로 지목하여 체포했을까요? 바로 오동기가 항일전을 펼쳤던 인물이고, 군대 내 부정부패를
척결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친일파 김창룡과 채병덕에게 오동기와 같은 군인은 제거해야만 자신의 정당성을 찾을 수 있었고, 이승만은 그
후에 벌어지는 여수반란 사건을 김구와 함께 엮으려고 했었습니다.
김창룡은 일제강점기에서는 일본의 앞잡이로 이승만 정권에서는 독재 앞잡이 역할을 너무나 완벽하게 수행한 대한민국 최고의 앞잡이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김창룡은 일제강점기에는 조선 독립군을 체포,구금하는 악질 헌병으로 살았고 해방 이후에는 민족 지도자 김구 선생을 암살하는
지령을 내렸습니다. 법적으로 물적 증거가 없다고 과연 그가 김구 암살의 배후가 아닐까요? 안두희는 병상에서 지령에 가까운
암시였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안두희는 김구 선생 암살 이후 승승장구하여 대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민족의 지도자를 암살한 범인치고는
너무 성공적으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김창룡에게 공과를 물어 그의 일제강점기 헌병 경력을 덮어두어야 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공이 무엇입니까?
해방이후 이승만을 위해 진정한 군인을 빨갱이로 만들어 체포한 일이 공입니까? 아니면 죄수를 공비로 변장시켜 사살하고 계엄령을
선포하게 한 일이 공입니까?
그가 육군 최초의 국군장으로 치렀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김창룡은 월남 후 국방경비대 (육군의 전신) 제5연대 (부산)에 사병으로 입대했지만, 훈련이 힘들다고 탈영했던 인물입니다. 탈영한 인물이 악독한 행동으로 부하에게 암살되었는데 국군장이라니 너무 어이가 없습니다.
반민족행위처벌법(1948.9.22 법률 제3호)에는 “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에 대해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고, “헌병, 헌병보, 고등경찰의 직에 있었던 자는 본법의 공소시효경과 전에는 공무원에 임명될 수 없다”
김창룡은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르면 결코 특무대장을 할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를 중용했고, 김구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던 사람이 김창룡 장례식에는 참석했습니다.
참고 자료및 문헌 및 이미지 출처: 국가기록원,MBC PD수첩,정지환 기자의 역사추적기,
반민족연구소 '청산하지 못한 역사' 박준성 '김창룡과 그의 묘갈',동아일보,조선일보,서울신문,
김창룡에 대한 글을 쓰면서 자료를 찾으면 찾을수록 어떻게 이런 인물이 국군장으로 장례를 치렀고, 국군기무사에 의해 대한민국 호국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현충원에 안장되었는지, 피가 거꾸로 솟구쳐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이승만이라는 인물이 정권을 잡고 친일파를 숙청한 사례가 없었습니다. 실형 선고 7명,실제 형집행 0명이었습니다. 프랑스는 어떠합니까? 사형집행만 3.800명이었습니다.
친일파를 숙청해야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친일파에 의해 숙청을 당했고, 이들은 이런 잘못된 사실을 숨기기 위해 권력을 잡으려고
부정과 부패, 무력과 독재를 행사하였습니다. 그런 기득권 세력들이 여태껏 대한민국의 상위 1%를 장악하고 사회의
비리와 부패,권력싸움,재벌 횡포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오동기는 일본 앞잡이 헌병에게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해방이 된 조국에서 대한민국을
위해 진정한 군인으로 살다가 빨갱이로 몰리고, 다시 고문당하고 투옥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난 속에 죽었습니다.
오동기와 같은 항일투사를 체포 고문했던 일본 앞잡이 헌병 김창룡은 해방되고도 살아남아, 항일투사들을 빨갱이로 둔갑시켰고, 독재자 이승만의 앞잡이로 살다가 부하의 손에 암살되고도 국군장으로 호화롭게 죽어서 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드골은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를 엄중하게 처단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프랑스를 배신하는 프랑스인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조금만 어려워도 대한민국을 배신하는 한국인이 무수히 많아질 것이다"
출 처: http://impeter.tistory.com/1505?top3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