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서 엘리사의 사환은 현실의 여러 가지 고통스런 여건에 휩싸여 불안과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아람 나라와 전쟁 중이었는데 아람 왕은 어떻게 해서든 이스라엘을 점령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아람 왕은 군대를 거느리고 이스라엘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시리아 임금이 이스라엘을 공격할 계획만 세우면 그 계획이 샅샅이 이스라엘 왕에게 전달되어졌습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 군대가 방어 계획을 철저히 세우므로 정상적인 공격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람왕은 그들중에 혹시 첩자가 있는지 요즘 같으면 도청 장치가 혹시나 설치가 됐는지 아마 했을 겁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이스라엘의 한 선지자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 선지자가 아람 왕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알고 그것을 이스라엘 왕에게 말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그렇게 대비책을 세운다는 그런 보고였습니다.
이 보고를 들은 아람 왕은 병사를 풀어서 도단성에 머물고 있는 엘리사를 체포하기 위해서 도단성을 포위하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엘리사의 종이 눈을 떠서 밖을 바라봤는데 자기들이 머물고 있는 도단성을 아람 군대가 말과 병거를 동원해서 겹겹이 포위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게 된 엘리사의 종은 허겁지겁 엘리사에게 달려와서 "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면서 그 상황을 엘리사에게 말하게 됩니다. 이 보고를 들은 엘리사는 이 종에게 하는 말이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이 엘리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종의 눈을 열어 주심으로 그 종이 다시 바라봤을 때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호위하여 둘러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육신의 눈으로만 바라보면 불안해집니다. 곧 현실만 바라보면 두려워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엘리사의 사환은 현실의 여러 가지 고통스런 여건에 휩싸여 불안과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는 아침에 눈을 떠서 밖을 바라보니 자기들이 머물고 있는 도단성을 아람왕이 보낸 아람 군대가 말과 병거를 동원해서 겹겹이 포위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엘리사에게 달려와서 "아, 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라고 하였습니다(왕하6:15). 이 구절은 엘리사를 수종 하던 사환이 맛보았던 불안과 공포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에게 "두려워 말라"(왕하6:6)고 했습니다. 사환의 두려움은 무엇으로 비롯되었습니까? 본문 말씀에 보면 "그 성은 엘리사가 잠자고 있는 성이요, 그 사환이 잠자고 있는 성입니다. 다시 말해 엘리사의 사환은 아람 군대가 자신의 삶의 터전을 파괴하려고 에워싼 것을 보고 두려웠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의 두려움은 어디에서 생깁니까? 자기의 삶의 터전이 파괴된다고 생각이 되면 두려움을 느낍니다. 가난, 질병, 가정 파괴, 전쟁을 두려워하는 것등이 모두 삶의 여건을 파괴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전쟁이 일어나서 더 잘 살게 된다면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경제가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이익을 보는 자들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곧 현실의 상황을 보는 시각에 따라 불안이 옵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불안은 반드시 환경 탓만은 아닙니다. 불안과 공포는 환경의 산물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 누구 나가 맛보는 이러한 불안과 공포가 결단코 현실의 괴로운 환경 때문에 일어나는 산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환경의 산물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오는 부산물인 것입니다.
똑같은 곤고와 고통과 괴로움에 직면했어도 어떤 사람은 마음이 평안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엘리사와 그 사환이 같은 환경,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엘리사의 사환만이 아람 군대에게 포위된 것이 아니라 엘리사 자신도 포위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 엘리사는 불안하지 않았습니다. 두렵지 않았습니다. 다만 엘리사의 사환만이 불안과 공포와 답답함을 맛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갈릴리 바다를 걸어 주님을 향해 가던 베드로는 자기를 덮쳐 오는 풍랑과 바람을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만 물에 빠지게 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행12장에 나타나는 베드로의 모습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헤롯의 칼에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절대 절명의 순간에도 베드로는 감옥에서 편안히 잠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보는가? 거기에 따라 어떤 사람은 평안을 소유하며 어떤 사람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도단 성을 포위하고 엘리사와 엘리사의 사환을 죽이려 했던 아람 군대는 그들 모두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같은 위협, 같은 두려운 환경 속에서도 문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각 차이로 인해 엘리사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그의 사환은 불안과 공포에 빠지게 되였습니다.엘리사의 사환은 아람 군대의 많은 군사와 병거를 보았습니다.
이 말은 현실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에, 육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에 사람들은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아람 군대와 같은 병마와 실패와 가난과 절박한 환경을 바라보며 견딜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무엇이 불행합니까?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는 것은 불행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마음을 안정을 얻지 못하고 불안과 공포의 검은 그림자에 가리워져 햇빛을 보지 못하고 사는 나무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불행인 것입니다. 곧 우리의 심령과 정서에 상처와 고통을 주는 이 불안과 공포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맛보는 현대적인 불행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아람 군대가 에워싸도 불안하거나 두렵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영적인 시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곧 그는 영안이 환하게 열려서 자기를 지키고 보호해주기 위해서 자기를둘러싼 하늘의 천군 천사와 불만과 불 병거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곧 하늘의 천군천사를 텅해 자기를 보호하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바라보는 신령한 안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사환을 보십시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천군 천사가 아니라 오직 아람 군대의 말발굽 소리와 군대의 수였습니다.
2.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 당면한 현실을 육신의 눈으로만 바라보시지 마시고 영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곧 현실적인 안목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지 마시고 신령한 눈을 떠서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의 아무리 어려운 곤경의 배후에서도 나의 고통과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를 에워싸고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보게 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왕하6:16)고 하였습니다.
엘리사는 영적인 눈으로 상황을 바라볼 때에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아람 군대 보다 하나님의 천군 천사가 더 우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영적인 눈으로 성경을 읽어야 하나님께서 지금 이 세대를 향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늘의 천군 천사를 보내셨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시각을 가지고, 믿음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 볼 때에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생활 곳곳에서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위를 바라보는 눈,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보는 눈,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와 손길을 발견하는 신령한 눈을 뜨는 것이 이 시대에 우리 성도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갗추어야 할 무장입니다.
3.그러면 어떠할 때 영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을까요? 1)믿음이 있을때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작가 버나드 쇼우는 뛰어난 유머와 기지를 가진 사람입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그에게 "선생님! 어떤 사람이 낙천주의자이고, 어떤 사람이 염세주의자입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버나드 쇼우는 이에 말하기를 "자, 여기에 내가 한 컵의 물을 반만 먹고 놓아두었다고 합시다.
이때 그 반정도 남은 물 컵을 바라보고 '아직도 반이나 남았는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낙천주의자이고, '반밖에 안 남았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염세주의자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낙천주의자와 염세주의자는 같은 물 컵을 바라보지만 생각하고, 표현하고, 대처하는 방법이 전혀 다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행복해지시길 원한다면 낙천주의자가 되십시오. 여러분이 만약 염세주의 적인 사람이라면 아무리 돈을 쌓아 놓고, 아무리 젊음을 자랑한다고 해도 여러분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염세적인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사람은 환경이 어떻든 마음속에 불안과 공포를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인생의 행복을 보장하는 이 낙천적인 시각이 곧 믿음의 시각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기 이 염세주의적인 시각이 불신앙적인 시각인 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낙천적인 시각 곧 믿음의 시각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믿음의 시각이 있을 때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합시다. "너희가 믿을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요한복음 11장에 나사로의 부활사건이 나옵니다. 나사로가 죽은지 사흘이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가 사는 베다니 동네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본 마르다가 예수님을 원망하며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우리은혜교회가 부흥하리라는 것을 믿습니까?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이루어 지리라는 것을 믿습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했습니다. 믿음은 보지 못한 것들을 증거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복음서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질문하십니다. "믿느냐" "네 믿음대로 되리라"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돌을 옮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저기에서 수군거립니다. "이미 죽은지 사흘이나 되었고, 이미 무덤에서는 냄새가 나는데 무엇하러 돌을 옮기라는 거야" 마르다도 역시 같은 생각으로 "주여 죽은지가 이미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역사를 보리라고 하였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미국의 "헤리"라는 사람은 방광암에 걸렸습니다. 의사는 얼마 못산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믿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기도하는 가운데 병에서 회복되어 건강해질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말하고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후 실제로 그 병이 다 나았다고 하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기적은 믿음의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너무나 몸이 약하여 곧 죽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17세 때 그리고 22세 때 등 모두 세 번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뻔하였습니다.
19세 때 천연두에, 20세 때 늑막염에 걸렸습니다. 35세 때에는 급성 이질에 걸려 죽을 고비를 또 넘겨야 했습니다. 43세 때에 치아가 거의 못 쓰게 되어 고통을 당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 주시고 항상 같이 하여 주시기에 사명이 있다고 늘 자기가 자기를 믿어 주었습니다. 그는 43세인 1775년에는 미국 혁명군의 총 사령관이 되어 독립군을 지휘하여 승리함으로써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습니다. 12년후 그는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죠지 워싱톤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주셨다는 확신의 믿음은 이처럼 그 사람을 머릿돌로 만들어 놓고 맙니다. 역사상 큰 일을 하였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이 자기를 특별하게 선택하여 주셨음을 알고 그렇게 받아 드리고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살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고난속에서도, 실패속에서도 어려움속에서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성령이 충만할 때입니다. "우찌무라 간조"라는 유명한 일본의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기독교인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의 것을 가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의 것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세상이 그를 업신여겨도 그는 세상을 이길 힘이 없으며, 깨끗하게 되기를 힘써도 그는 결코 깨끗해질 수 없다. 그는 성령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불신자보다도 못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곧 성령충만하지 아니하면 영안이 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엘리사의 시종처럼 문제와 사건을 만나면 불안하고 염려하다가 쓸어질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엘리사의 시종은 영안이 열리지 않아서 도단성을 에워싼 아람나라의 군사와 병거들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영안이 활짝 열려서 그의 시종과 달리 도단성을 에워싸고 있는 또 다른 군사들과 병거들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늘나라와 천군천사들이요 하늘나라의 불말과 불병거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영안이 열린 엘리사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그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경에 보면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감을 갑절이나 구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한 대로 엘리야의 성령의 영감을 갑절로 받은 사람입니다. 곧 엘리사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엘리사가 이처럼 충만할 때 또한 그는 영안이 활짝 열리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게하시가 보지 못하였던 하늘나라의 천군천사들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왕하 2:7-15, "선지자의 생도 오십인이 가서 멀리 서서 바라보매 그 두 사람이 요단 가에 섰더니 엘리야가 겉옷을 취하여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육지 위로 건너더라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가로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고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가지고 돌아와서 요단 언덕에 서서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저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맞은편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저를 보며 말하기를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의 위에 머물렀다 하고 가서 저를 영접하여 그 앞에서 땅에 엎드리고"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이 성령충만하여 말씀을 증거합니다. "너희들이 십자가에 매어 죽인 예수가 메시아, 그리스도이시다"라고 증거를 합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이 큰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을 스데반을 향하여 돌을 던집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이처럼 세상의 핍박을 두려워 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길수 있습니다.
3)기도할 때입니다. 왕하 6:14-16,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저희가 밤에 가서 그 성을 에워쌌더라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찌기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왕하 6:17,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사가 하나님께 그의 시종의 눈을 열어주시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리할때 엘리사의 시종도 영안이 활짝 열려서 하늘나라의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한 것을 보게됩니다.
그렇습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엘리사의 시종처럼 현실만 보게 됩니다. 문제만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로인해서 낙심하고 불안해합니다. 두려워합니다. 그러다가 절망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이처럼 두려움과 공포와 실패로 온통 에워 싸일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영안을 뜨지 못하면 오늘 우리도 엘리사의 사환처럼 공포에 떨고 절망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영안을 뜨게되면 엘리사처럼 절망도, 두려움도 없이 살게됩니다. 오히려 위기의 상황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기회를 얻게됩니다. 결과적으로는 더 기쁘고 신나는 신앙체험을 하게 됩니다.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식물학자요,농부인 조지 워싱턴 카버는 흑인노예 출신이었으나 불우한 환경을 신앙으로 극복하여 위대한 식물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땅콩 한 알에서 수레의 차축에 쓰이는 기름과 화장품 인쇄잉크 초 비누,샴푸등 무려 3백여가지의 상품을 개발, 세계문명에 기여했습니다.
그가 땅콩을 보며 늘 생각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땅콩에 어떤 자연의신비를 담으셨을테니 이것을 연구해보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도하면서 땅콩에 담긴 하나님의 신비를 캐나갔습니다.
하루는 그가 상원 의원들 모임에 초청을 받고 예정된 10분동안 연설했는데 이 연설에 감동을 받는 상원의원들이 계속 간청 무려 1시간30분동안 명 연설의 요지는 "땅콩 한 알에 담긴 하나님의 무한한 창조섭리"였습니다.
그렇습니다.사업하는 사람도,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도 이처럼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분야에서 크게 성공할 수 있는 영적지혜와 축복의 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곧 기도하면 영안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엡1:16-22,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인도의 성자 썬다싱(1889-1929?)은 원래 힌도교도였지만, 간절히 하나님을 찾다가 신기하게 예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그는 인더의 펀잡 지방의 람퍼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힌두교의 일파인 시이크교를 독실히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가까운 미숀 학교에 다니면서도 몹시 반감을 가지고 선교사들에게 돌을 던지고 오물까지 끼엊으며 반대하였습니다. 어느날 3일동안 두문 불출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왜냐하면 힌두교에서 참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심령에 만족과 평안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당신은 정말 계십니까? 정말 당신이 계시다면 그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하나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하고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람퍼시를 지나가는 기차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듣고 내일 아침 5시까지 응답이 없으면 그 시간에 지나가는 급행열차에 투신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당신이 정말 계시다면 내가 죽기전에 그 증거를 보여 주십시요"하고 기도했는데 5시 15분 전에 밝은 빛이 방안을 환하게 비치더니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서 힌두스탄 말로 "너는 언제까지 나를 원망하려느냐? 나는 너를 구원하러 왔다. 너는 바른 길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구나 내가 네게 바른 길을 가르쳐 주겠다. 내가 바로 그 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요14:6).
그리하여 그 다음부터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러 다녔습니다. 그 무시무시한 티벳나라에 15차례나 들어가 전도를 다니면서 많은 핍박을 받고 많은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한번은 썬다싱이 병원에서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윌램"이라는 소년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더니 그 소년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본인도 놀라고 의사들도 놀랐습니다.
그러자 이곳 저곳에서 환자들이 몰려와 에워 쌌습니다. 이때 썬다싱은 복음을 전파하여 영혼구원하는 일을 못하게 될까봐 신유의 은사를 포기하고 전도하러 떠났습니다. 썬다싱은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고 묻는 이에게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은 오히려 쉽습니다.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라고 대답하곤 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기적들이 그의 전도 생활에 나타났습니다. 몇번이나 매를 맞고 죽은 줄 알고 갔다 버리면 살아나곤 했습니다. 또 죽이려고 모여 들다가도 흰옷 입은 천사들이 둘러 싸고 있는 것을 보고 도망가기도 하였습니다. 한번은 물없는 우물에 거꾸로 집어 던졌습니다. 그 안에는 이미 죽은 송장이 코를 찌를 듯이 악취를 풍기고 또 해골이 다된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서 굶어 죽으라고 집어 넣고는 뚜껑을 닫고 자물쇠로 잠그고 대라마승이 열쇠를 가지고 가 버렸습니다. 삼일이 지나서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우물 위에 철거덕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뚜껑이 열리며 밧줄이 내려 왔습니다. 그 끝에 달린 고리에 한발을 딛고 줄을 잡았더니 우물 밖으로 끄집어 내 주더랍니다.
그런데 나와 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후에 라마승이 잡아다가 열쇠는 자기 밖에 없었는데, 누가 끄집어 내 주었느냐고 묻더니 모른다고 하니까 다른 곳으로 내어 쫓아 버리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수없는 기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말년에는 기도하다가 영계에 들어가고 천국과 지옥을 다 보고 예수님과도 대화하고 천사와도 대화하는 경지에 들어 갔습니다. 그러다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르게 죽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렇게 썬다싱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다가 예수님을 만나 평생 전도하다가 티벳에서 전도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썬다싱이 주님을 위해서 이처럼 귀하게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기도하다가 영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찾고 만나뵙기를 원했던 참 하나님이 그가 핍박했던 예수그리스도이신 것을 바로보았기 때문입니다.
고로 오늘 우리는 문제와 사건을 엘리사의 시종처럼 육신의 눈으로만 바라보면 불안해집니다.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낙심하게 되고 절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엘리사처럼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주님의 함께하심과 그분의 도우심의 역사를 바라볼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더욱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을 더욱 힘입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역사를 위해서 더욱 기도해야 하겠습니다.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