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묵으려고 싱가포르 간다"…英 왕실도 극찬한 호텔
송영찬 2023. 6. 15. 17:50
Cover Story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세계 호텔&리조트
140년 역사 국보가 된 래플스 호텔
男 기숙사에서 호텔로
2차 대전 겪으며 곳곳 파괴
일본군 사령부로 쓰인적도
수차례 현대식으로 새단장
100년째 이어지는 전통
흰 제복 도어맨, 문 열어주고
1대 1 전담 케어 서비스까지
존웨인 등 셀럽 이름 딴 룸도
1887년 아르메니아계 사업가 사키스 삼형제는 영국령 싱가포르 남쪽 해변의 작은 집을 사들인다. 과거에 남학생 기숙사로 쓰이던 작은 방갈로였다. 목적은 하나였다. 지중해와 홍해, 더 나아가 대서양과 인도양을 잇는 수에즈 운하가 개통한 뒤 몰려드는 여행객에게 제대로 된 호텔을 제공하자는 것. 빅토리아 여왕의 ‘골든 주빌리’, 다시 말해 즉위 50주년이 되던 해였다. 객실은 단 10개. 크기는 작지만 이름은 특별했다. 여왕의 골든 주빌리를 맞아 세워진 동상 주인공의 이름이 붙었다. 주인공은 밀림만 무성한 작은 어촌 마을이었던 싱가포르를 현대적인 무역항으로 탈바꿈한 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 경. 140여 년간 도시의 상징으로 자리를 지킨 래플스호텔의 탄생이다.
호텔이기 전에 국가 기념물로 지정
래플스호텔의 역사가 싱가포르의 역사 그 자체였기 때문일까. 이곳은 설립 100주년이 되던 1987년, 싱가포르의 국가 기념물로 지정된다. 그렇다고 물고기를 잡으며 살던 작은 마을이 글로벌 금융허브로 탈바꿈한 예쁜 역사만 담고 있는 건 아니다. 전쟁의 참상을 고스란히 간직한 아픈 역사도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싱가포르를 점령한 일본군은 이 역사적 건물을 사령부로 사용한다. 영국군이 이곳을 다시 탈환할 때 호텔 안에 있던 일본군 병사들은 단체로 수류탄을 터뜨려 자살해 호텔 곳곳이 파괴되기도 했다.
전쟁의 상처는 깊고 오래 남았다. 국가 공식 보물이 된 래플스호텔을 그대로 둘 순 없었다. 래플스호텔은 1989년과 2017년, 두 차례의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거쳤다. 수십 년간 증축을 완료해 1915년 당시의 모습을 되찾는 게 목표였다. 가장 최근 리노베이션은 2년이 넘게 걸렸다. 훼손된 옛 모습을 되찾는 동시에 투숙객에게는 현대적인 편리함을 제공해야 했기 때문이다.
인테리어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인테리어 디자이너 알렉산드라 샴펄리머드의 손에 맡겨졌다. 103개의 객실은 115개의 스위트룸으로 재탄생했다. 재탄생한 이 호텔 객실에 있으면 이 건물이 100년이 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구석구석에 있는 태블릿으로 객실 전체의 조명, 커튼, TV 조작, 통화는 물론 전담 버틀러 호출까지 가능하다.
‘싱가포르 상징’ 칵테일이 만들어진 곳
새단장을 마친 래플스는 낡지 않고 깊어졌다. 편리함만을 위해 옛것을 없애지 않았기 때문일 터. 로비 앞을 지키고 있는 고풍스러운 괘종시계는 이 건물이 호텔로 바뀌기 이전인 1870년부터 이 자리를 지켰다. 투숙객이 최고의 서비스를 받으며 조식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자 싱가포르 최고의 인도 레스토랑으로 꼽히는 ‘티핀 룸’도 1910년부터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1896년 칵테일바 ‘바 앤 빌라드 룸’이 문을 열 당시부터 함께한 당구대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다.
1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건 단순 하드웨어뿐만 아니다. 이곳에서 세계 최초로 시작된 버틀러 서비스도 예전 그대로다. 투숙객 누구나 전담 버틀러에게 세심한 케어를 받을 수 있다. 하얀 제복을 입고 터번을 쓴 시크교도의 호텔 도어맨이 문을 열어주는 전통 역시 100년 전 그 모습 그대로다.
이 나라를 상징하는 칵테일이 태어난 곳도 래플스에 있다. 1915년 ‘롱바’의 바텐더 응이암 통분은 진과 체리 브랜디, 라임주스를 섞은 칵테일을 몇몇 고객에게 줬다. 술이 아니라 마치 음료수 같은 이 음료는 공공장소에서 술을 마실 수 없는 여성 손님을 위한 것이었다. ‘싱가포르 슬링’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런데 롱바 바닥 곳곳은 땅콩 껍질 투성이다. 술과 함께 나오는 땅콩 껍질을 편하게 바닥에 버리면 하인들이 치우던 전통을 유지한 것이다. 천장 위엔 선풍기 대신 하인들이 부쳐주던 부채가 전자동으로 흔들리고 있다.
여왕의 극찬 “래플스 간 김에 싱가포르 들러”
영국의 윌리엄 왕세자는 2012년 할머니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재위 60주년 ‘다이아몬드 주빌리’를 기념해 싱가포르를 방문한다. 당시 왕세손 부부가 선택한 곳이 바로 래플스호텔. 엘리자베스 2세는 손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래플스호텔에 묵은 김에 싱가포르를 방문해 봐라.” 6년 전 싱가포르 순방 당시 이곳에 감명받은 여왕의 진심이 묻어 나온 말이었다.
영국의 국모(國母)만큼이나 싱가포르의 국부(國父)도 이곳을 사랑했다. ‘현대 싱가포르’의 아버지 리콴유는 ‘근대 싱가포르’의 아버지 래플스 이름을 딴 곳에 각별한 애착을 느꼈다. 그가 결혼식을 올린 곳도 래플스였다. 공교롭게도 그의 생일까지 호텔의 설립일과 같은 날이었다.
세계 유명인사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이곳엔 특별한 이름이 붙은 방 12개가 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찰리 채플린, 존 웨인 등.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시대를 관통하는 셀럽들이다. 그들이 묵었던 방에서 그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그들과 똑같이 버틀러의 안내를 받아 호텔 구석구석을 돌아다녀 보자. ‘붓처스블록’에서 200여 종의 와인과 완벽하게 페어링된 최상급 고기 요리를 먹을 수도 있고, 스타 셰프 제레미 룽의 ‘이’에서 호화로운 중화요리를 즐길 수도 있다.
말을 세워두던 공간은 부티크숍으로, 수영장이 있던 곳은 푸른 정원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파란 하늘 아래 늘어진 하얀색 열주(列柱), 시원하게 물을 뿜어내는 청동 분수, 8142개의 크리스털로 로비를 환하게 밝히는 샹들리에는 변함없이 오는 손님을 반기고 서 있다.
싱가포르=송영찬 기자 0ful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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