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께 드리는 전상서 / 문희 한연희
진작부터 글쓰기를 배우고 싶었으나 회갑이 지나도록 현실은 그닥 녹록치 않았습니다.
오랜 지인인 최주원시인으로부터 부악문학회 채수영 지도교수님을 소개받았을 때 교수님께서는 암투병 중이셨습니다.
2018년 12월 18일 화요일이었습니다. 3시간 조기출근해서 급한 일 처리한 후 점심시간 포함하여 4시간 확보해놓고 차일피일 미루던 글쓰기 수업에 첫발을 내디뎠던 강력한 동기는 불안이었습니다. 그날따라 찬바람에 눈발이 설강바람꽃잎처럼 흩날리는 날,
어쩌면 소중한 기회를 영영 잃게 될 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이 불쑥 치밀었기 때문입니다.
말을 아끼시던 교수님은 긴장되는 한 시간여의 첫수업이 끝나자 대뜸 시조 10편을 써오라 하시는데 앞이 캄캄했습니다.
오나 가나 앉으나 서나 참 많이 부담스런 숙제였습니다.
「숙제」한연희
별 다른 표정없이
투욱 던진 한 마디 말
기어드는 개미소리
"네에!"
덥썩 받아든 숙제
헤쳐보면 볼 수록
생각이 줄을 서서
밤새워 시름하네
꿈틀꿈틀 태동이 느껴질 그때,
그때마다
적어보고 지워보고
바꿔보고 더해보고
다시보고
마침내 낳고 보니
새근새근 잠자는데
송글송글 땀 맺혔네.
「추억」한연희
어릴땐 굼떴었지
노는게 서툴렀어.
동무틈 끼고싶어
아양도 떨어봤지
긴세월 석양 물들어
찰라로 사라졌네.
「엄마 마음」한연희
자식이 상전이라 궃은일 내가했지
새끼입 넣어주려 생선뼈 발라줬지
애닳아 그랬었다네 지나치면 독인걸
머물날 머잖았어 가기전 당도하렴
날마다 기다리다 화들짝 놀란가슴
내진정 신세지는거 죽기보다 싫단다.
수험생처럼 등결림을 견디면서 뒤척뒤척 써 간 시조10편을 보시더니 그중 7편을 " 좋아요." 라고 말씀하신 후에 '엄마마음'을 보시고 정인보의 자모사를 참조하라 말씀하시더니 표정없는 얼굴로 다음번엔 시를 써오라는 또다른 과제를 내주셨습니다.
수심 가득한 표정을 읽으셨는지 시집 두 권을 읽어본 후에 가져오라고 주셨으나 집에 오자마자 정인보의 '자모사'부터 찾았습니다. 연시조 40수 엄청난 분량에 놀라고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어려워서 공책에 옮겨 적었답니다.
너무 어려워서 일단 저자부터 알고자 위당 정인보에 대한 자료를 찾아 읽다가 엄청난 분임에 깜짝 놀랐습니다.
교수님의 깊은 진의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저를 돕기위해 신경쓰고 계심이 느껴졌습니다.
자모사를 읽다가 친정어머니가 생각났고 갈 수록 빼닮은 저의 모습을 볼 때마다 느껴지던 그 느낌을 시로 써보았습니다.
「모녀」한연희
무심코 본 거울 속에
그리운 어머니가
거기 말없이 서 계시다.
" 어머니! 나의 어머니!
사무치게 뵙고 싶었어요."
심장에 바위를 매단듯 묵직함이 느껴지더니
반석에서 단물나듯 일시에 터져나와
두 줄 수로되어 조용히 흐른다.
어머니가 빙그레 웃으시며 나즈막하게 말씀하신다.
" 울 것 없다. 내가 너와 늘 함께 있지않니."
흐르던 물줄기가 일시에 멈춰 섰다.
가슴이 아프다.
쥐어짜듯 조여오는 통증, 심장이 멎을 것 같다.
이런 거였구나
태내에 품는다는게 이런 의미였구나.
태고의 슬픔이 북받쳐 오른다.
내 딸의 얼굴에 비칠 그녀의 모습
" 보고플땐 거울을 봐."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아픔을
오롯이 견디어 낼
그녀와 나의 딸.
유전자의 단절된 역사가
강한 바람되어 폭풍해일 몰고와서
나의 딸, 나의 마음 모든 평안 쓸어갈 듯
이리저리 무섭게 넘실대도
나는 너의 어미란다
결단코 어미란다.
너는 내가 가슴으로 낳았도다.
나의 딸, 나의 보배
나는 무엇으로 너와 함께 엉길런가
나 비록 너의 외모에는
감히 머물지 못하겠으나
너의 시선 머무는 꽃송이 송이마다
잔잔한 추억으로 목걸이 길게 엮어
네가 거울 볼 때 환하게 웃어주마.
교수님께서 보시더니 첨삭지도가 불가능한, 도무지 건지지 못하시겠다 하셔서 다시 써갔던 일 생각나시죠?
「모녀」한연희
무심코 본 거울 속에
그리운 어머니가
거기 서 계시다
"어머니 어머니!"
두 줄 수로되어 조용히 흐른다.
빙그레 웃으시며
" 나는 너와 늘 함께 하고 있다."
열 달 품어 낳은 비밀
거울 안에 담겨 있다.
"보고플 땐 거울을 봐."
거울 속 여인 서서
고개를 갸웃갸웃
"보고플 땐 창문 열고 뜰을 서성이렴."
나 거기 활짝 피어
그리움 달래주마
천둥벌거숭이 같은 마지막 제자가 시라고 써온 글을 보시고 교수님께서 얼마나 기막히셨을지 지금은 짐작이 갑니다.
「방귀 」한연희
한 이불 속에 나란히 누워
사극에 몰입되어 무아지경 휩싸일때
느닷없이 웅장하게 뿌아아아 뽱!!,
함께 누운 자의 표정이 일시에 일그러져
냄새가 새어날까 꼭 잡은 이불 자락
힘껏 낚아채어 펄럭 펄럭 퍼얼럭
소리보다 더 고약한 가스 가스 가스가
방안에 가득하여 말문을 막아선다.
무안함을 웃음으로 어찌하든 가리고자
애쓰는 순간 순간마다
뿌우우웅 뿌뿌뿌뿌 스스스스
긴 꼬리가 이불 안에서 너울너울 춤을 춘다.
피쉬쉬식 불불불 슈욱 부다다다닥
따로 익힌 기술 없이 다채로운 가죽피리
아무때나 삐져나오는 대책없는 철부지
어찌하든 웃음으로 덮어보려 용 쓰지만 뿡~
보통은 하루 평균 15회, 많으면 25회
위 절제 이후부터 무한생성 뽱뽱뽱
단백질, 양배추, 기름진 음식 멀리하고
천천히 꼭꼭 씹어 횟수 줄여 애쓰지만 뿡~
아마도 숨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
그침없이 연주할 성능좋은 가죽피리
그저 민망함을 절친한 친구삼아
호탕하게 웃거나 눈웃음으로 응대하리
손 대기도 불가한 미숙아라 하시면서
방귀라는 시는 본 적이 없다시길래 그렇다면 다시 써보리라 작심을 했습니다.
「방귀」한연희
수술 후
방귀소리
흔들어 논
오장육부
제자리 찾은 신호
불가불
소탐대실
창자 일부 잘라내면
미숙한 소화능력
잦은방귀 무안 주네
고단백
넘긴 음식
짙은냄새 기별하고
급히 삼킨
탄수화물
고함치며 요동치네
누구든
자연스레 방귀 뀌며 살면서도
마치 아니 뀐듯
인상 쓰고 무안 주네
마음담아 쓴다해도 하고싶은 말 맘껏 써놨으니 어찌 시가 되었을까요.
심폐소생술 하는 심정으로 고쳐놓고 다음 주에 또 첨삭지도를 받아 보리라 가르침 받은대로 일단 실컷 써놓은 후에 뼈다귀만 남기고 살은 다 걷어냈어도 방귀는 시의 소재가 될 수 없다는걸 몰랐습니다.
시는 꾸미는 것이 아니라 빼기라시며
단순하게 품위있게 이미지만 건져 올리라 고 하신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6편 시 써 가면 2편만 쓸만 하고 나머지는 손 쓸 수없는 지경이라 버려질때마다 참 힘들었습니다.
「치매」한연희
짙은 연무 자욱하니
이전 일은 다 잊었다.
응어리 그리움
삭아지고
빈 곳간, 펴진 손
잿간 가라
거름 되라
자궁 속
탯줄 끊고
사는 방법 달리하던
그날 일도 잊었노라
또 다시 들어가리
영원한 그 나라로
다 잊음이 당연하게
회자될 그날 향해.
재주는 없어도 숙제는 성실하게 하는 심성인지라 끄적끄적, 많이 써보는게 좋다는 말씀에 뭐든지 끼어 맞춰보던 그날이 그립습니다.
일기장을 뒤척이며 처음 문사원을 찾아가던 날을 보고 소스라쳐 놀랐습니다.
교수님의 체취가 문사원뜰에 가득찬 49재 바로 그날, 2021년 12월18일과 같은 날이자 날씨조차 비슷하다니 소름이 돋습니다.
마지막 제자, 3년여 짧은 기간조차 이어지는 투병과 코로나19의 훼방으로 수업은 지지부진 했지만 교수님의 존재감은 40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님을 다시 뵈온 듯 든든했습니다.
그러고보니 언제든지 연락을 드리면 연결가능성이 있다는 걸 너무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제가 투병 중일때 희망을 가지고 낙심하지 말라시며 '문희'라 아호를 지어주시고 시집을 내도록 추천사를 써주시는 등 여러모양으로 눈물겹게 격려해주신 그 은혜가 가슴에 사무칩니다.
교수님의 커다란 그늘 아래 늘 머물고 싶은 마음 헤아려 바람으로 마음 속에 스며드셨나봅니다.
문사원 우편함 한 구탱이에라도 들어가 있으면 교수님께서 뜯어보시지 않을까 기대하며 편지를 씁니다.
지금쯤은 바람이 되어 문사원 뜰을 공간 제약없이 거니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채수영교수님!
교수님의 자랑스런 제자가 되도록 가르침대로 부지런히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