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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록(東槎錄) [1] 조선 / 우리역사 2010. 3. 3. 13:06 https://blog.naver.com/ohyh45/20101418451 번역하기 |
동사록(東槎錄) [1]
조선 중기의 문신 도촌(道村) 강홍중(姜弘重 1577(선조10) ~ 1642(인조20))이 통신 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다녀와서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사행일록(使行日錄)이다. 이 사행은 강호막부(江戶幕府)의 삼대 장군(三代將軍) 가광(家光)이 관백(關白)에 취임할 때에 회답 사행(回答使行)으로 일본에 건너가 하례(賀禮)를 하고 국교를 더욱 굳게 맺어 수백 년 동안 두 나라가 평화를 유지하도록 하였다.
당시 일본의 풍토ㆍ민속과 명승ㆍ고적, 그리고 정치ㆍ직제(職制)와 성첩ㆍ요새(要塞) 등에 이르기까지 소상하게 다루었다. 특히 임란왜란 후 외교 관계에 있어 귀중한 연구 자료가 된다.
천계 갑자년일본 회답사 행중좌목(天啓甲子日本回答使行中座目)
천계 갑자년 : 천계는 명 희종(明憙宗)의 연호. 1624, 인조 2년
상사(上使) 형조 참의 정입(鄭岦) 부사(副使)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 강홍중(姜弘重)
자(字)는 임보(任甫). 정축년(1577, 선조 10)에 출생. 선조 계묘년(1603, 선조 36)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선조 병오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강원 감사(江原監司)에 이름.종사관(從事官) 예조(禮曹) 정랑(正郞) 신계영(辛啓榮) 역관(譯官) 가선(嘉善) 박대근(朴大根) 이언서(李彥瑞) 통정(通政) 홍희남(洪喜男) 상통사(上通事) 전 정(正) 박언황(朴彥璜) 강우성(康遇聖) 전 직장(直長) 이형남(李亨男) 장선민(張善敏) 한학(漢學) 송예수(宋禮修) 정충헌(鄭忠獻) 사자관(寫字官) 이성국(李誠國) 화원(畫員) 이언홍(李彥弘) 의원(醫員) 곽금(郭嶔) 황덕업(黃德業) 서사(書寫) 김신남(金信男) 별파진(別破陣) 유태길(劉太吉) 김신종(金信宗) 포수(砲手) 백사길(白士吉) 김덕련(金德連) 상사 군관(上使軍官) 절충(折衝) 노세준(盧世俊) 전 부정(副正) 이동룡(李東龍) 전 경력(經歷) 정국빈(鄭國彬) 전 감찰(監察) 김현달(金顯達) 전 만호(萬戶) 이영서(李榮瑞) 내금장(內禁將) 송영(宋嶸) 사과(司果) 이안농(李安農) 부사 군관(副使軍官) 절충(折衝) 김사위(金士偉) 전 주부(主簿) 지학해(池學海) 전 선전(宣傳) 강덕취(姜德聚) 강수(姜綬) 전 만호(萬戶) 남궁도(南宮櫂) 정득선(鄭得善) 한량(閒良) 강홍헌(姜弘憲) 종사관 군관(從事官軍官) 출신(出身) 강의(姜毅) 정몽득(丁夢得) 방진(方璡)
8월
20일(임인)
맑음. 평명(平明)에 대궐로 나아가니, 상사(上使) 정입(鄭岦)과 종사관(從事官) 신계영(辛啓榮)이 벌써 의막(依幕 임시로 거처하는 곳)에 나와 있었고, 대궐 안 여러 아문(衙門)에서 모두 하인을 보내어 문안[存問]하였다. 숙배(肅拜)한 뒤에 상이 편전(便殿)에 납시어 세 사신(使臣)을 인견(引見)하고 일행을 단속하는 것과 사로잡혀 간 사람의 쇄환(刷還)하는 일을 간곡히 하교하였다. 그리고 호피(虎皮) 1장, 궁자(弓子) 1부(部), 장전(長箭)ㆍ편전(片箭) 각 1부, 유둔(油芚)을 갖춘 통아(筒兒) 2부, 후추[胡椒] 1두, 백첩선(白貼扇) 3자루, 칠별선(漆別扇) 5자루, 납약(臘藥) 1봉을 각각 하사하므로, 공손히 받고 배사(拜辭)한 후 물러나왔다. 좌의정과 봉래(蓬萊 정창연(鄭昌衍)) 두 정승에게 들러 작별 인사를 하고 집에 돌아와 사당에 뵙고 어머니 앞에 배사(拜辭)하니, 일가 친척의 부인들이 모두 와서 송별하였다. 지나는 길에 곽 첨정(郭僉正)ㆍ이 부정(李副正) 두 분에게 들러 인사를 하고 이정(離亭 작별하는 정자)에 이르니, 위로는 명공 거경(名公巨卿)에서 아래로는 평소에 친분이 있던 사대부까지 거의 다 와서 전별하였다. 이날은 도저동(桃渚洞) 삼거리에서 유숙하였다.
21일(계묘)맑음. 평명에 조반을 재촉해 먹고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들어가니 사인(舍人) 이명한(李明漢)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월사상공(月沙相公 이정귀(李廷龜))과 김 순천 지남(金順天止男 순천은 지명. 순천 원이었음) 영공이 연달아 이르렀다. 종사관(從事官)이 또 뒤쫓아와서, ‘상사(上使)는 벌써 날이 밝기 전에 떠났다.’ 하였다.
사인소(舍人所)에서 판비(辦備)를 내어 크게 기악(妓樂)을 잡히고 주연을 베풀어, 잔이 오고 가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취하게 되었다. 연릉댁(延陵宅)에 들렀는데, 취하여 한 마디 말도 수작하지 못하고 바로 일어났다. 군무(君懋)ㆍ이정(而靜)ㆍ백서(伯瑞) 형제와 조유지(趙綏之)가 뒤따라 와서 작별 인사를 하였다. 한강에 이르니 백규(伯圭) 형제와 성원(聲遠)ㆍ습지(習之)ㆍ정 직장(鄭直長 직장은 벼슬)이 와서 작별하였으며, 성아(星兒 아들 성(星)을 이름)도 뒤따라와 울며 송별하였다. 드디어 여러 친구와 작별하고 강을 건너니 급()ㆍ전(琠) 두 아들과 홍여경(洪汝敬)이 뒤를 따랐다.
양재참(良才站)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가평(加平) 군수(郡守) 이안눌(李安訥)이 지대차(支待次) 나와 있었고, 윤응성(尹應聖)이 그 산소에서 와 보았다. 교촌(板橋村)에서 말을 쉬이는데 날이 저물었다. 양근(楊根) 군수(郡守) 이의전(李義傳)이 지대차 나와 있었다.
황혼이 깔린 뒤에 횃불로 앞을 인도하고 길을 떠나 2경(二更 오후 9시~10시)에 용인현(龍仁縣)에 이르러 관사(官舍)에 사관(舍館)을 정하였다. 진위(振威) 현령(縣令) 김준(金埈)이 지대차 나왔고, 주인 원[主倅] 안사성(安士誠)이 보러왔다. 강덕윤(姜德潤)과 이격(李格)이 당성(唐城)에서 술을 가지고 보러왔고, 안성(安城) 군수(郡守) 김근(金瑾)과 경안(慶安) 찰방(察訪) 이대기(李大奇)는 차원(差員)으로 수행(隨行)하였다.
22일(갑진)
맑음. 조반 후에 길을 떠나 양지(陽智)에서 유숙하였다. 주인 원[主倅]은 근친(覲親)하기 위하여 시골에 내려갔다 한다. 수원부(水原府)에서 지대를 맡았는데, 부사(府使)가 체직(遞職)되어 오지 않았으므로 지공하는 범절이 아주 형편없었다.
23일(을사)
간혹 흐림. 아침에 떠나 승보원(承保院) 앞 들에서 점심 먹었다. 이천(利川) 부사(府使) 이성록(李成祿)ㆍ함양(咸陽) 현감(縣監) 이여항(李汝恒)이 지대차 출참(出站)하였다. 저녁에 죽산(竹山)에 다다르니, 주인 원이 보러 오고, 안산(安山) 군수(郡守)는 지대차 나와 있었다.
24일(병오)
비. 일찍 조반을 마치고 길을 떠나 10여 리를 가니, 비가 점점 퍼부어 일행들이 모두 흠씬 젖었다. 무극점(無極店)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지평현(砥平縣)에서 나와 기다리고 있었으나, 공궤(供饋)하는 범절이 더욱 형편없었다. 탄박장(汝呑薄庄)을 지나 팔송정(八松亭) 옛터에서 잠깐 쉬었다. 옛날 일을 추억하니, 자연히 감구(感舊)의 회포가 새로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손응주(孫應柱)ㆍ김국충(金國忠)이 보러 왔다.
저녁에 용안역(用安驛)에 다다르니, 충주(忠州) 목사(牧使) 정효성(鄭孝誠)ㆍ단양(丹陽) 군수(郡守) 권신중(權信中)ㆍ문의(文義) 현령(縣令) 이경인(李景仁)ㆍ청안(淸安) 현감(縣監) 김효성(金孝成)ㆍ진천(鎭川) 현감(縣監) 권응생(權應生)이 모두 지대차 나와 있었고, 이정림(李挺林)ㆍ이광윤(李光胤)ㆍ이건(李健)이 보러 왔으며, 남궁희(南宮曦)ㆍ어취흡(魚就洽)이 제천(堤川)으로부터 보러 왔다. 경기(京畿)에서 온 인마(人馬)는 이곳에서 교체되어 돌아갔다.
25일(정미)
비. 이른 아침에 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나 중도에 이르니, 비가 억수로 퍼부어 냇물이 크게 불었다. 달천(達川)을 건너 충주(忠州)에 들어가니, 목사(牧使) 영공이 보러 오고, 도사(都事) 고인계(高仁繼)는 연향(宴享)을 베풀기 위하여 왔으며, 방백(方伯)은 이미 체직되었으므로 오지 않았다고 한다.
26일(무신)
아침에 흐림. 충주에서 머물렀다. 본관(本官 그 고을 수령)에게 제물상(祭物床)을 얻어 이안(里安)에 있는 외증조(外曾祖) 산소에 소분(掃墳)하려 하였는데, 달천(達川)에 당도하니 냇물이 불어 건너지 못하고 돌아왔다. 옥여(玉汝) 형이 여양(驪陽)으로부터 와서 모였다.
오후에 도사(都事)가 연향을 대청에 베풀어 정사(正使) 이하 여러 군관이 모두 참석하였다. 이 연향은 충주에서 판비를 담당하고, 청주(淸州)에서 보조했다 한다.
27일(기유)아침에 흐림. 목사가 술을 가지고 와서 작별하고, 도사도 또한 이르렀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여 오후에 길을 떠났다. 수교촌(水橋村)에 당도하니, 괴산 군수 이덕윤(李德胤)ㆍ연기 현감 성홍헌(成弘憲)ㆍ단양 군수 권신중(權信中)이 모두 지대차 나왔다. 저녁에 맞아들여 서로 만나 보았다. 옥여(玉汝) 형도 따랐다.
28일(경술)맑음. 평명에 발행(發行)하여 안부역(安富驛)을 지나 조령(鳥嶺)을 넘어 용추(龍湫)에서 점심을 먹었다. 금산 군수 홍서룡(洪瑞龍)ㆍ문경 현감 조홍서(趙弘瑞)가 지대차 나왔다. 김천(金泉) 찰방(察訪) 신관일(申寬一)ㆍ안기(安奇) 찰방(察訪) 김시추(金是樞)ㆍ창락(昌樂) 찰방(察訪) 이경후(李慶厚)는 모두 부마 차사원(夫馬差使員)으로 왔다가 상사ㆍ종사와 한자리에 모여 산수를 마음껏 구경하고 잠깐 술을 나눈 다음 파하였다.
저녁에 문경현(聞慶縣)에 당도하여 관사(官舍)에 사관을 정하였다. 상주(尙州) 목사(牧使) 이호신(李好信)ㆍ함창(咸昌) 현감(縣監) 이응명(李應明)이 지대차 왔고, 유곡(幽谷) 찰방(察訪) 신이우(申易于)가 보러 왔으며, 신석무(申錫茂)ㆍ신석필(申錫弼)ㆍ이돈선(李惇善)ㆍ채경종(蔡慶宗)ㆍ강이생(姜已生)이 보러 왔고, 산양(山陽)의 수장노(守庄奴 농장 지키는 종)와 함창(咸昌)의 묘지기 등이 뵈러 왔다.
충청도(忠淸道)의 인마(人馬)는 이곳에서 교체되어 돌아갔다.
29일(신해)맑음. 조반 후 길을 떠났다. 상사와 종사는 곧장 용궁(龍宮)으로 향하고, 나는 선영(先塋)에 성묘하기 위하여 함창(咸昌)으로 향하였다. 비록 수일 동안의 이별이기는 하나, 10일을 동행하다가 두 갈래 길로 나뉘니, 작별하는 심정이 자못 서글펐다. 불장원(佛藏院)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개령(開寧) 현감(縣監) 강준(姜遵)이 지대차 오고, 신석경(申碩慶)ㆍ박성미(朴成美)ㆍ강홍섭(姜弘涉)이 보러 왔다.
저녁에 함창현(咸昌縣)에 다다르니, 선산(善山) 부사(府使) 심논(沈惀) 영공이 구탄 참소(狗灘站所)로부터 보러 와서 잠깐 담화하다가 바로 갔으며, 신근(申謹)ㆍ신구(申謳)ㆍ신심(申諶)ㆍ김원진(金遠振)ㆍ이기정(李基禎)ㆍ정언준(鄭彥寯) 등 여러 척장(戚丈)이 보러 왔다. 강홍록(姜弘祿)ㆍ강홍신(姜弘信)이 상주(尙州)로부터 보러 오고, 이위(李蘤)ㆍ유응기(柳應期)ㆍ변윤종(邊胤宗)ㆍ신석형(申碩亨)ㆍ박성민(朴成敏)ㆍ이석성(李錫成)이 보러 왔으며, 강홍순(姜弘順)의 사위 조탁(趙鐸)ㆍ김대정(金大鼎)이 뵈러 왔다.
9월
1일(임자)
맑음. 평명에 양범(良範 지명) 선영(先塋)에 가니, 상주(尙州)ㆍ지례(知禮) 등 관원이 감사의 분부로 제물상(祭物床)을 마련해 왔으므로 고조(高祖)ㆍ증조(曾祖)ㆍ양증조(養曾祖)의 묘소에 차려놓고 제를 지내고 또 다례상(茶禮床)으로 상근(尙根)의 묘에 제를 지내는데, 세월은 덧없이 빨라 무덤에 묵은 풀만 우북하니, 부지중에 실성통곡(失聲痛哭)을 하였다. 제를 지낸 뒤에 그 퇴물[餕]로서 무덤 아래의 노비들에게 나눠주고 바로 길을 떠났다. 10여 리를 가니, 주인 원이 길가에 전별연[祖帳]을 베풀고 기다리므로, 잠깐 들어가 술자리를 벌였는데, 과음하여 만취가 되었다. 두산(頭山) 신근(申謹)씨의 집에 들러 상근(尙根)의 궤연(几筵)에서 곡(哭)하고, 그 처자를 만나보았다. 여러 향족들이 매우 많이 모였으나 갈 길이 바빠 조용히 이야기하지 못하고 몇 잔 술을 들고는 바로 떠났다.
저녁에 용궁현(龍宮縣)에서 유숙하는데 비안(比安) 현감(縣監) 박준(朴浚)이 지대차 오고, 주인 원 이유후(李裕後)가 보러 왔으며, 전강(全絳)ㆍ전이성(全以性)ㆍ김원진(金遠振)ㆍ변욱(卞)ㆍ권경중(權敬中)ㆍ채득호(蔡得湖)ㆍ김극해(金克諧)ㆍ채극계(蔡克稽)ㆍ고시항(高是恒)이 보러 왔다.
상통사(上通事) 형언길(邢彥吉)이 초상(初喪)의 부음(訃音)을 듣고 그 본가로 달려갔다.
2일(계축)맑음. 평명에 마산(馬山)으로 떠났다. 정 진사(鄭進士)의 증조(曾祖) 묘소에 다례(茶禮)를 행하였는데, 제물은 그 고을에서 마련해 왔다. 결성(結城 생전에 결성 현감을 지낸 자)의 묘에 참배하고, 인보(仁輔) 형 본가(本家)로 찾아가 보았다. 정지(鄭沚)ㆍ권여해(權汝諧)가 술을 가지고 찾아왔다. 내실(內室)에 들어가 주수(主嫂 인보의 부인)를 뵈었는데, 정흔(鄭忻)도 또한 한자리에 있었다. 인보 형이 나를 위하여 전별연을 베풀어 주는데, 수륙 진미(水陸珍味)가 소반에 가득하였다. 서로 잔을 들어 권하였다. 길을 떠나 곧장 예천(醴泉) 남면(南面)에 이르러 계부(季父) 묘소에 참배하였다. 묘소는 밭머리에 있어 묵은 풀만 우북하니, 흐느껴짐을 금할 수 없었다. 본관(本官)이 제물상을 마련해 왔으므로 다례(茶禮)를 행하고, 제사가 끝난 후 원백(元百)의 집에서 쉬었다. 한 평사(韓評事 평사는 벼슬)의 매씨(妹氏)가 나를 보기 위하여 벌써 수일 전에 영천(榮川)에서 와 있었다. 척장(戚丈) 장충의(張忠義)를 찾아보고, 연복군(延福君) 진상(眞像)에 배알하였다. 여러 친족과 동리 사람들이 모두 모여, 소를 잡고 주연(酒宴)을 베풀어 서로 잔을 돌려가며 권하였다. 해가 진 뒤에 작별하고 일어나 마을에 들어가니, 밤이 이미 깊었다. 봉화(奉化) 현감(縣監) 유진(柳袗)이 지대차 왔다.
3일(갑인)맑음. 주인 원 홍이일(洪履一)이 보러 오고, 영천 군수(榮川郡守) 이중길(李重吉)이 상사(上使) 지대차 풍산참(豐山站)에 나왔다가 상사가 지나간 후에 나를 보기 위하여 술을 가지고 왔다. 주인 원과 봉화 현감이 모두 술자리를 베풀어 각각 잔을 나누고 작별하니, 날이 거의 정오가 되었다. 술이 거나하여 길을 떠나 풍산(豐山)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진보(眞寶) 현감(縣監) 이입(李岦)이 지대차 나왔다. 김경조(金慶祖)가 보러 왔는데, 그의 집이 풍산현에 있다고 한다. 변두수(卞斗壽)라는 사람이 척분이 있다 하여 보러 왔고, 권노(權櫓)가 영천(榮川)으로부터 술을 가지고 보러 왔는데, 먼 곳에서 일부러 와 주니 두터운 정분을 알 수 있다. 박회무(朴檜茂)는 서신으로 안부를 물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 무렵에 안동부(安東府)에 들어가니 상사와 종사가 바야흐로 머물러 기다리고 있었다. 부사(府使) 이상급(李尙伋)이 보러 왔다. 풍기(豐基) 군수(郡守) 송석경(宋錫慶)은 연향(宴享)의 비용을 보조하였고, 영해(寧海) 부사(府使) 윤민일(尹民逸)은 지대차 나와 있었다. 여(玉汝) 형은 예천(醴泉)에서 뒤떨어졌다.
4일(을묘)
맑음. 안동에 머물러 연향을 받았다. 풍기(豐基)ㆍ영해(寧海) 두 영공이 보러 와서 간략히 술잔을 나누고, 주인 원도 또한 보러 왔다. 이득배(李得培)ㆍ박중윤(朴重胤)이 보러 왔다. 정영방(鄭榮邦)의 여막(廬幕)에 홍헌(弘憲)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장계(狀啓)를 올리고 집에 서신을 부쳤다.
5일(병진)맑음. 아침에 이득배(李得培)가 술을 가지고 찾아와 서로 손을 잡고 작별하였다. 조반 후에 일행이 모두 떠나는데 주인 원이 영호(映湖)의 배 위에 전별연을 베풀고 기악(妓樂)을 갖추었다. 잔이 오고가매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만취가 되었다. 일직(一直)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예안(禮安) 현감(縣監) 양시우(楊時遇)가 지대차 나오고, 신석보(申錫輔)ㆍ남잡(南磼)이 보러 왔다. 저녁에 의성(義城)에 당도하니, 날은 이미 어두웠다. 청송(靑松) 부사(府使) 이유경(李有慶)이 지대차 나와 있었다.
6일(정사)
맑음. 주인 원 이경민(李景閔)과 청송 부사가 보러 왔다. 식후에 출발하여 상사ㆍ종사와 함께 지나는 길에 이관보(李寬甫) 영공댁을 들르니, 이장(而壯)도 또한 한자리에 있었다. 간략한 술상이 나왔는데, 술과 안주가 아름답고 정의가 은근하여 잔을 주고 받는 사이에 만취가 됨을 몰랐다. 청로역(靑路驛)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인동(仁同) 부사(府使) 우상중(禹尙中)이 지대차 와 있었다. 밤이 깊어 의흥(義興)에 당도하니, 군위(軍威) 현감(縣監) 조경기(趙慶起)가 지대차 오고, 주인 원 안대기(安大杞)가 보러 왔다.
7일(무오)
맑음. 조반 후에 상사와 더불어 떠났다. 종사는 종[奴]의 병으로 인하여 홀로 머물러 있었다. 저녁에 신녕(新寧)에 당도하니 성주(星州) 목사(牧使) 강복성(康復誠)은 병으로 오지 못하고, 다만 감관(監官)을 시켜 나와 기다리게 하였다. 상사와 더불어 서헌(西軒)에 오르니, 작은 시냇물이 앞을 두르고 처마는 날아갈 듯한데, 만 포기 무성한 대[脩篁]는 숲을 이루어 소쇄(瀟灑)한 운치가 자못 감상할 만하였다. 주인 원 이유겸(李有謙)을 불러 술잔을 들며 담화를 나눴다.
8일(기미)
맑음. 조반 후 출발하여 포시(晡詩)에 영천(永川)에 당도하니, 군수(郡守) 이돈(李墩)은 병으로 휴가 중이라 나오지 않고, 대구(大邱) 부사(府使) 한명욱(韓明勗)이 지대차 왔다. 조전(曺䡘)이 보러 왔다.
9일(경신)아침에 흐림. 한욱재(韓勗哉)가 술자리를 베풀어 상사ㆍ종사와 더불어 모두 모였다. 신녕(新寧) 현감(縣監)이 영천 겸관(永川兼官)으로 또한 참석하였는데, 여러 기녀(妓女)들이 앞에 나열하고 풍악[絲管]을 울리며 잔을 돌려 권하므로, 마음껏 마시어 만취가 되었다. 아불(阿佛)에서 점심 먹었는데, 청도(淸道) 군수(郡守) 최시량(崔始量)과 하양(河陽) 현감(縣監) 이의잠(李宜潜)이 지대차 나왔다. 조전(曺䡘)ㆍ조인(曺軔)ㆍ정담(鄭湛)ㆍ박돈(朴墩)이 술을 가지고 찾아왔는데, 정(鄭)ㆍ박(朴) 두 사람은 모두 지산서원(芝山書院)의 선비로서 지산(芝山 조호익(曹好益))에게 수업(受業)한 자였다.
저녁에 경주(慶州)에 다다르니, 부윤(府尹) 이정신(李廷臣) 영공이 보러 왔다. 청하(淸河) 현감(縣監) 유사경(柳思璟)ㆍ영덕(盈德) 현령(縣令) 한여흡(韓汝潝)ㆍ경산(慶山) 현령(縣令) 민여흠(閔汝欽)ㆍ흥해(興海) 군수(郡守) 홍우보(洪雨寶) 등이 혹은 지대차, 혹은 연수(宴需)의 보조차 왔다. 장수(長水) 찰방(察訪) 이대규(李大圭)ㆍ자여(自如) 찰방(察訪) 이정남(李挺南)은 영천(永川)에서 배행(陪行)하고, 안기(安奇)ㆍ김천(金泉)ㆍ창락(昌樂) 등 찰방은 물러갔다. 일행의 인마(人馬)는 이곳에서 모두 교체하였다.
저녁에 판관(判官) 안신(安伸)이 보러 왔다.
10일(신유)저녁에 비. 경주(慶州)에서 머물렀다. 조반 후에 상사ㆍ종사와 함께 봉황대(鳳凰臺)에 나가 구경하였다. 봉황대는 성밖 5리쯤에 있으니, 곧 산을 인력으로 만들어 대(臺)를 세운 것이다. 비록 그리 높지는 않으나 앞에 큰 평야(平野)가 있어 안계(眼界)가 훤하게 멀리 트이었다. 이를테면 월성(月城)ㆍ첨성대(瞻星臺)ㆍ금장대(金藏臺)ㆍ김유신 묘(金庾信墓)가 모두 한 눈에 바라보이니, 옛 일을 생각하매 감회(感懷)가 새로워져 또한 그윽한 정서(情緖)를 펼 수 있다. 봉덕사(鳳德寺)의 종(鐘)이 대 아래에 있는데, 이는 신라 구도(舊都)의 물건으로 또한 고적(古跡)이다. 나라에 큰 일이 있어 군사를 출동할 때에는 이 종을 쳤다고 한다. 부윤(府尹)과 흥해(興海)ㆍ영덕(盈德) 수령이 모두 모여 바야흐로 주연(酒宴)을 베풀고 기악(妓樂)을 연주하는데 비바람이 휘몰아치므로 모두 거두어 관사로 돌아왔다. 생원 최동언(崔東彥)이 보러 왔다.
11일(임술)
맑음. 경주에서 머물렀다. 연향을 받았는데, 부윤(府尹)과 흥해(興海) 수령도 같이 참석하였다.
13일(갑자)
맑음. 해가 돋은 후 일행이 모두 출발하여 동정(東亭)에 당도하니, 부윤과 흥해(興海) 군수(郡守)가 먼저 와서 전별연을 베풀고 기악(妓樂)을 울리며 술을 권하여 나도 모르게 만취가 되었다. 이곳은 옛날 최고운(崔孤雲)이 살던 구기(舊基)로, 얼마 전에 기자헌(奇自獻)이 집을 신축하고 영구히 거주할 계획을 하였는데, 지난봄 극형(極刑 사형)을 받은 후에 관가(官家)에 몰수되어 손을 전별하는 장소가 되었다 한다. 구어참(仇魚站)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영덕(盈德)ㆍ청하(淸河)의 수령이 지대차 나와 있었다. 저녁에 좌병영(左兵營)에 당도하니 날이 거의 저물었다. 울산(蔚山) 부사(府使) 송극인(宋克訒)ㆍ연일(延日) 현감(縣監) 이여하(李汝賀)가 지대차 오고, 밤에는 병사(兵使) 우치적(禹致績) 영공이 주연(酒宴)을 베풀었다. 오늘은 90여 리를 왔는데, 여러 날 휘달리던 나머지라, 몸이 몹시 피곤하여 잠깐 담화하고 바로 파하였다
14일(을축)
맑음. 해가 돋은 후에 길을 떠나 수십여 리를 갔다. 좌우 산협 길이 모두 단풍으로 물들고, 시냇물이 맑고 시원하여 이르는 곳마다 절승(絶勝)이었는데, 행색이 몹시 바빠 구경할 겨를도 없이 말을 채찍질하여 지나가니, 행역(行役)의 괴로움이 참으로 가련하였다. 용당(龍堂)에서 점심 먹었는데, 밀양(密陽) 부사(府使) 이안직(李安直)ㆍ언양(彥陽) 현감(縣監) 김영(金瀅)이 지대차 왔다. 인마(人馬)를 빨리 재촉하여 동래(東萊)를 5리쯤 앞두고 상사(上使) 이하 여러 관원이 관디[冠帶]를 갖추고 들어갔다. 부사(府使) 김치(金緻)는 방금 감사(監司)에게 병가[呈病]원을 내고 있어 나오지 못하고, 김해(金海) 부사(府使) 이정신(李廷臣)이 겸관(兼官)으로 나왔다. 그리고 양산(梁山) 군수(郡守) 박곤원(朴坤元)이 지대차 왔다. 이 날은 1백 20리를 갔다.
15일(병인)
맑음. 동래(東萊)에서 머물렀다. 새벽에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였다. 조반 후에 동헌(東軒 지방 관원이 공사를 처리하던 대청)에 앉아 일행 군관으로 하여금 두 패로 나누어 활을 쏘게 하여, 이긴 편은 상(賞)을 주고 진 편은 벌주(罰酒)를 마시게 하였다.
상통사(上通事) 박언황(朴彥璜)을 보내어 귤왜(橘倭 귤지정(橘智正))의 안부를 물었다.
16일(정묘)
맑음. 아침에 종사와 더불어 관아에 나아가 부사(府使)를 찾아보았다. 조반 후에 상사 이하 모두 관디[冠帶]를 갖추고 의물(儀物)을 앞에 진열(陳列)하여 일시에 출발하였으니, 이는 왜관(倭館)이 부산(釜山)에 있기 때문이다.
정오에 부산에 당도하니, 첨사(僉使)와 각포(各浦)의 변장(邊將)들이 출참(出站)하고 수령(守令)들이 모두 영접을 나왔기에 곧 당(堂)에 앉아 공례(公禮)를 받고 파하였다. 김해(金海)ㆍ밀양(密陽)의 수령과 창원(昌原) 부사(府使) 박홍미(朴弘美)ㆍ웅천(熊川) 현감(縣監) 정보문(鄭保門)ㆍ거제(巨濟) 현령(縣令) 박제립(朴悌立)ㆍ함안(咸安) 군수(郡守) □□□ㆍ기장(機張) 현감(縣監) 박윤서(朴胤緖)가 모두 지대차 오고, 좌수사(左水使) 황직(黃溭)이 찾아와 주연(酒宴)을 베풀어 주었다. 통영(統營) 중군(中軍) 임충간(任忠幹)이 통영에서 사신(使臣)이 타고 갈 새로 꾸민 배를 타고 왔다. 이는 그 공로를 자랑하고 겸하여 작별 인사도 나누려는 것이었다.
20일(신미)
맑음. 부산에서 머물렀다. 낮에 상사ㆍ종사와 함께 부산 증성(甑城)의 포루(砲樓)에 오르니 해문(海門)은 넓게 통하고, 어주(漁舟)는 점점이 떠 있다. 절영도(絶影島) 밖에 아물아물 보이는 산이 있으므로, 그 지방 사람에게 물으니,
“이는 대마도(對馬島)로, 청명한 날에는 이같이 분명히 보입니다.” 라고 하였다.
28일(기묘)
맑음. 새벽 녘에 생폐(牲幣 희생과 폐백)와 서수(庶羞 여러 가지 제수)에 제문(祭文)을 갖추어 상사 이하 여러 관원이 모두 검은 관디[冠帶]를 착용(着用)하고 영가대(永嘉臺) 위에서 해신(海神)에게 제사를 올렸다. 일행의 행장이 미처 정돈되지 않아 관사(館舍)에 도로 들어왔다. 오후에 배를 탔다. 울산(蔚山)ㆍ밀양(密陽) 부사가 모두 술을 가지고 와서 작별하였다. 귤지정(橘智正)이 왜 사공 12명을 보내 와서 배알(拜謁)하므로, 세 사신(使臣)이 모두 타루(舵樓) 위에서 교의(交椅 의자)에 앉아 행례(行禮)를 받고 이어서 술을 먹였다. 왜 사공 12명은 상ㆍ부선(上副船)에 각 3명, 3ㆍ4선(三四船)에 각 2명, 5ㆍ6선(五六船)에 각 1명을 분배한다고 하였다. 울산 부사ㆍ밀양 부사와 더불어 술잔을 나누어 작별하고 부선(副船)에 돌아오니, 두 아들과 홍여경(洪汝敬)ㆍ김효선(金孝先)ㆍ변윤종(邊胤宗)ㆍ안홍익(安弘翼)이 벌써 미리 와 있었다. 잠시 담화하다가 김효선ㆍ안홍익이 먼저 일어나고, 다음에 두 아들과 작별하였다. 왕사(王事)가 지중하므로 비록 슬픈 정을 억제하고 서로 면려(勉勵)하였으나 마음은 심히 괴로웠다. 두 아들도 또한 눈물을 머금고 흐느껴 말을 이루지 못하였다. 부자간의 정리에는 심상하게 잠깐 이별하는 것도 오히려 마음을 안정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이 험한 바다를 격한 만 리 이역의 이별임에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혼(神魂)이 암담하였다. 변공(邊公)과 홍여경(洪汝敬)도 작별하고 돌아가고, 수행하여 배서(陪書 지금의 비서와 같음)하던 자와 마부(馬夫)들도 모두 작별 인사를 고하고 갔다.
드디어 닻줄을 풀고 뱃길을 뜨는데, 고각(鼓角 북과 피리) 소리는 왁자그르하고 노소리는 빼각거리며 점차 육지와 멀어지니, 떠나는 마음이 더욱 괴로웠다. 귤지정(橘智正)의 배가 앞을 인도하고 갔다. 초량항(草梁項)에 배를 대고 배 위에서 유숙하였는데, 방은 정결하나 습기가 스며들어 몸이 매우 무거웠다.
29일(경진)맑음. 배 위에서 머무르며 바람을 기다렸다. 부산(釜山) 첨사(僉使) 전삼달(全三達)이 배를 타고 다가와 판옥선(板屋船) 위에서 전별연을 베풀었다. 상사는 기일(忌日)이어서 참석하지 않고, 나와 종사만이 담화하며 간략히 술을 나누다가 파하였다.
소주ㆍ밀과(蜜果)ㆍ잣ㆍ호두 등의 물건을 귤지정에게 보냈다.
30일(신사)비, 오후에 갬. 배 위에서 머물고 있는데, 동풍이 점점 일어나 정박할 수 없으므로, 배를 감만이(勘蠻夷 지명)로 옮겨 바람을 기다렸다. 귤지정이 설탕 상자를 보내왔으므로 바로 역관(譯官)ㆍ군관(軍官) 등에게 나눠 주었다.
10월
1일(임오)
흐리다가 밤에 비. 평명에 귤지정이 와서 말하기를,
“풍세가 매우 순하니 발선(發船)하기를 청합니다.”
하므로, 해가 돋은 후에 거정포(擧碇砲 배 떠나갈 때에 쏘는 포(砲))를 쏘아 여러 배가 차례로 바다에 나갔다. 태종대(太宗臺)를 지나 수십여 리를 가니, 풍세가 점점 동풍으로 변하여 물결이 크게 일어나 모든 배가 떴다 잠겼다가,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거려 위험이 호흡 사이에 박두하였다. 귤지정이 먼저 돛을 내려 배를 돌리고, 일행의 모든 배들도 또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모두 부산 앞바다로 되돌아왔다. 각 배의 원역(員役) 이하 격군(格軍)들이 구토하고 쓰러져 불성인사(不省人事)가 되었으며, 상사 역시 구토를 면하지 못하였다 한다. 창녕(昌寧) 현감(縣監) 조직(趙溭)ㆍ고성(固城) 현령(縣令) 김수(金遂)ㆍ기장(機張) 현감(縣監) 박윤(朴胤)이 지대차 왔다가 그대로 머무르고 돌아가지 않았다. 되돌아온 연유를 갖추어 장계를 올렸다.
2일(계미)
간혹 흐림. 배 위에 머물러 있었다. 날이 채 밝기 전에 왜인(倭人)과 우리 선원(船員)들이 모두 말하기를, "하늘이 맑게 개고 동북풍이 점점 일어나니, 일찍이 발선(發船)하기를 청합니다.”
하므로, 두세 번 상선(上船)에 통지하고 이른 아침에 돛을 달고 바다로 나갔다. 타루(柁樓) 위에 앉아 태종대를 지나니 파도는 잔잔하고 배는 심히 빨랐다. 2백여 리를 지나오니 바람이 점점 약해지므로 노 젓는 것을 재촉하였는데, 그때에 동풍이 크게 일어나서 배가 거슬려 나아가지 못하였다. 날은 저물어 가는데 대마도는 아직 멀고, 배 안의 사람들은 태반 현기(眩氣)로 쓰러져 있었다. 앞뒤 배가 다만 화전(火箭)으로써 서로 신호하는데, 상선(上船)은 멀리 가서 화전으로 신호가 되지 않았다. 밤은 칠흑같이 어두운데 오직 노젓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초경(初更)쯤에 불빛이 높은 봉우리 위에 비치므로 왜인에게 물으니, 이는 마도(馬島)의 악포(鰐浦)라고 하였다. 배 안의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비로소 희색이 있었으며, 또한 등불로써 서로 신호하고 노를 재촉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마도를 10여 리 앞두고 평조흥(平調興)과 찬기주(讚岐州)가 각기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였다. 왜의 소선(小船) 6척이 배를 이끌고 앞을 인도하여 2경(二更)말에 마도의 서쪽 악포(鰐浦)에 대었다. 포구(浦口) 위에는 수십 집이 있는데, 가옥의 제도가 우리나라와 같지 않고 매우 허술하였다. 도주(島主)가 세 사신(使臣)에게 하정(下程 사신에게 보내는 예물(禮物))을 보내왔다. 찬기주(讚岐州)는 육지에 내려 승사(僧舍)에서 쉬기를 청하였으나 밤이 깊고 기운이 불평하다고 사양하였다. 찬기주의 이름은 평지순(平智順)이니, 도주(島主)의 숙부다.
부산에서 악포(鰐浦)까지는 뱃길로 4백 80리다.
3일(갑신)
맑음. 배 위에 머물러 있으니, 귤지정이 첫새벽에 와서 안부를 묻고 육지에 내려 잠시 쉬기를 청하였는데, 갈 길이 바쁘다는 것으로 사양하였다. 진시 초에 발선하는데, 섬 가운데 노소 남녀들이 포구(浦口)에 나와 구경하는 자가 담[堵]처럼 빽빽이 둘러 서 있었다. 왜 소선(小船)이 각 배를 나누어 이끌고 포구를 나와 연안(沿岸)을 따라 동으로 향하는데, 귤지정이 앞을 인도하고 여러 배가 바다를 뒤덮어 모두 노(櫓)를 재촉하여 갔다. 지나는 포구가에 인가가 두세 군데 있었는데, 모두 명승(名勝)이었으나 온 섬이 모두 석산(石山)이었다. 당포(唐浦)를 지나 저물 녘에 한 포구에 들어가니 지명은 금포(金浦)라 하였으나 포구 안에 인가 10여 채가 있고, 마을 가운데 조그만 사찰(寺刹)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선광사(善光寺)였다. 상사 이하와 추종(騶從) 몇 명이 사찰로 사처를 정하니, 남녀들이 길을 끼고 구경하고, 간혹 합장(合掌)하는 자도 있으며, 배 위에서 쓸 나무와 물을 정성껏 공급해 주기도 하였다. 승사(僧舍)는 중수(重修)하였으나 미처 필역을 하지 못하여 숙소(宿所)의 범절이 또한 변변치 못하였다. 대개 도주(島主)가 우리 일행이 이곳에서 유숙할 것을 미리 생각하고 사승(寺僧)에게 중수할 것을 분부하였으나 미처 완성되지 못한 것이었다. 귤지정도 또한 와서 우리 일행을 돌봐 주었다.
이날은 가벼운 바람이 잠깐 불어 물결이 비단결 같으므로 때로는 상선(上船 상사가 탄 배)과 뱃전을 나란히 하고 젓대 부는 함무생(咸武生)과 노래하는 정득선(鄭得善)으로 하여금 번갈아 가며 불고 화답하게 하니, 평지에 있는 듯하였다. 이 또한 배 위의 한 흥취였다. 각기 술잔을 들어 서로 권하다가 파하였다.악포(鰐浦)에서 금포(金浦)까지 뱃길로 백 리 남짓하다.
4일(을유)
맑음. 사신 이하 일행이 일찍 일어나 배를 타고 백여 리를 가니, 조흥(調興)이 나와 영접하였다. 하뢰포(下瀨浦)에 이르니, 두 섬 사이에 포구가 심히 좁아 배가 나란히 들어갈 수 없었다. 돌 언덕 위에 한 칸 판옥(板屋)이 있으니, 이름은 주길사(住吉寺)인데, 곧 기도하는 곳이었다. 포구 안에는 큰 마을이 있는데, 나무 사이에 숨어서 구경하는 자가 얼마인지 알 수 없었다.
혹은 돛을 달고 혹은 노를 저어 부중(府中)과 10리쯤 되는 거리에 다가가니, 도주 의성(義成)이 나와 영접하는데 위의(威儀)가 조흥(調興)에 비하여 약간 융성하여 종선(從船) 4~5척이 옹위하고 다녔다. 배를 가까이 옮겨 작은 배로 명을 전달하고 상읍례(相揖禮)를 행하였다. 예가 끝난 후에 떡ㆍ과일ㆍ술통을 보내오고 곧 물러가 앞을 인도하였다.
해가 진 뒤에 한 포구로 들어가니, 곧 부중(府中)이다. 부중의 형세는 좁고 높은 산이 사면을 에웠으며, 앞에는 대ㆍ소선(大小船) 40~50척이 정박하여 있고, 왕래하며 사후(伺候)하는 배도 또한 거의 이 수효에 가까웠다. 언덕 근처에는 물이 얕으므로 중류에서 닻을 내리고 정사(正使) 이하가 관디[冠帶]를 갖추고 국서(國書)를 받들어 왜 소선(小船)으로 육지에 내리니, 밤은 이미 어두웠다. 등불로써 앞을 인도하고 연안(沿岸)을 따라 1마장쯤 가서 해안사(海晏寺)에 사처[下處]를 정했는데, 지나는 여염집마다 모두 등불을 달아 밝히고 구경하는 남녀들이 길가를 메웠다.
사처에 든 후 조흥(調興)이 술과 밥을 보내어 군관까지 먹이게 하였다. 장막ㆍ요[褥]ㆍ포진(鋪陳)은 대략 우리나라 제도를 본받았는데, 모두 새로 마련한 것이었다. 일본은 옛날부터 온돌방이 없었는데 사신의 행차를 위하여 특별히 만들어서 대기한 것이다. 사후(伺候)하는 사람들도 각기 맡은 일에 부지런히 하여 정성을 다하였다.금포(金浦)에서 부중(府中)까지는 뱃길로 1백 70리다.
5일(병술)
맑음. 해안사에서 머물렀다. 조흥(調興)ㆍ의성(義成)ㆍ현방(玄方)이 모두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의성은 하정(下程)을 보내 오고, 또 술과 면(麪) 등을 각기 보냈으므로 바로 일행에게 나누어 주었다.
조반 후에 조흥(調興)이 예조(禮曹)의 서계(書契)와 증여 물품(贈與物品)을 받기 위하여 관사(館舍) 앞에 와서 기다렸다. 정사 이하 관디[冠帶]를 갖추고 대청에 나와 좌정하니, 조흥이 공복(公服)을 입고 북으로 향하여 사배(四拜)하고, 의성(義成)ㆍ현방(玄方) 및 조흥(調興) 3인에게 보내는 예물을 받아가지고 나갔다. 조금 후에 현방은 가사(袈裟)를 입고 의성과 조흥은 공복을 갖추어 입고는 모두 신을 벗고 들어와 상읍례(相揖禮)를 행하였다. 사신은 동벽(東壁)에 자리잡고, 현방 이하는 서벽(西壁)에 자리잡아, 모두 교의(交椅)에 앉아 두 번 차례(茶禮)를 행하였다. 현방(玄方)은 하나의 산인(山人 중이나 도사)에 지나지 아니하나 장로(長老)로서 온 섬의 문서를 관리하므로, 자리가 의성의 위에 있었으니, 일본의 풍속이 그러하였다. 현방 등이 나간 뒤에 귤지정(橘智正) 및 수직왜(受職倭 우리나라 직첩을 받은 왜인) 마당고라(馬堂古羅) 등 5인이 모두 우리나라 관디[冠帶]를 착용하고 들어와 예(禮)를 행하고 나갔다.
저녁에 의성이 청귤(靑橘)을 보내 왔다.
6일(정해)
맑음. 해안사(海晏寺)에서 머물렀다. 아침에 조흥은 생선을 보내 오고, 현방은 떡과 과일을 보내 왔으므로 일행 군관과 사후(伺候)하는 왜인에게 나눠 먹였다. 저녁에 상사의 사첫방을 찾아가 보니 한 관내(館內)에 별당(別堂)으로 된 곳인데, 이름은 매향원(梅香院)이라 하며 정쇄(精灑)함이 비할 데 없었다.
7일(무자)맑음. 해안사에서 머물렀다. 조흥이 무[菁根] 한 그릇을 보냈으므로 바로 주방(廚房)에 내려 보냈다. 밤에 의성이 상화(霜花) 1합(榼)과 생전복[生鮑]ㆍ소라(小螺) 등을 보내 왔으므로 일행 원역(員役)과 사후하는 왜인에게 나눠 주었다.
8일(기축)
맑음. 해안사에서 머물렀다. 조흥이 생선을 보내 왔다. 정오에 현방이 서신과 함께 찰떡 한 그릇, 술 한 통과 각종 떡ㆍ과일ㆍ감ㆍ귤ㆍ배ㆍ잡효(雜肴 여러 가지 안주)를 보냈으므로 곧 원역 및 사후(伺候)하는 왜인에게 나눠 주고 답서를 써서 사례하였다.
바다를 건넜다는 장계를 써서 왜선(倭船) 편에 부산 첨사에게 보내고, 집에 보내는 서신도 아울러 부쳤다.
9일(경술)
간혹 흐림. 해안사에서 머물렀다. 조흥이 두부 한 그릇을 보내 오고, 의성은 설고(雪糕)ㆍ화당(花糖) 및 감귤ㆍ감을 보내 왔으므로 곧 군관들에게 나눠 주었다. 종사가 찾아왔으므로 인하여 같이 상사를 가 보았다.저녁에 큰비가 밤새도록 내렸다.
10일(신해)맑음. 아침에 흐리다가 비가 왔다. 해안사에서 머물렀다. 의성이 연례(宴禮) 행하기를 청하므로 누차 사양하다가 허락하였다. 과일상과 떡들은 대략 우리나라 규모를 모방하였고, 올린 음식은 모두 간이 맞았다. 찬(饌)을 나르고 술 심부름하는 자들은 모두 나이가 젊고 얼굴이 아름다운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 명칭은 약중(弱衆)인데, 방언(方言)으로는 와가수(瓦家守)라 하였다. 모두 발목까지 덮이는 긴 바지를 입었는데, 땅에 끌리는 것이 또 한 자쯤 되었다. 걸어다닐 때에는 감히 땅이 울리지 못하게 잦은 걸음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물러가도록 하였으니, 이는 그 나라 풍속에 존경하는 예절이었다. 위로는 정관(正官)으로부터 아래로는 격군(格軍)에 이르기까지 자리를 나누어 잔치를 베풀었다. 술 아홉 잔을 돌린 후에 다시 은밀한 좌석으로 옮겨 편히 앉고 현방(玄方) 이하가 각기 두 잔 술을 권하였다. 술자리가 반쯤 되어 역관을 시켜 현방에게 전하여 말하기를,“우리들이 왕명(王命)을 받들고 동으로 온 것은 오로지 사로잡혀 온 사람들을 쇄환(刷還)하는 한 가지 일을 위한 것이니, 오로지 그대들이 힘껏 주선해 줄 것을 믿는다.”하니, 대답하기를,
“전일에 이미 말씀을 들었으니, 어찌 잠시인들 감히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오늘날 사세가 전과는 다르니, 용이하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나 마땅히 힘을 다하여 도모해 보겠습니다.”하였다. 자리를 파할 때에 현방이 먼저 율시(律詩) 한 수를 써서 화답하기를 간청하는데, 거절하기 어려워 상사 이하 각기 차운(次韻)하여 주었다.
연회 처음에 현방과 의성은 중계(中階)에 서고, 조흥은 계하(階下)에 서서 정사(正使) 이하를 인도하여 섬돌 위에 이르고, 현방과 의성이 인도하여 당(堂) 위에 올라 읍례(揖禮)를 행했다. 사신은 동벽(東壁)에 자리잡고, 현방 이하는 서벽(西壁)에 자리 잡아 모두 교의에 앉았다. 옛 규례(規例)에는 역관ㆍ군관과 아래로 군졸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행례(行禮)하였는데, 금번에는 행례를 하지 않으니, 도주(島主) 이하가 지극히 유감으로 생각하여 귤지정을 보내어 말을 전하였다. 이쪽에서는 박대근을 시켜서 반복 논변하여 그렇지 않음을 설명하였으나, 끝내 해혹(解惑)되지 아니하고 그 사색(辭色)을 보면 자못 서운한 느낌이 있었다. 술이 반쯤 취하매 나이 젊은 광대로 하여금 풍악을 울리고 재주를 부리게 하며, 또 무동(舞童)을 시켜 떼를 나누어 들어오게 하였다. 모두 아롱진 비단 옷을 입고 얼굴에 가상(假像)을 썼는데 손으로는 금부채를 휘둘러 절조에 맞추어 노래하니, 보기에 매우 기괴하였다. 그러나 그 맑은 소리와 가는 허리로 절조에 맞추어 뜰에서 너울거리니, 그 아리따운 태도가 또한 하나의 흥미를 돋울 만하였다.
관사(館舍)의 제도는 크고 넓었는데, 단청을 하지 않고 다만 금병풍을 사면 벽에 둘렀으며, 사신이 앉은 벽 뒤에는 주렴(珠簾)을 쳐서 부인이 관광하는 곳으로 만들었으니, 소위 도주(島主)의 아내도 또한 그 안에 있다 한다. 시중드는 왜인들이 의성과 조흥의 뒤를 옹위한 자가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 혹은 담배 피우는 기구를 가지고 추종하는 자도 있었는데 모두가 조용하여 말이 없고, 구경하는 아이들까지도 물러나 꿇어 엎드리고 줄을 맞추어 앉아서 종일토록 아무 말도 없으니, 평소에 법령이 엄중한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의 하인들은 뜰 가운데 열지어 앉아 아무리 금하여도 떠드는 소리가 그치지 않으니, 저 오랑캐에 비해 볼 때 또한 부끄러운 일이었다. 우리 일행이 왕래할 때에는 구경하는 남녀들이 길의 좌우를 메웠다. 소위 양반의 부녀들은 흰 장옷[長衣]으로 머리를 싸고 얼굴을 가렸다. 구경하는 자의 수효는 또한 헤일 수 없었는데, 승려와 속인이 뒤섞여 남녀가 분별이 없고 말은 금수(禽獸)의 소리와 비슷하였다. 여염은 조밀한데, 모두 판자와 기와로 지붕을 덮고 좌우 옥사(屋舍)는 제도가 우리나라 저자의 가게와 흡사하였다.
행중(行中)의 여비와 호피(虎皮)ㆍ표피(豹皮)ㆍ인삼ㆍ세저(細苧)ㆍ유선(油扇)ㆍ유둔(油芚) 및 각색 마른 실과(實果) 등을 나누어 마련하여 도주 및 현방ㆍ조흥 등에게 주고, 귤지정ㆍ칠위문(七衛門)에게도 또한 차등있게 주었다. 대개 귤지정은 접대와 사후하는 일을 주관하고, 칠위문은 마도(馬島)의 모든 문서를 관장(管掌)하여 용사(用事)의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또 백미(白米)와 종이를 왜통사(倭通事) 및 왜사공 등에게 나누어 주었다.
11일(임진)
맑음. 간혹 가랑비. 해안사에서 머물렀다. 종사가 찾아왔으므로 상사의 사처로 같이 가서 간략히 술을 들며 젓대 소리를 들었다. 아침에 조흥이 무ㆍ토란 등을 보내 왔다.들으니, 어제 길가에서 중국 사람이 몸을 숨기고 구경하는 자가 있었다 하므로, 역관을 시켜 사후하는 왜인에게 물으니, ‘중국 배 1척이 약을 팔기 위하여 수일 전에 왔다가 아직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이 일본을 물리쳐 끊은 지 이미 오래되어 정삭(正朔 역서(曆書))을 통하지 않고, 바닷길로 왕래하는 것을 일체 엄금하는데, 잠상(潜商)들의 왕래가 잇달으니, 중국 사람들의 죽는 것도 헤아리지 않고 재물을 탐내는 것을 또한 알 수 있다.밤에 큰 바람이 불었다.
12일(계사)간혹 흐리고 눈이 날렸다. 밤 꿈이 지극히 산란하였다. 해안사에서 머물렀다. 조흥이 무[菁根]를 보내 왔다.
마도에 온 후로부터 하정(下程)의 찬물(饌物) 및 일행의 요미(料米)를 대략 5일에 한 번씩 공급해 주었는데, 사신은 매일 각 5수두(手斗)씩, 당상 역관(堂上譯官)은 3수두, 정관(正官)은 2수두, 중관(中官)은 1수두 반, 하관(下官)은 1수두였다. 일행이 상의하여 사신과 하관(下官)을 막론하고 모두 하루 3승(升)씩 계산하여 받고, 나머지 쌀은 구관 왜인(句管倭人)에게 돌려주었으니, 마도의 폐단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다. 그네들의 수두(手斗)라는 것은 곧 되[升]로, 우리나라 되로 2승 7홉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의성ㆍ조흥 등이 각기 서찰을 보내어 그저께 향연을 받아준 것과 예물을 준 데 대하여 사례의 뜻을 표하므로, 각기 회답을 써서 회사(回謝)하고 이어서 속히 떠날 것을 덧붙였다. 저녁에 의성이 별하정(別下程)으로 술ㆍ과일ㆍ생선ㆍ면(麪) 등을 보내 왔다. 물품을 자주 받는 것이 미안하여 사양하니, 심부름 온 왜인이 굳이 청하므로 마지못해 받아 두고 전례에 의하여 나누어 주었다.
13일(갑오)
맑음. 간혹 싸라기눈. 일기가 비로소 추워졌다. 해안사에서 머물렀다. 조흥이 등자(橙子)를 보내 오고, 칠위문은 술ㆍ과일ㆍ찰떡과 각색 안주를 보내 왔으므로 일행 원역과 사후(伺候)하는 왜인과 통사 등에게 나눠주었다. 오후에 종사와 더불어 상사의 사처에 가서 담화하고 간략히 술잔을 나누었다. 역관 이형남(李亨男)ㆍ포수 김덕련(金德連) 및 소통사(小通事) 등이 금물(禁物)을 범하여 종사관에게 잡혔으므로 핵실(覈實)하여 죄를 논하고 곤장으로 다스렸다.
15일(병신)
맑음. 해안사에서 머물렀다. 새벽에 북쪽 뜰에 장막을 베풀고 망궐례(望闕禮)를 의식대로 행하였다. 조흥이 생선을 보내 왔다. 소동(小童)들이 말하기를“50세 가량된 한 여인이 빨래를 핑계하고 문밖 시냇가에 앉아 사행(使行)의 하인을 만나서, ‘나는 전라도(全羅道) 옥과(玉果) 사람인데, 사로잡혀 이곳에 온 지 벌써 28년이 되었다. 본국으로 돌아가려 해도 이곳의 법이 엄중하여 자유롭게 되지 못한다. 행차가 돌아갈 때에 동지(同志) 몇 사람과 더불어 몰래 도망쳐 나올 터이니, 이 말을 삼가 미리 전파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한다. 그래서 소통사를 시켜 다시 그 거주를 탐문하게 하니, 이미 가버렸다.저녁에 조흥이 또 생선을 보내 왔으므로 바로 군관청에 내려 주었다.
16일(정유)
흐리고 아침에는 비가 뿌렸다. 해안사에서 머물렀다. 요사이 선인(先人)께서 꿈에 매우 분명히 나타나는데 간밤에는 더욱 분명하였으니, 이는 오늘이 기고(忌故)인데 불초한 몸이 해외에 멀리 나와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다른 나라에 와서 또 이날을 만나 종신(終身)의 슬픔을 펼 곳이 없으니, 심회(心懷)가 망극하여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조흥이 청우(靑芋)를 보내 오고, 의성은 설병(雪餠)ㆍ설탕ㆍ등자(橙子)ㆍ귤ㆍ생리(生梨) 등을 보내 왔다.
17일(무술)
맑았으나 바람이 불었다. 해안사에서 머물렀다.
조흥이 누차 연례(宴禮)를 청하더니 그 아문에서 자리를 베풀었으므로 조반 후에 상사 이하 다 갔다. 현방ㆍ의성도 아울러 와서 참여하였다. 기명(器皿)과 찬품(饌品)은 도주의 연회 때와 다름 없었고, 기수(器數) 및 상화(床花)ㆍ금ㆍ은ㆍ유리 등의 기구는 도주보다 화려한 편이었다. 다만 아문은 도주가 거처하는 곳보다 약간 옹색한 편이었으나, 정쇄(精灑)한 것은 일반이었다. 해가 진 후에 사처로 돌아왔다. 자리를 파할 무렵에 역관을 시켜 사로잡혀 온 사람의 쇄환에 관해 말을 전하기를,
“전일에 이미 말하였으니, 그대들이 반드시 성심을 다하여 주선할 것이다. 다만 듣건대, ‘이 섬에도 사로잡혀 온 사람이 많은데 쇄환하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하니, 그대들은 그대 할아버지ㆍ아버지 때부터 대대로 조정의 은혜를 입은 처지에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또 ‘사로잡혀 온 사람들이 우리 일행을 만나보려 해도 왜인들이 곳곳에서 막아 보지 못하게 한다.’ 하니, 그대들은 모름지기 각처에 통문을 내어 억제하는 일이 없도록 함이 옳을 것이다.”하니, 조흥이 대답하기를,
“마땅히 분부대로 힘을 다하겠습니다만, 쇄환한다는 말이 만약 먼저 전파되면 아마도 중간에 이간하는 말이 먼저 들어가 혹 일을 이루지 못할까 매우 염려되는 바입니다. 원컨대, 조용히 조처하여 돌아올 때에 곳곳에서 듣고 보는 대로 개유(開諭)시킴이 무방할 듯합니다.”하였다. 이 말이 비록 그럴 듯하나, 저들이 혹시 관백(關白)에게 꾸중을 들을까 염려하여 아직 뒤로 미루는 것이요, 실로 우리를 위하는 것은 아니었다. 상고(尙古 이경직(李景稷)의 자))의 〈일기(日記)〉에 ‘의성은 어리석고 조흥은 영리하다.’고 한 것이 과연 헛말이 아니었으니, 그 말의 간교함이 대개 이러하였다.
18일(기해)
맑음. 해안사에서 머물렀다. 도주와 조흥 등이 모두, ‘오늘 발선하겠다.’ 하므로 우리나라 사공들은 밤을 지새워 배를 정리하였다. 닭이 울 녘에 와서 바람이 순하다고 고하기에 곧 등불을 밝히고 일어앉아 행장을 수습하고 조흥이 사람 보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동틀 무렵에 비로소 왜사공을 시켜서 와 보고하기를,“오늘은 바람이 좋지 않으니 명일 발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왜인의 간교한 정상을 역관이 알지 못함이 아니나 실지는 서로 마음이 맞아 속임이 이에 이른 것이다. 이는 반드시 저들의 매매(賣買)가 끝나지 않아서 그런 것이니, 분통하고 분통한 일이다. 박대근(朴大根)으로 하여금 왜통사를 불러 속인 실수를 꾸짖고, 의성과 조흥 등에게 전달하게 하였다. 의성과 조흥이 귤지정과 칠위문을 보내어 사죄하므로, 세 사신[三使臣]이 대청[廳事]에 같이 앉아 두 왜인을 불러 꾸짖으니, 왜인이 말하기를,“오늘 일은 의성과 조흥의 죄가 아니요, 실로 왜 사공들이 배를 미처 정리하지 못하여 조흥을 속인 것입니다. 의례(儀禮)에 관해서는 귤지정은 몹시 늙었고, 전일 전고(典故)에 밝은 왜인들은 모두 죄를 입어 멀리 나갔으며, 그 나머지는 나이 어리고 일에 경력이 없어 소루하게 되었사오니, 널리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하므로, 대답하기를,
“두 나라가 수교(修交)하는 데에는 오직 신의(信義)에 달렸을 뿐이며, 사신을 접대하는 데에도 정성을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이요, 일호라도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미 지난 일은 어찌할 수 없거니와, 앞으로는 오늘과 같은 일이 없게 하라.”하고, 몇 잔 술을 먹여 보내니, 두 왜인은 예 예 하고 물러갔다.
저녁 무렵에 포구를 바라보니, 왜인들이 배를 정리하느라 분주하여, 떠들썩한 소리가 원근에 진동하며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의성이 술ㆍ고기ㆍ떡ㆍ과일 등을 보내 왔으므로 군관들에게 나눠 주었다.
19일(경자)
아침에는 흐림. 해안사에서 머물렀다. 새벽에 조흥이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오늘은 저희들이 꼭 뱃길을 뜨기 위하여 방금 유방원(流芳院)에서 바람을 기다리고 있는데, 하늘은 흐리고 바람이 없으니, 어찌할 수 없습니다. 해돋을 녘에 바람을 기다려 다시 보고하겠습니다.”하였다. 날이 늦도록 바람이 없어 뱃길을 뜨지 못하고 종일 곤히 잤다. 저녁에 조흥이 감귤을 보내 왔다.
20일(신축)
간밤에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여러 배가 서로 출렁대어 정박(停泊)할 수 없으므로 뱃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아침에 쾌히 갬. 해안사에서 머물렀다. 칠위문이 면(麪)ㆍ차(茶) 등을 보내고, 의성은 소주ㆍ유병(油餠) 및 각색 숙병(熟餠)을 보내 왔으므로 군관과 사후하는 왜인들에게 나눠 주었다. 오후에 현방ㆍ의성ㆍ조흥이 만나 보기를 청하므로, 세 사신이 중당(中堂)에서 접견하였다. 대개 사죄(謝罪)하기 위하여 온 것이었다. 각기 술 다섯 잔을 먹여 보냈다. 저녁에 조흥이 산저육(山猪肉)을 보내 왔다. 밤에 남궁도(南宮櫂)와 정득선(鄭得善)이 서로 싸운 죄를 다스리니, 사후 왜인들이 보고 혀를 빼며 말하기를,
“차라리 참형(斬刑)을 당할지언정 이 곤장은 차마 받지 못하겠다.”하였다. 그들의 성품이 지독하고 삶을 가벼이 여기는 것을 알 수 있다.
21일(계묘)
맑음. 새벽에 의성과 조흥이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오늘은 바람이 순한 듯하여 뱃길을 뜰 만하오니, 속히 행장을 챙기소서.”하므로, 곧 주방(廚房) 사람을 시켜 흰죽을 가져오게 하였다. 세 사신 일행이 각기 배를 타니, 해가 막 돋았다. 우리나라 배와 대마도 배 30여 척이 일시에 돛을 달고 바다에 나가 10여 리를 행하니, 바람은 점점 세어져 뱃머리는 파도를 헤치고 나가는데 빠르기가 화살 같았다. 바다 한복판에 미치지 못하여 물결이 크게 일어, 타고 있는 각 배가 풍도(風濤) 사이로 들락날락 하여, 어떤 때에는 높은 봉우리 위에 오르는 듯, 어떤 때에는 천 길 구덩이에 빠지는 듯, 그 위급한 형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넋을 잃고, 구역질하며 토하는 소리가 더러워 들을 수 없었다. 미시(未時)말에 일기도(壹岐島) 풍본포(風本浦)에 다달아 바로 용궁사(龍宮寺)에 사처를 정하였다.
절 앞에 한 고묘(古廟)가 있는데, 이름은 성모사(聖母祠)라 하였다. 성모(聖母)는 곧 산신(山神)의 이름으로 이 섬 사람들이 모두 신앙하여 기도한다고 한다. 물가의 촌락(村落)이 겨우 50여 호였는데, 산 넘어 마을이 곧 도주(島主)가 사는 곳이었다. 도주는 송포비전주 융신(松浦肥前州隆信)으로 강호(江戶)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부관(副官) 칠랑위문(七郞衛門)이 와서 접대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역관에게 들으니, ‘우리나라에서 사로잡혀 온 자가 이 섬에 매우 많은데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숨기고 내놓지 않으며, 한 남자가 바야흐로 우리 일행의 하인과 이야기하려다가 대마도 사람의 꾸중을 듣고 발도 붙여보지 못하고 갔으니, 이와 같은 자가 한둘이 아니라.’ 한다. 대개 대마도 사람들이 관백(關白)에게 이간하는 말이 먼저 들어가면 죄를 입을까 두려워서 그런 것이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마도에서 풍본포까지는 뱃길로 5백 리다.
23일(갑진)
저녁에 흐리고, 바람이 불순하였다. 용궁사에서 머물렀다. 조흥이 향귤ㆍ등자(橙子)ㆍ배ㆍ침과(沈果)를 보내고, 의성은 생리(生梨)ㆍ등자ㆍ생강ㆍ도자(桃子)ㆍ침과(沈果)를 보내 왔는데 모두 남만(南蠻)의 소산이라 한다. 일기도주(壹岐島主)의 친족 일고 호조전(日高虎助殿) 및 그 숙부 송포 장인전(松浦藏人殿)이 뵙기를 청하면서 마도 사람을 시켜 먼저 통하기에, 잠깐 들어올 것을 허락하니, 그 사람들이 무릎 걸음으로 기어들어와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고 배례만 행하고 물러갔다. 부관(副官)이 술과 고기ㆍ건어(乾魚)ㆍ후추 등을 보내 왔으니, 곧 이른바 별하정(別下程)이었는데, 사양하여 물리쳤다. 장인전(藏人殿)은 곧 우리나라 창원(昌原) 여자의 소생이다. 형제가 모두 처녀로서 임진왜란 때에 사로잡혀서 다 일기도주(壹岐島主)의 아내가 되었는데 지금까지 생존해 있으며, 그 남편인 도주는 지금 도주의 할아버지로 이미 작고하였다 한다.
24일(을사)
새벽부터 서북풍이 불었다. 평명에 배를 띄워 5리쯤 가니 풍세가 동풍으로 변하는 듯하다가 횡풍(橫風)이 점점 험악해지므로 잠깐 닻을 내리고 정박(停泊)하였다. 왜선과 더불어 상의하고서 다시 포구를 나와 돛[帆] 두 개를 비껴 달고 행하는데 바다 반도 못 미쳐서 바람결이 점점 약해지므로 격군(格軍)을 시켜 소리를 먹여가며 힘을 합하여 노를 재촉해 가게 해서 황혼 무렵에 겨우 남도(藍島)에 다달았다. 이 섬은 서해도(西海島) 축전주(筑前州) 소속이며, 행상(行商)들이 바람을 피하여 배를 정박하는 곳이니, 인가는 겨우 30여 호였다. 태수(太守) 우위충지(右衛忠之)는 연전에 강호(江戶)에 가고 대관(代官) 흑전미작수 일성(黑田美作守一成)과 소하내장윤 정직(小河內藏允正直)이 접대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관사(館舍)는 신축하였는데 처마ㆍ기둥ㆍ대들보ㆍ서까래와 울타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대[竹]로 만들고, 포진(鋪陳)하는 모든 물건도 정결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고 공궤하는 찬품이 지극히 사치스러웠으며, 사후(伺候)하는 사람들도 정성을 다하여 응접하는데 부지런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풍본포에서 남도(藍島)까지는 뱃길로 3백 50리다.
25일(병오)
풍세가 불순하여 남도에서 머물렀다. 대관(代官)들이 뵙기를 청하기에 잠깐 들어와 뵙기를 허락하니, 예모(禮貌)가 심히 공손하여 출입할 때에 무릎으로 기었는데, 이는 일본의 풍속에 높은 자를 뵙는 예절이었다. 역관들이 말하기를,
“충지(忠之)는 벼슬이 높아 녹봉(祿俸) 50만 석을 받고, 이 대관이 받는 녹봉도 1만 석이 못 되지 않는데, 마조(馬助)ㆍ칠우위문(七右衛門) 등이 모두 그 앞에서 굽실거리니, 그 벼슬이 높은 것을 알 만합니다.”
하였다. 그 사람들이 별하정(別下程) 세 소반을 바치기에 보니, 모두 종이로 봉하였는데, 겉면에 ‘은자(銀子)’라고 씌어 있고, 한 소반에 담긴 것이 무려 30~40편(片)이나 되었다. 너무나도 놀라워 역관을 시켜, 도저히 받을 수 없다는 뜻을 전하고 준엄하게 거절하니, 그 사람과 칠위문 등이 합사(合辭)하여 말하기를,
“사신의 몸가짐이 간결하심을 저희들이 모르는 것은 아니오나, 일본의 풍속은 이것이 아니면 높은 분을 대우하는 예에 결함이 되므로 감히 변변찮은 물건을 올렸는데, 이제 사양하여 물리치시니, 도리어 저희들이 부끄럽습니다. ‘그 고을에 들어가면 그 풍속을 따르는 것[入鄕循俗]’은 또한 옛날부터 있는 일이니, 무슨 손상됨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역관을 시켜 반복해서 개유(開諭)하여 돌려보내게 했다. 그리고 칠위문 등이 미리 단속하지 못한 실책을 꾸짖으며 앞으로 다시 이같은 일이 없도록 하라고 분부하니, 칠위문 등이 예 예 하고 물러갔다.
사로잡혀 온 사람들이 혹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있어 일행을 찾아오는 자가 있으면 문득 대마도 사람의 꾸중을 받으므로 임의로 나타나지 못하였다. 한 여인이 그 아들을 데리고 몰래 조그만 배를 타고 와 우리 뱃사람에게 말하기를,“나는 강진(康津)에 살던 백성의 딸입니다. 정유년(丁酉年) 사로잡혀 올 때에 아들은 6세 아이로 따라와 지금 이 섬에서 3식(息 1식은 30리) 거리에서 살고 있는데, 사신의 행차가 있음을 듣고 기쁜 마음을 견딜 수 없어 배를 세내어 타고 찾아왔습니다. 돌아가실 때에 다시 와 기다리겠으니, 원컨대, 행차를 따라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 주옵소서. 사로잡혀 온 사람으로 나와 같이 있는 자가 한 부락을 이루고 있는데, 모두 돌아가려 해도 되지 못하니, 내가 미리 알려 두었다가 같이 오겠습니다.”
하였다. 또 한 사람은 김해(金海)에 살던 양반이라 칭하며 군관 등에게 찾아와 말하기를,
“사로잡혀 와 이 섬에 살고 있는데, 본국으로 돌아가려 하나 탈출할 기회가 없소. 행차가 돌아갈 때에 마땅히 따라가겠으니, 그때에 하인을 시켜 여염 가운데서 외치기를, ‘사로잡혀 온 사람으로 본국에 돌아가려는 자가 있으면 모두 즉시 나오라.’ 하면, 마땅히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해 오겠소.”하며, 비밀히 약속하고 돌아갔다. 또 문자를 아는 한 왜인이 조그만 종이쪽지에 글을 써서 보이기를,
“사로잡혀 온 사람으로 명감(明鑑)에 살고 있는 자가 매우 많은데, 만약 관백의 허락을 얻는다면 모두 나갈 수 있습니다.”
하였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사로잡혀 온 사람이 곳곳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혹은 사세에 구애되어 비록 뜻대로 몸을 빼어 돌아가지는 못하지만, 고향을 그리는 정은 사람마다 일반인 것이니, 불쌍하다.
26일(정미)
간혹 흐림. 평명에 의성이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오늘은 서풍이 점점 일어나니 청컨대 속히 배를 타소서.”
하였다. 해돋을 녘에 배를 띄웠는데, 앞을 인도하며 이끌고 가는 왜 소선(小船)이 거의 70여 척이나 되었다. 30~40리를 가니 동풍이 일기 시작하므로 곧 돛을 내리고 노를 저어 나아갔다. 또 30~40리를 지나가니, 풍세가 점점 사나워 배가 거슬려 갈 수 없으므로 승도(勝島)가에 잠깐 정박하고 순풍이 불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검은 구름이 사방에서 모여들고 역풍이 더욱 험악하므로 부득이 돛을 달고 배를 되돌려 남도에 도로 정박하였다. 지공하는 왜인들이 이미 흩어지고 관사가 황량하여 하륙(下陸)하지 않고 그대로 배 위에서 유숙하였다. 조흥이 등자와 감귤을 보내 오고, 의성은 설병(雪餠)ㆍ생리(生梨)ㆍ등자ㆍ귤을 보내 왔다.
27일(무신)
간밤부터 큰비가 내려, 종일 쏟아졌다. 의성ㆍ조흥 등이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지공하는 사람들이 반 이상 돌아왔고, 이와 같은 큰비에 배 위에서 곤경을 치를 수 없으니, 아무리 우중(雨中)이지만 관사로 사처를 옮기소서.”
하였다. 오후에 상사ㆍ종사와 상의하고 비를 무릅쓰고 관사로 사처를 정했는데 병풍과 포진 등이 태반 오지 않아 부득이 세 사신이 한 곳에 유숙하였다.
28일(기유)큰 바람이 불었다. 남도에서 머물렀다. 귤지정이 술과 감귤을 보내 왔다. 정오에 현방이 찾아와 담화를 나누었다. 이어서, 서복사(徐福祠)는 어디에 있느냐 물으니, 대답하기를,
“남해도(南海道) 기이주(紀伊州) 웅야산(熊野山) 아래에 있는데, 지방 사람들이 지금까지 신봉(信奉)하여 향화(香火)가 끊기지 않고, 그 자손도 또한 그곳에 있는데, 모두 진씨(秦氏)로 일컫고 있습니다. 웅야산은 일명 금봉산(金峯山)이라고도 합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서복(徐福)이 일본에 올 때에는 진 시황(秦始皇)이 시서(詩書)를 불사르기 전이므로 육경(六經)의 전서(全書)가 일본에 있다 하는데 그러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일본에는 원래 문헌(文獻)이 없거니와, 듣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때에 설령 육경의 전서가 있었다 하더라도 일본은 전쟁을 좋아하여 번복이 매우 잦아 병화(兵火)의 참혹함이 진화(秦火)보다 심하였는데, 어찌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남도에서 마주 바라보이는 곳에 박다(博多) 냉천진(冷泉津)이 있는데, 바로 신라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시체를 묻은 곳으로 일본의 옛날 서도(西都)입니다. 정포은(鄭圃隱 정몽주의 호)ㆍ신 문충공(申文忠公 신숙주의 시호)이 수신사(修信使)로 왔을 때에도 모두 이곳에 왕래하였습니다.”
하였다. 현방이 시 한 절구(絶句)를 써서 보였다.
서녘을 돌아보니 눈 앞이 시원한데 / 回頭西望眼猶寒
십 리 송림에 칠 리 여울이로세 / 十里松林七里灘
지금도 제상 충혼 있는 듯 / 堤上舊魂今若在
어젯밤 꿈속에서 문안드렸네 / 夜來入夢問平安
대개 10리 송림과 7리 여울은 모두 냉천진에 있으므로, 인용한 것이다. 상사ㆍ종사와 함께 차운(次韻)하여 화답하였다. 또 묻기를,“해동기(海東記)에 실린 패가대(覇家臺)는 어디에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패가대는 원래 그러한 지명이 없고 일본의 어음(語音)에 박다주(博多州)를 화가다(化家多)라 하니, 이는 하가다[博多]의 와전(訛傳)으로 신숙주(申叔舟)가 와전을 그릇 기록한 것입니다.”
하였다. 현방이 또 묻기를,
“박제상의 부인이 치술령(鵄述嶺)에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언덕에 떨어져 죽었다 하는데, 이른바 치술령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이 같은 남편에 이같은 부인이 있으니, 천 년 후에도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일으키게 합니다.”
하였다. 충렬(忠烈)이 늠름하여 섬기는 바에 목숨을 바쳤으므로 오랑캐들도 또한 흠모할 줄 알았다. 열렬(烈烈)한 기개가 추상열일(秋霜烈日)과 더불어 빛을 다투었으니, 족히 천고(千古)의 강상(綱常)을 수립(樹立)하였다 할 것이다. 또 현방의 본관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저는 대내전(大內殿)의 후예(後裔)이므로 자칭 반 조선인(朝鮮人)이라 합니다.”
하였다. 대개 대내전은 곧 박다(博多)의 서도(西都)인데, 백제(百濟) 온조(溫祚)의 후예다. 현방이 박다에서 생장하였으므로 온조의 후예라고 이르고 온조의 후예이므로 반 조선인이라고 칭한 것이다.
진화(秦火) : 진 시황(秦始皇)이 시서(詩書)를 모두 불사른 것을 이름.
29일(경술)
흐리기도 하고 바람도 불고 비도 왔다. 남도에 머물러 순풍을 기다렸다. 바람이 순하면 명일 발행한다는 것을 일행에게 알렸다.
11월
1일(신해)
맑음. 새벽에 망궐례를 행하였다. 남도에서 머물렀다. 접대의 일을 주관하는 대관(代官) 일성(一成)과 정직(正直)이 축전주(筑前州)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근일 풍세가 불순하여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이제야 돌아오니, 지공의 범절에 어긋남이 많아 극히 미안합니다.”
하고, 이어서 들어와 뵙기를 청하므로, 사절하고 보지 않았다.밤중에 소낙비가 내렸다.
2일(임자)
맑음. 평명에 의성ㆍ조흥이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뱃사람들이 모두 서풍이 극히 순하다 하니, 속히 행장을 챙기옵소서.”
하므로, 상사 이하 일행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니 해가 막 솟아올랐다. 대마도 일행의 선박과 여러 왜인의 상선(商船) 1백여 척이 일시에 돛을 달고 바다를 뒤덮어 나가는데, 바람결이 세차서 배는 나는 듯하니, 바라보매 참으로 장관이었다. 다만 파도가 용솟음쳐서 배가 기우뚱거리므로 배 안의 사람들이 태반이나 어지러워 쓰러졌다. 뱃멀미가 가장 심한 자는 역관 장선민(張善敏)이었다.
3백여 리를 행하여 적간관(赤間關)을 10리쯤 못 미쳐에 5층 성루(城樓)가 있는데 백옥(白玉)으로 장식하여 바라보매 눈산[雪山]과 같았다. 인가가 매우 번성하여 큰 들에 가득하고, 흰 모래와 푸른 대가 10리를 연하였다. 성밖에 해자[濠]를 파고 그 위에는 홍교(虹橋 무지개 다리)를 걸쳐 상선(商船)을 통하게 하였으니, 곧 풍전(豐前) 지방 소창(小倉)이라는 곳이었다. 월중수(越中守) 충오(忠奧)가 일찍이 이 성을 지켰는데 지금은 그 아들 □리(□利)가 승습(承襲)하여 그대로 살고 있다 한다.
신시(申時)에 적간관(赤間關)에 다다르니, 이곳은 장문주(長門州) 소속인데 여염이 또한 조밀하였다. 태수(太守) 광원(廣元)은 강호(江戶) 모리(毛里)에 있고, 갑주수 수원(甲州守秀元)은 곧 남방주(南防州) 소속인데, 또한 강호에 있다. 대관왜(代官倭) 서이랑(西以郞)과 등강태랑우위문(藤江太郞右衛門) 등 두 사람이 접대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아미타사(阿彌陀寺)에 사처를 정하였는데, 응접하는 범절과 포진(舖陳)의 화려함이 남도만 못하지 않았다. 절 옆에 사당이 있으니, ‘안덕천황신당(安德天皇神堂)’이라 하였다. 왜인에게 물으니, ‘옛날 안덕천황이 원뢰조(源賴朝)의 침공을 받고 패하여 이곳에 이르러 세궁 역진(勢窮力盡)하자 그 조모가 등에 업고 바다에 들어가니, 시종신(侍從臣) 7인과 궁녀 몇 사람이 아울러 바다에 빠져 죽었다.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여 어린아이의 소상(塑像)을 만들고 사당을 세워 제사를 올리고, 사승(寺僧)으로 하여금 수호하게 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한다.
장문수 광원(長門守廣元)은 휘원(輝元)의 아들이요, 갑주수 수원(甲州守秀元)은 휘원의 양자다. 수뢰(秀賴)가 패한 후에 가강(家康)은 휘원을 죽이지 않고 머리 깎아 중이 되게 하고, 그 식읍(食邑) 10주(州)를 빼앗고 2주만을 광원과 수원에게 나누어 주어 습작(襲爵)하게 한 다음, 두 사람을 모두 강호(江戶)에 머물러 두고 대관(代官)으로 하여금 직무를 행하게 하였다 한다.
월중수 충오(越中守忠奧)는 가강(家康)을 도와준 사람이다. 수뢰가 그 처자를 빼앗아 고주(孤注)로 삼고 충오에게 항복 받으려 하니, 충오의 아내가 그 관하(管下)에게 말하기를,“수뢰가 내 남편을 항복 받고자 하여 나를 기화(奇貨)로 삼으니, 내가 남편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서 이와 같이 구차하게 살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였다. 관하 왜인들이 굳이 만류하였지만 듣지 않고 곧 그 두 아이를 죽이고 스스로 불살라 죽었다. 그 6세 된 딸이 죽을 적에 살려 달라고 빌면서,“앞으로는 절대로 병풍의 그림을 더럽히지 않겠으며, 절대로 정원의 화초도 꺾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한다. 그 잔인하고 혹독함은 왜인의 습성이 그런 것이지만, 삶을 버림에 있어 이같이 과감하니, 또한 열녀인 것이다.
남도에서 적간관까지는 3백 20리다.
고주(孤注) : 노름꾼이 나머지 돈을 다 걸고 마지막 승부를 결정하는 것. 송(宋) 나라 때 거란(契丹)의 침공이 있자, 구준(寇準)이 황제에게 전주(澶州)로 친정(親征)하기를 청했음. 뒤에 왕흠(王欽)이 참소하기를, “폐하는 구준의 고주였습니다.” 했음.
3일(계축)
맑음. 월중수 충리(越中守忠利)의 관하(管下) 왜인 수도서(藪圖書)가 별하정(別下程)으로 쌀 50석, 감 10상자, 술 50통, 닭 1백 수, 건어(乾魚) 1백 마리를 보내 오고, 이어서 뵙기를 청하였는데 무릎으로 기어 들어와 감히 직접 청하지 못하고 대마도 사람 마조(馬助)ㆍ칠위문(七衛門) 등을 시켜 전하여 말하기를,
“태수(太守)가 비록 강호에 있으나, 장군 관백(將軍關白)이 사신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나라에 영을 내려 성경(誠敬)을 극진히 하게 하였으므로 저희들이 태수의 명을 받들어 감히 변변찮은 물품을 올립니다”하므로, 역관들을 시켜 준엄한 말로 거절하였다. 도서(圖書)는 물러가지 않고 굳이 청하기를,
“장군의 명령이 저와 같고, 태수의 분부가 또 이와 같은데, 사신께서 굳이 거절하고 받지 않으시니, 태수가 듣고 어찌 서운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변변찮은 물건을 받아 종자(從者)에게 주십시오.”하므로, 또 박대근(朴大根)을 시켜 사절하기를,
“소창(小倉)은 지나는 길이 아니며, 지공(支供)도 이미 하관(下關)으로부터 보내 왔으니, 주고 받는 예의가 마침내 근거할 데가 없으므로 결코 받을 수 없다. 정은 벌써 받았으니, 속히 가지고 돌아가라.”
하였다. 마조(馬助) 등이 또 입을 모아 받기를 권하기에 부득이 술 50통만 받아 각 선원(船員)과 마도의 여러 배에 나눠 주었다. 장문수 대관(長門守代官) 서이절(西以節)과 등강태랑우위문(藤江太郞右衛門) 등이 또 뵙기를 청하고 별하정(別下程) 세 소반을 남도의 예(禮)와 같이 보내 왔기에, 박대근 등을 시켜 준엄한 말로 대답하기를,
“지나는 일로(一路)에 폐단 끼친 바가 적지 않으나 지공(支供)은 먹는 물건이니 부득불 받은 것이다. 그러나 별하정으로 말하면 받을 이유가 조금도 없으니, 이는 화물(貨物 뇌물로 주는 물건)이므로 결코 받을 수 없다. 빨리 가져 가고 두 말 하지 말라.”
하였다. 칠위문(七衛門)이 또한 굳이 권했지만 듣지 않으매, 그 사람들은 예 예 하고 무릎 걸음으로 물러갔다.
조반 후에 조수를 기다려 배를 탔다. 모든 배가 일시에 항구를 지나니 한 성터가 있는데, 일찍이 문자성(文字城)이라 불렀다. 옛날 파수(把守)하던 곳이었는데, 수충(秀忠)이 관백이 된 후에 달리 시설함은 허락하지 않고 철훼(撤毁)하게 했다고 한다. 북쪽으로 10리쯤 되는 산너머에 큰 부락이 있는데, 집 모퉁이와 분칠한 담이 작은 고개 너머로 살짝 드러났으니, 장문수 광원(長門守廣元)이 사는 곳이라 한다. 혹 돛을 달고 혹 노를 저어 행하는데 날이 저물어서 산기(山崎) 중류에 닻을 내리고 배 위에서 잤다.
하관(下關)에서 산기(山崎)까지는 뱃길로 70여 리였다. 하관은 곧 적간관(赤間關)이다.
4일(갑인)
아침에 흐림. 각 배에서 닭 울음 소리가 일시에 새벽을 알리니, 바다 가운데의 괴로움을 아주 잊어버리고 육지에서 사는 느낌이 들었다. 닭이 세 홰 운 뒤에 배를 띄웠다. 사방이 깜깜하여 동서를 분별할 수 없어 다만 북두칠성을 우러러보며 순풍에 맡길 뿐이었다. 백 리쯤 가니, 바람은 점점 약해지므로 노를 재촉하여 행하였다.
오후에 서풍이 또 거세게 일어나서 물결이 뛰고 치는 바람에 배는 화살같이 달렸다. 흑진(黑津)을 지나 황혼에 상관(上關)에 다다르니, 관을 지키는 왜인들이 별달리 하륙(下陸)을 간청하는 말이 없고 의성과 조흥 등도 또한 사람을 보내어 인도하는 일이 없었다. 상사와 종사가 지레 관사에 내리는 것이 구차한 듯하므로 나 홀로 배 위에서 유숙하였다. 그리고 강우성(康遇聖)을 시켜서 왜통사(倭通事)를 힐책하여, 조흥이 바로 하인을 시켜 사후(伺候)하지 않은 잘못을 전하게 하였다. 밤이 깊은 후에 의성 등이 비로소 그 잘못을 깨닫고 재삼 와서 하륙하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산기(山崎)에서 상관(上關)까지 뱃길로 4백여 리다. 상관은 곧 장문주(長門州) 소속인데, 태수가 왕래할 때에 차를 마시는 곳이었다.
5일(을묘)
맑음. 해가 돋기 전에 모든 배가 돛을 달고 일시에 발행하니, 서풍이 순하여 배가 심히 빨랐다. 유우도(油宇島)를 지나 진화촌(津和村) 앞 포구에 배를 멈추었다. 돛을 내리고 닻을 내려 의성과 조흥이 오기를 기다렸다. 저녁 조수를 이용하여 다시 배를 띄우려 하였는데 날이 벌써 저물고 바람도 순하지 않으므로 배 위에서 그대로 묵었다. 조흥이 등자[橙]ㆍ귤ㆍ침리(沈梨)를 보내 왔다.
상관에서 진화(津和)까지는 뱃길로 1백 20리다. 진화는 곧 이예주(伊豫州) 지방인데 남해도(南海道) 소속이다.
6일(병진)
맑음. 평명에 조수를 기다려 배를 띄웠는데, 북풍이 거슬러 불어 돛을 달지 못하고 노를 재촉하여 갔다. 정오에 과현(鍋懸)에 다다르니 곧 안예주(安豫州) 소속으로 천야단마수(淺野但馬守)의 관할이었다. 대관(代官) 목촌지마(木村志摩)ㆍ도천석견(圖川石見) 등이 접대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의성ㆍ조흥 등이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이곳이 비록 참소(站所)이기는 하나 여기서 도포(鞱浦)가 멀지 않으며 바람이 순하고 해도 이르니, 청컨대 관(館)에 내리지 마시고 그대로 행선(行船)하게 하십시오.”
하였다. 곧 강우성(康遇聖)ㆍ홍희남(洪喜男) 등을 시켜서 왜통사와 같이 대관왜에게 갈 길이 바빠 내리지 못하는 뜻으로 말하니, 대답하기를,“변변찮은 물건을 이미 준비하여 행차를 기다렸는데, 칙사의 하교가 이와 같으시니, 감히 다시 청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강 역관이 돌아와 말하기를,
“관사(館舍)는 행차를 위하여 새로 지었고, 포진(舖陳)한 물건은 지극히 정결했으며, 지공(支供)하는 찬품은 과연 성비(盛備)였는데, 행차가 내리지 않으니 대관 등이 더 없이 섭섭하게 여겨 쌀과 각종 찬물(饌物)을 보내 왔습니다.”
하므로, 군관과 역관을 시켜서 받아들이게 하여 뒷배에 실었다. 촌락(村落)은 겨우 40~50호에 지나지 않았으나, 대숲이 산을 두르고 과일나무가 줄지어 심어졌으며, 풀과 나무가 아직 푸르러 시들어 떨어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지나온 일로(一路)에는 무가 밭에 가득하고, 가을갈이가 한창이었으니, 우리나라 절후로 비교한다면 8월 하순 일기와 비슷하였다.
곧 배를 띄우게 하였는데, 바람이 순하고 쾌하여 왜선이 모두 뒤에 처졌다. 1백여 리를 행하니, 좌편 언덕에 한 큰 마을이 있었다. 이는 곧 안예주(安豫州)의 충해(忠海)인데, 왜말로는 단단오미(斷斷吾味)라 하였다. 왜통사 및 왜사공 등이 이곳에서 배를 멈추어 의성과 조흥의 배를 기다리자고 청하는데 저녁 바람이 알맞고 초승달이 밝아 그대로 배를 띄우고 노를 재촉하였다. 충해 수십 리를 지나서 북쪽으로 바라보니 한 번화한 촌락이 있는데 곧 비후주(備後州) 삼원(三原) 지방으로 술로써 온 나라에 이름이 있다 한다. 겨우 몇 리를 지나니 하늘이 이미 어두웠다. 희미한 달 아래 긴 바람이 배를 보내니, 다만 산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지나는 것이 보일 뿐이었다.
도포(鞱浦)를 10여 리 앞두고 멀리 바라보니, 등불이 번쩍번쩍하고 종소리가 은은하므로 가까이 가서 보니, 바다 어귀 석벽 위에 몇 칸 정사(精舍)가 있는데 이름은 관음사(觀音寺)라 하였다. 배가 지날 때 종을 울리고 기다리면 행인들이 쌀과 돈을 주기도 하고 나무를 주기도 하여 중들의 조석거리가 되게 하였다. 달이 떨어진 후에 비로소 도포(鞱浦)에 다다르니, 거의 3경초가 되었다. 여염이 조밀하고 기와집이 반이 넘었다. 배 위에서 유숙하니, 의성과 조흥이 뒤쫓아 와서 신위문(新衛門)으로 하여금 관사(館舍)에 내려가자는 뜻을 말하였으나, 그 말이 성실하지 않은 듯하고, 지대(支待)하는 왜인들도 또한 근간(勤懇)한 태도가 없었으니, 그 사이에 반드시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다. 참으로 분통한 일이다. 도포(鞱浦)는 곧 비후주(備後州) 소속인데 태수 정칙(正則)은 관백에게 죄를 지어 파출(罷黜)되었고, 현재 태수(太守) 수야일향(水野日向)은 방금 강호에 있으므로 대관왜(代官倭) 삼야수마(杉野數馬)ㆍ남본좌위문(楠本左衛門)ㆍ소출청우위문(小出淸右衛門) 등 3인이 와서 접대하는 일을 주관하였다.진화(津和)에서 도포까지 뱃길로 2백 80리다.
7일(정사)
맑음. 의성 등이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오늘은 바람과 조수가 순하니 일찌감치 발선(發船)하기를 청합니다.”
하기에, 대답하기를,
“어제 밤이 깊도록 배를 타서 신기(神氣)가 매우 편치 못하고 또 여러 차례 숙참(宿站)을 지나왔으므로 양식과 찬물(饌物) 등도 이미 떨어져 격군(格軍)들이 여러 차례 급함을 고하여 왔다. 어제는 밤이 깊어 곧 마련하지 못하였고, 오늘도 해가 늦도록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는데, 매양 관향왜(管餉倭)가 미처 오지 않아서라고 핑계를 하니, 심히 온당치 못하다. 하물며 앞으로 실진(室津)은 3백 리가 되고, 우창(牛窓)도 이곳과의 거리가 2백 리가 못 되지 않으므로 날이 느지막하게 발선하여서는 결코 도달하기 어렵다. 그래서 오늘은 이곳에서 머무르고 내일 새벽 일찍 떠나려 한다.”
하였다. 의성 등이 재삼 하인을 보내어 상선(上船)에 청하여 사시(巳時)말에 배를 띄우므로 나도 부득이 뒤따라 출발하였다.
돛을 달고 포구를 나가 10리쯤 지나와 북쪽으로 한 산을 바라보니, 분첩(粉堞)이 사면을 두르고 여염이 극히 번화하였으니, 곧 비후주 태수(備後州太守) 수야일향(水野日向)이 사는 곳이었다. 이름은 승산성(勝山城)이며, 일명 부산(富山)이라 하는데, 옛날 폐지되었다가 이제 다시 군(郡)이 되었다 한다.
백석도(白石島)를 지나 해질 녘에 하진(下津) 앞 바다에 다다라 배 위에서 유숙하였다. 하진은 해구(海口)의 요충(要衝)이다. 수길(秀吉)이 관백으로 있을 때에 요새를 만들어 파수하였는데, 지금은 철병하고 빈 성만 남았다 한다. 밤에 마도 관향왜(馬島管餉倭) 언우위문(彥右衛門)이 과현(鍋懸)으로부터 따라와 하정(下程)과 찬물(饌物)을 올렸는데, 매우 풍성(豐盛)하여 다른 참소(站所)의 비교가 아니었다. 그러나 도포에서는 한 물건도 주지 않으므로 받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도포에서 하진까지는 뱃길로 1백 리다. 하진은 일명 상진(霜津)이라고도 한다.
8일(무오)
맑음. 닭 울 때 조수를 이용하여 배를 띄웠는데 동풍이 거슬러 불어 돛을 달지 못하고 왜선(倭船)이 좌우에서 끌며 노를 저어 나아갔다. 사시(巳時)에 우창(牛窓)에 다다르니, 곧 비전주(備前州) 소속이었다. 본련사(本蓮寺)에 사처를 정하였다. 선소(船所)로부터 절 앞에 이르기까지 좌우의 인가가 거의 수백여 호가 되는데 남녀들이 길 좌우에서 구경하느라고 담 같이 서 있었다. 한 젊은 중이 자못 문자를 알기에 물으니, 의술(醫術)로 태수의 밑에 있는데, 이제 지대하기 위하여 나왔다 하였다. 태수 비전수 송평궁내 원충웅(備前守松平宮內源忠雄)은 곧 가강(家康)의 외손 지전삼판위문(池田三坂衛門)의 아들이니, 지전이 죽은 후에 충웅이 비전 태수(備前太守)를 이어받아 방금 강호에 있다 한다. 대관왜 지마수 성충(志摩守成忠)ㆍ병부소보 충계(兵部少輔忠繼)ㆍ좌도수 가차(佐渡守家次)ㆍ중대부 성정(重大夫成正)이 접대의 일을 주관하는데 시중드는 왜인들이 모두 나이 젊고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경근(敬謹)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우창(牛窓)에서 10여 리 떨어진 곳에 한 외딴섬이 있으니 모두 석산(石山)인데, 왜인이 집을 짓고 살고 있다. 바야흐로 돌을 떠서 해안(海岸)에 내리는데 산더미처럼 쌓였고 한 덩이 돌의 크기가 집채만큼 하였다. 물으니, 대판(大坂)에서 바야흐로 성 쌓는 일이 있어 여기서 가져간다 하였다.하진에서 우창까지 뱃길로 1백 리며, 우창에서 군치(郡治 군 소재지)까지는 70리라 한다.
9일(기미)맑음. 닭이 세 홰 운 뒤에 의성과 조흥이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조수가 방금 들어와서 발선(發船)할 만합니다.”
하였다. 바로 화각(畫角)을 재촉해 불고 배를 띄워 마도의 모든 배와 일시에 바다로 나가니, 우포(牛浦)의 작은 배가 좌우에서 끌고 노를 재촉하여 사시(巳時)에 실진 포구(室津浦口)에 다달았다. 조흥이 재삼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긴히 면대(面對)하여 아뢸 말이 있으니, 상선(上船) 옆으로 배를 옮겨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조금 후에 조흥의 배도 연달아 이르므로 상사ㆍ종사와 함께 선루(船樓) 위에 좌정했다. 수인사(修人事)도 하기 전에 조흥이 갑자기 말하기를,“일행을 검속(檢束)하는 일로서 일찍이 박 동지(朴同知)를 통하여 누차 전달하였는데, 어제 저녁에 행차 하인이 마도 사람과 서로 싸워 다치기에 이르렀으니, 청컨대 핵실하여 죄를 다스리옵소서.”하므로, 대답하기를,
“하인의 한 일을 일찍이 알지 못하였다. 지금 비로소 들으니 지극히 해괴한 일이다. 마땅히 엄중하게 다스려 경계하겠다.”
하니, 조흥은 즉석에서 사핵(査覈)하여 다스리지 않는 것을 불쾌하게 여겨 발연히 일어나 나가버렸다. 관사에 내려온 후 세 사신이 한 곳에 모여 싸운 사람을 조사하니, 3선 격군(格軍)이었다. 뜰 아래로 잡아들여 곤장 40대를 치고, 귤지정을 불러 조흥의 무례함을 힐책하였다.
실진(室津)은 번마주(幡摩州) 소속이니 미농수 충정(美濃守忠政)의 관할하는 곳이었다. 가강과 수뢰의 싸움에서 충정(忠政)과 그 아들 3인이 모두 가강에게 공로가 있었으므로 그 4부자에게 같이 번마(幡摩)를 지키게 하고 서해(西海)의 여러 도를 총관(總管)하게 하니, 녹봉 받는 것이 60만 석이었다. 맏아들 본전평팔충위(本田平八忠爲)는 곧 수충(秀忠)의 사위다. 가강이 일찍이 손녀를 수뢰의 아내로 주었는데, 수뢰와 가강이 틈이 벌어진 후에 수뢰가 자기를 배반한 것을 분하게 여겨 그 아내를 가강에게 돌려보냈다. 가강은, 여자가 실행(失行)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머리를 깎이고 중으로 삼아 별당(別堂)에 거처하게 하였다. 그 후 수충이 관백이 되자 그 여자의 머리를 기르게 하여 평팔(平八)의 아내로 삼았다. 어떤 사람은, ‘가강이 수뢰에게 꾀를 써서 그 손녀를 몰래 빼내어 돌아오게 하였다.’ 한다.
평팔은 병을 핑계대고 나오지 아니하고 다만 대관을 시켜 접대하는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관사의 헌걸스러운 것과 포진의 화려한 것이며, 찬품의 정결한 것과 기명의 선명한 것이며, 지대의 성근(誠勤)한 것과 사후의 공손한 것이 지나온 다른 곳에 비하여 월등하였다. 이곳에서 군치(郡治)까지는 50리였다. 앞뒤로 여염이 조밀한데 기와집이 태반으로 생계가 부유하였다. 포중(浦中)은 심히 넓고 사면이 산으로 둘러 있어 배 5백~6백 척을 수용할 수 있었다.우창에서 실진까지 뱃길로 1백여 리다.
10일(경신)
혹 흐리고 밤에 비. 실진에 머물러 바람을 기다렸다. 종사가 와서 담화하였다.
11일(신유)
비. 실진에서 머물렀다. 이곳에서 병고(兵庫)까지는 아침에 떠나 저녁에 이를 수 있으니 거리가 멀지는 않으나, 남해(南海)의 대양(大洋)이 그 사이에 있어 대판에서 내려오는 강물 하류와 합하므로, 반드시 바람과 조수가 모두 순한 후에야 배를 띄울 수 있었다. 적간관(赤間關)에서 동쪽은 비록 한편 육지를 따라 행하게 되었으나 물결의 험함이 대양(大洋)보다 심하였다. 황회원(黃檜原 회원(檜原)은 신(愼)의 봉호) 이상고(李尙古 상고는 경직(景稷)의 자)의 일록(日錄)에도 모두 이 일이 실려 있는데 참으로 거짓이 아니었다.
12일(임술)
늦게 갬. 실진(室津)에 머물렀다. 새벽에 동지 망궐례(冬至望闕禮)를 행하였다. 낮에 세 사신이 회의하고 현방(玄方)에게 글을 보내어 조흥을 꾸짖었다.
13일(계해)맑음. 미명(未明)에 의성ㆍ조흥이 사람을 보내어 떠나기를 청하므로, 우리 선원에게 물으니,
“이는 서북풍인데 이른바 횡풍(橫風)으로 발선(發船)할 만합니다.”
하였다. 해돋이에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두 돛을 비껴 달고 행하는데 마도의 여러 배와 일본 상선까지 합쳐 1백여 척이 일시에 돛을 달고 떠나니, 바라보매 성책(城柵)을 두른 듯하였다. 수십 리를 가다가 북쪽으로 해변을 바라보니, 분첩(粉堞)과 층루(層樓)는 반공(半空)을 가로지르고 여염은 땅을 뒤덮어 끊기지 않았다. 물으니, 번마주 주진(幡摩州主鎭)이었다. 실진으로부터 병고에 이르기까지 연해의 일대에 인가가 잇대었는데 모두 큰 마을이었다. 1백여 리를 지나니 또 석성(石城)이 평야에 뻗쳤고, 점포가 즐비하여 몇 리에 가득하였다. 모두 해안을 끼고 있었으니 이른바 명석포(明石浦)라는 곳이었다. 이곳은 태원 우근지(太原右近之)가 다스리는 곳으로 녹봉 받는 것이 20만 석이었다. 해구(海口)를 파수하는 요충(要衝)인데, 지금 번마주(幡摩州)에 속하였다고 한다. 일기(壹岐)서 동쪽으로 경유한 여러 섬과 일로(一路)의 해산(海山)이 모두 자산(赭山)으로 나무 하나 없고 평야도 한 곳 없었는데, 실진으로부터는 평야가 보이고 여염 가운데에 간혹 송림(松林)이 있었다. 명석포를 지난 후로 북풍이 매우 거세게 불어 배가 뛰는 말과 같이 요동하여 배 가운데 사람들이 현기(眩氣)로 쓰러지는 자가 많았다. 신시초에 병고(兵庫)에 다다르니 돛을 달고 실진으로 향하는 상선(商船)이 바다를 뒤덮어 갔다. 또한 장관(壯觀)이었다.
해진 후 다점(茶店)에 사처를 정하니, 점사(店舍)가 협착하여 상사(上使)와 함께 한방에서 유숙하였다. 병고는 섭진주(攝津州) 소속인데 5기내(五畿內) 지방에 속하므로 관백의 장입(藏入)하는 곳이며, 호전 좌위문(戶田左衛門)을 시켜 관리(管理)하게 하였다. 장입(藏入)은 우리나라의 내수(內需)와 같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장입(藏入)이 아니고 창입(倉入)이다.’ 하였다. 대관왜 각남(角南)ㆍ주마(住馬) 등 3인이 지대의 일을 주관하였다. 명석 군장 소립원 우근대부장감(明石郡將小笠原右近大夫將監)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별하정(別下程)을 올렸는데, 쌀ㆍ술ㆍ소ㆍ돼지ㆍ생꿩ㆍ닭ㆍ생선ㆍ건어(乾魚)ㆍ곶감ㆍ유자ㆍ밀감ㆍ사탕, 심지어는 채소ㆍ시탄(柴炭)까지 배에 가득하게 실어왔다.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으니, 사자가 말하기를,“태수가 혹시 행차가 폐군(敝郡)에 정박(碇泊)하시리라 생각하고 박물(薄物)을 준비하였는데, 행차가 들어오지 않으시므로 심히 섭섭하게 여겨 감히 사람을 시켜 뒤좇아 보냈습니다. 이제 하교를 받자오니 황공하여 감히 다시 전달하지 못하옵니다.”
하고, 부복하고 물러가지 않으므로, 부득이 약간의 술과 과실을 받아서 일행 원역에게 나누어 주었다.
번마수 충정(幡摩守忠政)에게 아들 3인이 있으니, 충위(忠爲)ㆍ충승(忠勝)ㆍ정씨(政氏)이며, 그 사위는 우근장감(右近將監)이다. 장감으로써 명석(明石)을 관할하게 하고 또 심복 제장(心腹諸將)으로 서로(西路)의 큰 고을에 배치(配置)하였으며, 전일 서로(西路)에 있던 여러 장수는 동로(東路)에 옮겼으니, 대개 서로는 관동(關東)에서 가장 멀어 수길(秀吉)에게 친신(親信)하였기 때문이었다.
천황가(天皇家)의 딸은 모든 장수와 혼인(婚姻)하지 않는 것이 일본의 국법이었는데, 5~6년 전에 평천황(平天皇) 때의 구례(舊例)를 상고하여, 천황이 그 딸을 지금의 관백 가광(家光)에게 시집을 보냈다 한다. 지금 천황의 성은 원씨(源氏)라 한다.
실진에서 병고까지 수로로 1백 80여 리다.
14일(갑자)
맑음. 아침 식사 때 배를 탔는데, 바람과 조수가 모두 거슬리므로 노를 재촉하여 행하였다. 협포(脅浦)를 지나 서궁촌(西宮村) 앞에 다다르니, 조수가 물러나 더 나아갈 수 없으므로 닻을 내리고 정박하였다. 조흥이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행차의 호송은 도주가 있고, 저희들은 앞길을 검리(檢理)할 일이 있어 먼저 대판(大坂)으로 갑니다.”
하였다. 상사ㆍ종사와 더불어 배 위에서 이야기하였다. 병고는 곧 옛날 복원경(福原京)인데, 여러 섬이 사면을 둘러싸고 가운데 바다가 있으므로 일본 사람들이 중국의 동정호(洞庭湖)에 비긴다 한다. 밤에 달빛은 대낮과 같고 물과 하늘은 한 빛인데, 어가(漁歌)가 서로 화답하고 젓대 소리가 구슬프게 들리니, 경치가 절승하여 사람의 가슴을 시원하게 하였다. 의성이 백주(白酒)와 떡ㆍ귤을 보내 왔으므로 군관ㆍ역관 등에게 나누어 주고, 밤에 배 위에서 유숙하였다.병고에서 서궁촌까지 수로로 50리다.
15일(을축)
흐리고 비 오다가 혹 갬.
밤중에 조수를 이용하여 배를 띄워 노를 저어 행하였다. 노옥촌(蘆屋村)을 지나 점포(店浦) 수리(數里)쯤 앞두고 노옥(蘆屋)의 앞 바다에서 배를 멈추니, 일명 천하기(天河崎)로 이곳 역시 관백의 장입(藏入)하는 땅이었다. 성첩(城堞)과 층루(層樓)가 있고 민호(民戶)도 또한 번성하였다.
평명에 배를 강구(江口)로 옮기니 강구는 곧 점포(店浦)였다. 상사ㆍ종사와 함께 각기 대판에서 보내온 작은 누선(樓船)을 타니 배의 제도가 교묘(巧妙)하여 판벽(板壁)으로 꾸미고 황금을 입혔다. 대개 목판(木板)에 흑칠(黑漆)을 입히고 포진과 기구가 지극히 화려하였다. 그리고 벽에는 단청으로 그림을 그려 사람의 눈을 현란하게 하였다. 물을 거슬러 올라가 좌우를 돌아보니, 갈대는 언덕에 가득하고 기러기가 떼를 지어 나는데, 강 하늘이 막막하고 찬 비가 죽죽 내리니 또한 한 절승한 경치였다. 20여 리를 가니 상선(商船)이 서로 이어 끊이지 않았으며 크고 작은 나무가 양쪽 언덕에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떼[筏]를 지어 강에 띄운 것도 또한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 칠판교(七板橋)를 지나 배 턱에 이르니, 영접나온 인마(人馬)가 언덕을 메웠다. 점포(店浦)로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인가가 즐비하였는데 동쪽 언덕에는 다만 한 줄로 연달았고, 서쪽 언덕에는 여염이 땅을 뒤덮었다. 강물이 제이교(第二橋)의 뒤로 나눠 흘러 별달리 장포(長浦 긴 물가)가 되었는데, 선박(船舶)의 연접한 것과 촌락의 조밀한 것이 또한 그와 같아 동서가 30리, 남북이 10여 리로 시야(視野)가 꽉 찼다.
비가 조금 개기를 기다려 미시경(未時頃)에 대판에서 수 리쯤 떨어진 본원사(本願寺)에 사처를 정했다. 정사년(1617, 광해군 9)에 우리 수신사(修信使 정사는 오윤겸)가 왔을 때에도 또한 이곳에서 머물렀다. 그때에는 절 이름이 아미타(阿彌陀)였는데, 지금 본원(本願)으로 고쳤다 한다. 서쪽으로 큰 시가지(市街地)를 지나니 거리가 이따금 가로 나눠져서 모두 정(井) 자 형으로 반듯반듯하여 사방으로 통달하였으며, 화물(貨物)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백 가지 물건을 모두 구비하였다. 민가(民家)는 60호를 1정(町)으로 삼고, 매정(每町)에 한 이문(里門)을 세워 밤에는 자물쇠를 채우고 지켰다. 옥상(屋上)에는 물통을 예비하고, 집 앞에는 긴 사다리를 세워 화재를 방비하며, 상점에는 매매하는 물건을 문앞에 매달아 알아보기 쉽게 하였다. 언어와 의복은 비록 중국과 같지 않으나, 음식 매매는 중국을 모방한 것이 많았다. 관광하는 남녀들이 길 좌우를 메웠으나 고요하여 떠드는 소리가 없다. 아이들까지도 모두 꿇어앉아 구경하고 감히 어른 앞을 가로막지 않으니, 그 평일 법령이 엄중한 것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사관에 들어온 후 현방ㆍ의성ㆍ조흥이 찾아와 몇 마디 수작한 후 바로 돌아갔다. 대판도 역시 관백의 장입(藏入)하는 땅으로 도전청좌위문(島田淸左衛門)과 구패충우위문(久貝忠右衛門)을 시켜서 지키게 하였다. 그 부관(副官) 말길손좌위문(末吉孫左衛門)과 고서석운(高西夕雲) 등이 와서 접대를 주관하였는데, 찬물은 모두 저자에 사서 올렸으며, 공장(供帳)의 화려한 것과 사후의 공손한 것이 갈수록 더욱 융숭하였다.
점포(店浦) 강구(江口)로부터 오른쪽으로 꺾어져 거의 수십 리를 가면 주길(住吉) 앞 바다에 이르는데, 이곳에는 매년 3월 3일이면 바다가 말라 육지가 된다. 그 넓이는 10여 리나 되는데 원근의 남녀들이 떼를 지어 와 구경한다. 그러나 초 4일 후에는 바닷물이 점점 생기니, 나라 사람들이 괴상한 일이라고 전하여 온다. 강(康)ㆍ박(朴) 두 역관도 일찍이 목격했다 한다.
서궁촌(西宮村)에서 점포(店浦)까지 수로로 50리요, 점포에서 대판까지 강로(江路)로 20리다.
16일(병인)
간혹 흐림. 대판에서 머물렀다. 조흥이 떡과 과일을 보내고, 청좌위(淸左衛)ㆍ충우위(忠右衛) 등도 또한 떡ㆍ과일 등 여러 가지를 보내 왔으므로 일행 원역과 왜통사 등에게 나누어 주었다.
17일(정묘)간혹 흐리다가 밤에 비가 왔다. 대판에서 머물렀다. 행장을 수습하여 작은 배에 옮겨 실리고 별파진(別破陣)ㆍ기패(旗牌) 등에게 시켜 먼저 정포(淀浦)로 보냈으며, 쌀과 잡물은 도주ㆍ조흥 등의 창고에 보관하였다. 각 배에 남게 된 왜 사공에게는 각기 쌀 1석씩을 주고, 우리 사공에게는 한데 합쳐서 쌀 4석과 찬물을 주어 그 뒤처져 있게 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18일(무진)
아침에는 비, 늦게 갬. 평명에 조흥이 직접 사관 앞에 와서 박대근을 불러 말하기를,
“지금은 비록 비가 내리지만, 하늘을 보니 늦게는 반드시 갤 것이오. 인부와 말이 이미 정제되었고 또 중로에 유숙할 만한 곳이 있으니, 날이 늦을 것을 염려 마시고 개이기를 기다려 곧 길을 뜨게 하시오. 저는 앞길에 검찰할 일이 많아 먼저 떠납니다.”
하였다. 곧 일행을 재촉해서 식사를 들게 하고 강 언덕에 나갔다. 세 사신이 각기 전일 타고 온 작은 배를 타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 천ㆍ만교(天滿橋) 두 다리를 지나 비전도(備前島)에 다다르니, 3~4리 앞은 곧 하내주(河內州)ㆍ우치현(宇治縣) 두 고을 물이 합류하는 곳이었다. 남쪽으로 대판성(大坂城)을 바라보니, 층루(層樓)와 비각(飛閣)은 수뢰가 패전할 때에 모두 불타버리고, 이제 다시 공사(工事)를 일으켜 성(城)은 이미 완축되고 목역(木役)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역사(役事)의 거창한 것은 이루 형언할 수 없어 인력으로 이룬 것이 아닌 듯하였다. 성밖에 있는 민가도 그 당시에 또한 모두 탔는데, 이제 이미 복구되어 빈 터가 하나도 없으니, 백성과 물력의 풍부함을 또한 알 수 있다. 성밖에는 곳곳에 조산(造山)이 있고 혹은 구덩이를 메운 곳도 있었으니, 이는 모두 가강이 성을 함락시킬 때에 만든 것이었다. 행장[行李]과 군위(軍威 군대 의장) 등 물건을 여러 배에 나누어 싣고 차례로 나아가는데 예선(曳船)의 왜인들이 천여 명에 가까워 언덕 위에 가득하였고 지나는 동리마다 서로 교대하여 끌었다.
초경(初更)에 평방(平方)에 다다르니, 평방은 곧 하내(河內)의 소속인데, 관백이 왕래할 때 차 마시는 곳이었다. 밤이 깊었으므로 관사로 내려가지 않았다. 대관 등이 숙공(熟供) 올리기를 청하므로, 나는 명일이 기고(忌故)이므로 사양하고 받지 않고 정관(正官) 이하만 받게 하였다. 평방의 옛 이름은 다점(茶店)이다. 집집마다 강 언덕에 누각을 세웠으니, 이른바 청루대제(靑樓大堤)다. 창가(娼家)의 젊은 여자들이 두셋씩 떼를 지어 누각 위에 서서 부채로 사람을 불러 차 마시기를 청한다. 그래서 상인(商人)과 협객(俠客)들이 이곳에 배를 정박하지 않는 자가 없다 한다.달뜬 후에 조흥이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강 비[江雨]는 비로소 개고 달빛은 대낮 같습니다. 이곳은 원래 숙소가 아니니 달 아래 배를 띄우소서.”
하였다. 그 말대로 곧 달빛을 받으며 노를 저어가니 때는 2경이었다.
5경초에 정포(淀浦)에 다다라 날이 밝기를 기다려 관사(館舍)에 드니, 관사도 또한 관백의 다옥(茶屋)이었다. 포(浦)의 왼편에 포루(砲樓)와 성첩(城堞)이 강물을 굽어보고 있으니 곧 송평월중수(松平越中守)가 다스리는 곳이다. 대관 목촌좌위문(木村左衛門)이 와서 지대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남쪽 언덕 위에 큰 건물이 있고 10장(丈) 부도(浮屠 석탑(石塔))를 세웠으니 곧 팔번 대명신(八幡大明神)의 사당이었다. 그 나라 풍속에 팔번(八幡)ㆍ춘일(春日)ㆍ주길(住吉)을 삼영사(三靈祠)의 기도(祈禱)하는 곳으로 삼으니, 팔번은 군사의 출정(出征)하는 것을 주관하고, 춘일은 나라의 큰일에 기도하는 것을 주관하며, 주길은 어린아이의 명 비는 것을 주관하였는데, 백성들이 자못 존신한다 하였다.
포루(砲樓)의 남쪽에 큰 무지개다리[大虹橋]가 있는데, 이는 곧 복견(伏見)을 왕래하는 큰길로, 이른바 경교(京橋)라는 것이었다. 복견은 옛날 평수길(平秀吉)이 살던 곳인데, 병신년 지진으로 함몰한 후에 여염이 태반이나 공허(空虛)해져 다시 옛날의 번성한 모습을 볼 수 없다 한다.정포에서 복견까지 육로로 15리, 복견에서 왜경(倭京)까지 30리, 대판에서 평방까지 강로(江路)로 50리, 평방에서 정포까지 강로로 50리다.
내가 남양(南陽) 원으로 있을 때 꿈에 한 강산(江山)을 유람한 일이 있었는데, 오늘 역람(歷覽)한 것이 완연히 꿈속에서 본 것과 같다. 남양 원에서 체직(遞職)되어 이 사행(使行)으로 오게 된 것이 정해진 명수(命數)임을 비로소 알았다
19일(기사)
개고 혹 눈. 날이 밝은 후 다옥(茶屋)에 내려가 쉬다가 조반을 들었다. 집안에 한 이상한 나무가 있는데 긴 가지가 치렁치렁하여 수양버들과 같았으니 그 이름은 사앵(絲櫻)이고 또 한 나무가 있는데 흰 꽃이 난만하여 한봄 꽃철과 같았으니, 그 이름은 다화(茶花)였다. 그리고 여러 가지 화초를 섞어 심어 앞뒤에 나열하였으니, 모두 우리나라에서 보던 것이었다.
거마(車馬)로 먼저 일행의 짐을 운반하게 하였다. 그리고 조흥이 보내 온 유옥교(有屋轎)를 타고 왜인으로 하여금 메게 하여 사시 초에 육로(陸路)로 발행하였다. 세 행차의 위의(威儀)와 군관(軍官)ㆍ취수(吹手)ㆍ나장(羅將)을 모두 전도(前導)로 삼고 상사 이하가 차례로 행하였다. 20여 리를 지나니, 길가에 한 승원(僧院)이 있는데 이름은 동사(東寺)라 하였다. 교자에서 내려 잠깐 쉰 후 관디[冠帶]를 고쳐 입고 출발하였다. 조흥은 앞을 인도하고 의성은 뒤를 따르니, 정모(㫌旄)와 기치(旗幟)가 10리를 연달았다.
신시(申時)에 왜경(倭京)에 당도하여 대덕사(大德寺) 안에 있는 천서사(天瑞寺)에 사처를 정하니, 곧 그들 국속(國俗)에 이른바 낙양(洛陽)이었다.정포(淀浦)로부터 동사(東寺)에 이르기까지 마을이 서로 연달았는데 모두 대숲 안에 있고, 동서남북 사방을 바라봐도 모두 그러하였다. 동쪽에 한 산이 있는데 이름은 애탕(愛宕)으로 곧 왜경의 진산(鎭山 도읍의 뒤에 자리잡고 있는 산)이다. 이 산의 남쪽에 또 산 하나가 있으니, 곧 혜일산(惠日山)이다. 동복사(東福寺)ㆍ대불사(大佛寺)가 모두 그 아래에 있어, 봄에 꽃이 만발하면 도인(都人)의 관광하는 곳이 된다 한다.
동사(東寺)에서 대덕사(大德寺)까지 20리는 모두 상가(商街) 가운데로 지나왔는데, 인가의 조밀함이나 화물의 산적(山積)함이나 남녀의 분답(紛沓)한 것이 대판보다 10배가 되었다. 거리는 반듯하여 모두 정(井) 자와 같았는데, 바로 난 거리는 정(町)이라 이르고, 가로 난 거리는 통(通)이라 하였다. 정(町)과 통(通)이 서로 교착(交錯)되어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 관광하는 자가 길가에 줄을 지어 좌우를 메웠으며, 심지어 입이 마르도록 찬탄(讚歎)하고 손을 모아 축복하는 자도 있었으니, 대개 존귀(尊貴)하게 여기는 것이었다.
천황(天皇)의 궁궐은 시가지(市街地)의 동쪽에 있는데, 그 앞을 지나니 분장(粉墻)만 바라보일 뿐이었다. 그 나라 사람들이 내리(內裏)라 칭한다 하였다. 4백 년 전에는 나라의 권세와 크고 작은 정령(政令)이 모두 천황으로부터 나왔는데, 원뢰조(源賴朝)가 찬탈(簒奪)한 후부터 정사에 간여하지 않고 관백으로 하여금 총섭(摠攝)하게 하였다. 대대로 왕위(王位)를 장자에게 전하고 그 나머지 자녀는 모두 중[僧尼]으로 삼아 사찰(寺刹)에 흩어져 살게 하고, 오직 의복과 음식만 부귀를 누릴 뿐이었다. 매월 보름 전에는 목욕 재계하고 고기와 훈채(葷菜 파ㆍ마늘ㆍ생강 등 냄새 나는 채소)를 먹지 않으며, 촛불을 밝히고 밤새도록 꿇어앉아 하늘에 기도 올리고, 보름 후에는 평인과 다름없이 고기를 먹고 잠을 자며 좌우 시종(侍從)과 더불어 종일 희학(戲謔)하는데, 제기 차기와 바둑 두는 것 등의 잡기 같은 것도 모두 천황의 궁중에서 익혔다 한다. 관백이 멀리 강호에 있으므로 판창주방수 중종(板倉周防守重宗)으로 하여금 왜경을 지키게 하였는데, 우리나라의 한성 판윤(漢城判尹)과 같다. 접대하는 일을 주관하여 그 하인을 시켜 관사 아래에서 사후하게 하였다.
대덕사(大德寺)에 당도하기 전 몇 리 지점에서 한 여인이 관광하는 가운데 끼어 통곡하며 말하기를,“나는 전라도 창평(昌平)에 사는 사족(士族)의 딸인데, 사로잡혀 이곳에 온 지 세월이 이미 오래입니다. 고향 생각이 간절하나 돌아갈 기회가 없으니, 행차 가운데 창평 사람이 있으면 고향 소식을 묻고자 합니다.”
하였다. 사족의 딸로서 몸을 더럽히고 절개가 이지러졌으니 금수와 다를 것이 없으나, 고향 생각하는 마음은 지극한 정에서 나와, 고향 사람을 찾아 집 소식을 묻고자 하니, 또한 가긍하다.
대덕사는 비록 도시의 여염 가운데 있으나 용보산(龍寶山) 한 모퉁이에 깊숙이 있어 적연히 떠드는 소리가 없으며, 절의 경내(境內)가 광활하여 그 안에 있는 크고 작은 사찰이 무려 수십 채가 되었다. 대문에서 천서사(天瑞寺)까지도 몇 마장이 되었는데, 솔ㆍ수기[杉] 등 교목(喬木)이 사면을 둘러 있고 종려(棕櫚)나무가 뜰에 열지어 있었다. 그리고 우북한 대[叢筠]가 동산에 가득하였으며, 기타 등자ㆍ감귤ㆍ동청(冬靑) 나무가 없는 곳이 없었다. 천서사는 옛 관백 직전신장(織田信長)이 창건(創建)한 것인데, 사승(寺僧)이 지금까지 잿밥[僧飯]을 공양하여 우리나라의 원당(願堂)과 같다 한다.정포에서 대덕사까지 육로로 50리다.
20일(경오)
간혹 흐림. 처음으로 된서리가 내렸다. 대덕사에서 머물렀다. 현방ㆍ의성이 일시에 찾아와 말하기를,
“앞길의 참소(站所)에서 벌써 기다리고 있으며, 이곳에서는 의례 수일 밖에 머무르지 못하므로 23일이나 25일에 발행하려 하오니, 행차의 하인과 짐 가운데 두고 갈 것과 가지고 갈 것을 미리 정하여 전기(前期)해서 정돈하심이 어떠합니까?”
하므로, 대답하기를,“행차는 오랫동안 길 위에 있었으므로 별로 정리할 것이 없으니, 비록 속히 발행하더라도 또한 불가할 것이 없다.”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사로잡혀 온 사람들의 쇄환하는 일은 그대들의 주선만 믿고 있으니, 범연히 넘기지 말고 각별히 힘써 도모하라.”
니, 대답하기를,“전일에 이미 명을 받았으니, 감히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바로 물러갔다. 일본의 역서(曆書)는 열두 달의 대소가 우리나라 역서와는 차이가 있어 일본에서는 오늘이 19일이라 하였다.
21일(신미)
간혹 흐리고, 아침에 잠깐 비가 왔다. 대덕사에서 머물렀다. 조흥이 밀감을 보내왔다. 현방이 동래(東萊)부산(釜山)에 보낼 서계초(書契草)가 완료되었다 하여 역관에게 보내어 사신에게 돌려 보이게 하였다. 대개 세견선(歲遣船) 서계 가운데, 사신이 무사히 왜경에 당도하고 장차 관동(關東)으로 떠난다는 뜻이 약간 언급되어 있었다.
일행의 지공을 왜경으로부터 판출(辦出)하였는데 모두 건량(乾糧)으로 바쳤다. 세 사신은 매일 각 1백 수두(手斗)씩, 당상 역관은 매일 각 50수두씩, 정관(正官)은 매일 각 30수두씩, 중관(中官)은 매일 각 15수두씩, 하관(下官)은 매일 각 5수두였는데, 일용과 찬물은 모두 이것으로써 교환하여 쓰게 하고, 오직 시탄(柴炭)만은 날마다 보내주었다.
22일(임신)
간혹 흐림. 대덕사에서 머물렀다. 아침에 칠위문이 박대근 등을 찾아 보고 말하기를,
“관백의 사자(使者)가 천황에게 문안을 왔다가 오늘 아침에 들어와 말하되, ‘관백이 사신의 행차가 왔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여, 행차가 만약 강호(江戶)에 당도하면 곧 명(命)을 전하게 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만일 그 말과 같다면 회정(回程)이 반드시 세전(歲前)에 있을 것이오니, 심히 다행한 일입니다.”하므로, 박(朴) 역관이 말하기를,
“전일의 사신 행차에는 판창(板倉)이 의례로 즉일에 와서 보았는데, 지금은 며칠이 지났건만 아직 그림자도 보이지 않으니, 어찌 전일의 규례와 다른가?”하니, 대답하기를,
“공의 말이 정히 옳습니다. 판창 역시 즉시 와 보는 것이 예절에 합당한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나, 연달아 사고가 있고 또 관백의 사자가 이제 들어와 접대하기에 겨를이 없으므로 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 말로써 풍전(豐前)에게 말하겠습니다.”
하였다. 풍전은 곧 조흥이었다.
23일(계유)
흐림. 대덕사에서 머물렀다. 부산 훈도(訓導) 최의길(崔義吉)이 박대근에게 부치는 서신을 대마도 사람이 와서 전하는데, 10월 29일에 부친 것이었다. ‘홍득일(洪得一)은 동래 부사, 민여검(閔汝儉)은 울산 부사, 최현(崔晛)은 대사간이 되었고, 그 외의 서울 소식은 근일 서울 장사꾼의 왕래가 없어 듣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만 리 타국에 와서 고국의 소식을 들으니, 비록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하나 또한 족히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조흥이 밀감 한 광주리를 보내 왔으므로 일행의 원역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로잡혀 온 사람으로 이성립(李成立)ㆍ김춘복(金春福)이란 자가 있는데, 일찍이 강(康)ㆍ박(朴) 두 역관과 친분이 있으므로 술을 가지고 찾아왔다. 이어서 말하기를,“조선이 사로잡혀 온 사람을 비록 쇄환하기는 하나 대우를 너무 박하게 한다 하는데, 사로잡혀 온 것이 본디 제 뜻이 아닌데, 이미 쇄환했으면 어째서 이같이 박대하오.”하므로, 두 역관이 반복하여 변론하였으나 오히려 믿지 않고, 또 말하기를,
“우리들이 모두 환자(宦者)로서, 일찍이 북정전(北政殿)에 있어 사령(使令) 노릇을 했습니다. 남충원(南忠元)의 딸과 며느리도 또한 그곳에 있었는데 모두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9월에 북정전이 작고하여 이제는 의탁할 곳이 없으니, 마땅히 관백의 분부를 기다려 거취를 정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성립은 곧 무장(茂長) 사람이요, 김춘복은 진주(晉州) 사람으로 일찍이 사직동(社稷洞)에 사는 내관(內官)의 양자가 되었다가 임진왜란 때에 사로잡혀 왔다 하며, 북정전은 곧 수길(秀吉)의 본처(本妻)라 하였다.
저녁에 작위(爵位)가 높은 천황의 궁인(宮人)이 많은 수종(隨從)을 데리고 우리나라의 인물과 위의(威儀)를 구경하기 위하여 궁중으로부터 왔는데 머리를 싸고 얼굴을 가려 복색(服色)이 이상하였다. 사후하는 왜인들도 또한 누구인지 알지 못하여 그 작위를 물으니, 팔조전(八條殿)이라 하였다. 이는 반드시 천황의 가까운 친족일 것이다. 해지기를 기다리며 문을 닫으라고 간청하더니, 각성(角聲)을 듣고서야 물러갔다.저녁에 비가 왔다. 밤에 종사와 더불어 상사의 관소(館所)에서 담화하였다.
24일(갑술)
비 오다 개다 하였다. 대덕사에서 머물렀다. 의성이 밀감 한 광주리를 보내 왔으므로 일행 원역에게 나누어 주었다. 낮에 판창(板倉)이 공복(公服) 차림으로 보러 오니, 의성과 조흥이 맨발로 분주하게 앞을 인도하여 들어왔다. 상사 이하가 관디[冠帶]를 갖추고 상견례(相見禮)를 행하였다. 판창이 말하기를,“사신께서 멀리 오시느라 노고가 심하지 않으십니까?”
하므로, 대답하기를,“두 나라가 사이 좋게 지내기 위해 사자를 보내어 빙례(聘禮)를 닦으니 발섭(跋涉)하는 수고로움은 직분에 당연한 일입니다. 감히 노고를 말하리까?”
하고, 잠시 자리에 나가 몇 마디 수작하다가 자리를 파하였다. 그 사람이 나이 젊고 우둔하여 예모(禮貌)를 알지 못하여 접견하는 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므로, 조흥이 옆에서 일일이 지휘하니 또한 가소로웠다. 정사년(1617, 광해군 9) 사행(使行) 때에는 그 아비 승중(勝重)이 판창에게 접대의 일을 주관하도록 하였는데, 승중이 연전에 죽었으므로 그 벼슬을 승습(承襲 이어받은 것)하여 일을 보살핀다 한다.
또 천황의 궁인(宮人)으로 자칭 천황의 친 아우라는 자가 있어, 의위(儀衛)와 복종(僕從)을 앞뒤에 옹호하고 역관이 있는 곳에 들어와 구경하고 풍악을 듣다가 갔는데, 의용(儀容)과 의복의 제도는 어제 본 자와 다름이 없다고 한다.
어떤 차 심부름하는 중[茶僧]이 역관에게 말하기를,“왜경과 복견의 사이에 소번산(小幡山)이 있는데, 수뢰의 잔당(殘黨)이 여러 곳으로 흩어져 중이 되기도 하고 농부가 되기도 하였지만 아직도 수백 명이 이 산으로 도망해 들어와서 인가(人家)를 약탈하고 도당(徒黨)을 모은 것이 거의 5백~6백 명이나 됩니다. 관백이 군사를 일으켜 쳐 없애려 해도 간웅(奸雄)이 때를 타서 일어날까 염려되어 아직 제거하지 않고 있습니다.”하였다.
25일(을해)
눈. 대덕사에서 머물렀다. 오후에 현방이 찾아와 이야기가 일본 고적에 미치자, 말하기를,
“근강주(近江州)의 비파호(琵琶湖)와 준하주(駿河州)의 부사산(富士山)은 모두 옛날부터 있던 것이 아니요, 하루 아침에 홀연히 생긴 것이며, 호수 가운데에 또 죽생도(竹生島)가 있는데 명신(明神 밝은 신령)이 바다에서 솟아 나오고 푸른 대[竹]가 하룻밤 사이에 생겼습니다. 지금까지 신전(神殿) 안에 있는데 푸르고 푸르러 마르지 않습니다. 또 나라에 큰 재앙이 있으면 장군악(將軍岳)이 진동하고 남도 대직관목상(南都大職冠木像)이 파열되어 피고름이 절로 흘러나옵니다. 이 모두가 왜사(倭史)에 실려 있습니다.”
하였다. 판창이 하정(下程)으로 생선ㆍ오리ㆍ떡ㆍ과일ㆍ술을 보내 왔으므로 곧 일행 원역에게 나누어 주었다.
26일(병자)
눈, 혹 맑음. 하인 1백 14인을 대덕사에 머물러 있게 하고 군관 노세준(盧世俊)ㆍ김사위(金士偉), 한학(漢學) 송예수(宋禮壽), 화원(畫員) 이언홍(李彥弘)을 시켜서 영솔하게 했는데 간사하고 지나친 일을 엄금하게 하였다. 그리고 각색 차비(各色差備) 3백여 명을 추려내어 이른 아침을 먹고 강호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왜경의 시가지를 경유하여 삼조교(三條橋)를 지나 미시(未時)말에 대진에 다다르니, 대진은 곧 근강주(近江州) 소속으로 태수 소야종좌위문 정측(小野宗左衛門貞側)이 다스리는 곳이었다. 선소주장 관소(膳所主將管沼)와 직부정 정방(織部正定芳)으로 접대하는 일을 같이 주관하게 하고, 대관 굴등병위(堀藤兵衛)ㆍ관소병루(管沼柄漏) 등으로 하여금 지공(支供)을 맡아보게 하였다. 종좌위문(宗左衛門)은 녹봉 1만 석을 받고, 직부정(織部正)은 녹봉 3만 석을 받는 사람이었다. 근강주(近江州)는 땅이 넓고 사람이 많아 세곡(稅穀) 받는 것이 7백 90만 석에 이르므로 장관(將官) 30명이 한 고을을 나눠 지킨다고 한다.
오는 길에 여러 시체(屍體)를 십자가(十字架)와 같은 나무에 온몸을 결박하여 별도로 길가에 세웠는데, 흉측한 형상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 연유를 물으니, 말하기를,“이들은 모두 남의 재물을 도둑질하고 남의 목숨을 해친 자이므로 이 형벌을 가하는데, 창과 칼로 난자(亂刺)하고 까마귀나 솔개 밥이 되게 하며, 뼈는 바람에 날립니다.”한다. 법이 이같이 가혹한 것은 일본의 풍속이었다.이날은 40리를 행하였다.
27일(정축)
맑음, 아침에 눈이 날렸다. 조반 후에 발행하여 몇 리쯤 지나니 큰 호수 하나가 있었다. 비파호(琵琶湖)였다. 호수는 거울같이 맑고 끝 없이 넓은데, 조각 배는 점점이 뜨고 돛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호수 언덕을 따라 수십 리를 행하여 초진촌(草津村) 뇌전교(瀨田橋)를 지나니 아득한 평야가 모두 논[水田]이었는데, 호수를 끌어 관개(灌漑)하여 토질이 매우 기름졌다.
미시(未時)말에 삼산(森山)에 다다르니, 삼산은 일명 수산(守山)이라고도 하는데, 또한 근강주(近江州) 소속이며 서천관음사 조현(西川觀音寺朝賢)이 다스리는 곳이다. 중[僧]을 태수로 삼았으므로 관음사(觀音寺)라고 부르고, 녹봉 5만 석을 받는다 한다. 대관 석하오부병위(石河五部兵衛)와 서천손좌위문(西川孫左衛門)이 접대를 주관하였다. 대진(大津)으로부터 삼산(森山)까지는 푸른 솔이 길 좌우에 연달았고, 도로는 숫돌처럼 편편하였다. 초진(草津)에 당도하여 북쪽으로 한 성을 바라보니, 층루(層樓)와 분첩(粉堞)이 반공(半空)에 솟아 호수를 굽어보고 있다. 한 지방의 웅진(雄鎭)으로 곧 선소주장(膳所主將)이 사는 곳이었다. 동정호(洞庭湖)의 악양루(岳陽樓)를 일찍이 눈으로 보지는 못했으나, 경치의 절승함과 기세의 웅장함은 아마 반드시 이보다 더하지 못할 것인데, 애석하게도 오랑캐 땅에 있어서 문인과 재사들이 그 사이에 품제(品題 평론하는 것)하지 못하게 되었다.강우성이 말하기를,“간밤에 대진(大津) 사람과 더불어 담화하였는데, 한 사람의 말이 ‘조선 사람 이문장(李文長)이 방금 왜경에서 점을 쳐 주고 생계를 하고 있는데, 사로잡혀 온 사람들을 공갈하여 말하기를, ‘조선의 법이 일본만 못하고 생계가 심히 어려워 살 수 없으니,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조금도 이로울 것이 없다.’ 하며, 만 가지 좋지 않은 말로 두루 다니며 유세(遊說)하여 그 본국을 흠모하는 마음을 끊어버리게 하므로 사로잡혀 온 사람들이 모두 문장의 말에 유혹되어 나가려 하지 않는다.’ 합니다. 또 그 마음 쓰는 것이 이와 같으므로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혹 심문을 당할까 염려하여 숨어 나오지 않습니다.”
하였다. 이른바 문장이란 자는 어느 지방에서 왔는지 알 수는 없으나 이와 같은 간사한 무리가 다른 나라에서 날뛰니, 심히 불행스럽고 통분한 일이다.이날은 50리를 행하였다.
28일(무인)
저녁에 흐림. 새벽에 발행하여 장원(長原)ㆍ소남(小南) 등의 마을을 지나 삼부천(三府川)을 건너 사시(巳時)에 팔번산(八幡山)에 당도하니, 곧 마도 사람이 써 보인 노정기(路程記)에 말한 ‘무좌(武佐)’라는 곳이었다. 이곳도 또한 근강주 소속이며, 팔번 태수 소굴원강수(八幡太守小堀遠江守)가 다스리는 곳이다. 녹봉 3만 석을 받는다 하였다. 대관 화전칠좌위문(和田七佐衛門)과 정수십조(井狩十助) 등 두 사람이 접대를 주관하였는데, 사후와 공급이 지극히 정성스러웠다.
점심 든 후에 발행하여 안토령(安土嶺)에 당도하니, 이곳은 옛날 신장(信長)이 진을 쳐서 동로(東路)를 파수하던 곳으로 성첩(城堞)의 유지(遺址)와 여염의 옛터가 모두 완연히 남아 있었다. 호수가 산밑까지 들어와 고깃배가 바람을 따라 오가며, 물고기와 기러기를 길들여 불러오고 놓아보내는 것을 사람의 임의로 하니, 또한 하나의 기관(奇觀)이었다. 안토봉(安土峯)의 맨 꼭대기에 조계사(曹溪寺)가 있는데 절 안에는 신장(信長)의 위패(位牌)가 있다 한다.
길을 재촉했으나 견여(肩輿) 메는 왜인들이 진흙수렁을 헤쳐 나가므로 걸음걸이가 자유롭지 못하여 해가 저문 뒤에 좌화산(佐和山) 종안사(宗安寺)에 당도하였다. 절 뒤에 언근산(彥根山)이 있으니, 곧 이곳의 진산(鎭山)이었다. 여기도 또한 근강주 소속으로 태수 정이소부두 등원 직효(井伊掃部頭藤原直孝)가 다스리는 곳인데, 가강의 외손이요, 지금 관백의 형이다. 녹봉 25만 석을 받는다 하였다. 이 사람도 또한 강호에 있었는데, 수신사(修信使)의 지대를 위하여 관백이 보냈으므로 일전에 이곳에 왔으며, 사행이 지나간 뒤에는 강호로 돌아간다 하였다. 대관 강본반조 선취(岡本半助宣就)와 목역우경조 수안(木役右京兆守安)이 와서 지공(支供)을 주관하며, 직효(直孝) 또한 미복(微服)으로 친히 와서 간검(看檢)하므로, 공장(供帳)의 화려한 것과 사후의 공손한 것이 다른 참소(站所)보다 각별하였다.
사로잡혀 온 두 여인이 스스로 양반의 딸이라 하며, 군관들을 찾아와 고향 소식을 묻고자 하는데, 사로잡혀 온 지가 이미 오래이므로 우리나라 말을 모두 잊어 말을 통하지 못하고 다만 부모의 존몰(存沒)을 물은 다음 눈물만 줄줄 흘릴 뿐이었다. 귀국의 여부(與否)를 물으니, 어린 아이를 가리킬 뿐이었다 한다. 이는 아들이 있으므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수산(守山)에서 팔번산(八幡山)까지 40리요, 팔번산에서 좌화(佐和)까지 70리다.
29일(기묘)
아침에 흐림. 평명에 출발하여 7~8리를 지나 절통령(絶通嶺)을 넘고 또 몇 리를 행하여 마침령(摩針嶺)을 넘으니, 두 고개가 모두 높고 험하여 인마(人馬)가 헐떡거려 간신히 넘었다. 맨 꼭대기에 가마를 멈추고 멀리 평야를 굽어보니, 근강(近江)의 호수가 수백 리 사이에 가득하였으며, 좌화성(佐和城) 가운데에는 여염(閭閻)이 즐비하여 그 번성함이 대판만 못하지 않았다.
오시에 금수(今須)에 당도하니, 이곳은 미농주(美濃州) 소속으로 관백의 장입(藏入)하는 땅인데, 미농주가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목역우경조 수안(木役右京兆守安)이 좌하(佐和)에서 와 접대를 주관하였다. 미시(未時)에 발행하여 관원(關原)을 지나니, 이곳은 가강이 휘원(輝元)과 싸워 승리한 곳인데, 강우성(康遇聖)이 일찍이 사로잡혔을 때에 가강의 군중에서 서로 전쟁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한다.
대원(大垣)에 10여 리 못 미쳐 와서 날이 저물었다. 왜인이 등불로 앞을 인도하여 초경(初更)에 대원에 다다라 화림원(花林院)에 사처를 정하니, 이곳은 미농주 지방으로 강부내선 장성(岡部內膳長盛)의 식읍(食邑)인데, 읍리(邑里)의 번성함이 비록 좌화(佐和)에는 미치지 못하나, 또한 거진(巨鎭)이었다. 미농(美濃)의 세곡이 총 20만 석인데, 10만 석은 장성(長盛)이 받고, 10만 석은 장군 표하(標下)에 있는 세 장수가 받는다 한다. 봉행(奉行) 강전장감(岡田將監)과 덕장좌마(德長左馬) 등이 접대를 주관하였다. 좌화산(佐和山)에서 금수(今須)까지 70리, 금수로부터 대원(大垣)까지는 50리다.
주방 고직(廚房庫直) 1인이 병이 위중하므로 마도 왜인을 시켜 대덕사로 호송하여 치료하게 하고 행차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게 하였다.
30일(경진)맑음. 날이 밝은 후에 발행하여 좌도하(佐渡河) 부교(浮橋)를 지나 묵가(墨街)에 이르러 여염의 점사(店舍)에 사처를 정하니, 또한 미농주 지방으로 장군의 장입(藏入)하는 땅이었다. 강전장감(岡田將監)이 대원(大垣)에서 와 지대(支待)를 주관하였는데, 이 사람은 임진왜란 때에 평행장(平行長)을 따라 평양(平壤)에 왕래하던 자였다. 스스로 말하기를,
“아내는 조선 사람인데, 아들을 낳아 벌써 장성하여 지금 강호에 가 있습니다.”
하며, 몸소 사후(伺候)하기를 극히 공손하게 하였으며, 접대하는 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정성을 다하였다.
점심 든 후 바로 떠나 몇 리를 행하여 제일 부교(第一浮橋)를 건너니 이름이 묵가천(墨街川)이었다. 또 몇 리를 나가 계천 부교(界川浮橋)를 건너니 곧 미농(美濃)ㆍ미장(尾張) 두 고을의 경계였다. 또 10리쯤 행하여 큰 부교 하나를 건너니, 이름이 흥천(興川)이었다. 부교의 제도가 지극히 정묘하여, 배는 모두 새로 만든 것으로 크고 작기가 한결같고, 좌우의 큰 줄은 모두 쇠[鐵]로 되어 그 크기가 다리만 하였다. 강의 양쪽 언덕에는 모두 지키는 자가 있어 지나가는 말[馬]이 판자를 마구 밟지 못하게 하였다. 관광하는 남녀들이 길가를 메우고, 심지어는 배를 타고 바라보는 자가 강의 아래위를 뒤덮었으며, 귀한 집 부녀들이 가마를 타고 길 양쪽에 열지어 있는 자가 또한 얼마인지 알 수 없으니, 참으로 장관이었다. 역관 등이 왜인에게 물으니, ‘모두 삼하(三河)ㆍ미농(美濃)ㆍ미장(尾張) 등 먼 지방 사람들인데 관광하기 위하여 전기(前期)하여 와서 머물렀다.’고 한다.
황혼 후에 명호옥(名護屋)에 다다르니, 인가가 곳곳마다 등을 달지 않은 집이 없고 또 횃불로 길을 비추어 밝기가 대낮과 같았다. 대광원(大光院)에 사처를 정하니, 이곳은 미장주(尾張州) 지방으로 덕천미장 중납언 의진(德川尾張中納言義眞)이 관할하는 곳이었다. 의진(義眞)은 수충(秀忠)의 둘째 아우요, 지금 장군의 숙부이며, 나이는 지금 25세요, 녹봉 70만 석을 받는다 한다. 봉행(奉行) 등전민부경 안중(藤田民部卿安重)이 와서 지공(支供)의 일을 주관하였다. 미장(尾張) 지방은 토품이 기름지고 촌락이 번성하여 성중(城中)의 인가가 수만여 호나 되고 장창(長槍)과 이검(利劍)이 모두 이곳에서 생산된다 한다.
사로잡혀 온 사람 박승조(朴承祖)라는 자가 찾아와 뵙고, 스스로 운봉(雲峯) 사는 양반의 아들이라 일컬으며,“정유년에 사로잡혀 와 지금 미장성주 의진(尾張城主義眞)의 마부(馬夫)로 있는데, 본국으로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사신의 행차가 돌아가실 때에 같이 갈까 합니다. 그리고 아내도 또한 서울 남대문 부근에 살던 사람이니, 마땅히 일시에 데리고 가야겠습니다.”
하였다. 또 두 사람이 와서 뵙는데, 하나는 울산(蔚山) 사람이요, 하나는 진해(鎭海) 사람으로, ‘임진년에 사로잡혀 와 또한 의진의 종이 되어 방금 교사(敎師)로서 사람에게 조총(鳥銃)을 가르친다.’ 하였다. 운봉 사람은 그 말이 거짓 같으나 자못 정녕하게 믿음을 보이므로 돌아갈 때에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해 보냈다.
대원(大垣)에서 묵가(墨街)까지 25리요, 묵가에서 명호옥(名護屋)까지 75리다.
[출처] 동사록(東槎錄) 1 |작성자 사나이
동사록(東槎錄) [1]
조선 / 우리역사
2010. 3. 3. 13:06
https://blog.naver.com/ohyh45/20101418451
번역하기동사록(東槎錄) [1]
조선 중기의 문신 도촌(道村) 강홍중(姜弘重 1577(선조10) ~ 1642(인조20))이 통신 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다녀와서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사행일록(使行日錄)이다. 이 사행은 강호막부(江戶幕府)의 삼대 장군(三代將軍) 가광(家光)이 관백(關白)에 취임할 때에 회답 사행(回答使行)으로 일본에 건너가 하례(賀禮)를 하고 국교를 더욱 굳게 맺어 수백 년 동안 두 나라가 평화를 유지하도록 하였다.
당시 일본의 풍토ㆍ민속과 명승ㆍ고적, 그리고 정치ㆍ직제(職制)와 성첩ㆍ요새(要塞) 등에 이르기까지 소상하게 다루었다. 특히 임란왜란 후 외교 관계에 있어 귀중한 연구 자료가 된다.
천계 갑자년일본 회답사 행중좌목(天啓甲子日本回答使行中座目)
천계 갑자년 : 천계는 명 희종(明憙宗)의 연호. 1624, 인조 2년
상사(上使) 형조 참의 정입(鄭岦) 부사(副使)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 강홍중(姜弘重)
자(字)는 임보(任甫). 정축년(1577, 선조 10)에 출생. 선조 계묘년(1603, 선조 36)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선조 병오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강원 감사(江原監司)에 이름.종사관(從事官) 예조(禮曹) 정랑(正郞) 신계영(辛啓榮) 역관(譯官) 가선(嘉善) 박대근(朴大根) 이언서(李彥瑞) 통정(通政) 홍희남(洪喜男) 상통사(上通事) 전 정(正) 박언황(朴彥璜) 강우성(康遇聖) 전 직장(直長) 이형남(李亨男) 장선민(張善敏) 한학(漢學) 송예수(宋禮修) 정충헌(鄭忠獻) 사자관(寫字官) 이성국(李誠國) 화원(畫員) 이언홍(李彥弘) 의원(醫員) 곽금(郭嶔) 황덕업(黃德業) 서사(書寫) 김신남(金信男) 별파진(別破陣) 유태길(劉太吉) 김신종(金信宗) 포수(砲手) 백사길(白士吉) 김덕련(金德連) 상사 군관(上使軍官) 절충(折衝) 노세준(盧世俊) 전 부정(副正) 이동룡(李東龍) 전 경력(經歷) 정국빈(鄭國彬) 전 감찰(監察) 김현달(金顯達) 전 만호(萬戶) 이영서(李榮瑞) 내금장(內禁將) 송영(宋嶸) 사과(司果) 이안농(李安農) 부사 군관(副使軍官) 절충(折衝) 김사위(金士偉) 전 주부(主簿) 지학해(池學海) 전 선전(宣傳) 강덕취(姜德聚) 강수(姜綬) 전 만호(萬戶) 남궁도(南宮櫂) 정득선(鄭得善) 한량(閒良) 강홍헌(姜弘憲) 종사관 군관(從事官軍官) 출신(出身) 강의(姜毅) 정몽득(丁夢得) 방진(方璡)
8월
20일(임인)
맑음. 평명(平明)에 대궐로 나아가니, 상사(上使) 정입(鄭岦)과 종사관(從事官) 신계영(辛啓榮)이 벌써 의막(依幕 임시로 거처하는 곳)에 나와 있었고, 대궐 안 여러 아문(衙門)에서 모두 하인을 보내어 문안[存問]하였다. 숙배(肅拜)한 뒤에 상이 편전(便殿)에 납시어 세 사신(使臣)을 인견(引見)하고 일행을 단속하는 것과 사로잡혀 간 사람의 쇄환(刷還)하는 일을 간곡히 하교하였다. 그리고 호피(虎皮) 1장, 궁자(弓子) 1부(部), 장전(長箭)ㆍ편전(片箭) 각 1부, 유둔(油芚)을 갖춘 통아(筒兒) 2부, 후추[胡椒] 1두, 백첩선(白貼扇) 3자루, 칠별선(漆別扇) 5자루, 납약(臘藥) 1봉을 각각 하사하므로, 공손히 받고 배사(拜辭)한 후 물러나왔다. 좌의정과 봉래(蓬萊 정창연(鄭昌衍)) 두 정승에게 들러 작별 인사를 하고 집에 돌아와 사당에 뵙고 어머니 앞에 배사(拜辭)하니, 일가 친척의 부인들이 모두 와서 송별하였다. 지나는 길에 곽 첨정(郭僉正)ㆍ이 부정(李副正) 두 분에게 들러 인사를 하고 이정(離亭 작별하는 정자)에 이르니, 위로는 명공 거경(名公巨卿)에서 아래로는 평소에 친분이 있던 사대부까지 거의 다 와서 전별하였다. 이날은 도저동(桃渚洞) 삼거리에서 유숙하였다.
21일(계묘)맑음. 평명에 조반을 재촉해 먹고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들어가니 사인(舍人) 이명한(李明漢)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월사상공(月沙相公 이정귀(李廷龜))과 김 순천 지남(金順天止男 순천은 지명. 순천 원이었음) 영공이 연달아 이르렀다. 종사관(從事官)이 또 뒤쫓아와서, ‘상사(上使)는 벌써 날이 밝기 전에 떠났다.’ 하였다.
사인소(舍人所)에서 판비(辦備)를 내어 크게 기악(妓樂)을 잡히고 주연을 베풀어, 잔이 오고 가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취하게 되었다. 연릉댁(延陵宅)에 들렀는데, 취하여 한 마디 말도 수작하지 못하고 바로 일어났다. 군무(君懋)ㆍ이정(而靜)ㆍ백서(伯瑞) 형제와 조유지(趙綏之)가 뒤따라 와서 작별 인사를 하였다. 한강에 이르니 백규(伯圭) 형제와 성원(聲遠)ㆍ습지(習之)ㆍ정 직장(鄭直長 직장은 벼슬)이 와서 작별하였으며, 성아(星兒 아들 성(星)을 이름)도 뒤따라와 울며 송별하였다. 드디어 여러 친구와 작별하고 강을 건너니 급()ㆍ전(琠) 두 아들과 홍여경(洪汝敬)이 뒤를 따랐다.
양재참(良才站)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가평(加平) 군수(郡守) 이안눌(李安訥)이 지대차(支待次) 나와 있었고, 윤응성(尹應聖)이 그 산소에서 와 보았다. 교촌(板橋村)에서 말을 쉬이는데 날이 저물었다. 양근(楊根) 군수(郡守) 이의전(李義傳)이 지대차 나와 있었다.
황혼이 깔린 뒤에 횃불로 앞을 인도하고 길을 떠나 2경(二更 오후 9시~10시)에 용인현(龍仁縣)에 이르러 관사(官舍)에 사관(舍館)을 정하였다. 진위(振威) 현령(縣令) 김준(金埈)이 지대차 나왔고, 주인 원[主倅] 안사성(安士誠)이 보러왔다. 강덕윤(姜德潤)과 이격(李格)이 당성(唐城)에서 술을 가지고 보러왔고, 안성(安城) 군수(郡守) 김근(金瑾)과 경안(慶安) 찰방(察訪) 이대기(李大奇)는 차원(差員)으로 수행(隨行)하였다.
22일(갑진)
맑음. 조반 후에 길을 떠나 양지(陽智)에서 유숙하였다. 주인 원[主倅]은 근친(覲親)하기 위하여 시골에 내려갔다 한다. 수원부(水原府)에서 지대를 맡았는데, 부사(府使)가 체직(遞職)되어 오지 않았으므로 지공하는 범절이 아주 형편없었다.
23일(을사)
간혹 흐림. 아침에 떠나 승보원(承保院) 앞 들에서 점심 먹었다. 이천(利川) 부사(府使) 이성록(李成祿)ㆍ함양(咸陽) 현감(縣監) 이여항(李汝恒)이 지대차 출참(出站)하였다. 저녁에 죽산(竹山)에 다다르니, 주인 원이 보러 오고, 안산(安山) 군수(郡守)는 지대차 나와 있었다.
24일(병오)
비. 일찍 조반을 마치고 길을 떠나 10여 리를 가니, 비가 점점 퍼부어 일행들이 모두 흠씬 젖었다. 무극점(無極店)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지평현(砥平縣)에서 나와 기다리고 있었으나, 공궤(供饋)하는 범절이 더욱 형편없었다. 탄박장(汝呑薄庄)을 지나 팔송정(八松亭) 옛터에서 잠깐 쉬었다. 옛날 일을 추억하니, 자연히 감구(感舊)의 회포가 새로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손응주(孫應柱)ㆍ김국충(金國忠)이 보러 왔다.
저녁에 용안역(用安驛)에 다다르니, 충주(忠州) 목사(牧使) 정효성(鄭孝誠)ㆍ단양(丹陽) 군수(郡守) 권신중(權信中)ㆍ문의(文義) 현령(縣令) 이경인(李景仁)ㆍ청안(淸安) 현감(縣監) 김효성(金孝成)ㆍ진천(鎭川) 현감(縣監) 권응생(權應生)이 모두 지대차 나와 있었고, 이정림(李挺林)ㆍ이광윤(李光胤)ㆍ이건(李健)이 보러 왔으며, 남궁희(南宮曦)ㆍ어취흡(魚就洽)이 제천(堤川)으로부터 보러 왔다. 경기(京畿)에서 온 인마(人馬)는 이곳에서 교체되어 돌아갔다.
25일(정미)
비. 이른 아침에 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나 중도에 이르니, 비가 억수로 퍼부어 냇물이 크게 불었다. 달천(達川)을 건너 충주(忠州)에 들어가니, 목사(牧使) 영공이 보러 오고, 도사(都事) 고인계(高仁繼)는 연향(宴享)을 베풀기 위하여 왔으며, 방백(方伯)은 이미 체직되었으므로 오지 않았다고 한다.
26일(무신)
아침에 흐림. 충주에서 머물렀다. 본관(本官 그 고을 수령)에게 제물상(祭物床)을 얻어 이안(里安)에 있는 외증조(外曾祖) 산소에 소분(掃墳)하려 하였는데, 달천(達川)에 당도하니 냇물이 불어 건너지 못하고 돌아왔다. 옥여(玉汝) 형이 여양(驪陽)으로부터 와서 모였다.
오후에 도사(都事)가 연향을 대청에 베풀어 정사(正使) 이하 여러 군관이 모두 참석하였다. 이 연향은 충주에서 판비를 담당하고, 청주(淸州)에서 보조했다 한다.
27일(기유)아침에 흐림. 목사가 술을 가지고 와서 작별하고, 도사도 또한 이르렀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여 오후에 길을 떠났다. 수교촌(水橋村)에 당도하니, 괴산 군수 이덕윤(李德胤)ㆍ연기 현감 성홍헌(成弘憲)ㆍ단양 군수 권신중(權信中)이 모두 지대차 나왔다. 저녁에 맞아들여 서로 만나 보았다. 옥여(玉汝) 형도 따랐다.
28일(경술)맑음. 평명에 발행(發行)하여 안부역(安富驛)을 지나 조령(鳥嶺)을 넘어 용추(龍湫)에서 점심을 먹었다. 금산 군수 홍서룡(洪瑞龍)ㆍ문경 현감 조홍서(趙弘瑞)가 지대차 나왔다. 김천(金泉) 찰방(察訪) 신관일(申寬一)ㆍ안기(安奇) 찰방(察訪) 김시추(金是樞)ㆍ창락(昌樂) 찰방(察訪) 이경후(李慶厚)는 모두 부마 차사원(夫馬差使員)으로 왔다가 상사ㆍ종사와 한자리에 모여 산수를 마음껏 구경하고 잠깐 술을 나눈 다음 파하였다.
저녁에 문경현(聞慶縣)에 당도하여 관사(官舍)에 사관을 정하였다. 상주(尙州) 목사(牧使) 이호신(李好信)ㆍ함창(咸昌) 현감(縣監) 이응명(李應明)이 지대차 왔고, 유곡(幽谷) 찰방(察訪) 신이우(申易于)가 보러 왔으며, 신석무(申錫茂)ㆍ신석필(申錫弼)ㆍ이돈선(李惇善)ㆍ채경종(蔡慶宗)ㆍ강이생(姜已生)이 보러 왔고, 산양(山陽)의 수장노(守庄奴 농장 지키는 종)와 함창(咸昌)의 묘지기 등이 뵈러 왔다.
충청도(忠淸道)의 인마(人馬)는 이곳에서 교체되어 돌아갔다.
29일(신해)맑음. 조반 후 길을 떠났다. 상사와 종사는 곧장 용궁(龍宮)으로 향하고, 나는 선영(先塋)에 성묘하기 위하여 함창(咸昌)으로 향하였다. 비록 수일 동안의 이별이기는 하나, 10일을 동행하다가 두 갈래 길로 나뉘니, 작별하는 심정이 자못 서글펐다. 불장원(佛藏院)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개령(開寧) 현감(縣監) 강준(姜遵)이 지대차 오고, 신석경(申碩慶)ㆍ박성미(朴成美)ㆍ강홍섭(姜弘涉)이 보러 왔다.
저녁에 함창현(咸昌縣)에 다다르니, 선산(善山) 부사(府使) 심논(沈惀) 영공이 구탄 참소(狗灘站所)로부터 보러 와서 잠깐 담화하다가 바로 갔으며, 신근(申謹)ㆍ신구(申謳)ㆍ신심(申諶)ㆍ김원진(金遠振)ㆍ이기정(李基禎)ㆍ정언준(鄭彥寯) 등 여러 척장(戚丈)이 보러 왔다. 강홍록(姜弘祿)ㆍ강홍신(姜弘信)이 상주(尙州)로부터 보러 오고, 이위(李蘤)ㆍ유응기(柳應期)ㆍ변윤종(邊胤宗)ㆍ신석형(申碩亨)ㆍ박성민(朴成敏)ㆍ이석성(李錫成)이 보러 왔으며, 강홍순(姜弘順)의 사위 조탁(趙鐸)ㆍ김대정(金大鼎)이 뵈러 왔다.
9월
1일(임자)
맑음. 평명에 양범(良範 지명) 선영(先塋)에 가니, 상주(尙州)ㆍ지례(知禮) 등 관원이 감사의 분부로 제물상(祭物床)을 마련해 왔으므로 고조(高祖)ㆍ증조(曾祖)ㆍ양증조(養曾祖)의 묘소에 차려놓고 제를 지내고 또 다례상(茶禮床)으로 상근(尙根)의 묘에 제를 지내는데, 세월은 덧없이 빨라 무덤에 묵은 풀만 우북하니, 부지중에 실성통곡(失聲痛哭)을 하였다. 제를 지낸 뒤에 그 퇴물[餕]로서 무덤 아래의 노비들에게 나눠주고 바로 길을 떠났다. 10여 리를 가니, 주인 원이 길가에 전별연[祖帳]을 베풀고 기다리므로, 잠깐 들어가 술자리를 벌였는데, 과음하여 만취가 되었다. 두산(頭山) 신근(申謹)씨의 집에 들러 상근(尙根)의 궤연(几筵)에서 곡(哭)하고, 그 처자를 만나보았다. 여러 향족들이 매우 많이 모였으나 갈 길이 바빠 조용히 이야기하지 못하고 몇 잔 술을 들고는 바로 떠났다.
저녁에 용궁현(龍宮縣)에서 유숙하는데 비안(比安) 현감(縣監) 박준(朴浚)이 지대차 오고, 주인 원 이유후(李裕後)가 보러 왔으며, 전강(全絳)ㆍ전이성(全以性)ㆍ김원진(金遠振)ㆍ변욱(卞)ㆍ권경중(權敬中)ㆍ채득호(蔡得湖)ㆍ김극해(金克諧)ㆍ채극계(蔡克稽)ㆍ고시항(高是恒)이 보러 왔다.
상통사(上通事) 형언길(邢彥吉)이 초상(初喪)의 부음(訃音)을 듣고 그 본가로 달려갔다.
2일(계축)맑음. 평명에 마산(馬山)으로 떠났다. 정 진사(鄭進士)의 증조(曾祖) 묘소에 다례(茶禮)를 행하였는데, 제물은 그 고을에서 마련해 왔다. 결성(結城 생전에 결성 현감을 지낸 자)의 묘에 참배하고, 인보(仁輔) 형 본가(本家)로 찾아가 보았다. 정지(鄭沚)ㆍ권여해(權汝諧)가 술을 가지고 찾아왔다. 내실(內室)에 들어가 주수(主嫂 인보의 부인)를 뵈었는데, 정흔(鄭忻)도 또한 한자리에 있었다. 인보 형이 나를 위하여 전별연을 베풀어 주는데, 수륙 진미(水陸珍味)가 소반에 가득하였다. 서로 잔을 들어 권하였다. 길을 떠나 곧장 예천(醴泉) 남면(南面)에 이르러 계부(季父) 묘소에 참배하였다. 묘소는 밭머리에 있어 묵은 풀만 우북하니, 흐느껴짐을 금할 수 없었다. 본관(本官)이 제물상을 마련해 왔으므로 다례(茶禮)를 행하고, 제사가 끝난 후 원백(元百)의 집에서 쉬었다. 한 평사(韓評事 평사는 벼슬)의 매씨(妹氏)가 나를 보기 위하여 벌써 수일 전에 영천(榮川)에서 와 있었다. 척장(戚丈) 장충의(張忠義)를 찾아보고, 연복군(延福君) 진상(眞像)에 배알하였다. 여러 친족과 동리 사람들이 모두 모여, 소를 잡고 주연(酒宴)을 베풀어 서로 잔을 돌려가며 권하였다. 해가 진 뒤에 작별하고 일어나 마을에 들어가니, 밤이 이미 깊었다. 봉화(奉化) 현감(縣監) 유진(柳袗)이 지대차 왔다.
3일(갑인)맑음. 주인 원 홍이일(洪履一)이 보러 오고, 영천 군수(榮川郡守) 이중길(李重吉)이 상사(上使) 지대차 풍산참(豐山站)에 나왔다가 상사가 지나간 후에 나를 보기 위하여 술을 가지고 왔다. 주인 원과 봉화 현감이 모두 술자리를 베풀어 각각 잔을 나누고 작별하니, 날이 거의 정오가 되었다. 술이 거나하여 길을 떠나 풍산(豐山)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진보(眞寶) 현감(縣監) 이입(李岦)이 지대차 나왔다. 김경조(金慶祖)가 보러 왔는데, 그의 집이 풍산현에 있다고 한다. 변두수(卞斗壽)라는 사람이 척분이 있다 하여 보러 왔고, 권노(權櫓)가 영천(榮川)으로부터 술을 가지고 보러 왔는데, 먼 곳에서 일부러 와 주니 두터운 정분을 알 수 있다. 박회무(朴檜茂)는 서신으로 안부를 물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 무렵에 안동부(安東府)에 들어가니 상사와 종사가 바야흐로 머물러 기다리고 있었다. 부사(府使) 이상급(李尙伋)이 보러 왔다. 풍기(豐基) 군수(郡守) 송석경(宋錫慶)은 연향(宴享)의 비용을 보조하였고, 영해(寧海) 부사(府使) 윤민일(尹民逸)은 지대차 나와 있었다. 여(玉汝) 형은 예천(醴泉)에서 뒤떨어졌다.
4일(을묘)
맑음. 안동에 머물러 연향을 받았다. 풍기(豐基)ㆍ영해(寧海) 두 영공이 보러 와서 간략히 술잔을 나누고, 주인 원도 또한 보러 왔다. 이득배(李得培)ㆍ박중윤(朴重胤)이 보러 왔다. 정영방(鄭榮邦)의 여막(廬幕)에 홍헌(弘憲)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장계(狀啓)를 올리고 집에 서신을 부쳤다.
5일(병진)맑음. 아침에 이득배(李得培)가 술을 가지고 찾아와 서로 손을 잡고 작별하였다. 조반 후에 일행이 모두 떠나는데 주인 원이 영호(映湖)의 배 위에 전별연을 베풀고 기악(妓樂)을 갖추었다. 잔이 오고가매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만취가 되었다. 일직(一直)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예안(禮安) 현감(縣監) 양시우(楊時遇)가 지대차 나오고, 신석보(申錫輔)ㆍ남잡(南磼)이 보러 왔다. 저녁에 의성(義城)에 당도하니, 날은 이미 어두웠다. 청송(靑松) 부사(府使) 이유경(李有慶)이 지대차 나와 있었다.
6일(정사)
맑음. 주인 원 이경민(李景閔)과 청송 부사가 보러 왔다. 식후에 출발하여 상사ㆍ종사와 함께 지나는 길에 이관보(李寬甫) 영공댁을 들르니, 이장(而壯)도 또한 한자리에 있었다. 간략한 술상이 나왔는데, 술과 안주가 아름답고 정의가 은근하여 잔을 주고 받는 사이에 만취가 됨을 몰랐다. 청로역(靑路驛)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인동(仁同) 부사(府使) 우상중(禹尙中)이 지대차 와 있었다. 밤이 깊어 의흥(義興)에 당도하니, 군위(軍威) 현감(縣監) 조경기(趙慶起)가 지대차 오고, 주인 원 안대기(安大杞)가 보러 왔다.
7일(무오)
맑음. 조반 후에 상사와 더불어 떠났다. 종사는 종[奴]의 병으로 인하여 홀로 머물러 있었다. 저녁에 신녕(新寧)에 당도하니 성주(星州) 목사(牧使) 강복성(康復誠)은 병으로 오지 못하고, 다만 감관(監官)을 시켜 나와 기다리게 하였다. 상사와 더불어 서헌(西軒)에 오르니, 작은 시냇물이 앞을 두르고 처마는 날아갈 듯한데, 만 포기 무성한 대[脩篁]는 숲을 이루어 소쇄(瀟灑)한 운치가 자못 감상할 만하였다. 주인 원 이유겸(李有謙)을 불러 술잔을 들며 담화를 나눴다.
8일(기미)
맑음. 조반 후 출발하여 포시(晡詩)에 영천(永川)에 당도하니, 군수(郡守) 이돈(李墩)은 병으로 휴가 중이라 나오지 않고, 대구(大邱) 부사(府使) 한명욱(韓明勗)이 지대차 왔다. 조전(曺䡘)이 보러 왔다.
9일(경신)아침에 흐림. 한욱재(韓勗哉)가 술자리를 베풀어 상사ㆍ종사와 더불어 모두 모였다. 신녕(新寧) 현감(縣監)이 영천 겸관(永川兼官)으로 또한 참석하였는데, 여러 기녀(妓女)들이 앞에 나열하고 풍악[絲管]을 울리며 잔을 돌려 권하므로, 마음껏 마시어 만취가 되었다. 아불(阿佛)에서 점심 먹었는데, 청도(淸道) 군수(郡守) 최시량(崔始量)과 하양(河陽) 현감(縣監) 이의잠(李宜潜)이 지대차 나왔다. 조전(曺䡘)ㆍ조인(曺軔)ㆍ정담(鄭湛)ㆍ박돈(朴墩)이 술을 가지고 찾아왔는데, 정(鄭)ㆍ박(朴) 두 사람은 모두 지산서원(芝山書院)의 선비로서 지산(芝山 조호익(曹好益))에게 수업(受業)한 자였다.
저녁에 경주(慶州)에 다다르니, 부윤(府尹) 이정신(李廷臣) 영공이 보러 왔다. 청하(淸河) 현감(縣監) 유사경(柳思璟)ㆍ영덕(盈德) 현령(縣令) 한여흡(韓汝潝)ㆍ경산(慶山) 현령(縣令) 민여흠(閔汝欽)ㆍ흥해(興海) 군수(郡守) 홍우보(洪雨寶) 등이 혹은 지대차, 혹은 연수(宴需)의 보조차 왔다. 장수(長水) 찰방(察訪) 이대규(李大圭)ㆍ자여(自如) 찰방(察訪) 이정남(李挺南)은 영천(永川)에서 배행(陪行)하고, 안기(安奇)ㆍ김천(金泉)ㆍ창락(昌樂) 등 찰방은 물러갔다. 일행의 인마(人馬)는 이곳에서 모두 교체하였다.
저녁에 판관(判官) 안신(安伸)이 보러 왔다.
10일(신유)저녁에 비. 경주(慶州)에서 머물렀다. 조반 후에 상사ㆍ종사와 함께 봉황대(鳳凰臺)에 나가 구경하였다. 봉황대는 성밖 5리쯤에 있으니, 곧 산을 인력으로 만들어 대(臺)를 세운 것이다. 비록 그리 높지는 않으나 앞에 큰 평야(平野)가 있어 안계(眼界)가 훤하게 멀리 트이었다. 이를테면 월성(月城)ㆍ첨성대(瞻星臺)ㆍ금장대(金藏臺)ㆍ김유신 묘(金庾信墓)가 모두 한 눈에 바라보이니, 옛 일을 생각하매 감회(感懷)가 새로워져 또한 그윽한 정서(情緖)를 펼 수 있다. 봉덕사(鳳德寺)의 종(鐘)이 대 아래에 있는데, 이는 신라 구도(舊都)의 물건으로 또한 고적(古跡)이다. 나라에 큰 일이 있어 군사를 출동할 때에는 이 종을 쳤다고 한다. 부윤(府尹)과 흥해(興海)ㆍ영덕(盈德) 수령이 모두 모여 바야흐로 주연(酒宴)을 베풀고 기악(妓樂)을 연주하는데 비바람이 휘몰아치므로 모두 거두어 관사로 돌아왔다. 생원 최동언(崔東彥)이 보러 왔다.
11일(임술)
맑음. 경주에서 머물렀다. 연향을 받았는데, 부윤(府尹)과 흥해(興海) 수령도 같이 참석하였다.
13일(갑자)
맑음. 해가 돋은 후 일행이 모두 출발하여 동정(東亭)에 당도하니, 부윤과 흥해(興海) 군수(郡守)가 먼저 와서 전별연을 베풀고 기악(妓樂)을 울리며 술을 권하여 나도 모르게 만취가 되었다. 이곳은 옛날 최고운(崔孤雲)이 살던 구기(舊基)로, 얼마 전에 기자헌(奇自獻)이 집을 신축하고 영구히 거주할 계획을 하였는데, 지난봄 극형(極刑 사형)을 받은 후에 관가(官家)에 몰수되어 손을 전별하는 장소가 되었다 한다. 구어참(仇魚站)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영덕(盈德)ㆍ청하(淸河)의 수령이 지대차 나와 있었다. 저녁에 좌병영(左兵營)에 당도하니 날이 거의 저물었다. 울산(蔚山) 부사(府使) 송극인(宋克訒)ㆍ연일(延日) 현감(縣監) 이여하(李汝賀)가 지대차 오고, 밤에는 병사(兵使) 우치적(禹致績) 영공이 주연(酒宴)을 베풀었다. 오늘은 90여 리를 왔는데, 여러 날 휘달리던 나머지라, 몸이 몹시 피곤하여 잠깐 담화하고 바로 파하였다
14일(을축)
맑음. 해가 돋은 후에 길을 떠나 수십여 리를 갔다. 좌우 산협 길이 모두 단풍으로 물들고, 시냇물이 맑고 시원하여 이르는 곳마다 절승(絶勝)이었는데, 행색이 몹시 바빠 구경할 겨를도 없이 말을 채찍질하여 지나가니, 행역(行役)의 괴로움이 참으로 가련하였다. 용당(龍堂)에서 점심 먹었는데, 밀양(密陽) 부사(府使) 이안직(李安直)ㆍ언양(彥陽) 현감(縣監) 김영(金瀅)이 지대차 왔다. 인마(人馬)를 빨리 재촉하여 동래(東萊)를 5리쯤 앞두고 상사(上使) 이하 여러 관원이 관디[冠帶]를 갖추고 들어갔다. 부사(府使) 김치(金緻)는 방금 감사(監司)에게 병가[呈病]원을 내고 있어 나오지 못하고, 김해(金海) 부사(府使) 이정신(李廷臣)이 겸관(兼官)으로 나왔다. 그리고 양산(梁山) 군수(郡守) 박곤원(朴坤元)이 지대차 왔다. 이 날은 1백 20리를 갔다.
15일(병인)
맑음. 동래(東萊)에서 머물렀다. 새벽에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였다. 조반 후에 동헌(東軒 지방 관원이 공사를 처리하던 대청)에 앉아 일행 군관으로 하여금 두 패로 나누어 활을 쏘게 하여, 이긴 편은 상(賞)을 주고 진 편은 벌주(罰酒)를 마시게 하였다.
상통사(上通事) 박언황(朴彥璜)을 보내어 귤왜(橘倭 귤지정(橘智正))의 안부를 물었다.
16일(정묘)
맑음. 아침에 종사와 더불어 관아에 나아가 부사(府使)를 찾아보았다. 조반 후에 상사 이하 모두 관디[冠帶]를 갖추고 의물(儀物)을 앞에 진열(陳列)하여 일시에 출발하였으니, 이는 왜관(倭館)이 부산(釜山)에 있기 때문이다.
정오에 부산에 당도하니, 첨사(僉使)와 각포(各浦)의 변장(邊將)들이 출참(出站)하고 수령(守令)들이 모두 영접을 나왔기에 곧 당(堂)에 앉아 공례(公禮)를 받고 파하였다. 김해(金海)ㆍ밀양(密陽)의 수령과 창원(昌原) 부사(府使) 박홍미(朴弘美)ㆍ웅천(熊川) 현감(縣監) 정보문(鄭保門)ㆍ거제(巨濟) 현령(縣令) 박제립(朴悌立)ㆍ함안(咸安) 군수(郡守) □□□ㆍ기장(機張) 현감(縣監) 박윤서(朴胤緖)가 모두 지대차 오고, 좌수사(左水使) 황직(黃溭)이 찾아와 주연(酒宴)을 베풀어 주었다. 통영(統營) 중군(中軍) 임충간(任忠幹)이 통영에서 사신(使臣)이 타고 갈 새로 꾸민 배를 타고 왔다. 이는 그 공로를 자랑하고 겸하여 작별 인사도 나누려는 것이었다.
20일(신미)
맑음. 부산에서 머물렀다. 낮에 상사ㆍ종사와 함께 부산 증성(甑城)의 포루(砲樓)에 오르니 해문(海門)은 넓게 통하고, 어주(漁舟)는 점점이 떠 있다. 절영도(絶影島) 밖에 아물아물 보이는 산이 있으므로, 그 지방 사람에게 물으니,
“이는 대마도(對馬島)로, 청명한 날에는 이같이 분명히 보입니다.” 라고 하였다.
28일(기묘)
맑음. 새벽 녘에 생폐(牲幣 희생과 폐백)와 서수(庶羞 여러 가지 제수)에 제문(祭文)을 갖추어 상사 이하 여러 관원이 모두 검은 관디[冠帶]를 착용(着用)하고 영가대(永嘉臺) 위에서 해신(海神)에게 제사를 올렸다. 일행의 행장이 미처 정돈되지 않아 관사(館舍)에 도로 들어왔다. 오후에 배를 탔다. 울산(蔚山)ㆍ밀양(密陽) 부사가 모두 술을 가지고 와서 작별하였다. 귤지정(橘智正)이 왜 사공 12명을 보내 와서 배알(拜謁)하므로, 세 사신(使臣)이 모두 타루(舵樓) 위에서 교의(交椅 의자)에 앉아 행례(行禮)를 받고 이어서 술을 먹였다. 왜 사공 12명은 상ㆍ부선(上副船)에 각 3명, 3ㆍ4선(三四船)에 각 2명, 5ㆍ6선(五六船)에 각 1명을 분배한다고 하였다. 울산 부사ㆍ밀양 부사와 더불어 술잔을 나누어 작별하고 부선(副船)에 돌아오니, 두 아들과 홍여경(洪汝敬)ㆍ김효선(金孝先)ㆍ변윤종(邊胤宗)ㆍ안홍익(安弘翼)이 벌써 미리 와 있었다. 잠시 담화하다가 김효선ㆍ안홍익이 먼저 일어나고, 다음에 두 아들과 작별하였다. 왕사(王事)가 지중하므로 비록 슬픈 정을 억제하고 서로 면려(勉勵)하였으나 마음은 심히 괴로웠다. 두 아들도 또한 눈물을 머금고 흐느껴 말을 이루지 못하였다. 부자간의 정리에는 심상하게 잠깐 이별하는 것도 오히려 마음을 안정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이 험한 바다를 격한 만 리 이역의 이별임에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혼(神魂)이 암담하였다. 변공(邊公)과 홍여경(洪汝敬)도 작별하고 돌아가고, 수행하여 배서(陪書 지금의 비서와 같음)하던 자와 마부(馬夫)들도 모두 작별 인사를 고하고 갔다.
드디어 닻줄을 풀고 뱃길을 뜨는데, 고각(鼓角 북과 피리) 소리는 왁자그르하고 노소리는 빼각거리며 점차 육지와 멀어지니, 떠나는 마음이 더욱 괴로웠다. 귤지정(橘智正)의 배가 앞을 인도하고 갔다. 초량항(草梁項)에 배를 대고 배 위에서 유숙하였는데, 방은 정결하나 습기가 스며들어 몸이 매우 무거웠다.
29일(경진)맑음. 배 위에서 머무르며 바람을 기다렸다. 부산(釜山) 첨사(僉使) 전삼달(全三達)이 배를 타고 다가와 판옥선(板屋船) 위에서 전별연을 베풀었다. 상사는 기일(忌日)이어서 참석하지 않고, 나와 종사만이 담화하며 간략히 술을 나누다가 파하였다.
소주ㆍ밀과(蜜果)ㆍ잣ㆍ호두 등의 물건을 귤지정에게 보냈다.
30일(신사)비, 오후에 갬. 배 위에서 머물고 있는데, 동풍이 점점 일어나 정박할 수 없으므로, 배를 감만이(勘蠻夷 지명)로 옮겨 바람을 기다렸다. 귤지정이 설탕 상자를 보내왔으므로 바로 역관(譯官)ㆍ군관(軍官) 등에게 나눠 주었다.
10월
1일(임오)
흐리다가 밤에 비. 평명에 귤지정이 와서 말하기를,
“풍세가 매우 순하니 발선(發船)하기를 청합니다.”
하므로, 해가 돋은 후에 거정포(擧碇砲 배 떠나갈 때에 쏘는 포(砲))를 쏘아 여러 배가 차례로 바다에 나갔다. 태종대(太宗臺)를 지나 수십여 리를 가니, 풍세가 점점 동풍으로 변하여 물결이 크게 일어나 모든 배가 떴다 잠겼다가,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거려 위험이 호흡 사이에 박두하였다. 귤지정이 먼저 돛을 내려 배를 돌리고, 일행의 모든 배들도 또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모두 부산 앞바다로 되돌아왔다. 각 배의 원역(員役) 이하 격군(格軍)들이 구토하고 쓰러져 불성인사(不省人事)가 되었으며, 상사 역시 구토를 면하지 못하였다 한다. 창녕(昌寧) 현감(縣監) 조직(趙溭)ㆍ고성(固城) 현령(縣令) 김수(金遂)ㆍ기장(機張) 현감(縣監) 박윤(朴胤)이 지대차 왔다가 그대로 머무르고 돌아가지 않았다. 되돌아온 연유를 갖추어 장계를 올렸다.
2일(계미)
간혹 흐림. 배 위에 머물러 있었다. 날이 채 밝기 전에 왜인(倭人)과 우리 선원(船員)들이 모두 말하기를, "하늘이 맑게 개고 동북풍이 점점 일어나니, 일찍이 발선(發船)하기를 청합니다.”
하므로, 두세 번 상선(上船)에 통지하고 이른 아침에 돛을 달고 바다로 나갔다. 타루(柁樓) 위에 앉아 태종대를 지나니 파도는 잔잔하고 배는 심히 빨랐다. 2백여 리를 지나오니 바람이 점점 약해지므로 노 젓는 것을 재촉하였는데, 그때에 동풍이 크게 일어나서 배가 거슬려 나아가지 못하였다. 날은 저물어 가는데 대마도는 아직 멀고, 배 안의 사람들은 태반 현기(眩氣)로 쓰러져 있었다. 앞뒤 배가 다만 화전(火箭)으로써 서로 신호하는데, 상선(上船)은 멀리 가서 화전으로 신호가 되지 않았다. 밤은 칠흑같이 어두운데 오직 노젓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초경(初更)쯤에 불빛이 높은 봉우리 위에 비치므로 왜인에게 물으니, 이는 마도(馬島)의 악포(鰐浦)라고 하였다. 배 안의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비로소 희색이 있었으며, 또한 등불로써 서로 신호하고 노를 재촉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마도를 10여 리 앞두고 평조흥(平調興)과 찬기주(讚岐州)가 각기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였다. 왜의 소선(小船) 6척이 배를 이끌고 앞을 인도하여 2경(二更)말에 마도의 서쪽 악포(鰐浦)에 대었다. 포구(浦口) 위에는 수십 집이 있는데, 가옥의 제도가 우리나라와 같지 않고 매우 허술하였다. 도주(島主)가 세 사신(使臣)에게 하정(下程 사신에게 보내는 예물(禮物))을 보내왔다. 찬기주(讚岐州)는 육지에 내려 승사(僧舍)에서 쉬기를 청하였으나 밤이 깊고 기운이 불평하다고 사양하였다. 찬기주의 이름은 평지순(平智順)이니, 도주(島主)의 숙부다.
부산에서 악포(鰐浦)까지는 뱃길로 4백 80리다.
3일(갑신)
맑음. 배 위에 머물러 있으니, 귤지정이 첫새벽에 와서 안부를 묻고 육지에 내려 잠시 쉬기를 청하였는데, 갈 길이 바쁘다는 것으로 사양하였다. 진시 초에 발선하는데, 섬 가운데 노소 남녀들이 포구(浦口)에 나와 구경하는 자가 담[堵]처럼 빽빽이 둘러 서 있었다. 왜 소선(小船)이 각 배를 나누어 이끌고 포구를 나와 연안(沿岸)을 따라 동으로 향하는데, 귤지정이 앞을 인도하고 여러 배가 바다를 뒤덮어 모두 노(櫓)를 재촉하여 갔다. 지나는 포구가에 인가가 두세 군데 있었는데, 모두 명승(名勝)이었으나 온 섬이 모두 석산(石山)이었다. 당포(唐浦)를 지나 저물 녘에 한 포구에 들어가니 지명은 금포(金浦)라 하였으나 포구 안에 인가 10여 채가 있고, 마을 가운데 조그만 사찰(寺刹)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선광사(善光寺)였다. 상사 이하와 추종(騶從) 몇 명이 사찰로 사처를 정하니, 남녀들이 길을 끼고 구경하고, 간혹 합장(合掌)하는 자도 있으며, 배 위에서 쓸 나무와 물을 정성껏 공급해 주기도 하였다. 승사(僧舍)는 중수(重修)하였으나 미처 필역을 하지 못하여 숙소(宿所)의 범절이 또한 변변치 못하였다. 대개 도주(島主)가 우리 일행이 이곳에서 유숙할 것을 미리 생각하고 사승(寺僧)에게 중수할 것을 분부하였으나 미처 완성되지 못한 것이었다. 귤지정도 또한 와서 우리 일행을 돌봐 주었다.
이날은 가벼운 바람이 잠깐 불어 물결이 비단결 같으므로 때로는 상선(上船 상사가 탄 배)과 뱃전을 나란히 하고 젓대 부는 함무생(咸武生)과 노래하는 정득선(鄭得善)으로 하여금 번갈아 가며 불고 화답하게 하니, 평지에 있는 듯하였다. 이 또한 배 위의 한 흥취였다. 각기 술잔을 들어 서로 권하다가 파하였다.악포(鰐浦)에서 금포(金浦)까지 뱃길로 백 리 남짓하다.
4일(을유)
맑음. 사신 이하 일행이 일찍 일어나 배를 타고 백여 리를 가니, 조흥(調興)이 나와 영접하였다. 하뢰포(下瀨浦)에 이르니, 두 섬 사이에 포구가 심히 좁아 배가 나란히 들어갈 수 없었다. 돌 언덕 위에 한 칸 판옥(板屋)이 있으니, 이름은 주길사(住吉寺)인데, 곧 기도하는 곳이었다. 포구 안에는 큰 마을이 있는데, 나무 사이에 숨어서 구경하는 자가 얼마인지 알 수 없었다.
혹은 돛을 달고 혹은 노를 저어 부중(府中)과 10리쯤 되는 거리에 다가가니, 도주 의성(義成)이 나와 영접하는데 위의(威儀)가 조흥(調興)에 비하여 약간 융성하여 종선(從船) 4~5척이 옹위하고 다녔다. 배를 가까이 옮겨 작은 배로 명을 전달하고 상읍례(相揖禮)를 행하였다. 예가 끝난 후에 떡ㆍ과일ㆍ술통을 보내오고 곧 물러가 앞을 인도하였다.
해가 진 뒤에 한 포구로 들어가니, 곧 부중(府中)이다. 부중의 형세는 좁고 높은 산이 사면을 에웠으며, 앞에는 대ㆍ소선(大小船) 40~50척이 정박하여 있고, 왕래하며 사후(伺候)하는 배도 또한 거의 이 수효에 가까웠다. 언덕 근처에는 물이 얕으므로 중류에서 닻을 내리고 정사(正使) 이하가 관디[冠帶]를 갖추고 국서(國書)를 받들어 왜 소선(小船)으로 육지에 내리니, 밤은 이미 어두웠다. 등불로써 앞을 인도하고 연안(沿岸)을 따라 1마장쯤 가서 해안사(海晏寺)에 사처[下處]를 정했는데, 지나는 여염집마다 모두 등불을 달아 밝히고 구경하는 남녀들이 길가를 메웠다.
사처에 든 후 조흥(調興)이 술과 밥을 보내어 군관까지 먹이게 하였다. 장막ㆍ요[褥]ㆍ포진(鋪陳)은 대략 우리나라 제도를 본받았는데, 모두 새로 마련한 것이었다. 일본은 옛날부터 온돌방이 없었는데 사신의 행차를 위하여 특별히 만들어서 대기한 것이다. 사후(伺候)하는 사람들도 각기 맡은 일에 부지런히 하여 정성을 다하였다.금포(金浦)에서 부중(府中)까지는 뱃길로 1백 70리다.
5일(병술)
맑음. 해안사에서 머물렀다. 조흥(調興)ㆍ의성(義成)ㆍ현방(玄方)이 모두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의성은 하정(下程)을 보내 오고, 또 술과 면(麪) 등을 각기 보냈으므로 바로 일행에게 나누어 주었다.
조반 후에 조흥(調興)이 예조(禮曹)의 서계(書契)와 증여 물품(贈與物品)을 받기 위하여 관사(館舍) 앞에 와서 기다렸다. 정사 이하 관디[冠帶]를 갖추고 대청에 나와 좌정하니, 조흥이 공복(公服)을 입고 북으로 향하여 사배(四拜)하고, 의성(義成)ㆍ현방(玄方) 및 조흥(調興) 3인에게 보내는 예물을 받아가지고 나갔다. 조금 후에 현방은 가사(袈裟)를 입고 의성과 조흥은 공복을 갖추어 입고는 모두 신을 벗고 들어와 상읍례(相揖禮)를 행하였다. 사신은 동벽(東壁)에 자리잡고, 현방 이하는 서벽(西壁)에 자리잡아, 모두 교의(交椅)에 앉아 두 번 차례(茶禮)를 행하였다. 현방(玄方)은 하나의 산인(山人 중이나 도사)에 지나지 아니하나 장로(長老)로서 온 섬의 문서를 관리하므로, 자리가 의성의 위에 있었으니, 일본의 풍속이 그러하였다. 현방 등이 나간 뒤에 귤지정(橘智正) 및 수직왜(受職倭 우리나라 직첩을 받은 왜인) 마당고라(馬堂古羅) 등 5인이 모두 우리나라 관디[冠帶]를 착용하고 들어와 예(禮)를 행하고 나갔다.
저녁에 의성이 청귤(靑橘)을 보내 왔다.
6일(정해)
맑음. 해안사(海晏寺)에서 머물렀다. 아침에 조흥은 생선을 보내 오고, 현방은 떡과 과일을 보내 왔으므로 일행 군관과 사후(伺候)하는 왜인에게 나눠 먹였다. 저녁에 상사의 사첫방을 찾아가 보니 한 관내(館內)에 별당(別堂)으로 된 곳인데, 이름은 매향원(梅香院)이라 하며 정쇄(精灑)함이 비할 데 없었다.
7일(무자)맑음. 해안사에서 머물렀다. 조흥이 무[菁根] 한 그릇을 보냈으므로 바로 주방(廚房)에 내려 보냈다. 밤에 의성이 상화(霜花) 1합(榼)과 생전복[生鮑]ㆍ소라(小螺) 등을 보내 왔으므로 일행 원역(員役)과 사후하는 왜인에게 나눠 주었다.
8일(기축)
맑음. 해안사에서 머물렀다. 조흥이 생선을 보내 왔다. 정오에 현방이 서신과 함께 찰떡 한 그릇, 술 한 통과 각종 떡ㆍ과일ㆍ감ㆍ귤ㆍ배ㆍ잡효(雜肴 여러 가지 안주)를 보냈으므로 곧 원역 및 사후(伺候)하는 왜인에게 나눠 주고 답서를 써서 사례하였다.
바다를 건넜다는 장계를 써서 왜선(倭船) 편에 부산 첨사에게 보내고, 집에 보내는 서신도 아울러 부쳤다.
9일(경술)
간혹 흐림. 해안사에서 머물렀다. 조흥이 두부 한 그릇을 보내 오고, 의성은 설고(雪糕)ㆍ화당(花糖) 및 감귤ㆍ감을 보내 왔으므로 곧 군관들에게 나눠 주었다. 종사가 찾아왔으므로 인하여 같이 상사를 가 보았다.저녁에 큰비가 밤새도록 내렸다.
10일(신해)맑음. 아침에 흐리다가 비가 왔다. 해안사에서 머물렀다. 의성이 연례(宴禮) 행하기를 청하므로 누차 사양하다가 허락하였다. 과일상과 떡들은 대략 우리나라 규모를 모방하였고, 올린 음식은 모두 간이 맞았다. 찬(饌)을 나르고 술 심부름하는 자들은 모두 나이가 젊고 얼굴이 아름다운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 명칭은 약중(弱衆)인데, 방언(方言)으로는 와가수(瓦家守)라 하였다. 모두 발목까지 덮이는 긴 바지를 입었는데, 땅에 끌리는 것이 또 한 자쯤 되었다. 걸어다닐 때에는 감히 땅이 울리지 못하게 잦은 걸음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물러가도록 하였으니, 이는 그 나라 풍속에 존경하는 예절이었다. 위로는 정관(正官)으로부터 아래로는 격군(格軍)에 이르기까지 자리를 나누어 잔치를 베풀었다. 술 아홉 잔을 돌린 후에 다시 은밀한 좌석으로 옮겨 편히 앉고 현방(玄方) 이하가 각기 두 잔 술을 권하였다. 술자리가 반쯤 되어 역관을 시켜 현방에게 전하여 말하기를,“우리들이 왕명(王命)을 받들고 동으로 온 것은 오로지 사로잡혀 온 사람들을 쇄환(刷還)하는 한 가지 일을 위한 것이니, 오로지 그대들이 힘껏 주선해 줄 것을 믿는다.”하니, 대답하기를,
“전일에 이미 말씀을 들었으니, 어찌 잠시인들 감히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오늘날 사세가 전과는 다르니, 용이하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나 마땅히 힘을 다하여 도모해 보겠습니다.”하였다. 자리를 파할 때에 현방이 먼저 율시(律詩) 한 수를 써서 화답하기를 간청하는데, 거절하기 어려워 상사 이하 각기 차운(次韻)하여 주었다.
연회 처음에 현방과 의성은 중계(中階)에 서고, 조흥은 계하(階下)에 서서 정사(正使) 이하를 인도하여 섬돌 위에 이르고, 현방과 의성이 인도하여 당(堂) 위에 올라 읍례(揖禮)를 행했다. 사신은 동벽(東壁)에 자리잡고, 현방 이하는 서벽(西壁)에 자리 잡아 모두 교의에 앉았다. 옛 규례(規例)에는 역관ㆍ군관과 아래로 군졸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행례(行禮)하였는데, 금번에는 행례를 하지 않으니, 도주(島主) 이하가 지극히 유감으로 생각하여 귤지정을 보내어 말을 전하였다. 이쪽에서는 박대근을 시켜서 반복 논변하여 그렇지 않음을 설명하였으나, 끝내 해혹(解惑)되지 아니하고 그 사색(辭色)을 보면 자못 서운한 느낌이 있었다. 술이 반쯤 취하매 나이 젊은 광대로 하여금 풍악을 울리고 재주를 부리게 하며, 또 무동(舞童)을 시켜 떼를 나누어 들어오게 하였다. 모두 아롱진 비단 옷을 입고 얼굴에 가상(假像)을 썼는데 손으로는 금부채를 휘둘러 절조에 맞추어 노래하니, 보기에 매우 기괴하였다. 그러나 그 맑은 소리와 가는 허리로 절조에 맞추어 뜰에서 너울거리니, 그 아리따운 태도가 또한 하나의 흥미를 돋울 만하였다.
관사(館舍)의 제도는 크고 넓었는데, 단청을 하지 않고 다만 금병풍을 사면 벽에 둘렀으며, 사신이 앉은 벽 뒤에는 주렴(珠簾)을 쳐서 부인이 관광하는 곳으로 만들었으니, 소위 도주(島主)의 아내도 또한 그 안에 있다 한다. 시중드는 왜인들이 의성과 조흥의 뒤를 옹위한 자가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 혹은 담배 피우는 기구를 가지고 추종하는 자도 있었는데 모두가 조용하여 말이 없고, 구경하는 아이들까지도 물러나 꿇어 엎드리고 줄을 맞추어 앉아서 종일토록 아무 말도 없으니, 평소에 법령이 엄중한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의 하인들은 뜰 가운데 열지어 앉아 아무리 금하여도 떠드는 소리가 그치지 않으니, 저 오랑캐에 비해 볼 때 또한 부끄러운 일이었다. 우리 일행이 왕래할 때에는 구경하는 남녀들이 길의 좌우를 메웠다. 소위 양반의 부녀들은 흰 장옷[長衣]으로 머리를 싸고 얼굴을 가렸다. 구경하는 자의 수효는 또한 헤일 수 없었는데, 승려와 속인이 뒤섞여 남녀가 분별이 없고 말은 금수(禽獸)의 소리와 비슷하였다. 여염은 조밀한데, 모두 판자와 기와로 지붕을 덮고 좌우 옥사(屋舍)는 제도가 우리나라 저자의 가게와 흡사하였다.
행중(行中)의 여비와 호피(虎皮)ㆍ표피(豹皮)ㆍ인삼ㆍ세저(細苧)ㆍ유선(油扇)ㆍ유둔(油芚) 및 각색 마른 실과(實果) 등을 나누어 마련하여 도주 및 현방ㆍ조흥 등에게 주고, 귤지정ㆍ칠위문(七衛門)에게도 또한 차등있게 주었다. 대개 귤지정은 접대와 사후하는 일을 주관하고, 칠위문은 마도(馬島)의 모든 문서를 관장(管掌)하여 용사(用事)의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또 백미(白米)와 종이를 왜통사(倭通事) 및 왜사공 등에게 나누어 주었다.
11일(임진)
맑음. 간혹 가랑비. 해안사에서 머물렀다. 종사가 찾아왔으므로 상사의 사처로 같이 가서 간략히 술을 들며 젓대 소리를 들었다. 아침에 조흥이 무ㆍ토란 등을 보내 왔다.들으니, 어제 길가에서 중국 사람이 몸을 숨기고 구경하는 자가 있었다 하므로, 역관을 시켜 사후하는 왜인에게 물으니, ‘중국 배 1척이 약을 팔기 위하여 수일 전에 왔다가 아직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이 일본을 물리쳐 끊은 지 이미 오래되어 정삭(正朔 역서(曆書))을 통하지 않고, 바닷길로 왕래하는 것을 일체 엄금하는데, 잠상(潜商)들의 왕래가 잇달으니, 중국 사람들의 죽는 것도 헤아리지 않고 재물을 탐내는 것을 또한 알 수 있다.밤에 큰 바람이 불었다.
12일(계사)간혹 흐리고 눈이 날렸다. 밤 꿈이 지극히 산란하였다. 해안사에서 머물렀다. 조흥이 무[菁根]를 보내 왔다.
마도에 온 후로부터 하정(下程)의 찬물(饌物) 및 일행의 요미(料米)를 대략 5일에 한 번씩 공급해 주었는데, 사신은 매일 각 5수두(手斗)씩, 당상 역관(堂上譯官)은 3수두, 정관(正官)은 2수두, 중관(中官)은 1수두 반, 하관(下官)은 1수두였다. 일행이 상의하여 사신과 하관(下官)을 막론하고 모두 하루 3승(升)씩 계산하여 받고, 나머지 쌀은 구관 왜인(句管倭人)에게 돌려주었으니, 마도의 폐단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다. 그네들의 수두(手斗)라는 것은 곧 되[升]로, 우리나라 되로 2승 7홉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의성ㆍ조흥 등이 각기 서찰을 보내어 그저께 향연을 받아준 것과 예물을 준 데 대하여 사례의 뜻을 표하므로, 각기 회답을 써서 회사(回謝)하고 이어서 속히 떠날 것을 덧붙였다. 저녁에 의성이 별하정(別下程)으로 술ㆍ과일ㆍ생선ㆍ면(麪) 등을 보내 왔다. 물품을 자주 받는 것이 미안하여 사양하니, 심부름 온 왜인이 굳이 청하므로 마지못해 받아 두고 전례에 의하여 나누어 주었다.
13일(갑오)
맑음. 간혹 싸라기눈. 일기가 비로소 추워졌다. 해안사에서 머물렀다. 조흥이 등자(橙子)를 보내 오고, 칠위문은 술ㆍ과일ㆍ찰떡과 각색 안주를 보내 왔으므로 일행 원역과 사후(伺候)하는 왜인과 통사 등에게 나눠주었다. 오후에 종사와 더불어 상사의 사처에 가서 담화하고 간략히 술잔을 나누었다. 역관 이형남(李亨男)ㆍ포수 김덕련(金德連) 및 소통사(小通事) 등이 금물(禁物)을 범하여 종사관에게 잡혔으므로 핵실(覈實)하여 죄를 논하고 곤장으로 다스렸다.
15일(병신)
맑음. 해안사에서 머물렀다. 새벽에 북쪽 뜰에 장막을 베풀고 망궐례(望闕禮)를 의식대로 행하였다. 조흥이 생선을 보내 왔다. 소동(小童)들이 말하기를“50세 가량된 한 여인이 빨래를 핑계하고 문밖 시냇가에 앉아 사행(使行)의 하인을 만나서, ‘나는 전라도(全羅道) 옥과(玉果) 사람인데, 사로잡혀 이곳에 온 지 벌써 28년이 되었다. 본국으로 돌아가려 해도 이곳의 법이 엄중하여 자유롭게 되지 못한다. 행차가 돌아갈 때에 동지(同志) 몇 사람과 더불어 몰래 도망쳐 나올 터이니, 이 말을 삼가 미리 전파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한다. 그래서 소통사를 시켜 다시 그 거주를 탐문하게 하니, 이미 가버렸다.저녁에 조흥이 또 생선을 보내 왔으므로 바로 군관청에 내려 주었다.
16일(정유)
흐리고 아침에는 비가 뿌렸다. 해안사에서 머물렀다. 요사이 선인(先人)께서 꿈에 매우 분명히 나타나는데 간밤에는 더욱 분명하였으니, 이는 오늘이 기고(忌故)인데 불초한 몸이 해외에 멀리 나와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다른 나라에 와서 또 이날을 만나 종신(終身)의 슬픔을 펼 곳이 없으니, 심회(心懷)가 망극하여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조흥이 청우(靑芋)를 보내 오고, 의성은 설병(雪餠)ㆍ설탕ㆍ등자(橙子)ㆍ귤ㆍ생리(生梨) 등을 보내 왔다.
17일(무술)
맑았으나 바람이 불었다. 해안사에서 머물렀다.
조흥이 누차 연례(宴禮)를 청하더니 그 아문에서 자리를 베풀었으므로 조반 후에 상사 이하 다 갔다. 현방ㆍ의성도 아울러 와서 참여하였다. 기명(器皿)과 찬품(饌品)은 도주의 연회 때와 다름 없었고, 기수(器數) 및 상화(床花)ㆍ금ㆍ은ㆍ유리 등의 기구는 도주보다 화려한 편이었다. 다만 아문은 도주가 거처하는 곳보다 약간 옹색한 편이었으나, 정쇄(精灑)한 것은 일반이었다. 해가 진 후에 사처로 돌아왔다. 자리를 파할 무렵에 역관을 시켜 사로잡혀 온 사람의 쇄환에 관해 말을 전하기를,
“전일에 이미 말하였으니, 그대들이 반드시 성심을 다하여 주선할 것이다. 다만 듣건대, ‘이 섬에도 사로잡혀 온 사람이 많은데 쇄환하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하니, 그대들은 그대 할아버지ㆍ아버지 때부터 대대로 조정의 은혜를 입은 처지에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또 ‘사로잡혀 온 사람들이 우리 일행을 만나보려 해도 왜인들이 곳곳에서 막아 보지 못하게 한다.’ 하니, 그대들은 모름지기 각처에 통문을 내어 억제하는 일이 없도록 함이 옳을 것이다.”하니, 조흥이 대답하기를,
“마땅히 분부대로 힘을 다하겠습니다만, 쇄환한다는 말이 만약 먼저 전파되면 아마도 중간에 이간하는 말이 먼저 들어가 혹 일을 이루지 못할까 매우 염려되는 바입니다. 원컨대, 조용히 조처하여 돌아올 때에 곳곳에서 듣고 보는 대로 개유(開諭)시킴이 무방할 듯합니다.”하였다. 이 말이 비록 그럴 듯하나, 저들이 혹시 관백(關白)에게 꾸중을 들을까 염려하여 아직 뒤로 미루는 것이요, 실로 우리를 위하는 것은 아니었다. 상고(尙古 이경직(李景稷)의 자))의 〈일기(日記)〉에 ‘의성은 어리석고 조흥은 영리하다.’고 한 것이 과연 헛말이 아니었으니, 그 말의 간교함이 대개 이러하였다.
18일(기해)
맑음. 해안사에서 머물렀다. 도주와 조흥 등이 모두, ‘오늘 발선하겠다.’ 하므로 우리나라 사공들은 밤을 지새워 배를 정리하였다. 닭이 울 녘에 와서 바람이 순하다고 고하기에 곧 등불을 밝히고 일어앉아 행장을 수습하고 조흥이 사람 보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동틀 무렵에 비로소 왜사공을 시켜서 와 보고하기를,“오늘은 바람이 좋지 않으니 명일 발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왜인의 간교한 정상을 역관이 알지 못함이 아니나 실지는 서로 마음이 맞아 속임이 이에 이른 것이다. 이는 반드시 저들의 매매(賣買)가 끝나지 않아서 그런 것이니, 분통하고 분통한 일이다. 박대근(朴大根)으로 하여금 왜통사를 불러 속인 실수를 꾸짖고, 의성과 조흥 등에게 전달하게 하였다. 의성과 조흥이 귤지정과 칠위문을 보내어 사죄하므로, 세 사신[三使臣]이 대청[廳事]에 같이 앉아 두 왜인을 불러 꾸짖으니, 왜인이 말하기를,“오늘 일은 의성과 조흥의 죄가 아니요, 실로 왜 사공들이 배를 미처 정리하지 못하여 조흥을 속인 것입니다. 의례(儀禮)에 관해서는 귤지정은 몹시 늙었고, 전일 전고(典故)에 밝은 왜인들은 모두 죄를 입어 멀리 나갔으며, 그 나머지는 나이 어리고 일에 경력이 없어 소루하게 되었사오니, 널리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하므로, 대답하기를,
“두 나라가 수교(修交)하는 데에는 오직 신의(信義)에 달렸을 뿐이며, 사신을 접대하는 데에도 정성을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이요, 일호라도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미 지난 일은 어찌할 수 없거니와, 앞으로는 오늘과 같은 일이 없게 하라.”하고, 몇 잔 술을 먹여 보내니, 두 왜인은 예 예 하고 물러갔다.
저녁 무렵에 포구를 바라보니, 왜인들이 배를 정리하느라 분주하여, 떠들썩한 소리가 원근에 진동하며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의성이 술ㆍ고기ㆍ떡ㆍ과일 등을 보내 왔으므로 군관들에게 나눠 주었다.
19일(경자)
아침에는 흐림. 해안사에서 머물렀다. 새벽에 조흥이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오늘은 저희들이 꼭 뱃길을 뜨기 위하여 방금 유방원(流芳院)에서 바람을 기다리고 있는데, 하늘은 흐리고 바람이 없으니, 어찌할 수 없습니다. 해돋을 녘에 바람을 기다려 다시 보고하겠습니다.”하였다. 날이 늦도록 바람이 없어 뱃길을 뜨지 못하고 종일 곤히 잤다. 저녁에 조흥이 감귤을 보내 왔다.
20일(신축)
간밤에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여러 배가 서로 출렁대어 정박(停泊)할 수 없으므로 뱃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아침에 쾌히 갬. 해안사에서 머물렀다. 칠위문이 면(麪)ㆍ차(茶) 등을 보내고, 의성은 소주ㆍ유병(油餠) 및 각색 숙병(熟餠)을 보내 왔으므로 군관과 사후하는 왜인들에게 나눠 주었다. 오후에 현방ㆍ의성ㆍ조흥이 만나 보기를 청하므로, 세 사신이 중당(中堂)에서 접견하였다. 대개 사죄(謝罪)하기 위하여 온 것이었다. 각기 술 다섯 잔을 먹여 보냈다. 저녁에 조흥이 산저육(山猪肉)을 보내 왔다. 밤에 남궁도(南宮櫂)와 정득선(鄭得善)이 서로 싸운 죄를 다스리니, 사후 왜인들이 보고 혀를 빼며 말하기를,
“차라리 참형(斬刑)을 당할지언정 이 곤장은 차마 받지 못하겠다.”하였다. 그들의 성품이 지독하고 삶을 가벼이 여기는 것을 알 수 있다.
21일(계묘)
맑음. 새벽에 의성과 조흥이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오늘은 바람이 순한 듯하여 뱃길을 뜰 만하오니, 속히 행장을 챙기소서.”하므로, 곧 주방(廚房) 사람을 시켜 흰죽을 가져오게 하였다. 세 사신 일행이 각기 배를 타니, 해가 막 돋았다. 우리나라 배와 대마도 배 30여 척이 일시에 돛을 달고 바다에 나가 10여 리를 행하니, 바람은 점점 세어져 뱃머리는 파도를 헤치고 나가는데 빠르기가 화살 같았다. 바다 한복판에 미치지 못하여 물결이 크게 일어, 타고 있는 각 배가 풍도(風濤) 사이로 들락날락 하여, 어떤 때에는 높은 봉우리 위에 오르는 듯, 어떤 때에는 천 길 구덩이에 빠지는 듯, 그 위급한 형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넋을 잃고, 구역질하며 토하는 소리가 더러워 들을 수 없었다. 미시(未時)말에 일기도(壹岐島) 풍본포(風本浦)에 다달아 바로 용궁사(龍宮寺)에 사처를 정하였다.
절 앞에 한 고묘(古廟)가 있는데, 이름은 성모사(聖母祠)라 하였다. 성모(聖母)는 곧 산신(山神)의 이름으로 이 섬 사람들이 모두 신앙하여 기도한다고 한다. 물가의 촌락(村落)이 겨우 50여 호였는데, 산 넘어 마을이 곧 도주(島主)가 사는 곳이었다. 도주는 송포비전주 융신(松浦肥前州隆信)으로 강호(江戶)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부관(副官) 칠랑위문(七郞衛門)이 와서 접대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역관에게 들으니, ‘우리나라에서 사로잡혀 온 자가 이 섬에 매우 많은데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숨기고 내놓지 않으며, 한 남자가 바야흐로 우리 일행의 하인과 이야기하려다가 대마도 사람의 꾸중을 듣고 발도 붙여보지 못하고 갔으니, 이와 같은 자가 한둘이 아니라.’ 한다. 대개 대마도 사람들이 관백(關白)에게 이간하는 말이 먼저 들어가면 죄를 입을까 두려워서 그런 것이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마도에서 풍본포까지는 뱃길로 5백 리다.
23일(갑진)
저녁에 흐리고, 바람이 불순하였다. 용궁사에서 머물렀다. 조흥이 향귤ㆍ등자(橙子)ㆍ배ㆍ침과(沈果)를 보내고, 의성은 생리(生梨)ㆍ등자ㆍ생강ㆍ도자(桃子)ㆍ침과(沈果)를 보내 왔는데 모두 남만(南蠻)의 소산이라 한다. 일기도주(壹岐島主)의 친족 일고 호조전(日高虎助殿) 및 그 숙부 송포 장인전(松浦藏人殿)이 뵙기를 청하면서 마도 사람을 시켜 먼저 통하기에, 잠깐 들어올 것을 허락하니, 그 사람들이 무릎 걸음으로 기어들어와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고 배례만 행하고 물러갔다. 부관(副官)이 술과 고기ㆍ건어(乾魚)ㆍ후추 등을 보내 왔으니, 곧 이른바 별하정(別下程)이었는데, 사양하여 물리쳤다. 장인전(藏人殿)은 곧 우리나라 창원(昌原) 여자의 소생이다. 형제가 모두 처녀로서 임진왜란 때에 사로잡혀서 다 일기도주(壹岐島主)의 아내가 되었는데 지금까지 생존해 있으며, 그 남편인 도주는 지금 도주의 할아버지로 이미 작고하였다 한다.
24일(을사)
새벽부터 서북풍이 불었다. 평명에 배를 띄워 5리쯤 가니 풍세가 동풍으로 변하는 듯하다가 횡풍(橫風)이 점점 험악해지므로 잠깐 닻을 내리고 정박(停泊)하였다. 왜선과 더불어 상의하고서 다시 포구를 나와 돛[帆] 두 개를 비껴 달고 행하는데 바다 반도 못 미쳐서 바람결이 점점 약해지므로 격군(格軍)을 시켜 소리를 먹여가며 힘을 합하여 노를 재촉해 가게 해서 황혼 무렵에 겨우 남도(藍島)에 다달았다. 이 섬은 서해도(西海島) 축전주(筑前州) 소속이며, 행상(行商)들이 바람을 피하여 배를 정박하는 곳이니, 인가는 겨우 30여 호였다. 태수(太守) 우위충지(右衛忠之)는 연전에 강호(江戶)에 가고 대관(代官) 흑전미작수 일성(黑田美作守一成)과 소하내장윤 정직(小河內藏允正直)이 접대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관사(館舍)는 신축하였는데 처마ㆍ기둥ㆍ대들보ㆍ서까래와 울타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대[竹]로 만들고, 포진(鋪陳)하는 모든 물건도 정결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고 공궤하는 찬품이 지극히 사치스러웠으며, 사후(伺候)하는 사람들도 정성을 다하여 응접하는데 부지런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풍본포에서 남도(藍島)까지는 뱃길로 3백 50리다.
25일(병오)
풍세가 불순하여 남도에서 머물렀다. 대관(代官)들이 뵙기를 청하기에 잠깐 들어와 뵙기를 허락하니, 예모(禮貌)가 심히 공손하여 출입할 때에 무릎으로 기었는데, 이는 일본의 풍속에 높은 자를 뵙는 예절이었다. 역관들이 말하기를,
“충지(忠之)는 벼슬이 높아 녹봉(祿俸) 50만 석을 받고, 이 대관이 받는 녹봉도 1만 석이 못 되지 않는데, 마조(馬助)ㆍ칠우위문(七右衛門) 등이 모두 그 앞에서 굽실거리니, 그 벼슬이 높은 것을 알 만합니다.”
하였다. 그 사람들이 별하정(別下程) 세 소반을 바치기에 보니, 모두 종이로 봉하였는데, 겉면에 ‘은자(銀子)’라고 씌어 있고, 한 소반에 담긴 것이 무려 30~40편(片)이나 되었다. 너무나도 놀라워 역관을 시켜, 도저히 받을 수 없다는 뜻을 전하고 준엄하게 거절하니, 그 사람과 칠위문 등이 합사(合辭)하여 말하기를,
“사신의 몸가짐이 간결하심을 저희들이 모르는 것은 아니오나, 일본의 풍속은 이것이 아니면 높은 분을 대우하는 예에 결함이 되므로 감히 변변찮은 물건을 올렸는데, 이제 사양하여 물리치시니, 도리어 저희들이 부끄럽습니다. ‘그 고을에 들어가면 그 풍속을 따르는 것[入鄕循俗]’은 또한 옛날부터 있는 일이니, 무슨 손상됨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역관을 시켜 반복해서 개유(開諭)하여 돌려보내게 했다. 그리고 칠위문 등이 미리 단속하지 못한 실책을 꾸짖으며 앞으로 다시 이같은 일이 없도록 하라고 분부하니, 칠위문 등이 예 예 하고 물러갔다.
사로잡혀 온 사람들이 혹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있어 일행을 찾아오는 자가 있으면 문득 대마도 사람의 꾸중을 받으므로 임의로 나타나지 못하였다. 한 여인이 그 아들을 데리고 몰래 조그만 배를 타고 와 우리 뱃사람에게 말하기를,“나는 강진(康津)에 살던 백성의 딸입니다. 정유년(丁酉年) 사로잡혀 올 때에 아들은 6세 아이로 따라와 지금 이 섬에서 3식(息 1식은 30리) 거리에서 살고 있는데, 사신의 행차가 있음을 듣고 기쁜 마음을 견딜 수 없어 배를 세내어 타고 찾아왔습니다. 돌아가실 때에 다시 와 기다리겠으니, 원컨대, 행차를 따라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 주옵소서. 사로잡혀 온 사람으로 나와 같이 있는 자가 한 부락을 이루고 있는데, 모두 돌아가려 해도 되지 못하니, 내가 미리 알려 두었다가 같이 오겠습니다.”
하였다. 또 한 사람은 김해(金海)에 살던 양반이라 칭하며 군관 등에게 찾아와 말하기를,
“사로잡혀 와 이 섬에 살고 있는데, 본국으로 돌아가려 하나 탈출할 기회가 없소. 행차가 돌아갈 때에 마땅히 따라가겠으니, 그때에 하인을 시켜 여염 가운데서 외치기를, ‘사로잡혀 온 사람으로 본국에 돌아가려는 자가 있으면 모두 즉시 나오라.’ 하면, 마땅히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해 오겠소.”하며, 비밀히 약속하고 돌아갔다. 또 문자를 아는 한 왜인이 조그만 종이쪽지에 글을 써서 보이기를,
“사로잡혀 온 사람으로 명감(明鑑)에 살고 있는 자가 매우 많은데, 만약 관백의 허락을 얻는다면 모두 나갈 수 있습니다.”
하였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사로잡혀 온 사람이 곳곳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혹은 사세에 구애되어 비록 뜻대로 몸을 빼어 돌아가지는 못하지만, 고향을 그리는 정은 사람마다 일반인 것이니, 불쌍하다.
26일(정미)
간혹 흐림. 평명에 의성이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오늘은 서풍이 점점 일어나니 청컨대 속히 배를 타소서.”
하였다. 해돋을 녘에 배를 띄웠는데, 앞을 인도하며 이끌고 가는 왜 소선(小船)이 거의 70여 척이나 되었다. 30~40리를 가니 동풍이 일기 시작하므로 곧 돛을 내리고 노를 저어 나아갔다. 또 30~40리를 지나가니, 풍세가 점점 사나워 배가 거슬려 갈 수 없으므로 승도(勝島)가에 잠깐 정박하고 순풍이 불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검은 구름이 사방에서 모여들고 역풍이 더욱 험악하므로 부득이 돛을 달고 배를 되돌려 남도에 도로 정박하였다. 지공하는 왜인들이 이미 흩어지고 관사가 황량하여 하륙(下陸)하지 않고 그대로 배 위에서 유숙하였다. 조흥이 등자와 감귤을 보내 오고, 의성은 설병(雪餠)ㆍ생리(生梨)ㆍ등자ㆍ귤을 보내 왔다.
27일(무신)
간밤부터 큰비가 내려, 종일 쏟아졌다. 의성ㆍ조흥 등이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지공하는 사람들이 반 이상 돌아왔고, 이와 같은 큰비에 배 위에서 곤경을 치를 수 없으니, 아무리 우중(雨中)이지만 관사로 사처를 옮기소서.”
하였다. 오후에 상사ㆍ종사와 상의하고 비를 무릅쓰고 관사로 사처를 정했는데 병풍과 포진 등이 태반 오지 않아 부득이 세 사신이 한 곳에 유숙하였다.
28일(기유)큰 바람이 불었다. 남도에서 머물렀다. 귤지정이 술과 감귤을 보내 왔다. 정오에 현방이 찾아와 담화를 나누었다. 이어서, 서복사(徐福祠)는 어디에 있느냐 물으니, 대답하기를,
“남해도(南海道) 기이주(紀伊州) 웅야산(熊野山) 아래에 있는데, 지방 사람들이 지금까지 신봉(信奉)하여 향화(香火)가 끊기지 않고, 그 자손도 또한 그곳에 있는데, 모두 진씨(秦氏)로 일컫고 있습니다. 웅야산은 일명 금봉산(金峯山)이라고도 합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서복(徐福)이 일본에 올 때에는 진 시황(秦始皇)이 시서(詩書)를 불사르기 전이므로 육경(六經)의 전서(全書)가 일본에 있다 하는데 그러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일본에는 원래 문헌(文獻)이 없거니와, 듣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때에 설령 육경의 전서가 있었다 하더라도 일본은 전쟁을 좋아하여 번복이 매우 잦아 병화(兵火)의 참혹함이 진화(秦火)보다 심하였는데, 어찌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남도에서 마주 바라보이는 곳에 박다(博多) 냉천진(冷泉津)이 있는데, 바로 신라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시체를 묻은 곳으로 일본의 옛날 서도(西都)입니다. 정포은(鄭圃隱 정몽주의 호)ㆍ신 문충공(申文忠公 신숙주의 시호)이 수신사(修信使)로 왔을 때에도 모두 이곳에 왕래하였습니다.”
하였다. 현방이 시 한 절구(絶句)를 써서 보였다.
서녘을 돌아보니 눈 앞이 시원한데 / 回頭西望眼猶寒
십 리 송림에 칠 리 여울이로세 / 十里松林七里灘
지금도 제상 충혼 있는 듯 / 堤上舊魂今若在
어젯밤 꿈속에서 문안드렸네 / 夜來入夢問平安
대개 10리 송림과 7리 여울은 모두 냉천진에 있으므로, 인용한 것이다. 상사ㆍ종사와 함께 차운(次韻)하여 화답하였다. 또 묻기를,“해동기(海東記)에 실린 패가대(覇家臺)는 어디에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패가대는 원래 그러한 지명이 없고 일본의 어음(語音)에 박다주(博多州)를 화가다(化家多)라 하니, 이는 하가다[博多]의 와전(訛傳)으로 신숙주(申叔舟)가 와전을 그릇 기록한 것입니다.”
하였다. 현방이 또 묻기를,
“박제상의 부인이 치술령(鵄述嶺)에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언덕에 떨어져 죽었다 하는데, 이른바 치술령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이 같은 남편에 이같은 부인이 있으니, 천 년 후에도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일으키게 합니다.”
하였다. 충렬(忠烈)이 늠름하여 섬기는 바에 목숨을 바쳤으므로 오랑캐들도 또한 흠모할 줄 알았다. 열렬(烈烈)한 기개가 추상열일(秋霜烈日)과 더불어 빛을 다투었으니, 족히 천고(千古)의 강상(綱常)을 수립(樹立)하였다 할 것이다. 또 현방의 본관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저는 대내전(大內殿)의 후예(後裔)이므로 자칭 반 조선인(朝鮮人)이라 합니다.”
하였다. 대개 대내전은 곧 박다(博多)의 서도(西都)인데, 백제(百濟) 온조(溫祚)의 후예다. 현방이 박다에서 생장하였으므로 온조의 후예라고 이르고 온조의 후예이므로 반 조선인이라고 칭한 것이다.
진화(秦火) : 진 시황(秦始皇)이 시서(詩書)를 모두 불사른 것을 이름.
29일(경술)
흐리기도 하고 바람도 불고 비도 왔다. 남도에 머물러 순풍을 기다렸다. 바람이 순하면 명일 발행한다는 것을 일행에게 알렸다.
11월
1일(신해)
맑음. 새벽에 망궐례를 행하였다. 남도에서 머물렀다. 접대의 일을 주관하는 대관(代官) 일성(一成)과 정직(正直)이 축전주(筑前州)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근일 풍세가 불순하여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이제야 돌아오니, 지공의 범절에 어긋남이 많아 극히 미안합니다.”
하고, 이어서 들어와 뵙기를 청하므로, 사절하고 보지 않았다.밤중에 소낙비가 내렸다.
2일(임자)
맑음. 평명에 의성ㆍ조흥이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뱃사람들이 모두 서풍이 극히 순하다 하니, 속히 행장을 챙기옵소서.”
하므로, 상사 이하 일행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니 해가 막 솟아올랐다. 대마도 일행의 선박과 여러 왜인의 상선(商船) 1백여 척이 일시에 돛을 달고 바다를 뒤덮어 나가는데, 바람결이 세차서 배는 나는 듯하니, 바라보매 참으로 장관이었다. 다만 파도가 용솟음쳐서 배가 기우뚱거리므로 배 안의 사람들이 태반이나 어지러워 쓰러졌다. 뱃멀미가 가장 심한 자는 역관 장선민(張善敏)이었다.
3백여 리를 행하여 적간관(赤間關)을 10리쯤 못 미쳐에 5층 성루(城樓)가 있는데 백옥(白玉)으로 장식하여 바라보매 눈산[雪山]과 같았다. 인가가 매우 번성하여 큰 들에 가득하고, 흰 모래와 푸른 대가 10리를 연하였다. 성밖에 해자[濠]를 파고 그 위에는 홍교(虹橋 무지개 다리)를 걸쳐 상선(商船)을 통하게 하였으니, 곧 풍전(豐前) 지방 소창(小倉)이라는 곳이었다. 월중수(越中守) 충오(忠奧)가 일찍이 이 성을 지켰는데 지금은 그 아들 □리(□利)가 승습(承襲)하여 그대로 살고 있다 한다.
신시(申時)에 적간관(赤間關)에 다다르니, 이곳은 장문주(長門州) 소속인데 여염이 또한 조밀하였다. 태수(太守) 광원(廣元)은 강호(江戶) 모리(毛里)에 있고, 갑주수 수원(甲州守秀元)은 곧 남방주(南防州) 소속인데, 또한 강호에 있다. 대관왜(代官倭) 서이랑(西以郞)과 등강태랑우위문(藤江太郞右衛門) 등 두 사람이 접대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아미타사(阿彌陀寺)에 사처를 정하였는데, 응접하는 범절과 포진(舖陳)의 화려함이 남도만 못하지 않았다. 절 옆에 사당이 있으니, ‘안덕천황신당(安德天皇神堂)’이라 하였다. 왜인에게 물으니, ‘옛날 안덕천황이 원뢰조(源賴朝)의 침공을 받고 패하여 이곳에 이르러 세궁 역진(勢窮力盡)하자 그 조모가 등에 업고 바다에 들어가니, 시종신(侍從臣) 7인과 궁녀 몇 사람이 아울러 바다에 빠져 죽었다.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여 어린아이의 소상(塑像)을 만들고 사당을 세워 제사를 올리고, 사승(寺僧)으로 하여금 수호하게 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한다.
장문수 광원(長門守廣元)은 휘원(輝元)의 아들이요, 갑주수 수원(甲州守秀元)은 휘원의 양자다. 수뢰(秀賴)가 패한 후에 가강(家康)은 휘원을 죽이지 않고 머리 깎아 중이 되게 하고, 그 식읍(食邑) 10주(州)를 빼앗고 2주만을 광원과 수원에게 나누어 주어 습작(襲爵)하게 한 다음, 두 사람을 모두 강호(江戶)에 머물러 두고 대관(代官)으로 하여금 직무를 행하게 하였다 한다.
월중수 충오(越中守忠奧)는 가강(家康)을 도와준 사람이다. 수뢰가 그 처자를 빼앗아 고주(孤注)로 삼고 충오에게 항복 받으려 하니, 충오의 아내가 그 관하(管下)에게 말하기를,“수뢰가 내 남편을 항복 받고자 하여 나를 기화(奇貨)로 삼으니, 내가 남편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서 이와 같이 구차하게 살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였다. 관하 왜인들이 굳이 만류하였지만 듣지 않고 곧 그 두 아이를 죽이고 스스로 불살라 죽었다. 그 6세 된 딸이 죽을 적에 살려 달라고 빌면서,“앞으로는 절대로 병풍의 그림을 더럽히지 않겠으며, 절대로 정원의 화초도 꺾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한다. 그 잔인하고 혹독함은 왜인의 습성이 그런 것이지만, 삶을 버림에 있어 이같이 과감하니, 또한 열녀인 것이다.
남도에서 적간관까지는 3백 20리다.
고주(孤注) : 노름꾼이 나머지 돈을 다 걸고 마지막 승부를 결정하는 것. 송(宋) 나라 때 거란(契丹)의 침공이 있자, 구준(寇準)이 황제에게 전주(澶州)로 친정(親征)하기를 청했음. 뒤에 왕흠(王欽)이 참소하기를, “폐하는 구준의 고주였습니다.” 했음.
3일(계축)
맑음. 월중수 충리(越中守忠利)의 관하(管下) 왜인 수도서(藪圖書)가 별하정(別下程)으로 쌀 50석, 감 10상자, 술 50통, 닭 1백 수, 건어(乾魚) 1백 마리를 보내 오고, 이어서 뵙기를 청하였는데 무릎으로 기어 들어와 감히 직접 청하지 못하고 대마도 사람 마조(馬助)ㆍ칠위문(七衛門) 등을 시켜 전하여 말하기를,
“태수(太守)가 비록 강호에 있으나, 장군 관백(將軍關白)이 사신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나라에 영을 내려 성경(誠敬)을 극진히 하게 하였으므로 저희들이 태수의 명을 받들어 감히 변변찮은 물품을 올립니다”하므로, 역관들을 시켜 준엄한 말로 거절하였다. 도서(圖書)는 물러가지 않고 굳이 청하기를,
“장군의 명령이 저와 같고, 태수의 분부가 또 이와 같은데, 사신께서 굳이 거절하고 받지 않으시니, 태수가 듣고 어찌 서운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변변찮은 물건을 받아 종자(從者)에게 주십시오.”하므로, 또 박대근(朴大根)을 시켜 사절하기를,
“소창(小倉)은 지나는 길이 아니며, 지공(支供)도 이미 하관(下關)으로부터 보내 왔으니, 주고 받는 예의가 마침내 근거할 데가 없으므로 결코 받을 수 없다. 정은 벌써 받았으니, 속히 가지고 돌아가라.”
하였다. 마조(馬助) 등이 또 입을 모아 받기를 권하기에 부득이 술 50통만 받아 각 선원(船員)과 마도의 여러 배에 나눠 주었다. 장문수 대관(長門守代官) 서이절(西以節)과 등강태랑우위문(藤江太郞右衛門) 등이 또 뵙기를 청하고 별하정(別下程) 세 소반을 남도의 예(禮)와 같이 보내 왔기에, 박대근 등을 시켜 준엄한 말로 대답하기를,
“지나는 일로(一路)에 폐단 끼친 바가 적지 않으나 지공(支供)은 먹는 물건이니 부득불 받은 것이다. 그러나 별하정으로 말하면 받을 이유가 조금도 없으니, 이는 화물(貨物 뇌물로 주는 물건)이므로 결코 받을 수 없다. 빨리 가져 가고 두 말 하지 말라.”
하였다. 칠위문(七衛門)이 또한 굳이 권했지만 듣지 않으매, 그 사람들은 예 예 하고 무릎 걸음으로 물러갔다.
조반 후에 조수를 기다려 배를 탔다. 모든 배가 일시에 항구를 지나니 한 성터가 있는데, 일찍이 문자성(文字城)이라 불렀다. 옛날 파수(把守)하던 곳이었는데, 수충(秀忠)이 관백이 된 후에 달리 시설함은 허락하지 않고 철훼(撤毁)하게 했다고 한다. 북쪽으로 10리쯤 되는 산너머에 큰 부락이 있는데, 집 모퉁이와 분칠한 담이 작은 고개 너머로 살짝 드러났으니, 장문수 광원(長門守廣元)이 사는 곳이라 한다. 혹 돛을 달고 혹 노를 저어 행하는데 날이 저물어서 산기(山崎) 중류에 닻을 내리고 배 위에서 잤다.
하관(下關)에서 산기(山崎)까지는 뱃길로 70여 리였다. 하관은 곧 적간관(赤間關)이다.
4일(갑인)
아침에 흐림. 각 배에서 닭 울음 소리가 일시에 새벽을 알리니, 바다 가운데의 괴로움을 아주 잊어버리고 육지에서 사는 느낌이 들었다. 닭이 세 홰 운 뒤에 배를 띄웠다. 사방이 깜깜하여 동서를 분별할 수 없어 다만 북두칠성을 우러러보며 순풍에 맡길 뿐이었다. 백 리쯤 가니, 바람은 점점 약해지므로 노를 재촉하여 행하였다.
오후에 서풍이 또 거세게 일어나서 물결이 뛰고 치는 바람에 배는 화살같이 달렸다. 흑진(黑津)을 지나 황혼에 상관(上關)에 다다르니, 관을 지키는 왜인들이 별달리 하륙(下陸)을 간청하는 말이 없고 의성과 조흥 등도 또한 사람을 보내어 인도하는 일이 없었다. 상사와 종사가 지레 관사에 내리는 것이 구차한 듯하므로 나 홀로 배 위에서 유숙하였다. 그리고 강우성(康遇聖)을 시켜서 왜통사(倭通事)를 힐책하여, 조흥이 바로 하인을 시켜 사후(伺候)하지 않은 잘못을 전하게 하였다. 밤이 깊은 후에 의성 등이 비로소 그 잘못을 깨닫고 재삼 와서 하륙하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산기(山崎)에서 상관(上關)까지 뱃길로 4백여 리다. 상관은 곧 장문주(長門州) 소속인데, 태수가 왕래할 때에 차를 마시는 곳이었다.
5일(을묘)
맑음. 해가 돋기 전에 모든 배가 돛을 달고 일시에 발행하니, 서풍이 순하여 배가 심히 빨랐다. 유우도(油宇島)를 지나 진화촌(津和村) 앞 포구에 배를 멈추었다. 돛을 내리고 닻을 내려 의성과 조흥이 오기를 기다렸다. 저녁 조수를 이용하여 다시 배를 띄우려 하였는데 날이 벌써 저물고 바람도 순하지 않으므로 배 위에서 그대로 묵었다. 조흥이 등자[橙]ㆍ귤ㆍ침리(沈梨)를 보내 왔다.
상관에서 진화(津和)까지는 뱃길로 1백 20리다. 진화는 곧 이예주(伊豫州) 지방인데 남해도(南海道) 소속이다.
6일(병진)
맑음. 평명에 조수를 기다려 배를 띄웠는데, 북풍이 거슬러 불어 돛을 달지 못하고 노를 재촉하여 갔다. 정오에 과현(鍋懸)에 다다르니 곧 안예주(安豫州) 소속으로 천야단마수(淺野但馬守)의 관할이었다. 대관(代官) 목촌지마(木村志摩)ㆍ도천석견(圖川石見) 등이 접대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의성ㆍ조흥 등이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이곳이 비록 참소(站所)이기는 하나 여기서 도포(鞱浦)가 멀지 않으며 바람이 순하고 해도 이르니, 청컨대 관(館)에 내리지 마시고 그대로 행선(行船)하게 하십시오.”
하였다. 곧 강우성(康遇聖)ㆍ홍희남(洪喜男) 등을 시켜서 왜통사와 같이 대관왜에게 갈 길이 바빠 내리지 못하는 뜻으로 말하니, 대답하기를,“변변찮은 물건을 이미 준비하여 행차를 기다렸는데, 칙사의 하교가 이와 같으시니, 감히 다시 청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강 역관이 돌아와 말하기를,
“관사(館舍)는 행차를 위하여 새로 지었고, 포진(舖陳)한 물건은 지극히 정결했으며, 지공(支供)하는 찬품은 과연 성비(盛備)였는데, 행차가 내리지 않으니 대관 등이 더 없이 섭섭하게 여겨 쌀과 각종 찬물(饌物)을 보내 왔습니다.”
하므로, 군관과 역관을 시켜서 받아들이게 하여 뒷배에 실었다. 촌락(村落)은 겨우 40~50호에 지나지 않았으나, 대숲이 산을 두르고 과일나무가 줄지어 심어졌으며, 풀과 나무가 아직 푸르러 시들어 떨어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지나온 일로(一路)에는 무가 밭에 가득하고, 가을갈이가 한창이었으니, 우리나라 절후로 비교한다면 8월 하순 일기와 비슷하였다.
곧 배를 띄우게 하였는데, 바람이 순하고 쾌하여 왜선이 모두 뒤에 처졌다. 1백여 리를 행하니, 좌편 언덕에 한 큰 마을이 있었다. 이는 곧 안예주(安豫州)의 충해(忠海)인데, 왜말로는 단단오미(斷斷吾味)라 하였다. 왜통사 및 왜사공 등이 이곳에서 배를 멈추어 의성과 조흥의 배를 기다리자고 청하는데 저녁 바람이 알맞고 초승달이 밝아 그대로 배를 띄우고 노를 재촉하였다. 충해 수십 리를 지나서 북쪽으로 바라보니 한 번화한 촌락이 있는데 곧 비후주(備後州) 삼원(三原) 지방으로 술로써 온 나라에 이름이 있다 한다. 겨우 몇 리를 지나니 하늘이 이미 어두웠다. 희미한 달 아래 긴 바람이 배를 보내니, 다만 산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지나는 것이 보일 뿐이었다.
도포(鞱浦)를 10여 리 앞두고 멀리 바라보니, 등불이 번쩍번쩍하고 종소리가 은은하므로 가까이 가서 보니, 바다 어귀 석벽 위에 몇 칸 정사(精舍)가 있는데 이름은 관음사(觀音寺)라 하였다. 배가 지날 때 종을 울리고 기다리면 행인들이 쌀과 돈을 주기도 하고 나무를 주기도 하여 중들의 조석거리가 되게 하였다. 달이 떨어진 후에 비로소 도포(鞱浦)에 다다르니, 거의 3경초가 되었다. 여염이 조밀하고 기와집이 반이 넘었다. 배 위에서 유숙하니, 의성과 조흥이 뒤쫓아 와서 신위문(新衛門)으로 하여금 관사(館舍)에 내려가자는 뜻을 말하였으나, 그 말이 성실하지 않은 듯하고, 지대(支待)하는 왜인들도 또한 근간(勤懇)한 태도가 없었으니, 그 사이에 반드시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다. 참으로 분통한 일이다. 도포(鞱浦)는 곧 비후주(備後州) 소속인데 태수 정칙(正則)은 관백에게 죄를 지어 파출(罷黜)되었고, 현재 태수(太守) 수야일향(水野日向)은 방금 강호에 있으므로 대관왜(代官倭) 삼야수마(杉野數馬)ㆍ남본좌위문(楠本左衛門)ㆍ소출청우위문(小出淸右衛門) 등 3인이 와서 접대하는 일을 주관하였다.진화(津和)에서 도포까지 뱃길로 2백 80리다.
7일(정사)
맑음. 의성 등이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오늘은 바람과 조수가 순하니 일찌감치 발선(發船)하기를 청합니다.”
하기에, 대답하기를,
“어제 밤이 깊도록 배를 타서 신기(神氣)가 매우 편치 못하고 또 여러 차례 숙참(宿站)을 지나왔으므로 양식과 찬물(饌物) 등도 이미 떨어져 격군(格軍)들이 여러 차례 급함을 고하여 왔다. 어제는 밤이 깊어 곧 마련하지 못하였고, 오늘도 해가 늦도록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는데, 매양 관향왜(管餉倭)가 미처 오지 않아서라고 핑계를 하니, 심히 온당치 못하다. 하물며 앞으로 실진(室津)은 3백 리가 되고, 우창(牛窓)도 이곳과의 거리가 2백 리가 못 되지 않으므로 날이 느지막하게 발선하여서는 결코 도달하기 어렵다. 그래서 오늘은 이곳에서 머무르고 내일 새벽 일찍 떠나려 한다.”
하였다. 의성 등이 재삼 하인을 보내어 상선(上船)에 청하여 사시(巳時)말에 배를 띄우므로 나도 부득이 뒤따라 출발하였다.
돛을 달고 포구를 나가 10리쯤 지나와 북쪽으로 한 산을 바라보니, 분첩(粉堞)이 사면을 두르고 여염이 극히 번화하였으니, 곧 비후주 태수(備後州太守) 수야일향(水野日向)이 사는 곳이었다. 이름은 승산성(勝山城)이며, 일명 부산(富山)이라 하는데, 옛날 폐지되었다가 이제 다시 군(郡)이 되었다 한다.
백석도(白石島)를 지나 해질 녘에 하진(下津) 앞 바다에 다다라 배 위에서 유숙하였다. 하진은 해구(海口)의 요충(要衝)이다. 수길(秀吉)이 관백으로 있을 때에 요새를 만들어 파수하였는데, 지금은 철병하고 빈 성만 남았다 한다. 밤에 마도 관향왜(馬島管餉倭) 언우위문(彥右衛門)이 과현(鍋懸)으로부터 따라와 하정(下程)과 찬물(饌物)을 올렸는데, 매우 풍성(豐盛)하여 다른 참소(站所)의 비교가 아니었다. 그러나 도포에서는 한 물건도 주지 않으므로 받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도포에서 하진까지는 뱃길로 1백 리다. 하진은 일명 상진(霜津)이라고도 한다.
8일(무오)
맑음. 닭 울 때 조수를 이용하여 배를 띄웠는데 동풍이 거슬러 불어 돛을 달지 못하고 왜선(倭船)이 좌우에서 끌며 노를 저어 나아갔다. 사시(巳時)에 우창(牛窓)에 다다르니, 곧 비전주(備前州) 소속이었다. 본련사(本蓮寺)에 사처를 정하였다. 선소(船所)로부터 절 앞에 이르기까지 좌우의 인가가 거의 수백여 호가 되는데 남녀들이 길 좌우에서 구경하느라고 담 같이 서 있었다. 한 젊은 중이 자못 문자를 알기에 물으니, 의술(醫術)로 태수의 밑에 있는데, 이제 지대하기 위하여 나왔다 하였다. 태수 비전수 송평궁내 원충웅(備前守松平宮內源忠雄)은 곧 가강(家康)의 외손 지전삼판위문(池田三坂衛門)의 아들이니, 지전이 죽은 후에 충웅이 비전 태수(備前太守)를 이어받아 방금 강호에 있다 한다. 대관왜 지마수 성충(志摩守成忠)ㆍ병부소보 충계(兵部少輔忠繼)ㆍ좌도수 가차(佐渡守家次)ㆍ중대부 성정(重大夫成正)이 접대의 일을 주관하는데 시중드는 왜인들이 모두 나이 젊고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경근(敬謹)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우창(牛窓)에서 10여 리 떨어진 곳에 한 외딴섬이 있으니 모두 석산(石山)인데, 왜인이 집을 짓고 살고 있다. 바야흐로 돌을 떠서 해안(海岸)에 내리는데 산더미처럼 쌓였고 한 덩이 돌의 크기가 집채만큼 하였다. 물으니, 대판(大坂)에서 바야흐로 성 쌓는 일이 있어 여기서 가져간다 하였다.하진에서 우창까지 뱃길로 1백 리며, 우창에서 군치(郡治 군 소재지)까지는 70리라 한다.
9일(기미)맑음. 닭이 세 홰 운 뒤에 의성과 조흥이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조수가 방금 들어와서 발선(發船)할 만합니다.”
하였다. 바로 화각(畫角)을 재촉해 불고 배를 띄워 마도의 모든 배와 일시에 바다로 나가니, 우포(牛浦)의 작은 배가 좌우에서 끌고 노를 재촉하여 사시(巳時)에 실진 포구(室津浦口)에 다달았다. 조흥이 재삼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긴히 면대(面對)하여 아뢸 말이 있으니, 상선(上船) 옆으로 배를 옮겨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조금 후에 조흥의 배도 연달아 이르므로 상사ㆍ종사와 함께 선루(船樓) 위에 좌정했다. 수인사(修人事)도 하기 전에 조흥이 갑자기 말하기를,“일행을 검속(檢束)하는 일로서 일찍이 박 동지(朴同知)를 통하여 누차 전달하였는데, 어제 저녁에 행차 하인이 마도 사람과 서로 싸워 다치기에 이르렀으니, 청컨대 핵실하여 죄를 다스리옵소서.”하므로, 대답하기를,
“하인의 한 일을 일찍이 알지 못하였다. 지금 비로소 들으니 지극히 해괴한 일이다. 마땅히 엄중하게 다스려 경계하겠다.”
하니, 조흥은 즉석에서 사핵(査覈)하여 다스리지 않는 것을 불쾌하게 여겨 발연히 일어나 나가버렸다. 관사에 내려온 후 세 사신이 한 곳에 모여 싸운 사람을 조사하니, 3선 격군(格軍)이었다. 뜰 아래로 잡아들여 곤장 40대를 치고, 귤지정을 불러 조흥의 무례함을 힐책하였다.
실진(室津)은 번마주(幡摩州) 소속이니 미농수 충정(美濃守忠政)의 관할하는 곳이었다. 가강과 수뢰의 싸움에서 충정(忠政)과 그 아들 3인이 모두 가강에게 공로가 있었으므로 그 4부자에게 같이 번마(幡摩)를 지키게 하고 서해(西海)의 여러 도를 총관(總管)하게 하니, 녹봉 받는 것이 60만 석이었다. 맏아들 본전평팔충위(本田平八忠爲)는 곧 수충(秀忠)의 사위다. 가강이 일찍이 손녀를 수뢰의 아내로 주었는데, 수뢰와 가강이 틈이 벌어진 후에 수뢰가 자기를 배반한 것을 분하게 여겨 그 아내를 가강에게 돌려보냈다. 가강은, 여자가 실행(失行)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머리를 깎이고 중으로 삼아 별당(別堂)에 거처하게 하였다. 그 후 수충이 관백이 되자 그 여자의 머리를 기르게 하여 평팔(平八)의 아내로 삼았다. 어떤 사람은, ‘가강이 수뢰에게 꾀를 써서 그 손녀를 몰래 빼내어 돌아오게 하였다.’ 한다.
평팔은 병을 핑계대고 나오지 아니하고 다만 대관을 시켜 접대하는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관사의 헌걸스러운 것과 포진의 화려한 것이며, 찬품의 정결한 것과 기명의 선명한 것이며, 지대의 성근(誠勤)한 것과 사후의 공손한 것이 지나온 다른 곳에 비하여 월등하였다. 이곳에서 군치(郡治)까지는 50리였다. 앞뒤로 여염이 조밀한데 기와집이 태반으로 생계가 부유하였다. 포중(浦中)은 심히 넓고 사면이 산으로 둘러 있어 배 5백~6백 척을 수용할 수 있었다.우창에서 실진까지 뱃길로 1백여 리다.
10일(경신)
혹 흐리고 밤에 비. 실진에 머물러 바람을 기다렸다. 종사가 와서 담화하였다.
11일(신유)
비. 실진에서 머물렀다. 이곳에서 병고(兵庫)까지는 아침에 떠나 저녁에 이를 수 있으니 거리가 멀지는 않으나, 남해(南海)의 대양(大洋)이 그 사이에 있어 대판에서 내려오는 강물 하류와 합하므로, 반드시 바람과 조수가 모두 순한 후에야 배를 띄울 수 있었다. 적간관(赤間關)에서 동쪽은 비록 한편 육지를 따라 행하게 되었으나 물결의 험함이 대양(大洋)보다 심하였다. 황회원(黃檜原 회원(檜原)은 신(愼)의 봉호) 이상고(李尙古 상고는 경직(景稷)의 자)의 일록(日錄)에도 모두 이 일이 실려 있는데 참으로 거짓이 아니었다.
12일(임술)
늦게 갬. 실진(室津)에 머물렀다. 새벽에 동지 망궐례(冬至望闕禮)를 행하였다. 낮에 세 사신이 회의하고 현방(玄方)에게 글을 보내어 조흥을 꾸짖었다.
13일(계해)맑음. 미명(未明)에 의성ㆍ조흥이 사람을 보내어 떠나기를 청하므로, 우리 선원에게 물으니,
“이는 서북풍인데 이른바 횡풍(橫風)으로 발선(發船)할 만합니다.”
하였다. 해돋이에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두 돛을 비껴 달고 행하는데 마도의 여러 배와 일본 상선까지 합쳐 1백여 척이 일시에 돛을 달고 떠나니, 바라보매 성책(城柵)을 두른 듯하였다. 수십 리를 가다가 북쪽으로 해변을 바라보니, 분첩(粉堞)과 층루(層樓)는 반공(半空)을 가로지르고 여염은 땅을 뒤덮어 끊기지 않았다. 물으니, 번마주 주진(幡摩州主鎭)이었다. 실진으로부터 병고에 이르기까지 연해의 일대에 인가가 잇대었는데 모두 큰 마을이었다. 1백여 리를 지나니 또 석성(石城)이 평야에 뻗쳤고, 점포가 즐비하여 몇 리에 가득하였다. 모두 해안을 끼고 있었으니 이른바 명석포(明石浦)라는 곳이었다. 이곳은 태원 우근지(太原右近之)가 다스리는 곳으로 녹봉 받는 것이 20만 석이었다. 해구(海口)를 파수하는 요충(要衝)인데, 지금 번마주(幡摩州)에 속하였다고 한다. 일기(壹岐)서 동쪽으로 경유한 여러 섬과 일로(一路)의 해산(海山)이 모두 자산(赭山)으로 나무 하나 없고 평야도 한 곳 없었는데, 실진으로부터는 평야가 보이고 여염 가운데에 간혹 송림(松林)이 있었다. 명석포를 지난 후로 북풍이 매우 거세게 불어 배가 뛰는 말과 같이 요동하여 배 가운데 사람들이 현기(眩氣)로 쓰러지는 자가 많았다. 신시초에 병고(兵庫)에 다다르니 돛을 달고 실진으로 향하는 상선(商船)이 바다를 뒤덮어 갔다. 또한 장관(壯觀)이었다.
해진 후 다점(茶店)에 사처를 정하니, 점사(店舍)가 협착하여 상사(上使)와 함께 한방에서 유숙하였다. 병고는 섭진주(攝津州) 소속인데 5기내(五畿內) 지방에 속하므로 관백의 장입(藏入)하는 곳이며, 호전 좌위문(戶田左衛門)을 시켜 관리(管理)하게 하였다. 장입(藏入)은 우리나라의 내수(內需)와 같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장입(藏入)이 아니고 창입(倉入)이다.’ 하였다. 대관왜 각남(角南)ㆍ주마(住馬) 등 3인이 지대의 일을 주관하였다. 명석 군장 소립원 우근대부장감(明石郡將小笠原右近大夫將監)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별하정(別下程)을 올렸는데, 쌀ㆍ술ㆍ소ㆍ돼지ㆍ생꿩ㆍ닭ㆍ생선ㆍ건어(乾魚)ㆍ곶감ㆍ유자ㆍ밀감ㆍ사탕, 심지어는 채소ㆍ시탄(柴炭)까지 배에 가득하게 실어왔다.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으니, 사자가 말하기를,“태수가 혹시 행차가 폐군(敝郡)에 정박(碇泊)하시리라 생각하고 박물(薄物)을 준비하였는데, 행차가 들어오지 않으시므로 심히 섭섭하게 여겨 감히 사람을 시켜 뒤좇아 보냈습니다. 이제 하교를 받자오니 황공하여 감히 다시 전달하지 못하옵니다.”
하고, 부복하고 물러가지 않으므로, 부득이 약간의 술과 과실을 받아서 일행 원역에게 나누어 주었다.
번마수 충정(幡摩守忠政)에게 아들 3인이 있으니, 충위(忠爲)ㆍ충승(忠勝)ㆍ정씨(政氏)이며, 그 사위는 우근장감(右近將監)이다. 장감으로써 명석(明石)을 관할하게 하고 또 심복 제장(心腹諸將)으로 서로(西路)의 큰 고을에 배치(配置)하였으며, 전일 서로(西路)에 있던 여러 장수는 동로(東路)에 옮겼으니, 대개 서로는 관동(關東)에서 가장 멀어 수길(秀吉)에게 친신(親信)하였기 때문이었다.
천황가(天皇家)의 딸은 모든 장수와 혼인(婚姻)하지 않는 것이 일본의 국법이었는데, 5~6년 전에 평천황(平天皇) 때의 구례(舊例)를 상고하여, 천황이 그 딸을 지금의 관백 가광(家光)에게 시집을 보냈다 한다. 지금 천황의 성은 원씨(源氏)라 한다.
실진에서 병고까지 수로로 1백 80여 리다.
14일(갑자)
맑음. 아침 식사 때 배를 탔는데, 바람과 조수가 모두 거슬리므로 노를 재촉하여 행하였다. 협포(脅浦)를 지나 서궁촌(西宮村) 앞에 다다르니, 조수가 물러나 더 나아갈 수 없으므로 닻을 내리고 정박하였다. 조흥이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행차의 호송은 도주가 있고, 저희들은 앞길을 검리(檢理)할 일이 있어 먼저 대판(大坂)으로 갑니다.”
하였다. 상사ㆍ종사와 더불어 배 위에서 이야기하였다. 병고는 곧 옛날 복원경(福原京)인데, 여러 섬이 사면을 둘러싸고 가운데 바다가 있으므로 일본 사람들이 중국의 동정호(洞庭湖)에 비긴다 한다. 밤에 달빛은 대낮과 같고 물과 하늘은 한 빛인데, 어가(漁歌)가 서로 화답하고 젓대 소리가 구슬프게 들리니, 경치가 절승하여 사람의 가슴을 시원하게 하였다. 의성이 백주(白酒)와 떡ㆍ귤을 보내 왔으므로 군관ㆍ역관 등에게 나누어 주고, 밤에 배 위에서 유숙하였다.병고에서 서궁촌까지 수로로 50리다.
15일(을축)
흐리고 비 오다가 혹 갬.
밤중에 조수를 이용하여 배를 띄워 노를 저어 행하였다. 노옥촌(蘆屋村)을 지나 점포(店浦) 수리(數里)쯤 앞두고 노옥(蘆屋)의 앞 바다에서 배를 멈추니, 일명 천하기(天河崎)로 이곳 역시 관백의 장입(藏入)하는 땅이었다. 성첩(城堞)과 층루(層樓)가 있고 민호(民戶)도 또한 번성하였다.
평명에 배를 강구(江口)로 옮기니 강구는 곧 점포(店浦)였다. 상사ㆍ종사와 함께 각기 대판에서 보내온 작은 누선(樓船)을 타니 배의 제도가 교묘(巧妙)하여 판벽(板壁)으로 꾸미고 황금을 입혔다. 대개 목판(木板)에 흑칠(黑漆)을 입히고 포진과 기구가 지극히 화려하였다. 그리고 벽에는 단청으로 그림을 그려 사람의 눈을 현란하게 하였다. 물을 거슬러 올라가 좌우를 돌아보니, 갈대는 언덕에 가득하고 기러기가 떼를 지어 나는데, 강 하늘이 막막하고 찬 비가 죽죽 내리니 또한 한 절승한 경치였다. 20여 리를 가니 상선(商船)이 서로 이어 끊이지 않았으며 크고 작은 나무가 양쪽 언덕에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떼[筏]를 지어 강에 띄운 것도 또한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 칠판교(七板橋)를 지나 배 턱에 이르니, 영접나온 인마(人馬)가 언덕을 메웠다. 점포(店浦)로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인가가 즐비하였는데 동쪽 언덕에는 다만 한 줄로 연달았고, 서쪽 언덕에는 여염이 땅을 뒤덮었다. 강물이 제이교(第二橋)의 뒤로 나눠 흘러 별달리 장포(長浦 긴 물가)가 되었는데, 선박(船舶)의 연접한 것과 촌락의 조밀한 것이 또한 그와 같아 동서가 30리, 남북이 10여 리로 시야(視野)가 꽉 찼다.
비가 조금 개기를 기다려 미시경(未時頃)에 대판에서 수 리쯤 떨어진 본원사(本願寺)에 사처를 정했다. 정사년(1617, 광해군 9)에 우리 수신사(修信使 정사는 오윤겸)가 왔을 때에도 또한 이곳에서 머물렀다. 그때에는 절 이름이 아미타(阿彌陀)였는데, 지금 본원(本願)으로 고쳤다 한다. 서쪽으로 큰 시가지(市街地)를 지나니 거리가 이따금 가로 나눠져서 모두 정(井) 자 형으로 반듯반듯하여 사방으로 통달하였으며, 화물(貨物)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백 가지 물건을 모두 구비하였다. 민가(民家)는 60호를 1정(町)으로 삼고, 매정(每町)에 한 이문(里門)을 세워 밤에는 자물쇠를 채우고 지켰다. 옥상(屋上)에는 물통을 예비하고, 집 앞에는 긴 사다리를 세워 화재를 방비하며, 상점에는 매매하는 물건을 문앞에 매달아 알아보기 쉽게 하였다. 언어와 의복은 비록 중국과 같지 않으나, 음식 매매는 중국을 모방한 것이 많았다. 관광하는 남녀들이 길 좌우를 메웠으나 고요하여 떠드는 소리가 없다. 아이들까지도 모두 꿇어앉아 구경하고 감히 어른 앞을 가로막지 않으니, 그 평일 법령이 엄중한 것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사관에 들어온 후 현방ㆍ의성ㆍ조흥이 찾아와 몇 마디 수작한 후 바로 돌아갔다. 대판도 역시 관백의 장입(藏入)하는 땅으로 도전청좌위문(島田淸左衛門)과 구패충우위문(久貝忠右衛門)을 시켜서 지키게 하였다. 그 부관(副官) 말길손좌위문(末吉孫左衛門)과 고서석운(高西夕雲) 등이 와서 접대를 주관하였는데, 찬물은 모두 저자에 사서 올렸으며, 공장(供帳)의 화려한 것과 사후의 공손한 것이 갈수록 더욱 융숭하였다.
점포(店浦) 강구(江口)로부터 오른쪽으로 꺾어져 거의 수십 리를 가면 주길(住吉) 앞 바다에 이르는데, 이곳에는 매년 3월 3일이면 바다가 말라 육지가 된다. 그 넓이는 10여 리나 되는데 원근의 남녀들이 떼를 지어 와 구경한다. 그러나 초 4일 후에는 바닷물이 점점 생기니, 나라 사람들이 괴상한 일이라고 전하여 온다. 강(康)ㆍ박(朴) 두 역관도 일찍이 목격했다 한다.
서궁촌(西宮村)에서 점포(店浦)까지 수로로 50리요, 점포에서 대판까지 강로(江路)로 20리다.
16일(병인)
간혹 흐림. 대판에서 머물렀다. 조흥이 떡과 과일을 보내고, 청좌위(淸左衛)ㆍ충우위(忠右衛) 등도 또한 떡ㆍ과일 등 여러 가지를 보내 왔으므로 일행 원역과 왜통사 등에게 나누어 주었다.
17일(정묘)간혹 흐리다가 밤에 비가 왔다. 대판에서 머물렀다. 행장을 수습하여 작은 배에 옮겨 실리고 별파진(別破陣)ㆍ기패(旗牌) 등에게 시켜 먼저 정포(淀浦)로 보냈으며, 쌀과 잡물은 도주ㆍ조흥 등의 창고에 보관하였다. 각 배에 남게 된 왜 사공에게는 각기 쌀 1석씩을 주고, 우리 사공에게는 한데 합쳐서 쌀 4석과 찬물을 주어 그 뒤처져 있게 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18일(무진)
아침에는 비, 늦게 갬. 평명에 조흥이 직접 사관 앞에 와서 박대근을 불러 말하기를,
“지금은 비록 비가 내리지만, 하늘을 보니 늦게는 반드시 갤 것이오. 인부와 말이 이미 정제되었고 또 중로에 유숙할 만한 곳이 있으니, 날이 늦을 것을 염려 마시고 개이기를 기다려 곧 길을 뜨게 하시오. 저는 앞길에 검찰할 일이 많아 먼저 떠납니다.”
하였다. 곧 일행을 재촉해서 식사를 들게 하고 강 언덕에 나갔다. 세 사신이 각기 전일 타고 온 작은 배를 타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 천ㆍ만교(天滿橋) 두 다리를 지나 비전도(備前島)에 다다르니, 3~4리 앞은 곧 하내주(河內州)ㆍ우치현(宇治縣) 두 고을 물이 합류하는 곳이었다. 남쪽으로 대판성(大坂城)을 바라보니, 층루(層樓)와 비각(飛閣)은 수뢰가 패전할 때에 모두 불타버리고, 이제 다시 공사(工事)를 일으켜 성(城)은 이미 완축되고 목역(木役)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역사(役事)의 거창한 것은 이루 형언할 수 없어 인력으로 이룬 것이 아닌 듯하였다. 성밖에 있는 민가도 그 당시에 또한 모두 탔는데, 이제 이미 복구되어 빈 터가 하나도 없으니, 백성과 물력의 풍부함을 또한 알 수 있다. 성밖에는 곳곳에 조산(造山)이 있고 혹은 구덩이를 메운 곳도 있었으니, 이는 모두 가강이 성을 함락시킬 때에 만든 것이었다. 행장[行李]과 군위(軍威 군대 의장) 등 물건을 여러 배에 나누어 싣고 차례로 나아가는데 예선(曳船)의 왜인들이 천여 명에 가까워 언덕 위에 가득하였고 지나는 동리마다 서로 교대하여 끌었다.
초경(初更)에 평방(平方)에 다다르니, 평방은 곧 하내(河內)의 소속인데, 관백이 왕래할 때 차 마시는 곳이었다. 밤이 깊었으므로 관사로 내려가지 않았다. 대관 등이 숙공(熟供) 올리기를 청하므로, 나는 명일이 기고(忌故)이므로 사양하고 받지 않고 정관(正官) 이하만 받게 하였다. 평방의 옛 이름은 다점(茶店)이다. 집집마다 강 언덕에 누각을 세웠으니, 이른바 청루대제(靑樓大堤)다. 창가(娼家)의 젊은 여자들이 두셋씩 떼를 지어 누각 위에 서서 부채로 사람을 불러 차 마시기를 청한다. 그래서 상인(商人)과 협객(俠客)들이 이곳에 배를 정박하지 않는 자가 없다 한다.달뜬 후에 조흥이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강 비[江雨]는 비로소 개고 달빛은 대낮 같습니다. 이곳은 원래 숙소가 아니니 달 아래 배를 띄우소서.”
하였다. 그 말대로 곧 달빛을 받으며 노를 저어가니 때는 2경이었다.
5경초에 정포(淀浦)에 다다라 날이 밝기를 기다려 관사(館舍)에 드니, 관사도 또한 관백의 다옥(茶屋)이었다. 포(浦)의 왼편에 포루(砲樓)와 성첩(城堞)이 강물을 굽어보고 있으니 곧 송평월중수(松平越中守)가 다스리는 곳이다. 대관 목촌좌위문(木村左衛門)이 와서 지대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남쪽 언덕 위에 큰 건물이 있고 10장(丈) 부도(浮屠 석탑(石塔))를 세웠으니 곧 팔번 대명신(八幡大明神)의 사당이었다. 그 나라 풍속에 팔번(八幡)ㆍ춘일(春日)ㆍ주길(住吉)을 삼영사(三靈祠)의 기도(祈禱)하는 곳으로 삼으니, 팔번은 군사의 출정(出征)하는 것을 주관하고, 춘일은 나라의 큰일에 기도하는 것을 주관하며, 주길은 어린아이의 명 비는 것을 주관하였는데, 백성들이 자못 존신한다 하였다.
포루(砲樓)의 남쪽에 큰 무지개다리[大虹橋]가 있는데, 이는 곧 복견(伏見)을 왕래하는 큰길로, 이른바 경교(京橋)라는 것이었다. 복견은 옛날 평수길(平秀吉)이 살던 곳인데, 병신년 지진으로 함몰한 후에 여염이 태반이나 공허(空虛)해져 다시 옛날의 번성한 모습을 볼 수 없다 한다.정포에서 복견까지 육로로 15리, 복견에서 왜경(倭京)까지 30리, 대판에서 평방까지 강로(江路)로 50리, 평방에서 정포까지 강로로 50리다.
내가 남양(南陽) 원으로 있을 때 꿈에 한 강산(江山)을 유람한 일이 있었는데, 오늘 역람(歷覽)한 것이 완연히 꿈속에서 본 것과 같다. 남양 원에서 체직(遞職)되어 이 사행(使行)으로 오게 된 것이 정해진 명수(命數)임을 비로소 알았다
19일(기사)
개고 혹 눈. 날이 밝은 후 다옥(茶屋)에 내려가 쉬다가 조반을 들었다. 집안에 한 이상한 나무가 있는데 긴 가지가 치렁치렁하여 수양버들과 같았으니 그 이름은 사앵(絲櫻)이고 또 한 나무가 있는데 흰 꽃이 난만하여 한봄 꽃철과 같았으니, 그 이름은 다화(茶花)였다. 그리고 여러 가지 화초를 섞어 심어 앞뒤에 나열하였으니, 모두 우리나라에서 보던 것이었다.
거마(車馬)로 먼저 일행의 짐을 운반하게 하였다. 그리고 조흥이 보내 온 유옥교(有屋轎)를 타고 왜인으로 하여금 메게 하여 사시 초에 육로(陸路)로 발행하였다. 세 행차의 위의(威儀)와 군관(軍官)ㆍ취수(吹手)ㆍ나장(羅將)을 모두 전도(前導)로 삼고 상사 이하가 차례로 행하였다. 20여 리를 지나니, 길가에 한 승원(僧院)이 있는데 이름은 동사(東寺)라 하였다. 교자에서 내려 잠깐 쉰 후 관디[冠帶]를 고쳐 입고 출발하였다. 조흥은 앞을 인도하고 의성은 뒤를 따르니, 정모(㫌旄)와 기치(旗幟)가 10리를 연달았다.
신시(申時)에 왜경(倭京)에 당도하여 대덕사(大德寺) 안에 있는 천서사(天瑞寺)에 사처를 정하니, 곧 그들 국속(國俗)에 이른바 낙양(洛陽)이었다.정포(淀浦)로부터 동사(東寺)에 이르기까지 마을이 서로 연달았는데 모두 대숲 안에 있고, 동서남북 사방을 바라봐도 모두 그러하였다. 동쪽에 한 산이 있는데 이름은 애탕(愛宕)으로 곧 왜경의 진산(鎭山 도읍의 뒤에 자리잡고 있는 산)이다. 이 산의 남쪽에 또 산 하나가 있으니, 곧 혜일산(惠日山)이다. 동복사(東福寺)ㆍ대불사(大佛寺)가 모두 그 아래에 있어, 봄에 꽃이 만발하면 도인(都人)의 관광하는 곳이 된다 한다.
동사(東寺)에서 대덕사(大德寺)까지 20리는 모두 상가(商街) 가운데로 지나왔는데, 인가의 조밀함이나 화물의 산적(山積)함이나 남녀의 분답(紛沓)한 것이 대판보다 10배가 되었다. 거리는 반듯하여 모두 정(井) 자와 같았는데, 바로 난 거리는 정(町)이라 이르고, 가로 난 거리는 통(通)이라 하였다. 정(町)과 통(通)이 서로 교착(交錯)되어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 관광하는 자가 길가에 줄을 지어 좌우를 메웠으며, 심지어 입이 마르도록 찬탄(讚歎)하고 손을 모아 축복하는 자도 있었으니, 대개 존귀(尊貴)하게 여기는 것이었다.
천황(天皇)의 궁궐은 시가지(市街地)의 동쪽에 있는데, 그 앞을 지나니 분장(粉墻)만 바라보일 뿐이었다. 그 나라 사람들이 내리(內裏)라 칭한다 하였다. 4백 년 전에는 나라의 권세와 크고 작은 정령(政令)이 모두 천황으로부터 나왔는데, 원뢰조(源賴朝)가 찬탈(簒奪)한 후부터 정사에 간여하지 않고 관백으로 하여금 총섭(摠攝)하게 하였다. 대대로 왕위(王位)를 장자에게 전하고 그 나머지 자녀는 모두 중[僧尼]으로 삼아 사찰(寺刹)에 흩어져 살게 하고, 오직 의복과 음식만 부귀를 누릴 뿐이었다. 매월 보름 전에는 목욕 재계하고 고기와 훈채(葷菜 파ㆍ마늘ㆍ생강 등 냄새 나는 채소)를 먹지 않으며, 촛불을 밝히고 밤새도록 꿇어앉아 하늘에 기도 올리고, 보름 후에는 평인과 다름없이 고기를 먹고 잠을 자며 좌우 시종(侍從)과 더불어 종일 희학(戲謔)하는데, 제기 차기와 바둑 두는 것 등의 잡기 같은 것도 모두 천황의 궁중에서 익혔다 한다. 관백이 멀리 강호에 있으므로 판창주방수 중종(板倉周防守重宗)으로 하여금 왜경을 지키게 하였는데, 우리나라의 한성 판윤(漢城判尹)과 같다. 접대하는 일을 주관하여 그 하인을 시켜 관사 아래에서 사후하게 하였다.
대덕사(大德寺)에 당도하기 전 몇 리 지점에서 한 여인이 관광하는 가운데 끼어 통곡하며 말하기를,“나는 전라도 창평(昌平)에 사는 사족(士族)의 딸인데, 사로잡혀 이곳에 온 지 세월이 이미 오래입니다. 고향 생각이 간절하나 돌아갈 기회가 없으니, 행차 가운데 창평 사람이 있으면 고향 소식을 묻고자 합니다.”
하였다. 사족의 딸로서 몸을 더럽히고 절개가 이지러졌으니 금수와 다를 것이 없으나, 고향 생각하는 마음은 지극한 정에서 나와, 고향 사람을 찾아 집 소식을 묻고자 하니, 또한 가긍하다.
대덕사는 비록 도시의 여염 가운데 있으나 용보산(龍寶山) 한 모퉁이에 깊숙이 있어 적연히 떠드는 소리가 없으며, 절의 경내(境內)가 광활하여 그 안에 있는 크고 작은 사찰이 무려 수십 채가 되었다. 대문에서 천서사(天瑞寺)까지도 몇 마장이 되었는데, 솔ㆍ수기[杉] 등 교목(喬木)이 사면을 둘러 있고 종려(棕櫚)나무가 뜰에 열지어 있었다. 그리고 우북한 대[叢筠]가 동산에 가득하였으며, 기타 등자ㆍ감귤ㆍ동청(冬靑) 나무가 없는 곳이 없었다. 천서사는 옛 관백 직전신장(織田信長)이 창건(創建)한 것인데, 사승(寺僧)이 지금까지 잿밥[僧飯]을 공양하여 우리나라의 원당(願堂)과 같다 한다.정포에서 대덕사까지 육로로 50리다.
20일(경오)
간혹 흐림. 처음으로 된서리가 내렸다. 대덕사에서 머물렀다. 현방ㆍ의성이 일시에 찾아와 말하기를,
“앞길의 참소(站所)에서 벌써 기다리고 있으며, 이곳에서는 의례 수일 밖에 머무르지 못하므로 23일이나 25일에 발행하려 하오니, 행차의 하인과 짐 가운데 두고 갈 것과 가지고 갈 것을 미리 정하여 전기(前期)해서 정돈하심이 어떠합니까?”
하므로, 대답하기를,“행차는 오랫동안 길 위에 있었으므로 별로 정리할 것이 없으니, 비록 속히 발행하더라도 또한 불가할 것이 없다.”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사로잡혀 온 사람들의 쇄환하는 일은 그대들의 주선만 믿고 있으니, 범연히 넘기지 말고 각별히 힘써 도모하라.”
니, 대답하기를,“전일에 이미 명을 받았으니, 감히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바로 물러갔다. 일본의 역서(曆書)는 열두 달의 대소가 우리나라 역서와는 차이가 있어 일본에서는 오늘이 19일이라 하였다.
21일(신미)
간혹 흐리고, 아침에 잠깐 비가 왔다. 대덕사에서 머물렀다. 조흥이 밀감을 보내왔다. 현방이 동래(東萊)부산(釜山)에 보낼 서계초(書契草)가 완료되었다 하여 역관에게 보내어 사신에게 돌려 보이게 하였다. 대개 세견선(歲遣船) 서계 가운데, 사신이 무사히 왜경에 당도하고 장차 관동(關東)으로 떠난다는 뜻이 약간 언급되어 있었다.
일행의 지공을 왜경으로부터 판출(辦出)하였는데 모두 건량(乾糧)으로 바쳤다. 세 사신은 매일 각 1백 수두(手斗)씩, 당상 역관은 매일 각 50수두씩, 정관(正官)은 매일 각 30수두씩, 중관(中官)은 매일 각 15수두씩, 하관(下官)은 매일 각 5수두였는데, 일용과 찬물은 모두 이것으로써 교환하여 쓰게 하고, 오직 시탄(柴炭)만은 날마다 보내주었다.
22일(임신)
간혹 흐림. 대덕사에서 머물렀다. 아침에 칠위문이 박대근 등을 찾아 보고 말하기를,
“관백의 사자(使者)가 천황에게 문안을 왔다가 오늘 아침에 들어와 말하되, ‘관백이 사신의 행차가 왔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여, 행차가 만약 강호(江戶)에 당도하면 곧 명(命)을 전하게 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만일 그 말과 같다면 회정(回程)이 반드시 세전(歲前)에 있을 것이오니, 심히 다행한 일입니다.”하므로, 박(朴) 역관이 말하기를,
“전일의 사신 행차에는 판창(板倉)이 의례로 즉일에 와서 보았는데, 지금은 며칠이 지났건만 아직 그림자도 보이지 않으니, 어찌 전일의 규례와 다른가?”하니, 대답하기를,
“공의 말이 정히 옳습니다. 판창 역시 즉시 와 보는 것이 예절에 합당한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나, 연달아 사고가 있고 또 관백의 사자가 이제 들어와 접대하기에 겨를이 없으므로 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 말로써 풍전(豐前)에게 말하겠습니다.”
하였다. 풍전은 곧 조흥이었다.
23일(계유)
흐림. 대덕사에서 머물렀다. 부산 훈도(訓導) 최의길(崔義吉)이 박대근에게 부치는 서신을 대마도 사람이 와서 전하는데, 10월 29일에 부친 것이었다. ‘홍득일(洪得一)은 동래 부사, 민여검(閔汝儉)은 울산 부사, 최현(崔晛)은 대사간이 되었고, 그 외의 서울 소식은 근일 서울 장사꾼의 왕래가 없어 듣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만 리 타국에 와서 고국의 소식을 들으니, 비록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하나 또한 족히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조흥이 밀감 한 광주리를 보내 왔으므로 일행의 원역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로잡혀 온 사람으로 이성립(李成立)ㆍ김춘복(金春福)이란 자가 있는데, 일찍이 강(康)ㆍ박(朴) 두 역관과 친분이 있으므로 술을 가지고 찾아왔다. 이어서 말하기를,“조선이 사로잡혀 온 사람을 비록 쇄환하기는 하나 대우를 너무 박하게 한다 하는데, 사로잡혀 온 것이 본디 제 뜻이 아닌데, 이미 쇄환했으면 어째서 이같이 박대하오.”하므로, 두 역관이 반복하여 변론하였으나 오히려 믿지 않고, 또 말하기를,
“우리들이 모두 환자(宦者)로서, 일찍이 북정전(北政殿)에 있어 사령(使令) 노릇을 했습니다. 남충원(南忠元)의 딸과 며느리도 또한 그곳에 있었는데 모두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9월에 북정전이 작고하여 이제는 의탁할 곳이 없으니, 마땅히 관백의 분부를 기다려 거취를 정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성립은 곧 무장(茂長) 사람이요, 김춘복은 진주(晉州) 사람으로 일찍이 사직동(社稷洞)에 사는 내관(內官)의 양자가 되었다가 임진왜란 때에 사로잡혀 왔다 하며, 북정전은 곧 수길(秀吉)의 본처(本妻)라 하였다.
저녁에 작위(爵位)가 높은 천황의 궁인(宮人)이 많은 수종(隨從)을 데리고 우리나라의 인물과 위의(威儀)를 구경하기 위하여 궁중으로부터 왔는데 머리를 싸고 얼굴을 가려 복색(服色)이 이상하였다. 사후하는 왜인들도 또한 누구인지 알지 못하여 그 작위를 물으니, 팔조전(八條殿)이라 하였다. 이는 반드시 천황의 가까운 친족일 것이다. 해지기를 기다리며 문을 닫으라고 간청하더니, 각성(角聲)을 듣고서야 물러갔다.저녁에 비가 왔다. 밤에 종사와 더불어 상사의 관소(館所)에서 담화하였다.
24일(갑술)
비 오다 개다 하였다. 대덕사에서 머물렀다. 의성이 밀감 한 광주리를 보내 왔으므로 일행 원역에게 나누어 주었다. 낮에 판창(板倉)이 공복(公服) 차림으로 보러 오니, 의성과 조흥이 맨발로 분주하게 앞을 인도하여 들어왔다. 상사 이하가 관디[冠帶]를 갖추고 상견례(相見禮)를 행하였다. 판창이 말하기를,“사신께서 멀리 오시느라 노고가 심하지 않으십니까?”
하므로, 대답하기를,“두 나라가 사이 좋게 지내기 위해 사자를 보내어 빙례(聘禮)를 닦으니 발섭(跋涉)하는 수고로움은 직분에 당연한 일입니다. 감히 노고를 말하리까?”
하고, 잠시 자리에 나가 몇 마디 수작하다가 자리를 파하였다. 그 사람이 나이 젊고 우둔하여 예모(禮貌)를 알지 못하여 접견하는 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므로, 조흥이 옆에서 일일이 지휘하니 또한 가소로웠다. 정사년(1617, 광해군 9) 사행(使行) 때에는 그 아비 승중(勝重)이 판창에게 접대의 일을 주관하도록 하였는데, 승중이 연전에 죽었으므로 그 벼슬을 승습(承襲 이어받은 것)하여 일을 보살핀다 한다.
또 천황의 궁인(宮人)으로 자칭 천황의 친 아우라는 자가 있어, 의위(儀衛)와 복종(僕從)을 앞뒤에 옹호하고 역관이 있는 곳에 들어와 구경하고 풍악을 듣다가 갔는데, 의용(儀容)과 의복의 제도는 어제 본 자와 다름이 없다고 한다.
어떤 차 심부름하는 중[茶僧]이 역관에게 말하기를,“왜경과 복견의 사이에 소번산(小幡山)이 있는데, 수뢰의 잔당(殘黨)이 여러 곳으로 흩어져 중이 되기도 하고 농부가 되기도 하였지만 아직도 수백 명이 이 산으로 도망해 들어와서 인가(人家)를 약탈하고 도당(徒黨)을 모은 것이 거의 5백~6백 명이나 됩니다. 관백이 군사를 일으켜 쳐 없애려 해도 간웅(奸雄)이 때를 타서 일어날까 염려되어 아직 제거하지 않고 있습니다.”하였다.
25일(을해)
눈. 대덕사에서 머물렀다. 오후에 현방이 찾아와 이야기가 일본 고적에 미치자, 말하기를,
“근강주(近江州)의 비파호(琵琶湖)와 준하주(駿河州)의 부사산(富士山)은 모두 옛날부터 있던 것이 아니요, 하루 아침에 홀연히 생긴 것이며, 호수 가운데에 또 죽생도(竹生島)가 있는데 명신(明神 밝은 신령)이 바다에서 솟아 나오고 푸른 대[竹]가 하룻밤 사이에 생겼습니다. 지금까지 신전(神殿) 안에 있는데 푸르고 푸르러 마르지 않습니다. 또 나라에 큰 재앙이 있으면 장군악(將軍岳)이 진동하고 남도 대직관목상(南都大職冠木像)이 파열되어 피고름이 절로 흘러나옵니다. 이 모두가 왜사(倭史)에 실려 있습니다.”
하였다. 판창이 하정(下程)으로 생선ㆍ오리ㆍ떡ㆍ과일ㆍ술을 보내 왔으므로 곧 일행 원역에게 나누어 주었다.
26일(병자)
눈, 혹 맑음. 하인 1백 14인을 대덕사에 머물러 있게 하고 군관 노세준(盧世俊)ㆍ김사위(金士偉), 한학(漢學) 송예수(宋禮壽), 화원(畫員) 이언홍(李彥弘)을 시켜서 영솔하게 했는데 간사하고 지나친 일을 엄금하게 하였다. 그리고 각색 차비(各色差備) 3백여 명을 추려내어 이른 아침을 먹고 강호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왜경의 시가지를 경유하여 삼조교(三條橋)를 지나 미시(未時)말에 대진에 다다르니, 대진은 곧 근강주(近江州) 소속으로 태수 소야종좌위문 정측(小野宗左衛門貞側)이 다스리는 곳이었다. 선소주장 관소(膳所主將管沼)와 직부정 정방(織部正定芳)으로 접대하는 일을 같이 주관하게 하고, 대관 굴등병위(堀藤兵衛)ㆍ관소병루(管沼柄漏) 등으로 하여금 지공(支供)을 맡아보게 하였다. 종좌위문(宗左衛門)은 녹봉 1만 석을 받고, 직부정(織部正)은 녹봉 3만 석을 받는 사람이었다. 근강주(近江州)는 땅이 넓고 사람이 많아 세곡(稅穀) 받는 것이 7백 90만 석에 이르므로 장관(將官) 30명이 한 고을을 나눠 지킨다고 한다.
오는 길에 여러 시체(屍體)를 십자가(十字架)와 같은 나무에 온몸을 결박하여 별도로 길가에 세웠는데, 흉측한 형상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 연유를 물으니, 말하기를,“이들은 모두 남의 재물을 도둑질하고 남의 목숨을 해친 자이므로 이 형벌을 가하는데, 창과 칼로 난자(亂刺)하고 까마귀나 솔개 밥이 되게 하며, 뼈는 바람에 날립니다.”한다. 법이 이같이 가혹한 것은 일본의 풍속이었다.이날은 40리를 행하였다.
27일(정축)
맑음, 아침에 눈이 날렸다. 조반 후에 발행하여 몇 리쯤 지나니 큰 호수 하나가 있었다. 비파호(琵琶湖)였다. 호수는 거울같이 맑고 끝 없이 넓은데, 조각 배는 점점이 뜨고 돛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호수 언덕을 따라 수십 리를 행하여 초진촌(草津村) 뇌전교(瀨田橋)를 지나니 아득한 평야가 모두 논[水田]이었는데, 호수를 끌어 관개(灌漑)하여 토질이 매우 기름졌다.
미시(未時)말에 삼산(森山)에 다다르니, 삼산은 일명 수산(守山)이라고도 하는데, 또한 근강주(近江州) 소속이며 서천관음사 조현(西川觀音寺朝賢)이 다스리는 곳이다. 중[僧]을 태수로 삼았으므로 관음사(觀音寺)라고 부르고, 녹봉 5만 석을 받는다 한다. 대관 석하오부병위(石河五部兵衛)와 서천손좌위문(西川孫左衛門)이 접대를 주관하였다. 대진(大津)으로부터 삼산(森山)까지는 푸른 솔이 길 좌우에 연달았고, 도로는 숫돌처럼 편편하였다. 초진(草津)에 당도하여 북쪽으로 한 성을 바라보니, 층루(層樓)와 분첩(粉堞)이 반공(半空)에 솟아 호수를 굽어보고 있다. 한 지방의 웅진(雄鎭)으로 곧 선소주장(膳所主將)이 사는 곳이었다. 동정호(洞庭湖)의 악양루(岳陽樓)를 일찍이 눈으로 보지는 못했으나, 경치의 절승함과 기세의 웅장함은 아마 반드시 이보다 더하지 못할 것인데, 애석하게도 오랑캐 땅에 있어서 문인과 재사들이 그 사이에 품제(品題 평론하는 것)하지 못하게 되었다.강우성이 말하기를,“간밤에 대진(大津) 사람과 더불어 담화하였는데, 한 사람의 말이 ‘조선 사람 이문장(李文長)이 방금 왜경에서 점을 쳐 주고 생계를 하고 있는데, 사로잡혀 온 사람들을 공갈하여 말하기를, ‘조선의 법이 일본만 못하고 생계가 심히 어려워 살 수 없으니,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조금도 이로울 것이 없다.’ 하며, 만 가지 좋지 않은 말로 두루 다니며 유세(遊說)하여 그 본국을 흠모하는 마음을 끊어버리게 하므로 사로잡혀 온 사람들이 모두 문장의 말에 유혹되어 나가려 하지 않는다.’ 합니다. 또 그 마음 쓰는 것이 이와 같으므로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혹 심문을 당할까 염려하여 숨어 나오지 않습니다.”
하였다. 이른바 문장이란 자는 어느 지방에서 왔는지 알 수는 없으나 이와 같은 간사한 무리가 다른 나라에서 날뛰니, 심히 불행스럽고 통분한 일이다.이날은 50리를 행하였다.
28일(무인)
저녁에 흐림. 새벽에 발행하여 장원(長原)ㆍ소남(小南) 등의 마을을 지나 삼부천(三府川)을 건너 사시(巳時)에 팔번산(八幡山)에 당도하니, 곧 마도 사람이 써 보인 노정기(路程記)에 말한 ‘무좌(武佐)’라는 곳이었다. 이곳도 또한 근강주 소속이며, 팔번 태수 소굴원강수(八幡太守小堀遠江守)가 다스리는 곳이다. 녹봉 3만 석을 받는다 하였다. 대관 화전칠좌위문(和田七佐衛門)과 정수십조(井狩十助) 등 두 사람이 접대를 주관하였는데, 사후와 공급이 지극히 정성스러웠다.
점심 든 후에 발행하여 안토령(安土嶺)에 당도하니, 이곳은 옛날 신장(信長)이 진을 쳐서 동로(東路)를 파수하던 곳으로 성첩(城堞)의 유지(遺址)와 여염의 옛터가 모두 완연히 남아 있었다. 호수가 산밑까지 들어와 고깃배가 바람을 따라 오가며, 물고기와 기러기를 길들여 불러오고 놓아보내는 것을 사람의 임의로 하니, 또한 하나의 기관(奇觀)이었다. 안토봉(安土峯)의 맨 꼭대기에 조계사(曹溪寺)가 있는데 절 안에는 신장(信長)의 위패(位牌)가 있다 한다.
길을 재촉했으나 견여(肩輿) 메는 왜인들이 진흙수렁을 헤쳐 나가므로 걸음걸이가 자유롭지 못하여 해가 저문 뒤에 좌화산(佐和山) 종안사(宗安寺)에 당도하였다. 절 뒤에 언근산(彥根山)이 있으니, 곧 이곳의 진산(鎭山)이었다. 여기도 또한 근강주 소속으로 태수 정이소부두 등원 직효(井伊掃部頭藤原直孝)가 다스리는 곳인데, 가강의 외손이요, 지금 관백의 형이다. 녹봉 25만 석을 받는다 하였다. 이 사람도 또한 강호에 있었는데, 수신사(修信使)의 지대를 위하여 관백이 보냈으므로 일전에 이곳에 왔으며, 사행이 지나간 뒤에는 강호로 돌아간다 하였다. 대관 강본반조 선취(岡本半助宣就)와 목역우경조 수안(木役右京兆守安)이 와서 지공(支供)을 주관하며, 직효(直孝) 또한 미복(微服)으로 친히 와서 간검(看檢)하므로, 공장(供帳)의 화려한 것과 사후의 공손한 것이 다른 참소(站所)보다 각별하였다.
사로잡혀 온 두 여인이 스스로 양반의 딸이라 하며, 군관들을 찾아와 고향 소식을 묻고자 하는데, 사로잡혀 온 지가 이미 오래이므로 우리나라 말을 모두 잊어 말을 통하지 못하고 다만 부모의 존몰(存沒)을 물은 다음 눈물만 줄줄 흘릴 뿐이었다. 귀국의 여부(與否)를 물으니, 어린 아이를 가리킬 뿐이었다 한다. 이는 아들이 있으므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수산(守山)에서 팔번산(八幡山)까지 40리요, 팔번산에서 좌화(佐和)까지 70리다.
29일(기묘)
아침에 흐림. 평명에 출발하여 7~8리를 지나 절통령(絶通嶺)을 넘고 또 몇 리를 행하여 마침령(摩針嶺)을 넘으니, 두 고개가 모두 높고 험하여 인마(人馬)가 헐떡거려 간신히 넘었다. 맨 꼭대기에 가마를 멈추고 멀리 평야를 굽어보니, 근강(近江)의 호수가 수백 리 사이에 가득하였으며, 좌화성(佐和城) 가운데에는 여염(閭閻)이 즐비하여 그 번성함이 대판만 못하지 않았다.
오시에 금수(今須)에 당도하니, 이곳은 미농주(美濃州) 소속으로 관백의 장입(藏入)하는 땅인데, 미농주가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목역우경조 수안(木役右京兆守安)이 좌하(佐和)에서 와 접대를 주관하였다. 미시(未時)에 발행하여 관원(關原)을 지나니, 이곳은 가강이 휘원(輝元)과 싸워 승리한 곳인데, 강우성(康遇聖)이 일찍이 사로잡혔을 때에 가강의 군중에서 서로 전쟁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한다.
대원(大垣)에 10여 리 못 미쳐 와서 날이 저물었다. 왜인이 등불로 앞을 인도하여 초경(初更)에 대원에 다다라 화림원(花林院)에 사처를 정하니, 이곳은 미농주 지방으로 강부내선 장성(岡部內膳長盛)의 식읍(食邑)인데, 읍리(邑里)의 번성함이 비록 좌화(佐和)에는 미치지 못하나, 또한 거진(巨鎭)이었다. 미농(美濃)의 세곡이 총 20만 석인데, 10만 석은 장성(長盛)이 받고, 10만 석은 장군 표하(標下)에 있는 세 장수가 받는다 한다. 봉행(奉行) 강전장감(岡田將監)과 덕장좌마(德長左馬) 등이 접대를 주관하였다. 좌화산(佐和山)에서 금수(今須)까지 70리, 금수로부터 대원(大垣)까지는 50리다.
주방 고직(廚房庫直) 1인이 병이 위중하므로 마도 왜인을 시켜 대덕사로 호송하여 치료하게 하고 행차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게 하였다.
30일(경진)맑음. 날이 밝은 후에 발행하여 좌도하(佐渡河) 부교(浮橋)를 지나 묵가(墨街)에 이르러 여염의 점사(店舍)에 사처를 정하니, 또한 미농주 지방으로 장군의 장입(藏入)하는 땅이었다. 강전장감(岡田將監)이 대원(大垣)에서 와 지대(支待)를 주관하였는데, 이 사람은 임진왜란 때에 평행장(平行長)을 따라 평양(平壤)에 왕래하던 자였다. 스스로 말하기를,
“아내는 조선 사람인데, 아들을 낳아 벌써 장성하여 지금 강호에 가 있습니다.”
하며, 몸소 사후(伺候)하기를 극히 공손하게 하였으며, 접대하는 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정성을 다하였다.
점심 든 후 바로 떠나 몇 리를 행하여 제일 부교(第一浮橋)를 건너니 이름이 묵가천(墨街川)이었다. 또 몇 리를 나가 계천 부교(界川浮橋)를 건너니 곧 미농(美濃)ㆍ미장(尾張) 두 고을의 경계였다. 또 10리쯤 행하여 큰 부교 하나를 건너니, 이름이 흥천(興川)이었다. 부교의 제도가 지극히 정묘하여, 배는 모두 새로 만든 것으로 크고 작기가 한결같고, 좌우의 큰 줄은 모두 쇠[鐵]로 되어 그 크기가 다리만 하였다. 강의 양쪽 언덕에는 모두 지키는 자가 있어 지나가는 말[馬]이 판자를 마구 밟지 못하게 하였다. 관광하는 남녀들이 길가를 메우고, 심지어는 배를 타고 바라보는 자가 강의 아래위를 뒤덮었으며, 귀한 집 부녀들이 가마를 타고 길 양쪽에 열지어 있는 자가 또한 얼마인지 알 수 없으니, 참으로 장관이었다. 역관 등이 왜인에게 물으니, ‘모두 삼하(三河)ㆍ미농(美濃)ㆍ미장(尾張) 등 먼 지방 사람들인데 관광하기 위하여 전기(前期)하여 와서 머물렀다.’고 한다.
황혼 후에 명호옥(名護屋)에 다다르니, 인가가 곳곳마다 등을 달지 않은 집이 없고 또 횃불로 길을 비추어 밝기가 대낮과 같았다. 대광원(大光院)에 사처를 정하니, 이곳은 미장주(尾張州) 지방으로 덕천미장 중납언 의진(德川尾張中納言義眞)이 관할하는 곳이었다. 의진(義眞)은 수충(秀忠)의 둘째 아우요, 지금 장군의 숙부이며, 나이는 지금 25세요, 녹봉 70만 석을 받는다 한다. 봉행(奉行) 등전민부경 안중(藤田民部卿安重)이 와서 지공(支供)의 일을 주관하였다. 미장(尾張) 지방은 토품이 기름지고 촌락이 번성하여 성중(城中)의 인가가 수만여 호나 되고 장창(長槍)과 이검(利劍)이 모두 이곳에서 생산된다 한다.
사로잡혀 온 사람 박승조(朴承祖)라는 자가 찾아와 뵙고, 스스로 운봉(雲峯) 사는 양반의 아들이라 일컬으며,“정유년에 사로잡혀 와 지금 미장성주 의진(尾張城主義眞)의 마부(馬夫)로 있는데, 본국으로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사신의 행차가 돌아가실 때에 같이 갈까 합니다. 그리고 아내도 또한 서울 남대문 부근에 살던 사람이니, 마땅히 일시에 데리고 가야겠습니다.”
하였다. 또 두 사람이 와서 뵙는데, 하나는 울산(蔚山) 사람이요, 하나는 진해(鎭海) 사람으로, ‘임진년에 사로잡혀 와 또한 의진의 종이 되어 방금 교사(敎師)로서 사람에게 조총(鳥銃)을 가르친다.’ 하였다. 운봉 사람은 그 말이 거짓 같으나 자못 정녕하게 믿음을 보이므로 돌아갈 때에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해 보냈다.
대원(大垣)에서 묵가(墨街)까지 25리요, 묵가에서 명호옥(名護屋)까지 75리다.
[출처] 동사록(東槎錄) 1 |작성자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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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네이버의 좋은 글을 이곳에 소개해 드리려고 해도 <복사 불가>등 대체로 옮기기가 어려웠는데
이 글은 글쓰신 분의 너그러운 복사가 허용되어 감사히 펌했습니다.
동사록은 우리 진주강문(박사공파 통계공 장파 후손)이 쓰신 꼭 읽어야 할 부분이라 생각되었고
글 중간에 저의 직계 14대조 연(연/ 초명 䞭 1577~1660)께서 개령현감(지금의 김천 부근) 재직시
나이가 갑장이신 통신사 부사(副使)께서 일본에 나가시는 길목에 함창의 선산에 성묘차 나설 때
일가 친척들이 많이 마중나왔다는 이야기도 있어 관심끝에 이 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8월 29일자)의 휘(諱)는 초명으로 나옵니다
부사의 군관등에 보이는 진주강문 인물들이 아마도 가깝게 지내셨던 일가들이 아닐까? 짐작하면서
한분 한분 나오시는 인물과 인물사전, 족보등의 대조확인도 해 볼 요량으로 욕심을 내보지만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나머지 동사록 부분(2)(3)은 글하단의 네이버 출처로 직접 찾아 읽어 주시기 바라며,
꼭 댓글을 남겨 고마움을 표시하시는 것도 잊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