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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생각해 봅니다 스크랩 가톨릭의 성령쇄신운동에 대해
안 엘리지오 추천 0 조회 104 15.10.04 07: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I. 서  론 1

 

II. 본  론 1

 

1. 성령 쇄신 운동 1

  1) 성령 쇄신의 개념과 약사 1

  2) 성령 쇄신운동의 특성 3

 

2. 성령세례의 개념과 전제조건. 5

  1) 성령세레란 무엇인가? 5

  2) 성령세례를 받기 위한 전제조건들 5

 

3. 성령세례(쇄신)을 위한 기도 6

  1. 성세서원 갱신예절 6

  2. 성령세례를 위한 안수기도 7

  3. 심령기도 9

  4. 성령세례를 위한 기도를 받은 후 10

 

4. 성령쇄신모임에 대한 이해 10

  1. 성령세례의 본질적인 체험과 결과 10

  2. 성령쇄신의 한계성 11

 

나가는 말-성령쇄신운동의 미래를 전망하며 12

 

참고문헌 14

 

I. 서  론

 

우리는 흔히들 성령운동이니 성령쇄신 운동이니 하면 개신교의 부흥회를 연상하게 되고 이러한 생각 이면에는 어느 정도의 부정적인 생각이 자리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보다 정확한 의미안에서의 이해는 분명히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성령쇄신운동 중에서 특히 성령세례부분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그래서 먼저 성령쇄신 운동이란 무엇인지를 간단히 알아보고 그 다음 성령세례에 대하여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령쇄신운동에 대한 한계성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II. 본  론

 

-. 성령 쇄신 운동

 -. 성령 쇄신의 개념과 약사

 -. 성령쇄신이란?

1. 교회의 모든 운동(Movement)의 시작은 교회에 부족한 부분을 보수하고 채우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교회안에는 지난 수세기 동안에 걸쳐 많은 신심운동들이 일어나서 교회의 생명을 크게 쇄신시켜 왔다. 4-5세기경의 금욕주의 운동, 성 베네딕또에 의한 수도생활의 보급, 프란치스코 수도회 운동, 중세기의 다양한 평신도 운동, 종교개혁 이후의 예수회의 업적, 금세기에 들어서의 전례운동 등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 운동들의 특징은 모두 복음의 기본 메시지로 돌아가자고 하는 전통에로의 복귀를 전제로 했었다. 따라서 이러한 운동들은 어려운 시기에 교회의 생명을 쇄신시키는 일에 중요한 수행을 해왔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 감리교파와 성결교파에서 시작되어 가톨릭 안에 들어온 성령운동은 가톨릭 전통 안에서의 교회의 쇄신 운동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운동은 교회의 쇄신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가톨릭 안에서의 성령운동은 ’성령쇄신’이라고 부르는데 성령 안에서의 刷新이라는 말은 성령께서 쇄신을 역사(役事)하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즉 성령의 능력으로 쇄신이 일어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서 은사는 교회의 발전과 쇄신을 위해 유용한 은총으로 암시된 바 있다. 그후에 성령께 초대교회처럼 은사를 청하면서 개방했을 때 사람들은 은사를 체험하면서 기도가 쇄신됨을 보게 되었고 초대교회에만 있었다고 생각되었던 예언, 이상한 언어, 치유의 은사들까지 경험하면서 은사 현상이 쇄신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성령쇄신은 ’은사쇄신’(Carismatic Renewal)이라고도 한다. 성령쇄신 또는 은사쇄신은 개인적으로 또는 공동체적으로 초대교회 때의 오순절 성령강림을 체험하는 것에 그 본질적 요소가 있다. 또 성령쇄신은 거시적인 차원에서는 교회의 쇄신이라는 목적을 지향하고 있으며 미시적으로는 신자들에게 단 한번의 체험에 그치지 않고,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각자의 생활을 전진시켜 계속적으로 성장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2. 성령쇄신운동의 기원 및 약사

성령운동의 발단은 1901년 1월 1일 이상한 언어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되고 있는 미국 캔자스 주 토페카에 있는 벧엘성서대학의 학장 찰스 폭스 퍼햄(Chales Fox Parham)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1900년에 약 30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오로지 성서만을 교재로 공부하였다. 그는 1900년 말에 학생들에게 ’참다운 성령세례의 성서적 표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였고 성령강림의 기록으로부터 이상한 언어의 은사로 이야기 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징표라고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 뒤로 성령 충만을 위한 지속적인 기도가 몇일이고 그 학교를 휩쓸었다. 그러다가 1901년 1월 1일 아녜스 오즈만(Agnes Ozman)이라는 학생이 퍼햄에게 그의 손을 머리 위에 안수하고 기도를 해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녀가 ’성령세례’를 체험하면서 이상한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몇일 동안 모든 학생과 퍼햄이 비슷한 체험을 하였다.

토스카에서 시작한 이 운동은 텍사스로 전파되었다. 당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1906년 퍼햄의 제자인 흑인 성결교회 목사 윌리암 세이머(Wiliam J. Seymour)가 이끈 로스엔젤레스 Azusa Street 부흥회였다. 그후 오순절주의는 1906년 초기에 유럽으로 보급되어 최초로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과 그리고 영국 및 유럽대륙으로 확장되었고 그 후  전 세계의 모든 지역으로 퍼졌다. 특히 성령 강림의 보급주의파는 라틴 아메리카에 있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자연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3. 가톨릭 안에서의 성령쇄신운동

가톨릭에서 성령운동이 시작된 것은 20세기 초엽이었다. 1900년 이탈리아의 성령 봉헌 수녀회의 창설자인 엘레나 게라(Elena Guerra)수녀는 10월 15일자 편지에서 교황 레오 13세에게 신세기의 첫 해를 온 교회의 이름으로 ’오소서 성령이여’를 노래하면서 시작할 것을 교황에게 제안하였고 교황은 그렇게 하였다. 레오 13세 교황이 성령께 대한 회칙을 통해서 성령께 간구하라고 했던 호소는 1959년 4월, 엘레나 수녀의 시복을 계기로 요한 23세 교황에게 채택되었고, 교황은 순례자들에게 새로운 성령강림의 필요를 역설하게 되었다. 요한 23세는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기 전날 참석자들에게 사도행전을 한번 더 읽을 것을 권유하였고 초대교회와 같은 새로운 성령강림을 기대하면서 마리아와 함께 기도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후 그는 공의회의 축원이 있을 때마다 누누히 위의 기도문을 상기하였다. 요한 23세의 뒤를 이은 바오로 6세 교황도 이 기도문을 인용하였다.

현대의 가톨릭 성령 쇄신 운동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난 직후인 1967년 미국의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에 있는 듀케인(Duquesne) 대학에서 몇몇 젊은이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캠퍼스에서나 전 교회에서 종교적 신심이 차차 식어져감을 당황한 나머지 교회의 참다운 쇄신은 새로운 성령강림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들은 바오로의 여러 서간들과 사도행전을 읽으며 그 중 몇몇은 매일 ’성령송가’를 바쳤다. 이들은 요한 23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야에 기대했던 새로운 성령강림에 대한동경을 가슴에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성령은 예수의 제자들이 다락방에서 체험했던 것과 같은 그런 체험을 주었다. 이들은 다른 대학의 친구들과 이 체험을 나누게 되었고 얼마 않되어 본당, 수도원에서도 기도 그룹이 생겼다. 이 여파는 5대륙에까지 번져 수많은 나라에서 성령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1967년 미국에서 첫 전국대회가 열린 이래 1974년에는 세계대회가 열려 많은 사제들과 주교들까지 참석하게 되었다.

 

4. 한국교회 안에서의 성령운동

가톨릭 성령운동이 1967년 미국의 피츠버그에 소재하는 투게인 대학교에서 출발하여 오래지 않아 성직자, 수도자를 포함한 많은 평신도들이 이 운동에 관심을 갖고 참가하게 되었으며 빠른 시일 내에 국제적 운동이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이 시작된 지 불과 4년 후인 1971년 한국에서도 성령쇄신에 참가했던 분들을 중심으로 기도모임이 시작되었다.

한국 성령쇄신 운동은 메리놀 외방 전교회의 백 제랄드 신부, 서 요셉 신부, 조영호 수사 그리고 에르나 에믿 수녀등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그후 수차에 걸쳐 성령 세미나를 개최한 후 1973년 12월 5일에 ’가톨릭 성신운동협의회’가 창설되었다. 1974년 1월 15일에 처음으로 한국인 25명이 한남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성령쇄신 세미나를 받게 되었다. 1974년 3월 1일 성신운동 협의회에서 성령운동 협의회로 명칭을 바뀌었으며, 처음으로 성령 세미나를 받은 사람끼리 정기적인 기도회를 가졌다. 1974년 5월 왜관에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등 12명이 성령세미나를 받게 된다. 1975년 성령운동 협의회의 명칭은 ’전국 성령 쇄신 봉사회’로 바뀌었고 1979년에 이 회는 다시 ’한국 가톨릭 성령쇄신 봉사자 위원회’로 개칭되었다. 이 성령쇄신 봉사회는 각 교구의 교구장이 임명한 지도신부와 평신도 대표1명, 그리고 약간의위원들로 구성되오 있다. 위원회는 성령 세미나 실시를 위한 교구간의 긴밀한 협조 체제를 이루고 기도회 성장과 성령쇄신 묵상회를 주관하고 있다.

 

- 성령 쇄신운동의 특성

 

성령쇄신의 특성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전통적인 영송과는 조금 다르게 부각되는 특성들이 있다. 곧 성령쇄신(운동)은 입문성사(세례, 견진성사)때 받은 성령을 정상과정을 통한 체험이 아닌 어느 순간에 의식적으로 감각적으로 결정적인 체험이 가능하다고 보는 점, 그리고 성령의 강림은 오직 성사를 통해서만 가능한데 기도의 응답으로 성령을 새로이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점 등을 개방하고 있다는 특성이 있다. 또한 성령쇄신에서는 성령의 체험을 통해 성령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유대를 가진 은사들을 체험게  해주며 그 은사들의 표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1) 성령쇄신은 성령을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계기를 준다.

종교감정이나 정서 같은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기 때문에 공적으로 드러내서는 안되는 것이라는 것이 수세기 동안 교회에 팽배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종교 형식주의와 전례주의에 연결되어서 성령의 체험이 시들해지고 단지 지식으로만 알게 되는 아쉬움을 남겨 놓을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감각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에 감각을 동경하면서 감각적 요구를 하게 된다. 보고 듣고 느끼는 감각적 체험은 인간 실전 그 자체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성령쇄신은 인간이 감지할 수 있고 표지를 통해서 알아들을 수 있는 신비를 체험케 해준다.

 

2) 성령쇄신은 성령의 힘을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체험할 수 있는 계기를 준다.

성령의 체험은 입문성사 때에 내재하시는 성령께 점차적인 개방을 통해 되기도 하고 우리가 그 시기를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에 일어날 수 도 있다. 전자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익숙한 것으로서 어떠한 절정체험이 없어도 체험 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영성적 성숙을 획득할 수 있는 하나의 진정한 방법이다. 후자는 절정(絶頂) 또는 위기(危機)의 체험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 전통 안에 이것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기만의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하느님을 체험하는 진정한 방법이기도 하다. 성령쇄신은 이런 가능성에 대해 개방하고 있기에 결정적인 성령체험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3) 성령쇄신에서의 성령의 체험은 입문성사 때 받은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다.

모든 신자는 입문성사를 받았기 때문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루가는 "당신들은 이제 곧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입니다"(사도 1,5; 11,6 참조)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또 다른 ’성령세례’라는 성사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 것인가. 루가의 관점은 입문성사 때 받은 성령이 의식적으로 체험되는 계기 또는 성장과정을 말하는 것으로서 신학적인 의미가 아니라 체험적인 의미를 가리키는 것이다. 가톨릭 성령쇄신에서도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 곧 ’성령으로 충만 됨을 체험한다’는 것을 이미 세례 때에 오신 성령을 재확인하고 쇄신하며 우리 자신을 온갖 성사적 은총에 개방시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4) 가톨릭 성령쇄신은 반드시 성사가 아니더라도 성령을 ’새로 보내주심’이 있다는 것에 대해 개방하고 있다.

’이미 성령이 내재하시는 사람에게 새로이 성령을 보낸다고 할 수가 있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셜리반 신부는 ’새로운 행위’와 ’새로운 차원의 은총’으로 더 성장하도록 이끌어 줄 ’새로운 보내주심’을 기대해서 안될 이유가 없다고 깨달았던 토마스의 견해에 따라서 이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즉 반드시 성사가 아니라 하더라도 성령을 ’새로 보내주심은 있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새로이 보내 주심’은 은사수여의 양상으로 해석되어서는 않되며 영혼 안에서 새로이 내재하시는 것이어야 하며, 또 이것은 내재하시는 성령과 한 인간을 참으로 실제적으로 ’새롭게 하심’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견해에 의하면 ’성령세례’, ’성령의 세례를 받는다’,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한다’라는 의미는 토마스의 견해처럼 ’새로운 차원의 행위나 은총으로 사람들을 이끄시는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해석된다. 즉 ’성령체험’은 인간의 생활 안으로 개입해 오시오 ’불타는 사랑으로’ 넘어서게 하는 ’체험적 요소’가 있느냐가 핵심적인 관건이 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5) 성령쇄신은 은사들의 표출과 현현(顯現)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초대교회 신자와 오늘의 교회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입문성사를 거행하고 동일한 성령을 받는다. 즉 교회는 본질적으로 초대교회와의 연속성 상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령쇄신 안에서의 은사들의 체험은 초대교회의 은사들의 체험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비록 초기교회의 공동생활이나 전교에 필요한 이적, 또는 박해시의 열렬한 성령의 활동은 외양적으로 없을 지라도 같은 성령께서는 오늘날에도 정상적인 은사들과 예외적인 은사들에 대해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체험을 주시고 계신다. 따라서 성령쇄신은 초대교회에서 신자들이 어떤 봉사적 은사들을 받은 것처럼 오늘날의 성령쇄신에서도 초대교회와 같은 예외적 은사들이 표출되고 현현되는 현상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다.

 

-. 성령세례의 개념과 전제조건.

 

1. 성령세레란 무엇인가?

 

입문성사를 통하여 성령의 도유를 받음으로서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필요한 은혜를 받았다. 성령은 신자로서의 의무를 다하도록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교회 안에서 봉사할 수 있게 한다. "저들이 이 말을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바오로가 손을 얹으니 성령이 그 위에 내려오셨다"(사도 19,5). 견진성사를 받은 사람은 더욱 교회와 결합하고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으로서 말과 행동으로 신앙을 증거하고 옹호할 은혜를 받게 된다 "너희 안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이다"(마태 10,22).

초대교회부터 현대교회에 이르기까지 충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에 맞는 적합한 은혜가 내려졌다. 현대 신자들이 보다 효과적으로 주님을 증거하고, 개인과 교회 공동체의 쇄신을 위하여 필연적으로 견진효과를 활용하고자 견진효과의 갱신과 실현은 필요한 것이라 할 것이다. 반 그리스도교적 사고에 항거하고 그리스도의 원의대로 생활하기 위하여 성령의 능력을 분양받고, 성령의 생명과 선물과 열매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살아 계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시어 획기적인 체험을 주시므로 더욱 가까이 주께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앙생활의 변혁을 위하여 견진효과의 갱신과 성령은사의 실현을 목적으로 성실한 공동체에서 비의식적으로, 비성사적으로 행해지는 세례를 성령세례라고 한다. 성령세례라는 표현에 오해가 있을 수 있으나, 가톨릭 성령세례는 견진성사의 실현과 갱신이고 은사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성사를 대신하는 의식적인 세례는 아닌 것이며 그분의 원의대로 신앙이 매일 새로와지기 위하여 받는 구체적인 갱신의 시작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임하신 성령께서는 모든 신자들이 새로운 생활을 하기 위하여 활기 있고 자유롭게 활동하실 수 있도록 믿음의 갱신을 위하여 드리는 중재의 기도로서 생활한 성실한 공동체 안에서 공동으로 기도하므로써 이루어진다. 신자들이 합당하게 자기 사명을 수행하고, 능력을 개발하고자 받는 자발적인 공동의 기도인 것이다. 사랑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와 개인의 갱신을 희망하고 노력하는 자세를 갖고 받을 때 큰 힘을 받을 수 있고, 그리스도로 충만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2. 성령세례를 받기 위한 전제조건들

 

1) 언제, 어디서든지 아주 적은 그룹에서도 받을 수 있으나, 충분한 준비를 한 성실한 공동체에서 받는 것이 바람직하며 받는 신자들은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첫째, 성령의 활동과 성령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과 진리를 믿어야 한다. 둘째, 지금까지 저지른 모든 허물에 대하여 올바른 성찰과 통회와 결심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고백성서나 마땅한 통회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셋째,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성령께 순종하겠다는 결심이 필요하다.

2) 기도는 평화적인 분위기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평화적이며, 따뜻한 환경을 준비하여 인도하고, 우정적인 분위기와 조용하고 아늑한 환경 속에서 새로이 받는 성령세례를 구해야 한다.

3) 받을 수 있는 엄격한 자격과 조건은 없지만, 충분한 교육과 기도회에 자주 참석하여 충분한 경험을 쌓은 후 받도록 해야 한다. 지도자들은 특히 정신적, 심리적,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신자나, 혹은 충분한 준비를 하지 않은 신자들에 대해서는 조심해야 한다.

 

3. 성령세례(쇄신)을 위한 기도

 

성령세례에서는 정해진 어떠한 형식의 기도문이나 정해진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세례를 위한 기도는 참석자와 봉사자의 많고 적음에 따라, 각 기도단의 관례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할 수 있다.

 

-. 성세서원 갱신예절

 

성세서원 갱신예절은 성령세례를 받기 전에 행하는 것으로서 보다 성령세례를 잘 받기 위한 준비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참석자 전체가 주례자의 인도에 따라서 행하게 된다. 이 예절을 행한 다음에 그룹별로 차례대로 안수기도를 하게 된다.

 

-. 시작성가와 기도

시작성가는 가톨릭 성가 214, 221등 봉헌에 대한 성가를 하면 좋고 시작기도는 마리아께 드리는 "마리아께 드리는 봉헌기도"와 같은 유형의 기도를 바치는 것이 좋다. 성모님께 대한 봉헌은 의무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 동안 항상 더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께 직접 나아갈 수도 있지만 성모님을 통하여 함께 나아가는 것은 겸손한 태도이며, 성모님께 속한 것은 온전히 예수님께 속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기는 기도

성세서원을 갱신하는 예절인데 이 때 각 사람은 악마와 모든 악을 끊어버린다는 약속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모시고 따르겠다는 약속과 함께 자신을 맡기는 기도를 한다. 성령께서 내 안에서 자유로이 활동하실 수 있도록 하려면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성령세례를 청하기 전에 앞으로도 일생동안 항상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겠다는 약속과 함께 자신을 주님의 것이 되도록 위탁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 성세 갱신 예절

예식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 당신은 악마와 모든 악을 끊어버립니까?

# 끊어버립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키시기 위해 돌아가시고, 우리를 위한 새 생명을 가져다 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셨음을 믿습니까?

# 믿습니다.

 

+ 당신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따르겠습니까?

# 따르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는 지금부터 온전히 당신의 것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어두움의 권세와 죄악으로부터 해방되어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온갖 악을 추방하고 나를 악으로 유인하는 온갖 것들을 피할 결심이옵니다. 내가 범한 모든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나는 당신께 내 모든 생애를 바쳐, 당신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당신을 따르기로 약속하나이다. 나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주는 세세에 영원히 살아계시고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 마침기도

마침기도는 "성령송가"를 바친다. 성령송가는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바쳐온 기도이고 가톨릭 성령쇄신 운동도 이 성령송가를 여러 달 동안 매일 바쳐오던 몇몇의 젊은이들이 포함된 피정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 성령세례를 위한 안수기도

 

성세서원 갱신예절을 마친 참석자들은 성령세례를 받기 위하여 안수기도를 받는다. 성령세례에서의 안수는 교회의 공식적인 성사에서의 권위와는 차이가 있다. 성령세례의 안수는 성령 충만과 은혜의 실현을 청하는 공동의 중재의 기도인 것이다. 이 운동 안에서의 안수는 하느님의 선물을 풍부히 받을 수 있도록 특별한 경우 마음을 열어 놓고 기대하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인 것이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이 행하여진다.

 

-. 성가

봉사자들이 안수 기도를 해 주는 장소로 참석자들이 들어오면 함께 누구나 아는 간단한 성가를 부른다.

 

-. 구마와 안수

봉사자들이 성령세례를 위하여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는 방에 참석자들이 들어오면 성령세례를 청하는 기도를 하기 전에 주관자는 전체를 위하여 간단하게 구마기도를 하고, 각 사람을 위하여 안수기도를 해 주는 봉사자들도 자기가 기도해 줄 사람을 위하여 조용히 단순하게 구마기도를 한 후 안수를 해준다. 안수를 해 주기 전에 구마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가라"라고만 해도 된다. 성령세례를 위한 안수 기도 때 구마 명령을 하는 것은 사람들이 마귀가 들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방해꾼인 마귀를 그 기도 장소와 그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멀리 떠나게 함으로서 방해하지 못하게 하는 단순한 명령이다.

성령세례를 위한 기도를 할 때 봉사자들이 참석자의 머리나 어깨나 등이나 몸의 한 부분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 줌으로써 참석자 안에 성령께서 보다 자유로이 활동하시도록 해 준다. 이를 성령세례를 위한 기도라고 한다. 이 기도를 할 때에는 앞에서 주관하는 사람은 참석자의 머리 위에 차례대로 손을 얹으며 기도하고 참석자의 뒤에서 도와주는 봉사자는 등이나 어깨에 손을 얹고 기도한다.

 

=. 참석자의 청원기도

 

-. 기도자세

원래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 자세는 두 팔을 위로 올리는 것이었고 초대 교회 신자들도 그렇게 기도하였다. 손바닥을 위로 향하여 두 팔을 드는 것은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2-3세기부터 신자들은 팔을 십자가 모습으로 벌리고 기도했는데 이런 기도 자세는 주님의 수난을 상징하고 죽음을 이긴 부활의 기쁨을 표시한다. 중세 때 게르만 민족이 신자가 되면서부터 비롯된 합장하는 기도의 자세는 본래 백성이 성주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자세였으며, 이런 기도자세는 하느님의 은총에 순명하겠다는 것을 표현하는 자세이다.

근래의 성령쇄신 운동에서는 팔꿈치를 몸에 대고 팔을 앞으로 내밀고 손을 펴서 위로 올리고 기도하는데, 이 자세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나타낸다. 성령세례를 받기 위하여 청원기도를 할 때 일반적으로 이런 자세를 취하게 된다. 자신이 현재 하고있는 기도자세를 고집하고 다른 기도자세를 배척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기도 자세를 생활하는 것이 좋다. 의자에 앉아서 하는 경우에는 긴장을 풀고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하여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는 것이 좋다.

 

-. 청원기도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주시도록 청하는 기도는 봉사자 한 명이 대표로 기도한 후에 참석자들이 일제히 큰 소리로 각자의 필요를 주님께 말씀드린다. 청원기도를 하기 전에 각 사람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주는 봉사자에게 자신이 원하는 은총의 선물에 대하여 말하고, 봉사자는 참석자들이 일제히 큰 소리로 주님께 기도할 때 자신이 기도해 주는 그 사람의 지향에 따라 기도해 준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큰소리와 눈물로 기도했음을 생각하며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하느님께 기도한다. 그 기도는 먼저 그 동안 세미나를 통하여 새로운 깨우침을 주시고 성령세례를 받게 해 주심에 감사하고, 그리고 이 성령세례를 통하여 심령기도의 은사와 자신이 원하는 은사와 변화된 삶을 주시도록 청한다. 기도하는 동안 자신이 그 동안 범한 잘못이 떠오르면 회개의 기도를 새롭게 할 수도 있다.

참석자들이 큰 소리로 자유로이 기도하는 동안 봉사자들은 참석자들을 위하여 안수기도를 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주신다.

 

-. 심령기도

 

1. 심령기도의 은사를 받기 위한 협력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령의 이끄심에 협력함으로서 다른 언어로 기도할 수 있는 은사인 심령기도의 은사를 받게 된다. 어떤 사람은 청원기도를 하는 중에 자신도 모르게 혀가 움직이면서 이상한 언어가 튀어나오는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는 성령의 이끄심에 협력할 때 심령기도의 은사를 받게 된다.

성령께서 성령세례를 위한 기도를 하는 동안에 몸에 따뜻한 열기를 느끼게 하거나, 혀나 턱, 손이나 몸이 떨리게 하거나, 자신이 모르는 말마디를 머리 속에 떠오르게 하심으로써 당신이 이끄심을 드러내시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즉시 하던 기도를 중단하고 큰 소리를 내어 협력한다.

그러나 아무런 표징이 없는 경우라도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므로 자신이 아는 단어가 아닌 뜻 없는 소리라도 내거나 말을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봉사자의 심령기도를 따라해 봄으로써 협력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하여 심령기도의 은사를 받을 수 있다. 우리가 먼저 입으로 소리를 낼 때 성령께서는 그 소리를 쉽게 이상한 언어로 바꾸어 주시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쉽게 심령기도를 하게 되지만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봉사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또렷한 언어가 형성될 수 있도록 목소리와 혀와 턱을 사용하여 주저함 없이 큰 소리로 협력한다.

 

2. 심령기도

처음에는 한 두 단어만 나오거나 턱을 협력하지 않아 또렷한 말이 안 나오는 경우도 있는데 일단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가 나오면 분석하거나 의심하거나 타인을 의식하거나 소리에 신경을 쓰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며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주신 주님을 찬미하는 마음으로 계속하여야 한다. 말을 배우는 어린이처럼 봉사자들이 크게 하라고 하면 크게 하고, 작게 하라면 작게 하도록 한다. 심령기도는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시는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이므로 자신이 자유롭게 조절할 수가 있다.

이상한 언어가 입으로 나올 때 이를 노래로 할 수도 있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입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를 따라 심령기도를 하면 그것이 심령노래가 된다.

 

3. 마침기도와 성가

성령세례를 위한 기도는 심령기도와 심령노래후 "알렐루야", "찬미찬미", "좋으신 하느님" 등 짧은 노래를 함께 부르거나, 봉사자나 참석자가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바침으로써 끝마친다.

 

4. 성령세례를 위한 기도를 받은 후

 

-. 기도와 묵상

성령세례를 받은 후에는 곧 다른 참석자들이 모여 있는 자리로 돌아가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주신 주님께 계속해서 감사와 찬미를 바칠 수도 있고, 지금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자 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자들과 함께 기도한 후에 다른 참석자들이 있는 자리로 돌아갈 수도 있다. 대기 장소로 돌아가면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성서말씀을 묵상하고(로마 12장; 에페 4,17-5,20; 6,10-18; 골로 3,1-21; 1데살 5,12-24 등) 앞으로의 삶에 대한 새로운 결심을 한다. 그리고 기도를 받고 있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 심령기도 연습

모든 사람이 성령세례를 위한 기도를 다 받았으면 함께 모여 심령노래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그룹 전체가 심령노래를 부른다. 심령노래를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경우에는 심령노래에 대한 훈련을 할 수도 있다.

 

-. 마지막 충고

강사나 세마나 봉사팀의 팀장이 마지막 충고를 한다.  먼저 사람마다 각각의 체험을 말하고 의심을 갖도록 하는 사탄의 유혹을 경계하며 등 여러 가지 충고를 한다.

 

-. 마침기도

자유로이 감사기도를 바친다.

 

**. 성령쇄신모임에 대한 이해

 

1. 성령세례의 본질적인 체험과 결과

 

1) 성령세례의 결과에 대한 효과를 보고 받는 유익성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 19장 2절 이하에서 나오는 에페소 사람들의 경험이나 최초의 사도들의 경험으로 보아서도 효과는 성서적으로 인정되었지만, 참여하여 성령세례를 받은 분들에게서 나타나는 열매를 관찰해 보면 잘 알 수가 있게 된다.

2)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주님을 증거하며 자기 사명에 합당하게 봉사하기 위한 능력을 받는다.

높은 영적 수준에서 모든 사람들은 효과적으로, 진리대로 인도할 수 있는 능력을 받는다는 것은 많은 경험을 통하여 인정될 수 있는 사실이다. 필요한 성령의 능력을 다시 분양받고 증가시키며, 사랑과 봉사를 할 수 있는 무한한 자원을 받게 된다. 또한 그리스도께 더 한층 감사하고 찬미하게 되며 주께서 주신 은사를 통하여 의심과 믿음의 부족과 자만을 극복하여 겸손히 봉사와 사랑을 하게 된다. 능력은 각기 다른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1고린 12장). 보다 좋은 열매를 위하여 신자들은 받은 사명에 따라 각각 다른 선물로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각기 다른 사명 안에서 자기의 세계를 위해 지혜를 향상시키고, 성숙시키고, 능력을 개발하는데 있어서 성령세례는 길잡이의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에 성령세례를 받는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3) 교계질서와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교회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교회의 기존 기도문과 전례에 적극 참여하며 영성체를 자주 한다.

4) 이 체험을 통하여 기쁨과 평화 속에,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커지고 공경하고자 하는 지향이 커진다.

5) 성령세례를 받은 후 많은 신자들이 자신의 습관성 폐습을 고칠 수 있었다. 성령께서 은밀한 권고와 경고로 신자생명을 옹호하기 때문이다. 신자생황에 있어서 나쁜 독소를 차츰차츰 제거시켜 준다. 특별히 생활 속에서 자성하는 시간을 많이 갖게 되고, 마음과 생활을 바꿔야 한다는 결정을 은밀히 갖게 된다.         

 

2. 성령쇄신의 한계성

 

1) 성령쇄신은 교회가 소유하지 않은 어떤 것을 교회에 주는 것이 아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성령쇄신이 신학적 실재 면에서 교회에 새로이 가져다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은 성령쇄신의 신학적 기초를 지적할 때 명백해 준다. 교회는 성령쇄신 때문에 교회가 과거에 소유하지 못했던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성령쇄신은 의식계발의 확장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며, 이 의식계발과 기대는 체험 및 전체교회생활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어떤 선물들은 과거 교회 생황에서 예언, 치유, 이상한 언어, 해석 등과 같이 어떤 유형적 방식으로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현재 그것들을 지방교회의 생활 안에서 작용하시는 성령의 정상적인 현시라고 보는 신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유별나거나 특출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매일의 그리스도적 공동체 생활에 속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져야 하며, 이 은사들만이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의 모두가 아니라는 점이 인식되어야 한다.

 

2) 신앙체험은 개인주의적인 것이 아니고 개인적인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령 쇄신운동의 성령을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그러나 이러한 감각적인 체험의 기회가 역으로 부작용처럼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성령쇄신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은사들을 체험하게 되고 그러한 체험을 통하여 공동체로서 하느님과의 개인적 신앙 관계로 인도되었음 알아야 한다. 하느님께 대한 이러한 체험은 공동체적인 성격을 띄고(1고린 14,24), 교회적 성격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적이고 개인적인 특성이 교회의 공동체적인 성격을 지양하고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만을 위한 다든지 사적 및 개인적 성격을 공동체적 성격과 대립시켜 놓는다든지 하는 집단이기주의나 개인주의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분명히 거부되어야 한다.

 

나가는 말-성령쇄신운동의 미래를 전망하며

 

지금까지 우리는 성령쇄신운동에 대하여서, 그리고 성령쇄신운동에서 행하여지는 성령세례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성령 세미나는 성령 안의 생활에 대한 소개로 꾸며져 있으며 오늘날 성령 안의 생활을 하고자 도처에서 밀려오는 많은 사람들을 성령 안의 생활로 인도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성령쇄신 운동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고도 풍성한 삶을 누리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이해의 과정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성령쇄신운동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영성적인 측면에서 어느 정도의 도움이 될 수는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모임이 지니는 한계성도 언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는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고, 하느님께 우리의 영을 들어올리는 것이며, 하느님과 함께 하는 마음의 대화이다. 그러나 성령쇄신운동에서 행하여지는 기도나 성령세례에서 나타나는 것은 앞에서 본 봐와 같이 극히 외향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인간의 내면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움직임에 마음을 내어 맡긴다는 의미도 있을 수 있지만 기도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느님과 인간이 마음으로 나누는 대화인 것이다. 그렇다고 본다면, 성령쇄신운동에서 행하여지는 기도는 일방적인 방향으로서 이해되어 질 수 있으며 극단적으로 말하면 지나친 감정적인 측면으로 기울어 질 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을 수도 있다.

성령쇄신운동에서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 안에서 성령의 현존을 더욱 느끼고 생각하자는 데 있으며 그들의 행동 역시도 영감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깊이 생각해 본다면 모든 기도는 은사적이라고 할 수가 있다. 영의 현존을 직접 느끼지 못할 때도 역시 심연 깊은 곳에는 모든 기도가 성령의 은사성이 내제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성령쇄신운동이 지니는 한계성이라는 것은 성령쇄신운동이후의 문제이다. 모든 기도가 그러하듯이 기도 그 자체로 머문다면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 할 것이다. 기도이후의 신자들의 삶 안에서 그것이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지고 신앙생활을 해 나아가는데 교회와 공동체 안에서 보탬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 상황 안에서 보면 많은 부정적인 요소들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성령쇄신운동을 하나의 운동으로 그치는 데서 오는 한계가 아닐까 한다. 이 성령쇄신운동 역시도 그리스도인의 기도라는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야 되고 구체적으로 삶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올바로 표현되고 증거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 천주교회의 모습은 세계 다른 여러 교회 안에서 주목받는 발전된 교회라고 불려지고 있으나, 이미 세상과 사회의 가치질서 구조에 따라 교회가 끌려가고 있음을 본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활기차고 활력 있는 교회로서 타종파들 보다 왕성한 시대를 구가했다. 그 이유는 1960,70년대 이후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진취적 사회활동과 신자들의 사랑의 열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재 교회가 타종파와 마찬가지로 종교의 익명성의 조짐이 있고 앞으로의 세대 발전에 따라 이런 현상이 더 가속화되리라 예상되고 결국 종교의 한 집단으로 남을 가능성도 지니고 있다. 이에 앞으로의 교회는 지금과 다른 사회 변화와 변천속에서 현세적인 세상 구조에 익숙한 신앙인들이 세상의 엄청난 물질적 공세를 어떻게 견뎌 낼 것이며, 더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견뎌낼 참 신앙인이 있겠느냐는 신각한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한 문제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한국 교회가 아직까지 미숙한 단계에 머물러 있음을 크게 문제삼아야 할 것이다. 우리 교회가 200여 년의 역사를 지나면서 괄목한 만한 외적 성장을 이룩하였으나 내적 성숙에 있어서는 보조를 같이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선교 200주년 전후 갑자기 몰려오던 예비자들에 대한 교리교육의 미흡, 신인 교우들의 성사, 전례에 대한 이해 부족과, 재교육의 부재, 성사생활의 미숙 등으로 주일미사, 판공성사 등 교회생활 불이행자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적지 않은 기존의 신자들이 물질 제일주의,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세상에 대하여 그리고 큰 기대를 걸고 입교한 형제자매들에 대하여 복음적 삶의 한계성과 무력함을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신자 수에 비해 사목자들의 부족으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사목활동의 한계 역시 문제점으로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신앙이 삶으로 표출되는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쇄신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쇄신은 바로 초대교회에서와 같은 성령의 은사적 체험을 바탕으로 성령의 움직임에 의해 건설되리라 본다. 이에 따라 교회의 제도, 전례, 기도, 활동을 포함한 교회의 전반적인 것들이 변화되고 교회는 복음과 복음적 가치를 실현하게 되며,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 빨리 완성되도록 시간을 앞당기고 그 공간을 확장시켜 나가게 될 것이다. 바로 교회는 성령을 통하여 신앙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말씀, 성령체험, 은사, 공동체에 따른 생활과 성령론적 대안을 가지고 미래의 교회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 대안은 우선 각 교회의 구성원 주교, 사제, 신자들 모두의 쇄신을 뜻하는 것이며 아울러 교회의 제도, 조직, 전례, 활동 등 교회 생활 전반에 걸친 쇄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성령론적인 대안을 가지고 미래 교회를 준비한다는 것은 교회 창설부터 지금까지 교회의 여정 중에서 잘못된 것을 스스로 고치고 끊임없는 반성과 생활을 계속한다는 것이고 교회가 본당 그리고 각각의 신앙생활에 구체적으로 접목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 참고문헌

 

1. 단행본

 

박용일, 성령이여 나의 주여, 크리스챤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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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태, 2천년대의 한국교회, 성바오로출판사 1993.

성령세미나를 위한 성서공부와 매일 묵상, 한국 가톨릭 성령쇄신 봉사자 협의회 1988.

토마스 슈프드?, 마음의 기도, 곽승룡 譯, 가톨릭출판사(근간예정).

 

2. 잡지

 

송광섭, "가톨릭 성령쇄신 운동", 신학전망 제67호(1984, 12).

이재을, "성령과 선교의 새바람" 사목 제167호(1992, 12).

이 프란치스코, "성령쇄신의 이해와 육성방안", 사목 제60호(1978, 11).

박재만, "한국천주교회의 선교쇄신 전망", 사목 제177호(1993, 10).-곽승룡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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