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왕산 기슭의 명소 찾기
◇ 무계원 : 종로구 창의문로 5가길 2 (부암동 327)
- 종로구 익선동의 요정 오진암 한옥을 이전한 부암동 전통문화공간
무계원의 건물은 과거 종로구 익선동에 있었던 서울시 등록음식점 1호인 오진암(梧珍庵)의 대문을 비롯해 기와, 서까래, 기둥 등 건물 자재를 사용하여 2010년에 지어졌고, 2014년에 개원하였다.
이 건물은 광복 전후에 활동하였던 서화가 이병직(李秉稙)의 주택이었다.
오진암은 1910년대 초 대표적인 상업용 도시한옥으로서 그 희소성과 함께 보존가치가 뛰어날 뿐 아니라, 남북 냉전체제를 대화국면으로 이끈 ‘7·4 남북공동성명’을 도출해낸 역사적인 장소였다.
1953년경에 요정을 낸 오진암은 1970∼80년대 삼청각·대원각과 함께 ‘요정 정치’의 근거지를 이뤘던 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무계원이 위치한 곳은 무계정사(武溪精舍) 터의 일부로 추정된다. 무계정사는 안평대군이 꿈을 꾼 도원(桃園)과 흡사해 안평대군이 조선초의 유명한 화가 안견(安堅)에게 부탁하자 3일 만에 「몽유도원도」를 그렸다. 또한 안평대군이 이곳에 정자를 지어 시를 읊으며 활을 쏘았다고 전해지는 유서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무계원의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는 세미나, 강연, 회의실로 활용되고 있으며, 안채마루, 안마당, 뒷마당 등 부대시설에서는 다양한 문화행사도 진행한다.
◇ 현진건 집터(玄鎭健家址) : 종로구 부암동 329-4
- 소설가이자 언론인, 독립운동가인 현진건이 일제말기에 살았던 집
이 집터는 현진건이 1937에서 1943년까지 살았던 곳이다. 현진건(1900~ 1943)은 일제강점기 소설가이자 언론인, 독립운동가이다.
현진건은 근대문학 초기에 단편소설의 양식을 개척하고, 사실주의 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소설가이다. 그의 작품은 자전적 소설과 민족적 현실 및 하층민에 대한 소설, 역사소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는 친일문학에 가담하지 않은 채 빈곤한 생활을 하다가 1943년 장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2005년 8월 15일,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한국 현대문학에서 염상섭이 리얼리즘의 시초가 되었다면 현진건은 리얼리즘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 소설가이자 가장 한국적인 문학을 쓴 한국문학의 거성(巨星)이기도 하다. 그는 빈처 · 술권하는 사회 · B사감과 러브레터 · 운수 좋은날 · 무영탑 등의 주옥같은 단편소설들을 많이 쓴 대가이다. 또한 그는 사회와 인간 개인에 대한 고찰을 소설에 담아내었다고 평가받는다.
1936년 「동아일보」에서 사회부장으로 근무하던 중에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에 관련되어 옥고를 치른 그는 이듬해 동아일보를 사직하고, 1943년까지 어렵게 살았다.
그는 출옥 후 부암동 이 집에서 생계를 위해 닭을 길렀다. 그러다가 그는 친구의 꼬임에 빠져 미두(米豆 : 현물 없이 약속만으로 미곡을 사고 파는 일)를 하다가 재산을 탕진하면서 술과 가난 속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1943년에 이곳에서 이사를 간다.
그가 떠나고 홀로 남아 있던 집은 60여 년이 흘러 2003년에 초라하게 헐렸다. 폐가로 방치된 그의 집을 문화재로 지정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하고, 경매로 넘어가 소유주가 헐어버려 ‘현진건 집터’ 표석만 설치되어 있다.
◇ 안평대군 이용(李瑢) 집터 : 종로구 부암동 329번지 4호(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2호)
- 안평대군이 산장을 짓고 수양대군에 대적하여 무사를 양성하던 무계정사 터
부암동 주민센터에서 인왕산으로 오르는 길에 소설가 현진건 집터가 있고, 그 옆에는 조선 초 세종대왕의 셋째 왕자 안평대군(安平大君 : 1418∼1453)의 산장(山莊)인 무계정사가 있다.
현재 이곳 주택 내부의 바위벽에는 안평대군이 쓴 ‘무계동(武溪洞)’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으므로 무계정사라 하여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즉 바위의 한쪽 면을 다듬고, 가로로 쓴 글씨는 그 솜씨로 보아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의 필적으로 보고 있다.
이곳을 무계동이라 한 것은 수석(水石)이 맑고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 중국의 무릉도원(武陵桃源)의 계곡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졌다. 일찍이 안평대군이 도원(桃園)에서 노닐던 꿈을 꾼 후 꿈속에서 놀던 장소를 찾아다니다가 이곳에 당도하여 무릉도원과 같으므로 산장을 짓고, 무계정사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설이 있다.
안평대군의 이름은 용(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낭각거사(琅珏居士)·매죽헌(梅竹軒)이며, 시호는 장소(章昭)이다. 안평대군은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詩文)과 글씨에 뛰어났으므로 영릉, 곧 세종대왕릉의 신도비(神道碑) 글씨도 그의 솜씨였다. 또한 그림과 가야금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안평대군은 단종이 즉위한 해에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가게 되자 외교적인 주도권을 빼앗겼다.
그러자 안평대군은 이곳에 무계정사를 짓고, 함경도의 이징옥(李澄玉)을 시켜 경성(鏡城)에 있는 무기를 서울로 옮기는 한편 장사(壯士)들을 모아 병력을 양성하였다. 그러나 명나라에서 귀국한 수양대군에 의하여 실권을 박탈당하였다.
무계정사가 건립되기 전에 이 터는 안평대군의 작은 아버지인 효령대군의 집터였으며, 이 건물은 안평대군의 아호를 따서 비해당(匪懈堂)이라고도 칭하고, 무이정사(武夷精舍)라고도 칭하였다. 안평대군은 이곳에서 글을 읽고 활을 쏘는 등 심신을 단련하였다.
성현(成俔)이 쓴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의하면 조선 초에 명나라 사신 예겸(倪謙)이 조선에 왔다가 현판에 쓰인 글씨를 보고 “이 글씨는 보통 솜씨가 아니다. 그 사람을 꼭 만나보고 싶다”고 하므로 세종대왕은 안평대군을 만나보게 하였다. 안평대군을 만난 예겸은 그 필체를 흠모하여 그의 글씨를 많이 받아 갔다. 그 뒤에 중국에 간 조선 사람들이 훌륭한 글씨라 하여 사 가지고 돌아오면 그것은 안평대군의 필적(筆跡)이었으므로 안평대군이 흐뭇하게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단종실록에 보면 성녕대군의 종 김보명(金寶明)이 안평대군에게 “보현봉 아래 명당에 집을 지으면 장손(長孫)에 이롭고 만대에 왕이 일어난다.”라고 거짓으로 꾸민 풍수설을 말하자 이를 믿은 안평대군이 무계정사를 지은 뒤 “나는 산수(山水)를 좋아하고 속세(俗世)를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핑계를 대었다는 것이다. 이에 세종의 후궁 혜빈(惠嬪) 양씨가 단종에게 “안평대군이 사직을 위태롭게 하기를 꾀하려고 많은 무뢰배를 모으고, 무계정사를 지었으니 이를 마땅히 막아야 한다”고 밀계(密啓)하였다.
1453년(단종 1) 10월 10일, 한명회·권람 일파가 수양대군을 왕위에 등극시키려고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을 죽였다. 그 당시 “사람들이 무계정사(武溪精舍)가 흥룡지지(興龍之地)라고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라는 모함을 하여 안평대군은 두 아들과 함께 무계정사에 갇히게 되었다. 이어서 안평대군은 강화도 교동(喬洞)으로 귀양 가서 사약을 받았으므로 36세의 젊은 나이로 타고난 재주를 모두 펼쳐 보지 못하고 요절(夭折)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무계정사가 계유정난 2일 후인 10월 12일과 그 다음날에도 철거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어 의정부에서 논의되었으므로 역모(逆謀)의 터전으로 간주되어 이 당시에 헐렸음을 알 수 있다.
◇ 반계 윤웅렬 별장 (磻溪 尹雄烈 別莊) : 종로구 부암동 348번지(서울 민속자료 제12호)
- 1906년에 윤웅렬이 건축한 별장으로 부암정(傅岩亭)이라고 알려진 건물
이 별장 은 자연환경이 아름다운 인왕산 기슭에 지은 조선시대(1900년대)의 별장이다. 대문간채·사랑채·안채가 현존한다. 시내에서 자하문(紫霞門) 고개 넘어 세검동 쪽을 바라다 본 좌측 언덕 위 높은 자리에 터를 잡은 집이다.
대문간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ㅡ자형 건물이다. 방과 곳간이 있다. 사랑채는 ㄷ자형이다. 정면이 4칸. 좌우 날개에 각 2칸씩인 1칸통 구조이다. 중심 건물에 곳간이 있는 특이한 건물로 사랑방은 서쪽 날개 3칸을 차지하고 있는데 안마당쪽은 폐쇄하고, 바깥쪽을 향하고 있으며 쪽마루가 설비되었다.
안채는 원칙적으로 ㄱ자형평면이나 건너방 앞부분이 반칸 안마당쪽으로 돌출하면서 이그러진 ㄷ자형이 되었다. 돌출부분 마루 밑으로 아궁이가 있어 건넌방에 불을 지피도록 되었다. 안채는 대문 동북측에 위치하며 남향하였다.
사랑채와 가깝게 있어 처마가 지근한 거리에 있다. 남향한 중심부가 정면 2칸 측면 칸반통의 대청이고 향좌측이 건넌방이고 우측에 2칸 넓이의 안방이다. 이어서 부엌과 찬방이 있다.
대청 전면 기둥에 문얼굴을 만들고 궁판이 있는 띄살 사분합을 달고 창호지를 발랐고, 문밖에 좁은 쪽마루를 내어 건너방에서부터 찬방까지 계속시켰다. 편의의 도모이다. 건넌방 돌출부에도 창을 달았는데 머름대 위에 궁판 없이 띄살무늬 네짝을 설치하였다. 굴도리집이고 5량집의 가구이며 겹처마이다.
윤웅렬(磻溪 尹雄烈 : 1840~1911)은 윤치호(尹致昊)의 부친이고, 윤보선 대통령의 큰 할아버지이다. 윤웅렬은 조선 말기의 무신이자 개화파로 경술국치 후 일본으로부터 조선 남작을 받은 친일 반민족행위자이다. 윤웅렬은 별기군의 총책임자였다. 윤웅렬은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으며, 약간의 일본어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1882년 임오군란을 피해 잠시 조선을 떠나 일본 나가사키에서 아들 윤치호와 함께 지내기도 했다. 1884년에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갑신정변에 가담했고, 1894년에 군부 대신으로 있던 중 춘생문 사건(春生門事件)에 가담하였으나 실패하자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이 별장은 윤웅렬이 1904년에 서울에 전염병이 유행하자 별서를 갖고자 이곳에 터를 잡았다. 이 별서는 1905년에 시공하여 이듬해에 완공하였다.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양옥과 접목시킨 중국 상해의 건축물들을 보고 영감을 받아 2층 벽돌 건물만 건축했다. 이후 이 별서는 윤웅렬의 셋째 아들 윤치창(尹致昌)이 상속 받아 2005년에 한옥을 증축해 오늘날의 부암정(傅岩亭)이 되었다.
부암정은 광복 후에 주인이 여러번 바뀌었다. 부암정은 2006년에 반계 윤웅렬 별장으로 문화재 명칭이 변경되었다.
◇ 범혜사 (梵慧寺) : 종로구 창의문로5가길 30-1
- 조선시대의 사찰로 보봉스님에 의해 재건되었다
범혜사는 조선시대의 사찰로 태고종의 보봉스님에 의해 재건되었다. 이 사찰은 여러 차례의 재건과 보수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범혜사는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조용한 분위기로 알려져 있어 명상과 평화로운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장소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 자하미술관 : 종로구 창의문로 5가길 46
- 서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미술관
자하미술관은 서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미술관이다. 도심에서 멀지 않으면서도 북악산과 인왕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이 미술관은 1층과 2층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2층 전시실에서 내려다보는 인왕산 절경이 특히 아름답다.
이 미술관에서는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아름다운 건축물과 더불어 미학적, 인문학적 바탕을 토대로 한 같은 시대의 신진, 중진 작가들의 기획전을 만나볼 수 있다.
* 관람료 : 2,000원
◇ 청계동천(靑溪洞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