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보고서 / 탁란
'영화*가 시작되면
뽀얀 먼지를 달고 온 버스가 서고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내린다
버스가 다시 섰을 땐 엄마 혼자서 떠난다
말 못하는 외할머니 곁에 떨궈진 아이'
만삭의 뻐꾸기 한 마리
몰래 오목눈이 둥지에 알을 낳는다
그 후부터 이 산 저 산
뻐꾸기 울음소리가 유별나다
화끈거리던 진달래 열을 식히고
숲은 녹빛으로 가득해 어둑하다
청보리 여무는 소리 서걱일 때
쑥부쟁이도 개망초도 꽃눈 만든다
코뚜레 뚫은 소 풀밭을 호령하다가
등줄따라 미끌리는 햇살 등살에
꼬리에 바람 물고 너붓이 엎드린다
뻐꾸기 날마다 울타리 너머
먼발치서 흘깃흘깃 새끼를 부른다
새끼는 제 어미에게만 귀 기울이며
자고 일어나고 얻어먹고 태연하다
다 자란 새끼 불러서 자취를 감춘
오목눈이 둥지가 텅 비었다
뻐꾸기 울음소리 그치자
오목눈이 울음소리가 숲을 채운다
'또 한대의 버스가 먼지를 날리면
할머니 볼우물에 서벅한 해 그름이 고인다
아직까지 소리 한번 지르지 못했는데
귀 어둔 외할머니 쭈구렁한 젖가슴 흔들며
굽은 등허리 닮아있는 집으로 들어간다’
*영화 <집으로>
발가락에 대하여
보도블럭 위를 알짱거리는
비둘기 발가락을 무심코 본 후로
종종 걸음 멈추고 안쓰럽게 세는 버릇
발가락 하나가 잘리고 없는 놈
그나마 둘 달린 놈
드물지만 한 쪽 발가락을 다 잘리고
뒤뚱거려서 애가 쓰이는 녀석도 보인다
배고픈 날 서대구공단 야적장을 뒤진 모양이다
명줄만큼 질긴 나일론실에 걸렸을 것이고
올가미에 졸려서 질식된 발가락이 말라서 떨어진다
작두에 잘린 할머니 집게손가락이 보인다
겨울이면 그 손가락이 시려 콧김 호호 쐬면서
손발이 성해야 벌어먹기가 수월하다는 넋두리
잠금장치에 갇혀 군말 없던 발가락들
곰팡내로 밀폐된 독방살이를 이젠 알겠다
밥벌이에 골몰해 손발가락 내 줄 뻔했던 일
바쁜 걸음 멈추고 비둘기 발가락을 보다가
내 손발의 품삯이 얼마나 송구스럽던지
꼼지락거리며 엎드려 경건하게 아는 체 해본다
생태보고서 / 공생
여태까지 네가 긋고 간 길 위 흔적만 찾아서 핥아 먹고 살았다
그것은 개미도 진딧물도 서로 충족되지 않을 목마름이었고
먼 기다림이었고 기어이 알아버린 둘의 한 방향의 길이었고
네가 머물다간 가지 끝은 아주 짧은 단맛으로 포장된 길일 뿐
애초에 포식이란 먼 단어 앞에서 좌절하게 하는 단물
햇살 꽁무니를 물고 길게 늘어져 누운 그림자
곧 밀려드는 어둠에게 먹혀 흔적을 지울 때
바람은 끊임없이 너의 몸 자국 위를 거칠게 훑고
혼란으로 둔해진 후각을 노리며 흔적 놓쳐 헤매기도 한다
감질나게 단물 핥아가며 꼬박꼬박 널 따라온 세월
가늘어지며 끝을 알 수 없이 모습 사라진 길에
더 이상 나아갈 의미도 잃고 방황하며
헤매는 삶을 빈정거리지만 운명처럼 그어진
저 위태로운 나뭇가지 끝을 향하는
우리 그리고 너와 나 어제 오늘 내일
개미와 진딧물처럼
뒤를 이을 선택의 여지 얼마일까?
화장실 속 휴대폰
투다닥 소리와 함께
손 쓸 겨를도 없이 재래식 화장실로 휴대폰이 빠져버렸다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발목잡힘이 귀찮았고
멱살잡이 당한 느낌에 던져버리고 싶었던
마침내 눈치챘는지 흔적도 없이 내 눈 앞에서 사라졌다
이제 내가 놓여나고자 안달했던 것에서의 자유다
천만에, 화장실 문 앞에 서서 난데없이 허옇게 빈 손
순식간에 모두들 떠나가 버렸다
누군가는 나를 애타게 찾는지 실종음 전파가 윙윙 귓바퀴를 울린다
휑하니 빠진 관계들의 사라짐 앞에 우두커니 패스워드를 잊은 채
길에서 경로 이탈한 네비게이션처럼 고정화면으로 서 있다
이런 엉터리같이 궁색하기 짝이 없는 아날로그를 쓴 나의 허세
졸지에 끊긴 전자파의 금단현상을 멀미나게 치루고 있으니
손아귀에 넣고자 했던 용이주도함이 낱낱이 까발려진 참담함으로
하얗게 밀려오는 백지들 위로 꼬물거리며 종문소식 된
그대 목소리
목공예 전시장 근처
역 지하도로 가는 길에
목공예를 전문으로 하는 전시장이 있다
그 곳엔 나무뿌리로 만든 작품들의
연신 우두둑 웅크린 관절 펴는 소리 들린다
누대에 걸친 무거운 암매장의 상처
필사적 탈출로 거듭된 순장의 역사들
어둠에서 지상으로 구원시키고 악착스런
수족들 달래서 환생케 한 전시장이 있다
지하계단 밑으로 노숙의 흔적 역력한 사내가 있다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눈길은 아래로 더 아래로
어둠이 깊어져서야 비로소 구겨진 몸을
조금씩 펴서 신문지 위로 내려놓는다
뿌리들 지상으로의 환생이 가까이 있는데
희미한 불빛에도 눈부셔 바스라질 것 같은
어둠에만 등 기대고 발굴을 거절당한 유적 앞에
아무 생각없이 나 지상으로 또 지하로 오르내린다
멍텅구리배
통통배 밧줄에 매달려서 포구로부터 사정없이 끌려와저렇게 먼 바다 유배지에서 홀로 서러운 노래 부르고 있는가어둠 속에서 한 열흘내가 너에게 멱살잡이 된 채밀물에 쫒겼다가 썰물에 붙들려오며숨막히게 출렁거리다 보면 파도처럼 몸으로 부딪던 울음 쏟아 뱃속의 허기까지 다 끄집어내면일렁이는 적막에 몸 던진 달빛만이 퉁퉁 불었다 삶이 저렇게 포구에 목매는 일이라면그대 밥벌이에 어깨 짓무른 가장이라서때로는 어디선가 멱살잡이 당하는가 멱살 잡힌 채로 파도의 두들김에팔 다리 내맡기고 몹시 흔들리기도 하는가
네펜데스
여름 창가에 네펜데스 한 포기
길게 주둥이 벌리고 은은한
단내 솔솔 풍기고 있는데
근처 지나던 파리란 놈
군침 흘리며 흘깃거리다가
그 길로 황천길 되고 말았다
처음 달콤하던 향기가 와 닿던
그 순간이 벼랑 끝인 것을
푸른 눈웃음 슬며시 던지고
유혹의 경계를 넘어오기만 하면
까마득한 천길 나락으로 치닫는
매순간 단맛의 아찔한 기억들
달작지근 하다가 멀어져간 너
깎아지른 허방을 짚으면서 쓴맛을 배우는
여름 창가 단내 풍기는 네펜데스
배신의 쓴맛은 늘 달콤함 그 뒤에 있었다
우화
자, 이제 네 껍질을 찢어
나를 꺼내 놓을 시간이야
질긴 네 허물에 쌓여 날개의 구김도
인내해야 했던 감옥살이
널 떠나 자유를 얻겠다는 몸부림
그땐 그 이유가 절박하다고 믿었지
네 허물을 찢고 젖은 가슴 햇살에 꺼내며
너를 매개로 삼아 참 미안하기도 했어
바람처럼 가벼울 수 있는 유일한 내 정처였다고
봄빛 속을 만끽하며 더 높이 날았지
내 너를 벗어 두고 바스러지도록 방치한 죄
봄꽃 속을 눈부시게 날아 본 후 이내 알았지
머무르고 싶은 봄날은 아주 잠깐이었거든
또 너를 잉태할 수 밖에 없는 몸
날개 꺾이고 목숨 다 바쳐 또 산란하는
어떤 도구
톡,톡,톡,
대지 위를 빗방울이 노크하듯 세상에다 내는 길
햇살 따사로운 보도블럭 따라 흰 지팡이 소녀 길을 걷는다
정오의 그림자가 소녀의 발 밑으로 불려와 느붓이 업드리고
숙련된 지팡이 하나로 진두지휘 길을 만들어낸다
매순간 두 눈 훤히 뜨고도 곤두박질 치는 세상
소녀는 발자국 색깔까지 보는 듯 만지는 듯 생글거린다
앞질러간 허덕임도 뒤에서 달려오는 조바심도
가만가만 발자국의 거친 호흡을 달래주는 표정
보이지 않는 시간에 얽매어 애타는 마음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헤매는 투덜거림도
만지고 타이르는 그녀만이 시공한 길
한 때는 숨기고 싶은 이름표 하얀 지팡이
무사의 비장한 명검으로 주군을 떠받드는
먼 길 든든한 길동무 한치 앞을 먼저 알아
이정표마다 몸으로 꼭꼭 눌러 곡진하게 이끈다
톡,톡,톡,
달팽이같이 몸으로 밀어 만든 그런 촉촉한 길도 있다
소낙비
한 열흘 훨 넘어섰지 싶어뙤약볕 아래서 헥헥 거린지가참 더럽게도 야박하단 말이야뭉게뭉게 젖줄 품은 여편네 치고는어린 것들 입이 말라 꼬부라질 성 싶으면맨발 벗어들고 후다닥 겁나게 들이닥치는구만 왠간히도 급하긴 급했던 모양이라불어 터진 젖통을랑 대충 쓱쓱 문질러출출히 젖줄 뿜다가 종래 쏟아붓는구만성질 급한 여편네 하는 짓이라고는 아예 젖꼭지 채로 냅다 집어 던지는지 수면 위로 수 없는 물꼭지 튀어 오르는 것 좀 보게엉덩짝은 야튼 가벼워서 냉큼 일어나는데 얼김에 얻어먹은 그 한 모금이 감질나오래 애말리지 말고 요렇게 다녀간다면 감지덕지라치마꼬리 붙들고 늘어지지도 못 하는 염치 느닷없이 얻어맞고도 외려 속 후련한 소낙비 같이 용천할 사랑 언제고 다녀가기는 할까나, 사노라면
박언숙 약력
1960년 경남 합천 출생
2005년 시전문지 <애지> 등단
대구문인협회, 대구시인협회 회원. 포에지92`,13`시 동인
첫댓글 축하합니다
바람처럼 가벼울 수 있는 내 유일한 정처였다고...속 시원한 소낙비 같이 용천 할 사랑
언제고 다녀가기는 할까나, 사노라면
허방을 짚으면서 쓴 맛을 배우며 그렇게...사노라면!!
상처도 외로움도 더 할 수 없이 의지력 있는 성숙의 벗이 되기도 하는, 그것이 인생!
잘 감상하고 갑니다^^*
만인의 누이
시인님의 시에서도 사람 냄새가
나고 따뜻하고 푸근함을 느낍니다.
축하 드립니다.
박시인 축하합니다.
밥벌이가 먹살잡힌채로 파도의 두들김에 흔들리고.......
따뜻하고 기대고싶은 시인~~^^
언니~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13시, 함께 가는 따뜻함을 늘 느낍니다.
무심을 탓하며 죄송
세상에 꼭 있어야할 사람
세상의 바람 소리에 꼭 귀 기울여야할 시!
시의 정처를 날아보고
봄날의 하늘을 날아보고
다시! 시
잉태
죄송,너무 늦게 본...
감사!
잘 읽었습니다^^
멍텅구리배에게 자유를 주고 싶네요!ㅎㅎ
자유,
멍텅구리에게 가 닿았겠죠? 선생님^^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