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도제(赤道祭)란 말 그대로 적도를 지날 때 해신(海神)에게 드리는 일종의 제사(祭祀)로 통과의례라 할 수 있다. 15세기 포르투갈 선박이 적도를 지나면서 한 의식이 유래가 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17세기에 네덜란드와 프랑스 선박이 위험한 해역을 통과할 때 해신(海神)에 대한 희생을 표시한 것이 기원이라 전해지기도 한다. 학창시절 지리부도 책에서 적도(赤道)라고 빨간줄을 그어 놓았듯이 바다 위에도 선을 그어둔 것은 아니지만 이 선(線)을 중심으로 남과 북의 자연적 현상이 정반대의 혹은 현격한 변화를 나타낸다.
영어로는 ‘Neptune's Revel’로 표시하는데 ‘Neptune’은 영어사전에는 명왕성(冥王星)으로 나오지만, 그리스의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을 말하며, ‘revel’은 흥청거리는 축하라는 뜻이니 ‘해신(海神)의 축제’ 정도면 될 것 같다. 한국 해군에서는 포세이돈 대신 ‘용왕(龍王)님’으로 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바다 위에선 바람이 화근(禍根)이었다. 안 불어도 탈, 너무 세게 불어도 문제였다. 태풍이나 기압의 차이로 인한 강풍은 바람이 강해서 현재에도 탈이지만, 적도를 중심으로 북위 30도, 남위 30도까지의 해역은 기온이 높으면서도 기압차가 없어 바람이 없는 곳이 있었다. 이를 ‘적도무풍대(doldrums)’라고 불렀다.
진짜로 그랬다. 일반 선박은 정해진 곳을 향해 항해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어선(漁船)은 어로(漁撈) 작업이 기본임으로, 어군(魚群)이 많은 곳이면 한 곳에서도 여러 날을 머물 때가 있다.
오래전 미 해군에서의 적도제(출처: U.S. Naval Institute Photo Archive )
한때 남태평양의 적도 부근에서 튜나(tuna : 참치) 실습선 승선 시 적도무풍지대를 몸으로 느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바람 한 점 없었다. 바다 표면이 마치 거울같이 맑고 조용해 뱃전에서 내려다보면 얼굴이 비치고, 먹이를 찾아 헤매는 상어들의 몸통이 훤히 보일 정도이면서도 실바람 한 오라기 없으니 그 더위와 답답함은 겪어보지 않고는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옛적 범선(帆船)시대에는 이런 곳을 만나면 그야말로 지금의 태풍보다 더 무서운 결과를 낳았다. 순전히 돛으로 움직이는 배가 바람이 없으니 꼼짝을 못 하고 몇 달이고 망망대해(茫茫大海)에서 표류(漂流)하게 되는 경우를 상상해 보면 짐작이 가겠지만, 이로 인한 물, 식량 등의 부족, 더위, 질병 등으로 인해 승조원들이 모두 죽게 되는 수가 있었다. 그런 상태의 배가 어쩌다 무풍지대를 빠져나오자 그 배를 본 사람들은 ‘유령선(幽靈船)’이라 불렀다고 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무사히 이 지역을 통과하기를 바다의 신(神)에게 기원하며 공물(貢物)을 바치는 의례(儀禮)를 행하였고, 이를 ‘적도제(Neptune's revel)라고 했다 한다. 이런 까닭으로 인간은 종교를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상상이 가능하다.
이러한 풍습은 바다 뿐만이 아니라 지구 곳곳에 지금까지도 특유의 관습들이 전래되어 남아 있을 것이다. 지금이야 적도뿐 아니고 세계 어느 해상에서나 선박의 가항력(可航力)에 따라 무풍지대의 위험은 없지만, 과거의 전통을 없애지 않고, 긴 항해에 지친 승조원들에게 지루함을 덜어주고 즐거움과 위로를 선사해 주는 축제의 형식으로 일종의 문화적, 안전항해를 기원하는 형식으로 변했다고 할 수 있다.
미 해군에서의 적도제(모의 재판) (출처: U.S. Naval Institute Photo Archive )
또한 이를 계기로 훈련선, 실습선, 군함 등에서는 하급승조원들이 상급자에 대한 불만이나 요구사항을 축제라는 형태를 빌어 희극적으로 표시하는 일종의 커무니케이션(communication)적인 행사로 바뀌기도 했 다.
실제로 오랜 기간 땅을 딛지 못하고 거친 해상(海象)에 시달리다 보면 너나 없이 스트레스가 쌓여, 하잘 것 아닌 일을 두고 동료간에 언쟁의 벌어지기도 하여 책임자로선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이런 것들을 풀어주고 도닥거려 주는 것도 중요한 책임이다.
그래서 이 의식은 각종 선박들이 첨단 위성 항해장비를 보유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사라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제물이 옛날의 처녀나 노예 대신 돼지머리로 전환됐을 뿐이다. 단, 해신의 분노를 사지 않기 위해 만찬 메뉴에는 절대로 해산물(海産物)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선교 나침판 위에 제물을 차리고 절하는 필자
적도제는 나라와 선박의 출항지나 선원들에 따라 그 모습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리나라 일반적 선박의 경우는 적도제를 고사(告祀) 형식으로 지낸다. 돼지머리 등을 놓은 제사상을 준비하여 모두가 절을 한 뒤에 제수(祭需)의 일부를 선수(船首)에서 바다로 던져 공물로 바친 후 축제를 즐긴다.
이와 달리 여객선의 경우는 승객 또는 승무원의 일부를 해신(海神)과 그 부하들로 꾸며서 간단한 재판을 벌이기도 한다거나, 승객들을 모아서 간단한 게임 등을 하거나, 적도 통과를 기념해서 큰 만찬을 벌이기도 하여 고객들이 추억을 되새기게 할 수 있는 이벤트적 행사들로 구성된다
해군(海軍)에서는 다른 의미도 담겨 있었다. 일찍부터 미국 해군에서는 「진정한 수병(水兵)으로 거듭나기 위한 통과의례」 즉, 한 번도 적도를 넘어보지 못한 승함(乘艦) 경력이 짧은 선원들에게 경험자가 자신의 경험을 전수한다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고, 초보자들에게 바다의 문화를 체험시키고 육지에서의 관습을 벗겨내고 겉모양만이 아닌 진짜 뱃사람으로 성장시키는 의미의 의식이 되기도 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전의 적도제는 적도를 처음으로 통과한 수병을 축하하는 행사로 사기(士氣)를 증진하고자 하는 의도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 해군에서는 이전에 적도를 통과해본 수병(水兵)은 경험에 따라 ‘쉘백(Shellback)’, ‘신망 높은 쉘백(Trusty Shellback)’, ‘명예로운 쉘백(Honorable Shellback)’ ‘넵튠의 후손(Son of Neptune)’ 등으로 불리며 아직 적도를 통과하지 못한 수병은 ‘올챙이(Pollywog)’나 ‘갓 태어난 올챙이(Slimy Pollywog)’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갑판부는 선교에서
내가 처음으로 적도제를 경험한 것은 실습생 시절 Tuna Long Line(참치선) 훈련선을 타고 남태평양으로 내려갈 때였다. 그날의 일기를 그대로 옮겨본다. 반세기도 훌쩍 넘은 옛적이다.
「1968. 8. 11(일).
오늘이 12일인데 어젯밤 Data Line(날짜변경선)을 지났기 때문에 다시 11일로 하루 더 사용한다. 아울러 Equator(적도)도 넘었다. 이제는 N(북위)에서 S(남위)로, 그리고 E(동경)에서 W(서경)으로 변한 것이다. 1시부터 적도제를 지냈다. 안전한 항해와 풍어를 보이지 않는 해신(海神)에게 빌기 위해서 남십자성(南十字星 : 남반구에서는 북극성이 보이지 않음으로 이를 기준으로 삼는다)을 향해 차례로 절을 하고 술을 따른다. 모두 경건한 마음으로-.
적도제를 마친 후 전 선원이 갑판(Deck)에 모여 한잔씩 나누며 오락회를 가졌다. 통닭도 4인에게 한 마리씩 지급됐다. 모처럼 흐뭇하고 흥겨운 밤이었다. 적도 무풍지대이긴 하지만 저기압 관계상 파도가 계속된다. 두둥실 달이 올랐다. 상하가 없고 귀천이 없이 기분을 푸는 것이다.」
이때 생각지도 않은 사회(司會)를 맡았다. 특별한 능력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니고 아무도 할 사람이 없자, 대표 훈련생이라 억지로 떠 맡겨진 것이다. 어떻게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없지만, 궁하면 통한다 했으니 교직에 있을 때의 경험으로 너스레를 섞어 적당히 넘겼을 것이다.
그리고는 일반 상선(商船)의 항해사 때는 내려온 지시에 따라 내 담당인 선교(船橋 : Bridge)에서 해당 부서원들만 모여서 올렸다. 기원문(祈願文)은 내가 지었다.
후에 선장이 되고 나서는 내가 생각한 구상으로 오더를 내려 각 부서별로 지내도록 했다. 단순히 적도를 지난다는 의미만으로 하지 않았다. 위치(해역)와 시간, 기상(氣象), 항해기간, 선내 상황 등을 고려해서 직업이 선원임을 항상 인식, 삶의 터인 애선(愛船) 정신, 안전, 건강을 각성하는 방향으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 그 시간에 선장은 없는 것으로 하라고 했다. 짧은 순간이나마 각자가 선장이고 기관장이라는 마음으로 느껴보라고….
음복 시간
정해진 시간이 되면 주위 상황을 봐서 길게 기적(汽笛)도 한 번 울리고, 미리 삶아 놓은 돼지머리 등 정갈한 음식을 차리고, 각 부서별로 지냈다. 직급순으로 절을 올리고 음복을 했다. ‘축문’은 부서별로 상황에 맞게 지어 올리도록 했고, 음복하기 전에 각 직장(職掌)들은 각각 담당 부서의 구석구석에 술을 뿌렸다.
그리고 나서는 둘러앉아 음복(飮福)을 하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데, 이때 가끔 하급선원들의 불평이 간접적인 표현으로 불거져 나와 좌중을 웃기기도 하지만 책임자에게는 따끔한 일침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항해사님요! 다음 적도제 할 때 용왕님께 제물(祭物)을 현금으로 해도 되는가 물어봐 주이소.”
가장 직급이 낮은 선원의 요구였다. 요즘도 그렇지만 돼지대가리는 삶기만 하면 웃는 듯 하면서 입을 살짝 벌린다. 그 입속에 선장(船長)이나 고급 사관이 고액권 달러($) 두어 장을 꽂으라는 뜻이다. 그들의 보너스인 셈이다.
「“갑판장님! 옛날에는 처자(처녀)를 제물로 바쳤다카던데, 일 잘 안 하고 밥만 축내는 놈 하나 제물 삼아 물에 집어던집시더.”
“좋지! 최고의 제물이 되겠지. 사망보험금은 우리 모두 같이 분빠이 해묵고.”
갑판장 영감이 유쾌하게 되받는다.」
어느 분이 쓴 글 나온 대목이다. 아마도 평소 말 잘 안 듣고 애먹이는 동료가 있었던 모양이다
첫댓글 '일 잘 안 하고 밥만 축내는 놈 하나 제물 삼아 물에 집어던집시더.'ggggg
적도제.
처음 듣는 단어에 호기심 발동.
불가항력일 때 어찌 신을 찾지 않으리요.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지요? 항해사가 밥 먹기 위한 것이 아니고 늑점이님 성향일 것 같은데요. ^^
친구 중에 이렇게 오발탄 같은 친구가 있어서 간접체험 자~~~알 하고 있심더.ㅎㅎㅎ
오발탄가지곤 모자랴죠. 적어도 육. 칠발탄은 돼야지요. 감사하요. 건강하시고요. ㅎㅎㅎ 부산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망망대해 배 위에서 겪는 여러가지 경험을 잘 표현한 글 감동적입니다.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