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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광주 5월, 문학적 범주와 위의
『5월시』동인 9권의 시집 중심
박철영
문학이나 정치는 과거나 현실보다 미래를 말하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과거의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하여 사회적으로 타당한 국가적 합의를 이뤄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현대사에서 엄청난 상처를 안고 있는 ‘1980년 광주의 5월’을 외면하고서는 미래를 향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사실 오랜 세월 불온한 오명을 쓰고 억눌려 살아왔던 사람들이 겪어온 세월은 참혹했다. 그나마 정권이 바뀌면서 조금은 나아졌다 하지만, 당한 사람들의 피멍 든 가슴속 원한과 울분은 치유된 것이 아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80년 당시를 ‘광주폭동’이라거나 ‘광주사태’라는 불온한 오명을 벗고 현재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명正名하여 불려지고 있다. 지난한 시간을 견디며 참아온 80년 광주는 군부에 의해 광기와 살기로 가득한 죽음의 도시였다. 그런 사회 환경에서 뜻있는 사람들이 자유와 정의를 생각하며 참된 문학을 통해 ‘80년 광주 정신’을 실현하고자 『5월시』 동인(나종영, 김진경, 박몽구, 이영진, 박주관, 곽재구, 윤재철, 최두석, 나해철, 이영진, 강형철)을 결성하게 된다. 1981년 뜻을 모아 세상에 조그만 빛과 희망이 되고자 했던 사람들! 그들은 광주 안팎에서 발생한 잔혹한 학살과 처절한 항쟁을 눈과 몸으로 겪었고 긴박한 기억은 선명한 시간으로 가슴에 담았다. 사실 ‘광주민주항쟁’은 전두환 군부 세력이 정치 세력화를 통해 집권을 위해 획책한 사건이다. 군을 동원해 일방적으로 광주 시민에게 참혹한 폭력과 끔찍한 학살을 자행했다. 그 암담한 시간을 겪으며 광주시민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회복에 있기에 군부 독재에 대한 항쟁 의지가 발현된 것이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의 미래는 민주주의의 올바른 실천이란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그런 민중적 각성의 시간을 함께한 『5월시』 동인들의 40여 년의 한결같은 의지로 작금에 이르러 일곱 번째의 동인 시집과 두 번의 ‘오월 판화집’ 발간을 통해 지속적인 사회 변화에 추동적 역할을 감당했다. 그들은 문학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했지만, 워낙 견고하게 구축된 학살 세력들의 세상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그 모순적 근원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을 구성하고 있는 국민의 의식에 있다는 것을 통감하였다. 『5월시』동인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학적 물음으로 “우리가 이땅에 내렸다고 생각하는 삶의 뿌리는 도대체 누구의 뿌리이며 누구의 삶인가? 분단을 수락한 상태에서 우리가 이룩하는 삶이란 근본적으로 뿌리 뽑힌 것이 아닌가?” (김진경, <제3문학론>, 《땅들아 하늘아 많은 사람들아》)에 대한 결론에 도달한다. 나아가야 할 길이 험난하다 해도 진정한 미래를 위한 문학적인 감당을 기꺼이 하겠다는 사명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한 노력으로 『5월시』회원들이 애써 쓴 시집을 발간했지만, 전반적으로 다룰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다. 1집부터 7집까지 발간된 시집 속 일부를 통해 부족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문학의 위중한 의미와 위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바람은 어디서 태어나는지도 모르는데
절망한 줄을 모르고
꽃에서 꽃으로 불어간다.
시궁창에서 시궁창으로
쥐구멍에서 쥐구멍으로
멈추었다가 다시 불어가고
다 잊은 듯이 그친 뒤에도 다시 불어간다.
바람은 절망할 줄을 모르고
바람은 쓰러질 줄을 모르고
낮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다시 낮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불어간다.
바람은 불면서 탑만 보이고
바람은 불면서 흙만 보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바람이 분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흔들면서 바람이 분다
바람은 절망할 줄을 모르고
꽃에서 꽃으로 불어 간다
바람은 쓰러질 줄을 모르고
-(김진경, <바람> 전문, 《이 땅에 태어나서》)에서
김진경 시인의 <바람>이란 시는 『5월시』동인 시집 《이 땅에 태어나서》에서 첫 장을 여는 시다. 이 시집이 나온 시기는 ‘광주민주항쟁’이 발발한 지 일 년 뒤인 1981년이다. 시기적으로 ‘5월’이란 말만 꺼내도 살벌한 군부 독재 세력에게는 극도의 경계이자 관리 대상이던 시절이다. 시집을 펴내기 위해 군부 세력의 검색을 피해야 했고, 은밀하게 행동해야만 했던 시절이다. 발간된 시집마저 정상적으로 유통시킬 수 없어 대학가 서점을 통해 세상에 내보여야 할 만큼 살벌한 통제와 삼엄한 감시의 시대였다. 그러한 시대환경에 비춰볼 때 이 시는 극도의 은유적인 이면을 갖고 형상화된 시임을 직감할 수 있다. 여기서 ‘바람’은 광주시민들이 잠시나마 쟁취한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민중 의식의 상징임은 당연하다. 그 ‘바람’은 헌법에서 보장된 인간의 기본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존엄성에 기초한다. 그것을 열망한 “바람은 어디서 태어나는지도 모르는데/ 절망한 줄을 모르고/ 꽃에서 꽃으로 불어간다.”며 민중의 살아있는 의식은 들불처럼 끝없이 번져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시인은 시대에 대한 변화 의지를 “모르고”란 시어의 반복을 통해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그 바람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이 땅의 주인인 민중들의 응어리진 가슴에서 충동된 것이기 때문이다. 민중에 의한 참된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바람’은 절망을 모른다. 군부의 일방적인 총칼 앞에 살육당하면서도 사그라지지 않는 ‘광주민주항쟁’의 의지는 더 뜨거워져 강건하다. ‘꽃에서 꽃으로’라는 말속에 함의된 사람들과 사람들의 연대의식은 끝없이 이어지는 생명성을 근거로 한다. ‘민주항쟁’ 정신과 항상성恒常性의 “바람은 절망할 줄을 모르고/ 바람은 쓰러질 줄을 모르고/ 낮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다시 낮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다시 낮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불어간다.”라며 잡초의 근성을 닮았고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민중의 뿌리가 이 땅 깊숙한 곳까지 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바람’을 위해 쓰러져간 광주의 영령들을 김진경 시인은 같은 시집에 실린 <진혼鎭魂>에서 “피도 스미지 않는 바닥/ 찢어진 깃폭처럼 비둘기는 떨어져 내려/ 까마득한 현기증,/ 목마름만이 우리의 것일 뿐,// 저 푸르게 엉크러진 봄도, 햇빛도/ 끝내 우리의 것은 아니었네/ 오, 저기 싸늘하게 날 선 칼날들/ 우리의 젊음에 파수 서고”에서 시인은 암울한 현실에 대한 목마름과 감당해야 할 시대정신에 괴로워하고 있다. 그 간절한 바람은 시 <풀>에서 또 다른 전언을 담아 우리에게 다가온다. 어릴 적 각인된 풍경이 나이 들어 새로운 시적 대상으로 확장된다. 김진경 시인은 가슴에 자란 ‘풀’이 갖는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6·25 전쟁의 참화가 쓸고 간 곳곳에 파헤쳐진 곳까지 “오포가 울고/ 뻘겋게 파헤쳐진 참호들이 꿈틀거리며 살아”나 현실로 데자뷔된다. 그 참호 속에 숨어 엎드린 사람들처럼 “나는 한 줄기 풀잎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산하를 물들인 사람의 피를 빨아들이듯 “한낮의 땡볕을 모두 빨아들인 풀잎./ 열병을 앓았어 기나긴 열병을/ 그대 가슴을 꿰뚫었을 감촉처럼 뜨거운 피의 열병”이 상징하는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그 피는 적과 아군이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인 동시에 이웃인 힘없는 이 땅의 민중이었던 것이다. 그 참호 속에서 세상을 원망하며 죽음을 맞이한 참담한 눈빛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토록 순한 눈빛을 본 기억은 다름 아닌 80년 광주 금남로를 메운 뜨거운 가슴을 가진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시인은 이어 “배암이고 싶었지 뻘겋게 들끓는 황토를 기어가는/ 몸서리치게 차가운 배암이고 싶었지/ 그대 여기 저기 거적에 덮여 누웠다는 골짜기/ 바위 틈서리를 기어서 풀딸기도 빨갛게 피고 있었지”라며 유년기의 경험을 통해 의식의 전환과 진전을 이뤄낸다. 그것은 김진경 시인의 시적 근원이 어디에서 출발하는 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건인 동시에 문학적 근원이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 가를 알게 해준다. ‘풀’들이 누웠다가 다시 일어서는 곳이 우리가 사는 곳이라면 죽어 묻혀서도 ‘풀’이 된 영령들은 살아서처럼 말을 한다.
수유리 4·19 묘지에 내리는 눈은
돌아누우라고 한다.
먼 하늘은 소리 없이 달려와
쌓인 눈을 다시 덮으며
돌아누우라고 한다.
너무도 조용해
그렇게 내리는 것은 사랑인가
그렇게 덮이는 것은 황홀인가
그렇게 눈 감아도 입술에 닿아 녹으며
돌아누우라고 한다.
그러나 돌아누우며 내리는 눈은
팔이 없다.
어깨를 덮으며 온몸을 덮으며
내리는 눈인데도 팔이 없다.
연못에서는 아이들이 스케이트를 타고
환호성을 올리는 사이에도 눈은 내리고
묘지를 덮으며 아이들을 덮으며
내리는 눈인데도 팔이 없다.
그렇게 눈 감아도
눈은 입술에 닿아 녹으며
돌아누우라고 한다.
수유리 4·19 묘지에 내리는 눈은
-(윤재철, <수유리에서> 전문, 《그 산 그 하늘이 그립거든》)에서
윤재철 시인은 ‘수유리’를 찾아갔을 것이다. 그것도 흰 눈이 쏟아지는 날, 사연이 없는 사람도 그런 날씨라면 가슴속 황망한 삶에 대한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그렇지만 시인은 무료한 시간을 달래려 찾아간 것이 아니다. 이 땅의 주인인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게 해달라고 외치다 압살된 4·19 영령들이 묻힌 곳이기 때문이다. ‘수유리 4·19 묘지’에는 3·15 부정 선거에 항거한 반독재 민주 항쟁 때에 희생당한 민주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시인은 어느 묘지 앞에서 ‘팔’이 잘려 없는 죽은 자의 기록을 보았을 것이다. 그 팔로 혹독한 그 시기 총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와 민주를 외치다 잘린 손으로 사람과 사람을 부둥켜안고 사람답게 살게 해달라고 목메어 외쳤을 것이다. 최루탄이 박혀 마산 앞바다에서 주검으로 떠오른 김주열의 죽음으로 맞바꾼 이승만 독재에 대한 규탄과 하야의 함성도 들렸을 것이다. 그 묘지 앞에서 윤재철 시인은 아직도 변한 것이 없는 세상에 대하여 분연히 일어서라는 “수유리 4·19 묘지에 내리는 눈은/ 돌아누우라고 한다./ 먼 하늘은 소리 없이 달려와/ 쌓인 눈을 다시 덮으며/ 돌아누우라고 한다.” 는 전언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 넋만 남은 고인의 묘지 앞에서 시인은 삶에 대한 무상감보다 더한 비장감을 읽는다. 이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스스로에게 고통스런 자문을 해야 한다. 같은 시집에 실린 <이장移葬 그 후 2>는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의 고통스러운 심정을 드러낸다. “밤이면 꿈속을 붉은 깃발이 달리고/ 인부들은 껄껄거리며 무덤을 뽑아낸다./ 삽자루가 이리 저리 엇갈리며 부딪치고/ 붉은 흙더미 속에 허옇게 잘려나간 풀뿌리들,/ 척척 삽자국이 사방 벽을 찍어 내리고/ 연탄재 쌓인 회색의 텅 빈 공기 속/ 사자死者는 신발만 남아 빗물을 가득 담고” 있다는 장소성은 그냥 죽은 자가 묻힌 무덤이 아니다. 그 무덤은 살아있는 사람이 살던 열악한 삶의 처소다. 그 처소가 세상의 개발 논리에 의해 처참하게 파헤쳐지고 있다는 고발의 시다. 파헤쳐진 그곳을 지키기 위해 그 땅에서 붙박이처럼 살다 죽음을 맞이한 민중이다. 이 땅에서 보호받아야 할 힘없는 백성이자 민중의 삶이 광기에 찬 눈먼 자들에 의해 파헤쳐지고 있다. 그들을 지탱하게 한 풀뿌리 같은 삶이 가진 자의 삶을 위해 무참히 파괴되고 있다. 민중의 삶에 대한 절절한 심정을 시인은 <꽃>을 통해 설움 깊은 언어로 토로한다. “가난한 나라의 꽃은 설움이다/ 가난한 나라의 꽃은 악다귀/ 가난한 나라의 꽃은 입으로 삼키는 꽃이다”라며 ‘꽃’은 질긴 생명에 대한 의지를 놓을 수 없다. 기어이 꽃은 ‘씨’를 만들고 다시 대궁을 올려 꽃으로 살아난다. 그 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철저하게 무장한 ‘가시’가 된다. 여기에서 시적으로 상징한 ‘꽃’의 의미는 많은 말들을 함의한다. 그것은 우리가 그토록 소중하게 지켜온 인간다운 삶의 근간인 자유에 대한 열망이자 풀뿌리 민중의 삶이 피워낸 이 땅의 진정한 정신으로 볼 수 있다.
남광주의 아침은 아욱 냄새가 난다.
시장 바닥에 앉은 아이 업은 아낙의 풍경은
멀리서 바라보면 용서를 빌고 싶지만
가까이서 눈뜨고 보라 그것은 눈물이다
건널목에서 여자 몇이서 깔깔거리고 있다
간수는 쌍껏들이라 욕해대고
공중목욕탕에 가는 꼬마들도 헤헤거린다
중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다리에 털 많은 쌀집 아저씨는
아들놈의 예비군복을 입고 있다
댓가지가 꽃혀 있는 곳으로
다리지도 못한 옷을 입고
부인네 둘이서 쌀 몇 되와 몇 푼을 가져간다
어젯밤엔 밤하늘에 외상으로 악을 쓰고
바락 바락 노래 부르기도 한 여자들과
오늘 아침 화순 방면에서 온
아낙들의 눈물이 남광주의 설움이다
움직이지 않은 장면들이
진보되지 않은 사실들이
뙤약볕 아래서 종일 계속되고
물건 파는 사내의 악다귀만이
방금 도착한 여수발 열차에 실려간다
남광주 남쪽 변두리는
우리가 가벼운 마음으로 떠났다가
무작정 내려버리는 어떤 읍내의 풍경 그대로다
남광주의 저녁은 누룩 냄새가 난다
삼교대에 들어가는 계집애가 촐랑촐랑 뛰어가고 있다
거대한 산
무등이 지배하는 밤은 계속된다.
-(박주관, <남광주> 전문, 《그 산 그 하늘이 그립거든》)에서
시인의 내면에 자리 잡은 복잡한 생각의 말미가 ‘남광주’에서 멈춰버렸다. 그곳의 풍경은 어찌 보면 박주관 시인이 일상처럼 보아온 소싯적 풍경 그대로일 수 있다. 그런데 풍경 속 사람들을 통해 드러내는 이미지가 예전 모습처럼 인정 넘치고 활기찬 모습이 아니다. 어딘가 모르게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삶의 전경이 몹시 어둡다. 어느 곳이든 아침 풍경은 주린 배를 자극하는 음식 냄새가 진동하기 마련이다. ‘남광주’의 아침 둥근 밥상에 올려질 아욱국은 그곳의 향토 국거리로 상식했을 푸성귀 중 하나다. 그곳 특유의 아욱국 맛을 떠올리며 시인은 일상을 바라보며 “시장 바닥에 앉은 아이 업은 아낙의 풍경은/ 멀리서 바라보면 용서를 빌고 싶지만/ 가까이서 눈뜨고 보라 그것은 눈물이다”라며 무언가 내막을 알고 있는 듯한 여운을 남긴다. 이어서‘깔깔거리’는 여자 몇을 가리키며 내뱉은 간수의 ‘쌍껏들’이라는 욕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중목욕탕에 가는 듯한 아이들이 “헤헤”거리는 거리의 풍경은 이미 정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잘못되어버린 아들의 예비 군복을 입고 쌀 배달을 위해 중고 자전거를 탄 아저씨와 신내림 받은 무당집으로 운세를 보러 가는 아낙들의 모습도
정상적이지 않다. 밤이 되면 맺힌 가슴속의 무언가를 풀려는 듯 악을 쓰듯 노래를 불러대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남광주’다. 그곳도 여느 사람 사는 곳과 다르지 않지만, 그들만이 기억하는 80년 광주의 시간이 오롯하게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온다. 계절의 순환처럼 아침이 오듯 때를 지나면 저녁이 온다. 시인은 <여름 저녁>에서 지루하게 펼쳐지는 시간을 관통하는 삶의 모습으로 포획해낸다. 아무런 불평하나 하지 못한 채 감당했던 시간을 위로하며 우리는 지나간 시간들이 허망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 시간은 엄연히 우리의 것으로 존재한 것들이었기에 그렇다. “다리 밑으로/ 돼지 곱창 삶는 풍경이 흐르면/ 개 몇 마리/ 빨래터에서 서성거리고/ 아랫도리를 벗은 여자들이/ 늘비한 하꼬방에 모여 있었다.// 방화가 동시 상영되는/ 과부집 골목의 극장 앞에/ 사내들이 기웃거리고/ 바다로 흘러가는/ 밤새내 젖은 여관이 몇 개 흔들리고 있었다.// 여름 저녁/ 도시를 관통하는 바람난 강을/ 시민의 양심이라 이름 붙이면서/ 성욕의 꿈들을 흘러보내고 있었다.”고 하는 여름날의 저녁 풍경은 후덥지근한 습기보다 더 눅눅하지만, 마냥 축축한 습기에 젖은 듯 소모해버린 시간만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여름날의 습한 기후처럼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인간적인 욕망을 감춘 감각적인 본능에 충실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임을 깨달아 버린 것이다. 잠시나마 무기력한 마음의 극심한 반동으로 “돌 몇 개를 주워/ 하늘로 하늘로 날려 보아도/ 우리는 아무것도 맞힐 수가 없었다”며 시인은 80년대라는 상처의 시간으로 봉인해버린 상실감을 애써 드러내고 만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격한 심정으로 세상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다만 세상을 관류하는 민중의 삶이 극도의 공허감에 빠져 몹시 흔들리고 있음을 우려하고 있다. 박주관 시인은 표면에 드러난 도시의 피로감을 보여주며 사회의 한 단면으로 실재하는 풍경조차도 우리의 시간으로 상기시킨다. 시에서 보여주는 소모적인 삶의 권태로움도 80년대 한국 사회의 암울한 사회적 분위기를 떠올린다면 여름날의 저녁은 유쾌하지 않은 시간이 맞다.
어디가서 못 오나
산이라면 넘어오고 강이라면 건너오지
장타령 한 가락에 술밥 말아 먹고
보리밭 질러 쉬엄쉬엄 달려오지
돌투성이 황톳길 어디 묻혀 못오나
호남쌀 실어내던 목포항
나라 잃은 설움 깊어 부두파업 일으켰네
피맺힌 두주먹 떨며 쫓겨온 몸
물고구마 함평장 돼지풀이 석곡장
각설이 먹설이로 허리풀고 떠돌았네
이 땅 저 하늘 내 사랑 데울 곳 어디
뚜울뚜울 돌아와 이 세상 가는 길
너울너울 흰 꽃 뿌려주던 김작은이
셈평 밝은 지주놈들 앞다투어 이름 갈 때
대문대문 찾아가 굿거리에 빗대어
논어 맹자 읽었는지 돈 한푼에 팔려서
뜨물통이나 먹었는지 나라 팔고 지조 팔고
얼씨구나 잘한다 품바나 잘한다
매부 좋고 누이 좋고 끼리끼리 잘 논다
드렁조 어깻짓에 한 잔 술 받쳐 먹고
낟가리 덕석마당 침 퉥 뱉고 나온 내 사람아
어디 가서 못오나 애고애고 못오나
오월 하늘 푸르른데
물길이면 건너 뛰고 산길이면 헤쳐오지
찔레꽃 돌밭길 큰 산 넘어 어디 갔나
천사마을 밤 깊어 새벽별 찬데
-(나종영, <천사마을의 김작은이> 전문, 《땅들아 하늘아 많은 사람아》)에서
나종영 시인은 사람을 알면 제풀에 가슴 뜨거워져 열병을 앓듯 가슴앓이를 한다. 시인은 「품바」를 이끈 각설이 대장 ‘김작은이’란 사람을 떠올리며 속앓이를 시작했다. 본명은 ‘천장근’으로 일본의 수탈이 본격화되던 1920년 목포에서 부두 노동자 파업을 주도하다 쫓기는 신세가 된다. 먹고살기 위해 장터를 유랑하는 장타령꾼이 되어 고달픈 생계를 이어 간다. ‘김작은이’가 즐겨 불렀던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왔네”라는 가락을 들으면 금방 「품바」가 생각날 것이다. 「품바」로 유명한 각설이 대장이 바로 ‘김작은이’다. 낭만적인 유랑 생활도 알고 보면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해야만 했던 생계수단인 것이다. 앞서 밝힌 대로 “호남쌀 실어내던 목포항/ 나라 잃은 설움 깊어 부두파업 일으켰네”라며 일제의 식량 반출이 활발했던 목포항에서 노동자 파업을 주도한다. 그것을 계기로 갖게 된 민족의식에 대한 각성은 민중의식으로 확장되며 인간의 존엄과 실존에 대한 자각에 이른다. 그 활동 무대는 무안을 기점으로 “물고구마 함평장 돼지풀이 석곡장”등 주변의 장터를 무수히 떠돌게 된다. 그렇게 돌아다녔지만, 이 땅에서 자신을 한 등속으로 받아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고, 유랑은 끝이 없는 정처가 되었다. 그렇지만 가슴속에 싹튼 민족에 대한 사랑은 끝없이 깊어진다. 그것은 잘못된 세상에 대한 조롱과 풍자를 곁들이며 「품바」의 애환적인 정서를 통해 민중 속으로 더 깊숙이 파고든다. “드렁조 어깻짓에 한 잔 술 받쳐 먹고/ 낟가리 덕석마당 침 퉥 뱉고 나온 내 사람아”라며 지주 계층을 희롱하는 수작을 통해 은근한 반감을 드러낸다. 그러면서 품바의 노랫가락도 당연스럽게 민중의 애환과 당시 사회상에 대한 신랄한 풍자 위주로 진화되어 간다. 그런 투철한 민중 의식을 갖고 살다 생애를 마친 ‘김작은이’에 대한 인간적인 그리움이 사뭇 깊다. 나종영 시인의 안타까운 심정적인 연민은 아래 시에서 고스란히 보여준다. 1연에서 “어디가서 못 오나/ 산이라면 넘어오고 강이라면 건너오지”라는 그리움의 정조에는 희망이 담겨있다면, 마지막 연 “찔레꽃 돌밭길 큰 산 넘어 어디 갔나”에서는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격한 절망을 나타내고 있다. 시인은 ‘김작은이’의 처절한 생애사를 통해 평범한 부두 노동자의 삶이 황폐화된 원인을 찾아보면서 당시 사회에 대한 비판도 함께한다. 이 땅에서 다시는 볼 수 없는 그 사람(김작은이)이 부르던 노래처럼 우리는 세상이 바뀌도록 노력해야 한다. 잘못된 세상에 대한 비판은 혼자 해선 안된다. 시인도 하고 민중도 하고 세상에 눈뜬 자들은 다 나서야 한다. 같은 시집에 실린 <공옥진孔玉振 1>은 온 몸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각오를 실천하듯 기괴한 춤사위로 세상 사람들에게 말문을 연다. “앞산은 나더러 허튼춤 추라 하네/ 뒷산은 나더러 곱사춤 추라 하네/ 설움 마음 깊어 망초꽃 딱지꽃/ 머리에 꽂고 옴족옴족 넘는 갈재마루/ 내 무얼 넘지 못해 눈물이 앞을 막나/ 내 사랑 눈물로 저 그믐달이 되었구나”라며 공옥진 선생님의 한 깊은 가슴속 노랫가락을 따라 몸을 흔들거려본다. 공옥진 선생님은 몸짓으로 우리 사회가 강요하고 있는 다양한 억압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바로 보고 싶지만 바로 보아서도 안되고 바른말과 행동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고 말한다. 공옥진 선생님은 예술의 한 유형인 ‘병신춤’을 통해 윤리의식의 실종과 부패한 사회상에 대한 강한 반동을 남긴 채 우리 곁을 떠나가셨다. 오만가지의 표정과 몸짓으로 관객을 사로잡은 그 이면에는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연민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사랑은 가슴으로 하고 가슴에다 불러야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종영 시인은 <땅끝에 서서> 그리운 사람을 부르며 애타게 찾고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그대/ 크게 외쳐 부르고 싶다/ 그대 불러, 멍든 사랑 부둥켜 안고/ 그대가 치던 쇳소리 들려주고 싶다”는 시인은 땅끝까지 찾아와 불러보지만, 순정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자던 그 사람은 우리 곁에 없다. 그 사람은 우리 곁에서 사람 사는 세상을 이루려다 죽어 흙이 되었거나 저 바다를 가로질러 하얗게 밀려오는 파도가 된 사람들로 가슴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추석달이 밝은데
비인 거리에 너는 그림자를 띄웠느냐
코울타르 먹인 전신주 아래
다리 꼬고 턱 바치고 꼭 그렇게
눈물나는 모습으로 서서 너는 다시
이 거리의 슬픔으로 가을 달맞이꽃이 되려느냐
부평에서 반월에서 구로동에서
이름도 얼굴도 때 묻은 젖 큰 가시내들은
고향이라고 명절이라고 다들 밀려 오는데
전세버스의 차창마다 깨꽃같은 그리움은 피었는데
네가 설 땅이 꼭 한 곳뿐이라고
너는 그 전주 아래 슬픔의 뿌리를 내리고 굳었느냐
그 무슨 한 맺힌 기다림의 씨앗이라도 뿌렸느냐
어색하게 스타킹을 신고 원피스를 입고
사과 광주리 설탕 한 포 입어 보지 못한
어머니의 겨울내복을 사들고
아버지의 소주와 동생의 운동화와 그림물감을 사들고
저렇듯 돌아오는 때절은
가시내의 웃음소리가 그리웁지 않느냐
추석 달빛은 찬데
대인동 골목마다 찬 달빛은 출렁이는데
굳어버린 너의 몸 위에 누가
창녀라고 낙인을 찍겠느냐
누가 한 오리 저주의 그림자를 드리우겠느냐
가까운 고향도 눈에 두고 갈 수 없어서
마음만은 언제나 고향 식구들 생각이 뜨거워서
홀로 들이킨 수면제 가슴 젖어오는데
추석 달빛은 차고 어머니는 웃고
너는 뜬 두 눈으로 달맞이꽃으로
대인동 골목마다 죽어서 살아 있는 눈물이 되었구나
-(곽재구, <대인동 부르스> 전문, 《땅들아 하늘아 많은 사람아》)에서
곽재구 시인이 바라본 풍경도 우리가 마주하는 일상과 다르지 않다. 도시의 삭막한 풍경을 시인의 감각으로 전율해 시적 대상으로 변주를 거쳐 세계로 편입한다. 시각도 감각적 전위에서 심상으로 심화한다면 기어이 닿고자 하는 서정이라는 범주에 당도하고 만다. 이 시는 시적인 상상력보다 사실성을 담보하여 구조화된 사회 현실을 잘 드러낸 서정시의 전형이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람 사는 방법과 사회의식으로 규범된 현상들에 대하여 시인의 눈으로 견인되고 있는 1982년의 ‘대인동’은 광주에 있다. 그 도시적 이미지를 지워버린 현재는 흔적만 남았을 창녀촌을 배경으로 한다. ‘대인동 부르스’는 2박자 아니면 4박자다.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만큼 변화무쌍한 것이 사람 마음이다. 그만큼 슬픔과 기쁨이 매일을 교차하지만, 밤이 깊어질수록 짙어지는 일교차는 클 수밖에 없다. 몸을 파는 여성들이 각각의 사연을 안고 그곳을 터전 삼아 살아가지만, 일상은 화려한 것에 반해 마음만은 정반대일 것이다. 이 시에서 한 여성의 삶이 처한 환경을 형해만 남은 낮달처럼 언뜻언뜻 비춰주고 있다. 불우한 여성의 인생 유전은 슬픔 그 자체다. 열악한 환경이야 비슷하다 치더라도 박봉의 공단에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가족사를 안고 있다. “추석달이 밝은데/ 비인 거리에 너는 그림자를 띄웠느냐”라며 묻는 대상은 이 땅에 살아가는 한 여성이자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다. 우리의 슬픔을 안고 사는 대인동의 밤 그림자는 남이 아닌 우리의 누이다. 그것은 추석 명절을 통해 확연하게 삶의 실루엣으로 드러난다. 남들이 노는 추석날, 사람들은 가족을 만나 기쁨을 함께한다. 평범한 일상마저 함께하지 못한 여성의 아픈 가슴을 어루만지는 ‘달맞이꽃’의 슬픈 변주는 기어이 수면제를 먹어야 끝을 본다는 슬픈 이야기를 오랫동안 끌어안고 있다. ‘대인동 부르스’는 사회의 양면처럼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곳이다. 슬픔을 상징하는 ‘달맞이꽃’은 몸을 파는 ‘창녀’로 변주된다. 반대로 기쁨처럼 핀 ‘깨꽃’과 공단에서 일하는 ‘가시내’는 동일한 존재로 충족되어 시적 상상력을 공명시킨다. 하지만, 그 사람들(공단의 아가씨와 창녀)이나 ‘깨꽃’과 ‘달맞이꽃’도 다르지 않다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듯 공단에서 일하던 아가씨들이나 대인동의 ‘창녀’나 귀향할 수 있는 처소는 그리움만 가득한 가난뿐이다. 사람이 살던 땅에서 그리운 것이 어찌 사람뿐이겠는가. 사람보다 더 깊이 흙에 뿌리박고 살아가는 ‘소국小菊’도 사람을 바라보며 피고 진다. <소국>은 사람처럼 속 마음이 깊다. “그리운 이 땅의/ 한 필 황포로 살아나/ 그리운 이 땅의/ 서러운 가을하늘 한 자락을/ 끌어안고 우는 키 작은 너는/ 아느냐 이 땅의 제일 후진/ 너와지붕 아래서도 그리움은 새 새끼를 치고/ 이 땅의 제일 추운/ 삼동의 칼바람 속에서도/ 봄꽃 뜨거운 산 돌갖 한 송이/ 청산 속에 낫 갈고 숨어 살고 있음을,” 보며 은둔적 삶을 살며 세상에 대한 불평하나 하지 않는 순박한 사람을 닮았다. 어쩌다 태어나보니 이땅에 살게 된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소국’은 꽃이자 사람이다. 갖은 고통을 마다치않고 견뎌내는 이땅의 주인이자 민중이다. 제 스스로 목숨 부지하며 살아가며 애지중지 제 새끼 키워가는 우리의 아버지의 아버지다. 비뚤어진 세상을 향해 언제든지 조선 삽날 쳐들고 들이댈 가슴 억누르며 살아가는 거리에 핀 꽃처럼 웅크리고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몽매한 곳이 어디일까. <그리운 남쪽>에는 누가 사는지 궁금하다. “우리가 매듭 굵은 손을 모아/ 여어이 여어이 부르면/ 어어이 어어이 눈물 섞인 구름으로/ 피맺힌 울음들이 되살아나는 그곳은” 다른 곳이 아니다. 바로 “우리 쓰러진 가슴 위에 피어나고 있음을,” 질긴 생명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남쪽은 언제쯤이면 쓰러진 꽃들이 다시 일어서서 환한 꽃을 피울 것인가 상상을 해본다.
그해 겨울 형들은 모두 감방에서 풀려나와
눈이 부신 햇빛을 보았다
따가운 눈보라도 차라리 반가웠고
오랫동안 그리던 얼굴을 만나
소주잔 바닥 마를 날이 없었지만
이내 시들해졌다
카프카서점에 모여 밤새 벌이는 개추렴에도 지쳐서
욱씰거리는 근육을 펼 일자리를 찾아나섰지만
받아주는 데는 아무데도 없었다
학원 강사 자리도 끼어들기 힘이 들었고
막노동 일터에까지 낯선 얼굴들은 따라다녔다
몇 사람만 모여 있어도 서에서 불러들였다
발 하나 제대로 뗄 수 없으면서
왜 그리들 힘이 났던지
포장마차를 열고 월부 책장사를 나섰지만
내노라 하는 가난통에도 서로들 자신을 퍼주기에 바빴다
비정의 세월은 이내 그것도 허물어버리기 일쑤였다
이듬해 봄 몇은 어디론가 흘러가고
몇몇은 다시 감방으로 떠밀려갔다
아직 천사가 날개를 펼 때가 아니었다
-(박몽구, <서시 2> 전문, 《다시는 절망을 노래할 수 없다》)에서
박몽구 시인은 장시를 통해 억압받은 시간의 말들을 발설하고 있다. 트라우마처럼 존재하는 과거가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다. 시인은 잊고 싶은 기억을 종종 소환하여 상기해야 한다. 소시민으로 살아가며 시를 생각하고 하루 세끼를 걱정하며 사는 것도 버거운 현실이다. 그런데 ‘국가’는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권력으로 되레 소시민의 사는 것마저 힘들게 한다며 시인은 말한다. 이런 유형의 시는 80년 광주를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익숙한 상황들이다. 아슬아슬한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이 백척간두다. 언제든지 더 낮은 곳으로 추락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삶을 떠받치고 있는 힘은 험난한 시대를 극복하려는 의지와 그 희망을 부단하게 추구한다는 것에 있다. “그해 겨울 형들은 모두 감방에서 풀려나와”서 “눈이 부신 햇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이 되었고, 눈보라 치는 차가운 겨울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혈기로 받아넘겼다. 그러나 마냥 그렇게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먹고살기 위해 일자리가 필요했지만, ‘감방’에 다녀온 사람들의 이력을 쉽게 받아줄 리가 없다. 그 사람들은 사회 밑바닥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는 형국으로 “막노동 일터에까지 낯선 얼굴들은 따라다녔다/ 몇 사람만 모여 있어도 서에서 불러들였다”는 국가에 의한 토끼몰이는 계속된다. 그래도 아직은 그들과 함께 할 수 있기에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포장마차를 열고 책장사로 버티는 힘든 일상이지만, 그것마저 각박한 “비정의 세월은 이내 그것도 허물어버리기 일쑤였다”라며 그마저 그들을 위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봄’은 시인에게 트라우마의 반복을 강제하는 계절인지 모른다. 누군가 “몇몇은 다시 감방으로 떠밀려” 그들 곁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분방한 시인의 사유를 강제하는 현실에서 앞으로 더 많은 미래의 시간을 제약하는 압력을 견뎌야 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과거의 혹독한 시간을 건너왔기 때문이다. 지금의 고통보다 더한 과거의 시간을 <서시 1>을 통해 말해주고 있다. “너 하나의 조그만 봄 손길은/ 갈망의 손, 손들을 모아 영산강 노도가 되어/ 금남로에 얼어붙은 질긴 얼음덩이를 녹여냈고/ 한 낮에도 앞길 캄캄해 눈뜰 수 없는/ 사람들의 눈을 열어/ 캐터필러가 몰고 온 적의를 뿌리쳤”던 경험에 감각된 기억은 무대의 실연처럼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학적 사유 속에서 있을 법한 상상력이 아닌 실재한 역사의 시간으로 그들은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엄청난 정신적인 상처에 불만하는 것이 아니다. 80년 광주의 오월이 남긴 본질적인 것(자유와 민주)에 더 골몰하지만, 성취를 고대하는 희망은 아직 이를지 모른다. <서시 3>의 시에서 “네 그림자는 우리에게 새 하늘 새땅을 가리킨다/ 그을린 네 그림자를 들고 입성하는 아침/ 이 조그만 나의 안녕은/ 너의 선물이다/ 역사 밖의 역사가 될 승리의 확신”을 희망처럼 간직하고 있다. 삶의 원형질로 굳어버린 과거는 되돌릴 수 없는 영원의 시간으로 존재한다. 감각으로 경험한 존재의 시간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언어적 관념을 넘어선 민중적인 희망의 시간으로 오랜 사유처럼 확장되어버렸다.
날이 흐리면
나 달지 여기 가오 나 달지 여기 가오
강암 당숙 목소리로 강은 울고
황혼 무렵 묶이어
공산면 원수골 큰 웅덩이로 가시며 외치던
형님의 음성으로 아버님은
삼십 년 가슴 치는 물결 소리 듣는다.
흰 옷으로 들에 엎드려 계실 때
먹장구름처럼 멀리 사람들이 이리 저리 몰릴 때
유난히 숨죽인 강물소리에
아버님은 동구로 뛰어가셨네.
구장이셨던 형님은 풍산댁
끌려간 아들을 위해 읍내로 가시고
하늘엔 가득한 거센 바람,
쇠붙이 화약 냄새, 흉흉한 소식.
사람 좋고 글 잘하고 일 잘하고
존경받던 형님은 오시지 않고
신음처럼 소리하며 뒤척이던 영산강.
트럭에 태워져 흙구덩이로 가실 때
나서 자라 삽질하던 새끼네를 지나시며
나 달지 여기 가오 나 달지 여기 가오
강물은 삽십 년 물소리로 흐르고
아버님이 듣는
가슴 치는 강울음.
-(나해철, <영산포 9> 전문, 《다시는 절망을 노래할 수 없다》)에서
영산포는 영산강을 젖줄처럼 빨며 긴 세월을 놓지 않고 흘러왔다. 강에서 바다로 흘러가기 전 며칠을 묵어가더라도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넉넉해서 인심 좋은 ‘영산포’는 오고 가는 사람들로 항상 복작거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다로 육지로 나서기 위해서 채비를 서두르지 않는다. 강물이 흘러온 시간과 바다로 나가야 할 시간은 항상 제때를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눌러 살아가는 사람들이 영산포의 포구 사람이 되었다. 그 사람들이 농사일도 도왔다가 여의치 않으면 바닷일을 하기도 하는, 그러다 아예 농부가 되거나 뱃일을 하며 대를 이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영산강은 내륙의 강이다. 담양 용추봉 가마골에서 발원하여 담양과 광주를 질러 나주평야와 영암을 적시며 영산강 하구를 마지막으로 황해로 흘러드는 강이다. 그렇게 흘러온 세월만큼 광주천과 황룡강의 지류에 사는 사람들은 강과 관계가 밀접할 수밖에 없다. 그 사람들의 소식이 흘러들어 강물 소리로 흘러가다 안부를 묻는 강가의 사람들에게 말을 전한다. 때로는 잔잔한 말소리로 그러다 분노의 시절에는 북정 물을 튕기듯 격한 소리도 마다치 않는다. 강은 슬픈 소리를 내지 못한다. 그 슬픔은 너무 깊어 애절한 소리는 인간만의 표현할 수 있는 소리다. 해질녘 강물은 노을부터 촉촉이 젖어 잠긴다. 햇살 좋은 날보다 흐린 날이면 사람의 눈을 피해 오래된 슬픔을 배운 강물이 소리를 낸다. “나 달지 여기 가오 나 달지 여기 가오/ 강암 당숙 목소리로 강은 울고/ 황혼 무렵 묶이어/ 공산면 원수골 큰 웅덩이로 가시며 외치던/ 형님의 음성으로 아버님은/ 삼십 년 가슴 치는 물결 소리 듣는다.”는데 그 소리는 환청이 아닌 ‘달지’ 형님의 목소리가 분명하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기억하는 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강가에 살던 사람들은 강을 사람처럼 여기며 살아왔다. 그 강을 보며 하루를 시작했고 하루를 나누면서 마음으로 전한 말들을 강은 다 기억하고 있다. 그런 강이 ‘달지’ 형님이 죽게 된 곡절한 사연을 모를 리가 없다. 강이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말뿐이다. 잊을 만하면 아버지의 가슴속 아들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 그 강은 우리의 슬픔까지 마다하지 않는 든든한 이웃이다. 즐거움보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는 만사 제쳐두고 달려간 형님이었다. 그날도 풍산댁 아들이 읍내에서 잘못되었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간다. 그렇지만, 그 길로 “쇠붙이 화약 냄새, 흉흉한 소식./ 사람 좋고 글 잘하고 일 잘하고/ 존경받던 형님”은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영산포’는 그래서 더 서럽다. 흘러온 세월 속 강물이 다시는 될 수 없듯 포구에서 사람으로의 시간을 더는 허락하지 않은 세상이 원망스럽다. 그래서 영산강은 이 땅의 서럽도록 억울한 사람들에게 만장같은 위로의 강물이 된다. 살다 눈이 뒤집히는 일을 당하면 사람은 곡기를 끊어 세상과 단절하려 한다. 나해철 시인의 <단식>에서 보여주는 시적 세계는 흐트러진 의식의 전복을 통해 본성을 회복하려 한 진실의 깊이를 더해주는 시다. 세상을 전복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다. 시인의 사상이 깃든 서정의 공간은 그것을 배제한 세계의 전복이 아니라 엄밀하게 논한다면 행동의 전환인 것이다. 그것은 과거 “너는 웃고 있지만/ 셀 수 없는 우리는 모두 울었다/ 죽음으로 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았으므로”에서 출발한다.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너는 웃”음을 잃지 않았던 사건이 발생한 시점은 “어머니의 혼을 잃고 남루한 너의 누님/ 기절하여 포대기처럼 업혀져갔”던 기억 속에 선명한 시절은 그리 먼 과거가 아니란 것을 말한다. ‘남루’한 삶을 운명처럼 알고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가해진 폭력들이 사라진 세상을 시인은 염원하고 있다. 그런 세상은 “잡초와 억새, 엉컹퀴와 강아지풀/ 남생이 풀밭만 남는/ 구원의 날이 곧 오고야 말겠구나”라며 민중의 소박한 꿈이 이뤄지는 날이 곧 도래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그것은 어느 순간에도 멈추지 않고 흐르는 강물을 보며 알게 된 삶의 지혜이다. <광주천 2>는 “우기에도 물이 넘치지 않았고/ 집과 아이들을 쓸어가지 않았다/ 아무것도 다치지 않았다는” 순한 강과 사람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풍경 그 자체 상생하는 일상이다. <광주천 4>에서는 어느 날 그 착한 강물 속으로 “길 위에/ 물 위에 떨어지는 것들은 꽃”이 아닌 사람이란 것을 보았다. ‘꽃’처럼 강물 따라 흘러간 사람들의 아찔한 시간이 무장 없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때의 순간을 간직한 강물에는 흔적이 선연하다. 그 앞에 서서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있었지만, 이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광주천 7>에서 “흐르는 것들을 위하여 우리는/ 공원 망월동에 있었고/ 역사의 묘역에서/ 자진했다 소문난 친구의 묘비” 앞에서 절망을 말할 수 없다. “가슴엔 꽃일까 노래일까/ 죽지 않는 무엇일까 이슬처럼 맺히고/ 흐르는 것들을 위하여/ 오래토록 우리는 해뜨는 쪽에 있었다”지만,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궁색한 변명이다. 해 뜨는 쪽은 동쪽이 맞다. 자연의 순명한 질서가 한 낮이 되면 어느 쪽이 동쪽인지 혼란스럽다.
혹시 밤 두시나 세 시경 이태원梨泰院에 가보았나
불야성이 어떤 곳인지
치외법권이 어떤 것인지
산발한 반토막 꿈 어지럽게 흩어지고
이 지상
희고 검은 씨앗, 누워 받는 곳
이태원梨泰院, 식민지 일번지 혹시 가보았나
사십여 년 섬사람 채찍 맞고
사십여 년 흰손의 채찍 아래 뭇매맞은 나라에
이제는 죽고 못사는 혈맹의 나라
시궁창 문화가 제일 먼저 상륙하여
동방예의지국, 환장해 내맡긴 몸뚱아리와
간음이 이루어지는 곳
두개골 가득 찬 식민지의 어린 아들딸
저 오색 네온사인 절망의 빛으로 부서지고
이 땅 거대한 감옥
덩치 큰 열쇠는 무서운 흰 손아귀 속으로 철렁이고
힘센 논리로 내 조국을 사수한다는
동맹의 나라
꽃잎처럼 아름다운 아들딸에게
종살이를 가르치고
피로 맹세한 우방의 병사와 뒹굴던
잠자리는 동반자적 호혜평등이었을까
혹시 밤 두시나 세 시경 이태원梨泰院에 가보았나
가보게,
순결한 조국의 처녀성이
조선주둔군 사령부 철조망 아래
배꽃처럼 떨어지는
식민지 일번지, 이태원梨泰院에 가보게나
-(고광헌, <이태원梨泰院> 전문, 《5월》)에서
이태원은 서울에 있다. 다 아는 사실을 말할 때 예외라는 것이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한 무엇인가가 그것을 말해준다. 고광헌 시인이 찾았다는 ‘이태원梨泰院’은 새벽 두 시나 세 시에 가봐야 그 뜻을 알게 된다. 이태원은 과연 우리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안에 존재하는 도시인가를 의문한다. 여기에서는 아름다운 나라와 우리가 그토록 자랑으로 여긴 단일한 민족이란 말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곳은 나를 빨리 버리고 국가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자유롭게 활개 치며 사는 치외법권 지대다. 그러나 그것은 언젠가는 우리 모두의 아픔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망각해선 안된다. 국가라는 정체성을 망각한 시대의 반복은 항상 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과다한 욕망의 노출과 충족 사이에서 미래를 흥정할 수는 없다. 육체의 근원인 정신의 거래까지 흥정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잠깐 동안은 눈앞의 이익을 얻은 것 같지만, 종내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르고 나서야 후회할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눈먼 오이디푸스가 테베로 향할 때는 마침 부축해준 딸들이라도 존재했지만, 국가라는 정체성이 훼손된 어느 시점에는 신화와 달리 상상할 수 없는 막대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에서 익히 보아왔다. 고광헌 시인이 우려한 것은 단순히 이태원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부조리한 모든 것을 망라해서겠지만, 단지 이태원을 예로 든 것에 불과하다. “사십여 년 섬사람 채찍 맞고/ 사십여 년 흰손의 채찍 아래 뭇매맞은 나라” 안에 존재한다는 ‘이태원梨泰院’을 그렇게 방기한 것도 국가다. 국가에 의해서 훼절을 방임하고 있는 현실에서 끝내 아름다운 나라로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우려가 심히 깊다. 일본에 의해 통치당한 40년의 식민지 대가를 톡톡히 치른 우리다. 일본 그들은 아직도 영광스런 대동아론의 망상을 잊지 않고 있다. 그에 맞춰 잊을 만하면 그들의 말로 익숙한 노래를 귀에 앵기도록 친절하게 불러주는 가수도 있다. 시인은 그런 우려가 사실이라면서 <유명 가수에게>란 시에서 국민적 각성을 환기하고 있다. “일제시대, 내 부모의 고혈을 빨던 마름의 아들로/ 대동아전쟁 때는 주옥같은 시를 천황께 바치고/ 광복 이후 지금까지 상전 수시로 바꾸며/ 원로 대가가 된 늙은 시인과 아시아는 하나라는 공연 이야기를 하”며 자랑스러워하던 그날처럼 “그대가 얼마 전 그들의 나라에 건너가/ 그들의 말로「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고” 왔을 때 일본 사람들 반응이 ““네, 부산항은 우리가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고향처럼 향수를 갖게 하는 곳 아니겠어요””라고 했다니 큰일 아니겠는가 싶다. 그런 것도 그들의 잘못이 아닐지 모른다. 그런 일들이 아무렇지 않다며 우리 사회는 가르치고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중산층 교실에서 6_한·일 신시대>는 청산되지 않은 부끄러운 과거를 훈장처럼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 사람들은 민족적인 양심과는 멀어 되레 당당한 기회일 수 있다. “번쩍이는 체육관 마루처럼/ 매끄러운 우리 교장 선생님의 일본말/ 일본말을 우리말보다 더 잘하시는/ 우리 교장 선생님”의 교육적 가치는 일제 시대를 통해 습득한 그대로를 쫓는 “언제나 완벽한 일렬종대를 좋아하시는/ 우리 교장 선생님” 같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잘 살아가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런 반면 <낙골 산동네 101번 종점>에 사는 사람들은 배에 기름 다 빠져 오르기도 힘든 산동네라 종점 버스도 사람들 보기 민망해 빌빌 거리며 간다. 그 사람들 “더러는 일당을 손에 쥐고/ 더러는 하루 종일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가/ 빈 손 가득/ 어둠을 쥐고 돌아오는 밤”이 수인의 표정처럼 죄스럽다. 눈빛만은 바꿀 수 없어 “아랫도리를 적시며 비포장 도로 양 옆/ 값싼 우산의 행렬/ 값비싼 마음을 기다리는 / 사랑의 도열을 보았는가”라고 묻지만, 시적인 것보다 절박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더 화급하다. 아직은 “저 아래 평지의 불빛”보다 마음만은 순정해서 하루를 채울 수 있는 끼니가 아니라도 좋다. “그대의 질긴 노동의 불빛이/ 몸살나 뒤척이는 땅/ 정직하게 갈아 뉘는 것이다”라며 오지 않을 미륵불을 기다리듯 사람들은 희망을 놓지 않는다.
5월은 내게 유행가를 부르게 한다
부끄러움만 남긴 그 계절은,
아카시아 독한 향기보다 더 진하게 나를 엄습한다.
잠들 때나 노래할 때나 봉급 봉투를 받을 때나
다리를 건널 때나, 아이들 햄버거를 사 줄 때, 남 몰래 양담배를 피울 때, 핵사찰 그 오묘한 방정식에 관한
신문 기사를 읽을 때
의식과 무의식, 의지와 무의지, 그 어느 쪽이든
그것은 언제나 기습이거나, 테러다.
성욕까지 가시게 하는,
봉급 받는 손끝까지 절망스럽게 하는
아, 사라지지 않는 환영,
피나 시간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가지 끝에서 가지 끝으로 따뜻하게 불어가는 바람으로도
아,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런 각성도 없는, 사실 부끄러움조차
잊고 사는 내게 5월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아,
하늘을 폭음으로 가르는 폭격기.
한순간 사라지는 물체에서조차
생일날 사 드는 반 돈짜리 금가락지 무게에서
조차, 5월 그 아카시아 향내는
사라지지 않는다.
유행가조차 어색하게 만드는 5월
너 끝나지 않는 시간이며
시간 밖의 시간이여.
내 이 끝간 데 없는 매춘을 큰 눈으로
큰 눈으로 응시하는 눈빛이여.
-(이영진, <5월은 내게> 전문, 《그리움이 끝나면 다시 길 떠날 수 있을까》)에서
계절의 이면에 숨은 향기는 똑같은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이영진 시인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알고 있는 ‘5월’은 아름다운 신춘의 격정이 가팔라지는 지점에 있다. 사람들은 봄을 지나온 짧은 시간을 아쉬워하며 남은 봄의 시간을 기다린다. ‘5월’이 가져온 신록보다 이파리 같은 꽃잎을 하얗게 터뜨리는 아카시아꽃은 으슥한 골목을 가리지 않고 향기를 드리운다. 어디서 온 향기일까를 생각하기보다 자극적인 향기가 곧 자유 인양 마음껏 들이킨 빚이 부풀어오는 ‘5월’이면 알레르기처럼 시인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봄은 불안한 과거의 시간 바깥으로 꽁꽁 숨어버린 사람들을 용케도 찾아내는 그들처럼 “의식과 무의식, 의지와 무의지, 그 어느 쪽이든/ 그것은 언제나 기습이거나, 테러”처럼 감행해온다. 어느 순간에도 불편한 마음을 편히 쉴 수 없는 현실의 강박은 과거의 아카시아꽃 향기 진동하던 봄에 있었다. 그 모든 것은 “~사라지지않는” 기억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시간과 생명이 계절을 따라 공전하듯 시인의 주변을 끊임없이 감시하며 맴돌고 있다. 모호한 ‘5월’의 계절 속으로 은폐되어버린 시간은 모두의 기억에 각인되어 있기에 봄을 편하게 맞을 수 없다. “유행가조차 어색하게 만드는 5월/ 너 끝나지 않는 시간이며/ 시간 밖의 시간이여./ 내 이 끝간 데 없는 매춘을 큰 눈으로/ 큰 눈으로 응시하는 눈빛”은 소중한 청춘의 순간을 기만해버린 데 대하여 결코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살며 우리가 보았던 것과 볼 수 없는 것들이 마치 불필요했던 것처럼 한 곳으로 모여 잠긴 곳이 ‘저수지’다. 시인은 전남 화순군 한천면에 있는 호남 탄좌를 찾아갔을 것이다. 버려져 오래된 것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하게 “고인 물이 무겁다”는 <한천寒泉저수지>에서 과거와 현재의 풍경 뒤로 어슴프레 잠겨있을 모습들을 만나게 된다. “산들은 늙은 몸안에서 끝없이 꽃들을 토해 내고 꽃들이 떨어져 시간이 꼶”아도 무뎌져서 더는 아프지 않다는 나이 사십 줄, 불혹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시인의 현재성에다 시간을 더해가면서 익숙해진 세상의 순리를 알게 된다. 살겠다고 들어온 호남탄좌에서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고 죽어나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아직은 살아있기에 자신만의 자유로운 시간은 남아 있다. 그 시간은 영원하지 않은 “마지막 생의 끝 시간, 그 끝에 앰불런스가 와 멎고 아직은 빈 채인 무덤가에 개나리 피어 호남탄좌 가는 길가에 한 순간 세상이 밝았다”는 찰나를 시적 풍경을 통해 삶의 무게로 전환한다. 그 시간은 어디서건 누구에게나 똑같이 작용한다. <밤 7시 20분 전. 5월 16일. 광화문>은 어떤 모습일까. 때를 가리키는 시간과 계절을 구분하고 시선을 집중하게 하는 장소까지를 나타내는 시제가 이채롭다. ‘광화문’은 정치와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가장 예민한 장소로 정보의 신경추이자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곳이다. 그곳의 시간이라는 순간은 지구 상에서 가장 빨리 소모되어 버리는 곳으로 “속도가 맹렬하게 교직하는 지점”으로 본 것이다. 어차피 광고도 시간 싸움이다. 짧은 시간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하려는 수단이 광고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에 대한 배려가 깊다는 것이다. 도대체 감정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광고판에도 인정머리가 있다는 것이니 “대형 사인 보드에서 쏟아지는 뉴스와 광고들/ 눈이 빠르지 못한 놈, 뉴스의 내용을 곰삭여 생각해/ 보는 놈들을 위해 뉴스는 반복된다”니 다행스럽게도 ‘광화문’은 광고판을 통해 소통과 배려의 장이 이뤄지는 기능을 겨우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국가로부터 대리 행사권을 부여받은 자본주의적인 사랑일지 모른다. 더 많은 사랑을 위해 자본의 수렁으로 깊숙이 뛰어들어야 산다. 그것도 치열한 생을 마감하기 위한 단련의 시간이란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서릿발 쪼는 놈을 본 적이 있다
살얼음 치고 날아오르는 놈을 본 적이 있다
공릉천에서 보는 멧비둘기는
잽싸고 날렵하기가
도시의 공원에서 뒤뚱대는 놈들과는 사뭇 다르다
날갯짓마다 가볍게
힘이 맺힌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나는 이런 느낌의 이유를
가까운 장명산에서 찾은 적이 있다
공릉천을 굽어보는
수리부엉이가 자주 머무는 소나무 아래에는
멧비둘기의 깃털이 흩어져 있었고
수리부엉이의 펠릿에는
멧비둘기의 뼈가 뭉쳐져 있었다
밤이면 소리없이 다가오는 죽음
죽음이 늘
멧비둘기들의 삶을 단련하고 있다.
-(최두석, <공릉천 멧비둘기> 전문, 《깨끗한 새벽》)에서
잽싼 것은 약삭스럽다는 의미와 가까우니 좋은 말이다. 부지런한 것과 비슷한 의미의 재빠른 속성을 아는 ‘공릉천의 멧비둘기’는 자본주의의 속성을 제대로 학습한 것이다. 그런 새들의 행동을 면밀히 살핀 시인의 눈도 재빠르게 움직였을 것이다. 한 톨의 옥수수를 얻기 위해 부리보다 작은 발로 세상을 딛고는 혹시나 끝나버릴 마감 시간에 쫓기듯이 무한 질주를 했을 것이다. 이참에 배를 채우지 못하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무서운 세상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멧비둘기는 부리부리한 작은 눈으로 땅바닥의 먹을 것과 주변의 위험한 것들을 부단히 감시했을 것이다. ‘공릉천 멧비둘기’가 유달리 날렵한 것은 잰걸음과 작은 머리를 수시로 사용했기 때문에 단련이 된 것이다. 그것마저 현대인의 몸과 머리가 따로 노는 습성을 판박이 했다. 그중에도 무리에서 단련을 소홀히 하여 뒤쳐진 놈은 언젠가는 죽음에 내몰릴 수밖에 없다는 것까지도 터득했을 것이다. 그런 일상의 결말은 부지런보다는 약삭 빠른 놈이 잘 사는 세상이란 것을 아는 것도 시간문제다. 여지없이 강도처럼 목숨을 강탈해야만 살 수 있는 더 잽싼 놈이 이 세상은 득시글거린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어눌한 밤을 지키지 못해 몽땅 다 털려버린 사람처럼 멧비둘기의 동료들이 하나씩 사라졌을 것이다. 처음엔 설마 하다 바로 옆의 이웃이 당했을 때 그때서야 무서운 세상이란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멧비둘기 같은 삶을 위태롭게 유지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시인은 달을 가리키며 달까지 도달하는 방향에 있는 모든 대상을 손가락으로 한꺼번에 보여주려 한다. 달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무서운 것들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말해 주고 싶어 한다. 이번 호에 실린 최두석 시인의 시적 대상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다. 그 ‘새’의 습성을 통해 자기만족의 시간을 찾으려는 것이겠지만, ‘새를 본다’는 것은 생명에 대한 존중과 공존하는 생명체로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출발한다. ‘잡는 것’과 바라‘본다’라는 관점은 완연한 차이를 갖고 있다. <새를 본다>에서 시인은 “종마다 서로 다른 부리를 확인하는 것/ 그 부리로 무얼 먹나 궁금해 하는 것” 그리고 “먹어야 사는 생명이/ 팔 대신 날개를 달고서/ 얼마나 더 자유로울 수 있나 살펴보는 것.”을 실행하면서 깨닫는 것은 아껴둔 사랑을 나누려는 것이다. 사랑은 마음속 측은지심에서 비롯된다. 상대방의 행위를 바라볼 때 그 행위 이전의 마음을 간절하게 다독여 발원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한 마음 없이는 좋아하는 마음뿐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리가 없다. <곤줄박이>란 시는 그런 시인의 마음을 잘 드러낸다. “좋아하는 때죽나무 열매를 받들 듯이 쥐고” 주변을 쉴 새 없이 두리번거리는 ‘곤줄박이’의 행동을 보며 사람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형은 면회할 때면
내가 형을 만나러 온 것인지
형이 나를 만나러 온 것인지
자꾸 헷갈려 웃음이 나옵니다
오른손인지 왼손인지 힘을 주어 뻗다가
얼굴을 붉히며 느닷없이 껄껄껄 웃으며
예전 형님으로 돌아오는 모습
예나 지금이나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면회실 투명 유리 구멍 몇 개 사이로
지나간 5년 국가 보안의 세월이
어수록한 말과 함께 들락이고
마포 철길 옆 ‘정집’ 마담의
「만년필 하나」 구성진 노랫가락에
탁자를 두드려 흥을 돋우던
형의 웃음소리가
잔뜩 흐린 포일리 산 몇 번지에 걸려
넘어졌다 불뚝 일어서서 달려옵니다
하얀 옷의 수인이 된 형은 여전한데
생선살 튀김, 무말랭이, 조미 멸치, 고추 참치
김, 오징어젓, 봉다리 봉다리 사식을 차입하여
형의 건강을 비는 정 많은 사무국장 이승철 옆에서
나는 아무 말 생각이 안 나
그저 빙긋이 웃다 남태령 넘어옵니다
-(강형철, <포일리에서_황석영님께> 전문, 《그리움이 끝나면 다시 길 떠날 수 있을까》)에서
단순한 교통 신호만 안 지켜도 단번에 주소지를 타고 며칠 후면 고지서가 날아오는 대한민국은 정보망으로 이뤄진 나라다. 그런 하찮은 것도 그러하거니와 하물며 ‘국가보안법’은 대한민국에서 초법적인 것으로 대항이 불가한 전가의 보도 같은 무서운 법이다. 황석영 선생님께서 국가 보안법에 걸려 꼼짝없이 감옥에 갇혔으니 가히 몸과 마음의 고통은 매우 컸을 것이다. 그런 시절의 추억담을 담아낸 강형철 시인의 시 한 편은 또 다른 그 시절의 삼엄함을 알려주는 기록물인 셈이다. 면회를 간 사람도 반가웠겠지만, 잊지 않고 찾아오는 후배들의 마음도 대단한 동지적 의리라고 봐야 한다. ‘포일리’는 의왕시에 있는 서울 교도소가 있는 곳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황석영 선생님께서 그곳에서 갇힌 심사가 순간순간 불콰하게 뒤틀려 올라 “오른손인지 왼손인지 힘을 주어 뻗다가/ 얼굴을 붉히며 느닷없이 껄껄껄 웃”고는 했을 그 마음이 얼마나 힘들어했을까 싶다. 심각한 표정으로 갇혀있던 ‘국가보안법’의 시간도 되돌아보면 피식 웃고 말 추억이 되어버렸다. 국가는 제대로 국가 의식으로 무장한 국민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몰아다 감방에 넣어 보호했고, 힘들게 살아가는 후배들은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 황석영 선생님께서 좋아했다는 사식으로 넣어줄 “생선살 튀김, 무말랭이, 조미 멸치, 고추 참치/ 김, 오징어젓 봉다리 봉다리” 가득 ‘아현시장’을 돌며 하나하나 챙겼을 것이다. 여하튼 <아현시장>을 돌아다니는 것이 복잡한 세상을 잠깐이라도 잊는 데는 그만이었다. 이것저것 즐비하게 늘어선 좌판대를 훑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뭐니 뭐니 해도 장터에서 쌈 구경하는 것만은 못할 것이다. 지엄한 국가 보안 사항으로 봉인된 “지나간 5년 국가 보안의 세월이/ 어수록한 말과 함께 들락이고/ 마포 철길 옆 ‘정집’ 마담의/ 「만년필 하나」 구성진 노랫가락에/ 탁자를 두드려 흥을 돋우던/ 형의 웃음소리가/ 잔뜩 흐린 포일리 산 몇 번지에 걸려/ 넘어졌다 불뚝 일어서서 달려”온다는 기밀 사항을 국가가 아니라 강형철 시인이 먼저 풀어버렸다. 어차피 국가보안법을 지키는 것은 국가의 몫이 맞다. 그러나 그것을 허무는 것은 가장 이 땅을 사랑하는 민중의 몫이다. 민중은 국가 권력처럼 모가지에 힘줄 필요도 없어, 자존심이고 뭐고 할 것 없이 불편하면 툭툭 걷어차버리는 일들을 다반사로 겪어보았다. 그런 시절 조심조심 호기심이 발동하여 세상에 첫 발을 내딛던 그 시기를 흔히들 청춘이라 말한다. 그런데 청춘을 즐길 짬도 없이 고단한 문학이 먼저 가슴 깊숙하게 들어와 버렸다면, <소격동에서>는 그런 시인의 청년기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경복궁 옆 장미 넝쿨보다 더 붉은 가슴을 가진 사내의 통증을 달랠 길 없어 “담장에 등을 대고 숨을 몰아쉬던 은행원 시절”을 회고한다. 그 골목 어딘가에 있을 하숙집 할머니가 차려준 “밥상을 책상삼아 형광램프 아래 톨스토이 『인생독본』을 읽으며 인생은 성실한 자의 것이라는 말에 밑줄을 긋고 가슴 벅차던 날들.”을 지나온 그 길에서 마흔 살의 시인의 닿고 닿아버린 가슴이 “넝쿨 장미 가시에 찔려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세월이란 것을 안다. 세월은 시간의 정예이다. 시간에 노출되어 무기력해진 사회의 빛이 되겠다고 의기 투합한『5월시』 동인의 7권의 시집에 실린 소중한 시들을 일별 해보았다. 시인 개개인의 사유 너머에 존재하는 시적인 것에 주목하려 했다. 특히 참혹한 과거에 대한 기억을 시라는 장르로 소환하여 무표정한 사회를 표정 있는 문학으로 다가가려 했다. 강형철 시인이 문학을 통해 지켜내려 한 사회관계에 대한 제 문제들은 우리의 불편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문학이 감당해야 할 범주는 사회의 모든 행위에 해당된다고 볼 때 가장 중요한 염치와 도덕에 기반한 윤리의식의 회복까지라면 회원 개개인의 시적 허용도 그 범주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결국은 국가나 사회 제반 사건들은 결여된 윤리의식으로 인한 대립과 갈등으로 촉발된 것이란 견해이기도 하다. 올바른 사회의식의 회복이야말로 건강한 표정이 있는 사회로의 느린 변화지만, 머지않은 미래의 진전으로 나타날 것이 분명하다. 『5월시』정신은 80년 광주의 오월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 정치 사회가 안고 있는 전반적인 부조리와 불합리에서 비롯된 적폐의 문제까지도 외면하지 않았다. 그 부분의 문학적 참여는 크거나 작거나의 문제가 아니라 ‘광주민주항쟁’ 정신으로 계승해야 할 참다운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제 『5월시』동인의 피끓던 가슴과 머리에도 세월은 어김없이 내려앉아 당시 이십 대의 청년들도 40년의 세월을 얹어버렸다. 세상은 무상하지만, 그 뜻이 헛되지 않았다면 그들이 품었던 진정한 정신은 의미 있는 세월이었다고 확신한다. 그렇게 쓴 참된 시들을 접하면서 시적 맥락이 지시하는 위의에 더 많이 다가가지 못한 부족한 점도 있다는 것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