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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제 : 해병대,그들만의 세계
글쓴이 : 신동아 잡지
1987년 사령부 재창설 하지만 해병대에도 시련은 있었다. 창설 24년6개월 만인 1973년 10월 ‘경제적 군의 관리 운영’이란 명목으로 해병대사령부 및 교육부대, 행정·군수지원 부대가 해군에 통폐합돼 각종 법률 등에 의해 임무와 권한이 상실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전투에선 한껏 명성을 떨쳤지만, ‘정치’엔 능하지 못했던 셈이다.
그러나 해군에 14년간 통합 운용되던 해병대는 전력관리상 문제점이 노출돼 상륙작전에 관한 지휘구조의 개선이 필요해짐에 따라 해병대 부대를 통합 지휘할 기구인 해병대사령부를 1987년 11월 재창설한다.
또 1990년 8월 국군조직법에 해병대 관련사항을 재입법화함으로써 부대령 부대와 그 위상이 다른 직제령 부대로 해병대사령부가 해병대 부대를 지휘할 수 있는 법적 토대가 마련됐다.
그후 국방부의 재경(在京)부대 교외이전 계획에 따라 1994년 4월 해병대사령부를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일대로 이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도 서울의 관문인 서부전선과 백령도·연평도 등 전략도서 방어를 주임무로 하면서 유사시 적의 옆구리와 후방을 강타하는 상륙작전을 전개해야 하는 해병대는 사령부 아래 6개 부대를 거느리고 있다. 2개 사단(포항 제1사단, 김포 제2사단)과 1개 여단(백령도 제6여단), 연평도 방어를 맡은 연평부대, 교육훈련단, 상륙군지원단이 그것이다.
해병대의 주요 전력 중 기동장비는 K-1 등 2종의 전차 100여 대, KAAV (Korean Assult Amphibious Vehicle) 등 3종의 상륙돌격장갑차 160여 대, K-200 계열의 장갑차 80여 대를 비롯해 모두 59종 3400여 대다. 상륙돌격장갑차를 제외하면 육군 지상장비와 거의 같다. 화력 면에선 K-9 등 4종의 자주포 200여 문과 4.2인치 등 3종의 박격포 700여 문을 갖췄다. 개인화기도 육군과 비슷한데, 다만 분대 및 소대급 기본화력이 육군보다 좀더 강화된 특징을 지닌다.
명인·기인 열전
역사가 오랜 만큼, 해병대를 거쳐간 인물도 많다. 우선 정계에선 현역 의원으로 한나라당 김기춘·공성진·박혁규·정병국 의원과 열린우리당 신학용 의원이 있다. 전직 의원인 홍사덕·정창화씨도 해병대 출신. 관계 인사로 청와대 경호실장을 지낸 박상범 전 국가보훈처장과 이희일 전 동자부 장관, 작고한 홍성철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있다.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법조계에도 30여 명의 법조인으로 이뤄진 ‘해병대 법조회’가 있다.
재계에선 김석원 쌍용양회 명예회장, 김무일 현대INI스틸 대표이사 겸 부회장, 김동렬 아세아시멘트 사장이 해병대 출신이다.
언론계에선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낸 안병훈 LG상남언론재단 이사장, 연합통신 사장을 지낸 현소환 ‘뉴스앤뉴스’ 대표, SBS 사장을 지낸 윤혁기씨 등을 꼽을 수 있다. 또 문학계 인사로 소설가 황석영씨(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으로 있는 소설가 현기영씨, 소설가이자 인하대 교수(국문학)인 김용성씨가 있다.
연예인으로는 탤런트 임채무·김상중, 가수 김흥국·남진, 개그맨 임혁필씨가 해병대 출신이다. 배우 장동건을 해병으로 내세운 영화 ‘해안선’을 연출한 김기덕 감독도 해병 부사관 출신이다.
창설기와 6·25전쟁기, 베트남전쟁기의 인물 중에도 독특한 개성과 해병정신을 보인 이들이 수두룩하다. 해병대 기합의 대명사로 불린 강복구 전 해병대전우회 총재, 일본 관동군 총검술 교관 출신의 강용 대령, ‘삼국지’의 영웅을 동경해 자신이 사살한 공비의 목을 잘라 소금에 절여 상관에게 내보인 진두태 중위 같은 창설기의 ‘괴짜’들을 비롯해 군기 확립을 위해 가짜 총살형을 집행한 중대장, 전투에서 많은 부하를 잃은 죄책감에 자결한 소대장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20여 년의 해병대 정훈장교 복무경험을 바탕으로 ‘해병대의 명인·기인전’(전2권) 등 해병대 관련 저서만 10여 권을 펴낸 정채호(79) 예비역 중령은 “해병대 56년 역사는 열악한 조건에서도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해병대를 일궈낸 명인(名人)들과 개성이 뚜렷하고 갖은 기행(奇行)을 보여준 기인(奇人)들은 물론, 이름 없이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킨 모든 해병이 함께 이룩한 것”이라 말한다.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1950년대 명문여대생 등 70여 명의 부녀자와 엽색행각을 벌인 ‘희대의 카사노바’로, 재판과정에서 ‘법은 정숙하고 순결한 여성의 정조만 보호한다’는 유명한 판결을 이끌어내며 자신의 이름 석자를 세간에 각인시켰던 박인수씨도 해병대 대위 출신이다. 하지만 그는 파면돼 결국 불명예 제대함으로써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Once a Marine, Always a Marine)’의 대열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