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계단은 극의 전개가 매우 빠르다. 초반 10분경에 이르면 100페이지를 넘게 읽어서 더 이상 손을 놓을 수 없는 소설만큼의 흡인력을 가진다. 여인의 죽음으로 살해누명을 쓰고 스파이에게 쫓기는 주인공의 여정을 살아있는 캐릭터묘사, 스피디한 전개를 통해서 히치콕은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로 만들어 냈다. 이 영화를 보다보면 쫓기는 자와 쫓는 자들을 담은 영화들 속에서 볼 수 있는 전형이 히치콕의 영화 속에서 많이 인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는데, 들키지 않기 위해서 우유배달원에게 옷을 빌려 입는 장면, 형사의 눈을 피하기 위해 처음 보는 여인에게 키스를 하는 장면(조성모의 뮤직비디오 투 헤븐에 나오는 유명한 키스 씬 을 떠올릴 수 있다), 위기모면을 위해 느닷없이 대중들 앞에서 웅변을 하는 재치 있는 주인공의 모습 등에서 고전영화가 가지고 있는 향수를 만끽할 수 있다.
극의 스피디한 전개를 위해서 히치콕은 과감한 생략과 단편소설처럼 간단한 이야기 구조를 채용한다. 범인을 신고하기 위해 경찰서로 찾아간 주인공은 살해범으로 몰리게 되는데 짧은 3컷 만으로 경찰서를 탈출해 군중들 사이로 들어가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1.경찰서의 창가를 보여주는 컷(3초정도) 2.곧바로 창을 깨고 달아나는 컷(3초정도) 3.거리 악단 속으로 몸을 숨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컷(5초정도) 총 10여초 동안 단 3컷만으로 범인으로 지목받은 주인공이 탈출하고 숨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군더더기 없고 세련되어 보이는 장면의 빠른 전환은 관객들이 영화에서 한시도 눈을 땔 수 없도록 흥미를 유발시키는 작용을 해주고 있는데 이런 히치콕의 배려는 그가 관객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영화를 만드는 감독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주인공 헨리가 은신하는 장소들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은 각각의 장르적 특색으로 나뉘어 볼 수 있다. 기차 안에서의 에피소드는 스티븐 시걸의 액션활극이 연상되고, 어느 시골부부의 집에서의 에피소드에서는 인물들의 캐릭터 묘사가 매우 뛰어난 심리극을 보는듯하다. 헨리가 시골부부의 부인을 보고 딸입니까? 라는 대사를 하는데 이때부터 남편은 젊은 남자와 부인이 바람이 나지 않을까 하며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본다. 함께 식전 기도를 하는 장면에서 부인은 헨리가 신문에 실린 살인범임을 알게 되고 주인공은 눈빛으로 동정을 호소한다. 이 장면은 대사가 배제되고 인물들의 얼굴표정만으로 상황을 표현하고 있는데, 침묵 속에서 눈빛과 표정만으로 침도 못 삼킬 정도로 감도는 긴장감을 만들어내고 있다. 또한 부인의 순수하고 순종적인 모습은 헨리가 데리고 가줬으면, 혹은 헨리와의 로맨스가 생겼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연민이 느껴지고 매력을 가진 캐릭터로 그려진다. 그리고 남편이 밖에서 창을 통해 헨리와 부인을 훔쳐보는 장면은 정지한 스틸사진으로 보더라도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매우 효과적인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함께 수갑을 차게 된 헨리를 불신하는 여인과의 여관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는 잘 만든 로맨틱 코미디라고 할 수 있다. 둘 사이의 덜컥거리던 관계가 점차 호감으로 변하는 과정을 여관이라는 장소, 수갑, 젖은 스타킹 같은 소재를 이용해서 재미있게 풀어낸다. 이처럼 39계단에서는 써쓰펜스 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의 연출에도 뛰어난 재주를 가진 히치콕의 면모를 볼 수 있다.
미스터 메모리라는 인물을 통해서는 히치콕이 논리적인 캐릭터의 구성보다는 극적인 구성에 더욱더 신경을 쓰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실제 하진 않지만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이런 캐릭터들은 영화를 보는 재미를 더해준다. 미스터 메모리라는 인물은 자신의 사명처럼 기억하고 있는 내용은 무조건 말한다. 심지어 자신의 죽음이 예견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논리적인 인과와 연결고리를 가진 행동, 인물의 성격을 표현 하는 것은 히치콕의 영화와는 거리가 먼듯하다. 히치콕은 이런 논리적 연결고리들을 약간 느슨하게 하는 대신 인물의 캐릭터에 생명력을 사건의 전환에 영화적인 극적상황을 만들어낸다. 이런 히치콕의 의도는 “나는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는” 그의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39계단은 복잡하게 생각하며 봐야하는 영화가 아닌 잘 만들어진 오락 영화다. 하지만 주의 깊게 보다보면 히치콕의 영화의 영향을 받은 많은 영화들을 새록새록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39계단을 보면서 수많은 영화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는데.. 그 중 하나를 말해보자면 미스터 메모리가 스파이들이 캐낸 정보를 암기 하는 장면에서 영화 ‘어 퓨 굿맨’의 잭 니콜슨이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레드코드의 존재를 말해버리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이 영화가 꼭 히치콕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라도.. 히치콕을 통해서 잭 니콜슨의 행동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