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28> 서장 (書狀)
여사인(呂舍人)에 대한 답서
“화두 해결되면 모든 문제 말끔히 사라지고”
"천 가지 만 가지 의심이 다만 하나의 의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화두(話頭) 위에서 의심이 부서지면 천 가지 만가지 의심이 일시에 부서집니다. 화두가 부서지지 않으면 다시금 화두 위에서 의심과 대면하여 끝까지 씨름하십시오. 만약 화두를 포기하고 도리어 다른 문자 위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경전의 가르침 위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옛 사람의 공안(公案) 위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일상사의 잡다한 일 속에서 의심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모두 삿된 마구니의 권속들입니다.
무엇보다도 조심할 것은, 화두를 제시하는 곳에서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며, 사량으로 헤아리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뜻을 사량할 수 없는 곳에다 두고 사량하면 마음은 갈 곳이 없어서, 마치 늙은 쥐가 소의 뿔 속으로 들어가 바로 넘어져 갈 길이 막혀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또 가슴에 시끄러움이 있으면 다만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를 드십시오.
부처님의 말씀과 조사 스님들의 말씀과 여러 곳의 노스님들의 말씀이 천차만별로 다른 것 같지만, 무자(無字) 화두를 뚫어내면 일시에 모두 뚫어내어 남에게 묻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만약 부처님의 말씀은 어떠하며 조사의 말씀은 어떠하며 여러 노스님들의 말씀은 어떤가 하고 남에게 한결같이 묻기만 한다면, 영원히 깨달을 때가 없을 것입니다."
천 가지 만 가지 의심이 다만 하나의 의심일 뿐이다. 중생이 가진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다양한 번뇌와 문제가 실은 하나의 문제이다. 겉으로 나타나는 모양으로 보면 인간이 가진 모든 문제는 제각각으로 다 다르게 보인다. 그러나 궁극적 해결이라는 점에서 보면 인간이 가진 모든 문제는 다 동일한 문제로서 본질적으로 하나의 문제이다.
그 하나의 문제란 바로 모양[相;생각,관념,느낌]으로 분별하고 헤아리며 모양에 머무르고 모양에 매여서 모양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여 모든 것을 모양을 가지고 해명하고 해결하려 하는 습성이다. 중생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물든 세속의 일을 모양에 매여서 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청정한 도(道)니 진리니 초월함이니 해탈함이니 깨달음이니 하는 탈세속의 문제까지도 모양에 매여서 행하고 있다. 세속과 탈세속이 그 뜻으로 보면 다르지만, 둘 다 모양 속에 있다는 면에서는 동일하다.
즉 중생의 근본 문제는 모양에 매여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이 가진 모든 문제의 해결의 길도 단 하나뿐이니, 그것은 모양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모양 속에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분별을 따라 이리저리 모양을 취사간택하는 것이 아니라, 모양의 구속에서 한 번 벗어나는 것이다. 일단 모양의 속박에서 벗어나면 그렇게 다양하게 보였던 모든 문제가 일시에 해결이 되면서, 모든 문제가 본래 하나의 문제임을 알게 된다.
화두를 부순다[打破]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모양에서 한 번 벗어나는 체험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어떤 화두든 하나만 부수면 그것으로 모든 화두를 다 부순 것이 된다. 진실로 완전히 부수었다면, 이 화두는 부수었는데 저 화두는 아직 부서지지 않는다는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만약 그렇게 판단된다면 아직 처음의 화두도 부수어 진 것이 아니라, 부수었다는 모양을 지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화두를 들 때 가장 명심해야 할 사항은, 반드시 모든 모양을 벗어나서 허공속에 한 점 바람도 없이 깨끗한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모양에 의지하여 이리저리 나누고 결합한 것을 가지고 만족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화두의 해결은 어떤 미묘한 이치의 이해도 아니고, 산뜻하고 상쾌한 느낌도 아니고, 그럴듯한 관념도 아니고, 말로써 상대를 묶어버리는 것도 아니고, 어떤 합리적 설명도 아니다.
화두가 해결되면 모든 문제가 말끔히 사라지고(해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문제가 본래 없었다), 동시에 모든 이유도 사라져서 물을 것도 없고 답할 것도 없다. 그저 말끔할 뿐이다.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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