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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16일-주일2부
(요한복음3:16-21 / 예수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심판과 구원, 보편타당한 논리인가)
이런 구절 다 암송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7장 26-27절,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귀납적으로 파편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나님은 자기를 역사 속에서 드러냈습니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이건 아테네에서 한 설교입니다. 아테네, 소크라테스의 고향에서 바울이 한 말이에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우상으로 섬기면 안 된다, 30절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묵고 유월절,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시대는 지나갔지만,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예수님 오기 전까지는 간과하셨다는 말을 썼어요. 중요합니다. 사도행전 14장 15-17절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방임의 시기가 있었다 그랬죠. 우리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그다음에 말합니다. 사도행전 10장 31절입니다.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고넬료는 유대인도 아니고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고넬료는 그냥 기도를 열심히 하고 구제를 열심히 했어요.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우리 하나님은 세계 모든 종교의 이적을 다 허락하셨습니다. 왜 했는지 아세요? 우리 하나님은 불교를 믿고 사찰에 가서 비는 사람에게 왜 애를 낳게 해주셨어요?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애 낳지 못하는 사모님이 사찰에 가서 다 기도 많이 했습니다. 백일기도 했습니다. 부처님이 낳게 해준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응답을 해준 거예요. 호세아서를 보면 호세아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가 안 와서 바알에게 계속 기도했습니다. 바알에게 기도했지만 그 사태를 책임진 분은 바알이 아니라 누구에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녀가 처한 곤경 때문에 그 자녀가 다른 언어를 쓰더라도 그 곤경을 알기만 하면 들어주는 하나님이래도요.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이방 여러 종교에도 기적이 나타나게 하셨는데 그 모든 기적은 누가 다 하는 거예요? 이방신들, 독립적으로 다스리는 신들이 한 게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 한 거예요. <나니아 연대기>에 보면 타쇼신에게 기도했던 한 원숭이가 구원을 받아 아슬란한테 갑니다. 나는 타쇼신에게 기도했지 아슬란을 향하여 기도한 적이 없는데 어찌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렇게 말하니까 이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아슬란이, 네가 정직으로 신명을 바쳐서 진정을 다 바쳐서 기도했다면 그건 아슬란에게 드려진 기도지 타쇼신에게 드려진 기도가 아니다, 네가 만일에 거짓으로 허위로 진정성 없이 아슬란의 이름으로 기도했다 하더라도 타쇼신에게 한 기도와 마찬가지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우리 하나님이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가까이 계시는 분이심을 말합니다. CS 루이스가 이렇게 문학적으로 비유적으로 썼는데도 불구하고, CS 루이스는 종교다원주의라는 논문이 나올 정도입니다. 너무 악하죠? 우리나라가 우리 한국교회가 하나님을 진짜 알면, 이렇게 타인에 대한 저주심 증오심 마음이 생기지 않아요. 우리 하나님의 영은 그런 마음을 주지 않아요. 우리 하나님의 영은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신실하게 비를 주시고 우리 하나님이 악인한테 비를 안 줍니까? MB께서도 비를 맞는 거예요. MB도 눈을 보시고 MB도 구름 보시고 MB도 단풍 보셔야죠. MB가 악인이라는 말이 아니에요. 애매한 걸 제가 결정해줍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정말로 선인과 악인에게까지도 비를 주시는 마음으로 종교를 불문하고 인종을 불문하고 어떤 문명권을 불문하고 하나님 자신의 Job, 창조를 유지하고 피조물을 살리는 일을 해오셨단 말이에요. 그런 빛나는 우리 하나님을 우리가 발견하는 마음을 성령으로 받은 거란 말이에요. 이렇게 참다운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믿는 마음을 배타적으로 가져야 참 배타성이죠. 기독교의 참 배타성은 무지무지한 보편적인 세계만민에게 가까이 계신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구절보다 더 결정적으로 중요한 구절이 요한복음 1장입니다. 제가 요한복음 처음 강의할 때 여러분이 이해를 못 했어요. 분명히 제가 이해 못한 것을 봤어요. 지금도 이해 할지 몰라요. 끝까지 이해 못할 수도 있는데 그래서 좀 아는 사람과 대화하면 저도 위로를 받는데 계속 모르는 사람한테만 말하면 시험에 들어요. 내가 혹시 잘못된 게 아닌가? 오늘 여러분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십시오. 다시 말해 깨달음을 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결정적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여러분 이 말씀은 로고스입니다. 엔 하르케 호 로고스, 로고스는 그리스사람이 다 알고 있는 겁니다. 그리스 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 로고스입니다. 신과 피조물 사이에 중간자가 로고스입니다. 신과 피조물 사이에 로고스가 있다고 믿었어요. 그 로고스가 우주 이성이고 원인이고 법칙이었어요. 그런데 그리스 사람이 알고 있는 그 로고스, 그분이 육신이 되어 온 분이 예수님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 사람들 모두를 이미 오랫동안 하나님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너무 이 요한복음 책은, 이 책 때문에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가 나온 거에요. 마테오리치는 중국 봉건시대의 원조였던 주나라가 하나라 은나라 시대 때 모든 자연 신, 애니미즘 토테미즘 이런 모든 원시종교를 극복하고 최초로 인격적인 하나님 신, 상제 신을 모신 첫 나라가 누구에요? 주나라, 주나라의 제후가 누구에요? 요나라, 요나라에서 태어난 중간 신이 누구에요? 공자, 그래서 이걸 보고 주나라야 말로 인격적인 하나님 상제 신을 처음으로 인정하여 제사를 드린 나라기 때문에 주나라에서 기독교를 본 거예요. 주나라는 BC 1200년부터 벌써 기독교가 시작된 거예요. 그게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에요. 그런 식의 접근이 가톨릭이에요. 개신교는 너무 신학이 약해요. 우리가 공부가 약하고 우리가 너무 타종교를 몰라요. 우리가 너무 타종교를 모르기 때문에, 여러분 단기 선교하러 가지 말고 이슬람을 공부하러 가야 해요. 테헤란 대학으로 유학을 가야 해요. 그게 기독교를 위하는 것이죠. 저는 말레이시아에 유학가기 원합니다. 쿠알라룸푸르에 가서 이슬람을 공부하세요. 왜 미국을 갑니까? 이슬람, 방콕대학교에 가서 불교를 연구하세요. 이건 너무 소중한 일입니다. 방콕대학의 불교학 박사 받아오면 한국교회에 지대한, 세계평화에 이바지합니다. 실론 같은 데 가세요. 학비가 쌉니다. 실론 차도 많아요. 그다음 쿠알라룸푸르요. 이런 데 가서 문화인류학적으로 접근해서 공부를 해야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돈 300만원 쓰면서 단기선교를 가는데, 그 돈으로 가서 이슬람을 연구하고 불교를 연구해요. 고등종교가 하찮은 게 아닙니다. 절대로 아니에요. 인류 역사에 몇 천 년 간 존재하면 보편적 그 무언가가 있어요. 성리적인 무언가가 있다고요. 그런 걸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거예요. 만야 그런 걸 아무 것도 안 믿고 지금 교회 안 다니는 간디는 지옥 갔다고 믿어버리면 그건 하나님의 보편적 섭리를 깡그리 부정하는 거예요. 저는 그걸 실제로 이단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런 거 하지 마세요. 원래 이단입니다. 그런데 저는 논쟁 벌이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이해만 해주면 되는데 제 인생은 소원이 끝납니다. 여러분이 이해를 못 하니까 제가 괴로운 겁니다. 한 번 보세요.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1장 14절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갈릴리의 나사렛 예수 158cm의 키를 가지고 팔레스타인 농부의 얼굴을 하고 쭈글쭈글한 머리를 가진 그 분이 이 세상에 오기 전에, 영원 전부터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 로고스였어요. 이건 기독교가 엄청나게 보편적인 종교가 될 수 있는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적인 엄청난 지평의 형국을 가능케 하는 대 선언이고, 진짜 좋은 의미의 배타성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 통치한다고 믿는 참된 배타성이에요. 여러분, 예수님 오기 전에 예수님이 누구에요? 만유 안에 있는 만유를 지으신 로고스가 예수님이니까 우리 예수님 적인 게 얼마나 온 세상에 많이 퍼져 있겠느냐고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기억납니까?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자연 안에 억만 년 동안 이미 있어왔다는 거죠. 바울이 부활 이야기 할 때 구약을 인용합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필연성을 교회에 확신시킬 때 하나의 썩는 밀알로 예수의 부활을 설명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부활을 호세아서 읽어봐라, 아모스 읽어봐라, 출애굽기 읽어봐라,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 12장 24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런 엄청난 대 부활, 곡식 자체가 십자가 부활의미를 선언하지 않습니까? 너무 놀라운 것은 우리가 12월에 보리를 뿌립니다. 1월말 2월초에 보리가 싹 올라옵니다. 보리가 분명히 제가 뿌릴 때 이놈은 죽은 놈과 방불한 놈입니다. 말라 비틀어져서 아무렇게나 표정이 일그러져 있어요. 이놈을 탁 던져서 거름 주고 흙을 덮어 놓으면 두 달 반 만에 고개가 올라오는데 3월이 되면 쫙 피면서 5월이 되면 보리밭에 고라니들이 엄청 뛰어놀고, 6월 10일 되면 추수하십시오, 하면서 살랑살랑 고개를 흔듭니다. 6월 10일에 잘라서 구워 먹으면 엄청 맛있습니다. 이 엄청난 대부활의 향연, 농사는 십자가 부활의 대향연, 헨델의 메시아와 똑같아요. 흔들리는 보리밭을 보면 헨델의 메시아, 주는 부활하셨다, 이걸 부르는 것과 똑같다고요. 저는 이런 하나님 앞에 찬미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온 생애를 바쳐서 이 하나님을 전파할 수밖에 없는 거거든요. 이런 하나님이 요한복음의 하나님, 세계 만민 안에 로고스, 세계 만민을 창조하셨던 로고스, 이렇게 우주적으로 범위가 넓으신 하나님이 우리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정말 우주적인 포용심이 생길 수밖에 없고, 타 종교 등과 우열을 다투지 않습니다. 타종교와 우위를 다투는 인간은 교권주의자, 다른 종교를 믿으면 우리가 돈이 모자라고 권력이 모자라는 악한 교권주의자만 이것에 대해서 침탈을 느낍니다. 모든 다른 사람들은 진리가 실천되는 그 자체 때문에 기쁜 거거든요. 그러니까 저처럼 예수를 믿으면 스님들을 보고 절대로 적개심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머리 깎은 스님을 보면 너무 안 됐다는 생각이 들고 털모자를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고 그래요. 실제로 스님들은 고기도 못 드시고 하니까요. 두부라도 사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고, 오히려 스님들 중에서 날라리 스님들이 많아서 걱정입니다. 오토바이 타고 다니면서 카바레 다니면서, 밴댕이회 먹고 다니면 골치 아파요. 진짜 착한 스님을 보면 사촌형님 같은 느낌이 들고요. 그 말은 우리 하나님이 로고스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 안에 계시고 영원부터 영원까지 만물 안에 계시고, 그분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예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굉장히 배타적 팔레스타인 피부를 가지고 오신 분이지만, 그 팔레스타인 피부를 가지고 오신 예수님은 세계 만민의 모든 것을 다 품은 배타성이에요. 보편성을 삼켜버린 배타성, 예수님의 그 독특한 팔레스타인 적인 외모를 가진 그분이 세계만민을 포용하는 그 특수성이에요. 기독교는 특수한 진리 맞습니다. 그런데 세계 만민을 전부 다 포용하고 포섭하는 특수성이기 때문에, 이런 특수와 보편의 변증법적인 화신인 예수를 만나면 세계만민의 역사문화 전부 다 하나님의 신적광체와 편린을 바라보는 기법이 있기 때문에, 세계 만민의 역사가 전부 저한테는 우리 하나님의 발자국을 찾는 고고학적인 기쁨을 준다는 말이에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사 1-15권을 읽으면서 너무 기뻤어요. 우리 하나님이 로마의 역사에도, 지난겨울에도 53만 6천 원짜리 사기열전 10권을 다 읽었습니다. 그걸 읽으면서 내가 너무나 감동했습니다. <임꺽정> 10권, 19세기 러시아 사회소설 10권, 모든 책을 다 읽었는데 한결같이 전부 다 시료 채취해 분석해보니까 우리 하나님의 발자국이 다 있습니다. 이게 너무 놀라운 겁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여러분 진짜 예수 잘 믿으면 창조의 풍요를 느끼고, 이런 하나님을 전파하고 싶은 느낌이 일어날 수밖에 없어요. 요한복음이 바로 그 중에서 최고입니다. 요한복음보다 더 보편과 특수가 아름답게 만날 수가 없어요. 이렇게 보편적이면서 이렇게 배타적이고 특수한 진리가 조인트 할 수 없는 거예요. 진짜 배타적인 예수님을 믿으면 보편적이 되어 버려요. 그러니까 배타적인 게 나쁜 게 아니라 좋은 배타성, 예수를 진짜 믿어야 좋은 보편성이 되니까 이렇게 서스펜스를 주는 배타적 진리를 제대로 믿으면 보편적인 사람이 되니까 예수의 배타성은 유지를 해야 되겠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나처럼 보편적이지 않고는, 나처럼 우주만물 가운데 퍼져 있는 신적인 능력과 성품의 화신이 아니고는 아버지께 갈자가 없다, 그런 뜻이에요. 기독교 믿으면 천당 간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15세 딸이 죽은 부모가 기독교인에게 이런 말을 듣습니다. 미국 보수주의 기독교 사람들은 12세 이내에 죽으면 전부 다 하나님 품에 간다고 믿습니다. 그건 성경 출애굽기에 보면 전후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12세짜리 어린아이는 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거든요. 그런 이상한 메타포를 보고, 교통사고를 당하려면 이왕이면 12세 이하에 당하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부모님은 15세 된 딸을 잃었습니다. 그랬더니 기독교인 한 명이 와서, 그 딸이 주를 영접했나요? 아니오, 친구들한테 들어보니까 자기는 무신론자라고 하고 죽었대요, 그렇게 하니까 기독교인이 하는 말이, 그러면 아무런 희망이 없네요, 이 저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란 말입니까? 이것이 예수란 말입니까? No way, 아닙니다, 그건 정말 잘못된 예수입니다, 라면서 책을 쓰는데 굉장히 빨리 읽힙니다. 그런데 이 책은 히틀러가 왜 지옥 안 가도 되는지를 설명을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이 이긴다>는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심판의 엄숙성을 배제하면서까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심판의 엄숙성을 고스란히 살리면서도 사랑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요한복음 오늘 본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제가 3주전인가 설명했을 겁니다. 민수기 21장 1-8절에서 나왔다고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적진에 돌진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민족 집단전멸을 막기 위해서 불뱀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무엇입니까? 더 큰 파멸을 막기 위한 창조적인 방해입니다. 내가 노름을 하다가 판돈 1억짜리 노름판에서 잡혔습니다. 내가 만일 판돈 1억짜리 노름판에서 안 잡히면 판돈 100억짜리 노름꾼이 됩니다. 이때 내가 1억짜리 때 잡혀서 감옥에서 20년 사는 건 창조적 심판, 더 큰 악을 막기 위한 하나님의 불뱀 파송사건입니다. 그런 겁니다. 민족전체가 집단 전멸할 수 있는 위험한 전쟁에 돌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막기 위해 불뱀을 보내 물게 했습니다. 불뱀에 물리니까 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백성은 우리 하나님은 전쟁에 돌입해서 죽는 걸 막기 위해 불뱀을 보냈는데, 불뱀이 또 민족전멸을 가져오면 안 되니까 놋뱀, 즉 불뱀의 독 위력을 싹 빼버리고 불뱀을 죽입니다. 사망을 죽입니다. 사망을 죽이면 산 자를 죽입니다. 큰 고기에 삼킨바 되어, 큰 흑돔고래한테 잡혔어요. 흑돔고래를 죽이면 여러분이 살죠. 똑같은 겁니다. 물론 흑돔고래는 사람 안 먹습니다. 불뱀이 사람을 죽일 때 불뱀의 독을 죽이면 불뱀에 물린 사람이 살겠죠? 그런 일종의 하나님의 magical 한 operation, 준 마술적인 operation, 고대사회는 이런 게 먹혔습니다. 놋뱀을 막 치니까 고대사회는 준마술적이고 준요술적인 행위를 믿었기 때문에 그 고대사회 수준에 맞게 말했습니다. 놋뱀을 만들어내니까, 이 놋뱀을 보아라, 너희를 물었던 불뱀은 죽었다, 불뱀을 죽여 버린 사랑의 하나님을 믿어라, 그러면 독 기운이 사라질 것이다, 라는 아주 간단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놋뱀을 쳐다본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처럼 사랑한다는 말은 심판의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을 심판의 불뱀을 죽여 만든 놋뱀을 쳐드심으로 살려주신 방법으로 세상을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그런 방법으로 우리 개인을 사랑하고 그런 방법으로 우리 가정을 사랑했단 뜻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않기로 작정하면 심판이 온다는 심판, 절대로 이 책도 없앨 수 없는 심판입니다. 이런 심판까지도 우리는 부정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심판과 구원은 비대칭적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심판과 구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 하지 않고 구원을 먼저 선택하라고 계속 설득하시는데 구원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이 가는 것이 심판이고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강제로 구원 받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심사숙고 끝에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사는 게 좋은 걸 인정해야만 구원받게 만들어놓으셨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은 인정받고 동의를 얻은 후에 구원의 선물을 주십니다. 여러분 오늘 날 구원 받으면 첫째 재산의 감소가 일어납니다. 구원받은 여러분이 돈이 많은 여러분이 가난한 지체가 많은 교회에 가면 여러분의 소득은 국세청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소득 재분배가 일어납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묻고 그래도 그런 구원을 받겠다고 하면 성령을 보내주시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그래서 구원을 받으면 소득재분배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받는데 십일조라는 건 소득재분배입니다. 소득이 많은 사람이 십일조를 내면 소득이 적은 사람은 십의 십일이 모입니다. 1억을 버는 사람이 1천만원을 내버리면 하루 종일 100만원 벌기도 힘든 사람에게 1천만원 가지고 교회에서 복지를 하면 소득재분배가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성령으로 감동돼서 마르크스 레닌 혁명없이 계급투쟁없이 그냥 그대로 의의 공동체, 거룩한 평탄작업이 일어나버립니다. 그렇게 오순도순 사는 걸 요한복음에서 영생,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영생과 구원을 원하렵니까? 아니면 이런 공동체에 속하지 않고 돈벌어서 뇌물 받아서 하이난 섬에 가서 뱀탕 얻어먹고 골프치고 더러운 짓을 하고 돌아다니다가 뒤지렵니까? 이렇게 물을 때 그쪽으로 살겠다고 하면 그건 구원을 받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할 수 없는 부유한 조건에 있지만 성령 받은 우리 형제자매들의 소득수준, 가리봉동 살고 금천구에 살지만 압구정에 사는 사람이 가리봉동 교회 다니면서 그 가난한 무지랭이급 들과 함께 살면서 헌금하고 사는 걸 즐거워하면 천국 가서도, 아이고 내가 천국에 왔구나, 이런 느낌이 드는데 그게 괴롭고 바베론 포로로 완전히 잡혀온 것 같다, 느낌이 들면 천국가도 이렇게 물어요. 천국 보내주세요 하나님, 네가 있는 곳이 천국이야, 아니에요, 나는 저렇게 못난 사람과 같이 있고 싶지 않아요, 아니 넌 원래 이 삶을 원했어, 저렇게 문둥이 들과 저는 살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천국 보내준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심적인 영생의 교제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은 천국가도 가장 괴로운 게 천국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진짜 천국에 보내달라고 데모하게 된다는 거죠. 이런 천국의 복음을 안 받아들이면 심판을 받는 게 돼요. 제가 볼 때 한국 남자들 불쌍해요. 이런 공동체에 속해 살면서 오순도순 살면서 성경퀴즈도 하면서 봉사활동도 하면서 밥 같이 먹으면서 이게 얼마나, 어른이 돼버리고 기성사회에서 계급사회에서 대접을 달리 받으면 이게 힘든 거예요. 우리는 출세한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냥 앉아서 춘천 막국수 먹듯이 먹는 게 쉽지만, 저도 이게 쉬워요. 저도 항상 이렇게 살기 때문에요. 그러나 어떤 사람은 우리 교회에 왔다가 못 와요. 너무 우리교회가 초라하니까 왔던 사람이 못 오는 거예요. 교회 넓은 데 가면 아마 오실 거예요. 그 사람이 약점이 아니라 이 세상은 실제로 그렇게 돌아가요. 그러니까 우리가 계급과 상관없이 형제자매라 하면서 이렇게 하는 건 성령의 감화로만 되지, 결코 세상에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노회만 가보세요. 노회에 가보면 일단 교회가 작은 사람은 앉으란 데가 아무도 없어요. 교회 큰 목사들만 턱 하니 앉아서 오리 고기 나오면 탁 젓가락 먼저 올리죠. 우리 보통 사람은 일단 젓가락 순서도 안 돌아와요. 가만히 있다가 와야 해요. 노회도 이럴진대 이 세상 다 그런 거예요. 다시 말해서 평등하지 않습니다. 돈 때문에 모든 권력관계가 재편돼요. 거기 있으면 메스껍고 아니꼬워서 위염 걸려서 드디어 위암 걸려요. 그런데 교회는 그게 아니잖아요. 교회는 그 사람이 무얼 하든지 교회 멤버십을 두고 성령 안에 인침을 받은 형제자매들은 전부 다 신적인, 즉 이 사랑은 영원할 것 같다는 불멸의 확신이 드는 사랑을 나누기 때문에 영생에 들어온 것이 됩니다. 이런 영생을 지금 좋아한다는 말은 가리봉동과 금천구와 장성 도계탄광에서 가난한 사람과 소록도에서 한 동아리가 되겠다고 결단하고 성령 받고 내려오는 것, 우리가 그런 구원을 원하지 않으면 그런 영생을 원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 것이라는 거죠. 참 무서운 거예요. 그러니까 실제로 어떤 사람은 심판 받습니까? 나 혼자, 유아독존적인 충만을 원하는 사람, 그게 심판을 받는 거예요. 하이난 섬에 홀로 가서 골프 70홀 108홀치고 돌아다니는 것이 심판 받은 거래도요. 절대로 구원받은 거 아니에요. 오히려 후보 선수지만 양진일 목사가 축구할 때 끼워주는 것, 이게 구원이라고요. 그래서 어쨌든 참여에 의의를 두고 후보 선수로도 열심히 뛰는 것, 이게 제 인생 살아온 방식입니다. 형제자매가 울 때 같이 오열해주고, 공동체가 부를 때 귀 기울여 사랑을 나눠주고, 이런 것이 영생이고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걸 싫어하고 나의 소득재분배를 싫어하고 나의 계급적인 자기부인을 싫어하고, 이런 모든 게 불편하다, 나는 바벨론 포로다, 나는 구원을 위해 왔지만 사실 천국의 인질로 온 거나 마찬가지다, 이런 사람들은 실제로 멋진 천국에 가서도, 답답하다, 이렇게 일기를 쓸 겁니다. 천국 D+11일차,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독기가 없다, 처음에는 좋았지만 너무 재미가 없다, 나는 아마 지옥을 더 원하는 것 같다, 이런 일기를 쓸 거예요. 사자를 보십시오. 고라니를 잡아먹고 피 질질 흘리면서 먹다가요. 풀 먹는 사자들만 오는 공동체, 식단메뉴가 풀밖에 안 나와요. 그러면 피 먹던 사자가 풀을 보자마자, 차라리 죽여라 죽여, 이러면서 하나님께 항의 하겠죠. 아슬란처럼 풀 먹던 사자가 되지 못하고 먹다가, 풀밖에 없는 걸 보고 사자가, 아 정말 더러운 천국이다, 고기는 영원히 못 먹는 것인가, 그것과 똑같겠죠? 풀 먹는 사자가 되는 것, 사자가 착취와 탐욕과 배제의 악을 버리고 풀을 먹고도 어린 양과 함께 뒹구는 것, 이게 바로 천국이고 영생이고, 이걸 거부한 사람들은 풀 먹지 못하고 풀 안 먹고 고기 먹겠다고 하는 사자들이 따로 모여 사는 곳이 바로 지옥이고, 그게 바로 심판이란 말이죠. 여러분 결단하십시오. 이 사랑을 영접하고 풀 먹는 사자가 되는 걸 좋아하면 영생을 뜻하는 것이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걸 알고도 싫어하면 심판받은 것이다, 이런 심판을 누가 거부할 수 있느냐? 저는 이런 생각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은 너무나 배타적이면서도 온 세계 만민을 다 품는 배타적인 보편적 사랑입니다. 하나님 우리 기독교인들이 정말로 사랑이 가득하여 지옥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의 운명에 관심 갖고 덤벼들어서 고쳐가게 해주시고, 형제자매들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데 불멸의 사랑을 실천하는 데 앞장서 나가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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