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호]
감춰지거나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황정산
지금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는 많은 이름들로 불린다. 얼마 전까지 IT시대, 글로벌 시대라 불려 졌지만 이제 그것을 넘어 제4차 산업혁명시대라고 말해지기도 한다. 더러 비판적으로 지금의 시대적 흐름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피로사회’나 ‘투명사회’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떤 이름으로 불리건 현대 사회의 뚜렷한 하나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바로 통합과 단일화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넓혀놓은 소통의 가능성과 정보의 양적 확대가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단일한 문화와 생활양식으로 아주 빨리 통합시키고 있다. 우리는 실시간으로 세계 모든 나라의 뉴스를 듣거나 볼 수 있고 SNS을 통해서 현실세계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과 소통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많은 것들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주류와 대세에서 밀려난 많은 것들은 사라지거나 잊혀 질 운명을 감수해야 한다. 수많은 토착어들이 사라지고 여러 지역의 소수민족의 문화들이 더 이상 계승 발전되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고 있다. 오직 자본의 논리와 그 힘에 의해 지지받는 것들만이 살아남는 그런 시대를 지금 우리는 살고 있다.
손택수 시인의 시들은 바로 이런 현실에서 소멸해 사라지거나 눈에 띄지 않게 감춰진 것들에 주목하는 특별한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 오고 있다 내가 모를 누군가
지나온 거리에서, 잊어버린 여름 강변에서,
더는 가지 않는 메타세쿼이아 숲을 지나,
귀에 익은 걸음으로 오고 있다
연못을 치는 빗소리, 웅덩이를 물고기 등처럼
가르고 지나가는 자전거 바퀴 소리,
...(중략)...
내 안에서 더 분명해지는 소리
오고 있다 누군가 틀림없는 누군가
누군가가 되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
강을 건너오고 있다 휑한 다리를 건너오고 있다
아파트 현관 앞 자동 점멸등을 깜박이고 있다
나가보면 아무도 없고 그저 허하기만 해서
가만히 맥박처럼 짚어보는 누군가
오직 오고 있는 속에서만 있는 누군가
- 「가만히 맥박처럼 짚어보는 누군가」 부분
이 시에서 오고 있는 누군가는 이미 가고 없는 누구이다. “나가보면 아무도 없고 그저 허하기만 해서/ 가만히 맥박처럼 짚어보는”이라는 표현에서 이미 없어진 누군가 때문에 시인은 허전함과 쓸쓸함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자전거 바퀴소리”라는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자전거처럼 오래되고 그래서 아련한 것이고 속도와 변화에서 빗겨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이 세상을 바삐 살아오면서 또는 세상이 변하고 발전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잊고 지낸 것들이다. 시인은 문득 그런 것들을 떠올리고 그리워하고 있다.
다음 시에서도 이와 비슷한 자전거의 이미지를 잘 활용하고 있다.
옆에서 핸들 한쪽을 잡고 부축을 한다
슬며시 뒤로 가서 잡은 듯 만 듯
손을 놓았을 때도 부축하는
손을 느낄 수 있도록
어느 순간은 손을 떼고 배를 밀 듯 놓아준다
나의 교수법은 특별한 것이 없다
언제든 손을 뻗을 수 있는 간격을 두고 쫒아가는 것뿐,
계속 페달을 밟아요 제가 뒤에 있으니 안심하구요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가다 시침 뚝 떼고 뒤로 물러서는 것 뿐
혼자서 잘도 굴러가는 자전거는 뿌듯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뭔가 쓸쓸하기도 하다
다들 저렇게 떠나가는 거겠지
뒤에서 나는 늘 손을 흔들고 있지
그래도 서운할 것까지는 없다
내가 좋아서 한 일이 아닌가 또한
돛처럼 옷을 부풀리며 질주하던 나의 자전거 뒤에도 그 옛날
중심을 잡아주던 손이 여전히
놓은 손을 차마 놓지를 못하고 있으니
- 「자전거를 보내다」 전문
자전거는 흔히 추억을 떠올린다. 처음 자전거를 탈 수 있었을 때의 기쁨과 설렘, 누군가와 함께 자전거를 탔을 때의 그 따뜻한 행복감 등을 누구나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누군가에게 자전거를 가르쳐 주던 경험을 떠올린다. 자신이 중심을 잡아주며 어떤 사람에게 자전거를 가르쳐주었지만 그 사람은 자전거와 함께 자신의 손을 떠난다. 그것은 자신이 바라던 일이지만 또한 자신에게 쓸쓸함을 남겨주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많은 것들과 이별한다. 다만 먼지를 쓰고 묶여 있는 낡은 자전거처럼 희미한 추억만 남아있다. 뭔가 중요한 것을 위해 바삐 살아왔지만 자전거가 떠올리는 이 많은 것들은 우리의 손을 아쉽게 떠나 잊혀 져 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세상이 급격하게 변하고 나의 삶이 각박하더라도 잠시 눈을 돌려 주변을 살펴보면 아직 남아있는 소중한 것들이 많이 있다. 손택수 시인은 바로 이런 것들에 눈을 돌리기도 한다. 이런 시인의 따뜻한 눈길이 다음 시에 잘 드러나 있다.
유리창에 먼지가 엉겨 붙어 있다
빗방울 후두기고 간 자리다
비에게도 비망록이 있었다면
먼지는 물의 뼈였나 보다
물을 다비한 사리, 하루살이떼 같고, 비듬 같고
밀어내는 발각질 같고,
장맛비 뒤의 웅덩이
졸아붙은 속의 일어난
흙비늘 같은
먼지 낀 창의 불투명이 풍경 쪽에 나를 더 다가서게 한다
먼지가 창문의 화소다
붙어 있던 살점 다 어디 가고
어느 창에 붙어 흐려지려나
오래전 물방울의 글썽임을
증명하고 있는 뼛가루
- 「물방울의 뼈」 전문
아무도 관심두지 않거나 지워서 없애야 할 오물로만 여겨지던 유리창의 먼지를 시인을 특별한 눈으로 관찰하고 있다. 그것들은 “하루살이떼”나 “비듬”, “발각질”처럼 더럽고 하찮고 버려져야 할 것들로 생각되지만 다른 시선으로 보면 사실은 그것들이 물의 뼈이고 또 “물을 다비한 사리”라고 시인은 생각한다. 아주 오래전에 정지용 시인이 유리창에서 보았던 슬픔처럼 유리창을 “글썽임”으로 잠시 젖게 한 물방울에도 흔적이 남아 있음을 시인은 간과하지 않고 있다. 그것이 세상을 불투명하게 만들지라도 이 미미한 존재의 흔적이 우리 삶의 한 부분이고 또 어쩌면 우리 삶이 이 모든 것들의 토대 위에 구축되고 있을지 모른다고 시인은 생각한다. “먼지가 창문의 화소”라는 언급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듯 사라지고 없어진 것들을 안타까워하고 그리워하면서 세상을 바라볼 때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는 소중한 것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손택수 시인은 바로 사라져 가고 있지만 아직 남아있는 소중한 그러나 미미한 것들에 무한한 애정을 표시한다.
창문 앞에 나무를 심어 속눈썹을 대신한다
기왕이면 마스카라
색을 칠한
자귀나무를 구하여
꽃은 붓같기도 하고
티끌 먼지 쓰는
비
같기도 해서
아무리 깜박여도 그날이 그날인 눈꼽쟁이창문을 반짝이게 하겠다
붓질이라면 하늘을 문질러도 보겠고 비질이라면 지상을 쓸어도 보겠다
짧은 속눈썹이 불만이라는 애인에게
자귀나무 꽃을 붙여주자
호숫가에 나무 심듯, 나무 그늘을 늘여
물고기떼 은비늘이 더 생생해지듯
- 「자귀나무 속눈썹」전문
자귀나무의 속눈썹은 미미한 존재이다. 그것의 하나하나는 작고 보잘 것 없다. 하지만 그 작은 눈썹들이 하나의 꽃을 형성하고 크게 활짝 피었을 때 자귀나무는 비로소 자귀나무로서의 어떤 미학적 완성을 보여준다. 자귀나무의 꽃은 사실 어떤 용도로도 쓸 수 없는 것이다. 아무런 실용성도 없고 열매를 맺는 생산성을 보여주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것은 애인의 속눈썹을 대신할 만큼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과 함께 동반되는 사랑의 정서를 우리에게 불러 일으켜 주는 존재이다. 따라서 한때 피었다 쉬이 사라지는 이 쓸모없는 꽃은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에게는 더없는 가치 있는 어떤 다른 존재가 된다. 시를 쓰는 행위도 어쩌면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더 작은 단위로만 이동하면서
섬은 자신의 공간을 드넓게 한다
마을 하나가 우주였던 어린 날처럼,
여기엔 어떤 절제가 있다
함부로 경계를 넘지 않고 지도의 축적을 거부하며
가능한 머무는 땅을 온전히 몸으로 겪고자 하는, 아끼고자 하는
- 「섬은 어떻게 우주가 되는가」 부분
이 시에서 섬은 고립되고 작은 것들에 대한 상징이다. 이미 대세에 따르지 못하고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지 못하므로 많은 것들이 고립되고 사라지고 잊혀 져 간다. 하지만 그 잊혀지고 사라지는 것들에 또 다른 마을이 있고 우주가 있다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손택수 시인의 시들은 바로 이런 것들을 찾아 기록하는 따뜻한 노력이다. 그래서 아프고 쓸쓸하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사라질 운명인 것들이 손택수 시인의 언어들을 통해 잠시 물방울처럼, 하늘의 별처럼 아니면 찬란한 꽃처럼 여기 시로서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황정산 | 1992년 《창작과비평》으로 평론, 2002년 《정신과표현》으로 시 등단. 저서로 『주변에서 글쓰기』 『쉽게 쓴 문학의 이해』등이 있음. 현재 대전대 교수, 본지 편집위원.
첫댓글 감상 잘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