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여름 집회
예수는 누구인가?
3. 사단을 정복함으로서 인격의 영광을 회복하신 분
[히브리스 1장 6절]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찌어다”
첫 번째 시간에 구속에 관해서 말씀드렸다. 인격을 회복하는 문제로, 인간의 문제는 인격을 회복하는 문제다. 두 번째는 근본을 아는 문제다. 예수님은 누구인가? 우리 인격을 회복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고, 우리 근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있는 이야기다. 독자적으로 있는 문제들이 아니고, 인격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서 있는 것이다. 근본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있는 것이다. 성경은 전부 하나님과의 관계다. 그래서 구약, 신약이라고 말한다. 옛 언약, 새 언약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이라는 뜻이다. 일종의 약속이다.
이것은 결국 관계다. 우리가 하나님이 없는 세상의 언어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나온 언어는 비록 언어의 모양은 같을지라도 내용은 다르다. 성경에 있는 말씀들은 모두 이런 언약에서 나온 말이니까 용어는 같을 수도 있고 비슷할 수도 있지만 내용은 전혀 다른 이야기기다. 독자적으로 관계없이 나온 말과 관계 때문에 나온 말은 다를 것 아니겠는가? 죄라는 말은 관계 때문에 나온 말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다면 그것은 죄라고 말할 수가 없다. 사회적인 잘못일 수도 있고 세상에서 양심적인 잘못일 수도 있고 이런 것이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한 죄라는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하는 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의 말이다. 과녁을 빗나갔다는 말도 하나님의 목적에서 빗나갔다는 말이다. 세상으로 말하면 아주 놀라운 사람일 수도 있고 훌륭한 사람일 수 있어도 성경이 말하는 죄라는 말은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말이니까, 자기 혼자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하나님의 과녁에서 빗나간 것은 틀린 것이다. 틀리다, 맞다는 기준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있는 것이니까 용어는 같을 지라도 내용은 전혀 다른 내용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모든 것은 관계에서 나왔다. 그러면 왜 사람은 인격을 잃었으며, 왜 사람은 근본을 잃고 부인하게 되었는가? 그것을 다른 사람들은 용어는 다르지만 인간이 왜 잘못되었는가? 이 문제를 놓고 말하면 지혜가 없어서 그렇다는 쪽도 있고, 양심이 나빠져서 그렇다는 쪽도 있고, 세상이 그래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가 있다. 지혜가 없어서 그렇다는 사람들은 지혜를 얻으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어리석어서 속은 것이고 어리석어서 잘못 된 것이라면 어리석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되지 않겠는가? 내가 악해서 그렇다면 이 악한 것을 고쳐야 되지 않겠는가? 모든 성인들의 이야기나 종교의 모든 이야기가 모두 이런 류에 속한다. 내가 지혜가 없어서 그렇다는 사람들은 지혜를 얻으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고, 사람이 악해서 그렇다고 하는 사람들은 선을 가르쳐서 선한 사람이 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이 인격을 잃었다, 근본을 잃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면 사람은 왜 그렇게 되었냐는 이 문제이다. 내가 지혜가 없어서 그렇게 되었는가? 내가 본성이 악해서 그렇게 되었는가? 여러분을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사람은 단지 산혼이니까 악한 것도 아니고 선한 것도 아니었단 말이다. 단지 산혼에 불과한 것이니까 밭이 악한 밭이 있고 선한 밭이 있는가? 흙이 선한 흙이 있고 악한 흙이 있는가? 흙은 자기 자신에게는 선도 없고 악도 없고 그렇다. 그런데 엉겅퀴가 심어지면 엉겅퀴 밭이 되고 포도가 심어지면 포도밭이 되는 것뿐이지 자기 자신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선한 사람도 없고 악한 사람도 없다.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있을 수 없다. 원래 사람은 산혼으로 지어졌으니까. 산혼으로 지어진 사람이 무슨 잘못을 하겠는가? 흙이 어떻게 잘못을 하겠는가? 흙이 자기가 스스로 엉겅퀴를 청해 들이겠는가? 흙이 스스로 나쁜 씨를 받아들이겠는가? 흙은 가만히 있는데 공중에 날아가는 새가 날아와서 씨를 뿌리고 갈 수도 있고, 똥을 싸고 갔는데 그것이 씨일 수도 있다. 저 산 꼭대기 어떤 곳에 가서 이상한 풀이 난 것을 보면 새들이 그것을 먹고 가서 거기 똥을 싼 것이다. 그렇게 씨가 퍼지니까 땅은 할 수 없이 그것을 키워야 된다. 땅이라는 것은 그렇다. 씨가 떨어지면 자기는 그 씨가 좋든지 나쁘든지 상관없이 그 씨를 키워내야 되는 것이 땅의 본분이다. 바로 사람이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인간을 생각할 때, 하나님이 사람을 생각할 때는 사람이 잘못해서 그렇단 것이 아니고, 누가 중간에 잘못한 놈이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하나님 생각은 그것이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사람이 잘못했다면 말이 안 된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했는데,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그 인간이 잘못했다면 그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만들어 놓은 그 만드신 분이 잘못된 것 아닌가? 그러면 결국 창조자가 잘못해서 그렇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까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고 내가 보기에 심히 좋도록 만들어 놓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누가 와서 씨를 뿌렸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런 비유를 하지 않았는가? 밭에 밀을 뿌렸는데 며칠 후에 가보니까 가라지가 나있더라. 그래서 제자들이 가라지가 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밀을 뿌렸는데 왜 가라지가 났습니까? 예수님이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대답했다. 그럼 뽑아버릴까요? 아니다. 그냥 두어라. 지금 그것을 뽑으면 밀까지 다 뽑힐 것이다. 열매 맺을 때가 돌아오면 저절로 밀하고 가라지가 갈라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한 데가 있다.
이 말이 바로 창세기에 나온 것과 같은 뜻이다. 누가 그렇게 했는가? 흙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산혼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누가 씨를 뿌렸다는 것이다. 우리가 철저하게 이것을 꼭 알고 있어야 된다. 오늘 아침 시간에 우리가 근원에 대해서 이야기 헸다. 산혼이니까 자기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자기로부터 나온 것 같지만 사실은 근원이 있어서 나온 것이다. 흙이 콩 밭이 되었으면 흙이 콩 밭이 된 것이 아니고, 콩이 들어와서 콩 밭이 된 것이다. 팥 밭이 되었으면 팥이 들어왔으니까 팥 밭이 된 것이지 흙이 어느 ,날 자기 스스로 팥 밭이 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꼭 사람이 책임을 전가한 것처럼 그렇게 들린다. 사람 입장에서 보면 자기는 책임이 없네. 인간은 책임이 없네. 이런 말 같이 들린다. 일단은 우리에게 책임이 없다. 우리 책임은 그 다음 문제이고 일단은 없다. 우리는 산 혼이기 때문이다.
원수가 있다는 것이다. 밀을 뿌렸는데 왜 가라지가 났습니까?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그러면 하나님의 세계에, 농장에 나쁜 씨를 뿌리는 원수가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처음부터 바로 이것을 인정하고 있다. 사탄을 인정하고 있다는 말이다. 씨를 뿌리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씨 없이는 흙이 그냥 밭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진공상태에 놔두면 전혀 흙은 백년만년이 가도 거기서 풀 한 포기 안 나온다. 씨를 뿌려야 나오게 된다. 사막이라고 하더라도 씨를 뿌리고 비가 오면 풀이 나게 되어있다. 흙이 스스로 낸 것이 아니다. 잘못이 있다면 자기가 그것을 길러낸 잘못은 있다. 그렇지만 흙은 그것을 길러낼 수밖에 없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무슨 씨가 들어와도 자기는 엉겅퀴가 싫지만 자기 본성상 그것을 키워내게 되어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씨를 뿌린 자를 잡아야 되지 않겠는가?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라고 했으니까 원수를 잡아내야 된다. 이것이 지금 하나님의 문제다. 원수를 잡아내자. 사람을 족치자가 아니고 원수를 잡아내자는 것이다.
문제 해결을 어디서 할 것인가? 우리가 스스로 할 것인가? 지혜를 얻어서 할 것인가? 선해져서 할 것인가? 의를 행해서 할 것인가? 그것이 아니고 원수를 잡아야 된다. 예를 들어 풀을 메 놓으면 우선은 보면 깨끗해 보이지만 며칠 가보면 또 나온다. 농사짓기 왜 어려운지 아는가? 잡초 때문에 어렵다. 잡초만 아니라면 씨 뿌려놓으면 나오는 것이니까 농사짓기 쉽다. 그런데 씨를 뿌려놓으면 온갖 잡초가 다 나온다. 옛날 사람들이 그 잡초를 메느라고 다 늙었다. 여름 뙤약볕 콩 밭에서 하루 종일 땡볕에 앉아 김을 매야 되는 것이다. 김매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없다. 그래서 옛날 노인들은 다 관절염이 걸린다. 쪼그리고 앉아서 일해서 그렇다. 요즘에는 제초제를 쓴다. 지독하다. 제초제를 써도 조금만 안 쓰면 다시 다 나와 버린다.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다 나와 버리고 만다. 그래서 농사짓기가 그렇게 어렵다.
이 제초제 이상으로 아예 그 씨를 뿌린 놈을 없애야 된다. 그래야 문제가 해결이 되지 내가 아무리 애를 써서 노력해서 부지런하게 성실히 해서 내가 그 잡초를 다 제거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끝이 없는 일이다. 잔디밭만 가꾸어 봐도 풀을 김을 매보면 끝도 없다. 언제 다 해놓았는데 언제 보면 다 나와 있다. 비 한번 오면 다 나와 있다. 사람도 꼭 그와 같다. 도덕으로 종교로 율법으로 김을 매놓으면 금방 나와 버린다. 김을 매놓으면 금방 나와 버린다.
율법은 뭐하는 것인가? 김매는 것이다. 도덕은 뭐하는 것인가? 김매는 것이다. 법률은 뭐하는 것인가? 김매는 것 아닌가? 그래서 하기 어려운 것이다. 잡초가 하나도 나오지 않게 잔디를 키우려면 굉장히 어렵다. 우리 인생에서 잡초가 하나도 나오지 않게 인생을 키울 방법이 없다. 바울은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라고 말했다. 제초제를 아무리 뿌려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의로워질 수가 없다.
결국은 그 원수를 잡아야 우리 문제가 해결이 된다. 누가 이 원수를 잡을 것인가? 우리는 잡을 수가 없다. 왜 잡을 수가 없는가? 우리 조상 아담이 못 잡았는데 내가 잡겠는가? 그 말은 나의 대장이 못 잡았는데 쫄병이 잡겠느냐는 말이다. 사단장도 못한 일을 쫄병이 하겠느냐는 뜻과 마찬가지다. 아담이 못 했는데 내가 하겠는가? 만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담이 아니어야 되는 것이다. 그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어야 할 수 있지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된다는 바울의 말이 그 말이다. 다 아담이라는 것이다. 아담이니까 한번 아담이 안 된 것은 다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 한 사람이 물속에 들어가서 숨 안 쉬고 5분 10분 20분을 있지 못 한다면 다른 모든 사람도 다 그렇다. 한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제주 해녀들이 최장 10분인가 얼마인가를 숨을 안 쉬고 산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최장이면 그 이상 갈 사람은 없다. 15분 잡아버리면 다 죽는 것이다. 한 사람도 살 사람이 아무도 없다.
아담 한 사람이 죄를 범함으로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게 되었다는 말은 이 말이다. 나는 그렇게 한 일이 없지만 나는 아담에게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아담이 5분밖에 못 견뎠으면 나는 당연히 못 견딘다는 말이다. 아담이 물에 빠져 죽었으면 나는 당연히 죽는다는 말이다. 아담이 불에 타서 죽었으면 나는 당연히 불에 타서 죽는다는 말이다. 아담과 내가 똑같으니까. 그러니까 아담하고 다른 분이 와야 되겠다.
오늘은 사탄을 정복함으로써 인격의 영광을 회복하신 분인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인가? 아담이 잃어버린 것을, 아담이 하지 못한 것을 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아담은 사탄에게 졌다.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눈이 밝아져서 네가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렇게 했다. 그러면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나는 그렇게 안하면 되지. 그것이 아니다. 그렇게 안 할 수 있으면 아담도 안 했다. 그렇게 안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안할 수 없기 때문에 했다는 말은 물속에 들어가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뜻과 똑같은 것이다. 물속에 들어가서 아담이 죽었으니까 나도 죽는 것이 아닌가. 사탄의 말에 아담이 아멘하고 갔다는 말은 우리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말한다. ]
지금도 똑같은 것이다. 옛날에 아담이 그러고 지금 말았던 것이 아니다. 그러면 신화다. 그때 한번 그렇게 하고 안 했으면 신화다. 그런데 그때 그렇고 지금도 역시 그렇다. 우리도 똑같은 시험을 받고 있고, 똑같은 시험에 똑같이 걸리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예외가 없다. 그러니까 아담이 아닌 사람이 와야 된다.
예수는 누구인가? 사탄을 정복함으로써 인격의 영광을 회복하신 분이다.
1. 인격이 유린됨
1) 인간은 아담 안에서 사단에게 인격이 유린되었음
인격은 유린되었다. 사단에게 인격이 유린되었다.
(1) 사단의 지식과 능력을 부러워함으로서 인격을 무시하고 버림
오늘 낮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사단은 지식도 있고 능력도 있고, 사람에 비해서 다른 것을 가지고 있다. 다른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부러워서 인격을 무시하게 된 것이다. 능력이나 지식이 부러웠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인격을 무시했다.
(2) 인격은 연약함으로서 제한을 받아야 함으로 버림
인격은 연약하다. 천사처럼 안 죽고 사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는 120살 산다고 하지만 120살을 살아도 80살이나 60살을 살아도 똑같다. 다 같은 시간 내에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격은 연약하기 때문에 우리는 제한을 받고 있다. 추위에 제한을 받고 더위에 제한을 받고 목숨에 제한을 받고 병에 제한을 받고 다 제한받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 제한을 벗어날까?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3) 하나님 없는 자유와 독립을 누리려고 지식의 길을 취했음
하나님 없는 자유는 없는가? 스스로 독립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그 독립을 누려보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생각이다. 누구한테도 이것이 없는 사람은 없다. 다 똑같이 있다. 이것 때문에 결국 사단에게 유린된 것이다. 우리도 만일 천사처럼 능력이 있고 지식이 있고 제한이 없었으면 유린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사람은 천사와는 다르게 생겼다. 다르게 생겼으니까 천사를 부러워하다가 유린된 것이 아니겠는가.
2) 하나님의 신성은 인격을 통해 표현됨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능력을 행하는 데는 사람이 천사보다 못하지만 하나님 신성을 표현하는 데는 천사보다도 인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 마음을 표현하는 데는 천사보다 인격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사람을 표현하려면 사람이 필요하다. 하나님 마음을 표현하려면 사람이 필요하다. 인격이 필요하다. 연약한데도 그것이 필요하다.
오늘 음성을 확성하기 위해서 마이크를 사용하고 있고 스피커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다른 물건보다 월등하게 좋아서 이것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데는 아무 쓸데가 없다. 농사짓는데 가면 아무런 쓸데가 없다. 농사짓는 농부에게 수백만원짜리 스피커 갖다 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호미 한 자루만 못하다. 그런데 음성을 확대하는 데는 그것이 필요하다. 사람도 능력을 행하는데 있어서는 천사만 못하다. 지식에 있어서 천사만 못하다. 제한에 있어서 천사만 못하다. 당연히 못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성을 표현할 때는,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할 때는 꼭 사람이어야 된다는 것이다.
(1) 능력은 천사를 통해, 성품은 인격을 통해 표현됨
하나님이 아나 창조 질서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표현하는 데는 천사를 사용하고 자신의 성품을 표현하는 데는 인격을 사용하려고 하신 것 같다. 하나님 생각을 다 모르지만 지금 우리가 생각해보면 하나님 능력을 표현할 때가 있다. 능력을 표현할 때는 천사를 사용한다. 그러면 자기 자신의 성품을 표현할 때도 천사를 사용하는가? 그렇지 않고 자신의 성품을 표현할 때는 사람을 사용했다. 그래서 말을 하게끔 했다. 하나님의 말을 하는 사람이 생겼다. 이것은 분명히 일이 다르다. 천사가 하는 일이 다르고 사람이 하는 일이 다르다.
사람이 인격을 무시하기 때문에 신의 성품에 참여하지를 못했다. 우리는 원래 신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되어 있었다.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표현하면 자연히 사람은 신의 성품에 참여할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인격을 무시했기 때문에 표현할 통로가 없는 것이다. 이 마이크 속에서 부속품 하나를 빼버리면 소리 안 난다. 이 안에 별 것이 안 들었다. 조그만 한 것 하나 들었는데 그것을 빼버리면 소리가 안 난다. 스피커에 소리가 크게 나지만 부품 하나 빼버리면 소리가 안 난다.
(2) 사람이 인격을 무시함으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지 못하고 사단의 능력만 모방하고 있음
사람도 마찬가지로 다른 것은 다 말짱한데 하나님 표현할 것만 딱 빠져버렸다. 바로 그것이 인격이다. 그것을 무시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표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사단의 능력만 계속 모방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능력이 그렇게 올라갈 수 있는가만 계속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세상에서 말한다면 과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가지려고 노력해서 지금 우주선을 타고 하늘을 날게끔 되지 않았는가.
종교적으로는 또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 하면 내가 능력 있는 자가 될 수 있는가? 종교적으로 그것을 찾는다. 젊었을 때 목회를 하면서 제일 어려웠던 것이 능력이었다. 제일 필요한 것이 능력이었다. 막상 교회를 가보니까 능력 있는 사람은 목회를 잘하는데, 능력 없는 사람은 목회가 안 된다. 여기에도 목회 하시던 여러 분들이 오셨는데 제일 첫째로 가서 부딪히는 문제가 능력 문제다. 불이라도 한방 내리면 금방 사람이 모여든다. 뭔가 사람이 할 수 없는 사람 이상의 어떤 것을 할 수만 있으면 사람 모으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구름떼처럼 몰려든다. 그런데 그런 것이 마음대로 되는가? 안 된다. 해보려고 애를 썼는데 안 되었다. 해봐야 흉내밖에 안 된다.
지금 생각하니까 참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설사 했다고 하면 어찌 되겠는가? 원숭이 나무 타는 것 보고 나도 연습해서 원숭이 나무 타는 것 비슷하게 그런 일을 하고 있지 않았겠는가? 천사가 하는 일을 나는 모방하고 있지 않았겠는가? 그러니 천사들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다. 원숭이가 사람 나무 타는 것 보면 얼마나 우습겠는가? 우리는 서커스 한다고 하고 잘한다고 하는데, 원숭이들이 보면 정말 코미디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때는 사람들이 서커스를 하면 원숭이들이 관중이 될 것이다. 구경하러 오려고 만원짜리 티켓사서 전부 앞자리에 앉으려고 애를 쓸 것이다. 사람은 다른 것은 잘하지만 나무 타는 것은 못 한다.
천사가 하는 일을 사람이 하려고 하면, 사람이 볼 때는 굉장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천사들이 보면 얼마나 우습겠는가? 그리고 원숭이 나무 타는 것을 내가 배우려고 하면 원숭이와 같이 살아야 된다. 원숭이 뒤를 따라다녀야 된다. 매일 보고 따라다니고 연습하고 훈련해야 그렇게 해야 될 것 아닌가? 꼬봉이 되는 것이다. 원숭이 꼬봉이 되어야 원숭이 흉내를 내지 원숭이 꼬봉 안 되고 어떻게 원숭이 흉내를 내는가? 천사의 꼬봉이 안 되고 어떻게 천사의 흉내를 내겠는가?
히브리스 1장은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원하는데 너희는 천사를 원하고 있다는 말이 이런 말이다. 아들은 천사보다 월등하다는 것이다.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오시게 하실 때는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이 저에게 경배할 것이다. 너희는 지금 천사들을 경배하고 있지만 맏아들이 나타나게 되면 천사들이 경배할 것이라는 것이다. 너희는 지금 천사를 경배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맏아들이 세상에 들어오게 될 때에는 천사들이 경배하는 것을 너희가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에게 원래 주어졌던 위치다. 사람이 인격을 무시했기 때문에 자기 영광을 잃어버린 것이다. 영광을 잃어버리고 사람이 인격을 무시하고 원숭이를 따라다니면서 나무 타는 것을 연습하고 있으면 무엇이 되겠는가? 영광이 나타나겠는가? 부끄러움이 나타나겠는가? 원숭이 꼬봉인데 부끄러움이 나타나지 사람의 영광이 나타나겠는가? 안 나타난다. 아무리 해보았자 본성적으로 나무를 잘 타는 놈과 연습해서 잘 타는 놈이 같겠는가? 아무리 잘한다고 하더라도 비교가 안 된다.
새들을 보면 잠잘 때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잔다. 왜 매달려서 잘 수 있는가? 잠을 잘 때 보면 손이 오그라져 버린다. 우리는 잠을 자면 손이 펴져 버린다. 사람은 나무를 잡고 있다가도 잠이 오면 펴 버리는데, 새는 잠이 오면 딱 오므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흉내 내서 하겠는가? 무슨 수로 그것을 모방해서 하겠는가? 새에게는 그렇게 주었고 사람에게는 이렇게 주었는데 어떻게 그것을 바꾸겠는가? 천사는 이런 일을 하게끔 만들어 놓았고, 사람은 이런 일을 하게끔 만들어 놓았는데, 어떻게 그것을 바꾸겠는가? 사람은 사람의 일을 해야 된다.
(3) 예수께서는 인격으로 사단을 정복하심
예수께서는 사단을 정복해야 하나님 나라를 정복할 수 있기 때문에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맨 처음 한 일이 사단과 전쟁하는 일이다. 40일을 금식하고 주리신 후에 그 영에 이끌려서 광야로 나가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고 한다. 이것은 고의적인 전쟁이다. 예를 들어 우리처럼 어찌하다가 시험을 받았다는 말이 아니고, 고의적으로 전쟁하러 갔다는 뜻이다. 왜? 이 전쟁에 지면 소용없는 것이다. 지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 그 이상이 안 되니까 여기서 이겨야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여기서 이겨야 하나님 나라가 가능하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 보면 이 사건 이후에 바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나온다.
사단이 정복되지 않는 한은 하나님 나라는 전파될 수가 없다. 전파되어 보았자 다시 사단의 나라밖에 안 된다. 왜 종교가 실패하였는가? 왜 교회가 역사 속에서 실패하였는가? 이유는 그것이 안 되어서 그렇다. 쉽게 말하면 사단이 정복되지 않은데다가 씨를 뿌렸다. 잡초가 있는데다가 씨를 뿌렸다. 그러니까 잡초와 같이 자랄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만 교회는 전부 세상과 동화되어서 세상화되어버리고 말았다.
지금은 무엇이 남았는가? 기독교 문화만 고스란히 남았다. 유럽이나 기독교 선진국에 가면 이제는 예수는 없어도 된다. 기독교 문화가 완전히 꽃피워 있으니까 예수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김진홍 목사님인가 그분이 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독일에 가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다 목사들이 왔는데 교수가 ‘여러분은 하나님이 있다고 믿습니까?’하고 물으니까 아무도 손을 들지 않더라는 것이다. 두리번거리다가 이상해서 자기 혼자 손을 들었는데 모두 웃더라는 것이다. 정말 이상한 데 왔구나. 신학교에 공부하러 왔는데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나오면서 옆에 있던 동료가 ‘당신 진짜로 손든 것이냐? 진짜로 하나님이 있다고 믿느냐?’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안 믿으면 왜 목사가 되느냐고 했단다. 당신은 하나님을 안 믿는데 왜 목사가 되었느냐고 물으니까 목사가 얼마나 좋은 직업이냐고 했다는 것이다. 왜? 그쪽에서는 거의 반 국교니까 목사가 공무원 대우를 받는다. 아주 신사적인 직업이다.
하나님이 있고 예수가 있고는 상관이 없다. 기독교 문화가 이미 다 정착이 되어서 기독교 문화로 살아가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잡초가 있는데다가 씨를 뿌렸기 때문이다. 가만 놔두면 혹시 또 다음에 가면 잡초가 되어버린다. 곡식이라는 것이 따로 없다. 원래는 잡초였는데 그것을 사람이 가져다가 제배를 해서 우리가 지금 먹는 곡식이 된 것이다. 그냥 잡초랑 같이 섞어 놔버리면 그냥 다 잡초가 되어버린다. 좋은 종자의 밤나무를 심어서 밤이 굵다. 비료도 안하고 그냥 놔두면 다 똘밤 되어버린다. 같은 밤나무인데 가만 놔두면 저절로 야생 밤이 되어버린다.
아무리 예수를 뿌려놓아도 아무리 씨를 뿌려놓아도 다시 도토리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역사에서 교회가 실패한 것이다. 아직도 천국이 안 된 이유가 그것이다. 아직도 하나님 나라가 오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에 그렇다.
예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기 바로 전에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전쟁을 하신 것이다.
2. 예수께서 인격의 영광을 되찾음
예수께서 인간의 영광을 찾아야 되기 때문에, 그것을 찾아야 하나님 나라가 될 것 아닌가! 이 전쟁이 중요한 전쟁이다.
1) 돌로 떡을 만들어 먹느냐? 하나님 말씀으로 사느냐?
돌로 떡을 만들어 먹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인가? 이 전쟁이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는 것은 능력이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는 능력은 아직도 없다. 21세기가 되었지만 돌로 떡을 만들어 먹는 능력은 아직도 없다. 무기물이 유기물 되는 법은 아직도 없다. 돌로 떡을 만든다는 말은 무기물로 유기물을 만든단 말이다. 이렇게 과학이 발달되었어도 아직도 없다.
그런데 왜 이 비유를 들었을까? 정말로 참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된다. 다른 비유를 들었더라면 시대가 지나면서 없어졌을 것인데 아직도 돌로 떡을 못 만드니까 얼마나 이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다. 그런데 사람 속에는 돌로 떡을 만들겠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계속 있다. 끊임없이 유혹받고 있다. 처음에 천사에게 유혹 받을 때, 사단에게 유혹 받을 때, 이 능력 때문에 유혹 받았다. 돌로 떡을 만든다는 것은 능력이다. 능력으로 살 것인가? 하나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인가? 이 문제이다. 이 문제에서 아담은 실패했다. 예수님은 이 문제에서 승리했다.
(1) 인격은 하나님 말씀(생명)을 먹고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표현함
인격은 말씀을 먹고 하나님과 연합해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그것이 인격이다. 인격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을 만한 능력을 가지는 것이 인격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하나님을 표현하는 그것이 인격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을 먹고 사는 것이다.
(2) 돌로 떡을 만들어 먹고서는 하나님 성품을 표현할 수 없음
돌로 떡을 만들어 먹고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수가 없다. 그것도 하고 이것도 하면 더 좋지 않겠는가 하는데 그렇지 않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은 놈이 어떻게 하나님 성품을 표현하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 성품은 인격을 통해서만 표현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서는 하나님 성품을 표현할 수가 없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고도 하나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고 살든지 아니면 인격을 하나님을 표현하든지 둘 중에 하나다.
(3) 하나님의 성품 표현을 목적으로 하려면 생명이신 하나님과 연합해야 함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람을 만들어 놓았으니까 자기는 생명이신 하나님과 연합해야 한다고 대답한 것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사람이란 것은 그렇다는 말이다. 내가 돌로 떡을 만들어 먹는다고 해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아마도 앞으로도 얼마나 가도 돌로 떡을 만들지는 못한다. 돌로 사람이 떡을 만들면 사람이 아니다. 그 말이다. 돌로 떡을 만든다면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도 못한 일을 사람이 어떻게 하겠는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일 것 같으면 광야에서 모래가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이 그것을 그냥 다 떡 만들어 버리면 된다. 그러면 떡을 밟고 다니면서 먹고 살았을 것이다. 하나님도 못하니까 만나를 내린 것 아니겠는가? 어떻게 사람이 돌로 떡을 만들겠는가? 사람이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다면 하나님보다 더 나은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성품을 표현할 필요가 전혀 없어진다.
2) 천하만국의 영광이냐? 하나님께 경배(예배) 하느냐?
두 번째,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이고 가로되 내게 절하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들에게 주노라고 했다. 천하만국의 영광이냐?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냐? 이것이다. 경배라는 말을 예배라고 표현할 수 있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표현할 수 있다. 천하만국의 영광이 인생의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인생의 몫이냐? 그것이다. 천하만국의 영광을 가졌다고 해서 사람이 되는 것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그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사람이다. 사람이 돌로 떡을 만들어서 먹고 사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사단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신이라는 말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어둠의 아들은 어둠이다. 빛의 아들은 빛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다. 네가 하나님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어보라는 말이다. 네가 하나님이라면 내게 절해봐라. 천하만국의 영광을 내가 주겠다.
우리는 천하만국의 영광을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 성경에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이것은 내게 넘겨진 것이고 내가 원하는 자들에게 준다고 했다. 천하만국의 영광을 얻으려면 하나님께 경배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 경배해서 천하만국의 영광을 얻은 사람은 없다. 천하만국의 영광을 얻으려면 그것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경배해야 된다. 그래야 얻는다.
하나님께 경배해서 천하만국의 영광을 얻은 사람이 누가 있는가? 없다. 제일 잘된 사람이 다윗이다. 지금 우리가 볼 때는 다윗이 굉장하지만 그 작은 나라의 왕이다. 강원도만큼 한 그런 나라의 왕이다. 성경에서 굉장한 사람으로 묘사가 되어있지만 별 것이 아니다.
천하만국의 영광을 받을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께 경배할 것인가? 이 문제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입장을 취했다. 나는 사람이 되겠다. 나는 사람으로 살겠다.
(1) 만국의 영광은 사단에게 넘겨졌음
만국의 영광은 사단에게 넘겨줬다.
(2) 하나님의 영광은 인격의 경배로 나타남
하나님의 영광은 인격의 경배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인간이 지어졌다면 내가 그것을 가진다고 나타는 것이 아니고, 인격의 영광이 있어야 그것이 나타난다. 내가 세계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들 가운데 누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면 저 사람은 하나님을 잘 믿어서 대통령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하나님이 세운 대통령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세운 대통령은 세상에 없다. 하나님의 세운 대통령이 무엇 하러 선거운동을 하러 다니겠는가? 하나님이 세우면 되지 선거운동을 무엇 하러 하겠는가? 하나님이 세운 대통령은 하나도 없다. 임금도 하나님이 세운 임금은 하나도 없다.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준다.
(3) 만국의 영광이냐? 하나님의 영광이냐?
만국의 영광이냐? 하나님의 영광이냐? 이 두 가지를 놓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택했다. 그래서 마귀가 물러갔다.
3) 하나님을 시험할 것이냐? 하나님께 순종할 것이냐?
세 번째 시험은 하나님을 시험할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에게 순종할 것이냐? 이 시험이다.
(1)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임
성전 꼭대기에 세우며 가로되 네가 뛰어내려보아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천사들이 너희를 보호해줄 것이다. 네가 사람이라면 이라고 말하지 않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① 내가 하나님의 성품만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책임지실 것인가?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성품만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책임질 것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고,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했느니라고 했다. 우리가 생각하면 내가 성전 꼭대기에서 던지더라도 내가 하나님만 표현한다면 천사들이 와서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표현하고 십자가에 달렸다. 그래도 받아주지 않았다. 거짓말이다. 우리가 하나님만 표현하면 천사들이 항상 보호해 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주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는 것이다. 꼭대기에서 떨어지면 죽게 만들어놓았다. 돌멩이는 떨어져도 깨지기 밖에 안하지만 사람은 떨어지면 죽는다. 우리 교회는 14층에서 떨어지고도 안 죽고 산 형제가 있긴 있다. 14층에서 떨어졌는데도 안 죽고 살았다. 기네스북에 오를 말한 사람이다. 하지만 사람은 떨어지면 죽도록 만들어놓았다.
내가 잘하면 하나님께 충성을 하면 나는 안 죽을 수도 있다 이렇게 시험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죽도록 만들어 놓았는데 왜 시험하는가? 14층에서 안 떨어져야 된다.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떨어질 일이 아니고 안 떨어져야 된다. 그것이 사람의 위치다. 그래서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말씀하셨다.
② 하나님은 과연 인생의 모든 필요를 채워줄 만큼 전능하신가?
(2) 인생은 다만 받은 대로 살고 명한 대로 순종하는 것임
인생은 받은 대로만, 자기가 받은 대로 살고 명령한대로 순종하는 그것이 인생이다. 나를 인생으로 지어놓았으면 그대로 살아야 되고, 내가 떨어져 죽게 만들어 놓았으니 그대로 순종해야 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라는 것이다.
① 하나님을 시험할 자격과 위치에 있지 않음
하나님을 시험할 자격의 위치에 우리가 있지 않다. 하나님을 시험해 볼 위치에 있지 않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못했다. 그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시험할 수가 없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했지 시험하지 못했다.
② 생명에 있어서 하나님과 하나라 하더라도 일에 있어서는 그분의 종임
생명에 있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 생명을 닮는다고 하더라도, 일에 있어서는 그분에게 절대적인 순종이 필요하다.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분과 동등한 것이 아니고, 일에 있어서는 그분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된다. 이것이 사람의 위치다.
③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였으므로 인격의 위치를 확고히 세우셨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서 인격의 위치를 확고하게 지키신 분이다.
이 세 가지 시험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렇게 질문했는데, 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는 육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것이 부끄러워서 우리는 졌는데, 예수님은 이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사람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내놓고 승리했다. 우리가 마귀라고 쫓아내려고 소리를 많이 질렀는가?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렀다.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지른다고 마귀가 나가겠는가? 목이 쉬도록 했으면, 아담도 그렇게 했으면 되었다. 아담이 소리 지를 줄 몰라서 안 했겠는가? 아담이 기도할 줄 몰라서 안 했겠는가? 아담이 능력이 없어서 안 되었겠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담이다. 우리 모든 사람이, 60억 인구가 다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담이다. 아담이 못한 일은 우리도 못 한다.
예수께서는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사단을 정복했다. 우리는 여기서 사단을 정복하는 일이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구나. 그렇게 알 수 있다.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다.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어려우면 못 한다. 어려우면 어떤 사람은 하지만 어떤 사람은 못한다. 종교적인 천재는 할 수 있지만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것은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이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왜? 사람의 위치로 승리한 것이니까. 내 행위로 내 능력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고, 사람의 위치로 승리한 것이니까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할 수 있다.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할 수 있다.
그러면 개나 소한테는 마귀가 왜 시험을 안 하는가? 개나 소는 아예 자기가 개인 줄 알기 때문에 시험에 안 걸린다. 소한테 가서 마귀가 아무리 시험 해봐도 소는 눈도 깜짝 안한다. 자기가 소인 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사람한테만 왔는가? 사람은 자기가 혹시 신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온 것이다. 사람이기만 하면 너무너무 쉽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는 것이 인생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사는 것이 인생이다. 천하만국의 영광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생이 아니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서 하나님 봐라. 나를 건져줄 것이다. 이것이 인생이 아니고 조심해서 떨어지지 말아야 되는 것이 인생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렇게 정해진 것을 내가 시험하고 있다면 정해주신 이를 시험하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는 인간의 분수에서 승리하게 된다.
예수님은 참 신기하신 분이다. 우리 인간의 분수를 가지고 승리했다. 부처님도 마왕을 이겼다고 한다. 어떻게 이겼는가? 예수님처럼 인간의 신분을 가지고 이긴 것이 아니다. 그분처럼 이기려면 그분처럼 수도를 해야 된다. 누가 그렇게 수도해서 이기겠는가? 설사 석가모니께서 마왕을 다 물리쳤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못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겠는가? 그런 분이나 한다. 그것이 진짜라 하더라도 몇 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여기에 속았다. 속은 것이 다른 것에 속은 것이 아니고 나는 사람인데 사람 아닌 것으로 잘못 생각했다. 그래서 속았다. 분수를 알면 아주 간단하다. 내 분수를 알면 사탄은 나한테 올 수가 없다. 왜 소를 유혹하러 안 가는가? 소는 분수를 알고 있으니까. 왜 개를 유혹하지 않는가? 개는 분수를 알고 있으니까. 왜 사람에게 유혹하러 왔는가? 사람은 분수를 모르니까. 분수를 모르는 사람을 보고 푼수라고 한다.
이것은 우주적인 전쟁이다. 아주 간단한 전쟁 같지만 사람이냐 천사냐 하는 전쟁이다. 히브리서 1장은 사람이냐 천사냐 누가 더 낫느냐는 이 말이다.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올 때는~”이라는 말은 맏아들이 있다는 말은 다음 아들들이 있다는 말이다. 형제들을 다 이끌고 온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맏아들이 되어서 동생들을 다 이끌고 온다는 그 말이다. 그렇게 오게 될 때는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 것이다.
또 천사들에게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더라 하였으되. 바람이나 불꽃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령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입니다.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료들보다 승하게 하였도다. 히브리서 1장을 여러분이 읽어보면 천사냐, 사람이냐? 그 문제다. 그런데 사람은 천사보다 월등하다는 그 말이다. 우리 주님이신 그분은 천사보다 월등하다. 그러면 우리의 주님이신 그분이 월등하면 나는 어쩌냐? 우리의 그분이 월등하면 나도 월등하다. 왜 그런가? 그분이 자기의 어떤 놀라운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했으면 나는 상관이 없다.
오늘도 어디를 가다보니 어떤 사람의 비석이 있는데 산악인의 비가 있었다. 경력을 보니까 대단했다. 남극, 북극, 또 하나 더 해서 삼극을 정복했다고 비석을 세워놓았다. 대단한 사람이다. 8천미터 9천미터까지 올라가서 안 죽고 살아온 사람이니까 대단하지 않은가. 그것을 두 번씩 세 번씩 갔다 왔다. 충청도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히말라야를 정복했기 때문에 나는 히말라야를 못 가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히말라야를 정복했으니 내가 어떻게 가겠는가? 여러분도 아무도 갈 사람이 없다. 너무 위대한 사람이 정복을 했기 때문이다. 너무 특별한 체력을 가진 사람이 정복을 했기 때문이다. 너무 특별한 의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정복을 했기 때문에 우리 보통 사람은 갈 수가 없다.
그런데 나와 똑같은 사람이 갔으면 나도 갈 수 있을 것 아닌가! 나와 조금도 틀리지 않은 사람이 갔으면 갈 수 있다. 나와 똑같은 사람, 나와 똑같은 체력을 가지고 있고, 나와 똑같은 폐가 한쪽 없는 사람이 갔으면 나도 간다. 남이 가는데 왜 못 가는가? 다른 사람이 가는데 나는 왜 못 가겠는가? 예수님이 그렇게 가셨기 때문에 우리 모든 사람이 갈 수가 있다.
예수님의 구원은 정말 다른 사람의 구원과 정말 다르다. 다른 사람의 구원은 놀라운 구원이다. 구원이라고 말하긴 그렇지만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예수님을 잘 알고 보면 너무나 시시하고 너무나 형편없고 너무나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에게 구원이 된다. 그분도 히말라야를 두 번이나 올라갈 분 같았으면 예수님이 히말라야 꼭대기에서 십자가를 졌으면 우리는 못 간다.
인생으로서 거기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든지 다 거기 있는 것이다. 바로 그분이 있는데 우리가 있다. 내가 2천년 전에 예수를 만나본 일이 있는가? 아무도 예수를 만나본 사람이 없다. 이제 새삼스럽게 예수를 만나러 가겠는가? 그분이 계신 곳에 우리 모든 사람이 있다. 이것이 포함이다.
그분은 그분 자신 속에 모든 인류를 포함하고 십자가를 졌다. 그러니까 우리도 그분이 십자가를 질 때 함께 진 것이다. 그분이 죽을 때 우리도 함께 죽은 것이다. 그랬으면 그분이 부활할 때 우리도 함께 부활한다는 말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다. 그분과 연합하여 그분과 같은 모양으로 십자가에 죽었으면 그분과 연합하여 그분과 같은 모양으로 부활할 것이다. 당연하다. 죽음에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부활에도 연합한 자가 될 것이다.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너무 어려운 것으로 지금까지 전달되어 왔기 때문에 우리는 뒤를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다시 또 율법이 되고 말았다. 복음이 왔는데 다시 또 율법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다 갈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이제는 율법 시대가 아니고 은혜의 시대라고 한다. 왜 은혜인가? 우리가 가만히 있는데 그 안에 포함되어 버렸으니 은혜다. 내가 달려갔으면 은혜가 아니다. 내가 힘썼으면 은혜가 아니다. 가만히 있었는데 나를 죽게 해버렸고, 가만히 있었는데 나를 다시 살게 했으니까 은혜다.
사단을 정복함으로써 인격의 영광을 회복하신 분이다. 우리가 무시했던 인격이다. 구속받았던 그것이 별것 아닌 시시한 것이다. 되찾아 놓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어서 다시 되찾아 온 것이 구속이다. 그 되찾아 온 것이 별 것 인줄 알지만 되 찾아온 것이 우리가 버렸던 것을 찾아왔다. 아담이 무시했던 것을 찾아온 것이다. 진짜로 구속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안 받으려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다시 반납하겠다는 사람 너무너무 많을 것이다. 모르니까 구속이 좋은 줄 알고 받은 것이다. 좋은 것이 아니다. 우리 아담이 버렸던 것이다. 싫었던 것이다. 예수님 찾아오신 것이 그것을 찾아왔다. 찾아온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인격의 영광이 있다. 물 위로 걸어갈 때 인격의 영광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였을 때 영광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실 때 영광이 나타났다.
이것은 역설이다. 십자가에 죽는데 왜 영광이 있는가? 역설이다 이것은. 삐까번쩍해야 될 건데 삐까번쩍이 무엇인가? 하늘이 캄캄해지고 땅이 요동하고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고 큰 소리를 지르고 운명했다. 이것이 뭐가 삐까번쩍한가? 완전히 절망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사도들은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살려낸 것이다. 완전히 시각이 바꿔진 것이고 세계가 바꿔진 것이다. 관념이 바꿔진 것이고 모든 것이 뒤집어져서 바꿔진 것이다. 그렇게 바꿔져야 그것이 영광으로 보이지 그렇지 않고는 구속을 다시 반납할 사람 너무너무 많다. 지금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 예수님이 갖다 주신 구속을 반납할 사람 너무너무 많다. 그것을 알고는 예수 안 믿는다. 참 비밀이다.
예수님께서 사단을 승리할 때 어떻게 승리했는가? 비밀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들인데 사단이 와서 시험을 하고 하면 당연히 불벼락을 내릴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불벼락을 내려서 사단을 박살을 내버리고 말 줄 알았는데, 불벼락을 내린 것이 아니고 우리가 무시했던 그 재료를 가지고 승리했다. 우리가 멸시했던, 인류가 멸시했던 그것을 가지고 승리하셨다. 그러니까 이것이 기이한 일 아닌가? 이것이 복음이다. 석가모니가 죽을 고생을 다해서 도를 깨달았다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고생이다. 고생의 대가이지 복음이 아니다.
왜 복음인가? 우리가 버린 것을 가지고 구속을 만들어 냈으니까 복음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우리의 기쁜 소식이다. 천심만고 끝에, 석가모니의 고행상을 보면 아주 뼈만 남아서 있는 고행상이 있다. 그렇게 뼈만 남도록 고행을 해서 결국 우유 한잔 마시고 깨달았다. 그러면 그것이 어떻게 복음이 되겠는가? 그것은 정말 저주다. 우리가 다 그렇게 해서 지혜를 깨달아서 무엇인가 될 것 같으면 다 저주다. 이대로 살다가 죽는 것이 낫다. 나는 못하겠다. 이대로 살다가 지옥에 가더라도 가지 완전 해골바가지 돼서 죽기 직전에 우유 한잔 마시고 지혜를 얻는 그것은 나는 못하겠다. 여러분은 하실지 모르겠지만 나는 못하겠다. 그것은 복음이 아니고 저주다.
예수님의 복음!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였는가? 아무것도 안했다. 아무것도 안했는데 내 위치를 싹 바꿔놓았다. 이것이 해방이다. 내가 독립운동을 했는가? 무엇을 했는가? 어느 날 갑자기 8월15일에 확 바꿔져서 우리가 해방이 되지 않았는가? 이것이 복음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가? 아무것도 안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바로가 나가라고 하니까 이것이 복음 아닌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가? 어느 날 갑자기 고레스가 해방했다. 그것이 복음이다. 우리가 한 것은, 우리가 해서 얻은 것은 복음이 아니다. 그분이 주셨으니까 그것이 복음이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그분이 해주셨기 때문에 그것이 복음이다. 그런데 그 할 수 없는 것을 그분도 힘들어 했다면 우리도 힘들 것이다. 그분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생각해보자. 이렇게 하는데 무슨 힘이 들겠는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하는데 나는 사람이다. 이것이 무엇이 힘든가? 아무 힘든 일이 아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보아라. 너를 보호해줄 것이다. 아니다. 나는 인간이다. 너무 쉽지 않은가? 힘들이고 할 수는 없다. 힘들이고 이긴 것은 이긴 것이 아니다. 힘들여서 이긴 것은 복음이 아니다. 전혀 힘들이지 않았는데 승리한 것이다. 예수님은 전혀 힘들이지 않았다.
대제사장은 세마포 옷을 입는다고 한다. 세마포 옷을 입고 만일에 성전에서 봉사를 할 때 땀이 나면 안 되는 것이다. 땀나는 봉사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마포 옷을 입는다. 예수님께서 만일 거기서 땀나는 일을 했다면 우리는 다 멸망이다. 예수님이 땀나는데 우리는 땀 안 나겠는가? 예수님이 땀이 났다면 우리는 피난다. 그런데 너무 쉽지 않은가? 사람이 떡으로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다. 너무 당연한 말씀 아닌가. 천하만국의 영광?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사람이다. 너무너무 쉽지 않은가? 주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너무 쉽다. 시험하려면 얼마나 어렵겠는가? 하나님을 시험하려면 너무너무 어려운 것이다. 사람 시험하기도 어려운데 하나님을 시험한번 해보라. 하나님을 시험하기는 너무너무 어려운 일이다. 또 하나님이 시험에 걸리겠는가? 안 걸릴 건데 시험에 걸리도록 한번 해보라. 얼마나 어렵겠는가? 주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했는데 나는 해보니까 하나님 시험 못하겠더라. 그 말이 쉽지 하나님을 시험 한번 해보려고 하면 얼마나 어렵겠는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면 너무너무 당연하다.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너무 쉽고,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보편적이다. 모든 사람이 다 공유할 수 있다. 히말라야 산에 올라간 것은 당연하지 않다. 당연히 올라간 것이 아니다. 피나는 노력을 해서 올라간 것이지 당연히 올라간 것이 아니다. 당연히 올라가지 않았으니까 우리한테는 복음이 안 된다. 나도 오늘 그 비석을 보면서 참 대단한 사람이네. 대단한 사람이지 나하는 아무 관계가 없다. 비석에 대단한 사람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나와 관계가 된다. 잘 알고 보면 예수님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나와 관계된 사람이다.
사단을 정복하는 일은 대단한 것으로 정복하는 것이 아니고 너무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야 정복한다. 가짜를 정복하려면 진짜를 정복해야지 가짜를 어떻게 총으로 정복하겠는가? 가짜를 대포로 쏜다고 해서 가짜가 없어지겠는가? 가짜는 진짜가 와야 된다. 진짜가 있으면 저절로 되는 것이다. 진짜가 없으면 대포로 쏴도 그것은 안 된다. 진짜가 없으면 폭탄을 내어도 안 되고 원자폭탄을 내어도 안 없어지는 것이다. 진짜가 있으면 저절로 가짜는 없어지는 것이다.
사단을 정복하는 것이 인류를 구원하는 급선무다. 사단을 정복하는 이분 안에 있는 것이 내 인생을 해결하는 급선무다. 사단을 정복하는 이분 안에 있는 것이 교회가 되는 급선무다. 사단이 정복되지 않고는 교회가 불가능하다. 교회가 되려면 사단이 정복되어야 교회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단은 그 나라다. 나라가 되기 때문에 그 나라가 되려면 그 나라의 원수, 그 나라의 우두머리가 없어져야 되지 않겠는가! 예수님은 그래서 둘이 결전을 한 것이다. 인류사적으로 최후의 결전을 한 것이다. 아담의 역사를 총 결산하는 결전이다. 거기서 아담이 아닌 사람, 아담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승리했다. 그래서 첫 사람 아담은, 마지막 사람 아담은,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 마지막 사람 아담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으로서 우리와 똑같은 운명을 가진 사람으로서 마귀를 이기고 천사들에게 수종을 받았다. 여러분도 바로 이 자리에서 내 인생의 자리에서 마귀를 물리치고 천사에게 수종 받는 사람 되시기를 바란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만고에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이 전쟁에서 주님께서 너무나 쉽게 너무나 당연하게 원수를 물리치고 천사들에게 수종 받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주님으로 인해서 패배의 세계는 없어졌고 패배의 사건은 없어졌고 절망의 사건은 이제 없어졌습니다. 주님 당신으로 인해서 우리에게도 이제는 희망이 생겼고 소망이 생겼고 우리에게는 이제는 천사들의 경배 받을 일이 생겼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주신 이 위치, 하나님이 정해주신 자리, 하나님이 보시고 심히 좋다고 했던 그 자리, 이것을 우리가 귀중하게 여길 수 있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것을 높이 알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마귀를 이기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천사들을 정복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모든 사람의 주님이 되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