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야와 함께 밤잠을 설치게 했던 런던올림픽이 끝났다. 올림픽 무대는 찰나의 순간에 희로애락이 모두 표출되기에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선수들의 동작 하나하나에 환호와 아쉬움이 교차했고, 경기 후 선수들이 남긴 소감은 감동의 어록으로 새겨졌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매 순간순간 나의 행동이며,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다.”(사격 진종오), “나보다 많은 땀을 흘린 선수가 있으면 금메달을 가져가도 좋다.”(레슬링 김현우), “그냥 한 명씩 이겨보자고 했는데 금메달을 차지했다.”(펜싱 김지연), “지금이 끝이 아니라 계속 열심히 할 거니까 많이 응원해주시고 사랑해주세요.”(리듬체조 손연재)
자신이 흘린 땀의 정직함을 믿고 매 순간 집중하며 꿈을 향해 도전해온 그들에게서 장인정신이 느껴진다. 이광복(53) 도편수에게도 열정을 불태우며 기능을 연마해온 시절이 있었다. 이미 고등학생 때 건축목공 분야에서 학생기능경기대회 금상과 지방기능올림픽대회 은상을 수상하며 기능장에 올랐다. 이후 삶의 방향은 안정적인 길로 향했지만, 다시 마흔의 나이에 목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13년이 지난 지금, 그는 차세대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마흔에 시작된 꿈을 향한 도전
이광복 도편수는 목수의 아들이다. 전남 진도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또래 아이들을 거느리며 골목대장을 독차지했다. 순전히 아버지의 목공 연장 덕택이다. 톱 한 자루가 쌀 두 가마니 값이었으니, 굉장히 귀하게 취급되었다. 눈썰미와 손재주 또한 뛰어나 한 번 본 것은 못 만드는 것이 없었다. 그에게 연장과 나무만 주어지면 썰매, 연, 팽이 등 놀이기구와 장난감이 뚝딱 만들어졌다. 그가 만든 손수레는 최고의 놀이기구였다. 종일 산으로 들로 아이들을 태우고 다니며 신나게 놀던 시절이다.
70년대는 중동 건설 붐이 일어 공고 진학이 인기였다. 공부 좀 한다는 친구들 7명이 함께 목포공고에 원서를 냈는데 혼자만 붙었다. 나무 다루는 솜씨가 워낙 출중하니, 1학년 때부터 목공 기능장 선수로 뽑혔다. 그는 우선 목공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빨랐다. 도면만 봐도 만드는 과정이 입체적으로 그려졌다. 생각한 대로 작업이 진행되고 칭찬을 들으니 재미가 붙었다. 작업에 몰두하다보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다. 2․3학년 때 앞서 언급한 두 대회에서 수상하고, 졸업한 후 안정적인 직업이 보장되었다. 아파트까지 받는 대우였다.
한국직업관리공단 산하 직업훈련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대학과 대학원 공부까지 마쳤다. 직장이 한국산업관리공단으로 바뀌며, 기능대학을 관리 감독하는 행정직으로 업무를 전환했다. 결혼을 하고 두 자녀를 키우며 부족함 없는 생활이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은 늘 허전했다. 때때로 목수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사무치게 밀려왔다. 한번은 설악산에 등산 갔다가 목수들이 봉정암 전각을 짓는 모습에 매료되어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 소식을 듣고 부장이 찾아와 강제로 끌고 내려가는 바람에, 그의 목수 인생은 한참 훗날로 기약된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1997년 말 IMF가 터지면서, 이듬해 구조조정 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공교롭게도 칼자루는 대학 관리차장이던 그에게 쥐어졌다. 상당히 고통스런 시간이었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스스로 구조조정 대상자가 되어 20여 년간 정들었던 직장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쉽고 섭섭한 기분보다는 설렘이 앞섰다. 그토록 갈망하던, 목수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온전히 열린 것이다. 1999년 김왕직 교수의 추천으로 조희환 선생 문하에 입문하게 된다. 조희환 선생은 조선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한 최원식 선생을 시작으로 조원재-이광규로 내려온,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맥을 잇는 당대 최고의 도편수였다.
“처음 두 달간은 집에 가지 않았어요. 나중에 집에 가니 아내가 저를 붙잡고 울음을 그치지 않더라구요. 좋은 직장 그만두고 나이 마흔에 꿈을 찾아 애쓰는 모습이 안쓰러웠던 게죠. 오랜 세월 펜대만 굴리던 손으로 건축일을 하려니 육체적으로 오죽 힘들었겠습니까. 당시엔 도편수인 선생님 곁에 딱 달라붙어 일을 했어요. 목적이 있었으니까요. 나이에 대한 부담이 있다보니 어서 빨리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은 간절함이 너무도 컸죠.”
자연의 곡선을 담은 한옥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타고난 ‘목수 DNA’는 곧 두각을 나타냈다. 무엇보다 목조건축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대패질 하나를 하더라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처리했다. 조희환 선생이 여러 일을 시켜보며 흡족해하자, 초짜배기가 도편수 옆을 맴돈다며 선배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선배를 누르는 방법은 오직 실력뿐이었다. 하루는 목수 20년차 이상의 선배 둘이 지붕골에 골추녀를 거는 작업을 하는데, 한나절 동안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며 쩔쩔 매는 것이다. 이때다 싶어 그가 나섰다. 현치도(現値圖, 1:1 도면)를 뜬 후 혼자서 한 시간도 안 걸려 걸어놓았다. 입이 딱 벌어진 선배들이 이후론 어떤 시비도 걸지 않았다.
스승으로부터 실력은 물론 전통건축에 대한 열정과 성실성을 인정받으며, 6개월 만에 건축을 갈무리하는 마감 작업이 맡겨졌다. 유래를 찾을 수 없는 파격적인 지시였다. 스승 문하에서 초(문양 도면) 그리는 법을 전수받으며, 기문(技門)의 맥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전해졌다. 스승과의 인연은 아주 짧았다.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고작 4년여의 시간을 함께 했을 뿐이다. 그러나 집다운 집을 지어야 한다는 스승의 꼼꼼한 기질과 고집마저 100% 흡수해온 그에게는 충분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스승이 병석에 있던 마지막 1년간은 자신이 배운 것을 내면적으로 확고하게 정립하는 시기였다.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안동 봉정사 극락전의 해체 수리 작업에 지원해 전 과정을 함께 했다. 나무와 집에 대한 생각, 전통 짜임 구조, 옛 선인들의 철학 등을 살피며 전통건축에 대한 이해를 업그레이드시켰다. 그가 내린 한옥에 대한 정의는 독특하다.
“기단, 초석, 기둥, 지붕을 가진 집이 바로 한옥입니다. 서양 건축엔 기본적으로 기단과 초석이 없어요. 신전(神殿)만이 그것을 갖추고 있죠. 우리나라엔 시골 민가도 기단과 초석이 있어요. 이 말은 곧 한옥에 살던 우리 민족은 신적인 영역의 심성을 지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한옥에는 자연의 이치가 담겨 있어요. 창 하나를 내더라도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음양의 조화를 이루려고 합니다. 자연의 일부분으로 공존하는 것이죠. 자연은 곡선입니다. 직선은 인간이 만든 것이죠. 서양 건축이 직선이라면 한옥은 자연의 곡선을 담고 있습니다.”
시대와 소통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전통건축
스승과의 인연은 최고의 한옥 전문가인 신영훈 선생에게로 이어졌다. 조희환 선생과 신영훈 선생은 모두 이광규 도편수의 제자다. 송광사 대웅보전, 프랑스 고암서방, 운문사 대웅보전, 보탑사 삼층목탑, 영국 대영박물관 사랑방, 강화도 학사재 등 문화재급 목조 건축물을 함께 만들었다. 이광복 선생은 임실 천지원 원당을 짓고 신영훈 선생으로부터 최고의 도편수로 인정받으며, 비로소 조희환 선생의 후계자로 낙점받았다. 3년 전부터는 목수 양성을 위해 신영훈 선생이 강원도 홍천에 설립한 ‘지용한옥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신영훈 선생에게서 전통건축의 디테일한 감각을 익혔다면, 현고 스님(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으로부터는 불교 사상을 배우며 문리가 트였다. 현고 스님과의 만남은 시절인연이었다. 북한산 금선사 삼성각과 양평 용문사 심검당 건물을 눈여겨봤던 스님이, 두 건물을 지은 도편수가 같은 사람이란 걸 알고 연락을 취해왔다. 당시 낙산사 복원 불사 도감 소임을 맡고 있던 스님에 의해 불사에 참여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2003년 도편수가 된 이후로 작업 과정을 대학노트에 빼곡하게 기록해놓는다. 1년에 5권 분량이다. 한 번도 같은 형태의 건물을 지어본 적이 없기에 노트 분량도 줄어들 줄 모른다. 전통을 바탕으로 늘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며 창조적인 작업을 하기 때문에, 한시도 도면 디자인 구상과 기술적인 연구를 멈출 수 없다. 거느리는 식구가 20여 명으로 늘어나면서부터는 재정적인 책임감도 무겁게 느껴진다. 일을 줄일 수 없는 이유다. 보통 건축 현장 대여섯 곳이 맞물려 돌아간다. 한편 미국 워싱턴 메두락 공원 ‘평화의 종’ 종각 건립과 러시아 한옥 전시회 등을 비롯해, 현재 중국에도 목수를 파견해 한옥을 지으며 한옥의 세계화를 이끌고 있다.
“현장에서 목수 일만 한다면 참 행복할 것 같아요. 그런데 자연적인 조건과 집의 용도에 따라 항상 새로운 도면을 구상해야 하니, 창작의 고통이 뒤따릅니다. 막 운동 끝내고 공부하려면 힘들듯이, 실기와 이론을 쉴 틈 없이 병행해야 하니 좀 고달프긴 해요. 그래도 늘 창조적인 생각을 하며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어 즐거움이 큽니다. 도편수로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니 할 일이 많아졌어요. 조희환, 신영훈 두 선생님과 현고 스님께서 저에게 아낌없이 지원하고 배려해주셨듯이, 제자들의 처우 개선과 함께 작업에만 몰두하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또 기술적으로 완성도 높은 이 시대 최고의 문화유산을 남기고픈 소망이 있습니다.”
이광복 선생은 이번 가을부터 또다시 새로운 도전을 한다. 도심 사찰 건물의 모델을 제시하는 잠실 불광사 대웅전 불사다. 현대적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지상 4층 건물 위에 당당하게 올라설, 전통 양식의 대웅전이 어떠한 모습으로 도시인들에게 다가올지 자못 기대가 크다. 시대와 소통하기 위해 전통건축의 변화를 끊임없이 모색하는, 그의 다음 행보가 벌써부터 궁금하다.
이광복/1960년 전남 진도 출생. 목포공고와 송원대 건축과를 졸업했으며, 전국 학생기능경기대회 건축목공 금상과 기능올림픽 지방경기대회 건축목공 은상을 수상했다. 1999년 고 조희환 도편수 문하에 입문하면서 진천 보탑사 영산전 불사에 참여했다. 2003년 도편수가 된 후, 조원재-이광규-조희환으로 내려온 전통건축의 맥을 잇고 있다. 강화도 학사재, 서울 금선사 삼성각, 평창 백덕재, 양평 용문사 심검당, 서울 고궁박물관 자격루, 낙산사 복원 불사, 가야 역사재현단지, 미국 워싱턴 메두락 공원 종각, 화순 한옥단지 등을 건립했다. 2006년 대한명인(대목)에 선정되었으며, 현재 (주)한옥과문화 부설 지용한옥학교 교수로서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
첫댓글기단, 초석, 기둥, 지붕을 가진 집이 바로 한옥입니다. 서양 건축엔 기본적으로 기단과 초석이 없어요. 신전(神殿)만이 그것을 갖추고 있죠. 우리나라엔 시골 민가도 기단과 초석이 있어요. 이 말은 곧 한옥에 살던 우리 민족은 신적인 영역의 심성을 지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한옥에는 자연의 이치가 담겨 있어요. 창 하나를 내더라도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음양의 조화를 이루려고 합니다. 자연의 일부분으로 공존하는 것이죠. 자연은 곡선입니다. 직선은 인간이 만든 것이죠. 서양 건축이 직선이라면 한옥은 자연의 곡선을 담고 있습니다.” 전통문화보존과 불교건축의 보배를 선재님을 통하여 만나게 됩니다. 고맙습니다. 나무 아미타불!
첫댓글 기단, 초석, 기둥, 지붕을 가진 집이 바로 한옥입니다. 서양 건축엔 기본적으로 기단과 초석이 없어요. 신전(神殿)만이 그것을 갖추고 있죠. 우리나라엔 시골 민가도 기단과 초석이 있어요. 이 말은 곧 한옥에 살던 우리 민족은 신적인 영역의 심성을 지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한옥에는 자연의 이치가 담겨 있어요. 창 하나를 내더라도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음양의 조화를 이루려고 합니다. 자연의 일부분으로 공존하는 것이죠. 자연은 곡선입니다. 직선은 인간이 만든 것이죠. 서양 건축이 직선이라면 한옥은 자연의 곡선을 담고 있습니다.” 전통문화보존과 불교건축의 보배를 선재님을 통하여 만나게 됩니다. 고맙습니다. 나무 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