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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人間革命 29卷 第1章 常樂 (16~21)
<상락 16>
법화경을 버리라고 협박하는 헤이노 사에몬노조 요리쓰나에게 맞서서 아쓰하라의 농민신도는 소리 높여 창제했다. 그것은 불석신명(不惜身命)으로 법화경을 지키겠다는 결의였다.
격분한 요리쓰나는 열세살인 둘째 아들 아누마 호간 스케무네에게 히키메(蟇目) 화살로 농민들을 쏘도록 했다.
이 화살은 오동나무로 화살촉을 만들어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데, 이 화살을 맞으면 몸에 깃든 악마가 달아난다고 믿었다. 소리를 내며 날아가기 때문에 말 탄 무사가 개를 쫓아가며 활을 쏘는 무예 등에 사용했다.
그 화살이 다가오는 공포와 맞았을 때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농민신도는 가혹한 고문을 끝까지 견뎌냈다.
결국 요리쓰나는 10월 15일, 신도의 중심적인 존재인 진시로, 야고로, 야로쿠로를 참수한다. 그러나 농민들은 한 사람도 신앙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의연히 창제했다. 농민들의 굴하지 않는 신앙에 요리쓰나는 당황했을 것이다.
결국 세 사람만 처형하고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남은 17명은 추방당한다.
한편 닛슈는 아쓰하라향에서 한때 시모우사(지바현 북부)로 옮기지만, 그 뒤에도 닛코 상인과 함께 홍교하러 힘껏 뛰어다닌다.
니치렌대성인의 문하는 닛쇼 등의 승려, 도키 조닌이나 시조 깅고 등의 무사 그리고 무사의 아내를 비롯해 그 가족으로 넓혀졌다.
그러나 일염부제 광선유포를 추진해 만인성불의 가르침을 현실에서 실현하려면 농민 등의 민중이 법화경의 가르침대로 모든 난을 이겨내는 불퇴의 신심을 확립해야 한다.
그들은 대부분 읽지도 쓰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 민중이 순수한 신심으로 난폭한 권력의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사신홍법의 실천을 관철했다. 즉 법화경의 간심(肝心)인 남묘호렌게쿄를 수지하고 대성인과 함께 광선유포를 위해 싸우는 위대한 민중이 출현한 것이다.
대성인은 “니치렌(日蓮)과 동의란다면 지용보살이 아니겠느뇨.”(어서 1360쪽) 하고 말씀하셨다.
민중을 단순히 구제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사람들을 구제하는 주체가 된다. 이것이 바로 참된 민중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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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쓰하라의 농민신도가 보여준 삶의 자세와 행동은 궁극적인 신심을 말해준다.
신심은 학식이나 사회적 지위, 재력 등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럼 무엇으로 정해지는가?
그것은 법난이라는 큰 시련과 맞닥뜨렸을 때 결코 좌절하지 않고 엄연히 맞서는 용기와 굳게 정한 마음이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싸워야 할 때’라고 받아들이고 스승의 말씀을 떠올려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자신이 정한 길을 관철하는 신념이다.
또 사리사욕과 보신에 집착하지 않고 법을 위해 이 한 몸을 내던지겠다는 각오다. 그리고 한 점 의심도 망설임도 없는 불법(佛法)의 법리에 대한 강한 확신이다.
반대로 퇴전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을 니치렌대성인은 다음과 같이 갈파하셨다.
“겁쟁이이고 법리를 기억하지 못하며, 욕심이 많고 의심이 많은 자들은 옻칠한데다가 물을 끼얹고 허공을 자르는 것과 같은 것이외다."(어서 1191쪽)
여기서 말씀하신 “법리를 기억하지 못하며”란, 대성인이 “어리석은 자의 버릇이란 약속한 일을 필요한 때에는 잊어버리느니라”(어서 234쪽) 하고 지적하셨듯 신념을 끝까지 관철하지 못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잊고 마음을 바꾸는 나약함과 어리석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미사와초>에는 제육천의 마왕이 권속에게 “그의 제자와 단나와 그리고 국토의 사람들 마음에 바꾸어 들어가서 혹은 간(諫)하고 혹은 위협해 보아라”(어서 1488쪽) 하고 명령했다고 씌어 있다.
아쓰하라법난 때도 승려인 다이신보와 산미보, 재가인 오타 지카마사와 나가사키 지로 효에노조 도키쓰나 등 대성인 문하가 퇴전해 교치 일파에 가담해 박해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정말이지 이 법리대로라고 할 수 있다.
본디 있을 수 없는 사태나 예상 밖의 상황을 만들어 신심을 교란시킨다. 이것이 제육천의 마왕이 노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광선유포의 싸움에서 방심하면 안 된다. 도다 조세이(戶田城聖)는 이렇게 읊었다.
“더욱더 / 험준한 산에 / 접어들었노라 / 광포의 여행 / 각오하고 나아가라”
<상락 18>
박해를 받은 아쓰하라 농민신도 그중에서도 진시로, 야고로, 야로쿠로 삼형제의 순교는 행복을 확립한다는 신앙의 목적과 정반대인 듯 보일지도 모른다.
생명은 비할 데 없이 존엄하고 반드시 지켜야 할 최고의 보배다.
그럼 왜 니치렌대성인은 “이왕이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법화경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라”(어서 1561쪽) 하고 말씀하셨을까?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죽음을 맞는다. 대성인 재세 때는 기근, 역병, 전쟁 등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또 몽고내습으로 목숨을 잃을 각오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목숨은 최고의 보배지만 이슬처럼 덧없다. 그렇다면 그 목숨을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해진다. 그러므로 대성인은 존귀한 목숨을 ‘세상의 얕은 일’에 버리지 말고 만인성불의 법, 다시 말해 전 인류의 행복을 실현하는 영원하고도 불변한 대법인 법화경을 지키고 유포하는 데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하면 “목숨을 법화경에 바쳐서 부처가 되시었다”(어서 1299쪽)는 말씀처럼 성불이라는 무너지지 않는 절대적 행복경애를 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삼세 영원하다. 정법을 위해 금세에 대난을 만나 순교하더라도 미래에 성불의 길이 열린다.
또 <사도어서>에서는 대난을 만나면 과거원원겁(過去遠遠劫)부터 쌓은 악업을 금세에 모두 소멸할 수 있다고도 말씀하셨다.
‘불석신명’ ‘사신홍법(死身弘法)’을 다짐하는 경지는 결코 비장한 것이 아니다. 태연자약하고 유유한 마음으로 기뻐하는 경지다.
대성인은 다쓰노구치에서 참수 당하려고 할 때, 눈물을 흘리는 시조 깅고에게 “이처럼 기쁜 일이니 웃으시오”(어서 914쪽) 하고 말씀하셨다.
더욱이 추위가 매섭게 몰아치는 유배지 사도에서 “미래의 성불을 생각하여 기뻐함에도 눈물을 막을 길이 없느니라.”(어서 1361쪽) 하고 쓰셨다.
광선유포를 위해 생애를 바치겠다고 용감하게 각오할 때, 우리 생명은 어본불인 니치렌대성인에게 직결해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큰 힘이 솟아나고 부처의 환희 찬 생명이 맥동한다.
<상락 19>
종문(宗門)이 군부정부의 탄압이 두려워 니치렌대성인의 정신을 위배하고 신찰(神札, 신사에서 내르는 부적)을 받들던 때에 초대 회장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는 정법정의를 지키다 옥사했다.
이 사신홍법과 순교의 역사가 바로 창가학회 정신의 원점이다.
스승 마키구치와 함께 투옥되어 훗날 제2대 회장이 된 제자 도다 조세이는 옥중에서 ‘자신이 지용보살’이라고 가슴속 깊이 오달하고 살아서 옥문을 나와 광선유포를 위해 평생을 바쳤다.
‘무엇을 위해 죽느냐’는 뒤집어 보면 ‘무엇을 위해 사느냐’이다.
둘은 표리일체다. 정법정의를 끝까지 지키다 순교한 스승과 그 유지를 이어 평생을 광선유포를 위해 꿋꿋이 싸운 제자. 이 두 사람은 ‘사신홍법’의 위대한 정신과 실천을 관철했다.
신이치는 지금 창가학회라는 대형 제트기가 안정비행을 하고 있지만, 광선유포의 여로에는 아쓰하라의 농민신도나 마키구치 초대 회장의 시대처럼 힘겨운 난기류가 기다리고 있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이치는 회장으로서 ‘순교자가 발생하는 상황을 결코 만들지 않겠다. 만약 순난을 피할 수 없다면 내가 이 한 몸으로 모두 받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필사적으로 조종관을 붙잡았다.
하지만 광선유포를 추진하려면 각자가 사신홍법을 각오해야 한다. 그렇게 굳게 일념을 세워야 일생성불도 숙명전환도 할 수 있다.
사신홍법을 각오한다는 것은 ‘인생의 근본 목적을 광포’라고 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명문명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불법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생활에서, 또 삶의 자세로 어본존의 공력과 불법의 진실을 증명하는 일이다.
광선유포를 위해 ‘건강해지겠습니다. 건강하게 해주십시오’ ‘경제혁명하겠습니다. 생활고를 이겨내게 해주십시오’ ‘화목한 가정을 꾸리겠습니다. 화목한 가정을 꾸리게 해주십시오’ 하고 깊이 기원하며 학회활동에 힘써야 한다.
광포를 서원(誓願)하는 기원이 부처와 지용보살의 기원이기에 제천은 물론 우주 일체를 움직인다.
<상락 20>
신심에 힘쓰는 까닭은 ‘중생소유락(衆生所遊樂)’ 즉 인생을 즐기고 유유한 행복경애를 구축하기 위해서다.
사람은 자칫 부(富)와 명성 등을 얻으면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마음 밖에서 행복을 찾으려다 욕망에 휘둘린다면 진정한 생명의 충족도 만족도 얻을 수 없다.
바라는 것을 손에 넣어도 그 기쁨은 한 순간일 뿐, 금방 허무해진다. 더구나 인간의 욕망은 더욱더 비대해져 새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불만이 점점 커지고 불안감에 시달리게 된다.
여기에 세간적인 욕망의 충족을 바라는 ‘욕락(欲樂)’의 한계가 있다.
그것에 반해, 부처의 깨달음을 향수하는 최고의 절대적 행복이 ‘법락(法樂)’이다.
이것은 밖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 속에서 치밀고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니치렌대성인은 “일체중생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이외의 유락은 없느니라”(어서 1143쪽) 하고 명확히 말씀하셨다.
남묘호렌게쿄를 불러야 ‘법락’ 즉 진정한 유락을 얻을 수 있다. 더군다나 대성인이 “나도 행하고 남도 교화(敎化)하시라” “힘이 있는 한 일문일구라도 설할지니라”(어서 1361쪽) 하고 말씀하셨듯, 자행화타(自行化他)를 실천해야만 진정한 유락을 맛볼 수 있다.
광선유포를 위해 싸우는 사람이 지용보살이다.
지용보살은 부처의 사덕(四德)인 ‘상락아정(常樂我淨)’을 갖추었다고 대성인은 말씀하셨다.
‘상’은 부처와 중생에게 갖춰진 부처의 생명이 삼세 영원히 상주한다는 뜻이다. ‘낙’은 괴로움이 없는 편안한 경지다. ‘아’는 부처의 생명이 바로 진실한 ‘아’이고 무엇으로도 파괴되지 않는 주체 적인 강인함을 가진다는 뜻이다. ‘정’은 청정함을 뜻하는데 아무리 세상이 혼탁해도 콸콸 솟아나는 샘처럼 깨끗한 생명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 ‘상락아정’의 경애를 확립해야만 진정한 ‘중생소유락’이 있고 그것은 사신홍법의 결의와 실천으로 생긴다.
<상락 21>
신이치는 군부정부의 탄압과 싸우다 옥사하신 초대 회장 마키구치 선생님의 ‘사신홍법의 정신’을 도다 선생님이 그리고 동지가 이어받았기에 학회가 발전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 광선유포가 크게 확대되었다고 확신했다.
신이치는 “수원(水源)에 물이 있으면 흐름이 마르지 아니하며”(어서 900쪽)라는 어서를 가슴 깊이 되새겼다.
10월 11일 저녁, 신이치는 오사카 도요나카시에 있는 간사이도다기념강당에서 연 아쓰하라법난 700년을 기념하는 오사카 조토권총회에 참석했다.
이날 신이치는 아쓰하라법난을 설명하며 현대에 맞는 순교정신을 언급했다.
“광포의 전진도 대하의 시대로 들어선 오늘날에는 희생자가 한 사람도 없어야 하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복운과 장수의 인생을 살아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진심 어린 기원이고 바람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신심을 강하게 확신하며 꿋꿋이 강성하게 창제한다, 사람들에게 불법을 알리고 격려하며 광선유포를 위해 꿋꿋이 살아서 행복의 실증을 보인다. 이것이 바로 순교정신에 통한다는 사실을 알기 바랍니다.”
순교는 본디 죽음을 예찬하는 영웅주의가 아니다. ‘광포가 곧 내 인생!’이라고 정하고 날마다 현실사회에서 격투하면서 끈기 있게 신심에 힘써 행복왕자(王者)가 되는 길이 현대의 불법자(佛法者)가 걸어야 할 길이다.
신이치는 오사카와 교토에서 지도 일정을 마치고 시즈오카로 이동해 아쓰하라 법난 700년 기념 법요에 참석했다. 그리고 14일 저녁에는 도노하라운동장에서 연 ‘아쓰하라법난 기념의 밤’에 참석해 창작무용 ‘아쓰하라 삼열사’를 관람했다.
굽히지 않고 신앙을 관철한 삼열사의 자세를 이어 가고자 하는 창가(創價)동지의 기상이 용솟음치는 박진감 넘치는 무대였다. 다들 생업에도 힘쓰고 광선유포의 활동에 도전하면서 열심히 연습을 거듭해 이날을 맞이했을 것이다.
신이치는 ‘삼열사의 위대한 정신은 우리 학회에 있다. 학회가 있는 한, 정법정의는 멸하지 않는다!’고 마음속으로 외치며 갈채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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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잘보았습니다
잘 읽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