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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말했었지
꿈을 가진 자는 성공하게 된다고
나는 꿈을 꾸지 꿈을 가진 자가 되는 꿈
아버지 어머니 나를 그렇게 보진 마세요
(후렴) 제발 졸업하면 뭐하냐고 묻지 말아요
나도 몰라 나도 몰라 나도 몰라
그러니 묻지 말아요
너는 말했었지 대학 가서 하고 싶은 것들 하라고
오직 하고 싶은 건 대학 가는 일 뿐이었네
똥 만드는 식충이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너는 말했었지 보이즈 비 앰비셔스
벗 낫 언틸 트웬티포
아이 앰 트웬티포 나 참 어쩌라는 건지
유학에 취직 준비를 하는 동기들아
나도 따라가야 하는 건가
어머니 나는 가끔 세상이 얼마나 미쳐 있는지
어머니 나는 가끔 세상이 얼마나 미쳐 있는지
어머니 나는 가끔 세상이 얼마나 미쳐 있는지 잊곤 합니다
(고아침 2007 연세대 진로탐색 프로젝트 록밴드의 “졸업생을 위한 송가”)
초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한국 대학생의 딜레마와 대학사회
조한혜정 (문화인류학)
1. 대학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나는 오늘 대학을 그만 둔다… 나는 25년 동안 경주마처럼 길고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함께 질주하는 분주한 친구들을 제치고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앞질러 달려가는 친구들 때문에 불안해하면서 소위 명문대 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취업’이라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시켜줄 자격증 꾸러미가 보인다. 너의 자격증 앞에 나의 자격증이 우월하고 또 다른 너의 자격증 앞에 나의 자격증이 무력하고 ,그리하여 새로운 자격증을 향한 경쟁의 질주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현실임을 마주하고 있다. 대학은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가 되어 내 이마에 바코드를 새긴다… 이 변화 빠른 시대에 10년을 채 써먹을 수 없어 버려지는 우리들은 또 대학원에, 유학에, 전문 과정에 돌입한다. 고비용 저수익의 악순환은 영영 끝나지 않는다. ‘세계를 무대로 너의 능력만큼 자유하리라’는 세계화, 민주화, 개인화의 넘치는 자유의 시대는 곧 자격증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2010. 3. 10. 김예슬)”
2010년 3월10일 이웃 대학의 한 경영학과 학생이 대학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위 글은 그 학생이 대자보로 세상을 향해 밝힌 ‘대학을 거부하는 글’이다. “명문을 버려라, 조국을 등져라, 세계를 탐하라”는 대학 슬로건이 나올 정도로 글로벌 경쟁시대에 살아남아야 한다는 대학 나름의 절박감도 있지만, 다른 한편에는 고실업 불안정 고용사회에서 제대로 먹고 살 수 없을 것이라는 대학생들의 불안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그간 학생들을 살벌한 경쟁에 몰아넣는 파행적 공간이라는 비난을 고등학교가 받아왔다면, 이제 그 화살이 대학으로 이동해오고 있는 듯하다.
‘입시 전쟁’에서 해방되자마자 곧바로 ‘스펙 전쟁’으로 돌진해야 하는 대학생들은 이제 대학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진리를 이야기하며, 앞으로 살아갈 삶을 기획하고 성찰할 시간을 갖는다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하게 되었고 그 결과 김예슬씨와 같은 학생들은 대학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자발적으로 대학을 떠나는 학생에게는 제 삶을 새로이 기획할 기회라도 있지만, 과로로 사라진 경우엔 그런 기회조차 없다.
2009년 10월 21일에는 이웃 대학교 4학년 학생이 과로사 했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그는 경영학과 경제학, 그리고 법학 등 세 가지 분야를 전공하며 로스쿨 입학을 준비하던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도대체 지금 대학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불과 5, 6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대학은 인재들이 서로를 성장시켜 나가는 배움의 생태계였다. 협력하면서 동시에 경쟁할 줄 아는 창의적인 청년들이 의기투합하여 다양한 실험을 벌이면서 ‘시대’를 만들어갔고 말이다. 그러나 요즘 대학에서는 그런 학생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미래가 불안한 대학생들은 혈혈단신으로 경쟁을 하고 안간힘을 쓰느라 정신이 없다. 입시 공부와 취업 준비에 매진하는 대학생들의 ‘공부’ 열기로 대학도서관은 가득차지만, 시대를 읽어내고 타인과 문제의식을 나누는 소통의 열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공공의 지혜를 모아내는 인재, 자원을 적절하게 재배치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갈 인재를 만나기는 힘들게 된 것이다.
지금 학생들은 아주 많은 정보를 알고 있고 ‘자기 계발’을 게을리 하지 않지만, 그 모두가 개별적 경쟁의 게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대학이 이토록 변해버린 지금, 한국사회는 과연 지속적으로 멀리 내다볼 줄 알고 유연한 사고를 가진 창의적 인재를 키워낼 수 있을까. 이 글에서 나는 2000년대 대학의 변화를 2008년과 2009년에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현재 대학의 문제적 상황을 진단하고 해법을 찾아보고자 한다.
2. 강도 높은 경쟁과 노동 : 입시 경쟁, 스펙 경쟁에서 취업 전쟁까지
고등학교 때의 이유 없는 불안과 초조함을 대학에 들어가면 없앨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입학 후 불어 닥치는 칼바람에 어쩔 줄 모르고 이리 저리 방황하고 있다.
― 이종호 (2008학번)
누군가가 “먹기 위해 사는 가 아니면 살기 위해 먹는가?”라고 묻는다면
“먹히지 않기 위해 산다." 라고 답하고 싶다.
“먹힌다.”는 의미는 나의 잠정적인 경쟁자를 포함하여 내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나의 모든 경쟁자들에게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나는 지는 것이 두렵고 낙오되기 싫다.― 민윤지 (2008학번)
다른 사람들이 내게 보이는 압박, 그것을 응축하고 있는, 벌레 보는 듯 하는 시선이 무섭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진다. 뭐라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가 나를 잉여인간으로 낙인 찍어버리고 아무도 나를 찾지 않게 된다….
누구나 나를 찾을 수 있도록, 아니 시장에서 나를 찾아줄 날을 기다리며 나를 관리하는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 홍성우 (2009학번)
위의 세 문단은 2009년도 가을학기 내 강의를 수강한 학생들이 쓴 숙제 글에서 따온 것이다. 수업 자체를
인류학적 연구의 현장으로도 활용하는 나는 2009년도 2학기에 <지구촌 시대의 문화인류학>을 수강한 학생들에게 1)자신들이 가진 공부의 비법 2)자신이 받은 사교육과 매니저 맘에 대한 생각, 그리고 3)‘고딩의 일상’을 적어보라는 숙제를 주어 자신들이 지내온 삶을 기록하고 성찰해보도록 하였다.
이들은 1990년대에 태어나 1997년 IMF 금융위기 때 초등학교를 다닌 세대로, 어린 시절 물질적 풍요를 누린 소비 세대이자 초등학교 즈음 갑작스런 경제 위기로 실직과 절망에 빠진 부모 및 이웃의 공포를 간접적으로 경험한 세대이기도 하다. 이들은 자유와 개성을 강조하던 윗세대 형들과는 달리 경쟁과 효율과 자기 책임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일찌감치 편입이 되었고, 2000년 이후 급격히 확장된 사교육 시장을 드나들며 입시 전문가와 준 입시 전문가인 어머니 아래서 자라났다. ‘학교는 친구를 만나고 점심을 먹으러 가는 곳, 공부는 학원에서 하는 것’ 식의 구도 속에서 자라며, 비싼 학원에 다니는 것이 자랑이 되는 세대로 성장한 아이들인 것이다.
다음에서 나는 시장 사회가 키운 이들 2000년대 후반 학번들의 삶을 1)입시 경쟁, 2)스펙 경쟁, 3)취업 경쟁이라는 세 단계로 나누어 보다 구체적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대학 입시 경쟁: 학교와 학원과 집을 맴돌다
대학생들의 숙제 글에서 나는 크게 세 가지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었다. 먼저, 학생들의 공부비법에 관한 숙제 글에서 “삶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경쟁이다”, “공부는 마라톤이고 잘 닦인 고속도로에 오르기 위한 티켓이다”, “공부를 혼자 하는 마라톤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하다가는 혼자 지쳐 나뒹굴 수 있다. 라이벌을 정해서 경쟁을 해야 하지만 단 너무 높은 경쟁상대는 설정하지 말아야 한다. 자칫 절망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등으로 경쟁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면서 경쟁을 즐기는 훈련을 해왔고, 그 결과 경쟁을 철저하게 내면화하고 있는 모습을 보였다.
두 번째로 이들은 철저한 플랜을 통해 자기 관리를 해오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대부분 학생들이 스터디 플래너(프랭클린 다이어리)를 사용했으며, 1초 계획부터 10년 계획에 이르기까지 촘촘히 계획을 세우는 데 능숙했다. 특히 이들은 입시를 예비군대 생활에 견주며 피할 수 없는 그 시간의 노동을 즐거운 노동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갖가지 비법을 쓰고 있었는데, 공책 정리를 최고로 예술적으로 한다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인터넷 강사를 찍어서 그분의 팬이 되면서 공부를 한다거나, 또 학원에 짝사랑하는 상대를 찍어두고 잘 조절된 연애를 통해 즐겁게 공부를 하는 것 등이 그 비법으로 자주 인용되었다.
세 번째로, 공부를 잘하는 편에 속하는 이 학생들은 성적순으로 선택된 “키워지는 아이”로서, 그 특권의식을 한껏 즐기면서 경쟁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당당하게 학원숙제를 하고 수업 중에 잠을 잤으며, 때로는 학교의 특권층으로 힘없는 아이를 ‘빵 셔틀’(집단으로 한 아이에게 매점에 가는 심부름을 시키는 것)을 시키는 등 집단 따돌림에 가담함으로서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였다. 또, 학원과 학교 공부로 인한 14시간 ‘중노동’으로 쌓인 스트레스를 팬덤 활동이나 ‘3분마다 웃겨주는 인터넷 유명강사의 강의’를 쇼 삼아 보는 것으로 해소해냈다. 즉, 이들은 시간과 삶을 철저하게 관리하는 습관을 들이는 한편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정보를 차단하면서 좁은 삶의 반경에서 안정을 구하는 영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들이 이토록 경쟁적 학습과 사교육 시장에 밀착된 데에는 교육 제도의 변화와 새로운 대학 입시 전형의 등장이라는 요인이 자리하고 있다. 1998년 김대중 정권의 ‘국민의 정부’는 지식기반사회의 인재를 키워내야 한다는 목표를 세워 학생들의 개성과 개별 능력을 키워주는 교육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에 이해찬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은 “하나만 잘하면 대학 간다.”는 모토 하에 정규 수업 이외의 모든 ‘자율학습’을 금지시켜 학생들로 하여금 소질에 맞는 배움의 길을 터주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개혁 조치는 한편으로 학부모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부모들은 자녀들의 소질을 키우기보다 학원을 통해 입시공부를 더 많이 시키는 쪽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수시로 변하는 교육정책을 신뢰하지 않았던 학부모들은 국가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시장의 교육 전문가와 손을 잡아버린 것이다.
획일적 인재가 아닌 다양한 재능을 가진 학생들을 뽑겠다는 취지로 대학 입시에 수시 입학제도와 논술 등 특기자 선발제도가 도입되면서 입학요건은 더욱 복잡해졌는데 이런 상황은 결과적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교육시장 접근 가능 계층 자녀의 대학 입학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으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부유한 가정의 어머니들은 온갖 정보를 동원해서 초등학교부터 아이들을 족집게 학원에 보내며 자녀의 성적을 관리하였으며, 자녀가 정규적 트랙으로 명문대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 시엔 입시 전문가들의 코치 속에 조기 어학연수나 재능 교육, 수상대회, 해외봉사 경력을 쌓아 ‘글로벌 리더’ 전형 등을 통해 자녀를 대학에 입학시켰다. 명문대에 부유층 자녀들의 비율이 급격하게 늘어났다는 통계는 곧 사교육 시장이 대학 입학에서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참고로 2009년 경제 협력 개발기구(OECD) 조사에서 한국은 교육기관 민간지출부분에서 1위를 기록했다. 이 게임을 받아들이기 힘든 부모들 중 일부는 자녀를 대안학교에 넣거나, 해외에 데리고 나가 교육을 시키는 등 과감한 결단을 내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런 선택을 할 담력이나 재력을 갖추지 못하였다. 결국, 다수의 학부모들은 철저하게 자녀의 일정관리를 하는 어머니의 정보력과 관리 능력, 그리고 사교육비를 댈 수 있는 가족의 경제력에 의해 좌우되는 입시 경쟁 판에 휘말리는 현실이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중요한 문제는 이 같은 사교육 시장과의 결탁과 도구적인 입시공부가 자라나는 세대의 능력과 인성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먼저, 어릴 때부터 ‘선행학습’에 익숙해진 아이가 어떤 인간으로 성장할 지에 관해 생각해 보자.
2000년대 이전까지의 초등학생들이 태권도나 피아노 학원을 다닌 것과 달리, 이후 의 초등학생들은 미리 학습 진도를 앞서나가는 ‘선행학습’을 위해 입학 전부터 학원에 다녔다. 학교에서 할 것을 미리 배워나가는 선행학습은 아이로 하여금 높은 성적을 받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구조적으로는 불공정 게임이며 개인 차원에서는 배움에 대한 그릇된 습관을 갖게 할 가능성을 높인다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결국 학원의 선행학습을 거치지 못한 학생들이 학교에서 체계적으로 소외되는 현상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사교육 시장에서 배제된 계층의 아이들이 공교육에서도 체계적으로 배제되는 불공평한 교육현장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상황은 비슷한 경제상황에 있는 이들끼리만 어울리게 하여 학생들이 보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부차적 역효과를 내기도 한다. 결국 선행학습이라는 것은 학교가 지진 평준화 제도의 공공성을 일시에 허물어버린 동시에 자녀들에게 학습과 관계맺기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심어주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우려되는 심각한 문제는, ‘입시공부’가 창의적이고 자기주도적인 학습능력을 퇴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입시공부는 갈수록 ‘공부 비법’ ‘면접 요령’ 등 비법과 편법을 가르치는 장이 되어가고 있고, 학원은 장기적인 학습보다 단기적으로 족집게처럼 효율적으로 정답과 공식을 가르쳐 주어 가시적 성과를 내야 한다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렇게 단기적 성과주의에 익숙해진 학생에게 대학에서의 인문학 공부가 낯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주어진 교과과정 안에서 얼마나 빨리 문제를 푸는가에 익숙해져있기 때문에 스스로 문제를 파악하거나 질문을 새롭게 던지는 능력은 퇴화되어 있는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정확한 답이 있는 질문의 해답을 찾는 기술만을 배워 온 이들 세대는 불확실한 상황에 들어섰을 때 속수무책이 될 확률이 높은 ‘시험’에서만 성공하는 인재가 될 가능성이 높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주문을 외우면서 삼년의 긴 연마를 해낸 이들이 가진 또 다른 문제는 이들이 너무 바쁜 나머지 ‘공동체적 삶’을 경험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경쟁 일변도의 교육체제가 양산한 인재는 그림 1에서 보듯 기본적으로 집과 학교와 학원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만나는 사람도 어머니와 학원교사와 담임이며, 외국 조기 유학을 가서도 실제로 어머니의 품에서 맴도는 시간이 가장 많다.
그림1. <‘인재들’의 경험세계 트라이앵글>
결국 이들 상당수의 ‘포트폴리오’(경험으로 쓴 이력서)가 조기 해외 어학연수나 다양한 자원봉사 등으로 화려하게 채워져 있다 하더라도 이 모든 경험들은 이미 잘 짜인 틀 안에서 이루어진 것들일 뿐, 이들은 사실 그 틀을 벗어난 경험을 해본 적이 없다. 어려서부터 누군가가 만들어준 판에서만 놀았던 이들은 낯선 상황에서 낮은 수행능력을 보이게 된다. 즉, “창의적이 돼라” 혹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만들어보라”는 말은 이들에게 부담스러운 말이다. 과열화된 경쟁을 통해 배출되었으며, 이미 정해진 길을 선호하는 성향의 우수한 학생은 특정한 경쟁에 단련된 단기적 인재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시대적 전환을 이뤄낼 창조적 인재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2) 학점 경쟁: 기술노동으로서의 스펙 쌓기
그렇다면, 입시 경쟁의 터널을 지나 그들이 맞이한 대학생활은 과연 어떠할까? 주지하다시피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수능 끝, 행복 시작’이라는 예비 대학생들의 공식은 깨어지기 시작했다. 대학에 합격한 '해방감'을 맛볼 겨를도 없이 입학과 함께 고시·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하거나 안정된 직장을 얻기 위해서 4년 평균 A학점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모든 동료 학생들을 라이벌로 여기며 입학초기부터 ‘스펙 관리’에 들어가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대학입시 준비 때와 다름없이 철저한 시간 통해 학점, 영어 성적, 인턴십 경력, 자격증 관리에 들어가는 것이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 살아남기 위해 중장기 단계별 목표를 세우고 전력투구하는 이들은 다른 가능성에 대해 상상을 하는 것을 시간 낭비라 여기며 한눈을 팔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삼삼오오 모여서 록 밴드 팀도 만들고 농활도 가고 여행을 떠나는 등 새로운 실험의 장을 다양하게 펼치면서 입시에 찌든 몸을 풀고 새로운 준거집단을 만들어가던 선배 세대와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인 것이다.
어머니와 학원에 의해 길러진 이 경쟁세대는 실로 1990년대 학번과는 매우 다른 성장과정을 거쳐 왔다. 우선 이들은 어릴 때부터 또래와 함께 독자적으로 무엇을 시도할 시간이 별로 없었던 세대이다. 이들 중에는 어머니가 가장 친한 친구라는 이들이 적지 않으며, 그래서 절친한 또래 친구는 없는 편이다. 어릴 때부터 ‘승자 독식’의 가치를 당연시하면서 자라난 이들은 대학에 와서 동료들끼리 뭔가 해볼 시도를 하긴 하지만 관계 맺기에 실패하는 경험을 한두 번 하게 되면 다시 홀로 게임으로 돌아서버리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학생회 활동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대학 등록금이 해마다 오르자 총학생회에서는 등록금의 국가 부담금을 높여야 한다는 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막상 당사자인 학생들의 참여는 저조한 것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다.
이런 현재 대학생들의 삶의 특징을 잘 표현하는 또 하나의 단어로는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의 줄임말)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용어는 자기 자녀를 다른 집 자녀와 끊임없이 비교하는 어머니의 행동을 빗대어 하는 말인데 모든 조건을 갖춘 인재를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0.1%의 대한민국 인재를 0.1%의 세계적 인재로 만들겠다.”는 한 사립대학교 경영대학의 광고는 “전 세계를 무대로 재능을 마음껏 펼칠 0.1%의 글로벌 리더”로 키워주겠다는 식의 학원 광고의 내용이 되었고 열심히만 하면 자녀들을 글로벌 인재로 키울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그러나 다수의 학생들은 자신이 ‘엄친아’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실상 ‘엄친아’는 상대적인 기준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현 체제에서는 거의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조건을 갖지 못한 것에 대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
그 뿐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이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 채 학자금 마련에 허리가 휘는 부모에 대해 미안해해야 하는 ‘쏘리 세대’가 되어가고 있다. 항간에서는 입시와 스펙전쟁에서 이기는 네 가지 조건은 “할아버지의 재력과 엄마의 정보력, 아이의 체력”이라는 말이 유머처럼 떠돌고 있는데 실제로 획일적 스펙 전쟁은 사실상 계급재생산으로 귀결되고 있는 중이다. 일선 교사들 사이에서는 “돈 있는 집 자식들이 성격까지 좋다”는 말이 나돌고 있으며, 대학에서 돈 있는 집 자식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는 것이 교사들 사이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실제로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을 갖춘 상위 1%는 구태여 국가에서 신경을 쓰지 않아도 제대로 스펙을 갖추고 졸업 후 좋은 직장을 가질 확률이 상당히 높다. 그들이 얼마나 사회에 헌신적인 인재일지는 알기 어렵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녀 교육을 위한 투자-학생들은 부모의 지원을 ‘투자’라고 표현 한다-를 아끼지 않은 어머니와 가족에게 대단한 감사의 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반면, 부모의 자산이 한정된 일반 중산층의 경우 학자금 대출로 큰 빚을 안고 대학을 졸업하게 되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어머니의 판단에 따라 투자 가치가 적은 동생은 희생을 당하는 등의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부모님이 고생을 하는 것을 본 어느 학생은 나중에 자신들이 그 투자를 갚지 못한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부모님께 그것이 늘 미안하다고도 했다. 이들 ‘쏘리 세대’가 가진 좌절감과 미안함의 이중적 부담은 한창 도전과 창의력으로 꿈을 키워나가야 할 세대에게 지워진 커다란 짐이 아닐 수 없다.
3) 취업경쟁: 승자와 패자가 없는 양극화 현상과 ‘나홀로족’의 등장
한국에서 명문대로 손꼽히는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 신입생 2009년도 여론조사 통계를 보면 희망 진로 부분에서 25.5%가 고시 공부, 21.6%가 대학원, 18%가 전공 관련 전문직을 선택하고 있으며, 일반 회사에 취업하겠다는 비율은 8.7%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마디로, ‘철밥통’이라고 간주되는 최고의 전문직에 도전하거나 ‘취직’을 일단 유보하는 ‘취학’을 선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대학원에 가려는 수가 많은 것은 청년실업문제가 고질적인 문제임을 잘 알고 있고 가능한 한 기존의 취업전쟁에 들어가기를 유보하고 싶어 하는 이들의 판단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조직에서 일하는 것은 ‘소모성 건전지’가 되는 것이라고 느끼고 있으며, 가능한 한 쉴 틈 없이 일해야 하는 ‘고속전철’을 타지 않기를 바란다. 이미 이들은 ‘성공한’ 선배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이들이 본 선배들의 삶을 짚어 보자. 원하는 고시 시험에 합격하여 ‘철밥통’의 직장을 갖거나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취직을 하여 일단의 ‘신의 직장’에 입성한 졸업생들은 실로 적지 않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들 가운데 4~5년의 직장 생활 후 대학원 진학이나 유학을 위해 추천서를 받으러 오는 이들이 부쩍 늘어났다. 고시 관문을 통과하여 6년 동안 외교관련 공무원 생활을 한 졸업생은 막상 현장에 가면 현장의 다수를 이루는 ‘서울대 출신’이 아니어서 밀리고, 여자이기에 밀리고, 대학 때 전공학과가 ‘외교학과’가 아니어서 밀리더라며 내내 경쟁에 휘말려야 하는 그런 생활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 유학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대기업에서 10년을 일한 졸업생도 직장생활에서 불안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여서, 일에서 보람이나 재미를 찾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자녀들 학원비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높아져 무기력함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회사맨’의 궁극적 성공은 임원이 되는 길 뿐인데 그것은 결코 보장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칫 하면 아파트 한 채도 마련하지 못한 채 조기 은퇴를 한 후 자녀의 학자금을 벌기위해 무슨 일이든 새로 시작할 것이 뻔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 합리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으면서 최전선에서 경쟁적 기업 활동을 임하다 보니 때로 ‘반사회적인 행위’도 불사해야 하고, 조기 유학생 출신이나 교포출신에게 승진 시험에서 밀리기도 해 기운이 빠질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군대 조직’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충성을 요구하는 조직문화, 몸이 견뎌내기 힘든 수준의 높은 노동 강도 그리고 좀처럼 보람을 찾을 수 없는 직무의 특성 등 이들이 다른 직업을 상상하는 데에는 공통된 이유들이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대학에 다니는 동안 다른 곳을 전혀 기웃거려보지 않고 ‘한 줄 서기’에만 몰두했던 것에 대해 크게 후회하면서 목수나 요리사의 꿈을 꾸고 있기도 했다.
이런 선배들을 보며 비경쟁적이고 대안적인 ‘다른 미래’를 꿈꾸는 소수도 있지만, 다수는 여전히 안전해 보이는 고시와 자격시험으로 몰려들고 있다. 이것은 그간 익숙해진 선행학습식의 공부, 곧 고시공부를 계속하는 삶의 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시간이 좀 지나면 고시공부는 통과를 목적으로 한 것이라기보다 그 외 다른 할 것을 찾지 못해서 그 자체로 삶의 방식이 되기도 한다. 고시공부를 한다는 생각에 친구들과 마음껏 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공부에 몰입도 잘 되지 않는 그런 어중간한 상태에서 부유하는 청년들이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이런 상황을 일찌감치 감지하고 취직 대신 결혼을 목표로 스펙을 쌓는 영리한 여대생들도 생겨나고 있다. ‘취업’ 대신 ‘취집’을 선택했다고 불리는 이들로, 어머니나 결혼 정보회사, 생애 컨설턴트들과 상의하여 성공적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실제로 이들의 목표는 남편을 만나는 것만이 아니라 평생 먹고 살 돈이 있는 집안에 ‘시집’을 가는 것이기 때문에 시부모를 직장 상사 모시듯 즐겁게 ‘모실’ 준비가 되어 있는 편이다. 결혼까지도 시장화 된 이런 현실은 모든 것이 ‘개인’ 이 책임을 지고 살아가기를 명하는 공공성이 사라진 시장질주 사회가 만들어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은 암울할 뿐이라면서 아예 고슴도치처럼 홀로의 굴속으로 숨어들어가는 청년들이 늘어나는 것 역시 이런 시대적 산물이다. 이들은 기존 노동시장의 ‘정품 인생(정규직)’으로 살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길을 모색할 자신도 없는 편이다. 주로 중산층 자녀들 중에서 찾아지는 이 부류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는 존재’로, 직장도 갖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자신에 비해 아주 많은 경제적, 사회적 자원을 가진 부모에게 빌붙어서 어떻게든 편히 지내보려 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원하는 것, 기대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의 괴리가 점점 커지면서 선뜻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느낌 속에서 마냥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경우이다. 부모들은 이들을 부양하기 위해 계속 직장을 다니고도 한다는데, 이웃 일본에서도 적절한 직장을 갖지 못한 ‘자녀부양’을 위해 조기 은퇴를 못하는 부모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캥거루족’, ‘빈대족’, ‘파라사이트 싱글’ 등으로 불리는 성인 자녀들이 선진국 전역에서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현재 부모와 자녀들은 입시라는 공통의 목표를 중심으로 단결한 것처럼 보이는데 입시나 ‘투자’가 끝난 시점이 어디일지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를 두고 부모 자녀간의 적나라한 신경전이 펼쳐지기도 한다. 부모들이 자신들이 전폭적으로 투자를 했던 자녀에게 계속 기대를 걸고 ‘간섭’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어머니 마음에 차지 않는 직장에 취업을 한 경우 “그만 두고 고시를 하라”고 명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결혼생활을 하는 딸에게는 이혼을 하라고 명하기도 한다고 한다는 사례가 이런 지점을 잘 드러낸다. 스폰서인 부모의 힘이 워낙 막강하여 독립적인 운신의 폭을 갖기 어려운 자녀들이 등장하고 있고, 이와 동시에, 자녀에게 충분한 ‘스폰서’가 되어줄 수 없는 부모의 경우 ‘등골이 휘어지게’ 일을 하면서도 자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오늘날 한국사회가 처한 현실이다.
어떤 면에서 현재 한국의 대학이 위기담론 안에서 양산하는 ‘인재’는 사실상 사회를 구할 인재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자기 계발에 몰두하는 개인, 바쁨으로 인해 장기적 전망을 사유하지 못하는 표류하는 개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바로 ‘공동운명체’에 대한 감각은 사라지고 오로지 시장이 질주하게 된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에 최적화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조주현(2009)은 신자유주의란 사회의 전 영역을 경제 논리가 주도하게 되는 질서와 신념체제로, 국가와 공적 영역이 축소되는 반면, 개인의 책임을 무한히 확장시키면서 시장이 자유롭게 질주하는 사회로 이행하는 체계라고 표현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구성원은 개별적으로 무한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명령을 들으며 자기계발, 자기관리를 하는 기업가적 주체로 변신하게 위해 혼신을 다하게 되는 것인데, 대한민국의 대학생들은 지금 다수가 이런 신자유주의적 질서 안에서 승리자가 되어보겠다고 승산 없는 싸움에 뛰어들어 외로운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3. 토론: 대학은 그래서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
넌 말했었지
꿈을 가진 자는 성공하게 된다고
나는 꿈을 꾸지 꿈을 가진 자가 되는 꿈
아버지 어머니 나를 그렇게 보진 마세요
(후렴)제발 졸업하면 뭐하냐고 묻지 말아요
나도 몰라 나도 몰라 나도 몰라
그러니 묻지 말아요
너는 말했었지 대학 가서 하고 싶은 것들 하라고
오직 하고 싶은 건 대학 가는 일 뿐이었네
똥 만드는 식충이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너는 말했었지 보이즈 비 앰비셔스
벗 낫 언틸 트웬티포
아이 앰 트웬티포 나 참 어쩌라는 건지
유학에 취직 준비를 하는 동기들아
나도 따라가야 하는 건가
어머니 나는 가끔 세상이 얼마나 미쳐 있는지
어머니 나는 가끔 세상이 얼마나 미쳐 있는지
어머니 나는 가끔 세상이 얼마나 미쳐 있는지 잊곤 합니다
(고아침 2007 연세대 진로탐색 프로젝트 록밴드의 “졸업생을 위한 송가”)
위에 인용한 노래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일류대학에 들어간 ‘효자’가 졸업에 즈음해서 당황해하는 모습을 그린 노래로, 이 청년은 대학 입시 경쟁을 거치고 치열한 스펙경쟁을 쌓아 성공해서 일개미처럼 살라고 명하는 세상을, 부모를, 선생님에 향해 그것이 과연 옳은/가능한 것이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열심히 인생을 살아왔고 한국을 선진국을 만들어낸 기성세대에게 이 노랫말들은 생소하기만 하겠지만 이것이 우리사회의 청년세대가 처한 불안과 무기력의 현실이며 이것을 더 이상 도외시할 수 없다. 그간 우리 사회가 질주해온 체제를 멈추어 세우고 함께 성찰을 해야할 때인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우리가 서 있는 지금, 여기 대학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0.1%의 ‘명품인재’, ‘1%의 글로벌 인재’를 길러보겠다는 대학본부의 집념이 ‘자기 계발’과 ‘자유의지’를 외치며 경쟁에 돌입한 ‘인재’들의 양산으로 이어지고 있는 이곳에서부터 말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시대 변화를 좀 더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고 고도자본주의 체제 속에 만연한 청년실업문제의 해결 방법을 풀기 위한 사유를 지속적으로 해 나갈 필요가 있다. 슈만과 마르틴이『세계화의 덫』이라는 책에서 지적했듯이, 세계 경제가 20%가 80%를 먹여 살리는 형태로 가는 것이라면 지금은 그 구조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하는 때인 것이다.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의 삶의 장과 새로운 노동구조를 만들어내야 함에도 기성세대가 그 몫을 해내지 못한 탓에 한국의 대학생들은 이 구조적인 문제를 개별사안으로 각자 떠맡아 자신을 혹사하고 있다. 이것이 근대의 산물임을 누구보다 잘 분석해내고 있는 바우만(2000:38-39)은 이를 “‘잉여’가 되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청년 세대의 걱정은 이전 세대가 경험하고 있는 걱정과는 다르다…
그간 근대라는 차를 계속 달리게 하고 속력을 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근대의 트레이드마크인 ‘진보’의 본 모습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다.”고 요약한 바 있다. 이제 대학사회는 청년실업문제가 ‘잉여인구’를 양산하는 근대의 구조적 산물이자 후기 근대사회가 풀어내야 할 핵심적 과제라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청년실업문제부터 해결해내야 하는 것이다.
이 세대는 창의성, 돌봄, 감정, 서비스 영역에서 ‘선진’사회가 필요로 하는 보다 ‘선진적’인 활동을 하면서 키워졌기에 실은 보다 다양한 창의적이고 소통적인 활동을 하면서 지식정보사회를 만들어가는 임무를 지닌 세대이다. 또한 이들은 현재 근대 사회가 직면해있는 환경의 위기라든가, 화석 자원의 고갈, 그리고 소통체제의 붕괴상황을 개선할 대안을 마련해야 할 세대이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그렇게 따라와 주지 않았다. 1997년의 경제위기 이후 적절한 비전과 계획을 마련하지 못한 채 국가가 공공영역을 급격히 축소해버렸고, 높은 위기감 속에서 기성세대-정부와 대학과 부모-는 어린 세대, 자녀 세대들을 ‘공장제적 성장주의 체제’ 속 무한경쟁, 적대적 경쟁으로 내몰았을 뿐이다. 그 결과 세대 간 소유의 격차는 심해지고 소통부재로 인한 오해는 커지는 가운데, 오히려 세대 간 상처와 원한이 누적되어 가는 일이 점차 확산되어 왔다. 시장적 계산과 돈이 주는 안정감에만 매달리는 사회를 살아오는 동안 젊은 세대들은 자연스럽게 돈 주도의 투기적 일상에 매몰되어 물질적 소유와 지위 확보를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었다.
‘성장주의’ 세대를 살았던 부모 세대는 젊은 날 안정된 직장을 가졌으며, 부동산 가격 급등 등으로 많은 재산을 쌓아 올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그들은 매우 보수화되어 있으면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자녀세대의 현실은 어떠한가? 이들은 가진 것이 또 앞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너무나 적다. 오히려 자신들의 시대를 만들어갈 실험을 시도할 시간이나 자원조차 갖지 못한 채 기존 조직에 점점 종속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전 세대가 돈을 벌기위해 만들어낸 심각한 환경 공해, 그리고 날로 불어나는 엄청난 국가부채만이 이들이 물려받을 유산으로 남겨지고 있다. 물론 기성세대가 자녀세대와 자신이 가진 것을 전혀 공유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나눔의 방식이 개별적인 자기 자식에게 한정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돈’을 통해 자녀의 삶을 통제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녀세대는 점점 더 수동적이고 눈치를 살피는 존재로 전락하는 한편 경쟁은 심화되는 결과를 낳고야 말았다.
이제 우리는 자신들을 향해 냉정하게 질문을 던져야만 하다. 청년세대에게 정말 그렇게 동의도 없는 큰 빚을 물려주면서 아무런 지원을 해 주지 않아도 되는 것이냐고.
영국에서는 앞으로 청년 세대가 갚아야 할 엄청난 국가부채를 두고 그 세대의 동의를 받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토론을 열이고 있고, 일본의 대학생들은 대학에 가서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졸업 후 직장은 없고 빚쟁이만 되어 있는 자신들의 상황에 대해 책임을 지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나라의 인재가 되기 위해 대학을 가서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왜 그렇게 비싼 학비를 내야하는 지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청년 실업과 관련해서 또 다른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데, 경제 침체를 기존 체제 밖에서 세금을 내지 않는 자급자족 형태의 삶을 선호하는 청년인구가 크게 늘어나고 있어서 나라의 미래가 걱정된다는 것이 바로 그 내용이다. 새로운 세대를 위한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고교 중퇴자와 대학 중퇴자들이 점점 늘어날 것이고, 직장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청년들이 늘어나면서 국가 경제가 전면적인 위기에 처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전 세계적인 현실을 한국의 대학과 학부모, 정부 관료들은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을까? 여기서 분명히 인식해야 할 점은 GNP 2만 불을 기록한 시점에서 다음 세대를 기존 체제를 유지하는 충실한 부품으로 제조해내는 것은 시대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장기하와 얼굴들’ 밴드의 “별일 없이 산다”라는 노래는 그런 면에서 혁명적인 노래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감각’으로 새로운 몸을 만들어내겠다는 뜻인데, 실제로 지금 시대에 필요한 사람은 낡아버린 체제에 매달려 '성공'해보려는 영악한 인재가 아니라 개인의 행복을 사회의 발전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는 창의적이고 지혜로운 영재들이라는 점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청년들을 키워내는 배움터인 대학은 이제 청년 실업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GNP 숫자를 높이는 게임이 아니라 실제 문제의 핵심을 파악해야 하고, 실질적 체감 경제를 연구하면서 다음 시대를 준비하는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국가가 미처 그것을 못해낸다면 대학이 앞장서서 그런 정책을 세워가도록 압력을 행사를 해야 하는 것이 대학의 의무다.
그래서 청년들이 “별일 없이 산다”고 노래하던 것을 넘어서 ‘별일’을 신나게 할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다. 현 위기는 경쟁을 잘하는 사람이 적어서가 아니라 협력과 돌봄의 능력을 가진 이들을 키우지 못하는데서 비롯한다. 나는 지금 이 글에서 경쟁 자체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과도한 경쟁, 특히 공존을 위한 협력을 수반하지 않은 경쟁이 나쁜 것이며, 그것이 과도할 때 사회는 도탄에 빠기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녀를 지극히 사랑하는 어머니들마저 ‘성공신화’에 빠져서 자녀를 초경쟁판으로 몰아넣는 것, 그리고 제자들을 ‘배움’으로부터 도주하게 만드는 현실-이것이 문제적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교수들마저 형식에 맞는 논문편수를 만드는 논문 제조자로 전락시키는 현실과 상통하는 문제적 현실이기도 하다.
그간 한국의 이른바 명문대학들은 대단한 경쟁심과 전투력으로 글로벌 등위 매기기에 참여했고 때로는 그 게임을 주도하면서 세계 100위권 대학에 진입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다. 이제는 그 등수가 상당부분 마케팅의 결과라는 것도 알게 되었을 것이고 그것이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아이비리그 대학 중 하나인 다트마스 대학 총장이 된 재미교포 출신 김용 박사는 전공분야에만 집중하는 대학교육에 대해 우려를 표하면서 “3M(Money, Market, and Me)의 시대를 3E(Excellence, Engagement, and Ethics) 시대로 바꾸어가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세계의 명문대학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탁월함은 사회에 관여함으로써 생기는 것이고 그것은 가치와 윤리감각이 이끌어내는 덕목이라는 것을 인지하면서 변화를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어느 곳보다 대학생들을 경쟁판으로 내몰고 있는 한국 대학은 시급히 그 방향을 바꾸어내야 한다. 그리하여 긴 호흡으로 미래를 위한 창조적 청년들을 길러가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생존을 타인의 생존과 연결해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 공생의 감각으로 쇠퇴하는 근대 문명을 넘어서는 길을 찾아낼 인재들 말이다. 또한, 청년들이 더 이상 실업의 공포에서 허덕이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고 만들어갈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하며, ‘돈의 순환 체계’를 넘어서 ‘돌봄의 순환체계’를 볼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가르쳐서 사회에 공헌하는 즐거움 속에서 일생을 살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 인류가 가고 있는 거대한 항해의 과정을 냉철하게 파악하는 언어의 산실, 새로운 가버넌스를 상상하고 태동시키는 산실, 그리고 인류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어가는 변혁의 산실로 새롭게 자리매김을 해내야 할 것이다. 대학은 예나 지금이나 집단 지성의 산실일 때 진정한 의미로서의 ‘대학’일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할 시점이다.
<함께 나눌 토론 거리>
1.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스펙 쌓기’에 돌입하는 현상에 대해 토론해보자. 연결해서 선행학습이 진정한 배움의 길에 방해가 된다고 하는 주장에 대해 생각해보자.
2. 자신이 소용없는 존재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적이 있는가? 자신의 불안의 진원지에 대해 서로 터놓고 이야기 해본다.
3. 자신이 마음을 터놓고 말하는 관계, 협력을 통해 이루어낸 일들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4. 청년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때 대학과 국가의 역할, 그리고 부모와 자신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자.
<추천 도서>
데이비드 하비, 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 서울: 한울, 2007.
저자는 이 책 전반에 걸쳐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을 가진 특정 ‘교리’의 기원, 등장 배경, 그리고 함의를 탐구한다. 부제처럼 신자유주의의 이론과 실제 과정의 역사를 ‘간략하지만’ 매우 체계적이며 압축적으로 서술함으로써 지난 30여 년간 세계 자본주의 역사의 경제-정치적 과정을 규정한 신자유주의, 그리고 이의 지리적으로 불균등한 발전 과정으로서의 신자유주의화에 관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낸시 폴브레, 보이지 않는 가슴: 돌봄 경제학, 서울: 또 하나의 문화, 2007.이 책은 주류 경제학자들이 맹신하는 시장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사랑·의무·호혜의 가치를 바탕으로 하는 가족과 공동체의 돌봄이라는 ‘보이지 않는 가슴’에 기대고 있음을 환기시킨다. 그간 우리가 분석해온 세계는 돈의 순환체계를 중심으로 한 일부일 뿐이고 실제 현실을 작용을 보기 위해서는 돌봄의 순환체계를 볼 수 있어야 한다면서 호혜의 관계를 바탕으로 한 사회재생산을 이론화하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모더티니와 그 추방자들, 새물결, 2008.
저자는 봉건적 질서에서 해방되면 진보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근대의 힘은 행복에 필수불가결한 것마저 휩쓸어버렸다고 말한다. 집단적 결속, 신성한 노동관, 확실한 시공간 안에 살았던 근대 시민들의 후예는 이제 목적지가 불확실한 이정표를 향해 무한 질주, 고전 분투하는 개인으로 원자화되고 시장원리에 의해 가차 없이 폐기처분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면서 모든 것을 녹이는 그 근대의 힘을 어떻게 고쳐 잡아야 할 지 반성을 요청하고 있다.
엄기호,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낮은 산, 2009.
10여 년간 아시아를 중심으로 남미에서부터 유럽까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국제연대운동을 해온 저자는 신자유주의가 발흥하고 번성하는 모습을 한국이라는 현장을 중심으로 풀어내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영향 아래 대다수 사람들의 삶과 감수성이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를 유년기, 청ㆍ장년기, 그리고 죽음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통해 풀어가면서 관련서적도 연결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조한혜정, 한운장, 홍아성, 김연지, 방영화, 김한솔 외, 교실에 돌아왔다: 신자유주의 시대 대학생의 글 읽기와 삶 읽기, 서울: 또 하나의 문화, 2009.
이 책은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학생들이 자기들을 스스로 분석하고 묘사해낸 책이다. <지구촌 시대의 문화인류학>이라는 교양과목을 수강한 90여명의 학생들이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답하면서 배움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스스로 사유하는 즐거움과 깨달음에 다다르는 과정을 그려주고 있다.
히라노 게이치로 [방울져 떨어지는 시계들의 파문] 중. 문학 동네, 2008
버블경제가 붕괴한 일본의 십여년이 만들어낸 삶을 생생하게 그려낸 소설집이다. 가족, 근대화, 인터넷, 기업국가의 부품, 변신의 욕망과 잉여 인간에 대한 음울한 이야기를 예리하고 담아내고 있다.
학부모 강좌 - 조한혜정의 '마을공동체 형성과 경쟁' - 참가자 접수중!! 10.06.03 16:14
민들레 HIT 79
경쟁_원고.hwp (61.0 KB) DOWN 7
경쟁만이 살 길이다?
‘너 죽고 나 살자’는 경쟁 논리를 외면해도 슬며시 불안해지죠.
입시경쟁, 학벌경쟁, 취업경쟁…
경쟁에서 지면 끝나는 건 아닌지.
나중에 아이가 ‘날 왜 이렇게 키웠냐’고 원망하면 어떻게 할지.
대안교육학부모연대와 공간민들레에서
아이들의 미래(진로)를 생각할 때마다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경쟁과 불안에 대해 속속들이 이야기 하고
대안적인 길을 찾아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경쟁이 과연 아이들의 힘을 키우는지,
경쟁에서 지면 낙오자가 되는 건지,
부모인 ‘나’를 돌아보는 자리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강연 : 조한혜정
-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 前서울시대안교육센터장
- 前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하자센터)장,
- 「왜 지금, 청소년?」, 「교실이 돌아왔다」, 「다시, 마을이다」저자
* 주제 : 마을공동체 형성과 경쟁
* 강의 내용
1. 대학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2. 강도 높은 경쟁과 노동 : 입시 경쟁, 스펙 경쟁에서 취업 전쟁까지
1) 대학 입시 경쟁: 학교와 학원과 집을 맴돌다
2) 학점 경쟁: 기술노동으로서의 스펙 쌓기
3) 취업경쟁: 승자와 패자가 없는 양극화 현상과 ‘나홀로족’의 등장
3. 토론: 대학은 그래서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
* 일시 : 2010년 6월 19일 (토) 낮 3시~5시
* 장소 : 행복나눔재단 4F 해바라기홀
- 오시는 길 http://www.happynanum.org/home/images/content5_6.jpg
* 참가비 : 천원
* 문의 : 공간민들레(02-322-1318)
* 참가하실 분은 미리 연락 주세요.(댓글도 가능-이름, 연락처)
첫댓글 비도오고... 간만에 바람도 산들산들 불고... 책은 눈에 안들어오고... 해서 여기 저기 할일없이 다니다가 ... 눈에 띄어 가져왔는데 ... 사실 부담스러운 글이죠... 혹시 '관심있는 1人'이 있을까 싶은데... 그 분만 보시고 다들 넘기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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