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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관리를 위해서 저는 탁구를 선택했습니다. 저에게 맞는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왕에 하는 운동 즐겁고 재미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운동이라는 것이 제법 익숙하지 않고는 잘못하면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 잘 좀 치고 싶은데 그게 쉽게 되지 않습니다. 몇 년을 쳐야 합니다. 더구나 개인차에 따라서는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스트레스를 받는 것입니다. 탁구를 치기 위해서 탁구채도 사야하고 신발도 사고 공도 경기용으로 준비하고 위에 입는 옷도 반바지도 사야하고 그렇게 준비를 했는데 정작 실력이 늘지 않기 때문에 중도에 포기를 하고 걱정을 하며 오히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탁구장에는 여러 분류의 사람들이 옵니다.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아들, 아버지와 딸, 부부, 연인 그리고 혼자 와서 치는 사람 중에 나이가 조금 있으신 분 아니면 젊은 사람들 그렇게 다양합니다. 그들 중에 누가 가장 행복할까? 실력이 월등히 좋은 분일까? 아니면 누굴까 하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탁구 치는 분들의 얼굴을 이렇게 관찰을 좀 했습니다.
그 중에 어머니와 아들이 와서 탁구를 치는데 어머니의 눈에 얼마나 아들을 사랑스럽게 여기며 탁구를 치는지 그 얼굴에 흐뭇해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자랑스러운 듯합니다.
그리고 부부가 와서 치는 모습을 봅니다. 나이가 제법 많은 부부와 중년의 부부와 그리고 젊은 부부를 봅니다. 분명 열심히 치려고 하는데 어딘가 어색합니다. 조금 나은 남편이 부인이 잘못 치면 다른 남자에게 특히 저 같은 사람에게 인계를 하고 조금 잘 치는 사람을 찾습니다. 그리고 어느 때는 화를 냅니다. 그것도 못하느냐고 말입니다. 하긴 탁구를 잘못 쳐 계속해서 땅에 떨어뜨리면 줍기 바쁘게 되고 힘이 듭니다. 짜증 날만합니다. 그걸 몇 십분 동안 계속하면 힘이 듭니다. 결국 한계가 와서 자칫 싸우는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가장 행복할까? 연인 사이입니다. 그것도 이제 막 사귀는 것이 진행된 사람들 말입니다. 젊은 여자가 어떻게 그렇게 탁구를 못 치는지 말입니다. 계속 땅에다 떨어뜨리게 치는 것입니다. 짜증도 왕 짜증이 날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반전입니다. 웃음꽃이 핍니다. 남자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웃음, 웃음, 웃음입니다. 떨어져도 좋습니다.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저렇게 좋아하다 결혼을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나서 옛날에 탁구 치며 웃음, 웃음, 웃음이 생각이 나서 다시 탁구장을 찾았다가 싸우고 돌아갑니다. 그리고 다시는 탁구 안친다고 속으로 다짐하고 심하면 고성을 지르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현재진행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뜨겁게 사랑하고 서로를 갈망하고 원했던 그 순간이 과거형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웃음 웃음 웃음을 날리는 것은 현재 지금 사랑을 진행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계시록에서 에베소교회에 말씀하셨습니다.
계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이 말씀이 곧 그 말씀 아닐까요. “너의 사랑은 과거형이다.” 라고 말입니다. 이제는 그 사랑은 멈추어 버렸고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그 사랑이 다시 진행형으로 바뀌길 원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이 이렇게 버려지는 이유 중에 하나는 시간의 흐름으로 인하여 상대에 대한 신비스러운 감정이 사라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까이 있을 때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건강할 때는 건강을 지키지 않다가 건강이 무너져서 죽을지도 모르는 단계에 이르는 병에 걸리면 건강해 지려고 얼마나 발버둥을 치는지 모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사랑은 너무도 소중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너무 가까이 있으면 그 사랑을 잊어버립니다.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의 사랑 안에 늘 거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릴 위해서 허락하여 주신 그 사랑이 잊어지거나 옅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이 식은 부부를 말하길 정으로 산다고 합니다. 정으로 사는 인생을 한걸음 더 나가서 의리라고도 합니다. 정이나 의리는 사랑과 비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신앙생활도 오래하면 의리로 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오랜 시간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했는데 그것을 끊기가 그래서 말입니까? 어떻게 보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목회를 의리로 합니다. 아무개권사님과의 의리로 교회를 나와 주고 아무개권사님과의 의리로 봉사도 해주고 의리로 헌금도 해주고 말입니다. 그래서 오랜 동안 교회를 나오지 않은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권면할 때 의리와 정을 앞세워서 나와 주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우리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함께 연합하는 것을 사랑한다면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벧전 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뜨겁게 사랑하라는 말씀을 읽다가 보니 트로트 가수 구자억목사의 노래가 생각이 납니다.
뜨겁게 뜨겁게 라는 노래인데 구목사가 지은 것입니다.
뜨겁게 뜨겁게 뜨겁게 뜨겁게 뜨겁게 뜨겁게 주님 그대 사랑 하시네
애타게 애타게 애타게 애타게 애타게 애타게 주님 그대 찾고 계시네
그 사랑은 값없는 사랑 이미 내게 먼저 주신 사랑 세상의 꽃도 시들고
풀도 마르겠지만 그 사랑은 변함이 없어
노래의 가사 중에 오늘 말씀을 전하려고 하면서 와 닿는 것은 그 사랑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변함없는 사랑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항상 진행 중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그렇게 위대하게 귀하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 사랑은 언제나 진행 중이기에 그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계속되는 사랑이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 여전히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영원할 것입니다. 비록 내가 잠시 그 사랑을 의심하고 흔들린다고 해도 예수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습니다.
아내가 며칠 전에 이렇게 물어봅니다. 당신이 나를 정말 사랑하는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그 말은 마치 우리의 사랑은 이제 과거의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은 현재 진행 중입니다. 그 진행 중이 멈추지 않는 한 그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이제는 상영은 끝이 났습니다. 강원도 산골에 늙은 부부가 서로를 아끼며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줄거리를 소개하는 대목을 잠깐 보면 이렇습니다.
“조그만 강이 흐르는 강원도 횡성의 아담한 마을에 89세 소녀감성 강계열 할머니, 98세 로맨티스트 조병만 할아버지가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어딜 가든 고운 빛깔의 커플 한복을 입고 두 손을 꼭 잡고 걷는 노부부입니다. 봄에는 꽃을 꺾어 서로의 머리에 꽂아주고, 여름엔 개울가에서 물장구를 치고, 가을엔 낙엽을 던지며 장난을 치고, 겨울에는 눈싸움을 하는 매일이 신혼 같은 백발의 노부부입니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 무려 400만 명입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열광했으며 그 두 부부는 76년을 지속적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두 분의 이야기가 영화가 된 것은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두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남편이 죽었어도 그 사랑은 끝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항상 진행형이었던 인물이 누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에녹이라는 사람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창5: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므두셀라를 낳은 후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전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자세히 기록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그 아들을 낳은 후부터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을 하였는데 무려 300년 동안을 동행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가 300년을 계속해서 현재진행형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를 세상에 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녹을 데려가셨습니다. 그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금도 계속해서 하나님과 사랑의 동행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계명을 지키면서 살면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 기쁨은 먼저 예수님이 경험하신 것임을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사랑이 계속 진행되지 않고 멈추었을 때의 위험을 우리는 위대한 다윗 왕에게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음악을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시를 통해서 고백하며 말씀으로 자신을 단련시키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더욱 강해질 때는 그는 하나님조차도 놀랄 만한 일을 계획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이 멈춰 제 자리 걸음을 할 때 그는 남의 아내를 취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았고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 된 욕망의 더러운 모습을 다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그는 살인자가 되었고, 간음 자가 되었고, 거짓말 하는 자가 되었으며 그는 지금의 총리보다 더 지독하게 나쁜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가 하나님과 계속해서 가져야 할 사랑이 멈추거나 식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한 주전에 만에도 화려하게 장식하던 석촌 호수와 주공5단지의 벚꽃이 너무도 허무하게 떨어졌습니다. 너무도 화려하였기 때문에 꽃이 떨어지고 난 그 나무의 모습이 초라하기 까지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키우는 다육식물이나 작은 화분에 피는 꽃들 중에는 일 년 내내 꽃을 피우는 것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기린 선인장이 그렇습니다. 기린 선인장의 원산지는 아프리카 마다카스카르입니다. 이 꽃은 교회 옥상에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관리를 잘못해서 큰 것은 죽어버렸고 작은 것 만 남았습니다. 작은 꽃을 잘 가꿔 피워보려고 합니다. 이 꽃의 꽃말이 “고난의 깊이를 간직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꽃이라고 불립니다. 이 꽃은 놀랍게 온도를 맞추면 돌아가면서 꽃이 피어 일 년 내내 꽃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다 이 꽃을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이듭니다. 보통 길게 늘어진 대 때문에 기린 선인장으로 알았는데 그런 뜻이 숨겨져 있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선인장은 마치 고난을 간직하면서도 계속해서 꽃을 피우는 것처럼 예수님의 모습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향한 그 마음에 꽃을 1년 내내 피우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안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어느 순간에 신앙생활에 활력과 기쁨이 충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쁨이 넘쳐야 교회생활도 그 외에 영적인 생활도 스스로 할 텐데 그렇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변한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과거를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중이면 이라고 믿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시기 위해서 매일 그 삶의 스케줄을 사셨을 때 기쁨이 충만하셨기에 우리에게도 그 기쁨의 충만한 자리로 초대하는 것일 것입니다.
저는 기쁨의 목회를 하고 싶습니다. 또 교우들이 신앙의 자리가 기쁨으로 충만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현재 예수님과 현재진행중인 사랑에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혹시 지금 내가 예수님과의 사랑이 멈춰 있습니까? 그러면 분명 의리 교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힘들어 할 것입니다. 자기 의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기에 절대로 기쁨이 충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말씀과 함께 현재진행 중인지 아닌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 있는 그 기쁨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기쁨은 어느 곳에서도 얻을 수 없고 가장 최상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을 날마다 누릴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