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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승리 / 무에서 유를 창조한 김광영의 삶
내 삶의 체험기 요약편
인간승리라하면 보편적으로 직위가 높다던지 재물이 많다던지 특정한부분에서 출세한 사람들등 언청난 사람들을 일커러 말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인간승리는 이와는 좀 동떨어진 것으로 자신이 세상에 나와 어떤일에 종사하고 종사하는 일에 만족했다면 바로 이것이 출세요 인간승리라 생각 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람.
나는 세상에 태어날때부터 선천적으로 부족함을 많이 지니고 태어낳다.
그 첫째가 건강이다. 나는 어린 유년기를 빈약한 건강으로 언제나 나약했고 건강이 나약하다보니 마음도 약해저 어떤 일이던 용기가 없어 소극적인 행동을 하였던 아이, 이것이 바로 나의 유년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더구나 이런 유년기를 6,25전쟁으로 인한 삶의 기로에서 쫓기고 숨어가며 웅쿠려 생활한 세월이 나를 장식했다 생각한다면 나를 위한 유년기 생활은 없었다 해도 과언 이 아닐듯 싶다.
내 삶의 이런 모든 악재는 생활의욕을 떨어트렸고 사회교육등 어떤 혜택도 받지못했다 할 정도로 빈약했다 할 것이다.
이런 유년기를 거처 청년기를 접어 들었고 1963년12월12일 육군에 입대했고 논산훈련소 연무대28연대 2중대2소대에서 훈련을 맞췄으며 25사단 포병632대대 작전과 행정3과 에서 교육계로 근무를 하다 전문교육대를 수료하지않았다는 이유로 지휘검열을 대비하여 B포대로 전출하여 B포대교육계로 전역시까지 근무했다.
이렇듯 빈약했던 나의 성장기가 나를 인간답게 살아가는 과정을 배우고 경험하는 계기가 된것은 군생활 이라 할수 있다. 남들은 군생활 이라하면 그쪽방향으로는 소변도 보지않는다는 속어가 탄생할정도로 기피하고 싶은 생활이라 하지만 나에게 할수 있다는 하면 된다는 긍지외 힘을 준곳은 바로 30개월의 군생활 이라 할수 있다.
군전역후, 나는 삶을 개척하기위해 모점포의 점원생활도 얼마않되는 기간 이지만 경험했고 자전거로 배달생활(당시는 비포장도로)로 시작하여 장사경험을 쌓은후, 작은 잡화,식료품 도배점포를 개업하여 각지역(충주,제천,괴산군 일대)를 차량으로 배달하는 과정을 거첬고 후 잡화상을 페업하고 지업사를 개업 지금까지 경영하고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젊은시기에는 가족과 살기위해 생업에 전염하느라 정신이 없었으며 어느정도 안정을 찾은후, 지역봉사에 나서 일하는 계기를 바련한 것이 오늘날 내가 내지역인 충주홍보를 위해 모든것을 바처 봉사하는 결과를 만들었으며 지금도 나는 즐겁고 기쁜마음으로 지역홍보에 최선을 다하는 홍보맨으로 탄생했으며 지금의 나는 내가 하는 모든일에 자신감이 충만해 있다.
인생이란 많이 변하는 것인가 이는 나를 두고 하는 말 같기도하다.
유년기를 빈약한 건강으로 용기없고 패기없는 생활 이라 할까 남에게 말도 잘 걸지 못할 정도로 건강과 마음 모두가 나약하기만 하여 내의사를 제대로 발표하지도 못했던 내가 지금의 나는 국회의원이나 시장등 정치권에 쓴소리도 잘하고 옳지못한 일에는 끝까지 바로잡으려 하고 대중앞에는 가장 선두에서 활동할수있는 그리고 자신이 하는일에 최고를 추구하는 이런 사람이 됐다.
그래서 나는 나를 잃커러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람이라고 자평한다.
빈약체질에서 건강체질로 바꿔준 배드민턴
내삶의 체험기 에서 전체적인 삶의 과정을 요약해 보았지만 내 자신이 지금 이렇듯 활발하게 지역홍보를 힘차게할수 있도록 만들어준 과정에는 내가 봉사일을 할수 있도록 힘을주고 자신감을 준 가장 큰 원인은 건강 이라 할수 있다.
건강이 나를 지켜주지 않았던들 마음이 건전할리 없고 마음이 건정하지 않았던들 내지역 충주홍보를 위해 열광적으로 봉사활동을 할수 있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렇듯 배드민턴은 빈약했던 필자의 건강을 강인한체질로 바꿔 주었고 강인한 체질은 내게 용기를 주었으며 하면 된다는 의지를 준 내 인생에 길잡이요 원초적 요인이 된 것이다.
내가 배드민턴을 생활체육으로 갖게된 계기는 병원에서 의사의 권유 때문인데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제대후 약간의 점원의 과정을 거처 금광상사라는 상호로 작은 도매점포를 운영하였는데 나의 빈약했던 건강상태가 군생활이라는 과정을 거처 어느정도 정상체질로 돌아 왔으나 제대후 점포를 운영하면서 제때에 식사를 하지못하고 어려운 환경속에서 살기위한 분투를 하다보니 다시 나의건강은 최악의 상태가 됐었다.
하여 당시 충주제중의원의 (고)이낙진박사를 찾아가 간단한 건강진단을 받았는데 박사는 말씀이 어떠한 병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생활체육을 권고해 주셨다. 당시 나는 점포를 운영하면서 온종일 극한노동을 하고 있던 차라 특별히 운동을 따로할 필요가 있는가 질문했었는데 의사의 말씀이 명언 이었다.
박사님의 말씀인즉, 노동으로 활동하는 것은 먹고살기위한 활동으로 실으나 좋으나 해야만되는 활동이나 운동은 나의 건강을 위해 기븐좋게 활동하는 것이므로 그 차이는 대단 하다는 조언 이었다.
이 조언에 따라 운동으로 배드민턴을 시작하게된 계기가 되었는데 처움 배드민턴을 치기위해 찾아간곳은 충주예선공원 이었다. 당시공원내에서는 5,60대의 노익장들이 모여서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는데 내나이 30 후반이었으니 이분들의 운동하는 모습은 내게 상당한 감동을 내게 주었다.
예성공원(예성배드민턴클럽)에서 시작한 배드민턴은 3년후, 충주여중체육관의(충주클럽)으로 옮겨 운동을 계속 하게 되는데 당시 예성클럽은 공원야외클럽으로 노익정들이 모여 운동을하는 클럽 이라며 충주클럽은 실질적인 충주배드민턴의 원조클럽이자 젊은층으로 구성된 전문클럽 이었다.
충주클럽으로 옮겨 생활체육 배드민턴을 새롭게 시작한 나는 배드민턴이란운동에 그만 푹빠저 매료돼 버렸으며 일년365일중 명절때와 외박시를 제외하고는 하루도 운동을 거르는 일이 없을 정도로 배드민턴이란 운동에 푹,빠저 버린 것이다.
또한 배드민턴을 치면서 타지로 배드민턴경기에도 참여 하게 되는데 내자신이 타지역 상대선수와 운동경기를 한다는 것도 흥미었고 대회 경기에서 메달을 땃을땐 세상을 얻은것같은 줄거움에 도취 하기도 했다.
이렇듯 열심히 운동을하여 각종배드민턴경기에서 메달을따고 우승을하고 하다보니 어느덧 배드민턴은 나의 일부가 되었으며 내삶의 전부가돼 있었다.
나는 살기위해 장사를하고 노동을하였으나 이런것들은 나와 내가족을 위한 삶의 현실 이었으나 배드민턴을 생활화 하면서부터는 내게 큰 변화가 일어낳다.
배드민턴을 치면서 각종대회에 클럽대표로 참여하여 메달을 따고 충북도민체육대회 선수로 참여하여 우승을 하는등 전적을 올리는 이런 세월을 계속하다보니 배드민턴은 나와는 분리할수 없는 나와는 한몸이 되었으며 내게 배드민턴을 빼고는 나라 할수 없을 정도가 됐으며 성적을 올리다보니 서취도도 높아저 욕심을 갖게도 됐다.
욕심이란 것은 내인생에 나와 함께하는 부분에서 최고가 돼야겠다는 막연한 꿈 같으면서도 내 의지를 한 것 높혀주는 계기가 되기도 한 것이라 할수 있다.
하여 내가 가장 먼저 추구한 욕심은 배드민턴 나와의 동급의 각종경기대회에서 가장 실력있는 최고가 돼야겟다는 욕심이었는데 나는 이런계획을 세운후, 각종대회에서 120여개의 메달을 획득하는 실력자가 됐으며 클럽에서 가장봉사를 잘하는 최고의 자리를 강구한뒤 클럽총무를 거처 충주클럽제16대회장과 충청북도부회장에 취임하게 된다.
또한 실적으로는 충주시와 교섭하여 도민체전시 충주시와 중원군을 대표하는 선수를 출전시켜 우승을 함으로서 관에서 훈련비조로 지원을받은 훈련비를 클럽운영비로 활용 하는 운영의 미를 보였으며 직무역임시 많은 동호인들을 영입하여 클럽활동을 활발하게 운영 하였다.
그후, 배드민턴클럽의 변화에따라 충주배드민턴클럽이 1966년 임병구초대회장으로 창설한뒤 충주단일클럽으로 활동해 오다 1993년 클럽내 젊은층들이 충주공고체육관으로 계명클럽이란 클럽명으로 삶림을 남으로서 충주배드민턴은 단일클럽에서 다클럽시대로 변환하게 됐다.
이로부터 10년후, 충주배드민턴은 다클럽시대로 발전했고 드디어 2003년 충주배드민턴연합회가 창설 하게된다. 연합회창설 초대연합회장엔 충주클럽19대회장 이었던 연규찬씨가 선임되었으며 이후 2.3.4대연합회장에 김학선, 5대연합회장에 이준영씨. 2015년 1월19일 제6대연합회장에 채희천씨가 연합회장에 취임하게된다.
1966년 충주에배드민턴이 들어와 49년이란 긴 세월이 지남에 충주배드민턴은 괄목할만한 발전을 보여 현재 32개클럽에 1,500여 동호인이 활발히 생활체육으로 배드민턴을 즐턴하고 있으니 감개가 무량하다.
그러고보니 내가 충주배드민턴클럽에 몸담은지도 어언33년 예성클럽활동3년까지 친다면 36년이 되었으니며 현재 활동하고있는 배드민턴동호인중 가장 배드민턴 활동을 오래한 동호인이 됨으로서 현재 배드민턴을 즐턴하고있는 동호인중 최 고참 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충주클럽의 충주배드민턴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배드민턴을 1966년 부터 충주지역에서 즐턴함으로서 충청남,북도에서 가장 배드민턴역사가 오래된 기록을 지니고있는 클럽으로서 충주배드민턴연합회의 자랑이자 긍지인 것이다.
지금 충주에는 노년층을 중심으로 실버클럽이 조성되어 활발하게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고 필자도 실버클럽에서 즐턴을 하는것이 좋을듯도 하나 충주배드민턴동호인의 가장 고참으로서 충주의 뿌리를 갖고있는 원조클럽인 충주클럽을 떠날수없다는 긍지 때문에 충주클럽에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배드민턴으로 하여금 건강을 찾았고 삶의 활력을 찾았으며 남들이 노년이라 하는 나이에 젊은이 묻지않게 활발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고 긍지도 갗고 인정도 받았으니 내가 현재 충주홍보라는 이름하에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것도 늦은나이에 젊은이들과 함께 생활할수 있는 것도 모두 배드민턴이 내게 앉겨준 큰 보배라 할 것이다.
내고장 충주를 위한 홍보에 참여하다.
나는 지역홍보를 위해 아름다운 충주산천을 찾아 사진을 찍고 각종행사에 참여하여 행사내용들을 취재하여 내가운영하는 각종 홍보사이트에 글을 올렸고 충주시블로그와 충청북도블로그 기자로 활동 하면서 지역 홍보글을 작성 하는등 지나친 극성을 부렸다.
충청권 신행정수도 입지홍보
내가 지역홍보에 참여하기 시작한 계기는 참여정부시절 당시 노무현대통령은 균형발전정책으로 수도권에 몰려있는 과밀현상을 막고 전국균형발전을 위해 충청권에 신행정수도를 건설한다는 정책을 수립하고 충청권에서는 어느지역이 신행정수도로 가장 적합한가 라는 과제를 가지고 홍보에 들어 갔으며 정부에선 "신행정수도" 홈을 개설하여 지역별로 적극적인 홍보전에 돌입 했다.
당시에 신행정수도 홈에 충주홍보를 하게 된것을 시작으로 충주를 알리기위한 홍보전에 돌입했는데 홍보전은 상상을 초월한 열전을 벌렸었다. 당시 홍보전에 돌입한 지역을 대충 나열해 보면 충북에서는 오송.충주. 음성진천.영동,옥천 등이 참여하여 홍보를 했으며 충남에선 대전,계룡. 연기,장기. 천안 등에서 홍보전에 나서 불붙는 열전을 벌렸다.
이대열에 충주홍보를 하기위해 참여한 나는 시간이 허용하는한 온종일 신행정사이트에 홍보글올리는것으로 집중했으며 얼마 않되는 홈운영기간에 게시글 500여편이 넘는 홍보글을 올리는 열성을 보였다.
당시 나보다도 더 극성을 부린 서울분이 있어 소개를 한다면 익명은 "홍익인간" 이란 명으로 충주홍보에 적극성을 보인 분이있었는데 이분이 올린글은 1000여편이 넘을 정도었으니 감히 상상할만 하다.
이분은 충주시청을 방문하여 나와의 대면을 신청했고 인연이되어 여러번 이분이 충주를 방문하여 함께 식사를 하는등 유대를 갖기도 하였는데 내가 홍보글을 이렇듯 열심히 올린데에는 "홍익인간" 이분이 함께 해 주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 이다.
충청권 신행정수도 입지를 홍보하기위해 시작한 나의 홍보활동은 신행정수도 입지선정에선 패배를 맛 보았으나 지역홍보에 발동이 걸린 나의 열정은 지금까지는 시작일 뿐이었다.
충주기업도시,혁신도시 유치를위한 홍보
참여정부에서는 신행정수도 입지가 선정되자 균형발전정책의 다음단계로 기업도시와 혁신도시유치 이었습니다.
먼저실행한정책이 기업도시 인데 충청북도에서는 충주가 기업도시유치를 신청하여 입지유치를 위한 무한경쟁에 돌입했다.
당시 전국에서 기업도시를 신청하여 홍보전에 들어 갔는데 기업도시는 정부에서 모든선정과정을 정했으며 반면 혁신도시는 정부에서 직접 선정하지않고 입지여건및 자격기준을 정한뒤 입지선정은 광역단체인 시도지사가 정하도록 방침을 정했었다.
원인은 1개시도에서 1개의 혁신도시를 건설한다는 방침에 따라 지역장인 시도지사에 입지유치권을 이양한것 같은데 역으로 생각해 볼때 기업도시를 정할때 낙마한 지역에서 정부에대한 비난이 심했음을볼때 정부에서 정한다는데 부담을 느껴 광역단체장에 입지선정권을 이양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찌됐던 먼저실시된 기업도시입지선정을위한 홍보전은 치열했고 충주시도 충주시장을 위시한 충주시민들의 동참하에 각자의 위치에서 각고의 노력을 하했다.
충주기업도시는 충주시민의 열의에 힘입어 유치에 성공이란 업적을 이뤘지만 유치를위한 홍보전이나 노력은 모든정열을 다쏫을정도로 치열했는데 충주기업도시유치는 입지여건이 타지역에비해 월등한 여건을 지니고 있었기에 유리한 과정을 거첬다.
충주기업도시가 가장 경쟁상대로 신경을썼던지역은 이웃인 원주기업도시 이었다.
원주는 충주와 인근에 접해있어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입지선정을위한 예비검정에서 충주기업도시가 전체신청도시의 2위로 우수지역으로 선정됨으로서 유치에 성공을했고 원주기업도시도 함께 선정됐는데 현재 당시함께 기업도시를 유치했던 지역중 충주기업도시가 가장 선두에서 성공한 기업도시로 꼽히고 있다.
충주가 가장 많은 심혈과 고통을 격으며 유치하려고 힘썻던 혁신도시유치는 당시충북지사의 아니한 발상으로 막말로 죽쒀 개준꼴이 돼 버렸는데 당시에 정부에선 충청권은 신행정수도가 선정됐기 때문에 혁신도시에선 배제한다는 정책을 발표 했었다.
이에 충주시에서는 신행정수도가 충청권에 선정됐긴 했지만 충주와는 먼거리에 위치해있어 영향권이 아니며 오히려 전주보다 먼거리에 있으므로 충북을 배제해서는 않된다는 의견을 제출했고 이릉성사시키기위해 대단위 상경시위를 포함한 각고의 노력하에 충청권에도 혁신도시를 배정하겠다는 협약을 받았는데 어처구니없는일은 충주에서 상경집회등 각고의 노력을 할 땐 뒷짐만 집고있었던 타지역들이 충북혁신도시가 배정되자 모든지역에서 서로 혁신도시를 유치하겠다고 경쟁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이런 각지역들의 유치경쟁은 그렇다 하더라도 문제는 당시입지선정을 담당했던 충청북도의 아니한 결정이다.
본래 정부에선 혁신도시입지여건으로 성공을위해 1도에 1개의 혁신도시건설.
성공여건으로 산,학,연의 삼박자를 갖춘 지역이어야 한다 라는 조건을 발표했다.
정부에서 정한 내용대로라면 충청북도에선 이런여건을 갗춘지역은 청주와 충주 두지역밖에 없으며 청주는 혁신도시입지에서 제외된 지역 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1순위는 충주 뿐이었기에 큰 기대를 갖었다.
그러나 경과는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충북혁신도시로 선정된 지역은 음성,진천이 선정됐고 2위로 제천, 충주는 3위로 제외 됐으며 반드신 선정점수를 발표하게되었던 규정을 위반하고 선정점수를 비공개로 정했던 것이다.
충북도는 여론분열을 막기위한 조치라 발표 했지만 이는 가식일뿐 실제로는 발표를 할수 없었던 것이다.
모든여건상 당연히 충주많이 혁신도시로서의 자격이 있고 타지역은 자격자체가 형성되질않았기 때문이다.
진천,음성을 혁신도시로 선정한 내심은 인구가많은 청주권을 의식하여서 었으며 제2혁신도시로 제천을 정했는데 이는 도지사의 고향이라는 의식때문이 었던 것이었다.
그런나 당시 혁신도시규정에 1광역단체에 1개의 혁신도시 방침이 정해젔기 때문에 고향사람을 눈속임한 치열한 방법 이었던 것이었다.
충북에 제2혁신도시가 않되는 이유는 충북혁신도시가 지정되기 먼저 경남도에서 진주에 혁신도시를 ㅁ2혁신도시를 지정발표했으나 정부방침에의해 무산됐기 때문이다. 충북혁신도시라는 말로는 그럴듯 했으나 그규모를 볼때 경남의 16/1밖에 않되었기에 충북의 제2혁신도시란 말도 않되는 고향을 기만한 저질 쇼었기 때문이다. (제천제2혁신도시는 후에 무산됐음)
당시 이런과정을 소상히 알고있음은 처움부터 끝까지 유치홍보에 최선을 다해 왔었기에 많은날자가 지나갔음에도 아직것 생생한 것이다. 당시필자는 충주혁신도시를 유치하기위한 홍보전으로 각사이트(충북도청,건설교통부,국가균형발전위원회, 청와대, 심지어는 혁신도시대상기업체 게시판까지 홍보글과 건의글을 올렸으며 그 증거문서의 일부는 지금까지 보전되어 있다.
아름다운 충주를 알리기위한 홍보의 길잡이
내고장 충주발전을 위한 홍보를 시작하면서 신행정수도입지선정과 혁신도시유치는 헛 수고로 돌아갔고 충주기업도시유치는 성사됨으로서 마음의 위로를 갖었지만 내가 지역홍보를 시작하면서 가장 큰것을 얻었다면 보잘것없는 필자가 내고장충주를 위해 무엇인가 할 일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일은 정부정책에 충주의 힘을 보태주는 일을 했다면 이제부터는 내 스스로 충주를 위해 할 일을 찾는 것이었고 그일이 바로 아름다운 내고장 충주를 알리고 홍보하여 많은 관광인파가 충주를 찾아오게 하는 그일의 선두에 내가 서야겠다는 마음 다짐 이었다.
내고장 충주는 천의 보호를 받은 특혜지역 이라 할 정도로 산수가 수려하고 강산이 아름다우며 역사적으로도 큰 추앙을 받을많큼 뛰어난 지역으로 삼국시대때엔 백제.고구려,신라가 매우 탐욕을 부렸던 지역이며 지리적으로도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천등산과 지등산,인등산이 충주호를 감쌓고 있어 하늘 아래 사람이 가장 살기좋은 지역임을 역학적으로도 알려주고있는 지역이다.
여기에 충주는 공기가좋고 물이맑은 청정지역으로 지진과 풍수해등이 없는 전국에서 가장 안전지대으로서 물이 풍부하여 사람들이 가장 살기좋은 고장임이 밝혀젔으며 국보급 문화재가 많고 아름다운 산천을 지닌지역임에도 지역자치단체의 시책의 부재와 개발미숙으로 보배충주가 알려주질 않아 관광객의 외면을 받고 있음이 안타까워 우리충주를 알리는 홍보 일을 나 라도 앞장서 보겠다는 용기를 갖어본다.
하여 나는 충주시청게시판의 "충주시에바란다"에 여러차례 건의글을 올려 충주를 알리는 홍보일을 민,관이 함께하는 사이트를 만들자고 건의 했었고 좋은 생각이라는 답변도 들었지만 답변후 무소식으로 1년이가고 또 글을 올리고 하는 수차례의 건의를 거듭했다.
이런 불성실한 충주시청의 소흘성에 나는 이 과정을 최근배시의원과 상의 했고 최의원의 긍정적인 의견일치를 보았으며 일이 성사되도록 적극 노력 하겠다고 약속 했으며 얼마후 충주시에서 충북지역자치단체에선 최초로 공식 충주시 홍보블로그를 개설했으며 브로그기자단을 모집하여 활발히 활동 하고 있다.
이에 앞서 충주시에서 늦장부리고 있었을때 내 스스로 충주홍보를 위해 할일을 찾았으며 이 일이 충청북도에서 운영하는 홍보체널인 충북문화관광 명예기자단에 합류하여 관광홍보일을 하게 된다.
충북문화관광명예기자 제도는 충북도청에서 별도의 홍보홈을 만들어 각 시군에서 3~5명 정도의 홍보단을 추천받아 자신의 지역의 문화관광을 홍보하는 홍보체널 이다.
나는 인터넷뉴스인 e조은뉴스에서 기자활동을 하던 실력을 발휘하여 내고장 충주의 문화관광을 홍보하기 시작 했고,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낸다는 나의 성격에 걸맞게 열된 지역홍보를 시작했으며 그열정을 데이터로 발표한다면 충북도 관광명예기자단은 모두 50명 인데 이 50명의 절반의 홍보글은 내의 충주홍보글이 찾이했다 생각한다면 나의 극성도 알만 하다.
충북관광기자로 열성을 부리고 있던중 또다른 홍보일에 가담하게 된다. 그일은 빅충북 명예기자 로 활동 하게 되는데 지금까지의 활동은 지역의 관광과 문화재등을 홍보하는 체널 이라면 빅충북명예기자가 하는 일은 충북공보실에서 하는 일로 충북월간지에 내지역소식이나 미담사례등을 올리는 체널 이다.
한번 시작하면 최고가 된다는 나의 성격 탓일까 이체널에서도 나의 활동은 가장 선두의 실적을 보이게 되니 나의 극성도 알만 하다. 더구나 내가 가담한 활동 멘버중에서 내가 가장 고령층에 든다는 불미로움을 제치고 이뤄낸 실적이고 보니 활동을 함에 나이는 없다라는 긍지를 갖게 되었으며 나의 열정을 더욱 부채질하게된다. (현재는 빅충북명예기자 제도 해산됨)
내가 충북문화관광명예기자로 활동을 시작 했을적엔 "충북문화관광"이란 체널이 별도로 있어 관광명예가자들의 공간이 되었으나 도에서는 도내 모든 관광체널을 통페합하여 충북나드리 라는 체널로 새로히 등장 했으며 관광명에기자의 활동공간은 나드리 홈내의 관광뉴스 에서 활동 하게 되었고 현재도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합류된 홈의 기능저하와 도청담당자의 무관심으로 관과기자단의 활동은 저조해 젔고 존패위기에 놓여 있는데 지난2014년12월 보은에서 열린 워크숍에서 나는 새로운 짐을 지게 된다.
워크숍은 강의와 토의 현장실습으로 메뉴가 짜여저 있는데 이 워크숍에서는 위기에놓인 기자단을 활성화 시키기위해 전 시간을 토론에 집중했으며 활성화 방안으로 충북기자단회장에 본인을 선정한 것이다.
기자단중 내나이 70대로 외관상 보기좋지는 않았지만 기자단중 가장 열성것 활동을하고있는 내게 짐을 마껴 위기에놓인 충북관광기자단을 활성화 시켜 달라는 주문 이었다.만장일치로 선출된 것이어서 회피할 수도 없는 형편으로 회장직을 수락했으나 이는 또 하나의 짐을 안겨준 것이었다.
회장직에오른 나는 가장먼저 기자단 소통을위한 충북관광명예기자 소통카페를 개설해 단합을 조성하기로 마음먹었으며 충북도청에 의례하여 모든기자단의 연락처와 이메일주소를 받아 각 기자님들에 소통메일을 보내 활력을 선도하는일에 시동을 걸었다.
또한 충북홍보체널인 충청북도 공식블로그 의 블로그기자단에도 가입을 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충북도민홍보대사 로도 활동 하고 있으니 내가 충주홍보를 위해 참여하고 있는 활동은 충북도청과 충주시청 의 모든 홍보체널에 합류하여 활동 하고 있는 것이다.
처움 지역홍보를 하고자 모든체널에 합류했을 당시엔 그저 한멘버의 일인이었으나 오래동안 한결같은 열성과 활동은 충주시는 물론 충청북도에선 많이 알려저 이 분야에서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나의 열성을 알고 있을 정도이다. 이런 열선은 2014년 12월에 실시한 워크숍에서 충북관광명예기자단 협의회장으로 책임을 맞게되는 결과가 되었다.
충주의 홍보맨으로 등장힌 김광영
이렇듯 지역홍보를 하려면 가장 먼저해야할 일은 홍보 자료수집 이다.
자료를 수집하지 못하면 홍보를 할 메류가 없기때문에 홍보글을 올릴수가 없기 때문 이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충주의 아름다운 산천을 찾아서 관광아닌 자료 수집을 하였고 각종 행사장을 찾아 사진을 찍고 취재를 하여야하니 충주지역의 행사장의 나는 약국의 감초가 돼 버렸다.
그러나 나도 생업으로 점포를 운영하고 있으니 내가 참여하여 취재를 하는 행사는 특별한 행사장을 찾아갈뿐, 모든 행사장을 찾지는 못하고 있어 좀 아쉬움을 낳고 있다. 그래도 지역의 특별한 행사장엔 반드시 내 모습이 있으니 충주시청의 공무원이나 의원등 알만한 인사는 나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
처움 행사장을 찾았을땐 자료수집을 위해서 였지만 행사장무대를 접근하여 취재한다는게 쑥스럽기도했고 멋적기도하여 용기가 필요 했으나 이런일들을 거듭하다보니 이제는 행사장이 나의집같이 편안하고 자연스럽기만하니 이래서 습관이란 것 은 이런 것들을 말 함인가 보다.
세월이 지나갔지만 활동해온 지난날을 되돌아 볼때 나 슷로 생각해 봐도 좀 극성스럽긴 한것 같다,
내가 많은 활동들을 했지만 가장 열성것 홍보활동을 했던 시기는 2013년 충주세계조정선수권대회 홍보를 한것 같다.
나는 조정홍보활동을 하기위해 청주,제천,서울,일산등 전국홍보단들과 함께하여 사진을찍고 취재를하여 홍보글을 올렸으며 무더운 태양빛 아래서도 취재활동을 했으니 대단하다할까? 멍청하다 할까?
이렇게 홍보활동에 극성을 부리다 보니 방송도 타게되는 일도 생겨 신문,라디오,TV 에서도 나의 활동장면을 취재하여 방영하였으니 나의 입지는 더욱 넓혀 젔다.
이렇게 정신없이 충주홍보를 위한 사진을 찍고 취재를 하고 홍보글을 올리다 보니 인정도 받게되어 충주시장표창과 도지사표창도 받게 되었으며 가장 놀라운것은 2013충주기네스에 내가 홍보글30,113건을 오린것이 인정되어 "충주최고 홍보왕" 이란 인증패를 받게 된 것이다.
당시 기네스인증패는 각 분야야에서 인증패를 받았으나 나는 지역에 기여한 보람으로 받은 인증패 이니 나는 가장 자랑 스러운 기네스인증패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되며 보람도 갗게 된다.
이런 나의 활동은 또다른 지역활동에도 참여하게 되니 한창희시장때는 충주시정자문위원으로 위촉 되었으며 이종배시장때는 "충주시민대화합특별협의회"와 "충발련"(충주발전협의회) 에서도 참여해 일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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