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집에 있다. 그런데 수도꼭지가 고장이 났다. 화분에 물을 줘야 하고 바닥은 청소기로 밀어야 한다. 당신은 지금 집에, 당신이 항상 글을 쓰는 그 집에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글쓰기는 당면 과제가 아니다. 지금은 글을 쓸 정신이 없다. 욕실에 물이 새고 있고, 식물들은 바싹 말라 있고, 먼지 뭉치가 온 집안을 굴러다니니까. 그러니 지금 당신은 집에 있지만 글쓰기와 저만큼 떨어져 있다. 당신의 마음과 글쓰기와의 거리는 이 집에서 카자흐스탄만큼 멀어져버렸다.
그래서 당신은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린다. 하지만 기다리는 건 꽤나 위험할 수 있다. 이 모든 혼란이, 경미한 우울증이, 해야 할 일들이, 우주에 대한 의심들이, 그리고 생각해낼 수 있는 수천 개의 다른 일들이 모두 처리되거나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려 한다면, 아주 오랜 시간을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어야 할지 모른다. 기다리는 중에는 좋은 일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무덤만 더 깊이 파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기다려선 안 된다. 작가에게 기다림이란 위험하고 치명적인 게임이다. 그러니 기다리지 말고 다음과 같은 규칙을 따라보면 어떨까?
네 시간에 한 번씩, 말하자면 약 먹을 시간이 되면 꼬박꼬박 약을 챙겨 먹듯이, 오전 8시와 정오와 오후 4시와 저녁 8시에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자.
“지금 내가 처한 바로 이 상황에서, 15분 동안 글을 쓸 수 있을까?”
만약 대답이 “아니오.”라면 왜 안 된다는 대답을 했는지 자신에게 설명해보라. 만약 대답이 “그렇다.”이긴 한데 글쓰기를 시작하고 있지 않다면 왜 글을 쓸 수 있는데도 쓰고 있지 않은지 물어야 한다. 대답이 “그렇다.”이고 글을 쓰고 있다면 스스로에게 솔직히 물어보자. “만약 이런 식의 실험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정말 이 시간에 글을 쓰고 있었을까?”
이 실험을 시도한 사람들은 입을 모아 다음처럼 말한다.
“그렇다고 네 시간에 한 번씩 꼭 글을 쓰지는 않았어요. 솔직히 너무 인위적이고 강압적이잖아요. 제 하루 일과나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이루기 힘든 일이죠. 하지만 글쓰기를 더 많이 의식하긴 했어요. 그래서 이 시간제 글쓰기 활동을 하지 않았던 때와 비교하면 확실히 그 전보다는 더 많이 쓰게 되는 것 같아요.”
이것이 바로 이 기술의 요점이다. 지금 비록 다리미판을 꺼내고 인터넷 뱅킹으로 고지서들을 처리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항상 글쓰기를 내 마음의 가장 앞이나 중심으로 꺼내놓고 있으면 글을 써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유지할 수 있다. 집에 있을 때마다 글을 쓰겠다는 이 목적의식을 유지하고만 있다면 그 목적의식은 실제로 일정한 시간에 글을 쓰는 행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하루에 네 번 약을 먹어야 한다는 걸 기억하듯이 글쓰기도 똑같이 대해야 한다.
물론 정한 그 시간에 절대로 글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될 위험, 또 그 시간이 와도 글을 쓰지 않아서 자기 자신에게 또다시 실망할 위험은 얼마든지 있다. 아예 시도하지 않았을 때보다 더 기분이 엉망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위험은 매우 생산적이고 부지런한 작가들에게도 적용되는데, 대부분의 작가들도 목표한 만큼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상으로 봤을 때 당신은 어쩌면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매일 연습해야 할지도 모른다. 자기를 용서하기로 새로이 다짐하면 글쓰기를 몇 번 건너뛰거나 글을 생각만큼 완성하지 못했다고 해서 너무 자기를 비하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어떻게든 글을 안 쓰고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는 데 거의 천재적이다. “오늘 나는 글을 쓰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보다는 보통 이런 식으로 말한다. “지금 목록을 작성하지 않으면 마트에 가서 헤매거나 잊어버리니까 지금 꼭 써둬야만 해.” 혹은 “일단 낮잠을 자야겠어. 남은 하루를 잘 보내려면 이 방법밖에 없으니까.”
이런 식으로 우리는 글쓰기를 회피하고 싶은 의도를 애써 못 본 척한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간다. 죄책감이 스멀스멀 밀려온다. 좌절감이 둥지를 튼다. 우울감이 자리를 잡는다. 하지만 우리는 나름대로의 목표를 달성했다. 글쓰기를 회피했으며 그것이 나의 속임수라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침묵하고 지나가는 데 성공한 것이다.
짧지만 규칙적인 글쓰기 시간을 정해놓으면 어찌 되었건 그 시간에는 글쓰기에 대한 생각들이 찾아오고 내면과 대화를 하게 된다. 물론 ‘아, 벌써 글 쓸 시간이네. 하지만 지금은 진짜로 쓰고 싶지가 않아’ 같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이 실망스러울지라도 글쓰기에 대해서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것보다는 당연히, 몇 배나 낫다. 이런 식으로 하면 글쓰기라는 목표가 머릿속에 존재하도록 마음을 다잡고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 있다. 몇 번의 의무적 글쓰기 시간을 중심으로 하루를 계획하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소설가인 조안은 말한다.
“글을 쓰겠다는 목적의식을 계속 품고 있으면 글쓰기가 생활 전면에 더 자주 등장하게 되죠. 하루에도 몇 번씩 다음 문단을 고민하고 틈틈이 머릿속으로 글을 다듬고 내 소설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 생각합니다. 이런 규칙적인 ‘목적의식 인식하기’는 자유로이 글쓰기에 대해 생각하고, 실제로 글을 쓰고, 또 글을 계속해서 쓸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글을 쓰기를 바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글을 쓰고 싶을 수도 있다. 이 역시 충분치 않다.
반드시 글을 써야겠다는 목적의식을 가지라. 그 목적의식이 훨씬 더 견고하게 우리를 이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