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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두 번째 시간이구요. 찾아오고 하시는 게 한번 와봐서 좀 편하시죠.(〜 네.) 반야심경을 이제 우리가 공부를 하러 왔습니다. 여러분 책을 다들 이렇게 들고 오셨던데. 책이 좀 무겁지요.(〜 네.) 안 들고 오셔도 됩니다.(웃음)
뭐 예를 들어, 오늘 공부할 내용해봐야 마하 아니면 많이 나가면 마하 반야까지 나가면 많이 나가는 건데. 거기 나오는 내용에 대해서 아마 같은 얘기를 하지는 아마 않을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 내용과 별 큰 상관없이 제가 마하와 반야의 말뜻이나 이런 거를 설명해드리려는 건 아니고.
‘진짜 마하반야가 뭐냐’하는 그 낙처를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거다 보니까 책은 뭐, 책 따라가면서 읽을 일도 없습니다. 제가 몇 페이지를 펴세요. 이런 말도 안 하고. 저도 지금 아무것도, 뭐 책을 안 들고 왔습니다. 그래서 무거우시니까 굳이 안 들고 오셔도 될 거 같습니다.
편안하게 오셔서 그냥 필기하실 것도 없고 그냥 편안하게 들으시다가 졸리면 주무시고(웃음) 또 안 졸리면 좀 자다가 깨서 또 듣고 이렇게 하시면 되고. 다리 아프신 분들은 하다가 다리도 이렇게 펴시고 또 뒤로 제기기도 하시고 편안하게 요가도 하시고 편안하게 이렇게 들으시면 되겠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제「반야심경」하면 ‘마하반야 바라밀다 심경’이라는 뜻인데요. 이 반야심경의 첫 글자부터 끝 글자까지 반야심경뿐 아니라 모든 경전이 마찬가진데. 하나의 낙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야, 반야심경같이 이렇게 짧은 거를 뭔 4개월씩이나 어떻게 우려먹으려고 뭔 할 얘기가 그렇게 많지’싶은데. 제가 느끼기에는 오히려 금강경처럼 긴 경전을 4개월 동안 하면 이 경전 보다가 세월 다 갈 확률이 높은데.
반야심경은 책 볼일이 없고 딱해야 될 얘기만 계속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저도 더 재미가 있을 수 있구요. 여러분도 아마 듣기가 좀 더 편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마하반야’ 이러면 뭐 크나큰 지혜, 이런 뜻이잖아요.
참된 지혜, 크나큰 지혜. 위대한 지혜. 부처님의 가르침. 이런 뜻일 수가 있는데. 중요한 건 마하 반야의 뜻이 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하 반야를 우리가 어떻게 마하 반야를 정말 체득할 수가 있을까.
어떤 것이 내가 이 현실 속에서 마하 반야라는 걸 체득해서 마하 반야를 현실에서 써먹으면서 살아야 되잖아요. 그냥 마하반야는 이런 뜻이다.라고 해서 머릿속에서 딱 알고 있어봐야 여기서는 그런 뜻이구나. 하고 이해는 할 수 있지만,
나가서 남편하고 아이하고 옆집 사람하고 회사에서 부딪치면 또 괴로운 일이 생긴단 말이지요. 그래서 이제 제가 이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는 이것이 현실에 맞아서 현실 속에서 내가 이걸 어떻게 하면 실천할 수 있을까?
거기에 좀 이제 주안점을 두고 여러분들도 들어주시고 저도 이제 그런 관점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하구요. 그래서 마하반야를 우리가 바른 안목으로 알게 되면요. 아주 너무나도 가볍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그래서 마하반야를 직접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으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이제 이 법을 드러내고 있는데. 우선 이 얘기 먼저 해보는 거지요. 뭐 어떤 것이 마하반야일까? 현실에서 우리가 마하반야를 어떻게 이제 이해를 해야 될까? 이것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좀 드리면요.
우리가 세상을 만납니다. 우리가 세상을 만나는데 눈으로는 모양을 보아요. 보고 보자마자 ‘이건 좋고 저건 나쁘고’라고 하면서 내가 보고 나서 ‘이건 좋다, 이건 나쁘다, 이건 맞다, 이건 틀리다, 이건 이것이고, 이건 저것이야’
라고 머릿속으로 해석을 하고 그것을 본 거라고 착각합니다. 실제 본 것은 이미 지나갔어도 보고 난 다음에 내 머릿속에 그려진 그림, 그림자, 내가 판단 분별한 거. 그걸 이제 쥐고 그게 내가 본 거야,라고 딱 믿는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너 이거 본적 있어?” “본 적 있지.” 부산 광안리 앞바다 본적 있으세요? (〜 네.) 기억으로만 본적 있는 거지요, 거지요. 그 “광안대교 알아?” 물어보면 “알아.” 이렇게 대답합니다. 왜? 난 분명히 내 눈으로 봤기 때문에.
내 눈으로 봤기 때문에 분명히 난 안다. 이렇게 생각해요. ‘안다’라는 마음이 식이에요. 식. ‘내가 경험해 봤기 때문에 알아’라고 하는 것이지요. 좀 멋있던가요. 별로던가요. 자기 나름대로 판단이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보자마자 아는 것을 진짜,라고 여김으로써 어리석음이 벌어지는 겁니다. 보자마자 알고, 듣자마자 알고, 눈귀코혀몸뜻이 내 바깥에 있는 색성향미촉법이라는 대상을 접촉하자마자 아는 마음. 그러고 접촉하자마자 아는 마음을 가지고 그림을 그려놔요.
상을 그려서 모양을 그려서 ‘이건 이거야. 저건 저거야’라고 그려놓고 그걸 ‘옳다’라고 딱 집착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내가 본 것이 진짜 맞느냐. 진짜 ‘맞다’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거지요.
방석이 보니까 빨강 방석이 있고 이 목탁 밑에 보면 빨강 방석이 이렇게 있어요. 여러분 옷을 빨강 옷 입고 계신 분, 또 파란색 옷, 검은색 옷, 여러 가지 옷을 입고 계시는데. 이 연등이 빨강 색이다. 내가 분명히 봤기 때문에 그건 빨간색이 맞아,
라고 이야기를 하겠지만 이게 진짜 빨간색이 맞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건 100% 옳은 것일까요. 내가 빨간색을 봤기 때문에 분명히 빨강 색이야. 대원정사 방석은 빨강 색이야. 약간 자주색 이런 거 빨강 색이야. 100% 진실일까요?
내가 보는 것에는 빨간색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제가 그 말씀드렸지요. 자외선이나 적외선을 보는 곤충들에게는 다른 색깔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자외선을 보는 일부 거미나 새나 나비, 나방들. 그들은 우리가 보는 것과 비슷하게 보지 않는다는 거지요.
자외선으로 이렇게 꽃을 찍어놓은 사진들이 있더라구요. 그래 봤더니. 꽃이 우리가 보는 것과 다르게 보입니다. 다르게. 얼추 비슷한 색도 있지만 좀 다르게 보여요. 그리고 또 요즘에는 적외선 촬영 기술이 있어서 적외선으로 사진을 촬영을 하는데,
곳곳을 적외선 촬영기법으로 찍어놓으면 약간 뭐랄까 이렇게 좀 환상적이고 몽롱한 어떤 그런 아주 새로운 느낌의 어떤 것으로 보이거든요. 적외선을 보는 어떤 뱀이라든지 이런 이들이 보는 것은 지금 우리가 보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보니까 수정체가 사람인데, 사람인데. 수정체가 없거나 혹은 백내장 수술을 하면서 수정체를 제거한 사람들. 그런 제거한 사람들 같은 경우는, 자외선을 우리는 가시광선의 영역밖에 못 봐야 되잖아요. 그런데 자외선이 보인답니다.
그 사람 눈에는. 그럼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은 내가 보는 방식과는 다르게 보겠지요. 그럼 그 사람은 내가 보는 게 맞는다고 생각할 것이고. 우리는 우리가 본 게 맞는다고 생각할 겁니다. 제가 옛날 어릴 적 기억에 어떤 기억이 있냐면요.
우리 반에 정말 똑똑하고 공부 제일 잘하고 인물도 잘났고 모든 면에서 모범적인. 그래서 그 친구 말이면 다들 그냥 꺼벅. 이런 어떤 모범생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시험을 보고 나면 내가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그 친구 시험지만 갖다 놓고 매겼으면 거의 다 맞았으니까.
그 친구 말은 그냥 불변의 진리 같은 그런 아주 카리스마 있고 똑 부러지는 친구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공부를 별로 못하는 친구와 이 공부 잘하는 친구가 ‘이게 맞나, 틀리나’ 가지구 약간 논쟁이 붙어서 다른 사람들이 전부다 당연히 ‘얘 말이 맞겠지’라고 거들떠도 안 봤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당연히 내가 맞는데 하면서 막 주장을 하니까. ‘모두가 당연히 얘 말이 맞지’ ‘얘는 뭐든지 맞는 아인데’ ‘그런데 쟤는 공부도 못하는 아이고. 쟤가 그렇게 뭐 잘하는 게 없는데.
쟤가 뭘 믿고서 얘하고 이러지’ 둘이서 나중에 너무 억울하니까 둘 다. 서로가. 너무 억울하니까 내기를 하자. 딴 사람들한테 물어봐서 내 말이 맞는지. 네 말이 맞는지. 내기를 해서 뭐 뭘 내기를 하자. 이렇게.
전부다 어떻게 생각을 했냐면 ‘야, 얘는 간도 크다’ ‘얘하고 지금 옳은지 틀리는지 내기를 하자 면은 무조건 얘기 맞지. 네가 맞겠나’ 그래서 전부다 거들떠도 안 보고 ‘얘가 맞을 것이다’라는 거에 다 거는 거지요. 무슨 문젠 줄 아십니까.
이 아이가 아주 똑똑한 아이였는데 색맹까지는 아니지만 색약이 있었어요. 색약이. 색약이 있었는데 얘 본인도 본인이 색약이 있다,라는 걸 몰랐습니다. 그때 처음 알고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모르니까 이게 빨간색과 녹색 뭐 이런 게 좀 헷갈리는 이런 색약도 있고. 뭐 여러 가지 종류의 색약이 있답니다. 뭐 빨간색, 노란색이 좀 분간이 안 되는 사람도 있고 그렇답니다. 그런데 저 아이가 보는 거는 남들이 보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런데 이 아이는 혼자만 전혀 다르게 보는 거지요. 그런데 얘는 ‘이게 100% 옳다’라고 생각한 거지요. 그러니까 어떤 내기라도 해라. 난 너한테 분명히 이길 수 있다. 저 아이는 내가 그럼 내가 바보냐. 빨간색을 빨강 색이라고 보는데.
왜 너는 아니라고 하느냐. 당당하게 내기를 한 거지요. 남들이 다 저게 맞다,라고 했을 때 이 아이의 그 표정을 아! 정말 잊을 수가 없습니다. 본인 스스로가 너무 충격을 받는 거예요. 의외로 색약인 사람들은 이게 사실은 뭐 장애다.
이런 건 아니거든요. 그런 경우가 많답니다. 우리나라에도 보면 한 5% 정도는 그냥 색약이 많이 있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색약은 사실은 병은 아니고 큰 문제가 없다 보니까. 문제가 없다 보니까, 본인도 모르고 자랄 확률이 높은 거지요.
그러면 보세요. 이 아이는 내가 본 게 100% 맞는다고 생각하고 저 아이는 자기가 본 게 100% 맞는다고 생각하며 둘이 싸운 것이지요. 자기가 본 것이 맞는다고 느끼는 겁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다르게 보일 수가 있어요.
이 색약인 친구가 본 것은 100% 틀린 걸까요. 본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 그럼 그 아이의 눈에는 그것이 옳은 거예요. 우리가 보는 거는 대중이, 여러 명이 보는 거니까 그 반 전체가 보는 게 진짜 옳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가시광선의 영역만 보니까 그렇게 보이잖아요. 그런데 자외선이나 적외선, 이것을 보는 사람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이니까. 내가 보는 게 맞다,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인간이 보는 것이 맞다,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지요.
이 가시광선을 볼 수 있는 어떤 영역이 있습니다. 그 영역의 스펙트럼 그 부분만 보는 거지요. 그 밑에나 그 위에는 못 보는 겁니다. 요만큼 밖에 못 보는 제한된 눈을 가지고서 ‘내가 본 것이 옳다’ 이렇게 싸우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게 옳은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이 아이가 진짜 옳은지. 저 아이가 진짜 옳은 건지. 우리는 우리들의 말을 보편적이라고 생각해서 색약인 사람을 문제가 있는 사람이고. 우리는 정상이야,라고 얘기하지만 진짜 색약 있는 사람이 문제인지 아닌지 진짜 그걸 얘기할 수 있을까요?
언젠가 그 신동엽. 신동엽이 이제 본인이 색약이란 얘기를 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토크쇼에서. 자신은 색약이라서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어릴 적부터 이해 가지 않는 게 있었다. 가을이 되면 단풍 구경하는 사람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단풍 구경을 왜 가는 건지를 모르겠다. 본인의 눈에는 단풍이 그냥 지저분한 색깔로 밖에 안 보인답니다. 제가 이걸 그런 색약인 사람이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서 찾아봤더니 우리는 빨갛고 노랗고 이런 단풍의 색감이 아름답잖아요. 화사하잖아요.
그런데 그 색약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안 보이고 그냥 구중중한 빨간색. 구중중한 노란색. 이런 식으로 보이는 거지요. 약간 쓰레기같이 좀 지저분하게만 보인다는 거예요. ‘저거를 왜 구경하러 가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에게는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그 사람은 너는 잘못됐고 나는 옳아,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서로 다른 것일 뿐. 절대적으로 옳다,라고. ‘내가 봤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옳아’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봤기 때문에 봐서 알아’라고 합니다. 여러분 제가 키가 큰가요. 작은 가요. 봤잖아요.(웃음) 아마 여러분들은 이제 보살님들이시니까 ‘키가 크다’라고 생각할 확률이 높으실 겁니다. 여러분보다는 좀 클 확률이 높으니까.
그런데 농구선수들 사이에서는 뭐 되게 작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요. 봤다고 해서 내가 본 것이 진짜 맞는 것이냐? 옛날 초등학교 때 그 넓었던 운동장이 지금 와서 가보면 학교도 좀 왜소해 보이고 작아 보일 수도 있거든요.
옛날에 ‘그렇다’라고 생각했던 것이 또 다르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본 것이 진짜로 옳은 것이냐. 100% 옳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내가 보자마자 그걸 전체적으로 내 본 것을 있는 그대로 저장하지 않습니다, 뇌는.
뇌 과학에서 뇌가 저장하는 방식을 어떻게 얘기하느냐면 뇌는 효율성을 따진답니다. 즉, 모든 것을 전부다 기억하기에는 뇌 용량이 너무 작은 거예요. 이 모든 정보를 어떻게 다 입력할 수 있겠습니까. 다 입력 못하니까 내가 관심 가지는 부분들만 선택적으로 인식한다는 거지요.
뇌가 전부다 딱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제가 여러분들 이 눈빛이 지금 수없이 많은 눈빛이 있는데 여러분들 얼굴을 전부다 기억을 당연히 못하지요. 선택적으로 기억을 하는 것이지요.
앞에서 초롱초롱하게 들으셨던 분들이나 또 이렇게 자주 들으신 분들이나 이랬던 분은 더 빨리 기억하겠지요, 아마도. 그거처럼 선택적으로 머릿속에 입력을 하는 거지요. 그러고 ‘안다’라고 느끼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자기가 관심 있는 관심사에 대해서만 선택적으로 인식을 하는 것이구요. 그렇게 인식하는데도 오류가 있는 겁니다. 뇌 과학에서는 사람들이 인식하는 것 자체가, 저장하는 것 자체가 오류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더, 더 큰 왜곡은 어디서 일어나느냐면 입력할 때도 이런 왜곡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꺼내서 쓸 때. ‘내가 옛날에 그거 봤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꺼내서 쓸 때 어떤 방식으로 꺼내서 쓰느냐면. 지금 이 순간,
그러니까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편견을 가지고 저장했고 그 편견을 가지고 꺼내 쓰는데. 그것도 지금 이 순간에 나의 느낌, 나의 감정, 여기에 따라서 꺼낼 때 다른 게 꺼내진답니다. 분명히 그때는 조금 안 좋게 입력을 했는데 지금 내가 너무 기쁜 거예요.
너무 행복한 거예요. 그럼 과거의 것을 꺼냈는데 그걸 조금 좋은 방식으로 꺼내 쓴다는 거예요. 왜곡을 시켜서. 내가 분명히 내가 어릴 때 살았을 때는 초등학교, 중학교 때 정말 힘들게 살았거나. ‘내가 그 시절 정말 힘들게 살았어’
그런데 지금 너무나도 행복하고 뭐든지 만족스러울 때 그것을 떠올리면 ‘야, 그래두 그때 힘든 거 같았지만 그래도 좋았어’ ‘그래서 그때가 참 좋았지’ 이렇게 떠올린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때 힘들었는데 지금도 계속 힘든 사람은 ‘그때도 정말 지옥 같앴고. 지금도 지옥 같애’라는 식으로 받아들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저장할 때도 왜곡되고 이것을 꺼내어 쓸 때도 그 순간순간에 마음 상태에 따라 왜곡된 것을 꺼 집어내서 쓴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을 어떻게 100% 내가 경험했기 때문에 내가 봤기 때문에 옳다,라고 어떻게 얘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우리는 봤기 때문에 옳다고 생각해요. 사실은 보고 나서 내가 내 식대로 해석한 겁니다.
진짜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본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그때 당시 나의 느낌에 따라서 그때 당시 나의 감정, 나의 관심사, 이런 거에 따라서 선택적으로 인식을 한 왜곡된 모습으로 내 머릿속에 저장을 하는 거지요.
이 머릿속에 저장된 내 식대로 저장된 인상, 기억, 그걸 상(相)이라고 부릅니다. 금강경에서는. 모양 상자를 써서. 상. 그렇게 해서 알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알 식(識) 자를 써서 식(識)이라고 불러요.
알음알이, 분별심, 분별상, 번뇌망상, 이게 전부다 같은 얘기입니다. 즉, 그 당시 것을 보자마자 알았다. 그런데 보자마자 안 것이 진짜로 아는 것이 아니라 내 식대로 내가 만든 상을 가지고 이렇게 딱 조합해서 그래놓고 나는 알았다. 분명히 난 안다.
그것도 자기만의 방식대로 이해한 것인데. 의미를 부여한 것이지요. 그 모양에다가. ‘이건 좋은 거야’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저건 나쁜 거야’라고 의미를 부여해 놓은 겁니다. 10년 전에 만났던 사람이 너무 별로였어요.
그래서 그 사람은 나쁜 사람, 안 좋은 사람으로 머릿속에 자기가 인식을 해놨는데. 10년 후에 만났는데 옛날 기억에 얽매여 있어서 그것이 옳다,라고 하는 사람은 10년 후에 만났는데도 ‘이 사람은 분명히 나쁜 사람일 거야’
그런 생각을 가지고 만나면 그 사람의 진면목을 만 날 수가 없는 것이지요. 10년 전에 내가 만났을 때 사실은 내가 그 사람의 진짜를 보지 못했을 수도 있고. 내가 속이 좁았기 때문에 못 봤을 수도 있고. 이 사람이 또 10년 만에 그 사람이 또 바뀌었을 수도 있는데.
‘그것이 옳다’라고 생각하고 그걸 꺼내 쓰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머릿속에 저장할 때부터 뭔가를 보자마자 ‘안다’라고 할 때 자기식대로 저장합니다. 자기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부여해서 저장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전부다 어떻게 저장돼있느냐면 A라는 사람은 ‘아 그건 괜찮은 사람’ B라는 사람은 ‘그 사람은 별로야’ 우리는 항상 그러잖아요. 그 사람 어때? 여러분들 “야, 법상 스님 강의한다는데 강의 들으러 가자.”
도반들한테 얘기하면 “뭐 누군데?” “어떤 사람인데?” 그러면 “좋은 사람이야.”(웃음) 뭐 이런 식으로 좋은 사람 아니면 안 좋은 사람. 보통은 이렇게 기억하기 쉬워요. 왜냐면 디테일하게 기억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좋다’ ‘나쁘다’ 이렇게 둘 중에 하나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건 내가 부여한 의미지요. 그 대상에 내가 의미 부여를 한 겁니다. 내가 의미 부여를 한 거예요. 그 의미 부여 한 거에 사로잡혀서 그게 진짜,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내가 의미 부여해서 기억해놓은 그 상을 진짜라고 집착하게 되면 그걸로 인해 괴로움이 발생합니다.
여러분 이 손이 여러분을 괴롭힐 수 있을까요? 이 손이 여러분을 괴롭힐 수 있을까요. 이거는 그냥 손이지요.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 제 손이 여러분에게 막 아주 좋은 의미로 저장돼 있나요? 나쁜 의미로 저장돼 있나요?
그거는 뭐 그런 저장돼 있을 게 없습니다. 이거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있는 그대로의 이것일 뿐입니다. 있는 그대로일 뿐이에요. 그런데 여기에다가 상을 부여하고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고.
의미를 부여하더라도 의미를 부여한 것이 ‘세상에선 그렇게 의미가 부여가 돼. 그런데 나는 그걸 100% 믿지는 않아’라고 의미 부여는 하되, 의미 부여한 거를 100% 믿지만 않으면. 괴로운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의미 부여 하더라도.
그런데 의미 부여를 해놓고 ‘그게 100% 맞아’라고 믿기 시작하면 이 손이 여러분을 괴롭힙니다. 어떻게 괴롭힐까요? 이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런데 제가 손을 갑자기 뒤집어요. 그러고 4개의 손가락을 접습니다.
4개 손가락을 접으면 갑자기 얘가 차마 못 접겠네요.(웃음) 이 손가락 4개를 접으면 그냥 ‘제가 여러분에게 욕한다’라는 느낌이 들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냥 이렇게 웃으시면서 ‘아, 저런 방편을 썼구나’ 이런 분도 계실 수 있는데.
이 중에 과하게 여기에 대한 의미 부여가 과하게 돼있고 그게 ‘이거는 욕이야’라고 의미 부여가 과하게 돼있는 사람은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아무리 방편이라도 그렇지. 스님이 부처님 앞에서 어떻게 손가락 욕을 우리에게 할 수가 있어’
‘대중에게 어떻게 이런 욕을 할 수가 있어’ 하고 속으로 화가 나실 겁니다. 이 손가락은 여러분을 괴롭힐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중에 어떤 분은 이 손가락으로 인해서 괴롭겠지요.
그런데 제가 특정한 한 사람을 지목해서 딱 이렇게 했을 때 그 사람은 갑자기 제가 되게 밉고 저한테 아마 화가 나실 수도 있을 겁니다. 제가 아니라 여러분 누군가가 생활 속에서 만나는 누군가가 여러분한테 이런 욕을 인상을 팍 쓰면서 했다.
그러면 엄청 화가 나겠지요. 당연히 화가 나겠지요, 거지요. 그런데 ‘아, 세상에선 이걸 욕이라는 어법으로 쓰긴 써’ ‘그런데 나는 이걸 100% 믿지는 않아’ 이건 상일뿐이잖아요. ‘우리가 손가락을 4개 접으면 욕이다’라는 우리가 만든 상인데.
그걸 100%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돼요. 그런데 100% 믿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이것을 볼 때마다 괴로운 일이 벌어집니다. 이게 나를 괴롭히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거는 힘이 없어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내가 힘을 부여해주는 거예요.
‘이건 욕이야’ 이것과 강력하게 동일시되어 있는 사람은 이 욕을 얻어먹을 때 엄청난 화, 괴로움, 짜증 나고, 상대방이 밉고,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이 손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상이 없습니다. 허상이에요. 허상.
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걸 100% 믿어서 괴로울 건지 말건 지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지. 이 손은 그걸 결정할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힘을 이 손에 부여합니다. 여러분은. 부여함으로써 그 손의 작은 하나의 몸짓에 여러분들이 괴로워하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예를 들어 손을 뭐 이렇게 한다든지 이렇게 한다든지 하면 ‘야! 나를 좋아하는구나’ 이렇게 생각을 할 거예요. 그럼 보세요. 손가락이 이렇게 됐던 뭐 이렇게 됐던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아무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좋았다’ ‘싫었다’ 한단 말이지요.
상에 얽매이게 되면 이렇게 작은 것이 나를 강력하게 휘두르게 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내 인생을 괴롭히기 시작해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옛날에 정말 수치스러운 기억이 있을 수 있어요. 어떤 내가 정말 미워했던 어떤 사람이 나한테 이러면서 욕을 했다.
그게 지금까지 나를 너무 괴롭히는 그런 수치스러운 기억으로 남아있을 수도 있습니다. 평생토록 그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되는 사람도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사실은 손은 전혀 그럴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 상을 믿고 ‘내가 봤기 때문에 진짜야’ ‘걔가 나한데 진짜로 욕했어’ 그 사람은 욕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제가 옛날에 어떤 사진을 찍은 걸 보니까 제가 이러고 사진을 찍었더라구요. 저는 전혀 이렇게 한 기억이 없거든요.
그런데 그냥 어찌어찌하다 보니까 손이 그냥 이렇게 됐는데. 그 순간이 포착돼서 사진이 찍힌 거겠지요. 그런데 남들이 보면 ‘아, 스님이 욕을 한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요. 예를 들면. 그 이미지를 진짜라고 믿게 되면 거기 걸릴 수도 있는 것일 뿐이지요.
이처럼 상에 얽매이기 시작하면 내가 봤기 때문에 ‘봐서 알아’라고 굳게 믿고 그걸 100% 진실이라고 믿기 시작하면 그걸로 인해서 세상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전혀 괴롭힐 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나를 괴롭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우리를 괴롭히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카그라증후군(Capgras syndrome)이라는 게 있다고 해요. 이 카그라증후군에 걸린 사람들은 자식이나 부모님을 보고서 ‘내 자식이 아니야’ ‘내 부모님이 아니야’라고 인식을 한답니다.
가짜라고 인식을 한답니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진짜가 아니라고 인식을 한다는 거지요. 그럼 그 사람의 인식에서는 분명히 엄마가 맞는데. 그 사람에게는 엄마가 아니라고 생각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완전한 왜곡된, 남들이 봤을 때 ‘내가 보는 게 맞아’ ‘저 사람이 보는 건 틀려’라고 생각했을 때 ‘내걸 고집하게 되고 저 사람이 본 것은 틀렸다’라고 생각하게 돼요. 여러분들 특정한 정치인을 봅니다.
그런데 극단적으로 집착이 심한 보수적으로 심한 사람과 극단적으로 진보적으로 심한 사람은 특정한 정치인을 보고 심하게 욕을 하기도 하고 심하게 칭찬하기도 합니다. 그건 내 견해 때문에 그렇잖아요.
내 견해가 극단적인 보수면 진보적인 사람은 싫고. 내 견해가 극단적인 진보면 보수적인 정치인은 싫은 것이지요. 그 정치인 자체를 내가 안다고 생각하지만 내 식대로 내가 의미 부여한 그 사람을 아는 것이지. 진짜 그 사람을 만나질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의미 부여한 것을 진짜라고 믿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TV에 나오기만 하면 짜증이 나고 미워져요. 짜증이 나고 밉고 뭐 화가 나고. TV 보다가도 특정 연예인이 나오면 막 채널을 돌리고. 꼴 보기 싫다고. 그럴 일이 전혀 없는데.
내가 만들어놓은 허상인데. 그 허상이라는 사실을 바르게 자각하지 못할 때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집니다. 눈으로 보고 나서 아는 것을 진짜 알았다고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지요. 그럼 여러분들도 보십시오.
이제부터는 보이는 거에, 보이는 거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겠지요. 보이는 것이 여러분을 괴롭힐 필요가 없겠지요. 보이는 것은 진짜가 아니니까. 내가 내 식대로 인식한 것이니까. 보이는 게 진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제 보이는 거에 휘둘릴 필요는 없겠지요. 거죠. 남들이 여러분한테 어떤 것을 보여주던. 집에 갔는데 자식이 누워서 게임을 하고 있다. 평소 같으면 화가 나겠지만 뭐 그냥 그러고 있을 뿐이구나.(웃음)
이럴 수도 있겠지요. 특정한 모습을 보고서 너무 과도한 막 화를 내고 이럴 필요는 없을 겁니다. 이게 보는 것만 그런 게 아니라 보고 나서 저장한 모든 것들은 왜곡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라고 굳게 믿고 있지만 왜곡이고.
하나의 허상을 저장해놓은 겁니다. 오십 보 백보에요. 오십 보 백보 차이. 그러나 100% 진실이 아닌 거면 100% 믿을 필요는 없는 겁니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소리를 듣고 나서 소리라는 소리 파장 하나가 여러분을 울고 웃게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을 죽일 수 있을까요? 소리 파장 하나가 여러분을 죽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을 평생 상처 주기도 합니다. 20대 때 “걔 너무 재수 없게 생기지 않았어,”라고 친구들끼리 떠드는 소리를 듣고 나서 평생토록 한 2, 30년 동안을 그게 너무 강렬하게 와닿아서 자기가 좋아했던 친군데.
자기를 재수 없게 생겼다는 얘기를 나 몰래 하는 얘기를 듣고 너무너무 충격을 받아서 ‘내가 좋아하는 친군데 나한테 저렇게 얘기할 정도면 내가 정말 얼마나 재수 없게 생긴 거지’ 너무 상처를 받아서 그게 평생을 남들 앞에 가면 이제 부끄럽고 두렵고.
남들도 ‘나를 재수 없게 볼 거야’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저렇게 보는데. 일반인들이 나를 좋게 볼 리가 만무하지 않겠어’ 하는 마음으로 한 30년 동안을 ‘나는 재수 없는 사람이야’라는 상 때문에 너무 상처받으면서 그 어떤 트라우마처럼 남아 가지고 남들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나중에 20년 30년 만에 그 사람을 다시 만나서 ‘내가 이렇게 평생 안고 사느니, 그래도 도대체 왜 그랬는지 말이나 한번 해보자’ 술을 먹고 말이나 한번 딱했는데 그 친구가 너무너무 당황해하면서 너무 어이없어 하면서
“야, 너 우리 반에 걔 몰라.” “걔 얘기한 거야.” 가만 보니까 걔하고 얘하고 이름이 약간, 어감이 비슷하더라는 거예요. 걔 얘기를 했는데 이 친구는 ‘자기를 얘기했다’라고 생각해서 그게 평생의 상처가 됐던 것이지요.
그러고 하다못해 그게 그 사람을 얘기했다 할지라도 그걸 평생 그렇게 상처로 안고 살 필요가 있을까요? 그거는 그 사람이 보는 단편적인 견해일 뿐입니다. 그러고 그 아이가 그날 엄청 기분이 안 좋았거나 그러면 좋은 걸 보고도 안 좋게 얘기하는 거예요,
사람은. 좋은 사람도 그날 기분에 따라 안 좋게도 얘기하잖아요. 그러구 친구들 모여서 막 A라는 사람을 욕하고 있는데. 다 욕하고 있는데 내가 나만 칭찬하면 거기서 또 왕따가 되잖아요, 약간. 욕할 때는 크게 동조는 안 하더라도 어〜 이렇게.(웃음)
보통 우리는 그러고 살잖아요. 그럴 수도 있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때 당시 내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고 말하고 이럴 수 있다,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 사람이 나를 욕했다 할지라도 그 말에 평생을 휘둘려서 괴로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거는 그냥 소리, 하나의 소리라는 경계일 뿐입니다. 그런데 소리라는 경계에 우리는 의미 부여를 강력하게 합니다. 능력 없는 놈이라는 말을 듣고 너무 충경을 받을 수도 있어요. 저는 음식을 아주 못하거든요.
그런데 저한테 “음식을 어떻게 이렇게 못할 수가 있어.” 이런 얘기를 해봐야 저는 전혀 안 괴롭습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뭐 백종원 선생 같은 분이나 뭐 이렇게 음식으로 먹고사는 식당 주인이나 어떤 자신의 음식이 아주 자신감이 있는 분에게 음식 못한다,
라는 얘기를 한마디 한다 생각해보세요. 그 사람은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겁니다. 그 말이 똑같은 말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엄청난 괴로움을 주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괴로움을 주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말은 그 말 자체가 실체가 있습니까?
실체가 없어요. 내가 그렇게 비중 있게 들을 거냐 말 거냐의 차이입니다. 내가 그렇게 들었을 뿐이지. 그렇게 듣지 않으면 그건 전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나를 괴롭히지 않는 말이 될 수가 있지요.
요즘 젊은 아이들. 중학생 고등학생들 말 줄여서 쓰고 막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런 말들을 가만히 제가 이렇게 보다 보니까. 약간 불교랑 좀 연관된 말들이 있어서 한편으론 반갑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좀 희한하던데. 어떤 애들끼리 얘기를 하잖아요.
그런데 한 아이가 이 아이가 너무 착한 거예요. 너무 착하고 너무너무 이렇게 봉사도 잘하고 베풀고 너무 착한 아이. 이제 그런저런 얘기를 자기네들끼리 막 하다가, 하다가 얘가 너무 착한 얘기를 하니까 옆에 있는 친구가 놀라면서
“야! 진짜야.” 그러면서 막 그러다가 옆에서 뭐라 그러냐면 “와! 개보살.”(웃음) ‘내가 이걸 잘못 들었나’ “뭐라 그랬어?” 그랬더니 개보살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나는 욕을 하는 건 줄 알고 ‘보살님을 저렇게 욕을 하면 안 되는데’
하고 요즘 젊은 애들이 말이지 “아무리 그래도 종교 가지고 종교는 건드리지 마라. 부모님과 종교는 건드리는 게 아니다.” 그래 얘기를 했더니 아, 이 ‘개보살’이 보살님을 욕하는 게 아니고 개라는 말은 그냥 하나의 애들끼리 쓰는 강조 용법.
그러니까 우리는 ‘개’를 딱 안 좋게 느끼는 편견을 가지고 있어서 “그래도 그건 쓰지 마.” 아마 어르신들은 거의 그럴 겁니다. 애들이 그런 말을 쓰면 “그래도 그건 쓰지 마.” 어감이 안 좋으니까. 그러면 애들은 뭐라 그럴까요.
“네.” 이러겠지요, 일단은. 눈앞에서는. 그러고 뒤에 가서는 ‘아, 역시 꼰대’ 이래 생각합니다. ‘개보살’은 정말 보살 같은 너무너무 착한 친구들을 높여 부르는 말이에요.(웃음) 이런 친구들한테 ‘개’자를 붙이거나 요즘 아주 더 안 좋은 경우도 있는데 차마 말을 못 하겠네요.(웃음)
10원짜리를 이게 앞에 붙이기도 하더라구요. 귀여운 사람을 보고 “개 귀엽네.” 그런데 우리들은 그걸 느낌이 어감이 안 좋다 보니까 ‘나쁘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어법에서는 그게 별로 안 좋은 말인데.
그 친구들의 어법에서는 아주 극존칭인 것이지요. 어떤 식당 주인이오. 자기 홈페이지를 이렇게 검색하다가 너무 충격을 받은 거예요. 음식을 먹고 나서 이제 댓글을 쓰는데. 그 댓글을 보고 나서 너무 상처를 받아가지고
막 한동안 며칠 동안 너무 괴로워하고 힘들어하고 뭐 이러다가 야, 이게 참 너무너무 힘들고 그래서. 너무너무 상처를 받았다가 어느 날 이제 딸한테. 딸한테 이제 물어본 거예요.
야, 내가 요즘 사실 좀 아빠도 힘든 게 있다. 뭐 너희들만 힘든 게 아니라 아빠도 힘들다. 이러면서 이제 얘기를 하다가 아이한테 이제 얘기한 거지요. 아빠가 뭐가 그래 힘드나? 그랬더니. 나도 사실은 내 인생에선 “음식 맛이 어떻다.”
라는 얘기가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건데. 누군가가 댓글을 남기고 갔는데. 너무 쌍스러운 욕을 하고 가서 정말 너무 상처를 받아가지고 미치겠다. “그게 뭐냐?” 이랬더니. 댓글에다가 뭐라 그랬나 면 존맛탱.(웃음)
존맛탱, 좀맛탱 이러고 나고 점점점 하다가 개존맛탱.(웃음) 개존맛탱을 쓰고 나서 또 옆에다가 이렇게 우는 표시 있잖아요 ‘ㅜㅜ’ 하는 거. 우는 표시 두 개를 해놓은 거예요. ‘야, 맛이 없어도 이렇게 맛이 없는데 눈물 날 정도로 맛이 없다는 얘기인 갑다’
라는 생각으로 너무 충격을 받았던 거예요. 그 얘기를 듣고 딸이 박장대소를 하면서 “아빠, ‘존맛탱’은 진짜 맛있다는 얘기다.” 너무너무 맛있다는 얘기를 요즘 애들은 ‘존맛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개’자를 쓰면 이거는 기가 막히게 맛있다는 얘깁니다.(웃음)
이건 뭐 너무너무 맛있다는 얘기이고. 제가 차마 말을 못 하는데 여기 ‘개’ 대신 10원짜리 하나 넣어가지고 존맛탱을 쓰면. 이건 누가 봐도 우리가 봤을 때는 100% 욕이거든요. 그런데 걔네들은 너무너무 맛있을 때 쓰는 용어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 아빠는 그것도 모르고 그런데다가 눈물까지 흘리잖아요. 그래서 그 얘기 듣고 좀 안심을 하다가 “야, 그러면 그 눈물은 뭐야?” 그랬더니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난다.(웃음)
그 생각도 못 한 거예요. ‘오죽 맛없으면 우나’ 했더니. 너무 맛있어서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난다. 그 얘기를 듣고는 이 아버지가 그 괴로움이 다 사라져버렸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보세요. 존막탱이라는 말 하나가 그 소리 하나가 우리를 괴롭힐 수는 없는데.
그 어법을 모르면 어법을 또 다르게 이해하면 그것이 우리를 마땅히 괴롭히는 무언가가 되지요. 그 말의 실체가 있어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괴로워하는 것이지요. 실제 댓글을 보고 자살하는 연예인들도 있지요, 거지요.
자기를 욕하는 댓글을 보고 자살한 연예인도 있고. 또 어떤 연예인은 댓글에 너무 심한 욕이 달려있어서 ‘내 도저히 못 참겠다’ 그래서 기어이 찾아내겠다. 해서 의뢰를 해가지구 찾았답니다.
찾아가지고 가서 정말 막 칼을 갈고 이제 가서 고소를 하려고 갔는데. 보니까 초등학생 애가, 순진하게 생긴 초등학생 애가 너무 화가 나서 얘기를 했더니 그 아이가 “사실은 제가 형의 너무 큰 팬이에요.”
너무 큰 팬인데. 뭐 어떤 모습이 좀 보기 안 좋아서 그냥 내가 그날 너무 기분도 안 좋고 해서 그냥 막 그냥 했다는 거예요. 자기 팬인데 자기가 기분 안 좋을 때 그냥 그렇게 막 투사를 한 것이지요.
그 얘기를 듣고 나니까 본인 정말 그 댓글 때문에 정말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는데. 그래서 그 많은 댓글 중에 그 댓글을 찾아서 기어이 찾은 건데. 그 댓글을 받았을 때 내가 받은 그 상처는 너무나도 커서 정말 죽고 싶을 정도였고.
또 실제 그 댓글이 약간은 본인도 그거에 대한 엄청난 콤플렉스가 있는데. 그런 얘기를 너무 적나라하게 하니까 너무 충격을 받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아이가 너무 좋아하는데 그날 내가 너무 그래서 그냥 이래 썼다.
그 얘길 듣고는 너무 허무하더래요. 내가 이렇게 죽을 것처럼 괴로웠는데 저 순진한 애가 나를 이렇게까지 괴롭혔단 말이야? 속으로는 이걸 찾으면 조폭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네가 그러면 어쩔래 하면서 대들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이렇게까지 욕하는 사람이면 ‘정말 칼부림이라도 하고. 나를 찾아와가지고 앞으로 죽이겠다고 찾아오면 어쩌나’ 하고 찾으면서도 걱정을 했는데. ‘이렇게 순진한 어린 꼬마 아이가 나를 이렇게까지 죽을 것처럼 괴롭게 만들었다니’
죽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구나. 그렇게 어이없는 말 한마디가 나를 죽일 것처럼 괴롭힐만한 힘이 실제는 없어요.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머릿속에 생각이, 머릿속에 생각이 우리를 괴롭히는 겁니다. 그런 댓글 하나를 보면 ‘수많은 사람이 이런 똑같은 생각을 할 거야’
그래서 오만가지 성급한 일반화를 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스스로 막 그 생각에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스스로 괴롭히는 겁니다. 그 허망한 허상. 그 소리 파장 하나가, 그 개념 하나가, 언어 하나가, 우리를 울렸다 울리고 자살하게 만들고 웃게 만들고.
내 인생을 쥐락펴락 한단 말이지요. 전혀 그런 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뭐 이런 얘기가 나와서 뭐 비슷한 얘기 가요. 제가 아는 스님들끼리 만나서 뭐 이런저런 얘기를 한참 하다가 그 스님이 되게 재밌는 스님이셨는데.
그 스님이 옆에 있는 다른 분이, 조금 후배 스님이 약간 잘못을 했는데. 이걸 좀 재미나게 한 마디를 이렇게 해주고 싶었는지. 이런 시방세...(웃음) 다들 갑자기 깜짝 놀래가지고 뭐 욕을 하니까 깜짝 놀래가지고. 뭔가 싶어서 깜짝 놀랬더니.
그 스님이 뭐라 그러냐면 이런 시방세계 부처님 같은 분이.(웃음) 시방세계 부처님 이러면서, 그렇게 하니까 이게 지금처럼 이제 그냥 다들 까르륵까르륵 웃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 생겼어요.
이 시방세계 부처님이라고 농담을 한 스님을 보고 다들 까르륵 웃고 말았는데. 그중에 한 스님이 정색을 하면서 “네가 그러고도 스님이냐.” 어떻게 부처님 명호를 가지고 그런 욕과 비슷한 어감을 풍기면서 그런 식으로 욕을 할 수가 있느냐.
왜 이렇게 천박한 짓을 할 수가 있느냐. 하면서 막 화를 내면서 아주 이 사람을 인격적으로 너는 아주 근본적으로 잘못돼 있다.라는 듯이 아주 그냥 막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변에 있는 스님들끼리 웅성웅성하면서 물론 이 말도 일리는 있는데.
뭐 그렇게까지 뭐 웃자고 한 말을 그래 정색할 필요 또 있느냐. 하면서 얘기를 했는데. “아, 아니다.” 하면서 또 정색을 하기도 했단 말이지요. 그럼 보세요. 그 시방세계 부처님이라는 말이, 말이 그렇게 표현을 한 것에 대해서 안 된다,
라고 강력하게, 그 의미 부여를 강력하게 한 사람은 그 얘기를 들으면 정색을 하겠지요. 엄청 화가 나겠지요. “아무리 그래도 부처님은 건들지 마라.” 하면서 엄청 화가 날 겁니다. 그런데 좀 유연한 사람 같으면 그렇게까지 화는 안 내겠지요.
웃고 넘길 수도 있겠지요. 어떤 쪽으로 선택할지는 뭐 본인의 마음이겠지만 특정한 그런 말 한마디에, 말은 전부다 허상인데. 그럴 거 같으면요. 그럴 거 같으면 그걸 가지고 따질 거 같으면. 사실 조사 스님들, 이건 정말 정말 나쁜 놈들이 많습니다.
조사 스님들은 말의 허망함을 지적하기 위해서 강력한 방편을 써버려요. “부처?, 뭐가 부처냐?” 예를 들면 똥 막대기가 부처라 그러잖아요. “부처가 뭐냐?”라고 물어보면 “똥오줌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거든요.
“똥오줌이나 부처나 다를 게 없다.”라는 얘기를 적나라하게 쓰고 있어요. “그리구 부처라는 말을 한 놈이 있으면, 내가 저, 부처는 저 똥통에 빠져있는 똥 휘젓는 그것만도 못한 놈이다.” 이런 식으로 얘길 합니다. 아주 막 그냥 그렇게 얘길 합니다.
부처를 똥오줌과 비교 못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부처라는 상. 똥오줌이라는 상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만 그게 문제가 되는 것이지. 그 상을 타파해주기 위해서 부처라는 상을 파해주기 위해서 그런 말을 쓸 수도 있는 것이지요.
즉, 이렇게 발끈을 한다,라는 것 자체는 내가 스스로 부여한 의미 부여. ‘이거는 그래도 절대 안 돼’라고 하는 그거를 100% 믿고 너무 과도하게 믿게 되었을 때 그거를 혼자서 혼자서 발끈하는 것이지요. 남들에겐 발끈할 일이 아닌데 본인에겐 발끈 한 일이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특정한 말들이 특정한 사람에게는 과도한 의미 부여가 되어 있고. 그것을 100% 믿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남들은 다르게 생각하는데. 난 이렇게 생각해요. 그때 남들과 계속해서 부딪치게 됩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면 계속 ‘이게 맞다’라고 싸우고 부딪치고 이렇게 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실은 소리라는 파장 자체가 공허해서 특별한 의미 부여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사람에 따라 다 다르게 인식이 되어 있는 겁니다.
이 사람은 이 말을 다른 어법으로 쓸 수도 있는 거거든요. 특정한 말을 가지고 “이 사람은 나쁜 놈이다.”라고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지요. 요즘 말로 사바사입니다. 사바사가 뭔지 아세요? 저는 사바사 이러 길래, 애들이.
사바사 이러갈래. ‘아! 이거 사바하인가’ ‘사바하의 뭔가’ ‘불교 용어인가’ 이래 생각했더니. 사람 by 사람이라고. 사람에 따라 다 다르다. 요즘 애들은 사바사. 뭐 케바케, 케이스 by 케이스. 사람에 따라 다 다를 수 있고. 상황에 따라 다 다를 수 있다,
라는 용어를 이렇게 줄여서 사바사, 케바케, 이렇게 부른답니다. 얼마나 지혜로운 젊은이들이에요.(웃음) 뭐든지 자기를 고집할 필요 없잖아요. 사람에 따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어법이 다 다른 겁니다.
그 사람이 취하고 있는 집착하고 있는 것들이 다르기 때문에 그 사람과 내가 다르다고 해서 싸울 필요가 없는 거예요. 이처럼 이런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말이 여러분들을 괴롭힐 수 있습니까? 말이 여러분들을 괴롭힐 수가 없는 것이지요.
말은 여러분을 뭐 상처 주게 하거나 괴롭히거나 그럴 수 있는 실질적인 힘 자체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말 한마디에 휘둘려서 말이 우리를 집어삼키게 허용해줘버려요. 특정한 어떤 사람이 나에게 했던 특정한 욕이 지금까지 상처로 남아있다?
그거는 내 스스로 그 말에 상을 부여하고 그 상을 진짜라고 여겨서 그 상을 취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건 허상인데. 허상이기 때문에 취할 필요가 없는 것인데. 우리는 그 허상을 취해서 거기 사로잡혀서 내가 만든 괴로움에 내 스스로 사로잡혀 있었을 뿐이지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살 필요가 전혀 없지요. 이 사실을 안다면 이제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고 해서요. 모든 말을 세상 사람들이 쓰는 말을 다 써도 좋아요. 말을 쓰지 말라는 말이 아니에요. 말이라는 것은 허상이니까 말도 하지 마라.
묵언해라. 아무 말도 안 하고 이러고 있는 것만 좋은 것이냐. 그 아닙니다. 이게 불자들이 방편을 잘못 이해하는 것들 중에 하나에요. 묵언이라고 해서 말 없는 게 무조건 좋은 것이다. 말을 수백수천 가지를 해도 말 없는 것과 똑같애요.
거기 걸려있지 않으면. 거기 사로잡혀 있지 않으면. 말 아무리 많이 해도 말 한마디 하지 않은 것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거기 걸려 있으면 그 하나하나가 말이 전부다 나를 집어삼키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뭐랄까?
그 이젠 아마 여러분들이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말을 다 써먹긴 해도 내가 이 말도 써먹고 저 말도 써먹고 다 써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말에도 휘둘리진 않을 수가 있겠지요. 그건 실제가 아니니까. 실제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불교는 정말 심플하고 단순한 얘기만 하고 있습니다. 뭐냐 하면 ‘진실만을 봐라’ ‘진짜만을 봐라’ ‘가짜에 목매지 마라’ 이 단순한 이겁니다. ‘제법실상’ ‘실상만을 봐라’ ‘허상을 보지 마라’ ‘허상에 사로잡혀 있지 말고 실상만을 봐라’
이것을 보고 ‘직접 내가 실상을 보고서 직접 보고 직접 느낀 거 아니면 그 따라가지 마라’ 하는 거예요. ‘모양을 따라가지 말고’ ‘상을 따라가지 말고’ ‘말뜻 따라가지 마라’ 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야, 네 남편이 어떤 이상한 여자랑 같이 단둘이 걸어간다더라.” 그 말을 듣고 내가 이미 지금부터 벌써 전투태세 돌입해서 막 흥분과 울분 태세에 돌입해서 ‘어떻게 이걸 막 그냥’ 이런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아직까지는 허상이에요. 왜 그럴까요? 들은 소리지요. 거지요. 소리 파장일 뿐입니다. 그러고 그 사람이 잘못 봤을 수도 있고. 그 사람이 친동생과 걸어가는 모습을 봤을 수도 있고, 예를 들면. 무수한 가능성이 있을 수가 있어요.
그러고 그 사람이 본 거잖아요. 그 사람이 본 게 잘못됐을 수도 있어요. 비슷하게 생긴 다른 사람을 왜곡해서 봤을 수도 있고. 무수히 많은 왜곡의 가능성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거를 막 벌써 흥분부터 하고 이럴 필요가 사실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내가 내 눈으로 생생하게 보기 전까지는 허상입니다. 실상이 아닙니다. 뭐만이 실상일까요? 첫째, 생각은, 생각으로 만들어진 건 전부다 허상입니다. 그 사람 생각에 저장돼있다가 나에게 전달해 준 거잖아요.
그 허상이 벌써 몇 단계 거쳐온 거니 그 허상을 믿을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내가 직접 본 것이 아니라면. 지금 이 순간 내 눈앞에 목전에 드러난 당처. 당처는 지금 당장 이것. 이런 소리거든요. 내 눈앞에 당장 드러나있는 당장 이것만이 진실이지.
실제잖아요. 이것 아닌 모든 것들은 실상일 수가 없습니다. 실제일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봐서 안다고 착각하니까 봐서 안 거에 집착하고. 그걸 옳다고 생각함으로써 수많은 괴로움을 만들어내고.
들어서 알았다고 생각하니까 그게 나를 괴롭히는 일이 생기고. 마찬가지 냄새 맡고 맛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특정한 냄새가 어떤 사람에게는 역하고 토하고 싶은 냄새가 될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에겐 향기일 수도 있어요.
내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이면 그 사람 땀 냄새를 너무 맡기 싫겠지만 내가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면 땀 냄새조차 맡기 좋을 수도 있겠지요. 음식도 마찬가지지요. 어떤 사람은 너무너무 먹기 싫어하는 음식이 어떤 사람은 너무나도 맛있는 음식일 수도 있습니다.
접촉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접촉하는 것. 손과 손이 이렇게 맞닿은 것. 이건 그냥 맞닿은 것뿐이잖아요. 뭐 아무런 실체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허상 속에서 이 개념이 작동하기 시작하면요.
허상이 작동하기 시작하고 이 허상을 믿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이거는 그냥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사람의 손가락을 이렇게 살짝 터치만 했다. 그럼 막 두근두근거리고 막 떨릴 수가 있단 말이지요.
옛날 제 동생이 그러더라구요. 고등학교 때 다 순진하고 순수한 아이들이니까 그러겠지요. 어느 날 막 와가지고 막 약간 심각해져서 저한테 와서 형, 형, 나를 너무너무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었고,
자신도 그 여자 얘가 맘에 들고 그래서 뭐 의도한 바는 전혀 아닌데. 어떻게 어떻게 둘이 이렇게 있는데. 갑자기 뽀뽀를 하게 될 거 같애서 이제 내가 가까이 다가갔는데. 얘가 눈을 감고 벌벌 벌벌 떨더니 내가 가까이 갔는데 갑자기 기절을 했대요.
너무 떨다가. 너무 떨다가.(웃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냐고. 너무 놀라더라구요. 그 보세요. 접촉이라는 것이 접촉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의미 부여가 되면 상대방을 좋아하는 마음을, 나랑 좋아하지 않는 사람.
난 옆에 이렇게 몸만 살짝 부딪쳐도 좋아하는 사람이면 막 두근두근거릴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나랑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지하철에서 옆에 막 낑겨서 앉아도 그 아무 느낌이 없잖아요.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 옆에 앉으면 막 두근두근거린단 말이지요.
그거는 옆에 앉았다. 접촉했다,라는 것 자체가 실제적인 괴로움이나 즐거움. 이런 거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접촉은. 그런데 내가 사랑하기 시작하면 작은 접촉이 나를 기절할 만큼 좋게 만들 수도 있고.
또 정말 소름 끼치는 어떤 나쁜 놈이거나 막 그냥 범죄자 거나 이런 사람이 나한테 가까이 와서 나를 살짝 스치기만 해도 온몸이 소름이 막 그냥, 너무 무서워서 소름이 끼칠 수도 있을 겁니다.
어떤 접촉 하나가 우리를 괴롭힐 수도 없고 즐겁게 할 수도 없어요. 우리는 집안에서 뭐 다양한 좋은 기계 같은 것들을 사서 씀으로써 좀 더 이렇게 쾌적한 환경. 조금 더 쾌적한 어떤 뭐 이런 것들을 추구하고 살잖아요.
뭐 좋은 기계를 하나 사야 되겠다. 이런 것도 내가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좀 편한 것을 추구하는 그런 마음이지요. 그런데 하나의 허상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ㅇㅇ 하는 청소기를 사야 되겠다. 그거는 이제 잘 빨린다더라.
그러니까 이제 어떤 분이 “야, 뭐 절에서 뭐 그렇게 비싼 거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 “그냥 저 차ㅇㅇ 이라고 싸게 나온 것도 있다더라.” “그것도 뭐 똑같은 거 아니냐.” 뭐 이렇게 하면서 이렇게 “그거 사자.” 이렇게 한단 말이지요.
그런데 또 옆에서 한 사람이 그냥 그 차ㅇㅇ을 사서 잘 쓰고 있는데. 야 그래도 이거 앞에 얘기한 거는 이게 여기서 앞에 다 바람이 들어오면 미세먼지가 빠져나가지가 않는다던데. 이거는 뒤로 다 빠져나가서 앞으로 빨아땡기지만 뒤로 미세먼지가 다 나간다더라.
또 이런 얘기를 한 마디 하니까 갑자기 심리적으로 왠지 이 미세먼지가 나를 막 할 거 같고. 사실, 요즘 미세먼지 때문에 막 어떻다. 이러면서 어떤 보살님들은 너무 예민하게 아주 여기서부터 여까지 온몸을 막 틀어막는 걸 하고.
자식들도 그거 안 하면 화를 내면서 미세먼지가 너를 당장 죽일 것처럼, 이래 생각하기도 하는데. 제가 미세먼지에 조금 일가견이 있는 것이 많이 먹어봤거든요.(웃음)
바로 앞에 제가 있던 절에서 2년 내리 리모델링을 했잖아요. 그 4층 전체를 1층 공사할 땐 2층에 가 피해 살고. 2층 공사할 땐 1층에 피해 살고. 그러면서 층을 달리해가면서 2년을 살았습니다.
거기 일반 미세먼지의 몇 백배의 미세먼지가 늘 이렇게 있었대요. 그렇게 2년 살아봤거든요. 그런데 내가 가만 보니까. 바깥에 아무리 미세먼지 많다고 해봐야 그래도 상당히 미세먼지 없던 날하고 비슷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런다고 해서 뭐 큰일이 벌어지느냐. 뭐 그렇게 벌어지진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을 믿어버려요. 자기 생각으로 ‘이건 이럴 거야’라고 딱 믿고 나면 그 생각이 나를 장악하게 됩니다.
그러고 그때부터는 미세먼지가 나를 정말 어떻게 공격할 거라는 착각을 하게 돼요. 음식이, ‘이런 음식은 안 좋다더라’라는 정보를 듣고 나면 그 음식을 절대 안 먹어야지만 난 행복하고. 그 음식을 먹으면 큰일 날 줄 압니다.
어떤 분이 한때 뭐 물 따로 밥 따로 이래서 밥 먹을 때 물을 같이 먹으면 큰일 난다. 밥은 먹을 때 건조하게 밥만 먹어야지. 국을 먹으면 안 된다. 우리나라에 국 먹는 습관이 우리 한국인의 건강을 망쳤다.
뭐 어쩌고 하면서 밥을 먹고 건조하게 밥을 먹고 나서 30분쯤 후에 물을 먹어야 된다. 이게 엄청 인기였대요. 그때 이분은 되게 목마른 걸 먹었는데. 끝까지 물도 국도 안 드시는 거예요.(웃음)
그래서 아니, 좀 드시라고 했더니 끝까지 안 먹어요. 그래서 “왜 안 드세요?” 이랬더니. “아, 이게 엄청 안 좋은 거라고. 이거 사람들이 다 잘못 알고 있다고. 큰일 나는 짓이다. 이렇게 먹으면 큰일 난다.”
그분은 음식을 고구마를 먹고 목이 말라서 음료수를 먹어야 되는데 그거를 천하의 큰일 날 걸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 물을 먹는 사람들 전부를 정말 불쌍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거지요. ‘아, 저 어리석은 사람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본인도 몇 년간 그걸 계속하셨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웃으면서 그 얘기를 하더라구요. “야, 그 몇 년간 그거 하느라고 진짜 고통받았는데. 야, 뭐 그거 하나 안 하나 뭐 모르겠다 하면서 이제는 자유롭게 먹는다고.”
그런 식으로 우리는 이거 하면 건강하다,라는 수많은 다양한 정보들이 많잖아요. 그럼 거기에 목을 맵니다. ‘절대적으로 옳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게 나를 집어삼켜버리기 시작해요. 콜라가 몸에 안 좋다.
라는 것을 어느 정도는 뭐 이해하면서 좀 덜먹을 수는 있겠지요. 예를 들면. 그런데 그 절대적으로 안 좋아서 이걸 먹으면 죽을 거라고 생각을 하면 그게 더 나를 힘들게 만듭니다. 게임이 안 좋다고 해서 아이에게 좀 적게 시키는 건 모르겠는데.
‘죽어도 하면 안 돼’라고 과도하게 집착을 한다,라는 건 ‘그거는 안 좋다’라는 내 생각. 의식. 안이비설신의할 때 의식. 이 생각을 과도하게 100% 믿는 거잖아요. 그럼 그 아이는 반에서 약간 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반 애들은 전부다 만나면 다 게임 얘기를 하는데. 이런 얘기 하긴 뭐 하지만, 2, 30대 젊은 스님들을 만나면요. 약간 제가 좀 낄 수가 없어요, 대화에. 이분들은 이제 좋은 말로 하면 이제 우리 장병들을 포교하다 보니까 장병들 눈높이 포교를 해야 된다.
그래 게임을 하세요. 게임을 하면서 이제 법문할 때 게임 얘기를 가지고 법문을 하는데. 장병들 몰입도는 막 100%입니다.(웃음) 너무 몰입을 하면서 게임 얘기를 해주면서 막 이런 집착을 버리라는 얘기를 하면 장병들 기가 막히게 막 좋아해요.
그럼 그 맞는 말이더라구요. 그런데 그걸 가지고 제가 그게 게임이 ‘맞다’ ‘틀리다’ 이걸 가지고 젊은 스님들한테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아, 스님이 돼가지고 게임에 그렇게 빠져서 되겠습니까.” 이런 얘기를 굳이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굳이 그렇게 할 필요 없지요. 그걸 절대적으로 맞는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거는 절대적으로 맞는 것도 아니고 절대적으로 틀린 것도 아닙니다. 그걸 통해 뭔가 배우고 깨달을 수도 있고. 그게 나를 힘들게 할 수도 있지만.
‘이건 이렇게 하면 이럴 거야’ ‘이렇게 하면 저럴 거야’라는 내 생각. 그 생각을 100% 믿기 때문에 그 생각으로 인한 괴로움에 빠지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생각 때문에 내 인생이 자유롭지 못한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의식. ‘안이비설신의’ 보고 나서 알음알이 저장하고. 상을 저장하는 거지요. 듣고 나서 ‘이게 맞아’라고 저장하고. 맛보고 나서 저장하고. 먹고 나서 저장하고. 감촉 느끼고 나서 저장하고. 생각하고 나서 저장하고.
어떤 특정한 지식들을 저장해서 그걸 ‘100% 옳아’라고 저장하고. 그 저장한 걸 100% 옳다,라고 믿는 마음. 그 마음이 그 생각에 대한 집착을 가져오고. 그 칩착심을 가지게 되면 반드시 괴로움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그것을 옳다,
라고 저장해놓고 그건 허상인 줄 모르고 그걸 실상일 거라고 알면서. 내가 아는 건 ‘내가 봤기 때문에 진짜 난 알아’ ‘확실해’ ‘내가 경험해 봤기 때문에 맞아’ ‘물 따로 밥 따로 먹어보니까 진짜 난 건강해졌어’라고 느끼는 사람은 그걸 100% 신뢰해요.
‘내가 경험했기 때문에 알아’ 이럽니다. 어떤 분은 기도하면 다 이루어져. 왜? 내가 경험해봐서 알아. 나는 기도해가지고 내 아들이 서울대 갔어. 그걸 기도발이라고 100% 믿고 있는 사람이 있단 말이지요.
그럼 그분은 내가 몸으로 직접 체험해봤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아들이 공부 잘해서 서울대 간 게 아니고 내가 기도 잘해서 서울대 갔다,라고 믿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믿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자기 생각. 자기가 보세요.
안 이 비 설 신의 나라는 존재가 내 바깥에 색 성 향 미 촉 법이라는 게 있다,라고 느껴서 바깥에 있는 색성향미촉법을 접촉하자마자 머릿속에 자동으로 인식.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라는 ‘육식’ 알음알이를 저장합니다.
그 알음알이는 어떤 방식으로 저장돼있나 면 모양, 특정한 모양을 가지고 저장이 돼요. 컴퓨터에다가 저장하려면 이름을 정해야 되잖아요. 그거처럼 특정한 모양으로 저장을 합니다. 이거는 질투 뭐 사랑 뭐 온갖 개념을 가지고 머릿속에 저장을 해요.
저장한 것은 통틀어 얘기하면 상입니다. 상. 아니면 명. 이름을 붙여서 저장을 해요. 그래서 명상이라 그럽니다. 이름을 붙여서 그 모양을 저장을 한다. 그리구 그 상을 맞는다고 믿는 것. 이 허상을 실상이라고 착각하고 허상을 믿는 어리석음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때부터 그 허상이 내 인생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허상이 실상일 거라는 착각을 하고 그 허상이 내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게 돼요. 그걸 ‘전도몽상’이라고 합니다. 뒤집혀진 생각. 실제는 관심이 없어요.
이제는. 허상만 관심이 있습니다. 나는 이 허상의 세계 속에 살고 있으니까. 여러분은 실상의 세계를 살지 않구요. 허상의 세계에 살고 있어요. 머릿속에서 내 관념으로 구축해놓은 안이비설신의 가 색성향미촉법으로 만들어놓은 이 허상의 세계가
진짜라고 여기면서 ‘내가 봤으니까 진짜지’ ‘내가 들었으니까 진짜지’ 하면서 그 허상을 진짜라고 느끼면서 허상으로 구축해놓은 그 ‘만법유식’ 이 세상은 오로지 ‘식’일 뿐입니다. 내가 그렇게 저장해놓은 ‘인식’일뿐이에요.
‘유식무경’ 오로지 식밖에 없지. 바깥, 실제적인 대상이 없습니다. 바깥 대상을 보고 ‘이거야’라고 저장했는데 실제 이 대상을 본 게 아니라 이거(머리를 가리키며)를 보고 있는 거예요. A라는 사람은 나쁜 놈 했는데.
진짜 그 사람이 나쁜 놈이 아니라 여기서(머리를 가리키며) 그 사람을 나쁜 놈이라 인식한 이거(머리를 가리키며)를 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바깥 대상을 내가 봤다고 느끼는데.
사실은 내 마음 안에서 그 사람이나 인상을 내 마음 안에 이렇게 상을 그려놓고 내 마음에 견분. 이거 견분이라 그래요. 보는 부분을 견분이라 그러고요. 볼 견자, 견분이라 그러고. 내 여기 맺힌 상을 상분이라 그래요.
머릿속에 기억된 상을, 내가 상을 만들어놓고 내가 그 상을 보는 거예요. 이걸 견분이 상분을 보는 겁니다. 이게 ‘유식’에서 하는 표현인데. 즉, 마음이 마음을 보는. 분별심이 분별심을 보는. 즉,
내가 바깥 대상을 봤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바깥 대상을 본 게 아니라 내가 내 머릿속에 대상이라고 이미지 그려놓은 그거를 본 겁니다. 내가 나를 본 거지요. 내가 나를 허망하게 봐놓고 ‘나는 그 사람을 봤어’ ‘난 그것을 봐서 그것을 알아’
이렇게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거기서 괴로움이 오는 거예요. 실상을 보지 않고 허상을 보니까. 허상은 진짜가 아니니까. 진짜가 아닌 게 확인이 될 때마다 괴로울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렇게 정리를 하고 잠시 10분 쉬었다가 이야기 하겠습니다.
〜박수.
첫댓글 _()_
감사합니다 ~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편견을 가지고 저장했고 그 편견을 가지고 꺼내 쓰는데. 그것도 지금 이 순간에 나의 느낌, 나의 감정, 여기에 따라서 꺼낼 때 다른 게 꺼내진답니다. 분명히 그때는 조금 안 좋게 입력을 했는데 지금 내가 너무 기쁜 거예요.
너무 행복한 거예요. 그럼 과거의 것을 꺼냈는데 그걸 조금 좋은 방식으로 꺼내 쓴다는 거예요. 왜곡을 시켜서.
이 머릿속에 저장된 내 식대로 저장된 인상, 기억, 그걸 상(相)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해서 알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알 식(識) 자를 써서 식(識)이라고 불러요.
내가 의미 부여해서 기억해놓은 그 상을 진짜라고 집착하게 되면 그걸로 인해 괴로움이 발생합니다.
소리라는 경계에 우리는 의미 부여를 강력하게 합니다
그렇게 어이없는 말 한마디가 나를 죽일 것처럼 괴롭힐만한 힘이 실제는 없어요.
그래서 오만가지 성급한 일반화를 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스스로 막 그 생각에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스스로 괴롭히는 겁니다.
말이 여러분들을 괴롭힐 수가 없는 것이지요.
허상인데. 허상이기 때문에 취할 필요가 없는 것인데. 우리는 그 허상을 취해서 거기 사로잡혀서 내가 만든 괴로움에 내 스스로 사로잡혀 있었을 뿐이지요.
허상을 진짜라고 느끼면서 허상으로 구축해놓은 그 ‘만법유식’ 이 세상은 오로지 ‘식’일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