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세차게 부는 바람은 코끝을 시리게 만들고 발걸음이 빨라지게 한다. 아침 최저 기온이 영하 10도를 알려준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이다 마루를 지나 마당으로 나선다.
3월부터 시작한 강의를 마무리하는 날이다. 일 년 동안 일주일에 이틀, 반 마다 두 번 교실에서 아이들을 만나 새로움을 얻었다. 나이로 보면 학생들과 나와는 두 세대를 뛰어넘는 사이다. 십 대의 아이들과 생각을 나누고 교실에서 함께 웃음과 얼굴에 주름살이 돋는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2학년 세 개 반은 학급마다 다른 모습을 보인다. 구성원들의 의욕이 넘치고 참여하려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학 반, 나의 이야기에 유달리 딴지를 걸어 수업 분위기를 흐리는 반,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아이들이 귀여울 따름이다.
초등학교 때 개인 학습을 한 몇 명을 제외하고는 처음 접하는 공부다.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우리의 전통이 숨 쉬는 기록을 맛보는 시간이다. 한자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왜 한자를 익혀야 하는지를 안내한다. 더욱이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 중에 한자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7할에 이를 정도다. 한자어를 얼마만큼 이해하느냐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습 이해의 관건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쓰는 일은 그림을 그리는 수준이다. 제 이름 세 글자도 써 본 일이 없다. 평상시 부모에게서 안내 받지 못한 경우도 있다. 일주일의 시간을 주고 부모님께 확인해 오도록 하였으나, 이름 확인 여부는 아랑곳 않고 인터넷 검색을 하여 음만 같은 한자로 따온 학생도 보이는 듯하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학생들이 한자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다. 교무실 교육 실무원의 도움을 받아 부수 일람표를 복사하여 코팅한 다음, 개개인의 이름을 써서 학생들에게 안긴다. 틈나는 대로 익히고 활용하는 학생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수업 시간마다 꺼내 보도록 한다.
3월이 지나면서 한자와 친해지고, 교과서 새로 나온 한자 학습 수행 평가는 갖가지 편법이 동원된다. 글자 쓰는 순서는 무시되고, 어떻게 하면 빠른 시간 안에 주어진 종이를 메꿀 수 있을까 궁리다. 획 수가 적은 글자를 먼저 쓰고 복잡한 글자는 뒤로 미룬다. 가끔 쓰는 시범을 안내하지만 학생들은 쳐다보는 경우가 많지 않다. 교과서 밖 생활 한자를 곁들이며 학생들에게 한자가 친숙하게 느껴지도록 하는데 시간을 보낸다. 수행 평가는 집중도를 높여준다. 점수에는 민감하다. 반마다 두 세 명은 관심이 없다. 달래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것만 하거나, 싫은 것은 하지 않는 태도는 살면서 곤란한 문제에 이를 수 있음을 들려준다.
학기마다 펼치는 여러 가지 수행 평가는 학생들의 개성과 다양성을 엿본다. 이 학습 결과물을 정리해 놓았다가 학년이 끝날때 쯤, 도서관에서 과목의 특색을 살려 전교생과 공유하는 시간을 갖는다.
세대 차이는 어쩔 수 없다. 내가 살아온 시간과 학생들이 살아가는 세월이 다르다. 작은 부분이지만 공감대가 생기고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면 흥이 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업에 임한다. 앞선 세대의 경험이 아이들에게 길을 선택하는 방향 제시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수업 마치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빠뜨린 것은 없는지, 무엇을 더 안내해 줄 수 있을까를 찾는다. 일 년을 보내면서 계획과 실행에 격차가 생겼다. 보완해야 할 내용이 눈에 들어온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일에 집중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아이들은 순수하다. 미래의 일까지 챙기며 해 나가는 것은 이미 애가 아니라 어른이다. 쉽고 편한 것을 먼저 완성하고 어렵고 힘이 드는 일은 나중으로 미룬다. 생각이 깊거나 멀리 보는 경우는 그 반대로 행하는 것을 제안한다. 달콤한 결과는 고통을 함께 안고 간다. 학생들이 어른의 생각을 그대로 쫓을 순 없지만 지속적인 안내는 필요하다.
겨울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하면서 수업 분위기는 이전과 다르다. 자기 주도적 학습을 하는 몇 명을 제외하고는 학습에 관심이 없다. 집중력을 높이려 여러 방법을 동원해 학생들의 눈과 귀를 끌어 모은다. 학생 지도에 앞서 내가 더 준비하고 성숙해 가는 모습을 보인다. 교학상장敎學相長, 가르치고 배우면서 서로 성장함을 체득한다. 1년간의 지도가 끝났다. 처음 다짐했던 내용처럼 학생들이 생소한 내용이지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는지 되돌아본다.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쓸 수 있는 사람, 괜히 확인을 한다. 몇 명이나 될까. 나에게 배운 학생들 모두가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누구든지 자신에게 꼭 필요하면 해낸다. 아니 할 수 밖에 없다. 머지않은 날에 스스로 찾아서 문제해결을 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마지막 수업을 하고 종이 울릴 때 학생 대표가 반 전체 학생을 일어서게 하였다. 그 동안 우리를 지도해 주신 ‘선생님께 인사’할때는 고마움과 함께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오름을 애써 숨긴다.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각자의 계획을 채워나가는 꿈을 위해 이어 갔으면 한다.
점심을 먹고 교무실에서 선생님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후, 교장실을 찾았다. 짧은 이야기 속에 다음 해에도 계속해서 수업을 맡아 줄 것을 요청받았다. 귀촌과 텃밭 가꾸기를 하면서 남는 시간에 내가 가진 재능을 기부한다는 생각으로 임해왔다. 시간 활용과 학생을 만나는 즐거움으로 나의 한 주가 채워진다. 다가오는 새 학년이 기다려진다. 수업을 끝내면서 진급한 학생을 뒤로 하고 새롭게 맞이할 아이들을 상상해본다.
바람이 불고 땅을 꽁꽁 얼게 만든 날씨는 차츰 물러갈 기세다. 운동장 언저리 풋살장은 대결을 펼치는 아이들의 함성으로 가득하다. 계절과 관계없이 학생들의 열기 만큼은 어디에 내어 놓아도 뒤지지 않는다. 어떤 일을 하든지 집중하는 모습은 권장할 일이다. 운동에서 재미를 붙여 범위를 차츰 넓혀서 학습에도 적용되었으면 한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자신의 단계에 어울리는 성취 욕구는 정해져 있기에 발달 과정에 맞는 성장이 기대된다. 시작한 일은 마무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나에게는 미련을 떨치고, 수용자인 상대에게는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능력을 펼치도록 할 것이다. 새로운 도전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