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치)사상문화 풍토를 어떻게 새롭게 할 것인가?"
이남곡 (인문운동가)
작년 년말 나에게 깊이 다가온 두 가지 역사가 있었다.
하나는 김치형 변호사의 <‘메타피지컬 클럽’으로 반추해 보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발제문을 통해서 본 미국의 주류 철학 즉 프래그마티즘의 성립 배경에 대한 것이었다.
간단한 소개다.
‘1872년 1월 미국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에서 ‘메타피지컬 클럽’이라 이름 붙인 하나의 토론 모임이 시작되었다.
토론은 주로 어떤 학자 한 사람의 서재에 모여 이루어졌다.
이 토론 모임은 9개월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을 만든 핵심적인 사상과 가치를 탄생하게 했다.
이것은 토론에 참여한 사람들조차 짐작하지 못하였다.
이 사상의 근본적 가치는 “관용”이다. 프래그머티즘 사고방식은 공리주의적 교육철학, 문화의 다원주의, 표현의 자유의 확대 등의 사상을 낳게 하였는데, 이러한 결과는 모두 관용의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이 글을 읽은 나의 감상이다.
남북 전쟁이라는 극단적 분열과 대립 증오를 경험한 나라에서 그 경험이 ‘관용’을 바탕으로 하는 철학을 탄생시키고, 그 이후 미국을 만들어간 사상으로 발전시켰다는 것은 미국의 행운이다.
그것이 우연한 행운이었을까?
물론 우리는 여러 조건과 상황이 미국과 다르다.
우리도 분단과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분열과 대립 증오를 경험했다.
아쉬운 것은 그 경험을 ‘관용’을 바탕으로 하는 철학이나 사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그런 역사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대단히 뛰어난 사람이나 사상들도 많았다.
단지 그것이 주류 철학으로서 나라의 중심가치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세계가 놀라는 여러 성과들을 이루었으면서도 지금의 난국을 만나고 있는 원인의 하나로 보인다.
특히 해방 70여년이 지나 상전벽해의 세상을 만들어왔으면서도 극단적인 대립과 분열이 나타난 한 해를 보내며, 이제 새로운 사상 정신의 지평이 열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다른 하나는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이정철 저)라는 책을 통해서 본 이조 선조 시대 당쟁에 관한 분석이었다.
<선조 11년경 동인(東人)세력이 확대되는 흐름 속에서 전에 볼 수 없었던 양상이 나타났다.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이 정(正)과 사(邪)로 구분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시비(是非)와 정사(正邪)는 차원을 달리하는 구분이다. ‘시비’는 특정한 상황이나 문제에 대한 판단 내용에 국한될 뿐 판단 주체에 대한 규정은 아니다. 때문에 사안에 따라 시(是)와 비(非)의 주체는 달라질 수 있다. ‘비’즉 잘못된 판단을 했다고 해서 그 판단 주체가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정사(正邪)’는 개별 상황을 뛰어넘어 판단주체의 정체성에 대한 규정이다. 그리고 정(正)과 사(邪)의 차원에서 비로소 군자와 소인이 구분되었다. 소인은 정치적 타협의 대상이 아닌 제거되어야할 대상을 뜻했다>
<동인과 서인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동인과 서인의 보합(保合), 조제(調劑)에 대한 논의도 동시에 등장했다. 조제란 정파간 세력 균형을, 보합이란 대화합을 뜻했다.
조제보합론은 조정에서 동인이 자신의 주도권확립을 위해서는 반드시 물리쳐야할 논리였다. 특히 동인과 결합한 구신(舊臣)에게 조제보합론은 대단히 위험한 주장이었다. 그들을 조정에서 축출시킬 수도 있는 논리였다. 이이(李珥)가 조제보합론을 들고 나오자 동인 측은 크게 반발했다.
이미 현실은 조제보합론의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하지만, 조제보합론은 사림(士林)의 오랜 이상과 정체성을 담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조제보합론이 가진 힘의 원천이었다>
450여년 전 용어들을 바꾸어 보면 우리 현실과 그대로 겹쳐 진다.
동서 대립을 좌우 보혁의 대립으로, 조제보합론을 협치나 연정으로, 동서간의 화합이 무망하여 당파를 떠나 개인적으로 접근한 것을 당 대 당의 협치나 연정이 아니라 국무회의를 실질적으로 당파를 떠나 연정이 가능하게 구성하자는 지금의 제안과 비교해 보면 거의 들어 맞는다.
새로운 (정치) 사상 문화의 핵심은 ‘무지(無知)의 자각’에 바탕을 두고 어떤 단정이나 고정도 없이 우리 시대의 정의(正義)를 찾아 실천하려는 태도가 주류로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현재 가장 크게 작용하고 있는 실제와 관념의 어긋남을 극복해야 한다.
실제는 산업화를 통한 경제적 토대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관념은 산업화를 주도한 세대(세력)와 민주화를 주도한 세대(세력)는 서로를 배척하고 있다.
실제는 산업화 민주화 세대가 함께 새로운 세대의 발목을 잡고 있다.
실제는 남북 체제의 이질성이 민족의 동질성보다 훨씬 커져 있다.
그런데 관념은 과거의 ‘민족주의’에 갇혀 있다.
‘일민족 일국가’라는 관념의 틀에서 벗어나 ‘두 국가 시대’를 통해 민족의 실질적 생명력을 최대화한다.
실제는 한국은 글로벌한 개방국가이다. 그런데 관념은 척양(斥洋) 척왜(斥倭)의 낡은 관념에 갇혀 있다.
새로운 문명전환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조차 이 어긋남을 못 벗어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세계시민의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명의 선도 국가로 나아간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 실제와 관념의 괴리를 극복하는 사상 문화 운동이 하나의 ‘국민(인문)운동’으로 전개되는 것이 절실하다.
밝은 미래를 열어갈 새로운 정치운동은 이러한 사상 문화 운동과 융합할 때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