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가 좋니마니 하는 말들이야 참 많죠.
이점들을 나열한들 고루할 듯 싶고 단점이야 시간들고 돈들고 어떤 책들은 엉덩이가 저릴 정도로 단단한 의자에 앉아 대단한 인내심까지 발휘하면서 눈침침 목뻐근함까지 감수해야기에 더구나 날로 눈휘둥그레질 다른 볼거리들이 흔해 책과는 사실 저도 꽤 거리를 두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니 오래 전부터 독서진흥을 위해 출판업을 면세사업자로 지정해 (1년에 한 번인가 면허세인지 뭔가를 구청에 내는 것 외에는) 세금을 내지 않는데, 그러다 보니 쉽게 출판사를 차렸다가 쉽게 문을 닫곤 하나 봅니다.
제가 딱 그런 경우였죠.
그저 등산이나 좋아했던 철없던 시절, 십대 때부터 등반하며 책이라곤 산악서적 외에는 눈에 들어오질 않았습니다.
20대 초반의 히말라야나 중반의 알프스 등반 후에 가져온 책들을 뒤적이곤 했는데, 우연찮게 그것들을 번역하는 재미에 빠진 다음엔 번역해둔 게 아까워 무작정 출판사 등록을 하고 책을 낸 셈이죠.
그 몇 년 전인 20대 중반에 (월급 가봉해) 낸 첫 책은 타출판사 이름(학문사)만 빌렸는데, 왠지 아쉬웠던지라 30대 초반에 만든 산악서적들인 경우에는 여하튼 산이름를 붙인 출판사가 딱이라 여겼죠.
이름하여 ‘도서출판 설악’이었습니다. 네 권 발간하고 문 닫은 출판사였습니다.
당시까지 네팔이나 인도 히말라야 봉우리들과 알프스의 여러 침봉들을 올랐기에 사실 설악산보다 높고 험한 봉우리들 이름이나, 적어도 출판사 이름에 '히말라야'나 '알프스' 같은 걸 붙일만도 했지만 회사를 그만두고 출판사를 차린 30대 초반이었던 그때까지 아마 저에겐 설악산이 제일 마음에 들고 좋은 산이었기 때문이죠.
고등학생 시절부터 매년 동하계로 적어도 보름 이상 한 달 가까이 설악에 들어갔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동하계 2주는 빠지지 않고 시간을 냈기에 설악산은 그만큼 저에게 소중하고 편하게 여겨진 산이었습니다.
그랬던 것을 요즘은 1년에 한번도 가질 못하니 산과의 인연도 다 시절따라 다르나 봅니다.
그랬던 출판사 이름이 1990년대 중후반부터 다시 찾은 알프스, 그 후 몽블랑 자락에서 십여 년 생활 후에 다시 차린 출판사 이름은 자연히 ‘도서출판 몽블랑’으로 바뀌었습니다.
변덕이 죽 끓듯 심하다 싶겠지만 새로 등록하는 마당이라, 또한 대부분의 책들이 알프스와 몽블랑 산군과 관계되다 보니 더구나 매일 몽블랑을 지켜보며 생활을 한지라 자연히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이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산이었으므로 저에겐 몽블랑이 가장 바람직한 출판사 이름이었죠.
사설이 길었습니다.
지금 제가 사는 도시 동네 빵집 상호가 몽블랑인 곳도 한두 곳 본 것 같고 유명한 만년필 회사 이름도 몽블랑인 것으로 보아 아마 찾아보면 꽤 많은 분야에서 몽블랑이라는 고유명사 단어를 사용하리라 봅니다.
그런데 출판사 이름으로 ‘몽블랑’이 또 있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이 지구상에 하나가 더 있어 긴 헛소리를 해본 겁니다.
바로 프랑스 유명 산악인 카트린 데스티벨의 책 <카트린 데스티벨>을 접하고 알게 되었죠.
그녀가 바로 몽블랑 출판사를 차려 책들을 내고 있다고 합니다.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아마 몽블랑 자락 샤모니에 그녀의 출판사 사무실이 있을 듯 싶군요.
세계 최고의 여성 클라이머인 카트린 데스티벨은 제가 1996년에 ‘설악 출판사’에서 펴낸 <위험의 저편에>에도 소개된 최고의 여성 산악인 중 한 명이죠.
아마 팔구십년대에 등산에 관심 있어 산악잡지를 뒤적인 이들은 그녀의 화려한 암벽등반 모습에 매료된 이들이 많았으리라 봅니다. 그만큼 당시 그녀는 세계적인 록(바위) 스타였죠.
과장은 결코 아닐텐데, 모험이나 산악문화가 강한 유럽에서 그리고 자국인 프랑스에서 그녀는 우리의 유명 스포츠 스타들 못지 않은 사랑을 받았으리라 봅니다.
그런 그녀가 이제 갓 육십을 넘긴 나이에 몽블랑 출판사를 차려 산악서적들을 낸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녀에게는 아마 몽블랑이 제보다 더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여겨지는군요.
사실 이 책을 읽어보면 제보다 훨씬 치열한 산악활동을 하고 뛰어난 등반들을 많이 한 그녀의 활동상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험의 저편에>에도 언급되었듯 당시의 수많은 유능한 남성 산악인들의 질투에 아랑곳하지 않는 그녀의 화려한 산악활동들 이면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타고난 대중적인 이미지 외에도 그녀 나름의 행운뿐 아니라 시련과 고난, 치열한 노력들을 엿볼 수 있더군요.
사실 국내에 소개된 비영어권 등반가들의 책이 귀한데, 이 책 또한 영어로 번역된 것을 소개한 것으로 국내에 이태리나 독일어권 산악서적보다 불어권 산서가 더 귀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 보다 많은 비영어권 산악인들의 책들도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000년대 중반 초겨울이었습니다.
샤모니 시내의 어느 한 행사장에서 우연히 카트린이 우리들 테이블로 왔습니다.
저야 (한여름 성수기에 샤모니 시내 서점 앞 테이블에서 팬사인회를 한다거나 행사장에서 먼발치로 카트린을 보아 왔던지라 더구나 제가 번역한 '위험의 저편에'를 통해) 익히 그녀를 알던 터라 여간 반갑지 않았는데, 당시 라푸마 공식모델이었던 그녀를 그 행사에 참가한 한국에이젼시 직원들은 잘 모르더군요.
여하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녀가 먼저 저에게 산에서 자주 봤다며 아는 채를 하길래 뜻밖이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에귀디미디 케이블카 역 앞 아파트에 살며 3800미터 고지의 눈밭으로 춘하추동 매일 같이 출퇴근했으니 유일한 동양남자의 얼굴이 눈에 쉽게 띄었으리라 봅니다.
여하튼 당시 사십대 중반이었던 그녀는 여전히 매력적이었는데, 특히나 여성적인 필력이 듬뿍 묻어 있는 이 책을 펼치면서 더 공감하며 그녀의 산악세계에 빠져드는 책읽기였습니다.
이 책은 남극의 한 무명봉 정상에서 추락해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내용으로 시작해 자신의 어린 시절 등반을 시작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알피니즘의 발상지 알프스가 있는 유럽이 등산역사에 있어 아무래도 우리보다 앞선 게 사실이라 특히 알프스가 우리네 백두대간처럼 가까이 있음에 부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죠.
요즘이야 국내에도 인공암장들이 흔해 젊어 특히 어린 나이에도 등반 즉, 스포츠 클라이밍을 시작하기 쉬운 환경인데 1970~80년대만 하더라도 인공암장에서의 등반은 꿈꾸지 못할 때였죠.
저 또한 이십대 중반이었던 1990년에 처음 알프스에 가 샤모니 외곽의 자연암장 가이앙에서 목격한, 초등생들끼리 자일을 묶고 등반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만큼 그 나라에선 산악활동의 저변에 폭이 넓었죠. 알프스를 끼고 있던 유럽의 나라들은 이미 그런 환경이 잘 갖춰져 있었던 셈인데, 이 책의 주인공 카트린도 12세에 프랑스 산악회 주최 암벽반에 가입해 등반의 세계에 빠져들었던 겁니다.
고교 때부터 등반을 한, 비교적 일찍 산에 다녔다는 제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카트린이 등반을 시작할 수 있었던 그런 환경이 부러운 거죠.
저 또한 두 번 가본 파리 외곽의 퐁텐블루 숲의 볼더링 시대를 거친 카트린은 수많은 암장들을 거쳐 드디어 몽블랑 산군의 침봉들을 섭렵하는데, 그때 그녀의 나이 겨우 십대 중반이었음을 생각하면(제가 기껏 이십대 중반에 알프스를 처음 찾았으니,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듯 등반력의 격차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후 그녀의 뛰어난 등반활동들이 그저 이뤄지지 않았음을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한편 십대 중반에 홀로 텐트 및 침낭들을 지고 에크랑 산군 일주 트레킹을 십여 일 하며 자연을 벗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훗날 프로 스포츠 클라이머 생활의 권태와 스트레스를 벗어버리고 과감하게 만년설산의 알파인 등반으로 눈을 돌리는 심리도 이해가 가더군요.
1990년 여름 저는 100일 동안 첫 알프스 경험을 하며 겨우 알파인 등반에 눈을 뜰 무렵, 그녀는 샤모니의 핵탄두 모양 침봉 드류의 보나티 필라를 그것도 단독으로 올랐으니.... 그후 카라코람의 트랑고 타워 등반이나 역시 드류에서 10일간 단독신루트 등반, (저 또한 올라본바 있는 두 북벽) 아이거와 그랑드 조라스 북벽, 그리고 마터호른 북벽 동계단독 등반 등의 이야기가 섬세한 여성적 필치로 자세히 쓰여 있습니다.
그후에도 그녀는 히말라야 등지에서 대담한 등반시도들을 했는데....
(모든 산악인들이 다 그렇진 않지만) 그만큼 알피니스트로서의 성장에 있어 환경적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셈인데, 제가 여러 지면에서 강조하기도 했던 바이기도 합니다.
(알프스 경험이 있는 제가 이런 말을 해 왠지 어폐가 있을지 모르지만) 히말라야 등지에서 보다 나은 수준의 등반활동을 하기 위해선 알프스를 건너뛰고선 쉽지 않을 거라고.
여하튼 내세울 게 없는 평범한 산악인인 저에 비하면 카트린은 이제껏 최고의 여성 산악인들 중 한 명인 건 분명할 듯 싶습니다.
이제껏 암벽등반만을 잘하는 이들은 수없이 많았지만 그녀만큼 스포츠 클라이밍뿐 아니라 알프스의 거벽과 히말라야 봉우리들에서 두루 활동한 이들은 드물기 때문이죠.
이제 육십이 넘은 그녀이긴 하지만 앞으로 또 어떤 산악활동을 펼치게 될지 그게 궁금하고 기대가 큽니다.
이 책을 통해 보니 앞으로 그녀가 몽블랑 출판사를 통해 보다 많은 산악서적들을 낼 거라고 하기에 더 큰 기대가 됩니다.
요즘 산서 발간의 동력을 상실한 저에게도 그녀의 활동이 큰 자극이 됨은 사실인데, 꺼진 불꽃이 언제 되살아날지 장담하지 못하는 제 자신이 미덥지 못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녀보다 조금은 더 젊다는 사실에 아주 조금이나마 희망을 걸어볼까 합니다.
아마 카트린의 몽블랑 출판사가 더 오래 운영되길 희망해야겠지요. 물론 도서출판 몽블랑도 문닫고 싶진 않습니다. ㅎㅎ
브레방 아래 플랑 프라 옆 침봉에서 몽블랑을 배경으로 한 카트린.
오래 전에 가스통 레뷔파의 유명한 포즈로 유명한 이곳을 겨우 찾아가봤는데, 사실 이런 포즈를 취할 자격이 있는 이들에게나 어울리는 자리이더군요.
첫댓글 카트린과 허선생님의 특별한 만남이 흥미롭습니다. 실제로 보면 훨씬 더 미인일듯... 소피 마르소를 닮은 듯도...ㅎㅎ..
진즉부터 읽고 싶었던 책인데... 저는 아직이네요...
제 생각엔 허선생님의 도서출판 설악과 몽블랑도 충분히 훌륭한 출판사입니다. 비록 출판사 경영상 적자가 뻔하겠지만...
등반하기에 좋은 환경을 그냥 두지 말자는 생각에 요즘은 가까이 있는 인수봉을 한 번이라도 더 오르자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너무 많은 클라이머들로 붐비는 게 싫어서 기피했었는데... 어차피 코로나 때문에 멀리 가지도 못하고...
재미난 독후감 즐감했습니다.^^
ㅎㅎ 너무 가벼운 글이 아니었나 싶은데, 재미나게 읽으셨다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사실 남성등반가들의 등반하는 뒷모습만 봐도 극한의 몸짓이랄까요, 헬스클럽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자연스러운 근육으로 행해지는 동작들이 어찌 멋지지 않을 수가 없죠. 더구나 카트린 같은 이들의 등반모습이야...^^
예, 기회되시면 이 책 또한 함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한편 도서출판 몽블랑이야 번창하지는 못할지언정 당분간 문은 닫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카트린의 몽블랑 출판사가 번창하길 바라는데, 어부지리 효과라도 기대해볼까 싶군요. ^^
인수봉 등반 안전하게 즐겁게 많이 하시길 희망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남다른....특별한 여성 산악인의 모습에
유구무언에 감탄사만....
ㅎㅎ 혹 카트린과 동년배는 아닐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저도 유구무언입니다.
물론 벽당님께서도 뭔가 특별한 구석은 분명 있으시리라 확신합니다.
ㅎㅎ~여긴?
허선생님도 가스통 레뷔파나 카트린 데스티벨 못지 않게 멋집니다.
전성기 때의 허선생님은 알프스의 최상급 등반가 반열에 오를 자격이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ㅎㅎ 과찬이십니다. 위 사진은 마눌님이 코스믹 리지 하면서 얼핏 찍어준 건데, 아직 가지고 있었나 봅니다. 지금 봐도 괜히 폼만 잡아 낯 간지럽군요.
내가 찍은 것이 아니여~
photo by 백선배님
굿모닝 허대장님,
저는 암벽에는 잼병 입니다.
유연하기 그지없는 몸도 바위앞에선 굳어버리죠.
옛날 1971년 북한산 인수봉 조난사고 소식을 접한뒤론
아예 접근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허대장 님께서 소개해주시는 암벽의 여왕 이란 타이틀과 함께
그녀에 대한 인생여정이 흥미롭고 궁금해집니다.
아울러 프랑스와 한국에서의 "몽블랑" 출판사는
세월의 풍랑에도 남아있기를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이 늘 그자리에 있듯 몽블랑 출판사/도서출판 몽블랑도 늘 그자리에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예, 인수봉 조난사고는 특히 봄철에 큰 사고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신입생들 데리고 따뜻한 봄바람 즐기며 오르다가 꽃샘추위에 하강 못하고 얼어죽은 경우들이....
저는 평소 몸이 뻗뻗하기 그지없다가도 바위앞에선 그래도 조금 풀리기는 하는데, 요즘들어 게을러 좀체 바위할 여력이 없어 마음까지 굳어져버렸습니다. ㅎㅎ
Catherine Destivelle!
Rock Queen이라 불려 마땅한 클라이머이면서도 꾸밈없이 진솔한 글솜씨까지,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책을 손에서 놓고 싶지 않은 책입니다. 특히 캠핑 텐트 안에서 랜턴 불빛으로 읽으면 더 실감나고 재미있습니다. 물론 잼나게 읽도록 번역해주신 역자의 실력도 한 몫했을 것 같습니다. 단독 등반하면서 벽에서 움직이고 느끼는 묘사는 단순하고 기술적인 부분이 많지만, 벽과 등반가 만이 배경이 되는 절대절명의 실존적 환경 자체가 어떤 화려한 수식이나 묘사가 없어도 상당히 서정적이면서 구도자의 정진처럼 느껴져 푹 빠져 읽게됩니다.
간만에 무척 재미있게 읽은 책입니다. 더불어 두 몽블랑 출판사에 영광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