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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장:1~21
본문은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 기독교의 본질중의 본질인 거듭남의 핵심진리가 밝혀지는 중요한 장이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묵상하고 또 거론되는 것에들에 순위를 매긴다면 역시 최상위에 랭크 되는 것이 이 '거듭남'이 아닐까 한다.
먼저 본문의 예수님의 이 거듭남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경위를 살펴보면, 어느날 밤에 니고데모란 관원이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다.
예수님이 니고데모를 칭할때 '너희'란 복수를 쓰셔서 니고데모가 하인이나 제자를 데리고 온것이라는말도 있지만 그것은 '너희 바리새인'이란 뜻으로 쓰신 말씀이지, 혼자 야밤에 은밀하게 왔을 것 같다.
니고데모가 낮이 아니라 밤에 찾아온 것에 대해 그가 비겁하고 소극적인 성품이라는 글도 보았지만, 그보다는 그가 신중한 성품이라 그랬으리라 본다.
니고데모가 정말 사람 눈치나 보는 소인배였다면 예수님을 잡으려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관원에게 예수님을 변호하며 항거하지 못했을 것이며(요7:45~52)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시 몰약과 침향 백근을 준비해 앞서 나서서 장례를 치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요16:39)
그는 그런 자신의 행동들이 자칫 지금껏 쌓아 온 지위나 명성을 잃어버릴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예수님 을 보호 했고 또 장례에도 앞장 섰다.
그래서 이때 그는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생기기 전 인데다 얼마전에 성전 정화사건으로 바리새인들의 경계의 대상이 된 예수님을 대낮에 방문한다는 것이 상당히 무모한 일이라 판단해 밤을 택해 찾아 왔을 것이다.
잠깐 니고데모에 대해 설명하면, 니고데모 이름의 뜻은 영어식으로는 우리가 잘아는 나이키인인 승리를 뜻하는 헬라어 '니케'와, 백성을 뜻하는 '데모스'의 합성어로 '백성의 승리자'란 뜻이다.
그는 바리새인이었으며 산헤드린 유대 관원이었고 랍비였다.
바리새파는 그 당시의 사두개파, 에서네파, 헤롯당 등 몇가지 당파중에 그나마 가장 전통있고 교세있는 당파였다.
그들 생활이 너무 율법에 치우쳐 외식적이긴 했지만그래도 천사도 부활도 인정치 않는 그시대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던 사두개파나 금욕주의와 세상을 떠나 은둔생활을 했던 에세네파, 또는 로마정권에 붙어 아부했던 정치당파인 헤롯당파보다는 그래도 그중 바리새파가 가장 성경적인 신앙관이 있었다.
그러니 니고데모가 그 바리새파중, 70인의 장로로 구성된 유대최고의 법정이며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민중의 선망과 존경을 받는 인물로 현대로 치면 명문대총장이나 국회의원쯤 되는 신분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자신의 위치를 내려놓고 아무런 사회적 지위도 명망도 없는 예수님을 밤에 몰래 찾아와 진리의 말씀을 구한 것이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표적을 아무라도 할수 없음이니이다."
이는 신분은 그렇다치고 연로한 자가 새파랗게 젊은자에게 하기엔 민망할 정도의 저자세의 말이다.
사실 유대에서는 랍비는 정규교육을 받은 40세이상의 기혼자만이 될수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런 정규교육도 받지않았고 나이도 30세 청년의 미혼으로 랍비의 자격은 하나도 갖추지 못한 자였다.
반면, 니고데모는 그런 조건을 다 갖춘 정식랍비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보다 한참 연장자인 니고데모에게 별 인사말도 없이 다짜고짜 난데없는 말을 한마디를 던진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이렇듯 동문서답 같고 수수께끼 같다. 그러나 이는 니고데모의 심령을 꿰뚫은 말씀이었다.
니고데모는 부족한것 없이 행복의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 자였다. 유대인에게 부와 명성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란 뜻이었고, 또 그는 율법을 가르치는 자로서 자신도 철저히 지켰다.
그러나 그는 왠지 이런 것들로 하나님나라에 들어갈수 있으리란 확신이 없었다.
뭔가 느낌으로 부족함을 느꼈고 예수님이 그 부족한게 뭔가를... 즉, 하나님나라에 들어갈수 있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알고 있다 생각해 찾아 온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고민을 알고 그 심령이 너무나 듣고자 구원의 조건과 법칙에 대한 말씀을 하신것이다.
그러나 역시 관념에 사로잡힌 그는 알아듣지 못한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수 있겠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수 있겠삽나이까"
이에 예수님은 책 몇권으로 써도 모자랄 광대한 의미가 담겨 있으면서 너무나 보석같은 진리의 정수를 단 몇마디에 다 실어 말씀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단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에 들어 갈수 없다.' 여기서 간혹 물은 물세례를 말하고 성령은성령세례라고 하시는 분도 있는데 하지만 물 세례는 그리스도를 믿겠다는 의식일뿐, 그 자체로 거듭남의 효력이 발생하진 않는다.
세례를 받고 아무런 감화나 변화가 없는 사람이 교회안엔 태반이다.
그래서 여기서의 물은 말씀을 뜻한다고 보는 게 맞다.
"이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5:26)
"그의 음성은 맑은(많은)물소리와 같으며"(계1:15,14:219:6 겔:43:2)
"내가 주는 물을 먹는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하지만 말씀을 읽거나 듣는다고 거듭나는 것은 아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읽지만 거듭남은 커녕 자유주의 신학자들처럼 예수님의 신성이나 기적조차 믿지 않는 사람도 많다.
말씀을 읽을 때 성령이 같이 역사해야 예수님이 진정으로 믿어지며 그로써 거듭남이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성령으로 아니히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수 없...'다고 한것이다.(고전12:3)
또한 말씀없이 성령만으로도 거듭날수 없다.
그래서 성령없이 말씀만 있거나 또는 성령체험만 강조하고 말씀이 없는 교회나 성도는 잘못된 것이다.
또한 이 말씀과 성령이 아니면 절대 다른 것으로 거듭남이 일어날수 없다.
거듭남은 헬라어로 '겐네데 아노덴'이다. 이는 '다시 난다'란 뜻과 '하늘로 부터 난다'란 뜻이다.
그러니까 거듭남은 사람의 자녀에서 하나님아버지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다.
'육으로 난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것은 영이니..'
즉, 사람의 육체에서 난것은 육이며 하나님에 의해 다시 태어난 게 영이란 말씀으로, 육은 사람, 땅의 것이요. 영은 하나님의 것이란 뜻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요6:63)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며 이세상 풍속을 좆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에 따라 지내며 육체의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훌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2:1~5)
그리고 다음 8절인 '바람이 임의로 불매...성령으로 난 사람도 이러하'다 하신 말씀은 성령을 의미하는 '프뉴마'도 호흡, 바람이기 때문에 바람에 빗대 말씀 하신 것이다.
그리고 당시, 예수님은 유월절을 지키느라 예루살렘에 계셨는데 예루살렘은 산지에 있어서 아마 이때에 밖에 바람이 불었을 것이고, 예수님은 그 바람소리를 들으며 성령을 바람에 비유하셨을 수도 있다.
바람은 어디에서 부터 불어오는지 그 시작을 알수 없듯, 성령님 또한 그렇고 눈에 보이진 않으나 느낄수 있으며 또 인간의 힘으로 주관 할수 없듯 임의로 부는 이러한 것이 성령의 특성으로 바람에 비유를 하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니고데모는 놀라 어찌 이런일이 있겠냐며 묻는다.
그는 생전 처음들어본 말이지만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무시할수 없는 신비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다음의 말씀을 잇는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이 말씀을 쉽게 풀면,
"이스라엘의 선생된 자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치고 이끄는 너희가 이런것을 모르면 쓰겠느냐. 나는 성부, 성령하나님과 하나인 하늘을 아는자로서 하늘의 일을 말하며 또한 표적으로 증거하지만 너희는 믿지 많는다. 내가 보이는 땅의 일로 기적을 베풀어도 믿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성령의 일을 말하면 믿겠느냐" 쯤 된다.
또한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이,
"하늘에서 내려온자 곧 인자외에는 하늘에 올라간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올라간'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아나베베켄'으로 현재 완료형으로 미래를 말하지 않고 과거를 말한다.
이 말씀이 후일 그리스도의 승천을 말하는 것이라면 에녹이나 엘리야도 승천했기에 그리스도외에 하늘로 올라간자가 없다는 말이 맞지 않는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 외엔 하늘에 있던자가 없느니라'로 번역되어야 맞다.
그러니까 하늘에 계셨으므로 성령의 일을 비롯, 하늘의 모든 비밀을 알고 계시며 지금은 성육신하여 내려온 자는 예수님 자신 뿐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다음 14절의,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대부분이 알고 있는 데로 민수기21:49에 나오는 불뱀에 물려 죽을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가 든 장대의 놋뱀을 바라봄으로 살아난 사건을 말씀하신것이다.
예수님은 구약시대의 거듭남의 확실한 예표였던 이 놋뱀사건을 빗대어 십자가에 매달린 자신을 바라봄으로 다시 산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놋뱀일까? 뱀은 사단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그리고 놋뱀은 죽은 뱀, 저주의 뱀이란 뜻이다. 예수님이 죽은 뱀, 저주의 뱀일리 없다.
그래서 놋뱀은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백성을 문 불뱀을 이렇게 죽여 매달겠다는 십자가 사건을 예표한 것이다.
또한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이다. 실체가 아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놋뱀을 보고 살았던 자는 다시 나이가 들거나 병이들거나 해서 다 죽었다.
그러나 신약에선 예수님 자신이 그 십자가에 매달리심으로 실제로 저주의 뱀을 죽였고 사망의 권세를 깨었다.
그래서 우린 저주의 놋뱀이 아닌 생명의 주관자이신 실체인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
다음 요한복음 3:16절은 기독교인 필수 암송구절인 1위인 말씀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심이라"
이말씀은 전 15절에 이어지는 말씀으로 보통 이 말씀만 떼어놓고 보면 요한의 설명같지만 이는 예수님의 니고데모에게 한 계속해서 이어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거듭남과 구원 기독교 핵심 교리인 구원론을 이날 밤 니고데모에게 다 풀어 강론하신것이다.
즉, 우린 말씀과 성령으로서 사람의 자녀에서 하나님자녀로 다시 태어 나야 하며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신 예수님을 바라 봄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며 이는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또한 믿는자는 육체의 자녀로서 받을 멸망의 심판을 피하고 믿지 않는자는 여전히 육체의 자녀로 있기에 심판을 받는 것이다.
여기서 심판은 헬라어로 '크리노'인데 이는 분리, 분별이란 뜻도 있다. 즉, 여전히 육의 자녀로서 하나님자녀가 되지 못해 하나님께 분리되어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말하는것처럼 하나님이 자신을 믿지 않아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길 거부해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마지막19~21절엔 예수님은 빛과 어두움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오지 아니하니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좆는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았다.
이는 영적으로 니고데모가 밤에 속한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결국 빛이신 예수님을 찾아 왔으며,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온자가 되었다.
성경에 니고데모에 대한 이야기는 본문 외에 얼마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전승에 의하면 니고데모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다른 제자들처럼 순교로 생을 마쳤다한다.
진정 그는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와 백성의 승리자, 예수님 말씀처럼 세상의 승리자가 된것이다.
버릴것 멊는자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보다 버릴것 많은 자가 그리스도를 따르기가 더 어렵고 귀한 법이다.
이는 그가 진정 거듭났기에 가능한 일이고, 그가 현세에 누리는 것들이 내세에 누릴 영광에 비하면 정말 하등 가치없는 죽은 것 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다면 자신이 거듭난 사람인지 아닌지 알수 있을까?
인터넷에서 어느 누가 쓴 글을 보니 어느 누가 대뜸 '당신은 거듭났느냐? 거듭났다면 거듭난 날짜를 아느냐?' 하고 물어 난감 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거듭남은 어느날 어떤 신비한 성령체험을 해서 겉 껍데기를 훌렁벗고 새사람으로 태어 나는 것이 거듭난 것은 아니다.
거듭남에 있어 그런 성령체험이 동반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런 신비한 성령체험을 했어도 거듭나지 않을 수 있고 조용히 별 체험 없이도 거듭날수 있다.
거듭남은 결과적으로 그 사람안의 내용물이 바뀌어야 하며 삶의 목적과 방향이 바뀌는 것이다.
쉽게 예를들면, 가령 술집이나 당구장 같은 유흥 오락시설이었던 자리가 어느 날 주인이 바뀌어 교회로 바뀌는 것과 같다.
업종이 달라지면 건물은 똑같지만 인테리어도 달라지고 가게안의 물품들 손님도 달라진다.
그러니까 화려하게 성령체험을 했지만 자기안의 내용물도 그대로고 사는 목적이 여전히 세상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이고 성령대신 악령이 주인된다면 거듭난 것이 아니다.
이는 단순한 성령체험일뿐 성령이 내주하시는 것이 아니다.
성령이 내주하시면 내면이 바뀌게끔 되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지고, 즐거움도 달라지고 좋았던게 싫어지고, 표정도 말투도 다 바뀌게 되있다.
간혹 목사중에서도 비속어를 쓰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 사람이 있다. 난 그런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고 본다. 거듭난 사람은 말부터 달라진다.
거듭난 사람은 '이년, 저놈, 개새끼'이런 욕설을 절대 할 수 없고 그런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수도 없다. 하나님나라는 입술과 마음이 깨끗한자가 들어가는 곳이다.
그리고 그의 마음엔 오직 그리스도만이 왕으로 존재해아 하며 그외 아무리 그럴 듯한 명분이 있다 해도 다른 것이 그리스도 위에 있다면 그것은 거듭난 자가 아닌 것이다.
우리모두 그리스도안에서 거듭 난 자로서 니고데모처럼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되길 소망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것은 지나갔으되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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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산ㅡ나현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