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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왕부에서 떠나는 춘약수
"주고후, 우리 사이의 모든 것은 이미 과거지사가 되고 말았으니 다시는 내가 돌아오리라 기대하지 말아요…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에요… 물론 당신은 여전히 양주에 계신 우리 부모님에게 박해를 가할 생각을 가질 수 있어요… 그렇게 한다면 당신이 비열한 소인이라는 이외에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니 모든것은 당신이 알아서 처리하세요."
주고후는 그만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온 얼굴 가득히 분노의 빛을 띄웠으나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조궁인은? 그녀 역시 그대를 따라서 가는 것이오?"
빙아를 들먹이자 춘약수는 그야말로 마음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 애는… 그 애는 이미 죽었어요…"
"아!"
주고후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내가 그녀를 죽인 거예요…"
춘약수는 냉랭히 웃었으나 맑은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그녀의 후사는 자연히 내가 책임져요. 그러니 당신은 쓸데없는 일을 더 상관하지 말아요."
말이 끝나자 그녀는 더 머뭇거리지 않고 기다란 창문을 열어 젖히고 몸을 날려서 창틀을 뛰어 넘었다. 삽시간에 그녀는 침침한 밤빛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주고후는 갑자기 어떤 느낌이 찾아 들었으나 이미 저지할래야 저지하기에 늦어 있었다.
밤바람이 설렁설렁 불어왔다. 활짝 열려진 기다란 창문으로 마구 불어 들어오고 있었다.
커다란 폭의 휘장은 바람에 파도처럼 일렁이면서 펄렁이고 있었고 은으로 만들어진 학취장등(鶴嘴長燈)의 파란 불꽃을 내뿜던 불도 즉시 꺼지고 말았다.
어둠컴컴한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는 주고후는 이 순간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공허감을 느꼈다. 그리고 바짝 자기에게로 압박해와 거의 질식할것 같은 정막이…
권세를 휘두른 이래 그는 처음으로 이와 같은 감촉을 느끼고 있는 것이니…
군무기의 등뒤에 가져다 대었던 손을 놓으면서 묘인준은 쓰디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법이 없군…"
두 사람은 이미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군무기는 냉정하고 방관자적인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이번 이무심에게 얻어맞은 일 장은 지극히 엄중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기소침해지지는 않았다.
"방법이 없소. 조금도 어떻게해 볼 도리가 없는걸…"
묘인준은 재차 고개를 가로젓고 그를 바라보았다.
"결코 나의 공력이 모자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숫제 낭낭의 수법이 전혀 다르기 때문일세. 그 어르신이 펼치는 것은 일종의 미묘한 폐기수법(閉氣手法)이란 말일세. 나의 생각으로는 이와 같은 수법을 통해서 자네의 몸에 있는 경락 가운데 최소한 아홉 곳은 이미 폐쇄된 것이라고 보여지네… 나의 능력은 겨우 자네를 위해 그 가운데 반만 풀 수가 있을 것이네."
군무기는 그 말을 받았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 역시 무척 수월한 노릇은 아니지."
"소용이 없네."
묘인준은 말을 이었다.
"설사 내가 전부 풀 수 있다 해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네. 관건은 낭낭이 자네의 몸안에 그녀 자신의 지음원기(至陰元氣)를 남겼다는 것일세. 이와 같은 경도는 너무나 미묘하다네… 나의 생각으로 내가 말하지 않아도 자네 스스로도 알 수 있을 것이네."
군무기는 일순 어리둥절해졌으나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는 자네의 뜻을 알겠네…"
군무기는 냉랭히 입을 열었다.
"그와 같은 기도(氣道)는 줄곧 나의 기해혈맥(氣海穴脈) 안에 도사리고 있네. 그래서 내 자신이 펼칠 수 있는 내력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니 그래서 나는 상승의 내공을 펼칠 수가 없었던 것일세."
"맞았네…"
묘인준은 맥빠진 얼굴을 하고 말을 이었다.
"그와 같은 상황하에서는 낭낭 자신 이외에 그 누구도 자네의 몸안에 웅크리고 있는 지음내력을 깡그리 씻어내지는 못할 것일세. 설사 공력이 더 높다 해도 공력과 기질이 유별하기 때문에 감히 경솔하게 시험해볼 수도 없고 말일세. 그렇게 되었을 때 그야말로…"
군무기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작혈(炸血)의 위험이 있는 것이지. 알겠네."
묘인준은 그를 한 번 바라보았다. 속으로 무척 탄복했다. 군무기의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깨우치는 능력에 지극히 놀람과 의아함을 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여기까지 이해를 하게 된 군무기는 그제서야 진정으로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넓었고 양성공(養性功)이 깊었다.
설사 가장 불리한 타격을 입었다 해도 결코 절망하지는 않았다. 더더구나 겉으로 드러내어서는 그저 어쩔줄 모르고 당황해 하는 꼴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용렬한 사람들이 스스로 쓸데없는 걱정을 자초할 필요가 없이 신경쓰지 말도록 하세."
얼굴에 땀을 훔치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을 때 문의 휘장이 젖혀지면서 날씬하고 얌전한 걸음걸이로 무명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인이 걸어 들어왔다.
군무기는 깜짝 놀라 다시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무척 낯이 설은 것이 아닌가. 즉시 그는 묘인준을 바라보았다. 묘인준이 아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나타난 소녀는 키가 헌칠했다. 그리고 짙은 눈에 동그란 눈동자를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퍽이나 자색이 있었는데 아름다움 속에서도 달리 영특한 기상이 엿보였다. 더군다나 눈동자에 갈무리된 그 눈빛은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사람을 압도하는 기세가 엿보였다.
군무기는 그와 같은 광경을 살펴본 후 대뜸 상대방이 또 결코 얕잡아볼 수 없는 협의도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묘인준은 미소로써 대답을 하고 정히 입을 열고 쌍방을 소개시키려고 했을 때 나타난 소녀는 어느덧 군무기를 향해 허리를 약간 구부려 보이며 간드러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소매 이취미(李翠薇)가 군선생에게 인사를 올립니다…"
"아… 이 분은…?"
군무기의 의아한 눈길을 받자 묘인준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분은 바로 지난번 자네에게 들먹였던 결옥 소저이네. 이취미는 그녀의 본래 이름일세."
군무기는 그제서야 그 아가씨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아. 반갑습니다. 이소저, 앉으시지요."
그리고 자기가 상반신을 벌거벗고 있는 데 대해서 일시에 겸연쩍게 여겼다.
묘인준은 즉시 눈치를 알아차리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소저는 여느 여자들과 다르며 역시 우리와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니 전혀 개의할 필요가 없네."
군무기는 고개를 끄덕이고 역시 눈앞의 소저를 바라보았다.
그 날 묘인준이 고약한 장사치 곽자만을 징계하고 병마지휘 서야로를 만나 화방으로 가서 술에 취해 결옥소저를 알게 된 경과는 이미 묘인준으로부터 직접 자세히 들었기 때문에 소저가 바로 전조의 충신 후예이며 무공에도 퍽이나 조예를 쌓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주고후를 찔러 죽이러 갔다가 성공하지 못해서는 한왕의 왕부에 사로잡히게 되었으나 묘인준이 이미 그 일에 상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무기는 쓸데없이 나서지 않았던 것인데 지금 와서 살펴볼 때 틀림없이 묘인준이 도움의 손을 뻗쳐서는 어느덧 갇힌 곳에서 벗어나게 된 모양이라는 판단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퍽이나 기쁜 일이라고 여겼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녀를 몇 번 더 눈여겨 보았다. 상대방 소저는 아름다운 가운데 영기가 발랄한 것이 정말 뛰어난 인품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훌륭한 구슬이 속세에서 기녀노릇을 했다는 것은 정말 한탄할 일이라 여겨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묘인준을 만나고 서로의 풍진세상에서 지기가 될 것을 허락한 모양이니 재주나 얼굴 모습에 있어서 그야말로 천생배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따라서 그는 마음속으로 그들을 축복해 주며 또한 기뻐했다.
그런데 이소저는 소맷자락을 걷어올리더니 한 쌍의 하얀 손목을 드러내며 의젓하게 군무기에게 입을 열었다.
"군선생, 몸이 어디 개운치 않은 곳이 있으면 소매가 그대를 위해서 안마를 해드리면 어떻겠어요?"
군무기가 막 입을 열려고 했을 때 묘인준이 어느덧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소저, 수고 좀 해주시구려."
두 사람은 마주보며 웃었고 이취미는 즉시 군무기의 등뒤로 돌아가서는 그의 어깨 위에 한 조각의 수건을 걸치고서는 즉시 안마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이 옷과 같이 희고 섬세했지만 무척 힘이 좋았다. 그리고 일단 힘을 주고 근육을 움켜잡는데 열 손가락 끝에서는 마치 한무더기의 숯불의 기운이 뻗쳐나오는 것 같았다.
하나의 수건을 격하고 있었는데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화끈거렸다. 그리고 불속처럼 화끈거리는 가운데 한가닥의 찬 기운이 있었다.
찬 기운과 뜨거운 기운이 서로 충격을 주는 가운데 저절로 근질근질한 느낌이 들면서 온몸이 대뜸 한없이 개운해지는 것이 아닌가.
군무기는 한 번 시험해보자 대뜸 이소저가 틀림없이 정순한 소녀공(素女功)을 연성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은 내력은 이무심의 지음공(至陰功)과 똑같다고는 할 수 없으나 유사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아래 위로 뚫고 나갈 때 이무심이 가한 기해혈맥내의 지음내기경도(至陰內 勁道)를 해소시킬 수는 없었지만 잠시 동안 완화시키는 효과는 거둘 수 있었고 모름지기 틀림없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군무기는 불현듯 고개를 쳐들고 그녀에게 고맙다는 시선을 보냈다.
이취미는 한편으로 공력을 돋구고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한편으로 웃으면서 말했다.
"선생의 존함과 유화하가에서 여러 가난한 집안의 아들딸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준 의협에 찬 행위들을 묘상공께서는 모두다 저에게 알려 주셨어요. 저로써는 정말 한없이 탄복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오늘날 이렇게 다행스럽게도 만나뵐 수 있다니 정말 생각지 못했네요…"
군무기는 고개를 가로젓으며 웃었다.
"그대는 너무나 겸손하시구려. 소저가 밤중에 왕부로 뛰어든 용기는 그야말로 가상한 일이 아니겠소."
이취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일을 말하자면 정말 부끄러워요… 저는…"
묘인준이 그 말을 받았다.
"그대가 말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깜빡 잊을 뻔했구려…"
그는 군무기 쪽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일에 대해서 나역시도 최근에서야 그녀에게 듣게 된 것인데… 따지고 보면 오히려 춘귀비에게 감사를 해야 할 것이네. 만약에 그녀가 그날 의리로 도움의 손길을 뻗쳐주지 않았더라면 이소저는 그날 바로 왕부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네…"
즉시 그는 이취미가 그 날 주고후를 찔러 죽이려다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으나 다행히 춘약수가 구원해주고 또 이번에 다시 그녀를 옥중에서 구출하게 된 경과를 대략 이야기했다. 군무기는 그저 조용히 듣기만 했다.
묘인준은 이야기가 끝나자 감탄하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춘소태세는 부귀를 누리고 있지만 의협의 길을 펼치는 것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고 일신의 무공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실로 훌륭하다 하지 않을 수 없네. 그 날 일이 있은 후 나는 한 때 말로써 자극을 좀 주었었는데 틀림없이 그녀는 자네를 만나러 갔을걸."
군무기는 쓰디쓰게 한 번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 일은 그가 마음 아파하고 유감스럽게 여기는 일이었다. 그리고 정서적으로는 그만 착잡해져서 정녕 끝까지 생각할 염두가 나지 않았고 생각해본들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취미는 원래 춘약수에 대해서 잘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일을 당한 이후 돌아오게 되자 가까스로 묘인준으로부터 대략 들어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뜸 원래의 생각을 바꾸어 춘약수가 당한 경우를 무척 동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또한 군무기가 춘약수에 대해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도 이해를 했다. 더군다나 지금은 또 다른 한 분의 소저 심요선이 개입하고 있어 정세가 더욱더 미묘하다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국외인으로써는 자연히 무슨 말을 하기가 거북스러웠다.
하여튼 이번의 해후로 인해서 묘인준과 이취미의 간격은 그야말로 한층더 깊어지게 되었다. 감정의 진전에 그녀는 부득불 진일보해서 묘인준이 처해 있는 처지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틀림없는 사실은 지금 묘인준과 군무기에게 가장 커다란 압력은 바로 요광전의 지극히 신비한 인물인 이무심에게서 비롯된다는 것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화두의 중심은 자연히 그 신비한 인물에게로 옮겨지게 되었다.
"자네가 두 번이나 낭낭의 손에서 도망을 쳐 목숨을 구했다는 것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일세…"
묘인준은 무척 억지로 웃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어르신은 틀림없이 그 일을 가장 큰 치욕으로 여기게 될 것이고 다시 만나게 되었을 적에는 그야말로 극한 적인 수단을 다해서라도…"
군무기는 멋적게 웃었다.
두번이나 이무심의 손에서 죽다 살아남은 일을 생각해보니 정말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었다. 반드시 죽게 되리라고 생각했는데 죽지 않았는데 그 미묘한 점은 정말 불가사의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봐도 납득이 갈 만한 설명이 되지 않았다.
마치 남모르는 가운데 어떤 신비한 안배가 있어서…
그러나 사실 실제 정황을 진지하게 검토해 보면 또다른 아리송한 점에 있는것 같기도 했다.
관건은 바로 이무심이라는 분이 무심, 즉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소문이 파다하게 났지만 자기에 대해서 손을 쓰게 되었을 적에는 처음부터 어느 정도 연민의 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 그 극한적으로 자기를 해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에게 어떤 도망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두 번이나 죽음에서 살아난 것은 결코 요행이라는 요인을 또한 절대적으로 배제할 수가 없었다.
이무심이 설사 자기에 대해서 어떤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되었다고 해도 최후의 뜻은 여전히 자기를 죽이는데 있는 것인데…
그녀 본인이 마치 일종의 모순에 마주친 듯한 것은 또 무엇 때문일까?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군무기는 여러모로 생각을 해보았으나 얻게 된 인상은 오직 유감스럽다는 사실이고 증오심은 전혀 우러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원수처럼 여겨지지도 않았다. 물론 거기에는 심요선이 원인의 하나가 되기도 하겠지만 묘인준 역시도 관계가 있었다.
그 이외에도 더더욱 일종의 이상한 원인이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이 이해할 수 없는 요인이 그로 하여금 줄곧 어떤 다른 적을 상대할 때처럼 절대적인 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이에 군무기는 지극히 곤혹감을 느끼고 백 번 생각해 보았으나 그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지금만 해도 커다란 액겁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왔는데 그는 또 마음 편하지 않게시리 이무심에게 기습을 가할 계획을 궁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이렇게 하는 데에는 원인이 있는 것이었다…
이취미는 그를 위해 안마하던 손을 떼어내고 몇 걸음 물러서서는 웃음을 띄우고 입을 열었다.
"이제 좀 나아지셨나요?"
"훨씬 가뿐해졌구려."
한편으로 그렇게 말하면서 군무기는 이소저에게 감사하는 말을 했다. 후자는 황송하다는 말을 했고 두 사람을 한 번 바라보더니 그대로 한 바람막이를 들고서는 몸을 돌려 그자리를 떠나갔다.
"그대들은 이야기를 나누세요. 저는 잠시 들어갔다 나올게요…"
그리고 그녀는 문을 열고 걸어 나갔다.
군무기는 한편으로 몸에 흐르는 땀을 훔치고 그녀가 떠나간 이후 묘인준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보기에 저 아가씨는 슬기롭고 총명할것 같군. 그리고 의협심도 강할것 같네. 그야말로 한 분의 기녀라고 볼 수 있는데 기질이나 언행이 크게 비범하네. 준형이 그와 같은 친구를 갖게 되었으니 정말 기쁘고도 축하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되네 그려."
묘인준은 자기의 옷을 가져와 군무기에게 바꾸어 입도록 하고서는 그 말을 듣더니 나직이 한숨을내쉬었다.
"아, 그와 같은 칭찬을 듣게 되니 정말 기분 좋네. 나는 그녀에 대해서 원래 그렇게 잘 이해를 하지 못했는데 이 며칠 동안 그녀에게 이야기를 들어서야 가까스로 그녀의 신세가 무척 참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네. 그녀의 부친은 일찍이 주고후에게 해침을 받아 죽음을 당하게 되고 어머님도 삼 년 전에 어느덧 작고하셨으며 오라비와 언니들은 헤어져서 행방을 알 수가 없다고 하더군. 그리고 그녀 자신은 어릴적부터 교방(敎坊)으로 떠돌아 다녔는데 나중에 무극파의 장로인 무극자를 만나게 되어 제자가 되고 무공을 익히는데 성공하자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살그머니 진회가에 나타났다는 것이었네. 그리고 그날 만약 춘약수가 그녀의 한목숨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그 날 바로 주고후의 검 아래 죽고 말았을 것이라고 하더군. 이번에 곤경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천한 직업을 다시 가질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돌아갈 집도 없으니 정말 어떻게 해야 될 바를 모를 처지라네…"
군무기는 그를 바라보았다.
"준형의 뜻은?"
묘인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군무기는 싸늘히 코웃음치고 입을 열었다.
"몇 마디의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군… 준형, 준형은 이소저에 대한 인상이 어떠신가?"
"그건…"
묘인준은 쓰디쓰게 웃었다.
"나는 자네의 뜻을 알겠네… 다만…"
말이 끝나자 몸을 일으키더니 창문 앞으로 가서 바깥을 한참 동안 주시하더니 몸을 돌리고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은 운명의 안배에 따르도록 하세… 나는 이소저를 데리고 먼저 기동(冀東)으로 좀 다녀와야겠네. 첫째 그녀와 헤어진지 오래된 한 명의 오라버니를 찾아 뵙고 둘째로는 잠시 동안 피해 있겠다는 것일세… 그런 후에…"
피한다는 것은 물론 요광전주 이무심이 이곳에 와 있기 때문이었다. 그 한마디의 말에 군무기는 속으로 흠칫하게 되었고 그제서야 상대방이 역시 자기와 마찬가지로 이무심이 찾아내려는 목표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다만 다르다는 것은 상대방에게는 사제지간의 정이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낭낭께서는 이미 나를 발견했는지도 모르겠네. 그리고 암암리에 나의 동정을 관찰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묘인준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정말 그렇다면 나의 이 모든 것은 그저 헛수고에 지나지 않을 것일세…"
군무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귀전의 전주는 결코 소문에 듣던 사람처럼 매정한 사람이 아닐세. 그녀가 스스로 자기에게 무심이라는 이름을 지어 붙였지만 더욱더 그녀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 셈일세. 자네가 이번에 집을 멀리 떠나면서 알리지 않았던 것은 틀림없이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했을 것이네. 따라서 나는 자네가 역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네."
"아무래도 너무 늦은 것 같네…"
묘인준의 얼굴에 퍽이나 아쉬운 듯이 냉랭한 웃음을 떠올렸다.
"나의 일에 대해서… 자네는 어쩌면 다 모르고 있을지 모르지… 자네는 마땅히 내 몸에 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순간적으로 그의 얼굴에 창백한 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음을 띄우고 다시 말을 이었다.
"요광전에는 내가 반드시 돌아갈 것이네…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닐세.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군무기는 원래 그의 병이 모두 치료된 줄 알았는데 그 말을 듣고나서야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가 있었다. 상대방의 표정이 무거워 더욱더 말못할 고충이 있는것처럼 보여졌고 따라서 어쩌면 이번 길이 묘인준으로써는 시도를 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와 그는 물론 도의적으로 사귄 사이지만 어떤 말들은 너무 직선적으로 말할 수 없는 거북함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선택은 하나같이 그가 확실히 병이 치유되고 건강을 되찾게 된 이후에야 논할 수가 있는 것이고 지금으로써는 아직도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생각이 들자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들 두 사람을 위해 역시 축복을 해주었다. 그리고 지금 헤어지는 이마당에 있어서 자기는 이무심과 끝내 세 번째로 만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정말 목숨을 잃게 될지 모르는 형편인지라 순간적으로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만 자기도 모르게시리 두 눈에 아쉬운 정을 드러냈다.
단장인(斷腸人) 대 단장인이라 피차 마음속으로 깊이 축복을 해주는 이외에 그 어떤 말도 뱉어내기에는 부적절했다.
"자네는 어떻게 할 작정인가?"
묘인준은 그를 바라보았다. 눈동자에는 관심으로 가득했다.
"내 생각으로는 역시 잠시 피하는 것이 좋겠구만…"
"아닐세…"
군무기는 냉랭히 웃었다.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차라리 직접 해결을 짓기 위해 찾아가는 것이 났겠네… 나는 조금 쉰 이후에 취호일품으로 그녀를 찾아가겠네."
묘인준은 깜짝 놀랐다.
"방울을 푸는 데는… 역시 방울을 매단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군무기는 말을 이었다.
"나는 이제 달리 선택할 길이 없네. 형세상 불속에서 밤송이를 집어 올려야 하듯 반드시 가야 할 것이네."
묘인준은 깜짝 놀랐으나 곧이어 모든 것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기 무공을 회복시키고 심지어 심요선과의 애정문제에 있어서도 군무기는 다른 길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형세에 있어서 불속에서 밤송이를 반드시 주어야 했다. 성공하지 못하면 그만 한 몸을 희생할 수밖에 없는데 그럴 수밖에 더 있겠는가.
그러나 묘인준은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했다. 군무기가 직접 위험을 무릅쓰고 취호일품으로 찾아가기로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이상의 두 가지 원인 이외에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잃어 버린 어머니의 자수한 모습을 되찾겠다는 것이었다.
밝은 달이 창문을 엿보고 있었는데 꽃그림자를 흔들어 놓으면서 유령처럼 창문 위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때로는 싹싹거리는 소리를 내어 이 깊은 밤중에 어느 정도 음산한 기운마저 감돌도록 했다.
소유리는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눈앞의 그 헌칠한 사람의 모습을 쳐다보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누구요…"
팍하는 한 무더기의 불빛이 그 사람의 손에서 발사되었다.
그는 끝내 똑똑히 볼수가 있었다.
"선생님… 그대이시군요? 아이고, 선생님께서 돌아오셨군요…"
그러면서 그는 털썩하니 엎드렸다. 너무나 기뻐서 흐느꼈다. 눈물 콧물을 마구 뿌리며 울었다.
군무기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그를 땅바닥에서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서는 의자를 손가락질하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앉아서 이야기를 하자."
한편으로 그는 눈앞에 있는 한 기름등잔의 불을 켰다. 등불빛이 밝지 않도록 아주 낮추었다. 그리고 나서야 그는 손에 들고 있는 화섭자를 끄고 앉았다.
"선생님… 이 이틀 동안 어디로 가셨댔습니까? 정말 초조해 죽을 뻔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생님이 떠났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아마도 무척 많은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에 일시에 무슨 말을 먼저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 같았다.
침침한 등불빛 아래 그는 군무기의 창백해진 얼굴을 발견하고는 대뜸 깜짝 놀라서는 입을 열었다.
"선생님… 병이 나셨나요?"
군무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네가 떠날 줄 알았다. 어째서 아직도 남아 있느냐?"
소유리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리고서는 참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저는…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젯밤에 어떤 여인이 와서는 선생이 돌아오시지 않을 것이니 저보고 돌아가라는 거예요… 그러나 저는 믿을 수가 없었어요…"
군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얼굴을 망사로 가린 여인이 아니었느냐?"
"선생님께서 어떻게 아셨어요?"
"조금은 안다."
군무기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녀는 너에게 모두 무슨 말들을 했느냐. 더듬지 말고 천천히 모두 나에게 이야기하도록 하거라."
소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굴에 여전히 두려움이 있는 듯 입을 열었다.
"그 여인은 정말 무서웠어요. 그녀는 저에게 선생님이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하면서 저보고는 혼자서 양주로 돌아가라고 했어요. 그리고는 은자를 주는데 제가 마다했어요. 나중에 저는 그녀가 선생님의 방에서 마구 물건들을 뒤지는 것을 보았어요. 그래서 제가 가서 그녀에게 마구 뒤적이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서 저를 한 번 가리켰는데 저는 그만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그녀는 선생님의 방에서 반나절 동안 뒤졌는데 어떤 물건을 찾아갔는지 모르겠어요. 이튿날 제가 정신을 차리게 되었을 때 그녀는 보이지 않았어요. 선생님께서는 빨리 찾아보세요. 혹시 무슨 물건을 잃어 버렸는지…?"
군무기는 싸늘히 코웃음을 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흥! 나는 모두다 보았다. 어떤 물건도 없어지지 않았다. 내가 이번에 돌아온 것은 네가 걱정이 되기 때문이란다…"
"저는 잘 있어요…"
소유리는 가슴을 펴 보였다.
"아무 일 없어요… 선생님, 이 이틀 동안 어디 가셨었나요? 선생님을 뵙지 못하니 정말 초조해지더군요."
군무기는 그를 한 번 바라본 이후 입을 열었다.
"나는 볼일이 있어서 무척 먼 곳으로 가야 하니 너는 다시 나를 따라갈 수가 없단다… 내가 보기에 내일 너 혼자서 먼저 양주로 돌아가도록 해라."
소유리는 어리둥절해졌으나 아무런 불평의 말을 하지 않았다.
군무기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돌아가서 우리의 서당을 한 번 돌보아 주려므나. 그곳에서는 너를 필요로 하고 있다…"
소유리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께서는?"
그리고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선생님께서는 언제 돌아가시지요?"
"그건 정말 말하기가 어렵구나…"
군무기는 의미심장한 다시 입을 열었다.
"너도 알다시피 양주는 내 고향이 아니다… 나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머물 수가 없다. 그러나 일단 여가가 있으면 나는 돌아가서 너희들을 찾아보도록 하마…"
그 한 떼의 천진난만한 가난한 애들을 떠올리자 자기도 모르게 그리움이 솟았다.
"너는 알겠지…"
군무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애당초 내가 그곳으로 간 주요 목적은 바로 너희들과 같은 한 떼의 가난한 애들 때문이었다. 이제 너희들을 모두 공부를 시키게 되었으니 내 소원은 반쯤 이루어진 셈이다. 나는 원래 더욱더 커다란 소원을 가지고 유화하가로 갔다. 거기에 더욱 많은 서당을 세워서 모든 그곳의 어려움에 처한 애들이 모두 입을 옷이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모두 너희들처럼 글공부를 할 수 있고 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의 이 소원은 아마도 실현되기가 어려울 것 같구나…"
소유리는 눈을 한 번 깜박이더니 영악하게 그의 눈치를 보았다.
"저… 어째서지요?"
군무기는 빙그레 웃고서는 손을 내밀어 그의 머리를 한 번 어루만져 주었다. 이 순간 마음속은 무척 많은 감개가 끌어 올랐다. 원래 그에게 말해주지 않으려고 했으나 자기도 모르게 그만 말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왜냐하면 내가 무척 무서운 적을 만났기 때문이란다…"
"아… 그게… 누구죠?"
"바로 네가 조금전에 말한 그 얼굴을 망사로 가린 여인이란다…"
"바로… 그녀란 말이에요?"
소유리는 단번에 놀라서 두 눈이 동그래지고 말았다.
군무기는 쓰디쓰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척 무섭고 무서운 사람이란다… 너는 잘 모르지만 나는 이미 상처를 입었다…"
"아… 선생님…"
"이번에 내가 그녀의 손에서 도망쳐 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늘이 도우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돌아가야 한다."
갑자기 그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리고서는 후닥닥 얼굴을 돌렸다. 창을 격하고 사람의 그림자가 번쩍하니 움직이는 것 같았다. 군무기는 마치 살쾡이처럼 몸을 날려 달려나갔다. 두 짝의 창호지는 그가 달려나가는 바람에 후닥닥 크게 열려졌다.
그의 몸뚱이는 마치 커다란 독수리가 하늘을 누비는 것처럼 휙하는 소리속에 어느덧 창문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이었다.
한 사람의 그림자가 바로 그의 몸뚱이가 막 떨어지는 그 찰나에 유성처럼 쏜살같이 허공을 가로지르더니 대뜸 삼 장을 가로질러서는 표연히 앞쪽 언덕 앞에 내려서는 것이었다.
군무기는 이제 공력을 한껏 펼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힘을 쓸 수가 있었다. 더군다나 상대방이 좀도둑처럼 깊은 밤중에 남의 집안을 엿본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력을 다해서 결코 상대방이 자기의 손아래서 도망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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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독했습니다
잘보았읍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