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16 08:00 by 김삼웅
1943년 가을, 공립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한 김대중은 만주건국대 진학을 포기하고 해운회사에 취업했다. 징용을 피하기 위해 일본인 회사에 취직한 것이다. 여기서 1년 반쯤 근무하다가 1944년 여름 목포 소재의 일인이 경영하는 전남기선 주식회사의 경리사원으로 들어갔다. 역시 징용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사별한 차용애 여사와 장남 홍일, 차남 홍업군과의 행복한 한때
김대중은 1945년 초에 본적지 하의도에서 징병검사를 받고, 이해 4월 9일 목포에서 큰 인쇄소를 경영하고 있던 차보륜의 딸 차용애(車容愛)와 결혼하였다. 김대중은 21세, 신부는 두 살 아래인 19세였다. 차용애는 목포공립상업학교 동기인 친구의 동생으로 일본 나가노현 이나(伊那)여학교를 다니던 재원이었다.
미군의 일본 폭격으로 위험을 느낀 아버지가 딸의 안위를 걱정하여 고향으로 불러와서 요행히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당시 이나여학교에 다니던 차용애의 친구들은 나고야의 군수공장에 동원되었다가 미군의 폭격을 맞아 모두 사망했다고 한다. 김대중은 뒷날 차용애를 만나게 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운명이란 그렇게 놀랍고 또 아름다운 것이다. 그녀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그녀를 목격했다. 그 또한 운명이리라. 그녀는 하얀 원피스차림에 꽃무늬가 있는 양산을 받쳐 들고는 마치 잰걸음이라도 세고 가듯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채 길을 걷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나서 그냥 가장 단순한 표현으로 ‘한눈에 반해 버리고’말았다. 단정한 머릿결이며 하얀 피부색이 항구의 어수선하고 칙칙한 분위기 속에서 피어난 백합같다는, 그 느낌 그대로였다. (주석 1)
김대중은 ‘첫눈에 반한’ 차용애를 보기 위하여 친구를 만난다는 핑계로 매일 그녀의 집을 찾아다녔다. 그러는 사이에 둘은 자주 만나게 되고 차츰 애정이 싹텄다. 차용애도 오빠의 친구이며 목포의 명문 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했던 잘생긴 남학생의 소식을 익히 듣고 있던 터라 쉽게 마음을 열어 연인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결혼을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차용애의 아버지가 반대하고 나섰다. 언제 전쟁터에 끌려가 죽을지도 모르는 사내에게 어떻게 딸을 줄 수 있느냐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수많은 청년들이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사망통지서 한 장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주변에는 허다했던 것이다. 김대중은 차용애를 만나기 직전에 징병검사를 마친 터라 당장 며칠 뒤에 징집될지도 모르는 처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군대에 끌려가지 않아도 되는 총각 하나를 점찍어 두고 그를 사위로 삼고자 하던 차에 김대중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차용애의 생각은 달랐다. 김대중과 결혼하겠다는 뜻이었다. 다행히 어머니도 딸의 편을 들어 주었다.
김대중의 목포상업학교 졸업 무렵의 사진을 보면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가 수려한 미남형이다.
차용애도 대단히 세력된 미모의 여성이었다. 두 사람은 해방 4개월 전인 1945년 4월 9일 목포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생활에 들어갔다.
언제 징집영장이 나올지 모르는 불안한 나날이고, 공습소개 때문에 강제로 신혼집이 헐리면서 시골로 이사를 해야 하는 전쟁말 혼란기의 신혼생활이었다.
그러던 중에 8ㆍ15 해방을 맞았다. 김대중은 일왕의 항복소식을 라디오를 통해 직접 듣고 일본의 항복소식을 알리는 포스터를 제작하여 목포시내에 붙였다. 아직 일본경찰이 버티고 있는 상황이어서 다소 무모한 행동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이 날은 우리나라가 해방된 날이다. 나는 아침부터 집에서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낮 열 두시에 있기로 된 일본 천황의 소위 조칙(詔勅) 방송을 기다렸다. 나는 그 때 군대에 들어가기 위해 집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설마하니 일본의 패전을 알리는 방송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많은 일본인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전쟁에 대한 새로운 결의 표명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른바 천황의 육성(肉聲) 방송은 일본의 항복을 알리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당시의 감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엉엉 울고 있을 때, 나는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거리로 뛰어 나갔다. 나는 우리나라가 해방되었다, 이제 곧 독립할 것이라는 글귀를 쓴 포스터를 만들어 거리거리에 붙이며 돌아다닌 기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때만 해도 일본군인이 아직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혼자서 열심히 포스터를 붙이며 돌아다녔다. (주석 2)
주석
1) 김대중, <나의 삶 나의 길>, 52~53쪽.
2) 김대중, <행동하는 양심으로>, 44~45쪽, 북미주민주구락부연합회 출판부, 1987.
첫댓글 젊은시절 도전정신이 대단하셨네요...진취적기상과 남자다움이 물씬 풍겨옵니다. 저는 그 나이에 우울하게 신세한탄만 하며 보내고 말았는데 뭔가 자기 인생을 못살고 끌려다니는 것보다 비참한 일도 없습니다. 차라리 김대통령처럼 일찍 자립했으면 더 좋았을 것같네요. 저도 한눈에 반해버린 열아홉살 시절이 있었지요. 근데 저는 일방적이어서 인생에 보탬이 안되고 말았네요. 삶의 자세랄까 배워할 것들이 정말 많으신 위대한 인물이십니다. 다행히 회복하시고 계시다니 안심이 되네요..^^
두 아드님 어린 모습이 너무 귀하고 사랑스럽습니다. 천사 같은 미소를 가졌습니다. 여사님도 우아하고 고운 분이셨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