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관(李殷官)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배뱅이굿"의 예능보유자이다.
1917년 강원도 이천(伊川)에서 태어나 1931년 철원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21세 때 철원에서 열린 콩쿠르에서 민요부분에 1등으로 당선되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황해도 황주로 가서 "서도소리"(西道소리)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서도소리 가운데 특히 "배뱅이굿"에 흥미를 느껴 즐겨 불렀다.
"배뱅이굿"이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50년대말
그가 영화 "배뱅이굿"과 각종 연예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음반활동을 활발히 하면서부터였다.
"배뱅이굿"은 1900년경 용강군(龍岡郡) 출신의 김관준(金寬俊)이 처음 불렀고,
그의 아들 김종조(金宗朝)에게 전해졌으며 최순경(崔順慶),이인수(李仁洙)등이
부르게 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이은관(李殷官)은 이인수(李仁洙)에게 사사받았다.
그는 "신불출 만담일행"과 전국순회공연을 가졌으며 1941~45년에는 무대생활을 했다.
1946년에 "대한국악원"에 입단했고 "민요국극단"을 조직하여 운영했는데 이때 주로 "배뱅이굿"을 공연했다.
1968년 국악협회 간사를 맡았고 같은 해에 민속예술학원을 설립하고 학원장으로 취임했다.
1975년부터 국악협회 이사를 맡았으며 1984년 10월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어
"김경렬","김경선" 형제에게 전수했다.
원래 "배뱅이굿"은 무가조(巫歌調)와 구슬프고 처량한 성조(聲調)가 많았는데,
그의 "배뱅이굿"은 무대예술화되면서 무가조(巫歌調)가 거의 빠지고
민요조(民謠調)가 강하며 재미를 더하기 위해 사설과 창법도 새롭게 도입되었다.
또한 음탕한 내용이나 욕지거리 부분은 일부 수정하기도 했다.
-Daum백과에서-
내가 "이은관"선생을 처음 뵌 때는 아주 어렸을 때인 국민학교 시절이다.
당시 상왕십리에 있는 "광무극장"에서 이은관선생의 "배뱅이굿"을 공연했다.
당시 아주 친했던 동네친구 할머니가 무속인이여서 "굿"이라는 것에 대해 그리 거부감이 없었다.
어떨 때는 굿하기 전날 준비과정부터 하나 하나 보기도 했다.
지금도 작두타다 발을 베인 무속인의 기억은 아주 생생하다.
"배뱅이굿"의 내용이나 대사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꽤나 흥미있게 본 기억이 난다.
그리고 공연이 끝나자 모두가 나와서 "창부타령"을 부르며,
신문지에 시루떡을 싸서 관객에게 던져주는 서비스까지 했다.
"굿을 보려면 계면떡 나올때까지 봐라"라는 속담을 그 나이에 알았다.
그 떡이 "계면떡"이였던 것이다.
형님들도 "배뱅이굿"에 관심을 가져 "배뱅이굿" 레코드판을 사오기까지 했다.
"왔구나~~ 왔소이다~.
불쌍히 죽어서 황천 간 배뱅이 혼신이
"피양"(평양)사는 박수무당의 몸을 빌고 입을 빌어 오늘에야 왔소이다~.
오마니(어머니)~~ 우리 오마니~"
이것이 당시 "배뱅이굿"의 첫 소리다.
그 "배뱅이굿"덕분에 친구 할머니가 굿을 할 때 사용하는 말의 뜻도 어느 정도 알았다.
나이가 들면서 부터 점차 "배뱅이굿"은 내게서 멀어져 갔다.
그래도 가끔은 그 대사 내용이 생각이 날때가 많았다.
일예로,
"앞다리 선각도 나는 좋아, 뒷다리 후각도 나는 좋아~" 등이다.
그런데 근래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이은관"선생의 타계 소식을 접했다.
선생의 제자분이 마지막 사진과 함께 운구모습을 사진을 찍어서 올린것이다.
그 사진과 그내용을 그대로 옮겨서 나대로의 추모를 해 본다.
지난 2014년 3월 12일 배뱅이굿을 부른 "이은관" 옹이 9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은관" 옹의 부음소식에 가슴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서산낙조(西山落照) 떨어지는 해는 내일 아침이면 다시 돋건마는
황천(黃泉)길이 얼마나 먼지 한 번 가면은 못 오누나.”
배뱅이굿의 첫 대목이다.
배뱅이굿의 창조(唱調)는 관서지방 무당들의 노랫소리 그대로이다.
이 배뱅이굿은 최근세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 전승되는 것은
평안도 김관준 계통을 이은 이은관(李殷官) <배뱅이굿>과
황해도 문창규(文昌圭) 계통을 이은 양소운(楊蘇云) <배뱅이굿>이 있으며,
이은관 <배뱅이굿>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로 지정되었다.
반주는 장구 하나를 쓰는 것이나, 바라 · 피리 · 젓대 · 해금을 쓰기도 한다.
장단은 굿거리 · 볶는타령 · 막장단 · 중모리(산염불장단) 등으로 되어 있고,
소리는 수심가토리가 주가 되어 경토리(京畿民謠調) · 메나리토리도 쓰이는데,
양소운 <배뱅이굿>에는 육자배기토리가 끼어 있다.
<배뱅이굿>에는 <산염불> · <자진염불> · <서도무가> 등의 서도민요도 있다.
배뱅이굿을 부른 서도소리 무형문화제인 이은관 옹을 생각하면 내 유년의 기억에 가장 먼저 떠오른다.
배뱅이굿을 처음 들은 것은 8살 정도였다.
어느 날 이웃집 할머니 집에서 배뱅이굿이 들려왔다.
전축에서 나오는 그 소리는 다른 세상이 열리는 충격이었다.
온 마을에 다 들릴 정도로 크게 튼 음악들은 "배뱅이굿"과 "회심곡"이 주로 나왔다.
계집아이는 마당에서 친구들과 고무줄놀이나 사방치미 놀이를 하다가도 이웃집에서 "배뱅이굿"이 들려오면
슬그머니 놀이에서 빠져나와 더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뒤란 담벼락에 기대앉아 한없이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가끔 어른들에게 들키면 어린 게 청승이라는 지청구를 듣곤 했다.
"배뱅이굿"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해도 최 정승의 딸 배뱅이가 18살에 상사병으로 죽자 부모가
딸 배뱅이의 넋이라도 불러보고 싶어
딸 넋을 불러오는 사람에게 재산의 절반을 나눠주겠다고 했다.
팔도의 무당이 오나 배뱅이의 넋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이 마을을 지나던 평양의 건달이 마을 할머니에게 배뱅이가 죽은 사연을 듣고
최 정승의 집으로 와서 가짜 무당행세로 배뱅이 넋을 부른 듯 속여서 최 정승의 재산을 받아가는 내용이었다.
"배뱅이굿"을 들으면 그 속에 구슬픔과 흥겨움이 함께 있다.
부모은공을 생각하게 했고, 저승에 가서 권선징악을 하는 장면들에서는
어린 마음에 죽음을 무서워하곤 했었다.
나이가 들면서 "배뱅이굿"을 해석하는 방식도 바뀌었다.
처음에는 가짜무당에게 속는 마을사람들과 배뱅이 부모가 어리석어 보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엉터리 박수무당이 배뱅이 부모를 위로하고 떠났다는 생각을 했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잃고 그 부모에게 재산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가짜 배뱅이 넋이 와서 하고 싶은 말 다하는 것을 보고 부모가 울고 나오면서
기둥뿌리라도 다 뽑아가거라! 고 했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바탕 울고, 웃고 세상사를 너그럽게 볼 수 있던 한 판 굿이었던 배뱅이굿은
언제 들어도 깊은 해학에 찬탄을 금할 수 없다.
배뱅이굿을 듣고 자란 계집아이는 이제는 중년에 이르렀다.
이은관 옹의 마지막 모습을 담으면서 유년이 사라지는 듯 깊은 상실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힘든 일이 있거나 마음껏 울고 싶을 때 "배뱅이굿"을 들었기에
이분에게 늘 신세를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발인은 지난 14일 한양대병원 장례식장에서 했다. 장지는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시립공원 묘지였다.
발인이 끝나고 용미리 시립공원에 도착했다.
꽃상여가 준비되어 있었다.
상여는 고인의 제자들이 메고 상여소리 또한 제자들이 맡았다.
상여소리를 하는 제자는 서도소리 보유자 무형문화재 "김경배"(59년생) 씨와
21살 때부터 상여소리를 한 "안성근"(54년생)씨와 여러 제자들이 불렀다.
스승의 마지막 가는 길에 제자들이 정성을 다했다.
제자 한국남(47년생)씨는 “선생님은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시고 정이 많으셨다.
많이 울었다. 내 손으로 잘 모시려고 한다.”고 했다.
상여를 멘 제자 중 최고령자는 최죽선(37년생)씨로 77세의 나이로 스승의 상여를 맸다.
양진희(57년생)은 “선생님은 배뱅이굿을 부르시는 것 외에 창작곡을 많이 만드셨다.
모든 악기를 하셨다. 섹스폰과 대금 등 못 하시는 게 없었다.
뭐든지 새롭게 배우는 것을 좋아하시고 어린애 같은 분이셨다.”고 회상했다.
이광수(49년생) 씨는 “선생님과 함께 창작곡으로 녹음을 하기로 했는데 돌아가셨다.” 며
“이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 몰랐다.”며 슬픔을 표했다.
상주 이승주(62년생) 씨는 “아버님은 영어공부를 하셨다.
어렸을 때 아버님과 같이 걸어가면 어린이들이 아버님 이름을 막 부르는 것이 싫었다.
아버님은 가족보다도 배뱅이굿이 먼저였다.
아버님 가시는 길에 제자들의 진심어린 모습을 보면서 아버님이 잘 사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러분들께 고맙다.”고 했다.
이은관 선생의 마지막 길을 기록하면서 마음이 남달랐다.
유년을 풍성하게 했던 고인에게 고마움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이은관 선생의 수제자들이 달공을 하다 ©최영숙
97세에 세상을 떠나고 80여 년을 서민들의 애환과 삶속에 녹아나는 창을 불렀던
고인의 마지막길이 생각보다 간소했기 때문이다.
"아이돌"의 부모가 돌아가도 온갖 방송국의 취재열기로 북적거렸다.
그런데 한결같은 길을 걸은 분의 마지막 길이 어찌 이리 쓸쓸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긴 세월을 살아낸 예인(藝人)에 대한 예의가 부족했다.
그러함에도 제자들의 스승을 떠나보내는 정성이 지극했기에 이은관 선생은 세상 마지막 떠나는 길이 서운치 않았을 것이다.
77세 제자가 상여를 메고 나이든 제자들이 사랑해요 하트를 그리며 스승을 떠나보내고
스승의 무덤에 엎드려 땅을 치고 우는 제자들을 보면서 이은관 선생이 어떻게 살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무덤을 떠나면서 고인의 영면을 기원하면서 "그동안 고마웠습니다."고 깊게 인사를 드렸다.
어디선가
"왔구나, 왔소이다. 황천 갔던 배뱅이가 왔소이다.”
하는 배뱅이굿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https://youtu.be/L7ajaW2FN3Y?si=aWym-_7tWoVxd5Ee
너무 늦었지만 선생의 명복을 빌어 본다.
또한 이렇게 사진까지 올려 선생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알려주신 "최영숙"님께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