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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차 답사자료 (03.28)-원안
마산박물관 문화유산 답사회
경북포항 답사자료
* 일 시 : 2017.03.28 (넷째 화요일) 07:30~18:30
* 일 정 : 현지 사정에 의하여 일부 변경 될 수 있습니다.
- 마산박물관(07:30) -- 포항 장기읍성/향교/북문/척화비/우암, 다산 사적비 -
-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구룡포 근대문화역사관 -
- - - 점심 (참뼈해장국 054-272-3446) - - -
- 호미곶/새천년기념관/수석박물관/상생의 손 -
-연오랑 세오녀상/등대박물관/호미곶등대/이육사청포도시비 -
- 영일민속박물관 – 냉수리신라비 – 냉수리고분군 -- 마산박물관(18:30) -
* 해 설 : 회 장 : 고 명 천 010-3889-1288
* 인 솔 : 이 사 : 김 인 국 010-3863-7570
마 산 문 화 답 사 회
2017-2차 답사자료 (03. 28)
** 포항시 현황
• 신라시대 : 퇴화현, 지답현, 근오지현, 해아현
• 고려시대 : 흥해군, 장기현, 연일현, 청하현 개칭
• 1949.08.15 : 포항읍이 시로 승격 (1시, 1읍, 13면, 1출장소)
• 면적 1,128.76㎢
• 행정조직 2구, 4읍, 10면, 15동
• 인구 521,693명 (2017.01.31.)
浦項 鄕號의 由來
浦項의 지명이 1731년부터 통용되었다는 것은 기록으로 확인되나 현재 남아 있는 史社와 浦項市街 形成이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옮겨지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포항의 마을명칭이 通洋浦(두호동 지역)나 여천의 마을 명칭보다 늦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오늘날의 포항은 慶北 제일의 도시로 성장하여 市가 차지하는 지역의 범위가 크게 확장되어 있고 이에 따라 市勢가 여간하지 않게 되었으나, 조선 중조까지만 해도 포항은 하나의 洞勢로서 오늘날 포항보다 넓었던 영일현에 속했던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포항지역은 예로부터 人類가 서식하기에 부적합한 곳으로 옛 기록(舊邑誌)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兄山城 아래 斤鳥支縣의 북쪽에 거친 돌무더기가 점점히 밝혀 있고 할과 같은 긴 모래밭이 푸른 바다에 다달아 莎草가 만연하고 도처에 습기가 차서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고을이 못된다」 「浦項은 옛적에 영일현 일각의 사람이 적게 사는 시골 벽지 어촌이다」 「通洋浦는 豆毛浦라고도 이르고 지금은 포항시 두호동으로 옛날에 萬戶營이 설치된 곳이며 영일만 水産의 중요 나루터이다」 「영일현은 경주에 소속된 현으로 동쪽 가에 있고 그 지역이 또한 通洋浦에 까지 다달았으니 실로 倭寇가 내왕하기 좋은 요충지다」 위의 기록을 요약하면 포항지역은 원래 영일현 북편의 바닷가로서 사초가 만연하고 습기가 차서 사람이 살기에 부적합한 곳이나 왜구가 침입하는 요충지이기 때문에 통양포에 만호영을 설치하면서부터 벽지에 조그마한 고을을 형성하여 군사요충지로서 영일만 水産의 중요 나루터로서 성장해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성과정을 밟은 이 고장이 조선시대에 余川院과 포항창진을 설치하면서부터 通洋浦라는 단순한 갯벌의 명칭이외에 포항과 여천이라는 동명이 새로 형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조선중기에 불리워졌을 浦項의 鄕號가 어떻게 해서 명명되었는지 확실한 자료를 찾지 못해 현재로서 정확히 밝힐 수 없는 것이나 현존하는 여러 史科를 분석 종합하면 그 윤곽은 잡을 수 있다. 비록 불확실하지만 이에 관한 고찰의 선구적 역할을 하는 <日月鄕誌 >의 추정이 있다. 著者는 「浦項則古之通洋僉使鎭」,「浦項之古號通洋浦」등의 미확인 碑碣기록을 근거로 고려시대에 通洋浦라고 하다가 조선초엽에 이르러 향호를 포항이라고 바꾸어 부르게 된 것은 확실한 것 같으나 그 이유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浦項鄕號는 이 고 장의 古老 相傳하는 傳說에 의하여 첫째, 通洋浦의 '浦字와 兄山項의 '項' 字를 따서 '포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說과 둘째, '浦曲長汀右手執項이란 글에서 '浦자와 '項자를 따라 '浦項이라 호칭하였다는 설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포곡장정우수집항'이란 개울과 활처럼 굽은 백사장의 해변에 오른손으로 목덜미( 淡水와 海水가 부딪히는 곳)를 잡는다는 뜻의 時句인데 이에 부합漁龍沙(東海面에서 松島에 이르는 30여리의 백사장)와 兄山江과 영일만의 자연적지형을 구비하고 있는 浦項이라는 것이다. 필자로서는 오늘날의 浦項市 발전이 通洋浦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은 수긍이 가나 高麗時代의 명칭 通洋浦가 조선시대에 와서 浦項으로 바뀌었다는 주장이나 통양포의 '浦'자와 형산항의 '項자를 따서 명명했다는 설이나 '포곡장정우수집항'의 詩句의 '浦자를 뽑아 불렀다는 말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浦項과 通洋浦의 관계이다. 광의(오늘날의 市범위)로 본다면 通洋浦는 浦項의 前身이되나 협의 (마을 생성당시의 범위)로 본다면 그렇지 못하여 두 마을은 서로 다른 歷史ㆍ地理的 배경을 띠고 달리 발전해온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즉 通洋浦는 광의로 보면 오늘날 浦項市 지역의 영역상 최초의 명칭이라고 할 수 있게 된다.되는 곳이 古老의 傳言에 의하면 일찍이 이 고장에 通洋浦水軍僉使鎭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으나 한일합방시 日帝가 파괴했던 것을 1970년 12월 '합방'60년이 지난 뒤 浦項市史蹟保存會 (會長 : 朴一天)에서 「通洋浦水軍僉使鎭營基址史蹟碑」를 세워 위의 역사적 사실과 의미를 기리고 있는 것은 뜻 깊은 일이다(현재 浦項文化院 뜰에 세워져 있음)
영일(迎日)지방과 포항(浦項)
포항의 역사는 넓게는 영일군(迎日郡), 좁게는 연일(延日)과 흥해(興海)를 모태로 하여 형성 발전되어 왔기 때문에 옛 부터 같은 생활(生活)ㆍ문화권(文化圈)속에서 행정적(行政的)인 이합(離合)을 거듭하였다.이 고장에 언제부터 인류가 거주하였는지 지금으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영일만의 바닷가와 형산강(兄山江)을 끼고 있는 지리적 위치로 보아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을 가능성이 엿보인다.아직까지 구석기(舊石器)유적지나 신석기(新石器)유적이 공식적으로 발굴되지 않아 당시의 삶의 형태가 규명되지 않았으나, 주변의 곳곳에서 무문토기(無文土器)를 사용한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의 문화(文化)흔적이 넓은 분포를 보이고 있음은 이 고장 역사의 시원을 밝혀줄 실마리가 되고 있다.흥해읍의 용곡리(龍谷里), 흥안리(興安里), 남성리(南成里), 호동(虎洞), 동해면의 도구리, 흥해읍의흥안2리의 선돌(立石), 그리고 석부(石斧), 석도(石刀),석검(石劒), 석족(石鏃),반월형석도(半月形石刀),방추차(紡錘車), 맷돌 등 다양하게 발굴되는 유물 등은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부터 이 지역에 인류가 서식하며 문화생활(文化生活)을 영위해 왔음을 알 수 있다.이상의 유적과 유물로 보아 오늘날의 포항(浦項)지역에는 형상강(兄山江)하류를 중심으로 동남쪽의 일월동(日月洞), 남서쪽의 효자동(孝子洞), 서쪽의 이동(梨洞)과 득량동(得良洞), 북쪽의 장성동(長城洞)과 양덕동(良德洞) 등의 주변 구릉지대에 가장 먼저 선사문화인(先史文化人)이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하여 이 고장은 신라(新羅)건국을 전후한 진한부족사회(辰韓部族社會)때에는 소읍국(小邑國)인동자국(動者國)에 소속된 촌락(村落)으로 성장되고, 157년(신라 아달라왕(阿達羅王)4년)경에는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으로, 757년(신라 경덕왕(景德王)16년)에는 임정현(臨汀縣)(또는 오천(烏川))으로고려시대(高麗時代)에는 연일(延日)((영일(迎日))현(縣)으로 개칭된 현명(縣名)의 행정구성(行政區城)의 마을로서 발전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오늘날의 포항시(浦項市)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영일만의 중심 해안지역에 영일(迎日)(연일(延日))이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한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현명(縣名)의 연혁을 보면 그 명칭의 변화가 이두식의 포기(表記)상 '음(音)'으로나 '뜻' 으로나 무리가 없이 연결되고 있다.①音 : 勤耆=근거-근오기-斤烏支-烏良友 烏支 -烏川②뜻 : 迎日(延日), 都祈野, 斤烏支, 日月, 延烏(迎烏), 烏川 도기야(都祈野)는 도지들(해돋이의 '돋이'를 '도기'(都祈)로 표기한 것으로 보면)로서 해가 돋는 들을 뜻하고, 그것은 영일(迎日)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신라시대의 이름인 근오지현(斤烏支縣)의 '斤'은 '도끼근'자로 이것과 '烏'를 붙이면 '도'가 되고 앞에서 '都'로 나타낸 것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斤烏支'도 역시 '도지'즉 '해돋이'라는 뜻이 된다. 그리고 연오, 세오, 오천의 '烏'는 태양을 나타내는 글자로 옛날부터 해 속에는 세발을 가진 까마귀가 있다고 생각해왔다. (일중유삼족오(日中有三足烏) 태평어람(太平御覽)권 3日上&고금운회(古今韻會)그래서 해를 '金烏'라고 불러 왔으며'靈烏'라고도 했고, '日烏'라고 칭한다. 따라서 延烏는 해를 오래 비치게 하는 뜻이 되고, '迎烏'는 해를 맞이하는 뜻이 된다.(延烏와 細烏는 일월지(日月池)에서 제의(祭儀)를 주제하는 사제자(司祭者)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영일권(迎日圈)에 유별나게 많이 나타나는 '烏'字가 든 지명(地名)들이 이러한 사실을 방증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迎日(延日)의 지명은 공식적으로 고려 초부터 호칭되었으나, 뜻으로 본 迎日의(해돋이,해맞이)의 지명, 즉 비공식적 지명은 훨씬 이전부터 호칭되었으나, 뜻으로 본 迎日의 치성(治城)은 오늘날의 영일읍(迎日邑)지역 뿐만 아닌 오천(烏川),대송(大松),동해(東海),포항(浦項)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이 고장과 주위 고을은 주로 해안지역이므로 왜(倭)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 서울을 향하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모든 문물(文物)이 미개하고 풍토(風土)가 척박했던 섬나라 사람인 왜(倭)의 노략질을 받을 기회가 많았던 것이다.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에 나타난 왜인(倭人)의 수많은 동해안(東海岸) 침입(侵入)의 경우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북형산성(北兄山城)을 축조한 경우는 그러한 사실을 밝혀주는 일차사료(一次史料)가 되고 있다.북형산(北兄山)은 예로부터 이 고장의 관문(關門)으로서 형상강(兄山江)이 포항(浦項)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兩山미기( 매기 : 목 )' 중 동남쪽의 해발 265.5m의 산을 말하는데, 신라 때에는 北兄山이라 불렀고, 고려 때부터는 兄山이라고 불러왔다. 서북쪽의 마주 보이는 산은 兄山보다 조금 낮고, 兄山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弟山이라고 부르고 있다.北兄山은 신라 때부터 國防의 要塞地로서 주목되었을 뿐만 아니라 神聖한 곳으로 지목된 곳이다.「兄山은 신라 때에 北兄山이라 불렀으며, 中祀에 들었다」(<新增東國興地勝覽) 卷21<慶州府山川條>),「四瀆祭를 北兄山城에서 지냈다」(<三國史記> 卷42 <雜志> 祭祀倭),「守令이 가서 제사 지낸 곳이 셋 있다. 大王의 神을 모시는 東嶽, 西嶽ㆍ兄山인데, 兄山은 府의 北쪽 30里거리에 있다」는 등의 기록이 이를 밝혀 주고 있다. 現在 王龍時의 작은 암자자리에서 出土되는 기와와 토기조각들이 신라 때의 것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이곳이 中祀를 베풀던 곳이 아닌가 한다.그리고 北兄山城에 봉화대(烽火臺)가 있었음을 유적지에 뿐 아니라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烽燧條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이러한 유서 깊은 형산(兄山)은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경주시(慶州市)에 속해 있으나, 이 고장의 역사적ㆍ지리적 발전으로 보아 弟山ㆍ兄山江과 함께 불가분의 관련을 갖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兄山江은 浦項의 생성(生成)과 발전(發展)의 젖줄로서 兄山과 弟山은 兄山江의 중요 길목인 '양산목'으로서 浦項의 關門으로 상징된다면, 문화재(文化財)가 많은 경주시(慶州市)에 속해 있는 것보다는 크게 발전하는 浦項市 지역에 편입시켜 그 현장을 보호하고 가꾸는 장래를 위해서 바람직한 일이 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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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항과 삼족오
* 삼족오란?
삼족오(三足烏)또는 세 발 까마귀는 고대 동아시아 지역에서 태양의 신으로 널리 숭배를 받은 전설의 새이다. 일부에서는 삼족오의 ‘오’가 까마귀가 아닌 단순히 ‘검은 새’를 의미한다고도 한다. 삼족오는 3개의 다리가 달려있는 까마귀를 의미한다. 그 이유를 들자면 여러 가지가 있는데, 태양이 양(陽)이고, 3이 양수(陽數)이므로 자연스레 태양에 사는 까마귀의 발도 3개라고 여겼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삼신일체사상(三神一體思想), 즉 천(天)·지(地)·인(人)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또 고조선 시대의 제기로 사용된 삼족정(三足鼎)과 연관시켜 ‘세 발’이 천계의 사자(使者), 군주, 천제(天帝)를 상징하는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 포항시와 삼족오
영일만 포항지역은 예로부터 일월의 고장(日月之鄕) 이라고 부른다. 신라초 157년 연오랑세오녀 일월신화의 탄생지로서‘해맞이의 성지’, ‘삼족오 태양신화의 고장’ 이라는 정체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포항의 영일만 남부 지역에는 태양과 삼족오를 상징하는 ‘烏’자와 ‘日月’관련 인명과 지명이 2천년 가까이 밀집되어 현존한다. 燕烏郞(迎烏郞)·細烏女 인명을 비롯하여 迎日(延日)·烏川·都祈野·日月·斤烏支·夫山·日光·光明·中明 등의 지명이 포항지역 무형의 문화유산으로서 삼족오태양의 생명력을 일깨우고 있다.
따라서 영일만 양곡(暘谷 해가처음 솟는 곳)의 포항지역은 고대 한민족문명권의 삼족오태양신화가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이동 전승된 귀착지, 한국 일월신화의 요람으로서 한국의 대표적 태양신화(일월신화)의 성지임을 밝혀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포항지역은 새로운 양곡의 신천지 개척, 즉 일본 건국신화의 출발지로서 연오랑 세오녀에 의해 일본 태양숭배신화를 정착시키게 한 것이다.
* 한국
한국에서는 씨름무덤(각저총), 쌍영총, 천왕지신총 등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 삼족오가 많이 그려져 있다. 《삼국유사》의 기이편(紀異扁) 에는 소지왕 10년 때에 까마귀가 나타나 사람에게 해야할 일이나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는 영험한 존재로 등장한다. 일본의 기원과 관련이 깊은 신라의 연오랑과 세오녀 신화에서도 삼족오가 등장 하는데, 연오랑(燕烏郞)과 세오녀(細烏女)의 이름을 자세히 살펴보면 둘 다 이름에 까마귀 오(烏)자가 붙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까마귀를 빛의 상징으로 보았다는 점을 알려주는 것이다. 고려 시대에는 의천의 가사에서 보이며, 조선 시대에는 일부 묘석에 삼족오가 새겨져 있다. 한국의 삼족오는 중국과 일본의 삼족오와는 달리 머리에 공작처럼 둥글게 말린 벼슬이 달려 있다는 점에서 그 외형에서 확실한 차이점이 있다.
* 일본
일본은 개국 신화에서 천황 군대에 길 안내를 한 태양신의 사자인 일본 삼족오 ‘야타가라스(八咫烏)’가 고대 고분과 각종 유물에서 등장하고 있으며, 아직도 구마노 신궁(熊野本宮大社) 등에서 모시는 대상이기도 하다. 천황이 즉위식 때에 입는 곤룡포의 왼쪽 어깨에는 삼족오가 자수로 놓여 있으며 또한 일본축구협회에서는 삼족오를 엠블렘으로 사용하고 있다.
* 중국
중국서 삼족오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전한시대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춘추원명포(春秋元命苞)》라는 책이며, 산해경(山海經)》에도 ‘태양 가운데 까마귀가 있으니 세 발 달린 까마귀이다(日中有烏謂三足烏也)’라는 삼족오에 대한 기록이 있다. 기원전 4,000년경의 양사오문화 유적지의 토기에서 처음으로 삼족오가 발견되었으며, 라오닝 성 차오양 지구 원태자 벽화묘에도 삼족오 문양이 있다.
** 연오랑 세오녀의 전설
포항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 세오녀 전설이 있는 곳이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 4년(157)에 신라 동쪽 일월동 바닷가에 어부인 연오랑과 베를 짜던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 생략 -- 이때부터 제사를 지내던 곳을 일월지라고 부르며 지금도 이곳을 일월향이라고 부르고 있다.
* 일월지의 설화
때는 신라 제8대 아달라 왕조로 천하가 태평하여 만민이 격양가를 부르고 평화롭게 사는 태평성대였다. -- 생략 -- 이 사실로 인하여 그 못을 해달못이라고 부르고 그 마을을 일월동이라 하고 그 고을을 영일현이라고 고쳐 부르고 그 비단을 국보로 정하고 그 비단을 넣어둔 창고를 귀비고(귀비고)라 부르고 해달못 부근 일대를 도기야라 하였다 한다 (<삼국유기)
* 신라 제8 대 아사달 이사금(서기154-184)때 일이었다. 동해 바닷가 조그마한 오막살이에 연오랑과 세오녀라는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남편 연오랑은 가난하지만 부지런한 어부였다. 그는 아침밥만 먹으면 바다로 나가, 고기를 낚거나 조개를 캐거나, 미역을 따며 하루종일 일을 했다. 남편이 이렇게 바다에서 하루 종일 해가 지도록 일하는 동안 ,아내 세오녀는 밭을 매거나 길쌈을 했다.세오녀의 배 짜는 솜씨는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아줄 정도로 꼼꼼했다. 이렇게 연오랑과 세오녀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정답게 살았다. 어느 날 아침 연오랑은 늘 하듯이 낚시대를 들고 고기를 낚으러 바다로 나갔다. 연오랑은 해변을 거닐며 낚시하기에 알맞은 곳을 찾다가 거북처럼 엎드려 있는 바위하나를 발견하여 신을 벗어 놓고 그리로 올라가 낚시대를 드리웠다. 그런데 그날 따라 고기가 통 잡히지 않았다. "그거 참 이상하다. 오늘은 고기들이 배가 고프지 않은 모양이지?" 점심때까지 헛손질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몸이 기우뚱했다. 깜짝 놀라 주위를 살펴보니 놀랍게도 바위가 통째 두둥실 떠가고 있었다. '아니, 이게 웬일이람?" 연오랑을 태운 바위는 둥실둥실 해뜨는 쪽으로 흘러갔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태양이 연오랑의 머리 위에 바짝 붙어 따라 오고 있는 것이었다. 연오랑을 실은 바위는 점점 빨라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쏜살 같이 푸른 물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한편 점심을 지어놓고 남편을 기다리던 세오녀는 아무리 기다려도 연오랑이 다녀오지 않자 근심이 되어 바다로 나갔다. "오늘은 낚시를 하겠다고 했으니까 저 바위 쪽으로 갔을 텐데." 세오녀는 모래를 밟으며 남편이 자주 가는 바위가 있는 해변가로 갔다. 그러나 남편의 모습은 거기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세오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남편을 불렀으나, 아무데서도 대답이 없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한 곳에 나란히 놓여 있는 신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아무리 보아도 남편의 것이 분명했다.세오녀는 바위를 다 훑어보았으나,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어? 저 바위는 꼭 거북이가 엎디어 있는 것 같은데!" 세오녀가 신을 벗어 놓고 그 바위에 오르자, 이번에도 바위가 둥둥 떠내려가기 시작했다.세오녀를 태운 바위는 점점 빨라지면서 동쪽으로 동쪽으로 흘러갔다. 한편 머리에 해를 이고 동으로 흘러갔던 연오랑은 이윽고 어떤 섬에 도착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일본의 서쪽 해안이었다. 당시 일본은 채 나라를 이루지 못해 부락마다 싸움이 심했다. 전체를 휘어잡는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판국에 연오랑이 바위를 타고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바위를 타고 온 손님을 보자. "저 분은 하늘에서 오신 분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우리들의 왕으로 받들자." 하며 연오랑을 환영했다. 일본사람들의 간절한 부탁에 못 이겨 임금이 된 연오랑은 마음이 무거웠다. 신라에 두고 온 아내가 그리웠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한 신하가 바삐 달려오더니 연오랑에게 아뢰었다. "서쪽 해안에 거북 바위를 탄 왠 여자가 나타났습니다.!" 연오랑이 나가보니 놀랍게도 그것은 세오녀였다.그리하여 세오녀는 일본의 왕비가 되었다. 연오랑이 일본을 다스리게 되면서 일본에는 태평세월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반대로 신라에는 이상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연오랑과 세오녀는가 떠난 이후 신라에는 해도 뜨지 않고 달도 뜨지 않았다. 또 곳곳에서 여우가 나타나 사람들을 놀리고 도망갔으며, 갑자기 도독이 날뛰었다. 아달라 이사금은 갑자기 들이닥친 이변에 고심 하다가 점장이를 불러 그 까닭을 물어 보았다.점장이의 대답은 이러했다. "우리 나라에 갑자기 이런 괴변이 일어나는 것은 얼마 전까지 해와 달의 정기를 지닌 두 분이 함께 동해안에 살고 있었는데, 그 분들이 한꺼번에 왜국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라임금은 그 말을 듣고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 연오랑에게 그 사정을 하소연하고,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연오랑은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나라로 와 임금이 된 것은 하늘이 시켜서 한 일이므로 내가 도로 신라로 돌아 갈 수 없는 일이오. 그러나 신라라면 바로 내가 태어난 나라이므로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없소. 여기 내 아내가 짠 비단이 있소. 이것을 줄 테니 이것을 제물로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다시 해와 달이 나타날 것이오." 사신이 돌아와 그대로 아뢰자 아달라 이사금은 제단을 차려 그 위에 세오녀가 짠 비단을 올려놓고 ,해와 달을 다시 보게 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제사가 끝나자 아닌게 아니라 사라졌던 해와 달이 다시 나타나 온 누리를 밝게 비추었다.세오녀의 정성이 깃든 비단이 하늘을 움직였던 것이다. 해와 달을 되찾은 신라 사람들은 그 뒤로 동해 벌판을 영일(迎日) 이라고 불렀으며,비단을 제물로 바치고 제사 지내던 곳을 도기야 (都祈野)라고 했다. 지금의 영일군 오천면 도구동이 바로 그곳이다. 아달라 이사금은 貴妃庫라는 이름의 창고를 짓게 하고는, 해와 달을 불러낸 신비한 비단을 거기에 보관시켰다. 지금은 그 귀비고는 없어지고 그 자리에 日月池라는 커다란 못이 남아 있는데, 신라 사람들은 가뭄이 들거나 병이 나돌면 으레 이 일월지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 일월(日月)과 관계된 지명 . 영일군(迎日郡) - 1994 년 12 월 31일자로 폐지된 영일군의 명칭은 1914 년 일제에 의한 전국행정구역 통폐합시 흥해군(興海郡), 장?군(長 ? 郡), 영일군(迎日郡), 청하군(淸河郡) 등 4 개군을 합하여 단일 군명을 정할 때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세오녀의 영일을 따 명칭을 정하였으며 당시 영일군 산하 18 개 면중에는 포항면이 포함 되었으며, 1949 년도에 포항읍은 포항시로 승격되었다가 1995 년1월 영일군과 통합하였다. . 도기야(都祈野)-삼국유사에 의하면 일월에 제사지내던 지역이 도기야 로 기록되어 있는데 일제가 도기야라는 지명을 도구(都丘)로 변경시켰음. 현재 동해면 도구리에는 일월사당이 있음. * 일월동(日月洞)-포항시 남구에 일월동이 있음. .中明理-포항시 남구 延日邑에 소재하고 있는 洞으로 연오랑.세오녀 설화에 해와 달이 빛을 다시 찾았을 때 빛이 한가운데 비친 곳이라 하여 중명이라 했음.
* 오천읍(烏川邑)-옛 일월면과 고현면을 합하여 1914 년 오천면이라 했는데 오(烏) 는 까마귀 즉 3 족오라 하여 발이 세 개 있는 까마귀는 민간설화에 해(日)로 표현된다.옛부터 이 지역을 영일 또는 오천이라 했음. * 세계리(世界理)-잃었던 해와 달의 빛을 다시 찾기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낸 제단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곳이며 해와 달이 빛을 찾았을 때 빛이 가장 먼저 비쳐 세계가 밝아졌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어릿불(魚龍불)-원래는 어룡불이라 하였는데 변음되어 어릿불로 불리고 있다. 송도동 송도해수욕장에서 동해면 도구리(都丘理) 해수욕장까지 어릿불이라고 한다.연오랑.세오녀설화에 두 부부가 바위 또는 고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왕과 왕비가 되었다는 설화내용에 고기를 용으로 표현하여 부부가 떠나간 불 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일월(日月)과 관계된 유적 + 일월사당(日月祠堂 )연오랑과세오녀의 설화를 바탕으로 지역민에게 희망적인 정서 문화로 승화시키는 표본으로 삼자는 뜻에서 일월사당을 복원하였다. 지역민의 발전과 안녕을 기원코자 매년 10 월에 천지신명(해. 달)께 제사를 지내는데 구 영일군의 일월문화제가 개최되는 해에도 이곳에서 제를 올렸으며, 1995년부터는 통합포항시에서 통합포항시민의 발전과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일월신제를 올리고 있다
** 장기읍성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읍내리에 자리한 장기읍성은 이 고장의 진산인 동악산에서 동쪽으로 뻗은 등성이에 있으며, 그 구릉 아래쪽으로는 장기천이 동해로 흘러 현내 들판을 형성하고 있다.
일제의 잔혹함은 이 읍성에도 밀려 들어와서 성안의 모든 관아등 시설이 파괴되고 단지 향교만이 이고장 주민들에 의해 복원 유지되고 있을 뿐, 잡초에 묻힌 성벽은 허물어진 곳이 대부분이다. 이 읍성은 일찍부터 동해안을 지키는 다른 읍성들과 같이 중요한 군사기지였음이 그 특성 이라 하겠다.
동해안의 중요 진성을 들면 울산의 처용암지방, 울주군 강동면 정자리지방 양남의 수념지방, 감포, 이곳 장기.포항.영일지방.흥해.칠포지방들인데 이들 지역은 해안선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펼쳐져 있고 삼국시대에는 서라벌을 침공하는 왜구를 방어한 군사기지였고, 고려, 조선시대 에도 같은 역할을 다 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 하는 것은 이들 지역과 경주사이에는 산성들이 있는데 가령 관문성 속칭 만리성은 울산.울주.양남지역 , 양북면의 팔조리산성은 감포지방. 시령산성은 장기지방, 북형산성은 포항. 흥해지방의 후방방어의 군사거점이였다고 할 때 충분한 설명이 된다고 본다.
더우기 시령산성은 포항시 남구 장기면과 경주시 양북면의 경계지점인데 경주에서 옛길을 따르면 감포길을 가다가 추령(관해동재)에서 부처재를 거쳐 기림사 계곡을 건너면 감재에 이른다. 이곳에 산성이 있고 장기와의 거리는 불과 5 ~ 6km 밖에 되지 않는 직행길로 80 ~ 90리 정도이다. 이 길은 경주에서 동북방향으로 포항과 감포의 중간지점이된다. 이러한 지리적 형국 은 장기지방이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결국 장기는 역대에 걸쳐 군사적 요충지로서 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곳 장기의 신라시대 행정구역은 양주 의창군에 속한 지답현이었다.양주는 윈래 삽량으로 지금의 양산이고 그 관할구역은 낙동강 하류지방과 동해 남부지방이다. 의창군은 본래 퇴화군 인데 경덕왕대에 의창이라 개명되고 고려시대에는 흥해군이라 하였다. 의창군은 여섯 현으로 이루어지고 그 관할지역은 지금의 포항시에 안강읍지방이 포함된 것이다. 육현중의 지답현은 경덕왕대에 기립현으로 개명되고 고려조에는 장기현으로 불리웠다. 현종 2년 (1011) 는 동해안의 청하, 흥해, 영일, 울주 등과 같이 성을 쌓았고 경주부 속현으로 공양왕대에는 감무를 두었다. 이때의 축성은 북방의 계원세력과 왜구에 대비한 것으로 장기읍성의 중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조선 태종 15년(1415)에 장기읍성의 지리적 중요성에 따라 수령의 위계를 사품이상으로 높여 무신으로 고관을 임명하여 지현사라 하였다가 세조 5년(1460)에는 독진으로 되었다가 동왕 12년(1467)에 독진을 파하였다. 뒤에 현감으로 고치고 그 밑에 훈도를 두었다.
축성의 기록을 살려보면 단종 2년(1454)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성의 둘레가 174보이고 성 안에 우물 두 곳이 있다. 예종1년(1469)에 지은 경상도속선지리지에는 세종 21년(1439)에 둘로 쌓고 둘레가 3,664척이고 높이는 12척이며 샘이 두곳이고 못이 두곳으로 겨울과 여름에도 마르지 않았고, 군창도 있다. 중종 25년(1530)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석축을 하고 둘레가 2,980척이고 높이는 10척으로 우물이 네곳이고 못이 두 곳이다. 구읍성이 현의 남쪽 2리에 있으며 돌로 쌓아 그 둘레가 468척이고 높이는 12척이고 샘이 두 곳 있다.
이상의 4가지 기록에서 성의 규모를 보면 모두 다르게 되어 있다.이것은 같은 위치의 성을 여러대에 걸쳐 중축한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러나 최소한 두 개이상의 성이 있었던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4의 구읍성은 뚜렷이 위치가 다르게 나타나 있는데 지금은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으나 분명히 고려시대 이전의 고성이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조선조말기 인 고종 23년(1895)에는 장기군 으로 바뀌고 감포, 양남, 양북면을 흡수하고 군수, 좌수와 별감 2인의 관원을 두었다. 이때의 읍성의 군병(병력은 훈련도감포수 74인, 어영정군 26인등 총 2,889인 이었고, 이에 걸맞는 장비도 보인다. 특히 수군 420인이 있는 것을 보아 수륙군을 군수가 지휘 하였다. 이후 일제하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감포읍, 양남면, 양북면이 경주군에 귀속되고 창주면과 서면을 합하여 봉산면으로 개명되고 현내면을 장기면으로 고쳐 영일군에 편입 되었다가 1934년에는 일제에 의해 봉산면과 장기면을 합하여 지행면으로 바뀌어 면으로 격하되고 치소도 성 아래 마을인 하성마을로 옮겨졌으며, 1990년 12월 1일자로 지행면 이 장기면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읍성은 쇠퇴하여 잡초가 우거진 고성지로 허물어진 성벽만 잠자고 있다.
한편 이곳은 벽지로 인정되어 귀양지로도 되었으니 유교의 대가인 우암 송시열과 실학파의 태두인 다산 정약용이 귀양살이 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송시열을 기리는 죽림서원이 세워져 이 고장은 글을 읽는 마을이 되었으며, 이 고장은 정치, 경제, 사회적인 특성이 있는 곳이 아니고 오로지 국방의 일익을 담당한 군사기지로 그 역할을 다 하였던 고장이라 할 수 있다.
* 장기읍성
사적 제386호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 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고려때 처음 이 성을 쌓았는데 동쪽으로 왜적을 막고 북쪽으로는 여진족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현종2년(1011) 당시에는 흙으로 성을 쌓았으나, 조선시대에 와서 돌로 성을 다시 쌓았다고 한다.
성의 형태는 타원형으로 둘레가 1440m이며 3개의 성문과 문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작은 성인 옹성, 성벽 바깥에 사각형 모양으로 덧붙여서 만든 치성을 갖추고 있다. 또한 4개의 우물과 2개의 연못인 음마지(飮馬池)가 있다. 성 안쪽에는 교육기관이었던 장기향교와 관청이었던 동헌 터가 남아 있는데 동헌은 현재 면사무소 안으로 옮겨 보호하고 있다.
산꼭대기에 있으면서 읍을 다스리는 기능도 갖추고 있는 장기읍성은 읍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 장기향교
문화재자료 제327호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장기향교는 조선 태종5년(1405)에 처음 지었으나, 임진외란때 불타 없어지/자선조 33년(1600)에 다시 지었다. 정조 9년(1785)에 마현동으로 옮겨지었고, 1931년 군수 김영수가 읍성 내에 있던 구객관을 수리하고 위패를 모셔 지금의 향교로 전해오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때 서문경. 서극인. 이대임. 이눌 등이 향교에 모시고 있던 위패를 용암석굴에 옮겨 놓아 위패만은 무사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향교를 옮겨 지을때 덕계 임재화가 대대로 살던 자기 집터를 내놓아 향교 재건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제사지내는 공간인 대성전, 교육 기능을 수행하는 강당인 명륜당, 내삼문, 외삼문 등이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그의 제자들과 중국, 우리나라의 성현들을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 책등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 장기향교
장기향교는 태종 5년(1405)에 현의 남쪽 2리에 창건되었으며, 임진병화로 소실되어 선조 33년(1600)에 중건하고, 정조 9년(1785)지방의 교학을 부흥하기 위해 현감 황익진(1784 ~ 1785) 때 마현행단 (구석곡 : 현 장기초등학교 동편)에 이건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방경.서극인.이대임.이눌등이 향교에 봉안해 오던 위패를 용암석굴에 권안시키고 의병을 일으켰기 때문에 건물은 소실되었으나 위패만은 무사할 수 있었고, 향교를 이건할 때 덕계 임재화가 대대로 살던 자기 집터를 희사하여 향교재건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그후 1931년에 군수 김영수가 향사들과 함께 읍성내에 있던 구객관을 수리하여 명륜당을 만들고 대성전을 새로 건립하여 위패를 옮겨 안치 하였다.
장기 향교는 소평위며, 인근 55문중이 매년 춘추 2회(2월, 8월 상정일) 향제를 지내다가, 최근부터는 8월 상정일에만 지내고 있다.
현재 향교에는 대성전.명륜당.신삼문, 동재.장경각. 대문 등의 건물이 보존되고 있다.향교 앞의 하마비는 근래 새로 만들어 세운 것이다.
중요민속자료 제187호이며 지방 교학의 산실이었다.
+ 장기척화비
문화재자료 제224호
척화비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 사람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더욱 강력히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해 서울 및 전국의 중요 도로변에 세우도록 한 비로, 이 비도 그 중의 하나이다.
비는 반듯한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모습이며, 비몸의 네 모서리와 윗변의 양끝을 단정해 다듬어 놓았다. 앞면에는 비문을 새겨 두었는데 내용에는 "서양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는 강한 어투의 경고를 적고 있다.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이후 같은 해에 일제히 세운 것으로,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대원군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납치되면서 대부분의 척화비들은 철거되고, 이처럼 몇 기의 비들만이 곳곳에 남아 옛 역사의 한 부분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이 대원군척화비(大院君斥和碑)의 원래 위치는 장기읍성 내에 있었던 것을 1990. 12. 1 장기면사무소 정원에 이설(移設)하여 보호책을 설치하였다.
+ 장기척화비종 목 문화재자료 제224호 (지 정 일 1990.08.07.)소 재 지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 면사무소 시 대 조선시대
척화비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 사람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더욱 강력히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해 서울 및 전국의 중요 도로변에 세우도록 한 비로, 이 비도 그 중의 하나이다.
비는 반듯한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모습이며, 비몸의 네 모서리와 윗변의 양끝을 단정히 다듬어 놓았다. 앞면에는 비문을 새겨 두었는데 내용에는 “서양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 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는 강한 어투의 경고를 적고 있다.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이후 같은 해에 일제히 세운 것으로,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대원군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납치되면서 대부분의 척화비들은 철거되고, 이처럼 몇 기의 비들만이 곳곳에 남아 옛 역사의 한 부분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원래는 장기읍성 안에 있었으나, 1990년에 장기읍사무소 정원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이 비는 1866년(고종 3) 병인양요와 1871년(고종 8) 신미양요를 겪은 후 서양사람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경고하기 위하여 1871년 4월에 대원군의 명에 의하여 서울·부산을 비롯하여 전국에 세운 비이다.
이 대원군척화비의 원래 위치는 장기읍성 내에 있었던 것을 1951년 4월초에 장기(당시 지행면)지서 입구에서 찾아 현재 장기면사무소 정문좌측 도로변에 세워 두었다가 1990.12.1 장기면사무소 정원에 이설하여 보호책을 설치하였다.
비석의 높이는 전국의 것이 각기 다른데, 장기척화비의 경우는 1.2m로 경남 함양의 것과 같다. 폭도 대체로 40∼45cm가 보편적이다. 재질은 보통 화강암이나 이 비는 사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장방형 판석 모양으로 전면에 각자하였다.
1862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침략해 오는데,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며, 그들과 교역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글을 반포, 쇄국의 의지를 천명하였다. 그 뒤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서울 종로, 부산, 함양, 동래, 부산진 등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이 비도 이 때 세운 것이다.
비문의 형식은 12자를 큰 글자로 내려쓰고, 그 옆에 작은 글씨로 건립 목적과 간지를 적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辛未立"(서양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하는 것이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임을 우리들의 만년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이다.
척화비는 그 후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때 대원군이 청에 납치되고 우리나라가 각국과 교통하자, 이 틈을 탄 일본공사의 요구로 모두 철거되었다.
원래의 위치는 장기읍성 내였으나, 일제 때 분실되었다가 그 후 1951년 4월초 지행지서 입구에서 찾아 현재의 위치에 세웠다.
찾아가는 길
포항에서 포항제철방향으로 가다가 오천을 지나 장기방향으로 929번 지방도를 이용한다. 장기면사무소 정원에 있다.
+ 우암 송시열
우암 송시열 선생은 조선조 숙종 원년(1675) 윤 5월 장기현으로 와 4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숙종 5년(1679) 4월10일에 자신이 머물던 사관안에 홀연히 자생한 느티나무를 베어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 죽교에 올라 거제도로 떠났다. 우암이 머물던 곳의 집 주인이었던 오도전은 우암에게 수학하여 향교의 훈장이 되었고 서유원 역시 끝까지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여 훈도를 받았으며 장기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은행나무 또한 우암이 심었다고 알려져 있다. 우암이 장기를 떠난 후 29년 되는 해 장기에 살고 있던 오도종, 이석증, 황보헌, 이동철, 한시유 등이 죽림서원을 창건하여 배향했다. 장기인들은 우암을 통하여 유학의 진수와 중앙정계의 동향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접할 기회를 가졌고, 아울러 궁벽한 해곡(海曲)이 예절을 숭상하는 유향(儒鄕)이 되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우암은 장기에서 <주자대전차이>와 <이정서분류> 등의 명저를 저술했고 많은 량의 시문(詩文)도 창작했다.
+ 다산 정약용
다산은 1801년 신유년의 천주교도 박해사건으로 그해 3월 9일에 이곳 장기 고을 마현으로 유배왔다가 사위인 황사영이 작성한 백서사건이 발생하면서 관련의혹으로 그해 10월 20일에 서울로 다시 압송되었으니, 7개월간 이곳에 머물렀던 셈이다.
다산은 이곳에 머물면서 장기고을 백성들의 삶의 모습과 고을 관리들의 목민형태를 글로써 남기게 되었으니. 부옹정가(芙蓉亭歌), 기성잡시 27수, 장기농가십장, 아가사, 해랑행, 오적어행, 타맥행 등 130여수가 그것이다. 전하는 시작들은 토속적이고도 사실적이며 비판적이면서도 은유적이다. 그밖에도 <이이술>, <기해방례변>등의 서책도 장기에서 저술하였으나 의금부로의 압송과정에 유실되어 없어졌으니 안타깝기가 그지 없다.
시대적 어려움을 떨쳐낼 사상가로서, 바름을 실천하는 표상적 지식인으로서 현실참여와 서정을 적절히 표현해내는 문학가로서 정성을 다해 살다간 다산의 혼백이 장기에 남아 있다.
** 구룡포 과메기
과메기란?
청정해역에서 갓 잡은 신선한 꽁치를 섭씨 영하10℃의 냉동상태로 두었다가, 겨울철 바깥에 내다걸어 자연상태에서 냉동과 해동을 거듭하여 말린것으로, 옛날 궁중의 고단백 식품으로 불포화 지방산인 EPA와 DHA함량이 많으며 맛 또한 일품이다.
과메기의 유래
과메기는 말린 청어인 ‘관목청어'에서 나온 말이다.꼬챙이 같은 것으로 청어의 눈을 뚫어 말렸다는 뜻이다.영일만에서는‘목'이란 말을 흔히 ‘메기' 또는 ‘미기'로 불렀다.이 때문에 ‘관목'은‘관메기'로 불리다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관'의 ㄴ받침이 탈락되고‘과메기'가 되었다.
동해에는 예로부터 청어잡이가 활발해 겨우내 잡힌 청어를 냉훈법이란 독특한 방법으로 얼렸다 녹였다 하면서 건조 시킨 것이 과메기이며 청어과메기의 건조장은 농가부엌의 살창이라는 것이었다.
농촌에서는 밥을 지을 때 솔가지를 많이 때는데 이 살창은 솔가지를 땔 때 빠져 나가게 하는 역할을 했다.
이 살창에 청어를 걸어두면 적당한 외풍으로 자연스럽게 얼었다 녹았다 하는 과정이 반복되고 살창으로 들어오는 송엽향까지 첨향되었다고 하며 이렇게 완성된 청어과메기는 궁중까지 진상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꽁치를 그냥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걸어두어 자연 건조시키는 것과는 달리 냉훈법에는 조상의 슬기와 지혜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 구룡포일본인가옥거리
일본인의 구룡포 이주는 100여 년 전인 1906년 가가와현 어업단 ‘소전조(小田組)’80여 척이 고등어등 어류떼를 따라 구룡포에 오기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후 고등어 어업의 대근거지가 되면서 일본인들이 대거 구룡포로 이주를 시작해 1932년에는 287가구 1,161명이 거주했다.
그때 당시 이 거리에는 선박경영과 통조림 가공공장 등을 운영하여 부유해진 일본인들이 하나 둘 가옥을 지었고 업종도 다영해져 거리는 날로 번창해졌다.
이 거리는 당시 음식점,제과점,어구류 판매점, 술집, 백화점 등이 들어선 구횽포지역 최대의 상업지구로 성장했으며, 지금도 이 거리에는 당시의 가옥들이 잘 남아 있어서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라고 명명하여 포항시가 복원사업을 통해 보존하고 있다.
+ 대등여관 – 1938년 건축 2층 목조건물, 안이 깊고 각층 방이 많다
+ 일심정 – 90여년전 건축된 2층 목조로 요리점. 복원하여 후루시토 일본식 찻집
+ 후지산 창문집 – 2층 발코니 부분 창문틀에 후지산 문양 조각.‘여명의 눈동자’촬영장소
** 구룡포근대문화역사관(하시모토 젠기치 가옥)
이 건물은 1920년대 가가와현에서 온 하시모토 젠기치(橋本善吉)가 살림집으로 지은 2층 일본식 목조가옥이다.
그는 구룡포에서 매제와 함께 4척의 선박을 운영하면서 선어운반업으로 크게 성공하여 부를 쌓은 사람이다. 건물을 짓기 위해 당시 일본에서 직접 건축자재를 운반하여 건립하였다고 한다.
하시모토 일가가 일본으로 돌아간 후 오랫동안 한국인이 거주하였으나 2010년 포항시에서 매입하여 현재 복원 공사를 마무리하여 ‘구룡포 근대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건물 내부의 부츠단, 고다츠, 란마, 후스마, 도코바시라 등이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 남아 있으며 일본식 건물의 구조적ㆍ의장적 특징을 잘 갖추고 있다.
이 건물은 한국과 일본 건축 전문가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대상으로 삼는 건축물로 그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 한국과 일본의 문화교류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1층 전시실
하시모토가 거주하던 안방에는 부츠단, 고다츠, 이로리 등 당시 일본주택의 전통적인 가구와 소품들이 재현되어 있어 당시의 생활모습을 잘 살펴볼 수 있으며 일본 전통부엌과 화장실도 당시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일본 전통부엌
당시의 생활모습 재현
2층 전시실
하시모토의 딸 방과 손님접대방 등이 있던 공간으로 란마, 도코바시라, 오시이레, 도코노마, 치가이디나, 쵸케쇼잉 등을 볼 수 있다.
창문, 창살 들이 다양한 문양으로 만들어졌으며 이러한 창문, 창살들은 이 집이 부자였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고 장식용 환기창(란마)은 통풍을 중요시한 일본 가옥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란마 (일본식 환기창)
도코노마
오이시레(일본식 붙박이장)
일본식 창틀
** 호미곶 소 재 지 경북 포항시 남구 대보면 대보리 일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호미곶은 호랑이의 꼬리라 하여,한반도의 정기가 서려있는 곳으로 일찍이 16세기 조선 명종때 풍수지리학자인 남사고는 산수비경(山水秘境)』에서 한반도는 백두산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형상으로, 백두산은 호랑이 코,호미곶(虎尾串)은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고 기술하면서 천하의 명당이라 하였다.영일만의 끝부분(포항에서 38㎞)인 호미곶 앞바다는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해역으로 각종 물고기의 회유지이다. 따라서 정치망 어업이 활발하고, 오징어, 꽁치, 고등어, 김, 미역, 전복, 성게 등 각종 수산자원이 풍부하다. 1903년에 만든 국내 최대규모의 등대와 1985년 준공한 국내 최초의 등대박물관이 위치한 이 곳은 전국에서 일출을 가장 빨리볼 수 있는 곳이다. 관광명소이자 청정해역을 보유하고 있어 호미곶(대보면) 자체가 자연공원이라 할 만큼 산세가 수려하고 주변의 웅장하다.
포항은 신라의 천년 수도 경주와 인접하여 그 당시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또 왜구가 일찍부터 출몰한 곳이라서 많은 성곽들이 축조되었다. 그 가운데 일부는 아직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한반도를 호랑이의 형상으로 봤을 때 호랑이의 꼬리처럼 동해로 불쑥 솟아나간 곳에 호미곶(장기곶)이 있다.
호미곶의 해맞이 광장은 새천년 한민족해맞이 축전 개최 장소로 만여평의 부지에 기념조형물, 성화대, 불씨함, 연오랑세오녀상, 공연장 등이 건립되어 있다. 광장진입로에 조성된 유채꽃 단지에는 매년 4월~5월 경에 유채꽃이 만개한다. 이곳 광장의 기념조형물인 상생의 손은 청동소재로 바다와 육지에 각각 설치하여 마주보는 형상으로 상생과 화합을 상징하고 있으며, 변산반도에서 가져온 20세기의 마지막 햇빛, 날짜변경선에 위치한 피지섬과 이 곳 호미곶 새천년 첫 햇빛 등이 합화, 안치된 성화대의 불씨는 각종 국제대회의 씨불로 사용될 계획이다.
+ 새천년기념관
새천년 국가 지정 일출행사개최를 기념하고 민족화합을 통한 통일조국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새천년기념관은 2009년12월28일 개관하여 많은 관광객이 찾는 호미곶의 새로운 명소입니다
• 전시실 : 포항의 지리적 특성, 역사와 문화, 산업, 미래비전 등을 영상과 패널, 디오라라마를 통해 자세히 접할 수 있음
• 바다화석박물관(사설) : 월요일 휴관 (대인 3,000원, 청소년/군인 2,000원, 초등학생 이하 1,000원, 단체 20인 이상은 각 500원 할인(초등생 이하 300원), 4인가족 할인권 7,000원, 장애우 및 국가유공자, 경로우대자는 각 1,000원 할인)
• 한국수석포항박물관 : 월요일 휴관, 무료
• 옥상전망대 : 호미곶 일대 해안선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
+ 해맞이 광장
+ 성화대
+ 상생의 손
+ 연오랑 세오녀상
+ 등대박물관
+ 호미곶등대
종 목 경상북도 기념물 제39호
지 정 일 1982.08.04소 재 지 경북 포항시 남구 대보면 대보리 221 시 대 조선시대우리나라 지도상 호랑이 꼬리부분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 등대이다. 이곳을 ‘호미곶’ 혹은 ‘동외곶’이라고 하는데, 서쪽으로는 영일만, 동쪽으로는 동해와 만나고 있어 일명 ‘대보등대’라고도 한다.
높이 26.4m, 둘레는 밑부분이 24m, 윗부분이 17m로 전국 최대 규모이다. 겉모습은 8각형의 탑 형식으로 근대식 건축 양식을 사용하여 지었는데,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벽돌로만 쌓아올려, 오늘날의 건축관계자들도 감탄을 금치 못한다고 한다. 내부는 6층으로 되어 있으며, 각층의 천장마다 조선 왕실의 상징무늬인 배꽃모양의 문장(紋章)이 조각되어 있다.
조선 고종 7년(1903)에 건립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로, 건축사적·문화재적으로 커다란 가치를 지니고 있다.
+ 이육사 청포도시비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대보리 234-17
내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 '청포도'로 유명한 육사(陸史) 이원록(李源祿.1904~1944)의 시비(詩碑)가 포항시 남구 대보면 대보리 호미곶에 우뚝 서 있다.
경북 안동이 고향인 이육사는 호미곶과 가까운 포항시 남구 동해면 일월동 옛 포도원에서 시상(詩想)을 떠올려 청포도를 지었다고 한다.
시비는 가로 3m, 세로 1.2m, 높이 2.5m 크기로 육사를 기리는 비문과 청포도 시가 새겨져 있고, 시비 조형물 디자인은 영남대 홍성문 교수, 비문은 아동문학가 손춘익씨, 글씨는 서예가 정현식씨가 각각 맡았다.
이육사는 이 시를 통해 풍요하고 평화로운 삶에의 소망을 노래했다. 청포도라는 소재의 신선한 감각과 선명한 색채 영상들이 잘 어울려서 작품 전체에 아름다움과 넉넉함을 준다. 특히 식민지 치하의 억압된 현실은 시인이 꿈꾸는 현실과 대립하면서, 이를 이겨내고자 하는 극복 의지가 담겨 있다.
청포도,하늘,푸른바다,청포 등 청색 이미지와 흰 돛단배,은쟁반,하이얀 모시수건 등 흰색 이미지는 이상적인 세계를 구현하는 상징적인 소재이다. 풍요로운 고향에 대한 정겨운 정서가 듬뿍 담긴 '청포도'는 전설이 풍성하게 연결된 매체로 지금은 없지만 언젠가 고달픈 몸으로 돌아올 손님에 대한 기다림의 정서를 담고 있다.
또 '그가 찾아올 그 날'이란 대목은 억눌린 소망이 밝은 빛 아래 펼쳐지는 때를 의미하며, '청포입은 손님'은 어두운 역사 가운데 괴로움을 겪고 있는 이를 암시하고 있다. '은쟁반'은 화해로운 미래 삶을 향한 순결한 소망을 암시하고 있다.
* 영일민속박물관
향토풍습 및 민속유물을 영구보존하고자 지역 주민등의 뜻을 모아 구 영일군과 영일문화원이 공동으로 헌종 원년(1835년)에 건립된 당시 흥해군의 동헌 건물이었던 제남헌을 수리하여 1983년 10월29일 개관이후 1985년 5월 제2전시실을 신축하여 민속박물관으로서는 국내최초로 1987년 6월 30일 문화부로 부터 박물관으로 지정됨.
+ 제남헌
흥해군(興海郡)의 동헌(東軒)건물이었던 제남헌은 1925년 원래의 자리에서 동남쪽 70m 떨어진 구 흥해읍사무소로 이건하여 흥해읍 회의실로 사용하다가 1976년에 다시 원래 자리인 현 위치에 이건하여 현재 「영일민속박물관」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다. 제남헌은 여지도서(輿地圖書)와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에 나타난 바와 같이 흥해읍성(興海邑城)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흥해읍성은 일제시대 초기에 모두 헐리고, 성(城)에서 나온 돌은 포항축항흥해공사에 사용되었으며, 관아건물도 이때 모두 헐리고, 제남헌만 남았다.제남헌의 기록은 이건시에 나왔다고 하는 도광(道光) 15년(1835년)이란 상량문 외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는데 건립 당시의 상량문인지 중건 상량문인지는 분명치 않다.제남헌은 정면 7칸, 측면 3칸 규모의 일자형(一字形) 건물로 자연석 기단위에 다듬돌 주초를 놓고 원주(圓柱)를 세웠으며, 주두상부(柱頭上部)에는 출목(出目)없이 삼익공(三翼工)으로 장식하였다. 평면은 전통칸(傳統間)을 우물마루로 꾸몄다. 문비(門扉)는 전면의 어칸(御間) 3칸에는 3분합문(分合門)을 달고, 양측의 2칸에는 쌍여닫이 세 살문을 달았으며, 양측면의 전면에는 외여닫이 살문을 설치하였다. 가구(架構)는 5량가(樑架)인데 대량(大樑)위에 초각(草刻)한 판재(板材)를 두어 종량(宗樑)을 받고 종량 위에는 파련대공을 세워 마룻대와 장혀를 받았다. 양측면의 가운데 두 기둥 상부에는 형량(衡樑)을 걸어 대량(大樑)위에 걸치게 하였다.제남헌은 목재와가(木材瓦家)로 팔작지붕 홑처마이며, 조선 헌종(憲宗) 원년(1835년)에 중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회화나무
조선시대 지상학자(地相學者 : 풍수) 이성지(李聖智)가 영남지방의 산세를 조사하고자 경상도에 이르러 흥해를 지날 때 동해 명산인 비학산 정상에 올라 흥해분지를 바라보고, 과연 천년 옛 고을의 승지(勝地)라 하였다고 한다. 당대의 이름난 풍수요, 어전(御殿) 관상감인 이성지라 흥해군수도 그를 소홀히 대접할 수 없어 성대히 잔치를 베풀어 환대를 하였는데, 그 연석에서 이성지가 흥해군수 이하 여러 참석자들에게 말하기를 "흥해는 반드시 다풍질(多風疾)이며,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5대 이상 그 유손이 세거할 곳이 못된다."고 전제하고 그 이유로 "흥해의 지세와 지리를 고찰해 보니 먼 옛날 선사시대에는 큰 호수였을 것이다. 수 만년 동안 호수였던 곳을 동편 낮은 곳의 산맥을 절단하여 그 곳으로 호수의 물을 흘러가게 하여 평야를 이루게 하였으므로 가뭄에는 물 걱정이 없으나 그 반면에 습기가 많을 것이므로 풍다(風多), 습다(濕多)의 피해가 반드시 있어 필시 괴질병이 많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 이 풍습기를 방지하는 방법으로서는 집집마다 회나무를 많이 심어야 할 것이다. 회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하여 습기를 섭취하는 양이 4~5배이므로 지하의 습기를 제거하는데는 최선의 방법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흥해군수는 명령을 내려 이유를 막론하고 집집마다 회나무 심기를 권장하여 물좋고 농사 잘 되고, 또한 사람살기에 적당한 이름난 곳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영일민속박물관 내의 회화나무와 중성1리, 망천리에 서 있는 회화나무는 이러한 전설을 간직한 채 말없이 오가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 냉수리신라비, 중성리신라비 복제물
국보 제264호 ‘포항냉수리 신라비’와 국보 제318호 ‘포항 중성리 신라비’의 복제품을 제작하여 시청사와 영일민속박물관에 설치해 전시하고 있다.또한 신광면 냉수리와 흥해읍 중성리의 비석이 발견된 장소에는 안내판과 표지판을 설치해 그 장소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비문 내용과 역사적 의미를 같이 소개함으로써 현장성을 살리고 역사교육의 장으로 만들었다.냉수리 신라비는 1989년 4월 6일 북구 신광면 냉수리에서 이상운 씨가 밭갈이를 하던 중 발견하여 신고한 것이다.이 비는 신라의 실성왕과 내물왕 두 왕이 진이마촌의 절거리에게 내린 재산 취득 및 절거리 사후 재산 상속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계미’란 간지와 지증왕 등의 칭호로 볼 때 지증왕 4년(503)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이 비문에는 중국 문서에서 발견되는 신라의 옛 국명인 사라(斯羅)가 최초로 나오고 또 임금(지증왕)의 본명이 ‘지도로’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등 신라 상대(上代)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비석에는 앞면과 뒷면 윗면에 231자가 새겨져 있다.중성리 신라비는 2009년 5월 11일 북구 흥해읍 중성리 일원 도로개설사업구간 공사현장 주변에서 동네 주민 김헌도씨가 평편한 돌이 있어 화분 받침대로 사용하려고 집으로 가져가 씻던 중 글자가 드러나 신고한 것이다.비의 앞면에 203자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글이 새겨져 있지 않다. 비문은 신라 관등제의 성립과정, 신라 6부의 내부구조, 신라의 지방통치와 분쟁 해결절차, 사건 판결 후 재발방지 조치 등 신라의 정치적ㆍ경제적ㆍ문화적 상황을 알려주고 있어 역사적ㆍ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제작시기는 지증왕 4년(503)의 냉수리 신라비보다 2년, ‘울진 봉평리 신라비’ 보다는 23년이 앞서는 신라 최고(最古)의 비이다. 특히 중성리비는 중국의 서체와 서풍에 큰 영향을 받지 않은 신라의 자생적이며 토속적인 서체라고 평가되고 있다.
* 영일 냉수리 신라비
종 목 국보 제264호 (지 정 일 1991.03.15.)소 재 지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신광면사무소 시 대 신라지금까지 남아있는 신라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1989년 마을주민이 밭갈이를 하던 중 발견하였으며, 재산분배를 확인하는 증명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형태는 네모난 자연석으로 밑부분이 넓고 위가 줄어드는 모습이며, 앞면과 뒷면, 그리고 윗면의 3면에 글자를 새겼다. 비문은 거의 닳지 않아 눈으로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보존상태가 좋다. 글자는 총 231자이고 서체는 해서체로 보이나, 예서체의 기풍이 많이 남아 있어 비문의 형태와 글씨체면에서 중원고구려비(국보 제205호), 울진봉평신라비(국보 제242호)와 매우 비슷하다.
비문은 절거리라는 인물의 재산소유와 유산상속문제를 결정한 사실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공문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각 부의 여러 귀족들이 참여하여 재산권 분쟁을 처리하고 있는데, 이는 왕권을 강화하기 이전에 미약했던 신라왕권의 한계를 알려주고 있다. 또한 소를 잡아 하늘의 뜻을 묻고 제천의식을 행하던 당시 풍속제도의 실상이 잘 담겨져 있다.
내용중 ‘계미’라는 간지와 ‘지증왕’등의 칭호가 나오고 있어 신라 지증왕 4년(503)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국가에서 세운 비로서 신라의 왕명을 다룬 초기 율령체제의 형태를 보여주어 당시 사회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신라역사 연구와 금석학 연구에도 중요한 유물이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
• 지정분류국가지정문화재 >국보
• 소재지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중성리
• 지정번호제318호
• 지정일시2012.2.22
• 시대신라시대
• 시대신라시대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이제까지의 연구결과를 비추어 볼 때 신라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 비의 발견장소 또한 냉수리 신라비 발견장소에서 약 8km 정도 떨어진 가까운 거리이며, 비문의 내용도 유사한 점이 많다. 비문의 내용은 지방민이 관여된 재산과 관련하여 분쟁이 있었다는 점, 이들 분쟁에 대해 신라의 지배층들이 합동으로 판결을 내리고 있었다는 점, 판결 이후 이들 문제에 대해 재발방지를 명시하고 있었다는 점 등의 유사점이 있다. 이 비문을 통해 당시 신라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내용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 영일 냉수리 고분군
종 목 경상북도 기념물 제95호
지 정 일 1994.04.16소 재 지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냉수리 산78-3외 5필 시 대 삼국시대
한강 이남에서 발굴조사된 6세기 전반의 신라 때 만든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다.
구조는 매우 큰 편이고 특이한 내부 형식을 갖추고 있다. 돌방무덤에는 옆방(측실)이 설치되어 추가장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널길(연도)의 옆면에 부실이 딸리고 현실 안에는 2개의 벽감이 설치되어 있다. 도굴된 상태였으나 관장식, 달개(영락), 금반지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 지역 수장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냉수리 무덤들 주변에는 이 무덤외에도 86기 이상이 분포하고 있어 중요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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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일월지 종 목 경상북도 기념물 제120호
지 정 일 1997.03.17소 재 지 경북 포항시 남구 오천읍 용덕리 일원 시 대 삼국시대
북송리 북천수
ㅇ 지정종별 및 명칭 : 천연기념물 제468호 “포항 북송리 북천수”
ㅇ 소 재 지 : 경상북도 포항시 흥해읍 북송리 477 외
ㅇ 수종 및 수령
- 수 종 : 소나무, 곰솔
- 수 령 : 50~200여년
- 크 기 : 수고 14~16m, 흉고직경 38~60㎝
ㅇ 문화재지정구역 : 5필지, 211,923㎡
ㅇ 지정사유
- 조선 철종 때 흥해군수 이득강이 읍성과 흥해의 진산인 도음산의맥을 보호하고 흥해의 수해 방지를 위해 군민을 동원하여 제방을 쌓고4리에 걸쳐 숲을 조성한 것이 현재에 이어지고 있는 숲으로 조선 후기에 제작된 『흥해현지도』 및 1938년 조사된 『조선의 임수』에도 기록이 남아 있는 등 역사적 유래가 깊은 숲임
- 수해방지림인 동시에 방풍림의 역할을 해 왔으며 정월보름에 마을에서 동제를 지내는 등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크다.**********************************************************************
고석사
경상북도 포항시(浦項市) 장기면 방산리(芳山里) 망해산 아래에 있는 사찰이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때 경주에 있던 궁전 동쪽에서 세 줄기의 서광이 3일간 계속하여 비치므로, 그 빛의 발원지를 찾게 하였더니 망해산 아래 지금의 고석사 바위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한다. 왕이 태사관을 시켜 점을 치게 하니 그 바위를 다듬어 부처를 만들고 절을 지으면 길(吉)하다고 하므로 분황사 주지 혜능을 시켜 바위를 깎아 불상을 만들게 하니 지금의 마애 미륵 의좌상(통일신라)이 만들어 지게 되었다. 이전에는 약사 여래불로 불리었으나 몇 년 전에 수리되기 전의 불상을 확인하기 위하여 작업을 한 결과 우리나라에 3번째로 발견된 의자에 안자있는 형태의 아주 귀한 형태의 석불로 동국대 미술사학을 하시는 문명대교수는 보물급 이상의 석불로 평가를 하고 있다. 이 석불을 봉안한 법당 보광전(普光殿)은 주심포(柱心包) 집으로 정면3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한다. 이 전설 이외에는 정확한 연혁이나 사적을 알 수 없다.
석남사지(石南寺址)의 남파대사비석(南坡大師碑石)
포항지역에서 출생하였거나 활동을 하신 큰 스님들을 보면, 청하 보경사 주지를 지내신 원진국사, 고려 충열왕 때 흥해에서 출생하여 국사의 자리에 까지 오르신 진각국사 배천희, 고려 우왕때 청하현 오두촌에서 태어나신 오암대사, 조선 영조 때 장기에서 태어나신 남파대사를 들 수 있겠다.
특히, 남파대사의 비석은 현재 장기면 방산리 묘봉산 자락에 있는 석남사지에 있는 것으로 조선시대 학문과 서예에 일가를 이룬 계오라는 스님이 비문을 짓고 쓰신 것으로 유명하다.
남파대사의 속성은 월성(月城)이씨, 휘(諱)는 화묵(華?), 자(子)는 자은(自隱), 호(號)는 남파(南坡)로 조선조 영조 경신년에 장기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머니는 허(許)씨다.
화엄경 십지론의 대조종으로 소시의 승과에 급제하여 대선에 제수되고, 그 후에 대사에 이르러 밀양 표충사수호도총섭을 지냈다. 묘향산 보현사에 김부식이 지은 사비에 의하면 보현사는 1042년(고려 정종 8년) 화엄종의 승려인 탐밀과 굉확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그 규모는 240여 칸에 달했고, 1761년(조선영조 37년)에 화재로 불타자 남파, 향악 두 대사가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조선조 때 번창한 선(禪)?교(敎) 양종의 맥이 보광대사로부터 시작해 회당대사, 서악대사, 용계대사, 남파대사로 이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남파대사는 조선조 때 선(禪)?교(敎) 양종을 두루 섭렵한 화엄경의 조종으로 일컬어질 정도의 고승이었다. 남파대사는 만년에 향리인 석남사에 돌아와 체류하다가 순조 정축년에 세상을 뜨니 향년 78세로 입적하였다고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남파대사비의 중요성은 남파대사의 유일한 옛 비석이라는 것과 함께 비문의 글씨 또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는 것에 있다.
남파대사의 비석 내용을 짓고 쓰신 분은 조선시대 명필로 이름을 날린 계오라는 스님이다. 이분의 내력은 1773년(영조49년)~1849(헌종15년). 벽암문파에 속하는 승려로 속성은 안동권씨이다. 자는 붕거(鵬擧)이고 호는 월하(月荷)이다. 아버지는 모현(募賢)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이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7세 때 하루에 1천여 언(言)씩을 외웠으며, 시에도 능숙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1세에 어버이의 뜻에 따라 출가하여 팔공산에서 월암의 제자가 되었으며, 그 뒤 침허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우기(祐祈)의 법을 이었다. 20세에 당을 열어 학인을 지도하였고, 유학자들과 교유하면서 필체나 시문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다.
한때 홍직필이 그의 인품과 학덕을 높이 사서 환속하여 벼슬을 하도록 권유하였으나, 출가야 말로 대장부의 일이라는 서신과 함께 승복을 벗을 수 없음을 천명하였다. 또 효심이 지극하여 자기의 토굴 곁에 따로 방을 마련하고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며, 노모의 눈이 어두워지자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여 시력을 회복시키기도 하였다. 울산 석남사에 있을 때는 밤에 참선하고 낮에는 옥류계곡에서 물을 먹물로 삼아 글씨를 연습하여 명필이 되었다. 60세 이후로는 시문이 수행정진에 방해가 된다하여 붓을 놓고 염불과 참선에만 전념하다가 77세로 가지산 석남사 연등정사에서 입적하였다. 그의 법맥은 선수(善修)-각성(覺性)-진언(震言)-원민(圓旻)-정혜(定慧)-탈원(脫遠)-선옥(禪玉)-위심(偉心)-계오(戒悟)로 이어진다. 저서는 모두 12권이 있었으나 『가산집(伽山集)』 4권만 전한다.
높이170㎝, 폭 80㎝의 화강암인 남파대사비는 현재 포항시 남구 장기면 괴정마을(방산2리) 서쪽 산골짜기(묘봉산 자락)에 있다. 일부 비문이 떨어져 나가는 등 200년 세월의 온갖 풍상 속에 석남사 옛 절터 잡초 속에 홀로 서 있던 것을 지난 2005년 11월 포항시에서 비각을 세웠다.
모포줄(牟浦줄)
중요민속자료 제187호
줄다리기 때 사용되는 줄이다. 모포리에서는 오랫동안 줄다리기 행사가 전해지는데 이때 사용되는 모포줄은 단순한 줄이 아닌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소중히 모셔지고 있다.
뇌성산 아래 골매기당에 있으며, 줄은 마을의 수호신이자 신체(神體)로서 할배신과 할매신을 의미한다. 마을에서는 풍요와 평화를 기원하는 뜻에서 매년 정초에 당제를 지내고, 음력 8월 16일에는 골매기당의 줄을 꺼내어 줄다리기를 하는데 이기는 마을에 풍년이 든다고 한다.
줄다리기는 동서 두 패로 편이 나뉘어 진행된다. 바다 쪽에 있는 마을들이 동편이 되고 산 쪽에 있는 마을들이 서편이 된다. 이 때 사용되는 줄은 맞물리는 부분의 올가미모양 고리가 큰 것이 암줄이고 작은 것이 숫줄로서 동편은 암줄이고 서편은 숫줄이다. 놀이가 끝난 뒤 줄은 다시 골매기당에 모셔진다. 당 내부의 마루바닥 위에 암줄을 또아리 틀 듯 둥굴게 말아놓고 그 위에 숫줄을 올려 놓는데 할배신과 할매신의 교합상태를 보이는 듯하다. 그 모습대로 골매기신으로 모셔지다가 1년에 한 번씩 줄다리기 줄로 이용되는 것이다.
줄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볏짚에 칡넝쿨이나 피나무 껍질을 혼합하여 만드는데 이 모포줄의 경우 정확한 제작시기는 추정하기 어려우나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보통 줄다리기가 끝난 줄은 버려지거나 태워지는데 이곳 모포리에서는 신앙대상물로 모셔두는게 특이하고 다양한 민간신앙의 대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민속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광남서원(廣南書院)
조선 단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1453년 수양대군에게 살해된 황보인(皇甫仁)과 그의 두 아들(錫, 欽)을 제향(祭享)하는 곳이다. 황보인(1387-1453)은 호가 지봉(芝峯)으로 조선 태종 14년 과거에 급제하여 세종14년(1414)에 병조판서가 되었고, 1440년에 평안?함길도 관찰사가 되어 약 10년간 김종서와 함께 6진을 개척하였다. 문종 2년에 영의정이 되고, 중종이 죽은 후 단종을 보좌하다가 계유정난(癸酉靖難)때 살해되었다. 이 때 두 아들도 함께 화를 입었는데, 숙종 때 복관(復官)되었다.
정조15년(1791)에 후손이 창건하여 세덕사(世德祀)라 하다가 순조31년(1831)에 광남서원(廣南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강당인 숭의당(崇義堂)과 제당인 충정묘(忠定廟)와 사우(祀宇) 등이 있다.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황보인의 손자를 단지 속에 숨겨 대보면 집신골에 피난을 와 핏줄을 이어가게 했다는 여종 단량의 비(忠婢丹良之碑)가 뒤뜰에 있다.
현재 서원이 있는 이 마을에는 그이 후손 영천황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단양(丹良)의 비(婢)와 황보(皇甫) 가(家)
단양은 조선조 세종과 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황보인의 여종이다.
때는 계유정난이 일어난 단종 1년 즉, 1453년 10월 10일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기위하여 여러 고명(顧命) 대신을 척살하는 과정에 먼저 김종서와 그 아들을 척살하고 이어 황보인의 장자와 차자 그리고 장성한 두 손자까지 모두 다섯 명을 무참하게 살해하였다. 그 급박한 상황 속에서 단양은 황보인의 젖먹이 손자 황보단을 물동이에 숨겨 머리에 이고 몰래 집을 빠져 나와 800여리를 걸어 황보인의 사위 윤당이 살고 있던 경북 봉화 닭실마을까지 갔으나 삼족까지 멸하는 때라 그곳에 있을수 없어 노자를 얻어가지고 무작정 남쪽으로 도망치다 더 갈 곳이 없는 동해안 끝 마을인 대보 짚신골에서 친자식처럼 단을 키웠다. 단이 성인이 된 뒤에 집안에 대한 슬픈 내력을 말해주었다. 가문을 보존하기 위해 4대를 이어오며 은둔 생활을 하였다. 단의 증손 황보억은 성동리 뇌성산 뒷자락으로 이주해와 세거지를 이루었고 이곳에 숨어산 지 290년만인 숙종 때에 와서야 누명이 풀렸다. 황보인과 그의 두아들(석, 흠)은 관직을 회복하였고, 황보인은 영조로부터 충정공이라는 시호도 하사받았다.
가문의 명예가 회복될 무렵 충비 단양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서원 뒤뜰 단양의 비를 세웠다. 신분을 엄격히 가리던 조선시대 때, 천한 노비의 은공에 감사하여 양반들이 세웠다는 단양의 비는 문화재적 가치를 넘어 교훈적 가치가 더 크다.
뇌성산(磊城山)의 뇌록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 있는 뇌성산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전통 건축물에 사용되는 단청 뇌록은 조선초기부터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조선 후기에 작성된 모든 건축 공사 관련 문헌에서 각각 경상도 장기현 북쪽 12리 천을이산과 북쪽 19리의 뇌성산에서 나는 토산품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이름이 나있었던 것이다.
재료의 하나인 뇌록이 생산되는 곳이다.
뇌록은 궁궐이나 절의 건축물에 단청을 칠할 때 가장 먼저 가칠을 하는 녹색 바탕칠의 재료가 되는 것이다.
생산지는 장기의 영암리에서 모포리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망재)에서 모포리 쪽으로 바라 다보면 모포리(칠전) 뒷산인 뇌성산(봉수대가 있던 곳)에서 학계리 쪽의 산중턱에 움푹 패인 산러리가 그 산지이다.
뇌록을 이 지역 주민들은 「뇌록」또는「매새」라고도 부른다. 그 정확한 뜻은 잘 알지 못하나, 매새는 돌과 돌 사이의 흙(매:매흙의 준말)이 끼인 것 같은 광물(새:광석속에 금분이 끼어있는 잔 말갱이)이라는 의미에서「매새」라 부르게 되지 않았나 생각 된다.
뇌록의 빛깔은 어린 쑥이 올라 올때의 빛깔보다 조금 진한 색을 띄고 있고 청색과 황색을 섞은 색으로 볼 수 있다.
이 뇌록지에는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뇌록을 채굴하고 파인 굴의 깊이가 수직으로 매우 깊어 명주실 꾸러미 서 너 개를 풀어 넣어도 바닥에 닿지 않았다고 하니 그 깊이가 매우 깊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은 매몰되어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고 돌무더기만쌓여있다.
뇌록을 채굴하는 곳을 「매사구디이」 (구덩이) 혹은 「쉰구디이」 라고도 하는데 쉰구디이라고 불려 지게 된 것은, 이곳에서 뇌록을 채굴하던 인부들이 작업을 하던 중에 많이 매몰되어, 동네 주민들이 소문을 듣고 가 보았더니, 그 채굴하던 곳에 「초배기」(대나무로 만든 옛날 도시락 통)가 50여개 발견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쉰명이 죽은 구덩이라 하여 「쉰구디이」라고 한다.
이곳 주민들이 정기적으로 채굴에 종사하였다고 전해지는 이야기는 없고, 나라에서 필요시에만 진공품(進貢)으로 수시로 채굴하였다는 것이다. 옛 문헌의 기록에서도 단청이 필요할 때만 경상감영(慶尙監營)에 명령하여 수시로 채취하였던 것으로 보여 진다.
광복 후 이 뇌록지에 소먹이러 가서 뇌록을 주워 물에 녹여 주먹만 하게 만들어 놓으면 상인들이 구입해 갔다고 한다.
지난 1996년 1월 전문가가 2일간 과거 뇌록 채취장소로 전해지는 뇌성산의 유적을 답사하여 제출한 '뇌성산의 단청안료 유적지 조사의견서' 에 의하면 현지에서 유적을 확인하고, 100그램의 뇌록 조각을 수습한 후 수습된 뇌록 조각을 가루로 만들어 전통 장인들이 하던 방식을 본받아 아교를 가미하여 칠을 해본 결과 조상들이 고건축에 사용했던 가칠(단청칠을 할 때 가장 먼저 하는 녹색의 바탕칠)과 거의 흡사한 색채를 낼 수 있었다 한다.
뇌성산 뇌록의 관련 문헌과 현지조사와 채색실험을 종합해 볼 때에 뇌성산은 과거 우리나라 단청칠의 기본이 되는 안료가 생산되던 유일한 장소임을 알게 된다.
1805년(순조5년) 인정전건영도감의궤(仁政?建營都監儀軌) : 창덕궁 인정전을 짓는 공사기록)의 「갑자(甲子) 2월 경상감영에 보내는 공문에 뇌록 20두(斗)를 장기현에서 조달할 것을 명령했다.」는 자료와 1830년(순조 30년) 서궐건영도감의궤(西闕建營都監儀軌) : 경희궁의 내전을 짓는 공사 기록)의 「경인(庚寅) 3월 경상감영에 뇌록 500두를 장기현에 조달할 것을 명령했다.」는 자료는 이러한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1)동국여지승람 23권(1486)
장기현 土産조에 磊綠 出磊城山(뇌록, 뇌성산에서 출토). 광어(廣魚), 해삼(海蔘), 사어(사어:모래무치), 대구어, 방어, 청어(靑魚), 송어(松魚), 홍합(紅蛤) 藿(곽:미역), 海衣(해의:김), 海獺(해달), 松覃(송담:송이버섯), 麻黃(마황:약초), 丁紛(정분:분색의 안료), 防風(방풍:약초)
2)仁政?建營都監儀軌(인정전건영도감의궤 : 창덕궁 인정전을 짓는 공사기록, 1805년. 순조5년)
갑자 2월 경상감영에 보내는 공문에 뇌록 20두를 장기현에서 조달할 것을 명령함.
3)西闕建營都監儀軌(서궐영건도감의궤 : 경희궁의 내전을 다시 짓는 공사 기록, 1830년. 순조30년)
경인 3월 경상감영에 뇌록 500두를 장기현에서 조달 할 것을 명령함.
4)昌慶宮建營都監儀軌(창경궁영건도감의궤 : 창경궁 내전을 다시 짓는 공사 기록, 1834년. 순조34년)
신묘 7월 경상감영에 뇌록 700두를 보낼 것을 명령함.
이상과 같이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도 없는 귀중한 천연자원이 우리 지역에 있다는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이곳을 문화재 내지는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오래도록 보존하고 관리될 수 있도록 해당관청에서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한다.
참고자료(장기향우회보)
장기 목장성
장기 목장성이 언제부터 실시 되었는 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신라시대(174여개소)와 조선시대(160여개소)에 많은 목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고려 시대에도 그만한 수의 목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초기부터 국내적으로는 관인(官人)이나 지배계급을 위한 역마(驛馬), 승마, 수렵, 상사용(賞賜用)과 국방(國防)으로, 대외적으로는 무역(貿易) 및 조공용(朝貢用)으로 필요하였다. 전국의 마정(馬政)은 병조(兵曹) 및 사복시(司僕時)에서 관장을 하였고 지방 마정(馬政)은 관찰사 밑에 감목관(監牧官종6품)이란 실무 담당자를 두어 관리토록 하였다.
이곳 동을 배환(冬乙背串)의 장기목장은 울산 목장에 소속되었으며, 구룡포읍 석문동에서 동해면 흥환리 까지 이며 마성(馬政) 주위의 4190把(발 약 6.3㎞)이며 삼정동(三政洞)에 목아문(牧衙門)을 설치하며 말을 관장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매년 3월과 10월에 마단(馬壇)을 그곳에 설치하여 제향(祭享)과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말 물 먹이는 못은 50군데로 목장내 백성이 매년 2월에 보수하며, 말이 비와 눈을 피할수 있도록 가가(假家) 19채가 목장내 백성이 거주하는 곳에 있어 여기에 청초(靑草)와 곡초(穀草)를 쌓아 두며, 국마(國馬)는 말일(末日)과 초하루에 242필을 부쳤다는 기록이 있다. 강사리에 있는 해봉사(海蓬寺)의 명월암(明月庵)에서 말목장을 위한 제를 올리도록 하였다고 한다.
흥인군 공덕비(興寅君功德碑)
흥인군 이최응:1815(순조15)~1882(고종19) 조선말기의 문신, 자는 양백(量佰), 흥선 대원군의 형, 흥인군에 봉해졌으며 1865년(고종2) 경북궁 중건때 영건도감제조(建營都監提調)를 지냈으나 쇄국 정치를 반대하여 대원군과 반목이 심했다. 1873년 영의정에 올랐다. 1880년 청나라 제도를 모방 통리기무아문이 신설되자 총리 대신이 되어 개화 정책을 적극 추진했으나 유림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사직하고 영돈녕 부사의 한직을 지냈다.
1882년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를 잠시 지내고 다시 영돈녕 부사가 되었다가 이해임오군란때 난도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는 충익공(忠翼公)뒤에 문충공(文忠公)으로 개시(改諡)되었다.
이 공덕비의 내용은 장기 목장성에 속한 7마을(七防)이 있었는데 모리배들이 세금을 많이 걷어 들여 천여 백성이 살아가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흥인 대감께서 특별히 백성들의 뜻을 살피셔서 조그마한 잘못도 밝히고 많이 거둬들인 고질적인 폐단을 없애 버리며, 그 근원을 뿌리 뽑아 버리니 흩어졌던 백성들이 다시 모이게 되었고 목장전체가 편안하게 되어 공덕비를 세우게 되었다. 비석 총길이 158㎝, 버신 123㎝, 비면넓이 43㎝, 두께 21㎝,이다.
감목관 공덕비(監牧官 功德碑)
감목관(監牧官) 조선시대의 외관직(外官職). 지방의 목장(牧場)에 관한일을 맡아보던 관원으로 대개 부사(府使)나 첨사(僉使)가 겸직하였다. 30개월을 만기로 하는 종6품관으로 정원은 경기도에 5명 (강화·수원·남양·인천·장봉도), 충청도에 1명 (서산), 경상도에 3명(진주·울산·동래) 전라도에 5명(흥양·순천·나주·진도·제주) 황해도에 3명(해주·풍천·장연) 함경도에 3명(함흥·서천·은성), 평안도에 1명(철산)이 있었다.
고종 때에는 중인(中人)과 서족(庶族)으로서 수령(守令)에 천거되려면 우선 감목관을 지내야 한다.
비석 총길이 114㎝, 비신(碑身) 82㎝, 비면(碑面)의 넓이 34㎝, 비석의 폭 15.5㎝, 광서8년(光緖八年, 1882년 고종 19년)에 세워짐.
울목김부찰노연영세불망(蔚牧金副察魯淵永世不忘)
포항시 남구 동해면 흥환리에서 조선시대 장기목장성의 규모와 관활지역을 밝혀주는 비석이 2001년 5월 4일 발견되었다.
흥인군 이최응의 (흥선대원군의친형) 비각 신축을 위해 터고르기를 하던중 발견된 이 비석에는 「울목김부찰 노연 영세 불망..(蔚牧金副察魯淵永世不忘)..」이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가로 32㎝ 높이 75㎝ 두께 22㎝ 크기의 이 비석은 연대는 나와 있지는 않지만 비석이 발견된 인근에 흥인군 이최응과 목장을 관장하던 감목관(監牧官) 민치억의 공을 기리는 불망비가 세워져 있어 같은 시대인 1882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비석에는 울목(蔚牧)이라는 명문이 처음으로 확인된 것으로 볼 때 이는 군마등 말을 키우던 장기 목장성이 울산 목장의 관활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태봉산(胎封山) 황인
이 지역에 와서 향토사(鄕土史)에 빠져 돌아다닌지 어언 30여년, 항상 새로운 자료나 정보를 접하게 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현장 답사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또 나의 관심 밖인 것에 대하여는 소홀하기 마련이다. 그 중 하나가 포항시 남구 장기면 죽정리(竹井里)에 있는 태봉산이다. 몇일전 조항산(鳥項山) 등산길에 정상에서 건너편에 보이는 산 이름을 물으니 태봉산(胎封山)이란다. 앞에 있는 것은 안태봉(혹은 암태봉)이고 건너편 것은 바깥태봉(혹은 숫태봉)이란다. 먼너 조항산에서 가까운 안태봉에 올라 보기로 했다. 정상에 올라 보니 2단으로 돌을 원형으로 쌓아 놓았는데, 위의 것은 지름 2m 50㎝, 높이 60㎝ 이고, 아랫것은 지름 7m, 높이 30㎝로 바닥은 자연석을 고르게 깔아 놓았다. 어찌 보면 죽장면 두마(竹長面 斗麻)에 있는 천제단(天祭壇)과 흡사 하나 크기가 작고 형태도 천제단과는 차이가 난다.
등산 온 이들에게 물으니, 신라시대 왕자의 태(胎)를 묻었다고 한다.
태봉산에 대하여 이 지역의 자료를 찾아보니 영일읍지(迎日邑誌)에는 "면(面)에서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신라(新羅)시대 왕자의 태를 이곳에 봉하였기 때문에 태봉이라 했다. 차부현(嗟夫峴), 일명 조항령(鳥項嶺)이라 하는데 차부현, 조항령 두 산(山)은 우뚝 마주 보고 있다. 다만 웅장하고 위엄이 있으나, 산 자체가 조치해서 태봉산에는 미치지 못한다." 라고 되어 있다. 조선환여승람(朝鮮?輿勝覽)지지(地誌) 영일군편(迎日郡篇)에는 "군(郡)의 서쪽 10리에 있다. 신라때 왕자의 태(胎)를 여기 봉했으므로 태봉(胎封)이라 이름하였다." 일월향지(日月鄕誌)에는 "지행면(只杏面) 대곡리(大谷里) 소재로 해발 100미(米)의 고원지대다. 옛날 신라시대에 왕자(王子)의 산태(産胎)를 안치하였다 하여 태봉산이라 하였고, 신라시대에는 잡인 출입엄금(雜人出入嚴禁)이었다. 하는데 차부현 또는 조항령이라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몇일 후 바깥태봉에 올라 보니 산 정상이 도굴 된 흔적이 뚜렷하고 주변에는 석실(石室)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장대석이나 큰 돌들이 무분별하게 흩어져 있었다.
죽정리(竹井里) 마을 어른들의 말씀중에 옛날 산 정상에 넓고 큰 바위가 땅 높이로 있어 그 위에서 발로 굴리면, 속이 빈 것 같은 쿵쿵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는데 십여년 전에 도굴(盜堀)이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슬픈재와 울음골에 대하여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신라시대 왕자의 태를 태우러 이곳에 왔다가 안태봉과 조항산 사이에 습기와 물이 많이 있어 태를 태우지 못하고 슬픔맘으로 돌아 갔다고 하여 슬픈재라 불리고 있고, 바깥태봉 쪽으로 고개를 넘어 가다가 계곡에서 울음을 참지 못하여 통곡을 하였다 하여 그 계곡을 울음골이라 불린다고 한다.
예로부터 태는 생명을 부여한 근원으로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특히 왕실에서는 아이가 새로 태어나면 태반(胎盤)은 깨끗이 세척한 후 전국에서 길지(吉止)를 골라 이를 묻는 안태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렇게 왕실에서 태를 봉안한 곳을 태실(胎室)이라 하며, 나중에 왕위에 오른 왕자의 태실을 태봉(胎峰)이라 하고 이렇게 가봉(加封)하는 것을 태봉(胎封)이라 하는 독특한 출생 의례(儀禮)를 유지해 왔다고 한다. 특히 안태봉과 바깥태봉은 주변의 산줄기와 통하지 않는 봉우리로 되어 있다. "태봉등록"과 "현종 개수 실록" 등의 기록에 보면 예로부터 왕실(王室)의 태는 주변 산줄기와 통하지 않는 봉우리를 골라 묻었다고 하는 기록도 있다. 원래 태를 묻는 산은 죽은이의 무덤을 쓰는 곳이 아니다, 라는 말이다.
태(胎)는 산자의 장소요, 무덤은 죽은이의 안식처라는 말도 있다.
여러 자료에도 기록으로 남아있고 하루에도 수 십명의 등산객들이 다녀 가는 태봉산이 조선시대에는 붓을 닮았다 하여 문필봉(文筆峰)이라고도 불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조항산을 찿는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안내판이라도 세우고 더 이상 훼손되지 않고 보존 될 수 있는 방법이 강구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장헌문(蔣憲文) 의병대장
장헌문의 자는 무장(武章), 호는 뇌헌(磊軒), 본관은 아산이다. 1870년 5월 9일 장기군 서면 죽곡리(현 장기면 죽정리 죽실마을)에서 태어났다.
1895년(고종 32년)의 민비시해(閔妃弑害)와 단발령(斷髮令)을 계기로 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봉기하자, 1896년 영일 장기에서 1차 거의(擧義), 항일투쟁을 개시하였다. 그 뒤 일제가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 국권을 침탈함을 보고, 김재홍?김복선 등과 함께 재기를 결의하고, 이듬해 5월 300여명의 의병을 모집, 그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그가 이끄는 '장기의진'은 주로 영일군내의 죽장?흥해?청하?장기?경주군 등지에서 활약함으로써 부근의 정환직(鄭煥直)?신돌석(申乭石)의 병진과 협공을 이루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전쟁터에서 많은 병사를 잃고 1908년 5월 7일 총상을 입고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가 체포된 곳은 장기군 내남면 공동(公洞)이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