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live/ZtnPWVaCGFo?si=U8IMv7FM9SN3iM3t
창세기 강론 102
창세기 38:15-30
유다와 다말(2)
9절에서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라는 말씀에서 땅에 설정하였다는 것은 땅을 파괴하고 멸망시키는 행위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어차피 죄의 저주 아래 있는 땅(창 3:17)이 오난으로 인해 더 파괴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가질 수 있는데 이는 오난으로 인해 땅이 더 더러워질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아들 낳는 역사를 통해 이 땅에 언약의 완성자로 오시는 것이다. 창조 언약에서 보여주신 것처럼 땅을 섬겨야 할 자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나타내었다(창 2:5). 이런 점에서 언약의 완성자는 땅을 섬기는 존재이다(엡 1:10, 골 1:20). 그러나 오난은 땅을 파괴함으로 땅을 섬기게 될 자가 그의 씨(후손)로 오는 아들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씨가 자기 의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언약도 무시하는 것이 인간의 죄성이다.
“15 그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16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청하건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의 며느리인 줄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15-16절). “그(녀)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라는 말은 다말이 자신을 처녀로 나타내었다는 뜻이다. 즉 아직 씨를 받지 못하였다는 의미이다.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라는 표현에서 “창녀”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자나’는 ‘간음하다’라는 뜻이다. 직역하면 ‘유다가 그녀를 보고 간음하기로 생각하였다’라는 말이다. “들어오려느냐”라는 말이 ‘보’이다. 즉 다말에게 들어가 하나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간음은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한 모습으로 그린다. 이런 점에서 유다를 통해 야곱의 아들들, 즉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의 실상을 드러내 준다.
“17 유다가 이르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담보물을 주겠느냐 18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17-18절). 유다는 다말에게 들어가는 조건으로 후에 염소 새끼를 주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다말은 그것을 얻기까지 “담보물”을 요구하였는데 “도장, 끈, 지팡이”이다.
“도장”의 ‘호탐’은 ‘인장, 도장, 인장반지’라는 뜻으로 소유자의 신분과 권리를 나타내는데 계약을 상징한다. “끈”은 계약 관계로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하며, “지팡이”의 ‘맛테’는 ‘지팡이, 막대기’라는 뜻인데 꽃이나 짐승의 모양을 새겨 부족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출애굽 때 지파로 표시되었다(민 13:4-15). 각 지파의 지휘관이 지팡이로 이끌었기 때문이다(민 17: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맛테)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시 110:2)
지파로 표시하였던 지팡이는 시편에서 주의 “규”(홀)로 표현하여 원수들을 물리치고 다스리는 권능으로 말씀한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을 상징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담보물”(17, 18, 20절)은 ‘에라본’으로 ‘담보물, 보증’이란 뜻인데 사도는 이 말을 헬라어로 ‘알라본’으로 음역하여 성령을 가리킬 때 사용하였다(고후 5:5).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알라본)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3-14)
유다가 다말에게 주기로 한 “염소 새끼”는 속죄의 제물인데 새끼라고 표현함으로 그 안에 복음을 담겨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담보물”이란 염소 새끼를 대신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들이 하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유다는 간음을 행하고 있었지만 다말은 자신의 몸을 내어줌의 담보물로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일하고 계심을 보증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유다와 다말은 서로 예수 그리스도를 넘겨주고 받음으로 죄인에게 하나님의 의가 주어지는 언약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런 점에서 “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너울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19절)라는 말씀은 유다에 의해 온전한 의가 드러나기까지는 과부의 모습을 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세상이 볼 때는 과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남편으로 삼고 있다고 하지만 외형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씨를 받은 것에 대한 보증을 성령께서 내 안에서 늘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말씀으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성도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는 것으로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나누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 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담보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21 그가 그곳 사람에게 물어 이르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이르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22 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이르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였고 그곳 사람도 이르기를 거기에는 창녀가 없다 하더이다 하더라 23 유다가 이르되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내가 이 염소 새끼를 보냈으나 그대가 그를 찾지 못하였느니라”(20-23절).
유다가 다말에게 주기로 한 염소 새끼를 아둘람 사람 히라에게 부탁한 것은 자신의 행위가 깨끗한 것처럼 보이기 위한 것이다. “히라”는 ‘귀족, 찬란함’이라는 뜻이다. 즉 자신의 행위를 히라와 같다는 의미로 나타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기독교라는 종교성을 가진 자들은 자신을 윤리 도덕적으로 깨끗한 존재로 나타내는 것이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는 방법이라고 착각한다.
여기서 이제 “창녀”라는 ‘케데샤’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데 ‘카다쉬’(거룩하다, 성별하다)에서 온 말로 가나안 땅의 신전 제사를 위해 거룩하게 구별된 여자로 ‘신전의 창녀’라는 뜻이다. 비록 음행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신전의 제사 의식을 위한 것을 거룩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유다는 나름 종교 행위를 통해 거룩을 행한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한 음행이었다.
“그곳 사람”이란 표현은 히브리어로 ‘에노쉬’인데 ‘인류, 인간’이라는 뜻인데 다말과 같은 곳이 있었지만 다말의 의를 알지 못하는 존재이기에 창녀를 찾는 아둘람 사람에게 문자 그대로 창녀는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다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위해 구별하신 존재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리를 보지 못하는 보편적인 인류의 모습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 8:23)
유다는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라고 하였는데 아둘람 사람과 하나 되어 자신의 의를 믿는 아들들, 엘이나 오난과 같은 모습이다. 소문이 퍼져 자신의 위신과 명예가 훼손되는 것이 더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담보물로 인한 보증이 드러나면 죄인의 부끄러움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아래에서 났고 곧 세상에 속한 자의 모습이다.
“24 석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일러 말하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느니라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25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24-26절).
우리 성경에 “그는 나보다 옳도다”라고 번역하였는데 ‘차다크’는 ‘의롭다’라는 뜻으로 직역하면 ‘그녀는 나보다 의롭다’라는 말이다. ‘의’는 ‘하나님의 의’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된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유다와 다말의 한낱 그렇고 그런 19금 이야기가 아니라 다말에 의해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유다의 죄가 폭로되고 다말이 어떻게 씨를 갖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엘과 오난을 통해 더럽혀진 땅에 새롭게 언약이 성취되는 과정을 보여주신 것이다.
유다는 다말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보았다. 자기 가문의 후손을 잇게 하기 위한 헌신적인 결단을 한 다말의 고통 속에서 야곱에게 언약하신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된 것이다(참고 룻 4:12).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과오와 수치를 다말이 담당하게 하심으로 유다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신 그 마음을 알도록 하셨다. 결국 아들의 죽음은 다말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계신다.
아들들의 죽음을 며느리에게 돌려 셋째 아들을 보호하고자 했던 유다의 잘못 때문에 힘없는 다말이 고통을 받았다. 고통받던 다말은 유다의 가문, 아니 더 폭넓게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언약의 씨를 이어가도록 하기 위한 언약의 일에 불려 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수치스런 자리에서 수치스런 행위를 감수하면서 유다 가문의 저주를 짊어진 하나님의 희생을 드러낸 것이었다.
“27 해산할 때에 보니 쌍태라 28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29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30 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27-30절). 다말은 베레스와 세라라는 쌍둥이를 낳게 되는데 그 중에 베레스를 통해 언약의 씨가 이어지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게 되었다(마 1:1-16). 언약이 씨(후손)가 쌍둥이를 통해 베레스로 이어지는 것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야곱 언약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유다가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선택된 것은 그의 장점이나 선한 행위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의롭다고 자처하는 유다가 불의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이방 여인인 다말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고발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이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을 아는 미천한 다말을 통해 언약의 역사를 이어가는 것임을 보이셨다. 앞으로 요셉의 이야기는 이런 차원으로 보여 주실 것이기에 유다와 다말 사건을 여기에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다와 유다의 아들들의 죄로 인해서 다말이 애매하게 희생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 자신들의 악함과 죄로 인해 누가 고통을 받는가?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기독교의 의는 개인의 의가 아니라 다말같이 공동체(교회)를 위해 희생하는 의를 말한다. 형제의 끊어진 기업과 생명을 이어주기 위해서 어떤 희생이라도 치룰 수 있는 자가 의로우신 주님께 구원받은 자의 삶의 방식이 된다. 유다의 죄악된 모습은 당시 야곱아들들(이스라엘)의 실상이고 오늘 우리의 실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다의 후손으로 오시는 것은 확실히 하나님 편에서의 희생이요 은혜였다(2025012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