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어(조기) 소비 문화 탄생
이상집
한민족 전체 소비문화의 중심에 조기가 일찍부터 자리하고 있었다.
일본인은 한국인의 조기를 보고 대중어라고 불렀다는데, 조선은 신분사회이고 신분사회에 대중이라는 표현을 붙이는 것은 모순적으로 들린다. 아마도 당시 일본인이 말한 대중어의 대중은 근대사회에서 대중 소비나 대중문화의 대중과는 다른 층위를 함축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대중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이 물고기가 귀천이 존재하는 신분사회에서 귀천과 관계없이 소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1820년경 간행된 난호어목지에 따르면, 조기는 그물로 잡는데, 명태와 마찬가지로 많이 잡힐 경우에는 득어여산, 즉 산처럼 잡히기 때문에 배에 다 실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어획되는 어종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라에 넘쳐흘러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 모두 맛있는 음식이라 여겼다고 한다.
20세기 초 일본인의 보고서에 따르면, 조기는 조선인의 기호에 적합한 일용 상찬의 하나이기도 했지만, 제례품이기도 해서, 그것들이 사용되는 계절, 즉 설, 추석명절이 되면 전국의 모든 사람이 일시에 사용하기에 소비가 갑자기 증가하고, 가격은 현저하게 오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5세기 말 편찬된 경국대전의 봉사조는 6품 이상의 문무관은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의 3대까지, 7품 이하는 2대까지, 서인은 단지 부모에게만 제사 지낸다고 규정하였고, 신분에 따른 차등 봉사를 규정하고 있는데 현대 한국인 중에는 조선후기 이후의 전통에 따라 4대 봉사가 모범적인 규범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신분은 법과 사회 경제적 조건을 통해 특정한 집단이 특정한 생활양식을 독점하게 함으로써 유지된다. 간단히 말해 신분사회에서 평민은 돈을 벌기도 어렵겠지만, 돈을 벌더라도 왕처럼 입거나 행동해서는 안 된다. 법을 통해 신분에 따라 소비품을 제한하는 것은 신분제 국가에서는 매우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국가신분제를 지향했던 조선에서 관직에 따라 차등봉사를 규정해 신분을 나눈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조선은 제사를 올리는 대상뿐 아니라, 신분에 따라 제물의 종류와 가짓수도 제한했다.
15세기 말 국조오례의는 대부 사서인 즉 관료와 서민의 시제, 기일, 속절 즉, 설, 단오, 추석, 동지 제례시 올리는 음식 규범을 제시하고 있다. 2품 이상의 경우에는 앞에서부터 1행에 과일 다섯 가지를, 2행에 채소 세 가지와, 포 말린 것과 절인 것을 놓고, 3행에는 면, 떡, 어, 육, 구운 간을 각기 하나씩 놓고, 제4행에는 밥, 일종의 국인 갱, 수저를 한 쌍을 놓고, 5행에는 잔을 6개 놓았다. 이에 반해 6품의 경우에는 제물이 5행이 아니라 4행으로 줄어들면서, 제물의 종류는 그대로이지만 가짓수가 조금씩 줄어 들고, 9품 이상의 경우에는 제물이 4행으로 유지되지만, 종류와 가짓수가 줄어들면서, 떡, 채소가 사라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관직이 없는 서인의 제물에서 9품 이상과 다른 점이 발견되는데, 바로 육고기와 함께 어물이 사라지게 된다.
조선 초기에 조선왕조는 신분에 따라 서민에게는 육류나 어류를 제례품으로 사용할 수 없게 금지했다. 반대로 이는 사족은 신분에 맞게 육류나 어류를 제례품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조선 초기부터 시작된 유교적 의례형식의 확산은 제례품으로서 어물소비를 촉진시켜 어업의 발전을 뒷받침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15세기 말 국조오례의 편찬과 시행을 계기로 국가 단위의 제사가 확립되었다. 이에 따라 각 군현을 비롯해 여러 지방 정부에서도 일 년에 수차례 정해진식에 따라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지냈고, 수천 개에 이르는 서원과 향교에서도 선현 봉사, 춘추 제향 등 다양한 형태의 제사가 수행되었다. 신분에 따라 제사를 제약했음에도, 전국적으로 유교적 제사가 확대된 것은 분명하였다. 조기 등의 해산물 소비를 확대한 것은 조선 후기에는 주자가례와 소학 등이 보급되어 관혼상제가 일반화되고 표준화되기 시작한 것과 관련이 깊어 보인다. 주자가례는 국조오례의와 달리 신분에 따른 차등봉사를 규정하지 않았다. 육류, 어류 등 의례에 사용되는 물종은 규정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종류를 특정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는 해산물만 사용하면 되는 것이 무엇을 사용할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아무 물고기나 마음대로 제사상에 사용했던 것은 아니다. 언제부터인지 그리고 왜인지는 아직 대답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조상제사에 문화적으로 선호하던 물고기가 조기였다는 사실이다. 조기를 필두로 북어, 대구, 미역 등 몇몇 특정 해산물은 전국지방 장시로 유통되어 제수품이나 일용 상찬으로 널리 소비되었다. 특히 조기는 조기가 어획되는 어장과 관계없이 전국적으로 제례품으로써 소비되고 있었다.
조상제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대표적인 조직은 종중으로 종중의 주요한 제사는 종법제도에 근거해, 한 가문의 시조로부터 큰아들로 이어지는 종가에서 주관한다. 종가나 종중은 앞서 조선중기 이후 4대 봉사를 넘어, 가문의 시조 이하 조상들의 제사를 장자 집안이 맡아 지내면서 생겨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종법제도를 친족 집단이 유지하면, 자연히 종가가 존재하게 된다. 집안이 오래된 경우에 종중의 규모가 매우 크며, 성씨의 시조를 중심으로 묶인 대종회 혹은 종친회도 운영되고 있다. 내륙이든 해안이든 관계없이 37사례에서 제례품으로 조기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기가 제례품으로서 상당히 보편적으로 소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단 조상제사뿐 아니라, 마을제사에도 조기가 사용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마찬가지로 조기가 산출되지 않는 동해안 마을의 제례품을 조사한 보고서가 있는데, 조기는 동해안에서 어획되는 명태 다음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어종이었다. 특히 경북 내륙지역인 안동의 마을 제사에서도 두 번째로 많이 사용되던 어종이 조기였다. 조기가 전혀 산출되지 않는 동해에서 그것도 내륙지방에서도 조기가 선호된 것을 보면, 조기는 그야말로 아주 오랫동안 지역적 차이나 신분을 넘어서 한국문화가 보편적으로 선호했던 물고기임이 틀림없다.
조선 후기에는 주자가례와 소학 등이 보급되어 관혼상제가 일반화되고 표준화되기 시작하였다. 주자가례는 조선전기 국조오례의와 달리 신분에 따른 차등 봉사를 규정하지 않았다. 또, 육류, 어류 등 의례에 사용되는 물종은 규정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특정하고 있지는 않았다. 즉, 어류나 육류, 채소 등을 사용하면 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사용할지는 규정하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제사상에 아무것이나 마음대로 올렸던 것은 아니다. 조상제사에 대중어라고 부르는 특정 해산물이 문화적으로 선호되었다. 이는 조기를 필두로 북어, 대구, 미역 등의 해산물이 전국지방 장시로 유통되어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된 것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조상은 제사를‘성찬’보다 정성으로 이해하며 평소 즐기던 음식이나 집에서 먹는 반상처럼 깨끗하게 준비하는 취지가 강조된다. 대중어(조기)는 제사나 차례에서 자주 쓰이는 생선으로 소개되며, 지역에 따라 조기, 명태, 민어 등 준비하는 생선이 달라질 수 있다. 제사상 진설은 지방, 가문, 지역 관습에 따라 차이가 커서 대중어 사용이보다 관습적 선택으로 보는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