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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문제적 인간 유병언--오대양 사건과 유병언
http://blog.donga.com/milhoon/archives/4022
그들은 그렇게 죽어갔다
세월호 사건 관련 혐의로 추적을 받던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이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세월호 참사의 충격도 적지 않은데 유병언씨마저 변사체로 발견됨으로써 세상은 더 놀라는 것 같다. 유병언 그는 문제적 인간이다. 그는 왜 그렇게 큰 사건의 한 복판에서 있어야 했는가.
유병언씨가 세상에 크게 알려진 것은 오대양 사건 때문이다. 오대양 사건이란 1987년 8월 29일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에 있던 오대양(주)에서 (주)오대양의 사장인 박순자 씨 등 32명이 집단 자살(자의에 의한 타살 포함, 이에 대해서는 이삼재 경정과 한 다음의 인터부 기사에서 설명한다)한 변사체로 발견된 사건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은 자살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대양 집단 타살 사건으로 부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유병언씨가 변사체로 발견된 순천 현장
두 번이나 세상을 놀라게 한 오대양 사건
오대양 사건은 두 번 세상을 놀라게 하는 형태로 터져 나왔다. 첫 번째가 1987년 8월 29일 32명이 집단 자살한 형태로 나온 것이다. 그때 기자는 복학한 대학교 4학년이었다. 기자로 나갈 꿈을 꾸고 있던 때인지라, 이 사건관 관련된 기사들을 주의 깊게 읽었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1991년 7월 2차 오대양 사건이 터져 나왔을 때 기자로서 취재를 할 수 있었다.
1차 오대양 사건은 큰 충격을 주었지만 이들이 자살(자의에 의한 타살 포함)했다는데 대해서는 이의가 적었다. 이 사건을 수사한 경찰과 검찰이 모두 같은 결론을 내렸다. 본 기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일부 인사들은 의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조용히 퍼져 나간 것이 오대양 뒤에 세모가 있다는 소문이었다.
오대양 사건 현장오대양 사건 현장. 1987년은 세상이 매우 시끄러웠다. 새해 벽두에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경찰 고문을 받아 사망해, 그해 봄에는 격렬한 민주화시위가 있었다. 그런데 전두환 정부는 간선으로 다음 대통령을 뽑는다는 호헌조치(4.13호헌조치)를 발표해 시위를 더 격화시켰다. 그리하여 그 유명한 6월 항쟁이 일어났고 마침내 6월 29일 여당의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씨가 직선제로 대통령를 뽑겠다는 6.29선언을 발표해, 대한민국은 민주화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한 달 뒤 오대양 용인공장에서 32명이 떼죽음한 변사체로 발견되어 세상은 또 한 번 놀랐다. 사람이 상체를 집어넣고 있는 천장 안에 시신들이 있었다. 벽체 기둥 사이에 긴 각목을 걸고, 벽체와 각목 사이에 넓은 베니어판을 깐 후 그 위에 시신이 둥개둥개 포개져 있는 형태로 발견된 것이다. 민주화열풍을 단숨에 날려버린 오대양 사건이 터져나온 것이다
오대양 사건에서는 (주)오대양이 거둬들인 100억원이 넘는 돈의 행방이 문제가 되었다. (주)오대양에서는 장부를 작성했다고 하는데 장부가 발견되지 않았으니 수사기관은 돈의 향방을 찾지 못했다. 그에 대해 검찰과 경찰은 이 돈의 대부분은 높은 이자와 100 여명이 넘었던 오대양 식구들이 먹고 사는데 사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의혹을 제기하는 이들은 그 돈은 유병언씨가 이끄는 세모로 갔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때부터 세모에 모여 있는 구원파들이 날카로워졌다. 일부 언론은 이를 토대로 한 기사를 썼다가 구원파로부터 큰 항의를 받아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었다.
노순호씨 암매장 숨김 오대양 생존자들
그때 검찰과 경찰은 오대양 관련자 가운데 노순호라고 하는 사람을 찾는데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노씨는 지금의 국민은행으로 통합된 주택은행의 행원이었다. 그는 주택은행을 퇴사하고 (주)오대양에 들어와 이 회사의 회계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때문에 장부를 관리해왔을 것으로 추정됐는데, 1차 오대양 사건 시 아무리 조사를 해도 그는 발견되지 않았다. 때문에 검찰과 경찰은 실종으로 처리하고 검찰은 그에 대해 기소중지를 결정했었다.
2차 오대양 사건은 오대양에 식구로 있던 이들 가운데 일부가 서울 수유리에 다시 모여 집단 생활을 하다 터져나온 것이다. 1차 오대양 사건의 파문은 매우 컸기에 당시 경찰은 오대양 출신 사람들의 행적을 추적했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서울 수유리에서 집단 생활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은 알 수가 없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생업을 위해 택시 운전을 했는데 사고가 일어났다. 그때 이들은 노순호를 죽였기 때문에 사고가 일어난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1차 오대양 사건이 일어나기 전 노모씨는 (주)오대양이 너무 많은 빚 때문에 무너질 것을 예상하고 탈퇴를 시도했다가 (주)오대양 식구들에게 잡혀 뭇매를 맞아 숨졌다.
그러자 오대양 식구들은 그의 사체를 암매장하고 모른 척 하기로 했었다. 이들의 단결력은 매우 강했기에 32명의 변사체가 발견되는 1차 오대양 사건이 났어도 이들은 노모씨에 대해서는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수사기관들이 그렇게 노씨에 대해 물었는데. 노씨의 가족들조차도 말을 하지 않았다. 때문에 검찰과 경찰은 노씨를 실종자로 판단하고 기소중지 처리를 했었다.
오대양 돈을 세모가 가져갔다는 의혹 제기
그런데 수유리에 모여 다시 집단생활을 해오던 이들이 자꾸 사고를 당하자 노씨를 죽여서 암매장 한 것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노씨 살해를 자수를 하게 되었다. 그러자 다시 오대양 사건에 대한 의혹이 확 일어났다. 그리고 노씨가 살해됐으니 오대양 용인공장에서 숨진 32명도 타살됐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엄청난 의혹이 일어 검찰과 경찰은 다시 이 사건을 조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온 결론이 역시 자살(자의에 의한 타살 포함)이었다. 하지만 자금 담당자인 노씨가 타살된 것이 확인됐으니 오대양이 거둬들였다는 100억원 대의 사채는 어디론가 갔을 것이라는 의혹이 계속 제기됐다. 그러자 이 수사를 담당한 대전지검이 이 돈 가운데 일부가 세모 유병언 당시 회장한테 갔다고 보고 그를 기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세모가 돈만 빼먹고 돈을 모아오는 총책인 오대양 사람들을 죽인 것이라는 의혹이 강하게 퍼져나갔다. 2차 오대양사건은 1차보다 훨씬 커진 것이다. 그러나 대전지검은 오대양 돈이 세모로 갔다는 것을 밝히는데 실패했다. 유병언씨 재판은 첨예했는데 최종심까기 간 결과 유씨에게 적용된 죄목은 오대양 돈을 가져간 것이 아니라 조세포탈 등이었다. 오대양 사채와는 별 관계가 없는 ‘회사 부정 경영’ 건으로 그는 처벌 받게 된 것이다. 생전에 유씨는 오대양 사건 배후로 몰려 엉뚱한 건으로 처벌받게 된 것을 매우 억울해했다.
지금 많은 기자들이 유병언 사건에 대해 취재하고 있지만 이들은 1,2차 오대양 사건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다. 현역 기자 가운데 1차 오대양 사건을 취재한 이는 경영을 담당하는 최고위층 뿐일 것이다. 27년 전에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본 기자는 2차 오대양 사건 취재에 참여했다. 서른 살도 되지 못한 애송이 기자 시절이었다. 그런 본 기자가 2차 오대양사건이라도 취재해보고 현역 기자로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세월호4월 16일 304명의 목숨을 앗아가며 침몰한 세월호. 유병언씨는 수사당국에 의해 세월호 실소유주로 지목되고 도주를 하면서 또 한번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기자들은 정부를 쉽게 공격한다. 10년 전 정부가 발행한 문서를 찾아내 지금 보니 엉터리라고 비난하는 것을 자주 봤다. 기자도 글을 쓰는 직업이다. 문서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남긴 그 많은 글들도 세월이 지나 부정확했던 것이 드러나면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기자들이 쓴 기사가 오보로 밝혀져 비난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언론의 힘은 막강한데 왜 오보에 대해서는 큰 책임을 지지 않을까.
기자도 역사를 의식하며 기사를 써야 한다
유병언씨의 변사를 보면서 24,5년 전에 쓴 기사를 꺼내 공개한다. 유병언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오대양 사건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취재를 하면서 깨달은 것 중의 하나는 사건은 그때의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자들은 먼 훗날 내 기사가 다시 세상에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신중하게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젊은 나이였지만 이 사건은 오래 동안 잊혀 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을 했었다. 내가 쓰게 되는 이 기사는 영원히 책임 져야할 것이라는 부담을 느꼈었다. 그래서 총력을 기울여 취재를 했고 사실에 접근해보려고 애를 썼다. 지금 생각해도 아주 긴 장문(長文)의 기사를 쓰기고 했다.
감식의 중요성 놓친 현지 경찰
지금 순천의 사건 현장에서 유병언씨의 것으로 추정되는 안경을 발견했다는 속보가 떴다. 유씨는 안경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인데 그의 변사체 발견됐을 때 사건 현장에서 경찰은 그의 안경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그의 신원이 확인된 다음 재수색을 하면서 현장에서 500여m 떨어진 곳에서 그의 것일 수도 있는 안경을 찾아냈다. 이는 경찰의 현장 감식이 허술했다는 뜻이다.
유병언 별장 내부유병언 별장 내부. 지난 5월 25일 유병언씨가 있었다고 하는 별장 '숲속의 추억'. 유씨는 2층 통나무 벽 방 안에 상당한 돈이 든 여행용 가방을 두고 나간 뒤 2.5km 떨어진 산속의 매실밭 부근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처음 신고를 받았을 때도 제대로 감식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때 제대로 감식을 했다면 그의 가방에 쓰인 글씨와 구원파 간의 관계를 찾아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강력 사건은 감식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감식에 이어 부검을 제대로 해야 수사를 잘 할 수 있다. 오대양 사건은 그 충격이 워낙 컸기에 당시 최고의 감식팀이 투입됐다. 이삼재 씨가 그 주인공이다.
2차 오대양 사건은 지금 세월호 이상으로 치엻ㅏ고 복잡했다. 자타살 다툼에서 사채 행방에 대한 논란 등 온갖 의견과 억측이 대립했다. 검찰과 경찰, 언론은 정신 없이 헤메야 했다. 1차 오대양 사건 때 현장을 감식했던 이삼재 씨와의 인터뷰를 통해 오대양 사건의 현장을 살펴본다. 그리고 그를 향했던 사건을 다룬 그때의 기사를 차례로 공개하며 유병언씨에 대해 살펴본다. 유병언 씨에 대해 본 기자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도 매우 외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매우 강했지만 그 반작용으로 여린 측면이 있었다. 22,3년 전에 썼던 기사를 차례로 공개하면서 내가 본 유병언을 밝혀보기로 한다.
[91.10 월간조선]오대양 사건 현장감식했던 이삼재 경정 인터뷰
현장감식했던 이삼재 경정 인터뷰
그들은 이렇게 죽어갔다
오대양 변사현장 재구성
변사자들은 외부세력에 의해 타살된 것이 아니다. 최후의 사자 이경수는 마지막에 자살했다. ‘자의에 의한 자․타살’-이것이 현장의 진실이며 더 이상의 의혹은 없다!
천장 속의 변사체
1987년 8월 29일 오전 11시경, 경기도 용인군 남사면 북2리의 주식회사 오대양 용인공장. 주방 일을 하는 김영자 씨(당시 41세․여)는 할머니 김옥용 씨(65)와 방에서 옥수수를 먹고 있다가 여자휴게실 쪽에서 뭔가 떨어지는 듯한 ‘딸가닥’ 하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달려나갔다. 여자휴게실 문을 열자 천장의 석고보드가 스티로폴과 함께 떨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석고보드와 스티로폴을 얼른 들고 나가 치운 그는 뻥 뚫린 천장을 향해 낮은 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컴컴한 천장 속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김 씨는 할머니를 데려와 고무물통(다라이)을 엎어 놓고 그 위에 고무대야를 다시 엎은 다음 할머니 손을 잡고 올라가 플래시로 천장 속을 비췄다.
불빛이 어둠을 뚫고 쏘듯이 나가자 허공중에 발을 구부린 한 남자의 하체가 나타났다. 공장장 이경수 씨(당시 44)였다. 김 씨는 플래시를 이리저리 비춘 끝에 이경수 씨가 목을 맨 채 매달려 있는 것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편 이날 아침 7시쯤 이 공장 복도의 소파에서 잠을 자고 일어난 이기정 씨(당시 53·박순자 씨 남편, 충남도 건설국장)는 승용차를 타고 오산 성심병원으로 갔다. 성심병원에는 용인공장 식모인 정화진 씨(당시 42·여)가 입원해 있었다. 정 씨는 이날 새벽 2시쯤 이기정 씨의 처남 박용주 씨(당시 31·박순자의 남동생)가 누나의 소재지를 가르쳐주지 않는 데 격분해서 휘두른 기타에 맞고 머리를 다쳐 이 병원으로 옮겨졌었다.
오전 7시 30분쯤 병원에 도착한 이 씨는 김영채 씨(당시 32·오주양행 직원) 등과 기사식당에서 아침을 든 후 근처 목욕탕에 가서 한잠 더 자고 낮 12시쯤 병원 앞으로 돌아왔다. 12시 30분쯤, 서성거리던 이 씨는 택시 한 대가 달려와 멎는 것을 보았다. 내린 사람은 김영자 씨였다. 김 씨는 정화진 씨에게 이경수 씨가 죽은 것을 알리기 위해 달려오던 참이었다. 엉겁결에 이기정 씨를 만나게 된 김영자 씨는 “국장님이 찾던 사람이 다락에 있다”고 하면서 죽었다는 뜻으로 두 손을 목에 대고 팔짝팔짝 뛰었다.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이기정 씨가 “뭔 일 있냐”고 묻자 김영자 씨는 “가서 할머니께 물어보면 안다”고 대답했다. 이 씨는 김 씨가 타고 온 택시를 타고 다시 용인공장으로 달려갔다.
오후 1시쯤 용인공장에 도착한 이 씨는 천장에 찾던 사람이 있음을 알고 이날 아침 서울로 올라갔던 처남 박용준(당시 36)·용주 씨 등에게 “다시 내려오라”고 연락했다. 오후 3시 30분쯤 이들이 도착하자 이 씨는 공장의 식당 천장에서 틈을 발견하고 김영채 등으로 하여금 석고보드를 뜯어내고 올라가게 했다. 이때 이기정 씨는 “영호야! 재호야!”하고 아들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박용준 씨와 용주 씨는 이 씨를 붙잡고 서 있었다. 20여분 후 천장에 올라갔던 김영채 씨 등 네 명이 내려왔다. 이들로부터 변사사실을 확인한 이기정 씨는 오후 4시쯤 이 사실을 용인경찰서에 신고케 했다. 이것은 끔찍한 ‘오대양 변사사건’의 서막이었다. 누가 32명을 죽였나를 놓고 ‘자의에 의한 집단자․타살’과 ‘외부세력에 의한 타살’ 주장이 맞서기 시작하는 출발점이었다.
당시 이 사건을 수사했던 충남도경은 “이경수가 박순자(당시 48․오대양 사장)의 명령에 따라 무더위로 탈진한 31명을 확인 교살(목을 졸라 죽임)하고 스스로는 목을 매어 숨진 것”이라고 발표했다. 1988년과 올해에 이 사건에 대한 재수사가 있었으나 모두 “현장에서 교사(목이 매여 죽음) 및 의사(스스로 목을 매어 죽음)로 숨진 것”이라고 결론지어졌다. 그러나 ‘외부세력에 의한 타살’ 주장은 계속되고 있다.
이경수 발에 흙 없다
-오대양의 사채는 어디로 갔을까요.
“그 문제는 저는 모릅니다. 현장감식만 알 뿐입니다.
-오대양과 세모와의 관계도 모르시겠군요.
“모릅니다. 그쪽에 자꾸 의혹을 갖다보니 변사자들이 타살되어 옮겨졌다는 주장이 나오는데 사건 해결은 현장감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감식해 오면서 감식을 잘못한 적은 없습니까.
“있습니다. 나중에 진짜 범인을 잡긴 했지만 시간이 오래 걸렸지요.”
-오대양 변사사건도 감식을 잘못할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이 사건 감식은 이 이상 할 수 없습니다.”
약 네 시간에 걸친 인터뷰 동안 이 부소장은 시종 차분한 목소리로 질문에 대답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지난 87년 현장감식을 하면서 ‘이 사건 감식은 내가 책임져야겠구나. 절대로 이 사건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반드시 의혹이 제기돼 다시 수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진자료를 모두 보관해 두었습니다. 몇 년 후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은 또 일어날 것입니다. 그때도 똑같은 자료와 근거로 대답할 것입니다.
오대양 사건 현장도
현장감식의 배테랑
경찰대학 부설 수사간부연구소의 이삼재 부소장(53·경정)은 1987년 8월 29일 저녁 8시쯤 현장에 가서 사진을 찍으며 현장감식을 했던 사람이다. 1960년 건국대 법대 졸업 후 순경으로 들어와 64년부터 69년까지 서울시경 감식계에 근무했고 71년부터 80년까지는 서울시경 현장감식반장을 지냈다. 이후 수사관들에게 현장감식을 강의하던 그는 오대양 변사사건이 일어나자 치안본부의 특명으로 현장에 내려갔었다. 국내 현장감식의 1인자로 꼽히는 이 부소장은 “현장에 가보지 않고 부검만 하면 사건 진상을 알 수 없다”며 “모든 사건의 해결은 과학적인 현장감식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32명의 죽음에 대해 “31명은 타살되었고 이경수는 자살했다”고 단언했다.
-31명이 타살되었다는 것은 자의에 의한 타살, 즉 죽여달라고 했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결국 이경수를 포함한 모두가 자살했다는 얘기군요.
“그렇습니다. 자의에 의한 집단 자․타살이지요.
-변사자들이 다른 곳에서 살해돼 용인공장 천장에 옮겨진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까.
“변사자들은 모두 현장에서 죽었습니다. 그것은 현장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 부소장은 이때부터 현장에서 찍은 사진 슬라이드를 사무실의 흰 벽 위에 투사하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29일 밤 용인경찰서 직원들이 천장을 뜯고 시체를 내리는 슬라이드를 투사했다. 사진은 세 명이 위에서 사체를 내려주고 밑에서 세 명이 사체를 받는 장면이었다.
“사체 하나 옮기기가 이렇게 힘듭니다. 죽은 사람은 산 사람과 달리 축 처지기 때문이지요. 사체를 내리는 것이 이 정도라면 거꾸로 올릴 때는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천장을 뜯고 32명의 사체를 은밀히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체가 이동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사체는 한쪽에 19구, 다른 한쪽에 12구, 그리고 목을 맨 이경수로 나눠져 있었습니다(그림 1 참조). 편의상 19의 사체를 A그룹, 12구의 사체를 B그룹으로 하겠습니다. 그중 3중으로 겹쳐 포개진 A그룹 사체를 다 내리고 보니 시멘블록으로 된 칸막이 벽 위에 각목을 걸쳐놓고 합판을 깐 다음 그 위에 카페트, 담요, 캐시밀론 이불을 깐 것이 나오더군요. B그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체를 다른 곳에서 옮겨왔다면 합판 위에 이불까지 깔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들이 죽을 때까지 천장 안에서 지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이들이 천장에서 지낸 증거는 또 있습니다. 에서처럼 현장에서는 오줌이 든 두 개의 청색 플라스틱 물통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물통은 한 말 용량쯤 되는, 시장에서 흔히 살 수 있는 것입니다. A그룹쪽에 있는 오줌통에는 반 이상 오줌이 차 있었고 생리대가 하나 떠 있었습니다. 변사자 중에 생리하는 여자가 있었다는 증거이지요. 부검 결과 생리중이었던 여자가 나왔습니다.
또 비닐로 된 등산용 물백과 컵도 발견되었ㅅ브니다. 얼음을 채운 듯한 보온물통도 있었습니다. 물을 마셨다는 증거이지요. 라면박스도 다섯 상자 있었는데 뜯은 흔적은 없었습니다. 오대양에서 수입하는 유아용 이유식 ‘가락티나’ 박스도 있었는데 까서 먹은 것은 몇 개 되지 않았습니다. 50개들이 박스 네 개가 있었으니 모두 2백 개의 가락티나가 있었는데 7~8개쯤을 까서 먹다가 말았습니다. 장기간 은신하기 위해 음식물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담요와 캐시밀론 이불 등은 어디서 가져왔습니까.
“용인공장 기숙사 안에 있던 것입니다. 또 사망한 여자들 중 다수는 기숙사에서 가져온 잠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여자들이 왜 잠옷을 입고 있었습니까.
“천장 속이 무지하게 더웠기 때문입니다. 은 제가 변사체 발견 1주일 후에 가서 측정한 온도입니다. 36도를 오르내리는 한낮의 더위에 견디지 못하자 잠옷을 가져오게 해서 갈아입고 지냈던 것이지요.
사건 현장 온도 및 급식 현황
-천장 속에서는 각목, 합판은 물론 사다리까지도 발견되었습니다. 이 큰 것들을 어떻게 끌어 올렸겠습니까.
“사다리는 32명이 천장에 올라갈 때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이 다 올라오자 증거를 없애기 위해 천장 속에 올려놓은 듯합니다. 천장을 뜯은 곳은 감식 결과 남자 샤워실과 여자 샤워실을 가르는 칸막이벽 양쪽이었습니다. 이곳을 각각 1백10×1백cm, 80×1백20cm씩 뜯고 사람과 각목, 합판, 사다리 등이 올라간 것이지요. 부피가 큰 박스나 물통도 이곳으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천장을 뜯고 다시 봉했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천장 속의 석고보드 위에는 스티로폴이 깔려 있었습니다. 스티로폴을 걷고 보니 샤워실 쪽에는 석고보드 대신 선 라이트(빛은 통과시키고 수분은 막는, 반투명한 건축 자재)가 깔려 있더군요. 선 라이트는 밑(샤워실)에서 나사못을 끼운 다음 선 라이트 위의 U자형 지지대(앵글)에 조여 고정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곳은 나사못만 풀면 금방 천장을 뜯을 수 있는 곳이지요. 천장 속의 선 라이트 지지대(앵글)중 하나는 위로 꺾여져 올라갔던 흔적이 있었습니다. 뭔가 큰 물건이 이곳을 통해 위로 올라가면서 구부러진 것 같았습니다. 이곳의 나사못은 헐겁게 조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올라간 후 밑에 있던 여자들이 나사못을 조였다는 증거이지요. 선 라이트 밑의 샤워실 벽에 지문조사를 했더니 타일 위에 무수한 지문과 장문(손바닥 무늬)이 채취되었습니다. 나사못을 조이는 데 사용된 드라이버 두 개는 남자 샤워실 비품용 붙박이장에서도 찾아냈습니다. 또 천장 위에서도 드라이버 두 개가 발견되었습니다.
지문채취 한 여자 샤워실
-박순자를 비롯한 변사자들이 천장에 올라간 것은 언제였습니까.
“박순자가 부산에 갔다가 올라와 직원들을 용인공장으로 모이게 한 8월 25일입니다. 이날 오후 네 시쯤 이곳에 도착한 박순자는 이경수, 김길환 등에게 천장에 은신 장소를 만들도록 한 다음 직원들과 함께 올라간 것으로 보입니다.
-8월 25일부터 29일까지 천장 속에서 지냈다는 추정이시군요. 이 기간이면 꽤 많은 음식물이 필요했을 텐데요.
“이들이 먹은 주식은 주먹밥이었습니다. 는 당시 이들을 천장에 숨겨주고 시치미를 뗐던 김영자 씨 등이 진술한 주먹밥 급식현황입니다. 주먹밥은 첫날은 공급되지 않았고 이후 하루 한 차례씩 올려졌습니다. 그러나 변사자들은 주먹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더위로 지쳐서 그런 것 같습니다. 8월 28일에는 주먹밥이 쉬니까 식초를 쳐서 올려달라고 부탁해, 식초를 친 주먹밥이 올라갔습니다. 8월 29일 현장에 갔을 때는 올려보내기 위해 만들어둔 42개의 주먹밥이 주방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식초를 치면 주먹밥이 안 상합니까.
“모르겠습니다. 천장 속에 있던 누군가가 식초를 치면 안 상한다고 믿었던 모양이지요.”
-32명이 배출한 쓰레기도 있었을 텐데요.
“대변이 든 검은 비닐봉지 두 개와 쓰레기가 담긴 흰 비닐봉지 네 개가 발견되었습니다. 쓰레기봉지 안에는 먹다버린 상한 주먹밥과 옥수수 등이 있었습니다. 옥수수는 에서처럼 8월 27일 올려준 것입니다. 또 두루마리 휴지와 찢어서 사용한 휴지조각이 발견되었습니다.
-휴지조각에는 뭐가 있었습니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휴지조각은 A그룹 주위에 더 많았는데 약 1백20여개나 발견되었습니다. 모두 수거해 감정했으나 코를 푼 것이나 정액 같은 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추측컨대 물이나 땀 종류를 닦았던 것 같습니다. 또 에서처럼 남녀 샤워실과 여자휴게실 사이 칸막이벽에는 누군가가 누웠던 듯 시멘블럭에 착 달라붙은 화장지가 깔려 있었습니다.”
무수한 휴지조각 발견
-칸막이 벽의 폭이 사람이 누울 정도로 넓었습니까.
“20~25cm 정도였습니다. 이곳을 비롯한 칸막이벽은 천장 안에서 이동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저를 비롯한 경기도경과 용인경찰서 직원들이 천장에 올라갔을 때도 이 칸막이벽을 밟고 다녔습니다. 걸을 때는 중심을 잡기 위해 석고보드를 지붕과 연결해 놓은 철근을 잡고 다녀야 했습니다.
-천장 석고보드 위로는 사람이 올라설 수 없습니까.
“없습니다. 제가 갔을 때 같이 올라갔던 용인서의 한 직원은 석고보드를 밟았다가 주방의 솥 위로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변사한 이들이 양식과 물을 갖고 천장에 올라가 숨을 만큼 박순자 씨의 상황이 급박했습니까.
“급박했지요. 이들이 숨고 난 다음 박순자 씨 행방을 찾는 채권자와 경찰 및 기자들이 수시로 이 공장을 찾아왔습니다. 천장 속의 사람들은 외부 사람들이 다녀가는 것을 다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밑에서 올려주는 상황을 알려주는 메모도 받았습니다. 상당한 위기의식을 가졌을 것입니다. 8월 28일 오후 2시쯤에는 채권단으로부터 이들이 용인공장에 있을 것이라는 제보를 받은 충남도경 형사대가 와서 부녀자 12명, 초․중․고생 18명, 어린이 19명 등 49명을 연행해 갔습니다. 이날 오후 5시 30분경에는 (주)삼우로부터 지원이 불가능하다는 뜻의 ‘삼우도 지금 무척 고통받고 있답니다’란 메모가 정화진을 통해 천장으로 전달되었습니다. 또 이기정, 박용주 씨 등도 이곳을 수시로 찾아와 박순자 씨가 어디 있느냐고 밑에 있던 이들을 채근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박용주 씨가 기타를 휘둘러, 정화진 씨를 다치게 한 것입니다. 정화진 씨가 오산 성심병원에 간 다음 이기정 씨는 공장복도의 소파에서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천장 속의 사람들은 자기 가족에게도 나타나지 않을 만큼 위기의식을 느끼며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메모
2.9평 위에 19구의 시체
-이 부소장께서 현장에 처음 가서 목격한 것을 듣기로 하지요. 먼저 A그룹 상황부터 설명해 주십시오.
“19구의 사체 중 남자는 김길환 하나였습니다. 19명의 입에는 모두 휴지가 틀어 막혀 있었고 몇몇은 코에도 휴지가 막혀 있었습니다. 사체는 2.9평의 합판 위에 2중으로 차곡차곡 쌓여져 있었습니다. 김길환의 사체는 맨 위에 있었는데 김의 사체가 놓여 있는 곳은 3중으로 쌓여 있는 상태였습니다.”
-사체의 입에 휴지가 있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변사자 중 병원에 근무해 사체를 다뤄본 사람이 있었다는 의미이지요. 휴지를 막은 상태는 얌전하지 않았습니다. 휴지의 일부가 입 밖으로 나와 있는 상태였지요. 변사자 중 곽남옥은 간호사 출신입니다. 그가 휴지를 막은 것 같습니다.”
-A그룹 변사자들은 손발이 묶여 있었다던데….
“전부는 아니고 먼저 죽은 것으로 보이는 안쪽의 사체와 마지막으로 죽은 것으로 보이는 김길환․곽남옥․오현숙 등이 묶여 있었습니다. 현장에 갔을 때 오현숙은 발만 묶인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양손에 시계를 찼던 것처럼 묶인 흔적이 있고 앞에 끊긴 끈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천장에 올라갔던 김영채 등이 사체를 만져보니 뜨뜻해서 살았는 줄 알고 주방에서 올려보낸 칼로 끊어주었더군요.
먼저 죽은 듯이 보이는 변사자들의 손발이 묶여 있는 것은 누군가가 끈으로 목을 묶을 때 반항할까 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반항하지 않자 나중에는 손발을 묶지 않고 목만 묶은 것 같습니다. 김길환․곽남옥 등의 손발이 묶인 것은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혹시 반항할까 봐서 묶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사체가 뜨뜻할 수 있습니까.
“지붕으로부터 열을 받았기 때문이었죠. 제가 지붕 안에 올라갔었을 때도 무지하게 더웠습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시체라고 확인하는 순간 질겁을 하고 내려왔을 텐데요.
“김영채 씨 등은 며칠 전부터 이들을 찾아 헤맨 사람입니다. 이들은 박순자 등을 찾으면 덩치 큰 김길환이가 덤벼들 것으로 예상, 김길환을 때려눕혀야 한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또 밑에서는 이기정 씨가 ‘살아 있는 사람을 찾아라. 살아 있는 사람은 살려라’라고 주문했습니다. 그래서 입에 있는 휴지를 뽑기도 하고 위에 엎어져 있는 사체를 떠밀어내려 바로 눕히기도 한 것입니다. 김영채 씨는 처제 조귀복(당시 28)을 찾으려 했었다는데 B그룹에 있었기 때문에 못 찾았습니다.
-변사자들의 사망원인은 무엇입니까.
“A그룹 변사자들은 모두 목이 묶여서 죽어 있었습니다. 부검 결과도 목이 묶여 질식사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목을 묶은 끈의 상태가 손․발을 묶은 끈의 상태와 달랐습니다. 목을 묶은 끈은 단단히 결박되어 있었지만 손발을 묶은 것은 허술했습니다. 여기에서 힘이 좋은 남자들이 목을 묶고 여자들은 손․발을 묶었다는 추측이 가능해집니다.”
-누가 이들을 죽였다고 보십니까.
“이경수, 김길환, 곽남옥과 오현숙이 마지막까지 살아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데 간여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좁은 공간에서 사람을 죽여 차곡차곡 쌓아놓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체를 옮기는 데는 힘이 많이 듭니다. 따라서 안쪽에서부터 하나, 둘씩 죽인 다음 그 위에서 또 한 명을 죽이는 식으로 진행했을 것입니다. 마지막에 이들 네 명이 남자, 먼저 김길환을 죽여 위로 옮겨 놓은 뒤 마지막 남은 공간에서 이경수가 오현숙을 죽이고 그 위에서 곽남옥을 죽인 다음 스스로 목을 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부소장은 A그룹의 사체가 뒤엉켜 있는 슬라이드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그는 맨 위에 있는 김길환의 허리춤이 상체 쪽으로 삐죽 솟아 있는 것을 가리키며 “이는 김길환의 시체를 끌어 올릴 때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곽남옥이 오현숙보다 나중에 죽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 가능합니까.
“곽남옥에 묶인 끈은 파란 이불보 천을 마치 새끼 꼬듯이 꼬아서 만든 것입니다. 똑같은 끈이 이경수의 목에 매여 있었습니다. 이경수는 A그룹을 죽인 다음 천으로 새끼를 꽈서 곽남옥을 죽이고 자신도 죽은 것 같습니다.
-사람은 죽여놓고서 새끼를 꼰다는 것이 가능합니까.
“천으로 새끼를 꼬면 잘 되지 않습니다. 헝겊의 잘라낸 면에서 실오라기가 일어나기 때문이지요. 현장감식했을 때 이 실오라기 뭉치가 발견되었습니다. 새끼를 꼬다가 잘 되지 않자 실오라기를 뽑아 뭉쳐서 던져 놓은 다음 4m 길이의 새끼를 꼰 것으로 보입니다. 이경수는 꽤 오랜 시간 새끼를 꽜을 것입니다. 사람을 죽여놓고 새끼를 꼴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그가 가장 나중에 죽을 만큼 철저한 신자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광신자의 의식구조는 일반인과 다릅니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천장 감식
사체 옆에서 새끼를 꼬다
-옆에서 이경수 등이 사람을 죽이는데 자기 죽을 차례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광신자인 경우 충분히 가능합니다. 또 이들은 4박 5일간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않고 더위에 지쳐 있었습니다. 부검했을 때도 변사자의 위에서는 음식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종교에 깊이 빠져 있는 데다 힘까지 빠져서 일종의 가사상태였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죽이는 데 가담한 네 명은 다른 사람과 달리 가사상태가 아니었다는 얘기인데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또 사람의 목을 매는 데 상당한 힘이 들 텐데 허기와 더위에 지친 그들이 어떻게 힘을 냈을까요.
“글쎄요. 이유식인 가락티나를 먹고 힘을 내서 죽였는지, 어떻게 죽였는지 생각해 봐야겠군요. 광신자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이 부분은 이 부소장이 명쾌히 설명하지 못한 부분이다. 기자는 이 문제를 정신과의사인 이규동 박사(57)에게 물어보았다. 이 박사는 “87년 이 사건이 처음 보도되었을 때 광신자의 집단심리로 인한 떼죽음”이라고 판단했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집단심리에 맹신하게 되면 인격과 판단력이 퇴행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곁에서 하나씩 사람이 죽어가면 더욱 긴장해서 집결하게 될 것입니다. 어서 죽여 달라는 입장이 되는 것이지요. 이때 죽이는 사람은 힘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뭐 하는지도 모르고 무의식 상태에서 기계적으로 죽여나가는 것이지요.”
이 박사는 이런 사건을 접할 때마다 “사람의 판단력은 별 게 아니다. 세뇌된 상태에서 위기의식에 빠졌을 때는 판단력이 거의 없어지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B그룹에 대한 현장설명에서도 이 부소장은 슬라이드를 이용했다. 사진 속의 B그룹은 머리를 한쪽으로 한 채 박순자쪽은 낮고 반대로 갈수록 높아지는 형태로 사체가 쌓여 있었다. B그룹의 사체에는 목에 끈이 묶인 것이 하나도 없었다.
“A그룹에서 5m 떨어진 B그룹은 1.7평 면적의 합판 위에 남자 둘, 여자 열 명이 죽어 있었습니다. 이곳 변사자들은 모두 누군가가 끈을 앞목에 걸고 뒤에서 잡아당겨서 죽인 듯했습니다.”
-왜 그렇게 죽였을까요.
“A그룹을 죽이다 보니 끈이 모자라서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B그룹은 A그룹보다 나중에 죽었다는 말씀인가요.
“그것은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 동시에 양쪽에서 죽이기 시작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
-B그룹 사체에는 손발이 묶인 것도 없군요.
“그렇습니다. 추측컨대 처음 A그룹에서 손․발을 묶고 죽여나갔는데 아무도 반항하지 않자 아예 묶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지난 8월 20일 대전지검의 수사결과에서는 박순자가 가장 먼저 숨진 것으로 발표되었는데요.
“검찰 발표는 그러했지만 부검결과는 박순자가 가장 먼저 죽은 것 같지 않았습니다.”
메모 발견으로 단서 잡아
-이경수 등이 변사자들을 죽이기 시작한 것은 언제쯤일까요.
“29일 새벽부터 29일 오전 11시까지로 봅니다. 근거는 김영자의 진술입니다. 김영자가 29일 오전 8시쯤 남자샤워실에 가서 천장을 두드리자 이경수가 ‘씩씩’거리며 내려다 보곤 ‘왜 자꾸 불러’ 했다는 것입니다. 이경수는 한창 사람을 죽이느라 숨이 찼던 것이지요. 현장에서 발견된 메모로도 이 시간은 확인되었습니다. 김명순이 쓴 메모는 ‘반대다. 완전 도전이다. 넘기면 개발비 불게 하는 거다. 다 나를 팔았기 때문이다. 절대로 입 닫아라. 이미 의식 없으시다. 네 시간 전부터 다섯 명 정도 갔다. 오늘 중으로 거의 갈 것 같다. 너만이 깨물어라. 처음 계획하고 온 거다. 성령인도로 너만 버텨라’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 메모는 오전 8시 김영자가 이경수를 불러서 올려준 메모지 뒷면에다 김명순이 썼다가 잘게 찢어서 B그룹 주위에 버려놓았던 것입니다. 저는 이 메모지를 9월 2일 다시 갔을 때 찾았습니다. 모두 67쪽으로 찢어져 있어 다시 맞추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메모의 후반부 ‘이미 의식 없으시다’부터는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가 되는데 앞 부분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메모의 반대편에는 김영자 씨가 쓴 메모가 있습니다. 김명순의 메모는 김영자 씨 메모의 답장입니다. 밑에서 올려보낸 메모는 ‘국장님 이제 갔습니다. 10명이나 왔어요. 용준이 행패, 화진이 머리 다쳐 병원 갔음. 저는 왼팔을 못쓰고 있음. 저의 생각인데요 사장님께서 모두를 생각하시면 모두 굶어죽기보다 마지막까지 나타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장님 한 분 나타나면 수습될 것 같습니다.’라고 되어 있었지요.
29일 새벽 2시 박용주 씨가 휘두른 기타에 정화진 씨가 맞은 이후의 상황을 알리는 내용이지요. 김영자 씨는 박용준 씨와 용주 씨를 혼동하고 있었습니다. 김영자 씨는 이기정 씨가 소파에서 자고 나가자 오전 8시 이경수를 불러 이 메모를 전달한 것입니다. 밑에서 이런 내용이 전달돼 오자 김명순은 박순자가 이미 죽었다는 뜻을 썼다가 찢은 것입니다.”
-그 외 현장에서 발견한 쪽지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하나는 밑에서 올려보낸 것으로서 ‘국장님과 (용준)이랑 왔어요.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그 사람들이 말했어요. 오늘밤 새도(록 주위)에서 맴돌며 온 식구가 여기서 진치고 살 거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기정 씨가 용인공장에 온 것을 알리는 메모입니다.(참고․괄호 안은 찢어져 있어 판독불능이라 이 부소장이 추정한 것임) 또 하나 쪽지는 ‘아무리 우리 식구라도 누가 있느냐고 묻거든 다락에 있는 사람, 다 없다고 해. 아무리 우리 식구라도’라고 되어 있었지요. 이기정 씨를 비롯한 외부 사람들이 박순자 일행을 찾는 데 대해 천장 위에서 지시를 내린 것입니다. 이러한 쪽지가 발견되었을 때 이 사건의 윤곽이 명확해 지더군요.”
-천장 안에서 성행위는 없었을까요.
“여자 사체에서 정자가 검출되었다는 것을 천장 위에서 강간이나 화간이 있었다는 것과 연결시킬 수 없습니다. 성행위가 있었다면 여자들의 속옷에 정액이 묻어 있던가 해야 합니다. 그런 흔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여자들은 모두 속옷을 제대로 입고 죽어 있었습니다. 유방 하나 드러난 여자도 없었지요. 아주 깨끗한 사체들입니다.”
-28명의 여자 중 질내용물을 채취한 여자는 왜 12명뿐입니까.
“8월 30일 처음 부검을 시작한 것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황적준 박사 팀이었습니다. 황 박사는 질내용을 채취했지요. 그러다 손이 달리자 서재관 박사팀을 추가로 불렀습니다. 서 박사팀은 질내용물을 다 채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2구입니다. 부검은 저의 영역이 아니라 정확히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법의학자에 따라서는 정자의 검출가능 기간이 다릅니다. 천장에 올라가기 전의 성행위시의 정자가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또 검출되었다는 것이 정액인지도 명확치 않습니다.”
성행위 흔적 없어
-변사자들이 약물 또는 마취약을 흡입한 상태에서 교살됐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현장에서 발견된 약병은 판피린 한 병이었습니다. 박순자가 마신 것이었지요. 박순자는 판피린 중독자였습니다. 변사자들이 독극물을 흡입했다면 부검시 검출되어야 하는데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마취약을 흡입했다면 그 휘발성 때문에 부검해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현장에 떨어진 무수한 휴지가 마취약을 묻히는 데 사용되었다면 마취약이 휘발되어 버려서 휴지에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취약은 휘발성이 강한 만큼 가져올 때는 단단히 밀봉해야 합니다. 현장에서 마취약을 넣은 듯한 용기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8월 29일 새벽에 이기정 씨는 공장 소파에서 잤습니다. 정말 아무 소리도 못 들었을까요.
“소리를 안 내었을 것입니다. 천장 속의 분위기가 그만큼 긴박했다는 것이지요. 만약 누군가가 살고 싶다는 생각만 했었다면 소리를 지르거나 합판 위에서 몸을 굴리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랬으면 용인경찰서 직원처럼 석고보드를 뚫고 밑으로 떨어졌을 테니까요. 그런데 한 명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천장 안의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은 변사자 중 가족관계인 사람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가족 관계라면 다른 사람과 달리 뜻이 더 잘 통할 수 있습니다. 강제로 죽임을 당하는 상황이었다면 이 가족 중 어느 한 두 가족은 반항할 수도 있었고 밑으로 뛰어내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반항한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경수의 죽음은 이 사건 전체를 뒤바꿀 수 있을 만큼 중요합니다. 법의학자인 문국진 박사는 누군가가 이경수를 목 졸라 죽인 후 달아 맸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경수는 스스로 목을 묶은 다음 천장에 매달렸습니다. 우선 현장부터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이경수가 매달려 있는 곳은 과 같이 석고보드 위였습니다. 이경수의 목을 맨 끈이 묶여 있는 곳은 지붕 바로 밑의 철골입니다. 철골에 끈을 묶으려면 칸막이 벽(이곳은 다른 곳보다 시멘블럭이 30cm정도쯤 더 높이 쌓여 있다) 위에서 몸을 기울여 지붕 밑의 철골을 잡고 묶거나, 반대편에 있는 철제 앵글 위에 올라가 역시 몸을 기울인 채 묶어야 합니다. 즉 삼각형 밑변의 꼭지점에 끈을 묶어야 하는 식입니다. 이경수를 살해한 다음 매달았다면 적어도 2~3명의 건장한 남자 힘이 필요합니다. 10kg 이상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석고보드 위에서 60kg이 넘는 축 처진 남자 사체를 매단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이경수를 매달았다면 이들도 몸을 기울여 철골을 잡았을 것입니다. 제대로 힘을 쓰기 어려웠을 테지요. 또 칸막이벽과 철제 앵글의 폭이 좁아 여럿이 올라갔더라도 운신하기 불편해 힘을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이경수가 스스로 목을 매 자살했다는 것 외엔 다른 추측이 불가능합니다.
변사자 가족 관계
-문국진 박사 등은 ‘자살을 했다면 뒷목 부분은 끈이 들리기 때문에 끈 흔적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경수의 뒷목에는 끈이 감겼던 흔적이 있다(일주색흔). 등에 사반(죽은 후 밑으로 피가 쏠려 생겨나는 반점)이 있으니 이경수는 타살돼 눕혀진 채 옮겨져서 매달렸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같은 주장은 현장을 가보지 않고 부검만 할 경우 일어날 수 있습니다. 목 주위를 삥 두른 일주색흔이 있다는 것은 이경수가 올가미식으로 목을 매지 않고 옭매듭식으로 묶고 철골에 매달렸기 때문입니다. 등의 사반은 이경수 사체를 밑에 내려, 눕혀놓은 뒤에 생긴 것입니다.
-문 박사는 이경수 목엔 2중의 색흔이 있다며 이는 교살한 후 의사를 가장하려고 매달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문 박사는 법의학계의 원로이십니다. 저도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 박사께서는 현장에 가지 않았고 부검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경수의 목을 맨 사진만 보고 판단을 한 것입니다. 문 박사가 주장하는 2중 색흔이 과연 2중 색흔인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문 박사는 사진 위에 트레이싱 페이퍼(투명한 용지)를 놓고 연필로 선을 그어 가면서 색흔이 두 개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설명을 들은 사람이라면 색흔이 두 개 있다고 믿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 색흔은 2중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이경수를 죽였다면 눕혀놓고서 순간적으로 목을 묶었겠지요. 이때 끈을 옆으로 당기니까 흔적이 뒷목의 밑으로 생기겠지요. 그리고나서 짧은 시간 내에 사체를 매달면 매듭이 위로 들려 올라갑니다. 이때 사체에 남아 있는 매듭의 흔적은 어느 것이겠습니까. 목을 묶어 죽이는 순간의 색흔은 없어지고 매달았을 때의 색흔만 생깁니다. 즉 좁은 천장 안에서 이경수를 죽이고 매달았다면 2중 색흔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경수 뒷목 아래쪽에 흔적이 있는 것은 철골에 묶인 끈을 끊고서 사체를 내려 바로 눕혀 놓았을 때 매듭에 눌려 생긴 것입니다. 따라서 문 박사가 주장하는 2중 색흔, 3중 색흔은 이경수 뒷목의 상태를 사진만 갖고 판단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또 문 박사가 이경수의 몸무게와 같은 무게의 돗자리를 묶어 실험했다는 끈은 이경수 목에 묶여 있던 것이 아닙니다. 모조품이지요. 앞서 말했지만 천으로 새끼를 꼬면 잘 꼬여지지 않습니다. 꼬이는 정도도 일정하지 않지요. 이런 차이로 인해 촘촘하게 꼬인 끈 부분과 마주 닿은 목 부분은 헐겁게 꼬인 끈 부분과 맞닿은 목 부분과 색흔이 달라집니다. 문 박사가 실험한 끈이 촘촘하게 꼬여진 끈이었습니다. 또 이경수가 묶인 것과 굵기가 같은 것도 아닙니다.
이경수 목 맨 끈 없어져
-당시 이경수 목을 맨 끈은 어디에 있습니까.
“모릅니다. 없어졌습니다.”
-한쪽에서는 이경수가 다리를 쭉 펴지 않고 무릎 이하를 오그린 채 죽어 있었다며 의사인 경우 이럴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경수가 다리를 펴고 죽었으면 발 밑의 석고보드가 떨어져, 죽으려 한다는 것이 금방 들통납니다. 죽는 것을 노출시키려 했다면 죽으려고 할 필요가 없었지요. 목을 옭매듭으로 묶은 끈을 철골에 묶고 매달렸을 때 그는 다리를 오므렸을 것입니다. 최후까지도 발각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차츰 힘이 빠지면서 다리가 펴지다가 마침내 스티로폴에 발이 닿자 무게를 못 이긴 스티로폴과 석고보드가 떨어진 것입니다. 밑에 있던 김영자는 이 소리를 듣고서야 이경수가 죽은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경수 등의 사반은 무엇입니까.
“밑에 내려서 눕혀 놓았을 때 사반이 이동한 것입니다. 이경수의 사반은 팔꿈치 이하와 다리에도 있습니다. 의사의 경우 팔과 다리의 사반은 전형적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부소장은 다시 A그룹의 사진을 제시했다. 그는 밑에 깔린 한 여자의 사체를 가리켰다. 그 여자는 반듯이 누운 채 무릎을 세우고 있었다.
“이 경우 사반은 등에도 생기지만 발에도 생깁니다. 현장을 보지 않고서 이 여자의 사체를 부검하면 발바닥이 푸르스름하다(사반의 증거)며 목을 매어 죽은 것으로 소견을 밝힐 수도 있습니다.”
그는 또 ‘B그룹에 있는 박순자의 아들 이영호는 목을 매어 죽었다’는 부검의사의 소견은 현장을 보지 않고 부검만 한 데서 생긴 실수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영호는 A그룹의 여자처럼 무릎을 세운 채 누워 있었습니다. 사반은 등과 발등, 발바닥에 있었습니다. 부검의사는 의사로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영호가 목을 매어 단 흔적은 현장 어느 곳에도 없었습니다. 다른 변사자들과 같이 목이 졸려 질식사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경수 발바닥의 흙은 무엇입니까.
“이 사진을 보십시오. 발바닥이 회색입니다. 흙이 묻은 것이 아닙니다. 이경수의 발바닥이 원래 이런 것 같습니다. 여기에 사반이 생겨나자 흙이 묻은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박순자가 자의에 반하여 타살됐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박순자의 목 주위에는 표피가 벗겨진 흔적이 있었습니다. 이는 목을 조를 때 본능적으로 고통을 덜기 위해 끈을 밀치면서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박순자가 자의에 반하여 타살되었다고 보이는 흔적이 없습니다.”
-외부에서 누군가가 들어와 이경수 등을 타살하거나, 죽는 것을 도와주고 도망쳤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없습니다.”
이경수 발에 흙 없다
-오대양의 사채는 어디로 갔을까요.
“그 문제는 저는 모릅니다. 현장감식만 알 뿐입니다.
-오대양과 세모와의 관계도 모르시겠군요.
“모릅니다. 그쪽에 자꾸 의혹을 갖다보니 변사자들이 타살되어 옮겨졌다는 주장이 나오는데 사건 해결은 현장감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감식해 오면서 감식을 잘못한 적은 없습니까.
“있습니다. 나중에 진짜 범인을 잡긴 했지만 시간이 오래 걸렸지요.”
-오대양 변사사건도 감식을 잘못할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이 사건 감식은 이 이상 할 수 없습니다.”
약 네 시간에 걸친 인터뷰 동안 이 부소장은 시종 차분한 목소리로 질문에 대답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지난 87년 현장감식을 하면서 ‘이 사건 감식은 내가 책임져야겠구나. 절대로 이 사건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반드시 의혹이 제기돼 다시 수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진자료를 모두 보관해 두었습니다. 몇 년 후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은 또 일어날 것입니다. 그때도 똑같은 자료와 근거로 대답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