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갈 5:1)
출처 : KTSM 최회봉
신앙생활이 내게 가져다준 가장 큰 선물은 내 안에 주어진 기쁨과 평화와 자유였다. 내 안이 하나님으로 가득할 때 기쁨과 평안과 자유를 느낀다. 그런데 이것이 점차 과거형이 되어가고 있다. 신앙생활이 길어지고, 뭔가 아는 것도 더 많아지는 것 같은데, 내 안에 기쁨과 평화와 자유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복음이 가져다준 선물을 잃어버리고 있다. 내 안에 임한 하나님 나라가 희미해져 간다.
복잡해져서 그렇다. 단순한 게 아름답다. 그냥 하나님 믿어 신나고 기쁘고 평안하고 행복하고 감사하면 안 되나? 누군가 성도가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아마 초신자여서 그러는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오래된 신자가 되면 덜 행복하고 덜 기쁘고 덜 평화로워야 하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해야 할 일이 많아져서 일 것이다.
예전에 홍정길 원로 목사의 설교에서 들은 얘기가 기억난다. 그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게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목사 생활을 한 지 꽤 되고 나서 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자유’를 찾았다고 했다.
이 곳에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써 있다. 사람의 제일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홍 목사에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됐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많이 한 사람들일수록 내가 뭔가를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부채 의식’에 시달리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 불확실한 신념을 초신자들에게 열심히 전파하려 든다. 인간적 시각으로 볼 때는 맞는 말이다. 하나님 덕분에 구원받고 영생까지 얻었는데, 그렇게 받아 누리기만 해서야 되겠느냐는 논리다.
목사들은 설교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아예 구약성경을 가지고 성도들을 겁주기도 한다. 순종하면 복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받는다고.
이런 얘기들이 알게 모르게 쌓이면서 나의 신앙에 ‘뭔가 다른 것’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네가 예수 믿어 구원 받았지만 그것으로 다 끝난 게 아니다. 커다란 시험이 남아 있다. 나중에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갔을 때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게 없다면 천국 간다는 보장이 있겠느냐” 뭐 그런 얘기다. 당신이 구원받은 것은 맞지만, 그 구원을 유지하려면 뭔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해서 하늘에 상급을 쌓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경계하고 있는 다른 복음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물론 예수 믿어 법적으로는 구원을 받았지만, 영의 구원이 이루어졌을 뿐 아직 혼과 몸의 구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앙의 결국은 영혼(혼)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니, 몸이 죽는 순간까지 우리는 혼의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 그리고 주님 오시는 날 몸의 구원도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서 혼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달려간다. 그 구원을 빼앗기 위해 마귀는 죽는 날까지 우리를 방해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곳곳에서 말한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우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을 확신하노라고. 그런데도 교회에서 리더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겁을 준다. “너 지금처럼 그렇게 신앙생활 하다가는 큰일 난다”는 요지다. 몇 년 전 어떤 소그룹 리더가 소그룹 활동이 없는 나를 보고 “정말 큰 일이다. 알아서 해라”며 혀를 찬 기억이 난다.
초신자가 느끼던 말할 수 없는 행복은 여기까지다. 이제부터는 부채 의식에 시달린다. 교회 다니면서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래서 뭔가를 해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교회 사역팀이라는 게 신입 교인에게는 꽤 배타적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대체로 ‘사역’이라는 두 글자가 머리에 깊이 박혀 있는 고참 성도일수록 사납게 비쳐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어떻든 몇 년 전부터는 교회 다니는 게 예전 만큼 행복하지가 않다. 이런 말하면 이런 질문이 들어올지도 모른다. 교회를 행복하려고 다니냐고. 그렇다. 예수 믿으면 기쁘고 평안하고 행복하고 신나는 게 맞다.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움직이시는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나를 책임져 주시는데 당연히 행복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상상을 해본다. 자식 잘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아버지가 있다. 그런데 그 자식이 조금 모자라 아버지가 원하는 것만큼 똑똑하지도 못하고 잘나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를 정말 존경하고 좋아한다. 사랑한다. 그런 아버지가 있다는 게 너무 좋다. 그래서 아버지 맘에 드는 일,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을 해보려고 하지만 역부족이다. 능력이 안 된다. 하지만 잘해보고 싶다. 아버지에게 좋은 아들이고 싶다.
그런데 아버지가 정하신 어느 시점에서 평가 시험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는 판단하신다. “너는 평생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라다니고, 다가오고 친해지려고 애썼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너는 너무 모자란 게 많아. 내가 내준 숙제를 제대로 한 게 없쟎아. 헌금을 많아 했니, 구제를 많이 했니, 전도를 많이 했니 봉사를 많이 했니. 모두 낙제점이잖아. 그러니 네가 아무리 나를 아버지라 불렀다 하더라도 오늘부터는 내 아들 아니다. 지옥으로 가거라”
하나님이 정말 이러시려나? 그게 아니면, 교회에서 사람들이 하는 말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재철 원로목사와 김동호 원로목사는 한국 교회의 많은 목사가 교인을 가스라이팅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나도 두 아들이 있다. 내가 아들에게 바라는 게 무엇인가. 나는 아들이 나를 얼마나 기쁘게 하는지를 늘 생각하며 사나? 아니다. 나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감사하다. 이에 더불어 그가 나를 좋아하고, 나로 인해 즐거워한다면 뭐 더 바랄 것이 있겠는가?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들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시지 않았나. 그렇다면 지금 내 아들에 느끼는 감정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느끼시는 감정과 상당히 유사할 가능성이 크다.
바울이 얘기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예수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지만, 다시 종의 멍에를 메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다. 갈라디아 지역 교회에서는 성도의 자유를 빼앗는 게 할례라고 바울은 지목한다. 정답이 제시됐으니 다행이다.
답이 모호하면 고민스럽다. 분명히 현대 교회에도 주님이 주신 자유를 빼앗고, 다시 종의 멍에를 메도록 하는 것들이 있을 텐데, 갈라디아서처럼 콕 찍어서 제시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니 그것이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기쁨과 평화와 자유를 주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중간에서 가로채서는 안 된다. 그것은 도둑질이다. 마귀나 할 짓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신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크리스찬이 기쁘고 평화롭고 자유롭지 못한데 누가 그들을 좋아하고 호감을 느끼겠는가. 저 사람은 왜 늘 저렇게 행복해하지? 저 사람 형편은 말이 아닌 것 같은데, 늘 평안하네. 왜 그렇지? 그럴 때 사람들은 크리스찬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가 믿는 하나님에게 관심을 갖는 게 아닌가?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각종 틀, 이것 아니면 안 된다며 열을 올리는 것들이 우리의 자유를 앗아가는 ‘종의 멍에’ 아닌가 싶다.
주님. 오직 주님만 바라봅니다. 주님을 신뢰합니다.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시고, 주의 진리로 나를 이끄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