夏·殷나라는 우리 歷史 - 漢字는 東夷族이 만든 글(契).
글/ 陳泰夏 (진태하 인제대학교 석좌교수)
한자문화권의 근간을 이루는 최고(最古)의 언어는 한어(韓語).
논어(論語)의 마지막 구절에서 “不知言, 無以知人”(말을 모르면,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이라고 공자(孔子)는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책명 그대로 「論語」를 끝마쳤다. 「身言書判」이란 말이 있지만, 남을 처음 만나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는 것이다. 이 위대한 공자의 말씀을 확대하면, 한 민족의 역사를 알려면 그 민족의 말을 알아야 한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평범 속의 진리이다. 그래서 필자는 「한 민족(民族)의 언어(言語)는 녹슬지 않는 청동기(靑銅器)다.」라고 강조하는 바이다. 우리는 한 민족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연구하다 보면, 그 문화유산이 비록 금석문(金石文)이라 할지라도 오랜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대부분 민멸(泯滅)되어 볼 수 없지만, 오히려 무형의 언어는 거의 영구적이다. 실은 언어도 시간과 공간에 따라 음운변천도 있고, 어휘가 전의「확대」소멸되기도 하지만 형체 자체가 물질유산처럼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또한 언어의 음운변천은 무질서하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변천의 맥이 이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전문적인 연구를 통하여 고대(古代)로 소급하여 그 원형을 재구(再構)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우리 한민족은 수많은 국내외적인 병화(兵火)로 인하여 대부분의 역사유물이 소실되어 버렸지만, 다행히 우리는 황하문명(黃河文明)을 중심한 한자문화권에서 가장 역사 오랜 섬세한 언어체계를 가진 「한어(韓語)」를 면면히 지켜오고 있는 것이 우리 민족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어휘의 70%이상이 한자어(漢字語)로 되어 있고, 그 어휘의 조어(造語)는 대부분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 유입되었고, 근대에 와서는 일본인들의 한자로 만든 신조어(新造語)가 상당수 유입되어 쓰이고 있지만, 고유어로서 우리 한어(韓語)의 역사는 중국이나 일본에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앞에서 논급한대로 중국어는 한자(漢字)가 형성된 뒤에, 인위로 매 글자의 음을 주입하고, 뒤에 그 한자음을 연결하여 구어(口語)를 구사함으로써 한자 이전의 이른 시대 중국어는 소멸되어 버린 것이다. 일본어의 경우는 단적인 예를 들면 숫자의 경우 고유어로서 하나에서 열까지 뿐이 셀 수 없다. 열 하나에서부터는 한자음으로 셀 수뿐이 없는 말이다. 이로써 보면 일본어에서 한자어나 외래어를 제거하면 원시 초보단계의 언어를 면할 수 없는 언어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 한어(韓語)의 차용어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런 면에서 한자문화권의 근간을 이루는 언어는 한국어이다. 다시 말해서 고대 중국어나 일본어를 알려면 한국어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月」자의 연원과 옥토끼.
전회의 「日」(날일)자에 이어 「月」(달 월)자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우리의 조상인 동이족(東夷族)이 문자 곧 글(契)을 만들던 초기에, 해와 달이 모두 둥글기 때문에 의류상형(依類象形)의 방법으로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달은 부득이 기울었을 때의 모양을 상형하여 해의 글자와 구별했을 것이다. 은대의 갑골문에서 달의 기운 형태를 상형하여 「」의 형태로 제자한 것은 이해가 되지만, 「」의 모양과 같이 가운데 선을 그은 것이 무엇인지 매우 궁금한 일이다. 동이족의 문자 창제 이전부터 구구전승하던 전설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해에 대해서는 「日中有金烏」 곧 해 가운데는 금까마귀가 있다는 전설이 있었지만, 달에 대해서는 「月中有玉免」 곧 달 가운데는 옥토끼가 있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러므로 달의 기운 형태를 그리고 달가운데 있다는 옥토끼를 선으로 표시하여 「」의 형태로 制字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우리는 달밤에 달 속의 얼룩진 그림자를 보며 계수나무 밑에서 옥토끼가 떡방아를 찧고 있다는 아름다운 동화(童話) 같은 전설을 이어가고 있는 민족이다. 더구나 지금까지 발굴된 고구려 고분(古墳)중에는 해 속의 금까마귀와 더불어 달 속의 옥토끼를 그려 놓은 벽화가 많이 있다. 이러한 벽화가 중국 측의 벽화에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은대(殷代)의 갑골문에서 해의 자형을 「」의 형태로, 달의 자형을 「」의 형태로 상형한 것은 곧 위와 같은 전설과 벽화를 가진 민족이 만들지, 다른 민족이 만들 수 없는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런 면에서 한자는 결코 중국의 한족(漢族)이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조상인 동이족(東夷族)이 만들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른바 한자 곧 동방문자인 글(契)은 본래 회화문자(繪畵文字)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육서(六書 : 象形·指事·會意·形聲·轉注·假借)중에서 상형자에는 문자를 만들던 당시의 생활풍습·전설고사·사고방식 등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단 하나의 글자로도 몇 천 년 전의 실상을 추찰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이 표음문자가 따라 갈 수 없는 표의문자의 장점인 것이다. 중국의 옛 문헌에는 달 속에 섬여(蟾) 곧 두꺼비가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달을 섬백(蟾魄), 섬륜(蟾輪), 섬반(蟾盤), 섬궁(蟾宮)이라고 일컫기도 하는데, 기록의 시기를 보아 「月中有玉」의 전설보다는 훨씬 후대의 중국 측에서 만들어진 전설이라고 생각된다. 문화는 상호 유입되기 때문에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달 속에 두꺼비를 그린 것이 있기는 하다.
「家」자의 연원과 돼지.
다음은 「家」(집 가)자에 대하여 살펴보려 한다. 「家」자는 곧 「?」(집 면)자와 「豕」(돼지 시)자의 합체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자에 대하여 대개 「갓머리」라고 일컫고 있으나, 그것은 서당에서 아이들에게 얼른 익히게 하기 위한 속칭이므로 마땅히 「집 면」으로 일컬어야 한다. 「?」자는 본래 집의 모양을 상형하여 「」의 자형과 같이 단독으로 썼던 글자인데, 뒤에 부수자만으로 쓰게 된 것이다. 「갓머리」로 익히게 되면 「安」자의 경우, 여자가 갓을 쓰고 있는 것으로 잘못 해석하기 쉽다. 문자를 만들던 초기에 「편안하다」는 추상어를 형상화하여 상대로 하여금 얼른 알아보게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安」자가 갑골문에는 「」의 자형과 같이 쓰였다. 곧 여자가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무릎을 꿇고 집 안에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여자가 네 활개를 치고 거리에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조용히 집 안에 앉아 있는 것이 개인적으로도 편안하고 그 집안 전체가 편안할 수 있는 것이다. 수천 년 전에 이러한 착상을 하여 문자를 창제한 이들은 참으로 높은 IQ를 가진 천재였단 것 같다. 「편안」이란 말의 「→ 安」의 형상화는 고금동서의 진리가 아닐 수 없다. 갑골문에서 「家」의 자형을 찾아보면 「」의 형태로 되어 있고, 금문에서는 「,」의 형태로 변형되고, 소전체에서는 「」와 같이 정리되어 오늘의 「家」자가 된 것이다. 여기서 「」의 집 안에 「」의 형태는 불과 선 5개로 돼지를 나타낸 것이니, 곧 집 안에 돼지가 있다면 그 뜻은 「돼지우리」가 되어야 하는데, 사람이 사는 집의 뜻으로 쓰여 왔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A.D 100년경 후한(後漢)시대 허신(許愼)이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집 면)에 「?」(수퇘지 가)의 「?」를 생략하여 「豕」자만을 더하여 합체자로서 자형을 만들고, 자음(字音)은 「?」(수퇘지 가)에서 「가」음을 취하여 「家」의 음이 「가」가 되었다고 풀이하였다. 허신의 설은 옳지 않음을 바로 알 수 있다. 「?」자가 「家」자보다 뒤에 만들어졌는데 「?」에서 「가」의 자음을 취했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허신의 설을 부당하다고 지적하면서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근 2000년 동안 의문을 가지고 연구하여 왔지만 아직도 그 풀이가 구구불일(區區不一)하여 정설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이는 고대에는 집 안에서 돼지와 같이 살았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어떤 이는 돼지를 잡아서 집 안에서 제사를 지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그런데 근대에 이르러 서호(徐灝)는 “家(從)豕者, 人家皆有畜豕也.”<說文解字注箋>(家는 豕자를 의미부로 한 글자인데, 사람들 집에 모두 돼지를 길렀을 것이다.)라고 사실에 근접한 풀이를 하였고, 나상배(羅常培)는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여 “照我推想中國初民時代的 ‘家’大槪是上層住人, 下層養猪. 現在雲南鄕間的房子還有殘餘這種樣式的”<語言與文化>(나의 추측으로는 중국 초기의 집은 대개 위에는 사람이 살고 아래에는 돼지를 길렀을 것이다. 현재 운남성 시골집에서는 아직도 이러한 양식이 남아 있다.)이라고 풀이하였다. 그러나 왜 집 밑에 돼지를 길렀는가 하는 중요한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필자는 이 설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문헌을 통하여 그 이유를 밝히게 되었다. 옛날 파충류(爬蟲類)가 번성하던 시대에, 특히 잠잘 때에 기어들어 오는 뱀을 방어하는 일이 가장 큰 고민이었다. 이 때 우리의 조상인 동이족(東夷族)들은 뱀의 천적이 돼지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필자가 시골에서 자랄 때 직접 본 것으로는 둔한 집돼지도 뱀만 보면 한 입에 잡아먹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독사라도 돼지를 만나면 도망도 못 가고 잡아먹힌다. 당시 사람들은 여기에 착안하여 집 밑에 반드시 돼지를 길렀다. 돼지의 똥냄새만 맡아도 뱀이 절대로 접근하지 않기 때문에 편안히 잘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집 안에 사람은 없어도 되지만, 돼지는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에 「집」이란 글자를 만들 때, 「」의 자형과 같이 집 안에 돼지를 그려 놓아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중국에서 오늘날 민간 간화자(簡化字)로 「가(家)」자 대신 「」를 만들어 쓰는 것은 집 안에 사람이 있어야 집이 될 수 있다는 평범한 생각에서 만든 글자이다. 갑골문에 돼지우리를 나타낸 글자는 ' →(돼지우리 환)’ 등과 같이 ' →家’자와 구별하였다. 제주도에서는 근래까지도 화장실 밑에 돼지를 기르고 있는 것은, 고대에 집 밑에다 돼지를 길렀던 풍속이 이어져 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육지에도 있었던 풍속으로 특히 강원도에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풍속을 TV에 소개된 일도 있다. 한대(漢代)의 무덤에서 발견된 부장품 도기(陶器)에도 집 밑에 돼지를 기른 모형도가 출토된 일이 있다. 그것이 비록 한대(漢代)의 부장품이지만 동이족의 습속으로서 이어져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돼지와 뱀의 상극관계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볼 수 있다. 혼담이 오가다가 여자가 돼지띠, 남자가 뱀띠면 원진(元嗔, 궁합이 매우 나쁨의 뜻)이라 하여 그 날로 혼담은 없었던 것으로 할 만큼 철저히 기피하여 왔다. 여기서 부언할 것은 지금도 혼인 시에 띠를 가리는 풍속은 이미 은(殷)나라 때 갑골문에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가 정해져 있었으므로 적어도 3400년 이전부터 내려오는 풍속이다. 은(殷)나라 때 사람들은 서로 만나면 “上古艸居患, 故相問無乎.”(상고시대 풀섶에 살면서 뱀을 걱정하여 ‘뱀 없어’라고 서로 물었다.)라고 한 바와 같이 인사말이 「無」(무타)였다. 「?」는 현재 중국에서 사물을 가리키는 대명사로서 「他」와 같이 쓰이지만, 본래는 「뱀」을 상형한 글자로서 갑골문에서는 「」 등의 형태로 나타나고, 금문에서는 「」 등과 같이 변형되어 소전체에서 「」와 같이 정리되어 오늘의 「?」가 된 것이다. 뒤에 「?」자를 더하여 「蛇」(뱀 사)로 되었다. 「蛇」의 음이 「事」와 같으므로 뒤에 「無」가 「無事」로 바뀌어 지금도 서로 오랜만에 만나면 「별일 없어」하는 인사로 남게 되었다. 이로써 은대(殷代)에 뱀이 얼마나 많았으며, 사람들이 얼마나 두려워했나를 알 수 있다. 또한 인사말의 연원이 매우 오래되었음도 알 수 있다. 이상을 종합하여 볼 때 「집」의 자형을 「→ 家」자로 만든 민족이 어떤 민족인가? 의문이 여지없이 우리의 조상인 동이족(東夷族)이 만든 것이다. 아직도 집 밑에 돼지를 기르는 풍속을 이어오고 있는 우리 민족을 놔두고, 2000년대 지금도 구구불일한 추측으로 확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중국인들이 만들었다고 생각하면서, 또한 그것을 차용문자로서 우리가 쓰고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의식을 이제는 버려야 할 것이다. 「然」자의 연원과 개불고기. 다음은 「然」자에 대해서 살펴본다. 우리나라에서 발간하는 자전에는 「然」에 대하여 ‘그러할 연, 이치에 맞고 내 마음에 든다는 뜻’으로 풀이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然」자의 본래 뜻을 모르고 있다. 「然」자는 곧 「(肉)」(고기 육), 「犬」(개 견), 「 (火)」(불 화)의 3자 합체자로서 본래의 자의(字義)는 개를 불에 그슬린 고기라는 뜻이었다. 이른 시대부터 동이족(東夷族)은 개를 잡을 때는 돼지나 닭처럼 뜨거운 물에 튀겨서 털을 뽑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불에 그슬리어 잡았기 때문에, 뒤에 「然」의 자의(字義)가 「개불고기 연」에서 「그슬릴 연, 태울 연」자로 전의(轉義)되었다. 동이족들은 삼복(三伏)지경의 한 여름철 탈진하였을 때에 고단백질의 개불고기를 먹고 나면 ‘암 그렇지 개불고기가 최고야!’ 이처럼 ‘그렇지’하고 반복 탄성을 내다보니 「그슬릴 연」에서 다시 「그럴 연」자로 전의된 것이다. 한자를 처음 만들 때는 「一字一義」의 문자였으나, 「然」자와 같이 시대가 지나면서 「一字多義」의 문자로 변하여 지금은 숫자(數字)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한 글자에 여러 가지 뜻이 들어 있기 때문에 한문을 해석할 때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예를 하나 더 들면 「莫」은 본래 「」 등의 자형으로서 해가 풀 속에 들어 있는 상태를 그리어 날이 「저물다」의 뜻을 나타냈던 글자이다. 고대에는 일출(日出)서부터 일몰(日沒)까지 일을 했기 때문에 해가 지면 하던 일도 말다는 뜻으로서 「莫」의 자의가 「말 막」으로 전의된 것이다. 이렇게 전의됨으로써 「저물다」의 글자가 다시 필요하므로 「莫」자에 「日」자를 더하여 다시 「暮」(저물 모)자를 만든 것이다. 「然」자도 「그럴 연」자로 전의되자, 「태우다」의 글자가 다시 필요하게 되어 「然」자에 「火」자를 더하여 「燃」(태울 연)자를 또 만든 것이다. 조자(造字)의 원칙으로 볼 때는 「燃」이나 「暮」자는 한 글자 내에 「火」와 「日」이 중복되어 쓰였으므로 모순이다. 그러나 전의된 상태에서 본래의 자형을 버리고 새로이 글자를 만들 수는 없었던 것이다. 뒤에 부득이 모순적인 방법으로 만든 후기자를 「누증자」(累增字)라고 한다. 한자에는 이와 같은 누증자가 많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개를 잡을 때 반드시 그슬리어 잡는 풍속을 가진 민족은 세계에서 우리 한민족뿐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대만에 살고 있을 때 중국인들은 우리 한국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는다며 흉을 보는 것을 직접 들은 바 있다. 지금 대륙에서는 일부 중국인들도 조선족에게 배워서 개를 잡아먹지만, 우리처럼 그슬리어 잡아먹지는 않는다. 더구나 우리 속담에 ‘삼복에 개 패듯한다’는 말이 있다. 개는 반드시 두드려 패서 잡아 그슬려 먹을 때 가장 맛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개고기를 아무 때나 먹기 때문에 「사철탕」이라는 말도 생겼지만, 동이족은 본래 삼복(三伏)에만 잡아 보신(補身)했던 것이다. 삼복(三伏 : 初伏, 中伏, 末伏)의 「伏」(복)자에 「犬」자가 들어 있는 것으로도 동이족의 풍습을 엿볼 수 있는 방증자료이다. 한자는 문자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풍습이나 전설이 반영되어 표의문자로서 조자되었기 때문에 「然」자를 처음 만든 민족이 중국민족이 아니라, 우리의 조상인 동이족(東夷族)임이 확연하다. 몇 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는 개를 잡을 때 반드시 불에 그슬리는 것을 보면, 한 민족의 풍습이란 얼마나 끈끈한가를 알 수 있다. 만일 「然」자가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뒤에, 그 글자를 풀어보고서 비로소 개를 잡을 때 불에 그슬리기 시작했다고 반박한다면, 이는 전연 상식 이하의 반대를 위한 억지가 아닐 수 없다. 서구인들이 우리 한국에서 개고기를 먹는다고 지탄하는 것은 편견이 아닐 수 없다. 불란서 사람들이 거위의 간을 크게 만들어 잡아먹기 위하여 잔인한 방법을 쓰는 것은 그야말로 목불인견의 행위이다. 더구나 우리는 그들이 말하는 애완견이 아닌 식용견을 취할 뿐이다. 그들의 지탄이 두려워 뒷골목으로 숨어서, 「개장국」이란 이름도 「영양탕, 사철탕」으로 바꾸어 먹는 것은 참으로 민족적 주체성을 상실했다고 아니할 수 없다. 제 나라의 유구한 역사의 전통 음식을 먹으면서도 떳떳하지 못하다면,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한자, 동이족이 만든 유산”
▲ 진태하 인제대 석좌교수가 14일 국학원이 주최한 제87회 국민강좌에서 “한자는 지금부터 약 3400년 전 황하 이북에 자리를 잡았던 동이족이 만든 문자”라고 말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차용문자 아닌 한글과 같은 우리글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jade@newscj.com 2010.09.14 23:13:32 漢字는 원래 동이족 문자였다는데…
원로 국어학자 진태하 교수 주장 韓·中 네티즌 발명 논쟁 불러
한자의 기원과 발명을 둘러싸고 한국과 중국 사이에 논쟁이 불붙을 조짐이다. 세계일보 입력 2011-04-26 10:33:00, 수정 2011-04-26 10:33:00
'한자=동이족 창제' 중국학자들도 인정? [단독] 4월 중국 학술대회에서 중국학자들 공감 분위기
진태하 인제대 석좌교수는 중국 은나라때 갑골문자 등을 근거로 한자는 우리의 조상인 동이족이 만들었다는 학설을 펴고 있다. 지난 4월18일 오후 중국 산시(陝西)성 푸핑(富平)현 성타이(盛泰)호텔. 중국과 대만 등에서 온 학자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자 관련 학술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한국 학자로 진태하(73) 인제대 교수가 참석해 국내 한자교육 현황을 발표했다. 세계일보 입력 2011-07-04 09:46:49, 수정 2011-07-04 09:46:49 <한자를 동이족이 만들었음을 보여주는 근거 학설> ▷중국의 사학자 쩌우쥔멍(鄒君孟) : “중국 민족, 곧 화하족(華夏族)은 원시사회 말기 炎帝((염제)와 皇帝(황제) 집단을 기초로 하여 동방일부의 蚩尤(치우)와 少昊(소호)가 지배하던 집단이 융합해 형성됐다.”(華夏族起源考論에서) ※ 동이(東夷) : 후한시대 동방 쪽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으며 활을 잘 쏘는 우리 민족의 조상을 일컬음. ※ 대문구문화 : 중국 산둥성 지역에서 기원전 4300년에서 기원전 2500년 무렵에 나타난 신석기시대 후기 문화. ※ 앙소(仰韶)문화 : 중국 황허 중류 지역에서 기원전 5000년에서 기원전 3000년 무렵까지 존속한 신석기 문화. ※ 용산문화 : 중국의 황허 유역에서 기원전 3000년에서 기원전 2000년 무렵까지 존재한 신석기시대 후기 문화. ▷대만의 문자학자 이경재(李敬齋) : “동이족의 대표적인 인물은 순과 설(契)을 들 수 있으며, 한자를 처음 만들었다고 하는 ‘창연’은 ‘契’과 동일인물이며, 중국 문자는 동이인(東夷人)이 창조하였으며, 공자도 동이족인 은나라 사람의 후예이며, 공자의 고향인 곡부는 곧 소호의 옛 도시로서 동이문화의 발원지이다.” |
출처: 국제결혼정보센타 원문보기 글쓴이: zuz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