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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자석과 같아서 자꾸만 그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시민포커스=조한일 기자]
눈물의 출처
노영임
눈이 오다
비가 오다
'오다'라고 말한다
'오다'의 대립어는 '가다'가 분명한데
눈, 비가 간다라는 말 들어 본 적 있어?
왔는데 가지 않고 감쪽같이 사라졌다면
어디로 흘러든 거지? 행방이 묘연한 걸
어쩌면
우리 몸속에 스며든 건 아닐까?
산간지역 빗물 받아 쟁여두고 가뭄 때 쓰듯
누구는 목메지 않게 굳은 빵 적셔 먹거나
슬픈 날
눈물로 핑 돌아 연신 훔쳐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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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다”는 말,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다”는 말, 어떤 게 맞을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의문과 같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혹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처럼 ‘오도 가도 못하는 일’이 가끔 우리 곁에 다가온다. 동물과 인간 사이 견고한 경계를 결정하는 것 중의 하나가 ‘출처’를 찾는 일일 것이다.
시인이 찾고자 하는 ‘눈물의 출처’는 ‘눈물’을 구성하는 화학 성분이 아니다. 정작은 ‘오다’와 ‘가다’라는 대립어의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시인의 감성, 양심, 성찰, 고뇌, 사유를 두루 섞어 독자의 언어적 방심과 선입견에 죽비를 내리치는 듯한 내적 표현이 그려진다. 필자도 ‘눈이 간다’ 또 ‘비가 간다’라는 말은 들어 본 적 없다. ‘비가 오신다’라며 ‘비’라는 비인격에 ‘대립어’ 인격을 얹어 존중하기에 바빴다. 타성에 젖은 인류가 그간 누린 비에 대한 최소한의 예라고 해두자.
‘왔는데 가지 않고 감쪽같이 사라졌다면’이라는 가정은 물리적인 ‘출처’를 넘어서서 ‘왔는데’가 아닌 실제로는 오지 않은 것에 대한 주입식 사고거나 오긴 왔지만 실제로 사라지지 않은 것에 대한 “상실”이거나 “실종”일 것이다. ‘오고 간다’는 대립어는 받아들이기에 따라 어느 한쪽으로 쏠리고 그 쏠림의 각을 우리는 평생 벌리거나 좁히면서 ‘있다’, ‘없다’라거나 ‘많다’, ‘적다’라거나 ‘온다’, ‘간다’로 재단해 왔다.
시인이 표현한 ‘누구는 목메지 않게 굳은 빵 적셔 먹거나’에서 시인의 ‘눈물’을 보는 외면의 각을 보게 된다. 동시에 각도기를 반대편으로 돌려 ‘슬픈 날 / 눈물로 핑 돌아 연신 훔쳐내지 않을까?’ 에서는 내면의 각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내(內)와 외(外)라는 출처가 다른 삶에서 예각의 삶을 살 때가 있고 둔각의 삶을 살 때가 있다. “오면 간다”는 것도 사물과 현상과 사고를 보는 각자의 각에 달려 있기도 하지만 눈, 비와는 달리 ‘슬픈 날’은 오면 간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눈물은 자석과 같아서 자꾸만 그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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