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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행원과 깨달음
보현행원을 말하다 보면 반드시 깨달음의 문제에 부딪친다. 보현행원은 참 좋은 것이다, 그런데 과연 보현행원으로 깨달을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 대부분은 보현행원은 좋기는 하지만 깨달음과는 상관없기에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수행을 하고 그리고 그렇게 해서 깨달음을 얻은 후 그때서야 보현행으로 나아가겠다고 한다. 아니면 깨치면 보현행은 저절로 나오는 것이니까 굳이 지금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지금 사람들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옛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화엄경』에 처음부터 보현행이 펼쳐지는 것을 보지를 못하고 화엄 따로 보현행 따로, 깨달음 따로 보살행 따로… 그렇게 알며 줄창 화엄만 붙잡고 있다가 화엄을 다 배운 뒤에 마지막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보현행인줄로만 알고 왔던 것이다.
이것이 먼저 비로법계를 깨닫고 그 후에야 보현행(先悟毘盧法界 後修普賢行願)하는 전통적인 기존의 견해다. 이러한 오해는 40 『화엄경』이 나온 뒤에도 여전한 것 같다. 오히려 대본『화엄경』과 달리 40 『화엄경』에 마지막으로 「보현행원품」이 따로 삽입되자 이제는 ‘정말로’ 『화엄경』의 ‘결론’이 보현행이라 생각하고 보현행을 오직 「보현행원품」 강의 때만 언급하는 수준이 되어버린 듯하다. 결론이 보현행원이니까 그 전에는 보현행원을 공부할 필요가 없고 화엄을 먼저 공부하고 결론 낼 때만 보현행원을 다시 살펴보는 것이다.
보현행을 언급하는 『화엄경』 내용이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화엄은 그저 중국 화엄종 사람들의 이야기만 정설이 되어 내려온다. 그리고 『화엄경』의 연구는 없고 화엄종의 화엄학 연구만 있다. 문제는 화엄종의 화엄학 강의에는 보현행 강의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화려한 ‘화엄학’만 있을 뿐이다.
많은 분들이 행원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지는데 행원에서의 깨달음은 이미 논란이 끝난 사건이다. 우리는 이미 깨달아 있으며 행원은 이미 깨달음을 뛰어넘은 가르침인 것이다. 행원을 할 때 우리는 이미 ‘깨달음 너머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행원은 깨닫기 위해 쓰는 힘을 ‘부처로 살아가는데 써라’고 가르친다.
화엄의 관점은 번뇌가 변해 보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또 중생이 수행을 해서 그 공덕으로 부처를 이루는 것도 아니다. 지금 이 자리가 부처 자리 또는 부처 이룰 자리이며 깨달음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 바로 ‘나의 소식’인 것이다. 따라서 부처 이룰 생각하지 말고 부처로 살아가라! 깨달음을 이루려 하지 말고 깨달은 자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불자들 사이에도 부처님처럼 살자는 운동이 물결치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안타까운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 부처님처럼 사는 것인지, 그 방법의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구체성의 부족인 셈인데,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부처로 사는 것인가? 필자는 그것이 바로 보현행원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럼에도 보현행원의 언급은 아직 없는 듯하다. ‘부처님으로 살자, 그리고 그 길이 보현행원이다!’ 이렇게 말씀해 주시면 정말 얼마나 좋을까? 보현행원은 하는 것만큼 부처가 된다. 한 번을 하면 한 번 부처님, 열 번을 하면 열 번 부처님 되는 것이다.
실지로 보현행을 하면 평범하고 무의미하던 일상사가 새롭게 다가온다. 작은 일들이 소중하게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작은 깨달음은 곳곳에 들불처럼 일어나기 시작하여 마침내 온 산하를 태우는 거대한 불로 이어지게 된다.
또한 번뇌가 점점 적어지며 일상생활 그 자체가 선정의 상태로 늘 깨어있는 상태가 되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점차 수많은 부처님이 출현하시게 된다. 부처님의 출현! 그것은 그대로가 깨달음이다.
육조혜능은 “반야행을 하고 금강경을 독송하면 견성한다.”고 말한다. 반야행은 자비행이며 보현행 역시 자비행이다. 따라서 보현행으로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 『화엄경』에도 ‘보현행원은 부처님행이며 보현행원으로 깨닫는다.’는 말이 여러 곳에서 나온다.
보현행원은 나날이 내 생명을 성장시키는 가르침이다. 행원으로 우리는 진리의 삶을 살며 행원으로 우리의 진리 생명은 나날이 성장을 더해 간다.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룬다는 말도 따로 이룩할 보리라는 게 있어서 그것을 보현행원으로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보현행원을 함으로써 순간순간 찰나찰나를 진리생명으로 살고 진리 생명으로 성장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모두가 그렇게 찰나찰나 진리로 피어나는 꽃, 그런 진리 생명의 꽃들이 만발한 세계를 화엄(佛華嚴)이라 한다.
굳이 보현행원이 깨달을 수 있는 가르침이라는 근거를 경론에서 찾는다면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으니 하나는 금강경, 둘은 기신론이다. 금강경은 무아 무상의 자리에서 일체 선업을 지을 것을 가르치고, 그렇게 하면 바로 깨달음을 얻는다고 말한다.
기신론 역시 일체의 선업을 짓는 것이 자연히 진여법으로 가는 길이 된다고 이른다. 또한 기신론은 진여의 세계에 오입(悟入)하는 방법으로 주체와 객체, 혹은 주관과 객관의 분별을 떠나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비록 대립과 투쟁의 세계에 살지만 이것을 극복해야 하며 이는 분별을 떠나고 주객이 사라지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현행원은 주객이 사라지는 가르침이다. 나와 너는 사라지고 부처님만 남는 게 보현행원이다. 온 세상이 부처님만 가득한 것이다.
우리가 도업은 중시하지만 선업은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선업은 일반인들이나 짓는 것이고 도업이 더 중요하다는), 영명연수의 만선동귀집을 보면 그렇지 않다. 칠불통게(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에도 강조하듯 선업은 단순히 일반인들이나 복 짓는 차원에서 짓는 그런 것이 아니다. 어쩌면 불교의 모든 것이고 깨달음에 가는 길이기도 하다.
다만 선업의 의미나 가치를 제대로 모르고 있을 뿐이다. 만선동귀집을 보면 선업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치를 모르면 선업은 단순 유위법으로 끝나지만 알고 보면 삶뿐 아니라 수행에서도 선업을 짓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만선동귀집은 설명한다. 만선동귀집 서(序)는 이렇게 시작한다.
“바다는 온갖 흐름이 모이지 않고선 가득해지질 못하듯이 십지의 지존에 오름도 만선(萬善)을 두루 쌓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다… 어찌 한 가지의 수행만으로 쉽사리 이루어지랴, 반드시 많이 듣고 두루 익혀야 하는 것이다… 무릇 계행이나 선정을 의지하면 마땅히 복이 되고 경전이나 존상(尊像) 등을 짓거나 펴낸다면 반드시 뛰어난 공덕을 얻는 법, 자기에게 조그마한 현(賢)이 있는 것으로 짐짓 마음이 곧 부처라고 말하지 말라. 범부로부터 성위에 오르는 것이니 수행하지 않은 석가는 없었고, 거짓으로부터 진실에 드는 것이라 닦아 증득하지 않은 달마는 없었다.”
한 가지 수행만으로 성불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숱한 행, 그 중에서도 만 가지 선을 닦아야만 증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대저 지금부터 이야기하려 하는 온갖 선법(善法)은 모두가 실상(實相)을 그 바탕(宗旨)으로 하여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이 같은 이치에만 계합하면 그 나머지 만덕(萬德)은 저절로 갖춰지리니, 왜냐하면(이 마음의 실상이란) 진제(眞際)를 움직이지 않은 채 항상 만행을 일으키고, 인연 생멸법을 어기지 않은 채 항상 법계의 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영명연수에 의하면 선법이란 실상에서 나와 실상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단순한 착한 일, 복 짓는 것이 선업이 아니라 선업은 진리의 나툼이요 또 진리로 귀결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업의 만행을 닦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도 한 가지가 아니라 두루 익혀야 하고 만선을 행하면 만덕은 저절로 갖춰진다는 것이니, 그것은 진리가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인데 진리를 불교 용어로 말하면 실상이요 깨달음이다. 따라서 만선의 대명사인 보현행원이 깨달음을 이끈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어서 영명연수는 말한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이들은 마땅히 육도와 만행을 널리 구해 원만히 행할 것이요 부디 어리석음만을 지키며 우두커니 앉아 참된 수행의 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
만선을 행할 생각은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염불 독경 좌선만 수행이라 생각하고 진짜 수행인 육바라밀과 만행을 게을리 하면 안 된다는 것인데, 이에 따르면 만 가지 선의 보고(寶庫)인 보현행원을 ‘깨달음과는 상관없다’며 부정하고, 수행처에 앉아서 수행만 고집하는 것은 참된 수행을 가로막는 일이 된다. 만선동귀집은 끝무렵에 이런 질문과 답을 한다.
(문) “만행의 근원이 마음을 근본으로 삼는다면 조도문(助道門)은 어떤 법으로 근본을 삼는가?”
(답) “진실과 정직으로 으뜸 삼고 자비와 섭화(攝化)로 행할 바의 도를 삼는다. 곧고 바르기 때문에 결과도 굽고 휘어짐이 없어서 행(行)이 진여를 수순하며, 자비로 소승의 편고(偏枯)에 떨어지지 않고 공(功)이 대각(大覺)과 가지런한 것이다. 이 두 문이야말로 실로 자타를 겸리(兼利)케 하는 첩경이 된다.”
진실 정직 자비 섭화는 또한 보현행원의 속성들 중 하나다. 보현행은 진실하고 정직하며 자비 그 자체다. 그러므로 만선동귀집은 보현행원이야말로 깨달음을 일으키는 만 가지 선업의 시작임과 동시에, 자타를 모두 성불케 하는 지름길이 되는 가르침임을 일러주는 셈이다. 다만 애석하게도 만선동귀집 역시 그것을 ‘보현행원’이라 이름하지 않을 뿐이다.
이러한 경론적 근거에도 아직 깨달음에 대한 의문이 있는 분들을 위해 지눌의 깨달음에 이르는 가르침을 살펴보자. 지눌은 깨달음에 이르는 불교적 방법을 3 가지로 말한다.
첫째 지적해오로, 이 단계에서는 자기가 곧 부처라는 걸 깨닫고 이런 지적 깨달음은 수행자를 일시적으로 불도에 귀의하게 만든다. 둘째는 점수 단계로, 올바른 믿음의 단계를 거쳐 과거 습기를 끊임없이 씻어 건전한 마음 유지한다. 셋째, 점수가 마침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단계다.
그런데 지눌이 생각한 이 세 가지 가르침은 바로 보현행원에 적용할 수 있다.
보현행원은 내 생명이 바로 부처님과 똑같은 무량공덕 생명이라는 전제 하에 시작되는데 이것이 첫째의 지적해오이며, 다음으로 행원의 실천은 둘째 점수단계이고 행원이 무르익어 나타나는 단계가 셋째 단계다.
보현행원을 실천하지 않으면 결코 경험하지 못할 세계가, 보현행원을 실천하면 거짓말처럼 우리 앞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마치 여명에 새벽이 서서히 밝아오듯 그렇게 온 세상이 점점 밝아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세계가 얼마나 황홀하고 얼마나 도무지 알 수 없는 세계인가 하면, 『화엄경』 「입법계품」만 번역한 40 『화엄경』은 경 이름을 ‘입부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이라고 굳이 또 지었을 정도다. 지눌의 생각이 사실이라면 보현행원으로 우리는 완벽히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즉 보현행원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불교적 수행’인 것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보조지눌이 보현행원의 중요성을 언급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기존의 화엄 이해가 잘못되게 된 것은 ‘먼저 비로법계를 깨치고 나서 그후에 보현행원을 닦겠다’는 화엄교가의 흐름이 주류가 되었기 때문으로(즉 ‘따로 국밥’) 생각한다.
특히 비로법계의 상(想을) 일으켜 비로법계를 깨달으려 했는데, 이를 지눌은 그것은 망상이고 망상으로 비로법계를 볼 수는 없으며 부동지불을 믿는 마음을 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걸 ‘보현행원을 해야 한다’로 말했으면 보현행원이 지금까지 수행으로서 간과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실지로 지눌에 따르면 깨달음은 지적(theoria)인 것이어서 행, 즉 보살의 만행을 통해 증(證)으로 연결해야 한다고 했다(契證). 깨달음은 사실 시작일 뿐이어서 깨달음의 체험은 보살의 이상을 실천적으로 성취해 나감으로써 정점에 이르게 되며, 깨달음은 수행을 위한 전제를 이론적으로 파악하는 것일 뿐으로, 이 이해가 지속적인 보살만행의 실천을 통해 적용되지 않으면 그 깨달음은 진정한 것으로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깨달음이 행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지눌의 지적은 핵심을 말한 것이지만, 깨달음이 ‘행(목우행)에 의해 올 수 있는 것’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이 못내 아쉽다.
목우행은 보현행으로서, 깨친 이후에만 할 수 있거나 깨친 이후에야 할 수 있는 행이 아님에도 깨친 이후에야 목우행을 언급하는 것은 목우행의 깨달음에 대한 중요성을 조금 평가절하(?)한 듯하다.
지눌이 보현행으로 저 미진권경을 깨뜨릴 수 있고 보현행으로 깨달을 수 있다고 한 말씀만 하셨다면, 보현행원이 깨달음과 무관하고 수행도 아니라는 오해가 오늘 날까지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화엄학을 그렇게 발전 시켰음에도 화엄의 실천 부분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오늘날 일본 화엄 불교의 모습도 없었을 것이다.
첫댓글 오늘 오후에 드디어 진짜 최종본 보냈습니다.
받아들여질지 아닐지는 불광출판사에서 최종 결정하겠지만, 어쨌든 보냈습니다.
올 1월부터 오늘까지, 여기만 매달렸더니 번아웃 상태.
오늘은 원고를 보는데 뭘 보는지를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화요일 최종 본 걸로 그냥 끝
이번 책은 제가 볼 때는, 정말~ 잘 쓴 책입니다.
불교가 무언지, 부처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 우리는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또 어떤 수행을 해야 하는지, 또 선정과 깨달음, 계정혜는 어떤 원리로 오는지 등등이,
제 뇌피셜이 아니라 경론에 근거해서 분명히 밝혔습니다.
또 보현행이 무엇인지, 왜 화엄은 보현행을 강조했는지도 밝혔고,
무엇보다 화엄과 보현행을 연관시켜 설명했습니다.
보현행이 화엄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화엄이 보현행과 또 따로 있는 것도 아님을,
화엄경을 통해 분명히 밝혔어요.
그리고 보현행원과 다른 수행, 다른 가르침과의 연관도 말씀드렸고요,
그리고 지금까지 불교의 문제점,
즉 공덕을 하나하나 따로 구하는 문제점을 지적했고,
이제는 하나의 가르침으로 모든 공덕을 이루고 모든 가르침을 이룰 시절인연이 왔음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복 따로 짓고(복덕자량) 수행 따로 하고 지혜 따로 이루고(지혜자량)이 아니라,
가르침 하나, 수행 하나가 모두 복도 짓고 참회도 하고 선정도 이루고 지혜도 이루게 하는 것이지요.
원효는 이를, '모든 가르침이 최고에 이르면 하나로 돌아간다'고 말했고요.
왜 화엄이, 보현행원이 세간과 출세간을 구분하지 않는지도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자체가 세간, 출세간이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인데,
우리는 그동안 시간과 공간이 다른 존재인 줄 알고 과학을 해왔죠.
그러나 아인슈타인 때 와서, 시간과 공간은 본래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존재였음이 밝혀졌고,
그래서 이제는 시공간이라 하여, 시간과 공간을 분리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로 생각하며 과학을 풀어나가지요.
세간 출세간도 마찬가지.
깨달음과 어리석음도 마찬가지.
이런 것들은 사실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인데,
우리는 그동안 분리해서 따로 연구해온 겁니다.
이를 지적한 것이 부처님의 '불이(不二 or 不異)사상'으로, 다른 말로 중도라고도 하지요.
그런데 이 불이라는 게 유마경에 나오는 것인 줄 아는 분들이 태반입니다.
사실은 불교 전체가 불이요, 특히 화엄경만큼 불이를 강조하는 가르침이 없는데,
상즉상입이 바로 불이 때문에 일어나는건데,
불이는 못 보고 상즉상입만 본 것이 기존의 화엄학이지요.
화엄은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이 다르지 않다고 말해요.
-깨닫고 못 깨닫고가 같다!
(7) 正覺相의 一相無相 : 깨닫고 깨닫지 못한 것이 같다! 아무 차별, 차이가 없다!
불자야(보현보살이 문수보살을 불자라 부름) 가령 어떤 이가 항하사 모래 같은 마음을 내어 일일심에 다시 항하사 같은 부처님을 화작해서 항하사 겁이 다하도록 쉬지 않으면 불자야 이 사람의 화심 화작여래가 얼마나 많겠느냐? 문수가 답하대 제가 아는 바로는 화와 불화가 아무 차별이 없으니 왜 얼마나 되겠느냐 묻습니까?
佛子야 假使有人이 能化作恒河沙等心하고 一一心에 復化作恒河沙等佛호대 皆無色無形無相하야 如是盡恒河沙等劫토록 無有休息하면 佛子야 於汝意云何오 彼人의 化心하야 化作如來가 凡有幾何오 如來性起妙德菩薩이 言하사대 如我解於仁所說義컨댄 化與不化가 等無有別이어니 云何問言凡有幾何니잇고
@普賢. 보현이 답하대 선재선재라 문수여, 당신이 말씀하듯 설사 일체중생이 어일념중에 실로 성정각을 해도 불성정각과 하나도 차이가 없으니 왜 그런가. 보리는 무상이라 무상이면 즉시 증감이 없으니 문수여, 보살은 성등정각이 보리에 같고 일상 무상임을 응당 알아야 합니다.
普賢菩薩이 言하사대 善哉善哉라 佛子야 如汝所說하야 設一切衆生이 於一念中에 悉成正覺이라도 與不成正覺으로 等無有異니 何以故오 菩提는 無相故라 若無有相이면 則無增無減이니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應如是知成等正覺이 同於菩提하야 一相無相이니라 여래출현품
그리고 무엇보다 금하광덕큰스님의 사상을 재조명했습니다.
우리 큰스님의 사상이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밝은지를 부족한 지면이나마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곳곳에 기회만 나면 언급했습니다.
큰스님의 사상은 반야화엄(또는 반야행원)입니다.
반야가 主인 것은 분명하지만, 또한 화엄을 모르면 큰스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실 수가 없어요.
이통현의 불광관 수행법이 바로 큰스님의 마하반야염송 가르침이요 보현행원임을 이번 책에서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큰스님의 불광운동의 불광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님을 저의 오버인지 모르나 저는 느낍니다.
큰스님의 경계가 화엄반야이기에, 큰스님이 이통현의 불광관을 아마 알지 못하셨을 것임에도
새 불교운동을 행동불교의 대명사인 화엄불교, 그리고 이통현이 일찌기 명명했던, 불광을 시공을 넘어 공명했을 겁니다.
구리 갈매리 보현사에서 큰스님을 모시고 대학교를 다녔던 기획원 출신 조화재선배께서 들려주신 이야기인데,
큰스님이 새불교운동을 하시면서 이름을 뭐로 하면 좋겠냐며 조선배에게 자문을 구하셨다지요.
큰스님이 생각하신 이름은 佛光과 '부처님의 빛'인데, 조선배는 그 중 '부처님의 빛'을 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큰스님이 불광으로 결정.
큰스님 떠나시고 방향을 못잡고 헤매는 불광 불자님들.
이번 저의 작은 책이,
부디 다시 큰스님의 가르침을 재조명하고,
큰스님의 뜻을 이어가는,
그런 불광 불자님들이 되시면 참 좋겠습니다.
오늘은 사실 제가 진료를 쉬는 날입니다.
그럼에도 원고를 마감해야 해서 오후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원고는 수정도 못하고 거의 그대로 그냥 보냈어요.
번아웃 상태라 그런 듯.
제가 목요일은 쉬는 줄, 이 동네 많은 분들이 아시는 바,
환자도 6명 봤네요
아마 의사들 떼돈 버는 줄 국민들이 아실텐데,
오늘 6명 진료한 수입은 10만원 남짓입니다.
그것도 접종이 있어 그래요.
이 중 5만원은 오늘 휴진 대신 나와준 직원 오후 수당으로 지급될거고,
오늘은 5만원 번 셈이네요.
이제 퇴근하며 시골 가을 내음 짙은 읍내에서
막걸리 한병 사갖도 가야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제가 보현행원을 말씀드리면 숱하게 들어왔던 사항 두 가지,
1. 보현행원은 그냥 자비행, 보살행이지 그게 깨달음과 무슨 상관이냐?
2. 보현행원을 수행이라 할 수 있느냐?
이 두 부분을 확실히 대답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중 하나입니다.
금강경에 대한 화엄조사 규봉종밀의 말씀을 들어보면
종밀은 본각진심을 긍정적으로 드러내는 경전이 최고의 경전이라는 교상판석으로
화엄경 원각경은 불교의 핵심을 드러낸 최고의 경전이라 합니다
but 반야부를 대표하는 금강경은 부정의 말투가 많기에 대승경전 이기는 하지만 좀 수준이 떨어지는 가르침이라고 단호히 평가하지요
남회근선생 역시 금강경은 性空을 말하므로 쉽게 狂禪으로 흐르기 쉽다며
이해는 쉬울지 모르나 증득에는 아무 도움이 안된다고 말씀 하십니다
책에는 원효 이야기도 핵심을 실었습니다
원효는 화엄승이라는데
실지로 화엄 관련 저서는 아주 적어요 3권밖에 없어요
그런데 왜 원효를 화엄승이라 할까요
심지어 해동 화엄 초조라 할까요
번아웃이 왔음에도 탈고하셨음을 축하드립니다.
문장이 매끄럽습니다. ^^
고맙습니다. 기대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탈고를 축하드립니다.
출간될 책도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청정수님 말씀처럼 기존 책에서 보던것과는 문체가 다른 것 같습니다.
또한 기존 경전에 근거하여 설명을 곁들이니 처음 접하는 불자님들께는 훨씬 설득력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큰 일 하셨습니다. 보현 선생님 말고,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 하실 분이 누가 있겠습니까?
출판 일은 선생님 손을 떠난 일이니 좀 쉬시면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