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에 관한 소묘 · 1 외 14편
문덕수
선線이
한 가닥 달아난다.
실뱀처럼.
또 한 가닥 선이
뒤좇는다.
어둠 속에서 빛살처럼 쏟아져 나오는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선이
꽃잎을
문다.
뱀처럼.
또 한 가닥의 선이
뒤좇아 문다.
어둠 속에서 불꽃러머 피어나오는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꽃이
찢어진다.
떨어진다.
거미줄처럼 짜인
무변無邊의 망사網紗,
찬란한 꽃 망사 위에
동그만 우주가
달걀처럼
고요히 내려앉다.
꽃과 언어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간
꺼져도,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재떨이를 오브제로 한 시
싸늘한 저항
재떨이는
내 것이 아니었다.
나와
그 일상日常을 벗어난 재떨이
사이에
벌어지는 거리도
아무는 상처의 속살처럼
삐죽삐죽 돋아나는 하늘도
재떨이에서
움켜쥐었던 손을
나는 떼었다.
그 싸늘한 저항과
나의 부재 사이에
꽃씨도 뿌릴 수 없는 황막한 계절.
다만
살의殺意의 강물이 흘렀다.
다정스레 내민 나의 손이
시든 꽃잎처럼 떨어지던
그러한 강물
재떨이가 아니었다.
이렇게
나와 재떨이 사이에
6·25 같은 전율과
혁명의 아우성이
머물다
꺼졌다.
손수건
누가 떨어뜨렸을까
구겨진 손수건이
밤의 길바닥에 붙어 있다.
지금은 지옥까지 잠든 시간
손수건이 눈을 뜬다.
금시 한 마리 새로 날아갈 듯이
금시 한 마리 벌레로 기어갈 듯이
발딱발닥 살아나는 슬픔.
빈 유리컵
탁자 위에
빈 유리컵이
어제의 모습 그대로 있다.
잠자는 것도
눈을 뜨고 있는 것도 아니다.
누가 사뿐사뿐 다가와서
조심스레 가득히 물을 붓거나,
하루나 일 년쯤 지나서
다시 빈 손이 찾아와
잡을 때까지 그대로 있다.
곁에는 재떨이
타다 남은 성냥개비,
다시 일 년쯤 지나서
그 너머 녹슨 라이터가
죽은 혼령같이 남아 있다.
이승과 저승의 사이같이
오고 가는 빈 손
투명한 그
갈증의 입술들이
무덤 속에서 썩고 있을 때,
빈 유리컵은
사랑은 어디 있나
저 시렁 위에
마른 동태의 눈알에
저 신줏神主단지 속에
앙상한 나뭇가지같이
여윈 내 육신을 한순간
번개처럼 번쩍
한 가닥 휘감을 뜨거운 전율은
어디 있나.
내 심장을
내 허파까지를 도려 내라.
그것도 모자라거든 내 심장을
몽땅 끄집어 내어
빨래처럼 쥐어짜 보라.
영혼은 어디 있나
실은 그것들은
모두 썩어가는 나무토막
삭고 녹스는 쇠가시
꼬이고 얽히는 지푸라기들.
저 주검을 번쩍 눈뜨게 할
저 무덤을 열고 벌떡 일어서게 할
저 허우적거리는 지옥의
팔들을 덥석 잡아 끌어올릴.
표적標的
그 날,
내 이마를 찢고 날아간
파편의 행방을
좇고 있다.
그 날.
내 허벅지를 뚫고 날아간
총알의 행방을
지금도 좇고 있다.
눈썹 위로
지렁이가 기어간 듯한
도독한 상처의 자국과
가끔 가시에 찔리듯
찌르르 뜨끔 아리는 허벅지를 만지면서,
붉은 캐터필러에 깔려
온몸이 꽃가루로 바스러지고
눈알과 팔다리가 삐어져 튀는
그 피의 새벽을
나는 좇고 있다.
다시 원수의 표적이 되리
숨을 거두기 전에도
거둔 후에도
표적이 되어 끝내 좇으리.
해마다 6월은 와서
온몸에
빗발 같은
총알이 날아와 박힌다.
그
병사들의,
아직도 잠들지 못한 그 병사들의
마지막 숨으로
마지막 눈빛으로
오늘 나와 저 나무들의 맥박은
뛰고 있다.
소련제 캐터필러에
그 포화에
깔리고 혹은 불타고,
그리고 쫓긴 보따리들이
열차를 좁은 길바닥을 메우고,
시체가 또 시체를 덮는
목멘 아우성,
그 영원한 혼령의 울음이
오늘 나의 핏줄
저 역사의 강물로 흐른다.
내 팔을 다오
내 눈알을 다오
내 다리, 내 허벅지, 내 늑골을 다오
떨어져 나간
한쪽 팔의
한쪽 눈알의 행방을 좇으며,
이마의
옆구리의 상처는
증인證印처럼 남아서 앓고 있다.
신음은
아직 우리가
총대를 내린 것이 아니며
철모를 벗은 것이 아니라는
절규다.
빗발처럼 총알이 박히듯이
빨간 꽃은 피고
푸른 숲은 우거진다.
가로수
가로수는 왜 제가 가로수인지
왜 바람이 와서 흔드는지
왜 머리 위에서 하늘이
갑자기 내려앉으며 흐려지고
먹구름 천둥 번개가 치는지
모르는 채 열지어 서 있다.
가로수는 제가 무엇인지
왜 차들이 요란한 경적을 울리며
휙휙 지나가고 또 지나가는지
그러다간 서로 부딪히고 찌그러지는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죽는지
빌딩들은 왜 길가에 늘어서 있는지
사람들은 왜 똑같은 얼굴
똑같은 걸음 똑같은 모양으로
열심히 빌딩 속을 드나들고 있는지.
가로수는 그저 가로수일 뿐
왜 잎이 떨어지고 다시 돋아나는지
까막 까치들이 가끔 와서는 울고
매미들이 왜 귀청을 찢는지
가을도 아닌데 그만 잎이
시들시들 병드는지도 모르면서.
잎이 떨어진다고
잎이 가지에서 떨어진다고
그것이 이별이겠느냐
그것이 자유이겠느냐
또다른 올가미 같은 인연이 있으리.
나는 그렇지 않다 해도
그는 그렇다고 한다.
잎은 금방 땅에 내려앉지 않는다.
풀렸다가는 또 감기는 연줄 같은
보이지 않는 노끈에 매였는지
허공을 휘청거리면서 맴돌고
다시 솟구치듯 올라가다가는
한 굽이씩 돌아 내리 더듬으며
가끔은 날갯짓을 혹은
나비의 몸짓이다.
잘 보라고 이 사람아
이 신비스런 잎의 몸짓을
이렇게 악보로 옮기지.
새로운 영혼으로 태어나는 순간일까
지상은 점점 가까워오는데
잎은 어느 빌딩의 옥상에 머무르다가
육교 쪽으로 날아가
난간을 붙들고 한두 바퀴 돈다.
그의 운명도 이제는 끝이리.
온몸 짓밟혀 가루로 흩뿌려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리
이 사람아 분명히 보았지
그 흙 속에는 뭔가의
미지의 시가 묻혀 있음을.
어부와 그의 아내
- 불교 설화에서
오늘 짐작으론 큰 고기 많이 잡힐테니
마을 사람 우르르 몰려와 손 벌리겠군
그렇지, 암 좋은 수가 있지 좋은 수가
여편네야 넌 아무나 찍자 좀 붙으렴
사람들 싸움판에 몰리도록
낚시줄 휙 던졌다 끌어당기니
첫 물에 큰 놈이 물렸것다
당겨도 낚싯대만 휘어 끌려오지 않으니
전갈을 받은 그의 아내
옳다, 마가리 한 마리 물렸겠군.
다라수 잎사귀 귀에 달고
한쪽 눈꺼풀에만 꺼먼 먹칠을 하여
개 한 마리 안고 길거리로 나서니
지나가던 한 아낙네 그 꼴 보고
저 여편네 꼬락서니 정말 미쳤군.
뭐 미쳤다구 내가 왜 미쳐
머리채 휘몰아 잡아틀고 이년저년 맞붙으니
동네 사람들 우루루 몰려들구나
남 보고 괜히 미쳤다구, 재판소 가자
창피해서 못 가겠다, 왜 못 가
나으리 나으리 우리 나으리마님
이년이 날 미쳤다고 욕지거리해요
일부러 미친 꼴 하고 나왔어요
네 그 꼴 정말 요글요글 메스껍군
두말 말고 여덟 푼 벌금을 내라.
어부는 물 속을 절버덩 들어가 보니
이건 윗물에서 떠내려온 나무 토막
낚시라도 빼내려고 이러지러 굴리니
가시 같은 가지 끝에 그만 눈이 찔렸네.
잿빛 허무의 노을
예배건 회의건 토론이건
로봇처럼 똑같이 두 발을 번갈아 떼면서
엘리베이터로 먹이처럼 먹혀 들어갈 때
또는 휘감기는 지푸라기처럼 우루루 몰려 들어갈 때
병원 회사 아파트
그리고 도시
지금은 한 시대 물살이 기쁨인 듯 슬픔인 듯 가득히 고여 넘실거리지만
분노 눈물 슬픔 웃음이 범벅으로 폭발하지만
언젠가는 썰물로 텅 빌 것이고
잿더미로 남겠지.
똑같은 규격
똑같은 무게
똑같은 죽음
똑같은 뉴스
똑같은 감정
똑같은 절규
이런 대량생산이 쏟아져 나오는 곳에서
몇 그루의 나무는 바보처럼 서서
꽃이 피고 이운다.
으슥한 길가 마른 덤불 속엔 버려진 승용차 한 대
열심이 녹슬고 있고
내일 또 날이 새면 삭아서 휑뎅그렁 헐린 빈 건물들의 골조는
회사도 되고 병원도 되겠지만
그 다음에는
묻지 말라
무덤, 사막, 폐허
그 위에는 잿빛 허무의 노을이 술렁거리리.
꽃 앞에서
샐비어도 장미도 국화도 제라늄도 아름답다.
그 빛은 태양과 더불어
그 향기는 바람과 더불어
꽃의
그 빛은 한 시대 어둠의 씨가 되고
그 향기는 한 사회의 독이 되는가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의 호수 눈, 앵두 입술
한 사람을 사랑함은
모든 사람의 사랑이기 때문,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야 하리.
강물 속에 몸을 던지거나
절벽에 돌멩이처럼 굴러 떨어질지라도 어리석어야 하리.
꽃잎세기
마을을 덮은 코스모스 덤불
아무거나 한 송이 골라 꽃잎을 열심히 세어 본들
나비처럼 머무를 수야,
대추나무 밑둥을 감고
한창 뿌득뿌득 기어오르고 있는 나팔꽃
푸른 것은 깔때기 모양
흰 것은 나팔주둥이
한 잎 두 잎 세 잎 네 잎 다섯 여섯 세어 보지만
실은 한 송이일 뿐이다.
돌담을 돌자 앞장선 나비는 오간 데 없고
순하고 야들야들한 연보라 무궁화꽃
그 한송이의 여섯 개 꽃잎을 확인한들
내 어쩌랴 어쩌랴.
해바라기는 서른네 개의 황금 꽃잎을 둥글게 박고
들국화는 서른아홉 개로 쪼개진 보랏빛을 빽빽이 둘렀거늘
내 어찌 머무를 수야.
유리컵
사람들이 다 물러간 뒤에
무슨 암호처럼
빈 유리컵만 남았다.
시간의 저쪽
투명한 무한의 공간 속에
빈 탐욕이
피라밋처럼
언젠가는
태평양도 다 훌쩍 들이켜 마셔 버릴 듯이
혹은 더 없는 빨간 한 잔의 포도주를 빚을 듯이.
- 『문덕수 시전집』에서 (시문학사, 2006)
출처: 함께하는 시인들 The Poet`s Garden 원문보기 글쓴이: 박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