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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소시집 해설○
빗방울 버스를 탄 금빛물고기의 자유
권혁수(시인)
과일은 익어야 향기가 난다. 신현락 시인의 시는 잘 익은 과일처럼 향기롭고 재미가 있다. 그런가하면 어린아이와 노인의 시간적 경계를 훌훌 넘나드는 자유를 맛보게 한다.
우리는 한때 어린이였다. 어린이를 버리고 어른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여전히 어린이가 살고 있다. 꿈을 꾸느라 성장을 거부한 어린이. 그래서 우리가 버린 것은 어린이가 아니라 그 껍질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느 날 어른을 버리고 어린이가 되는 날이 있다.
어린이의 눈으로 어른의 마음을, 어른의 마음으로 어린이의 모습을 그려내는 신현락 시인의 시 5편을 읽는 데는 불과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 우리는 어느 골목 끝에 멈춰 선 막다른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더 앞으로 나아가야하는데, 갑자기 길 없는 길에 멈춰 서버린 불안감을 어쩌지 못한다. 길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그의 시를 고분고분 읽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제시한 자유의 길을 읽기 위해…….
아이가 곁에 와서 종이를 놓고 간다
색종이로 곱게 접은 물고기 한 마리
바다 속을 헤엄쳐 간다
금빛이다
아이가 돌아간 빈 교실에
초록금빛 물결 출렁인다
듣기로는 심해의 어떤 물고기는
수천 리 떨어진 곳에서도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소리통로가 있다고 한다
아이에게도 내가 모르는
바다로 통하는
황금열쇠를 가지고 있나 보다
일상은 늘 남루하다 해도
그 아이의 바다처럼
금빛 물고기처럼
빈 교실에 출렁이는 물결처럼
-「금빛물고기-김종삼 시풍으로」전문
필자는 이런 의문을 가져본다. 아이는 왜 종이를 내 앞에 놓고 갔을까? 종이물고기는 대체 어느 바다 속을 헤엄쳐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부질없는 의문이지만, 독자는 분명히 ‘종이물고기’는 ‘아이’이고 아이는 어제의 ‘나’ 오늘 시를 쓰고 있는 ‘나’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포착할 것이다. 모든 영역과 통하는 언어의 문을 열 수 있는 황금열쇠. 그 황금열쇠를 갖고 아이는 교실 가득 출렁이는 초록금빛 물결을 타넘어 저 드넓은 대양으로 나가려는 욕망의 전형인 것이다. 나의 존재와 다름 아닌 것이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타고르의 시 ‘바닷가에서’의 한 구절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모래로 집짓고 빈 조개껍질로 놀이를 합니다/가랑잎으로 그들은 배를 만들고 웃음 웃으며/이 배를 넓은 바다로 띄워보냅니다/아이들은 세계의 바닷가에서 놀이를 합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어느 한순간 넓은 바다로, 세계의 바다로 떠나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꿈을 확인하는 순간이 있다. 시인처럼 우연히 종이물고기를 얻음으로써 ‘수천 리 떨어진 곳에서도/소식을 전할 수 있는 소리통로’인 황금열쇠를 갖고 싶었던 소망 그리고 저 드넓은 5대양 6대주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싶었던 욕망을 확인하는 것이다. 곧 그러한 과거를 갖고 있어 우리는 결코 ‘금빛 물고기처럼/빈 교실에 출렁이는 물결처럼’ 남루하거나 무기력하지 않은 역동적인 존재인 것이다. 절창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 시 ‘금’에서도 그의 투명한 동심의 감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한때는 그랬네.
땅 위에 금을 그으며
여기 넘어오면 안 돼, 넘어오면 죽는 거야, 하면서
네 편 내 편 서로 금을 밟지 않으려고
금 밖에서 빙글빙글 돌았던 적이 있었네.
나도 그랬네.
누군가 금만 그으면
여기에서 저기로 넘어가지 못하는 줄 알았네.
그날 밤 나와 너 사이에 그어진 금을
내 새끼손가락은 얼마나 넘어가고 싶었던가.
땅 위에 금을 그으며
여기는 내 집이야.
순금으로 지은 집이라고 착각한 옛날도 있었네.
나도 너의 금이었을까.
넘어가서는 안 되는 국경처럼
머나먼 금기의 이역에서
깃발만 펄럭이고 있었을까.
한때는 너와 나
금 밖에서 서성거렸으나
이제는 금 안에서 금 밖을 기웃거리네.
지금 저 금 밖에서 우는 사람아
그곳은 금 밖이 아니고 금 안이라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금 안에서 우는 거라네.
-「금」전문
아이는 금을 긋고 소유권을 주장한다. 절대권력자다. ‘금만 그으면’ 권리가 있고 상대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그러나 또 그 금을 넘고 싶은 욕망의 속내를 드러내준다. 통제를 넘어 무한한 낭만을 얻고 싶었던 그 시절이 우리에겐 어린이의 모습으로 현신한 보살신앙처럼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여기 넘어오면 안 돼, 넘어오면 죽는 거야’라고 서로의 한계를 설정한다. 인식이다. 도덕적 이성의 발로다. 국경을 수호하려는 국가적 계약이다. 순결에게 던지는 경고다. 그렇지만 ‘내 새끼손가락은 얼마나 넘어가고 싶었던가’ 유혹의 고뇌를 고백하고 만다. 그 성역을 깨고 싶었던 고백은 마침내 ‘나도 너의 금이었을까’를 진단하듯 꺼내놓는 화두에 가 닿는다. ‘금’이란 나와 타자의 영역을 확인하고 확인시키는 자아성찰의 증거다. 그 ‘금’은 실로 자신의 내면에 갈등을 일으켜 ‘순금’ ‘깃발’ 같은 일체의 인간적 욕망이 범람하는 것을 막아주는 방파제인 것이다.
‘누군가’의 소유인지도 모르는 땅에 금을 그으며 ‘여기는 내 집이’라고 선언하고 싶었던 시절, 우리는 얼마나 나만의 공간인 ‘골방’이라는 자유를 갖고 싶어 했던가! 따라서 그 집은 ‘순금으로 지은 집이라’고까지 적시해도 조금도 모자라지 않다. 그렇지만 왜 시인은 그 상상을 굳이 ‘착각’이라고 단정 짓는 것일까. 이루지 못한 성적 욕구불만의 허무인가! 아닐 것이다. ‘한때는 너와 나’ ‘금 밖에서 서성거렸’던 남루하지만 진솔한 모습의 자아를 발견한 것이다. 진정 향기로운 나를 찾은 것이다. 망상을 버린 욕망을 버린 구도자의 성찰인 것이다. 나의 모습에서 너의 모습(不二)을 본 것이다.
‘그곳은 금 밖이 아니고 금 안이라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금 안에서 우는 거라네.’
이 구절에 이르러 마침내 우리는 시인의 인간적 연민의 시선을 분명히 확인하게 된다.
시인은 우리에게 ‘금’이 있으되 그 도덕적 사고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도록 z-패스포트를 건네준 것이다.
그의 세 번째 시 자명自鳴을 보자. 그 계시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원시의 어떤 부족은 새벽하늘이 밝아오는 소리에 잠을 깬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후 새벽이면 귀부터 먼저 열려서 창밖으로 나가곤 했다
새벽 쓰레기를 수거하는 차의 종소리, 일 나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실어 나르는
새벽 첫차의 엔진 소리에 섞여 가끔씩 별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기도 했던가
여명의 배후에는 그렇게 여러 소리의 냄새들이 뒤섞여 있지만 그 중에 나는
새소리를 빛의 소리로 듣기로 했다 아무래도 제일 빛에 민감한 종족은
가장 높이 나는 새들일 테니까 하늘의 소리 시원에는 새가 있다고 작정한다
하지만 새벽하늘이 밝아오는 소리라니!
바람도 가지 못하는 공중에 걸린 나도 모르는 울림판이 있는 것일까
새는 밤의 미로를 깃 속에 품고 있다가 지상에서 가장 먼저 그 빛을 감지하는 것이 아닐까
그 빛의 목젖을 순결한 부리로 쪼아대는 자명自鳴이라니!
스스로 밝아오지 않는 자에게 새벽은 그냥 오는 게 아니다
빛에는 냄새가 없다 소리 소문 없이 증발하고 만다
나는 휘발성의 새소리를 들으며 잠이 깬다
빛이 내 몸에 들어와 지난 밤 내 꿈을 밟고 왔던 어지러운 별자리도 우수수 떨어지곤 했다
창을 열고 새소리 나는 곳을 본다 나뭇가지와 나뭇잎에 가려서 그 소리의 시원
보이지 않는다 푸른 나뭇잎 음표만이 바람에 넘실거린다 저렇게 스스로 울면서
자기를 감출 수 있는 자의 경지란 무엇일까 나는 그 나무 위에 내 푸른 귀를 올려놓고
새소리는 이제 잠에서 막 깨어나는 어린 아들의 혓바닥 위에 올려놓고 쫑알쫑알 다시 아침을 시작한다
-「자명自鳴」 전문
원시 인류의 새벽은 인간성을 찾는 시간이었다. 무명의 밤을 지나 인간은 비로소 새벽에 윤리의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 하늘의 계시를 새가 전달해주었던 것이다.
이제 그 원시의 계절을 지나온 시인은 동굴이 아닌 아파트에서 그 원시의 그날처럼
‘창문’을 열고 귀를 기울이고 그 새가 전달하는 하늘의 계시를 듣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싶은 것이다. 푸른 나뭇잎처럼 ‘어린 아들의 혓바닥’처럼 새롭고 신선한 아침을 시작하고 싶은 것이다.
‘자명’의 ‘휘발성’ 새소리를 듣고, 보고 ‘스스로 울면서 자기를 감출 수 있는 경지, 곧 ‘새벽’을 오게 하는 ’스스로 밝아오‘는 ‘자’처럼 순결한 자유인이 되고 싶은 것이다.
책을 읽다가
밑줄을 그어가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덧붙이다 보면
어느새 책은 사라지고 글자 사이로 도마뱀의 꼬리처럼
자꾸 끊어지곤 하던 길들……, 그 막막한 언어의 넓이가
해석의 깊이를 낳는다고 믿었던 때의 일,
나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엄마를 찾는 아이의 울음소리,
……종소리처럼 새가 날아간다거나
광활한 여백의 배경으로 퍼져가는 상像들이
지금까지 내 독서의 풍경이었다
그 풍경의 근원에는 바람이 있다
바람이 아니면 읽을 수 없는 허무의 돋을새김,
바람이 허물고 가는 풍화의 안쪽을 당신이라고 했다
당신에게 가는 길이 없어서, 다만 당신과 나 사이로
그 광야를 배경으로 별처럼 돋아나는 문자를
어루만지고 살았던 이력으로 별과 별 사이를 목측하는
시력이 생겼던 것인데, 그 사이엔……다친 말들처럼
이주해가는 사람들의 영혼이 오독으로 절뚝거리고,
……먼 훗날 바람처럼 날아가는 새가 보이기도,
별에서는 더 이상 음악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해도
시간의 전이를 허락하지 않는 비석이란 없다
어떤 책은 황무지를 배경으로 쓰이는 것이어서
당신의 풍화를 엿보기 위해 황무지를
바람의 배경으로 읽어야 했던 시절도 있었던 것,
모든 배경은 미처 쓰이지 않은 여백의 다른 이름이어서
모래 위에 그리는 바람의 동선을 어림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 생을 건너간 사람도 있었던 거다
책을 읽는 건
외로운 영혼이 물방울처럼 떨어지는 나무의 잠을 털면서
다른 생으로 이주해가는 누군가의 울음소리에
눈을 맞추는 일, 나와 당신 사이를
불어오는 바람에 생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일,
……종소리처럼 새를 날려 보내거나
나무처럼 혼자 오래 남아 있는 것이기도
-「바람이 읽고 간다」 전문
‘새’가 나는 전원 속에서 ‘나무’와 같은 자세로 고요히 독서하며 자아의 길을 찾아 떠나는 구도자 신현락 시인.
우리는 그의 ‘도마뱀의 꼬리처럼 자꾸 끊어지곤 하던 길들……’을 통해 그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지, 가야할 곳이 어디인지 암시를 받는다. 시인에게 있어서 ‘길’은 시인의 자유를 찾아 떠나는 공간을 상징한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당신에게 가는 길이 없’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소통의 길이 없는 서로의 간격에는
‘다친 말들처럼/이주해가는 사람들의 영혼이 오독으로 절뚝거리고,/……먼 훗날 바람처럼 날아가는 새가 보이’는 풍경만 설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마치 성자가 고행의 길을 거쳐 왔듯이 ‘당신의 풍화를 엿보기 위해 황무지를/바람의 배경으로 읽어야 했던 시절’처럼 결국 갖가지 인간적 고뇌와 고난을 통해 확인하고 깨달아가는 자신의 길을 제시한다. 그 길이 자신의 소리와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에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음에도 ‘다른 생으로 이주해가는 누군가의 울음소리에/눈을 맞추는’것이라고 자신의 독서의 길 곧 삶의 방향을 새삼 확인한다. 자화상처럼 ‘나와 당신 사이를/불어오는 바람에 생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길, ‘종소리처럼 새를 날려 보내거나/나무처럼 혼자’ 걷는 신앙의 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한 경계를 넘어 이제 그의 시세계를 다 아울러 들여다볼 수 있는 시 ‘빗방울버스’를 읽어야 할 시간이다.
비 오는 버스에서 시비가 붙었다 차를 잘 못 탔으니 중간에 내려달라는 손님과 내려줄 수 없다는 기사와의 언쟁 끝에 누군가의 입에선가 너, 나이가 몇이냐? 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여기서 나이가 왜 나오니? 라고 되묻는 입장에서도 세월이 주는 무게를 알고 있는 듯 그 이후 잠시 침묵이 흐르고 비가 오는 벌판 한 가운데 손님을 내려주고 버스가 다시 출발할 때쯤 나는 새삼스레 버스를 잘 못 탄 것은 아닌지 불안해졌다 나도 그만 여기서 침묵하든가 아니면 하차해야 하는 나이는 아닌지……
사람들은 나이를 숫자로 기억하지만 나는 저 차창에 흘러내리는 빗방울의 서사로 기억한다 빗방울이 흘러내린 자리로 또 한 방울이 흘러오고 흘러가는 그 아득한 시간의 서사에서 거기 처음처럼 다시 태어나는 몇 소절의 노래들, 그리운 이름들로 기억한다 물론 버스를 잘 못 탄 저 손님처럼 중도하차한 이름도 있다 그 이름들이 하나둘 지워지는 생의 지평선에 가끔씩 구름이 뜨곤 했다 누가 나에게 나이를 물어온다면 나는 구름을 들어보이리라 그리고 되물으리라 내 이름과 당신 이름 사이에서 어느 것이 구름의 나이인지……
몇 개의 이름이 지상에서 사라진 건 불과 몇 정거장 전 일이다 아직까지 몇 억 광년 떨어진 빗방울별에게 가 닿은 부음은 없었다 그건 아주 먼 마지막 이야기이다 처음 빗방울이 떨어진 자리의 꽃잎을 서정이라 한다면 처음과 마지막의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있어야 하는 것일까 단지 중간만 있는 서사라면 나는 언제든지 내 나이를 속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여기에서 내리는 비를 이야기 할 때 당신은 어제 내린 비를 이야기 한다 내가 내일 내릴 비의 예감에 눈이 젖어 있을 때 당신은 오는 비를 맞으며 버스를 기다릴 것이다 끝내 당신이란 이름으로 기다릴 것이다
빗방울의 서사에서 흘러가지 않은 사랑은 없었다 모든 사랑은 내 스스로 떠나오거나 어쩔 수 없는 중력에 의해 떨어지던 빗방울 같은 것이었다 해도 꽃잎 같은 입술로 내 이름을 불러주는 당신의 계절이 있었다 그 많은 이름과 빗방울꽃잎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이 버스는 종점이 있겠지만 한때 동승했던 빗방울의 짧은 이야기의 끝을 기억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다만 불안한 희망 속으로 불려나온 한 방울 눈물의 서사에게, 나는 침묵을 염주알처럼 매만지며 앞으로 몇 정거장을 더 갈 수 있을지 물어 보곤 하는 것이다
-「빗방울버스」 전문
‘비 오는 버스에서 시비가 붙었다 차를 잘 못 탔으니 중간에 내려달라는 손님과 내려줄 수 없다는 기사와의 언쟁 끝에 누군가의 입에선가 너, 나이가 몇이냐? 라는 말이 튀어나왔다/여기서 나이가 왜 나오니?’
신 시인의 시 ‘빗방울버스’ 앞머리다.
우리는 싸우다가 사세가 불리하면 나이를 들먹인다. 유아기적 발상이다.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웃고 나면 ‘비가 오는 벌판 한 가운데 손님을 내려주고 버스가 다시 출발할 때쯤 나는 새삼스레 버스를 잘 못 탄 것은 아닌지’하는 무거움이 낯선 손님처럼 기다린다. 나도 내렸어야 하는 건 아니었는지! 자칭 시인입네 하며 대거리해오는 말싸움에 침묵해야 하는 것인지!
일상의 삶 속에서 살아있음의 성성한 맥을 포착해 내는 감성과 따스한 시인의 체온을 느끼게 하는 시어다.
시인은 ‘나이’라는 시간이 아닌 ‘서사’ 속의 ‘이름’들과 함께 아직 한 세상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에피소드로 단정하게 정리해주고 있다. 그리고 자신은 아직 버스에서 내릴 나이거나 이름을 잊어버릴 망각의 존재가 아니라고 중생들이 동승한 버스의 운행 과정을 차분하게 진단도 한다.
‘누가 나에게 나이를 물어온다면 나는 구름을 들어보이리라 그리고 되물으리라 내 이름과 당신 이름 사이에서 어느 것이 구름의 나이인지……’라고 ‘염화시중의 미소’처럼 단적인 화두 하나를 던져주고 있다. 최상승 선의 경지다.
시인은 이 세계에 내재된 아포리아를 이미 건너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시인’이란 말 속에는 민중들의 삶의 중력을 앞에서 이끌고 가야하는 중대한 책임이 주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구도자의 길처럼 특히 이 시대에. 신현락 시인이 그 역할을 해내고 있다면 지나친 말일까.
신현락 시인의 시는 대체로 동심에 근거를 두고 있어 맑고 재미있게 읽힌다. 정성으로 빚은 포도주 같다. 농부의 마음으로 땀 흘려 가꿔낸 청정 채라고나 할까!
나는 하늘을 나는 새처럼 신 시인의 시를 독자 가운데 가장 먼저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을 너무나 기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봄을 깨우는 종소리 같은 시를 읽을 수 있었다니! 무엇보다도 작금의 혼탁한 정치 뉴스를 잠시 잊고 일상을 떠날 수 있게 해준데 대해 감사한다.
게다가 어린아이처럼 맑은 눈으로 고단한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맛볼 수 있게 해준 데 대해서 더욱 고맙게 생각한다. 무감각하게 지니고만 있었던 나이와 이름 그리고 종착점을 일깨워준데 대해서도 감사한다. 게다가 ‘시인’이란 버스에 동승을 허락 받은 것 같아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체온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고 특히, 어떤 마음으로 시를 왜 써야하는지를 친절하게 일러주어 고맙다.
평소에 만날 때마다 느낀 바지만, 고고한 기품이 넘치는 시적 발상에서 그가 천생 선비라는 기억을 지울 수 없다. 도덕적 가치가 담긴 삶의 무게를 정확히 계량해 내는 눈금이 분명한 저울 같다.
‘가장 높이 나는 새’처럼 ‘하늘의 소리’를 가장 숭고하고 신선하게 듣는 신 시인의 귀를 빌려 나도 그 하늘의 소리를 듣고 싶다. 그러자면 자주 만나야할 텐데……. 필자의 직업이 지방출장을 다니는 게 직업이다 보니, 자주 만날 수 없는 현실이 억울하다.
어지러운 길이 널려있는 나날……. 혹여 ‘길’을 덧들지 않으려면 신 시인의 ‘시’를 틈틈이 펼쳐봐야겠다.
■권혁수 시인
2002년 계간《미네르바》시 등단.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당선. 서울문화재단 『2009젊은예술가지원』시부문 선정. 한국현대시인협회 2010현대시인작품상 수상시집으로『빵나무아래』가 있음
이메일 : hyuksoo120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