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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시간에 화두를 깨치는 방법
[핵심]
A. 생각은 가짜다.
B. 가짜를 폐쇄한다.
C. 생각(가짜. 환각)이 폐쇄되면 진리는 열린다.
D. 생각이 폐쇄되면 더 이상 나를 만들지 못하므로, 결국 무아(無我)가 자동으로 성취되어 수행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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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석가모니는 보리수나무 밑에서 새벽 샛별을 보고 깨달으셨다.
2. 무엇을 깨달으셨을까?
3. 이 세상이 가짜라는 것을 깨달으셨다.
(그래서 무아, 무상, 고, 라고 하셨고, 가짜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이 팔만대장경이다. 이 엄청난 분량은, 세상이 가짜라는 사실이 얼마나 믿기 어려웠으면 이렇게 광대하게 설명하셨겠는가!)
4. 가짜인 이유는?
선악, 미추, 앞뒤, 너나, 옳고 그름, 삶과 죽음 등등이 모두 가상적인 중심을 설정해 놓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양쪽으로 분별하는 것이므로 가짜다.
예로 들어, 앞과 뒤를 구분할 때, 가운데에 가상적인 기준을 세우면, 앞과 뒤가 둘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가상적인 기준을, 앞보다 더 앞으로 옮기면, 앞이 오히려 뒤가 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우리의 생각은 가상적인 기준을 임의로 설정해 놓고 선악, 미추, 앞뒤, 로 각각 나누는 것이므로, 이런 것들이 전부 가짜라는 것이다.
원래는 앞뒤가 없지만, 중생이 가상적인 기준을 임의로 세우면 홀연히 앞뒤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가짜라고 하는 것이다.
5. 바깥에 보이는 모든 사물은 생각으로 만든 가짜다. (일체유심조=一切惟心造)
좀처럼 믿기 힘든 일이지만, “사람”과 “산하대지”를 모두 생각이 만들어 앞에 투사해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산하대지는 생각으로 된 것이다.
즉 나무도 생각이요, 산도 생각이요, 사람과 동물도 생각이다.
그러므로, 나무나 산이 바깥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으로 만든 환각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생각이 폐쇄되면 산하대지도 사라지고, 나무도 사라지고, 건물도 사라지고, 자동차도 사라지고, 사람과 동물도 사라지고, 나도 사라진다. 일체가 사라진다. 이것을 텅 빔이라고 표현한다.
6. 생각이 가짜라면 무엇이 진리인가?
진리는 생각(환각)을 백퍼센트 폐쇄(멈춤. 닫힘)했을 때 진리는 열린다.
진리가 열린다는 것은, 가짜인 생각을 백퍼센트 폐쇄하는 순간, 생각(양쪽으로 나눔)을 멈췄기 때문에 열리는 것이다.
진리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가짜를 해체하면 진리는 저절로 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가짜인 착각만 없으면, “없는” 그것이 진리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착각 없는(더 이상 환각을 만들지 못하는)” 그것이 진리다.
다시 말해, 생각이 가짜를 만드는 근본 원인이니까, 생각 그 자체를 폐쇄하면 진리는 열린다.
가짜를 만드는 원흉인 생각을 백퍼센트 없애버리면, 그 이면에서 기다리고 있던 진실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 진실이 뭐냐 하면, 일체가 사라진 텅 빔이다.
7. 그러면 생각을 폐쇄하는 방법은 있는가? 있다!
어떻게 하는가?
간화선의 “화두”가 그 목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화두라는 것은, 의문을 응집하여 의문의 덩어리를 만드는 것이 화두의 본색이다.
그러면 화두가 어떻게 “생각”을 폐쇄할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자!
의문을 일으키는 것은, “생각(환각)”에서 시작되지만, 생각을 없애버리고, 의문 자체만을 똑 떼어서 보면, 다시 말해 “의문 자체”만 본다면 그것은 생각이 아니고 생각 일어나기 이전의 마음이다.
이뭣꼬! 했을 때, 뭣꼬~~!하는 의문만을 똑 떼어서 보라는 것이다.
“의문 자체”만 보면, 그 부분은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이라고 봐도 된다.
그래서
화두를 이용하는 것은, 생각을 응집시켜, 생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폐쇄코자 하는 방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화두를 이용하면, 당연히 의문이 응집되고 응집될수록 생각은 더욱더 폐쇄되는 것이다.
* 그러나 수많은 화두 수행자는 꿈에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다만 화두를 일념으로 참구하면 뭔가 열릴 것이라고 기대할 뿐이다.
8. 열림;
생각이 완전 100퍼센트 폐쇄되면 그곳에서 새로운 마음이 열린다. “가짜”로 구성된 생각이 백퍼센트 폐쇄되면, 더 이상 가짜가 없기 때문에 공(空의) 세계가 열린다,
즉 모든 망념이 닫히면 그 이면에 있는 절대적인 텅 빈 바탕이 열리는 것이다. 절대적 바탕이 열리면 망념이 완전히 닫혔다는 증거가 된다.
절대적 텅 빔이란 어떤 현상을 말하는 것이냐 하면, 산도 사라지고, 대지도 사라지고, 나무도 사라지고, 집도 사라지고, 나도 사라진 것을 말한다. 이것들은 모두 생각이 만든 환각이기 때문에 생각이 폐쇄되면 당연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망념이 닫히면(망념은 “나”로부터 시작되기 때문) 그 즉시 지혜가 발생한다. 지혜가 무엇이냐 하면, 중생의 세계가 허상이고 가짜구나! 라고 판단을 하는 것을 지혜라고 한다.
9. 열림과 자아(나)의 관계
열림은 100퍼센트 내 몸에 대한 집착이 없어졌을 때 열린다.
조금이라도 집착이 남아 있으면 절대 열리지 않는다.
즉 100퍼센트 생각이 닫혔다는 것은, 더 이상 환각을 만들 수 없다는 뜻인데, 그 이유는, 환각은 “내”가 있어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환각을 만들 수 없다면, 그것은 바로 내가 없어졌다는 뜻이고, 내가 없어지면, 즉시 그 이면에 대기하고 있는 텅빈 순수한 허공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다.
(텅 빔이란 모든 착각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조금 전까지 앞뒤가 좌우가 있었는데 지금은 앞뒤 좌우 상하가 없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텅 빔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것을 더 세밀히 설명하면, 산하대지와 사람과 동물 등등 모든 사물이 사라져 없어진 것이며, 또 모든 개념(옳다 그르다, 길다 짧다, 사랑 미움, 등등)들도 다 사라진다. 그렇다고 해서 “텅 빔”을 텅 빔이라는 또 다른 절대적 진리가 있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이 이론은 영화관의 “흰 스크린”과도 같다. 영화가 상영될 땐 전쟁의 무서운 살육전이 진행되기 때문에 그 바탕에 “흰 스크린”이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면 하얀 스크린 위에서 전쟁이 상영됐다는 것을 안다. 이처럼 “생각의 영화”가 진행될 땐 그 바탕에 하얀 스크린이 있는지 모르지만, “생각의 영화”가 끝났을 때, 그때 비로소 흰 바탕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영화가 끝났다는 것은 더 이상 생각이 작동되지 못하고 폐쇄됐다는 뜻이 되고,
생각이 100퍼센트 패쇄되면, 자아(自我)도 작동하지 못하므로 당연히 하얀 스크린 같은 텅빈 대 허공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또 이것은 “거울 비유”와 같다. 맑은 거울이 있다, 그 앞에 무서운 사자가 지나가면 사자의 그림자가 거울 바탕에 찍힌다, 그러나 사자가 완전히 지나가고 나면 거울엔 아무 흔적이 없고 다만 맑은 바탕만 드러나는 것과 같다.
이 거울 비유처럼 “마음의 순수바탕”이 “망념의 그림자”가 사라지면 저절로 나타난다는 것과 같다.
(주의; “거울 비유”나 “스크린 비유”처럼 바탕에 있는 “순수한 텅 빔”을 석가모니는 “그것 또한 망념”이라고 하셨지만, 대승불교와 중국의 선종은 이것을 순수한 “진여” 또는 “자성” “본성” “참나”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이 둘의 차이를 아는 것이 불교의 전문적 지혜다. 그렇지만 생각이 가짜라고 하는 부분은 석가모니와 중국 선종 두 쪽 다 진리라고 인정한다.
다시 정리하면, 바탕의 텅 빔은 중국 선종은 진리라고 인정하지만, 석가모니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깥으로 나타난 모든 것은 가짜다! 하는 점은 중국 선종이나 석가모니나 둘 다 옳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중국 선종의 화두 법만 다루기 때문에, 석가모니께서는 그것을 왜 망념이라고 하셨는지는 밑에 “보충 설명”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10, “의단”(의심뭉치)과 “생각 폐쇄”의 관계.
위에서 설명한 비유처럼 생각의 망념을 폐쇄하면 저절로 텅 빔의 바탕이 나타나는 것이 간화선이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생각이 백퍼센트 폐쇄되지 않으면 텅 빔의 바탕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도 숙고해야 한다.
그러므로 생각의 폐쇄가 수행의 성패를 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의단(疑團)이 형성되어 가면, 생각은 점차 폐쇄되므로,
의단의 형성과 생각 폐쇄 이 둘은 동일한 것이다.
왜냐하면, 생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차단하면, 생각은 더 이상 이쪽저쪽 헤매지 않기 때문에 저절로 한곳으로 몰입된다.
그래서 생각을 폐쇄하면 집중력은 더욱 응집되어 저절로 “의심 뭉치”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11. 이 모든 것의 핵심(몸 해체, 생각 폐쇄)은 내 몸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이 집착을 놓으면 수행이 쉽게 해결된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수행법들은 내 몸의 집착을 놓게 하는 일종의 방편들이라고 볼 수 있다.
12. 근본불교(석가모니)의 “몸 해체”와 중국 선종의 “생각 폐쇄”, 이 둘의 관계를 보자.
석가모니의 근본불교에서는 “몸을 해체”하지만, 중국의 선종은 “생각을 폐쇄”한다. 즉 한쪽은 해체하고 한쪽은 폐쇄한다. 이 둘은 방법이 다르다.
그러나 이 둘이 같은 점은, 내 몸에 대한 집착이 있으면 수행이 안 된다는 점에 있어서는 공통으로 같다. 결국 내 몸에 대한 집착을 없애는 것이 수행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ㄱ]. 근본불교 수행관에서, 공동묘지에서 시체가 썩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할 때, 내 몸이 시체처럼 잘 사라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내 몸이 잘 사라지지 않는 것은 내 몸에 대한 집착이 있어서이다.
집착은 무엇이 만드냐 하면 생각이 만든다. 생각 속에 묻어 있는 “나”에 대한 집착을 해체하면, 시체관을 할 때 시체가 잘 해체되고 또 쉽게 사라진다.
[ㄴ]. 중국 선종에서, 생각을 폐쇄할 때, 화두 참구를 이용해서 생각을 폐쇄하는 것도, 결국 내 몸에 대한 집착이 없으면, 생각이 쉽게 폐쇄되지만, 그러나 몸에 집착이 있으면 잘 폐쇄되지 않고 망념이 끝없이 일어난다.
13. 보충 설명.
“거울 비유”나 “스크린 비유”처럼 “순수한 텅 빈 바탕”을 석가모니는 그것 또한 환각이라고 하셨지만,
대승불교와 중국 선종에서는 그것을 진리라고 하는 것은 오랜 역사적인 흐름이 있다. 즉 불교 교리 발달 과정에서 생긴 새로운 이론이다.
석가모니처럼 모든 것은 가짜고 환각이라고 가르치니까
지혜가 모자라는 후대의 수행자들이 가슴에 절망을 느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가짜고 환각이라 하면 우리는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갈 것인가 하고 염세주의에 빠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 바탕에 “절대 순수 텅 빔”이 있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텅 빈 바탕이라는 표현은,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방편임을 잊으면 안 된다.
순수한 텅 빔이라는 것은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텅 비었다는 것은 실체가 있는 물체가 아니지 않는가!
그러므로 중생의 염세주의에 빠져 갈팡질팡 하는 것을 구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기면 된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이것이 마치 실체가 있는 절대 진리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후학들이 그 말에 휘둘리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단 하나의 진리는, 일체가 가짜고 환각일 뿐이다.
이 말에 염세주의에 빠지지 않고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지혜인이라면, 그는 이미 대자유를 얻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 모든 것, 즉 눈앞에 보이는 산하대지와 사람과 동물 그리고 미움 원망 죽음 등등 모든 것이 가짜이고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알았다면,
거듭 말하지만, 정말 명확히 알았다면, 가슴이 뻥 뚫릴 정도로 대자유를 느껴야 한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일체 번뇌가 다 사라지고 천지에 걸릴 것이 없는 도인이 되는 것이다. 이 말뜻을 진정으로 알았다면 말이다.
그 사람 앞에 무엇이 걸릴 것인가! 죽음도 고통도 모두가 꿈인줄 알았다면, 무엇을 걱정할 것인가!
죽음이 앞에 오면 그것 또한 가짜인데 그냥 받아들여 죽어주면 되는 것이다. 무엇을 아쉬워하고 두려워할 것인가!
그러나 죽음이 실제라고 여겨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중생들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남의 일일 뿐이다.
이 점에서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깨닫는 것이 거대한 뭔가를 깨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사소한 곳에서 확연히 가슴에 와닿는다. 모든 것이 가짜며 환각이라면 내가 무엇을 걱정할까?
죽어도 좋고 고통스러워도 좋다 내가 뭘 걱정할 것인가 모두가 환각인데.... 이 말이 가슴을 꽝! 하고 때리는 순간 온천지가 텅 빈다. 왜 빌까? 환각이고 가짜니까! 한낱 꿈속에 일을 가지고 내가 왜 걱정 근심을 할까! 꿈 깨면 모두 사라지고 없는 것들을 가지고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가짜며 환각이라는 말씀은 이 세상 최고의 진리인 것이다. 그것을 석가모니는 삼법인(무아, 무상, 고)이라 하셨다.
무아 무상 고라는 말뜻은 “일체가 허상”이라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