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문학론(民族主義文學論)
【1】
1926년경 국민문학파에 속했던 문인들이 내세운 문학론. 당시의 국민문학운동은 바로 민족문학운동의 동의어(同義語)였다. 이 운동은 계급제일주의를 주장한 프로문학의 이론적 강화와 대공세)大攻勢)에 맞서 일어난 것이다.
이 운동의 주동적 인물들은 염상섭ㆍ양주동ㆍ조운(曺雲)ㆍ김영진(金永鎭)ㆍ이병기(李秉岐)ㆍ김성근(金聲近) 등이었다. 국민문학파의 이론적 토대는 조선적(朝鮮的)인 것의 쟁취였는데, 구체적 내용은, 염상섭의 <시조(時調)에 관하여>(조선일보.1926)에서 표명된 조선의 시대상, 조선인의 생활ㆍ감정ㆍ사상ㆍ희망 등으로 집약될 수 있다. 이러한 조선적인 것의 추구와 촉진은 당연히 민족의 복고적(復古的) 사상을 동반하게 되어, 그 결과 시조의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1925년을 기점으로 하여 그 후 시조문학의 재현을 위한 평론이 계속 발표되었는데, 최남선의 <조선국민문학으로의 시조>(조선문단.1926)와 <시조태반(時調胎盤)으로의 조선민정(朝鮮民情)과 민속>(조선문단.1926), 손진태(孫晋泰)의 <시조와 시조에 표현된 조선 사람>(新民.1926), 이병기의 <시조란 무엇인고>(동아일보,1926) 등이 그것이다.
시조 부흥과 더불어 우리글의 연구와 보급을 위한 운동이 제기되었고, 그래서 1926년에 비로소 정음반포일(正音頒布日)을 찾아 정하기도 하였다. 조선적인 것을 찾으려고 한 운동은 민족의 전통과 가치의 회복을 위한 것이었다는 뜻에서 높이 평가될 수 있지만, 그것이 민족의 역사적 현재성(現在性)을 도외시하고, 외국의 것을 배척하는 보수적ㆍ국수주의적(國粹主義的)인 것으로 빠질 약점과 위험성을 또한 내포하고 있어서, 프로문학 진영으로부터 맹렬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비판문의 대표적인 예가 김기진(金基鎭)의 <문단상(文壇上)의 조선주의>(조선지광.1927)이다. 김기진은 조선주의란 결국 국수주의의 변형이며, 보수적 정신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공격했다. 이 글에 대하여 염상섭ㆍ정병순(鄭炳淳)ㆍ김영진 등이 반론을 펴는 등 격한 논쟁이 벌어졌다.
【2】
1929년을 전후하여 한국문단에 계급제일주의와 민족제일주의의 상반된 극단의 병폐를 지양하고자 양자(兩者) 사이의 이론을 조화 또는 제휴하려는 의도에서 절충파가 일어났다. 절중파의 주장은 민족을 떠난 계급이 있을 수 없고, 계급을 떠난 민족 또한 있을 수 없다는 조화론을 내세웠다. 그런데 절충파, 즉 중간파는 프로문학파나 국민문학파와는 다른 제3세력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원래 국민문학파에 속했던 문인들, 즉 염상섭ㆍ양주동이 중심세력이었고, 거기에 정노풍(鄭蘆風)이 가담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절충파의 주의ㆍ주장은 엄격한 의미에서 ‘제3의 길’의 모색이라 볼 수 없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민족문학을 발판으로 해서 무산계급문학을 어느 정도 흡수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절충적 타협론이 나오게 된 동기는 국민문학파의 비진보적(非進步的) 보수성을 반성하고, 한편 염상섭이 <반동전통문학(反動傳統文學)의 관계>(조선일보.1927)에서 언급했듯이, 피압박민족의 현실에 있어서 계급문학을 배제할 수 없는 그 당시의 문단사적 필연성 때문이었던 것 같다.
특히 양주동과 정노풍이 민족문학과 계급문학의 제휴를 강력히 요구한 열렬한 절충파였는데, 그들의 지론(持論)의 핵심은 [문예공론]에 실린 양주동의 단평과, 정노풍의 <조선문학건설의 이론적 기초>(조선일보.1929)에서 잘 밝혀지고 있다. 양주동은 민족을 초월한 계급정신이 없고, 계급에서 유리된 민족 관념도 없기 때문에 우리 문학은 민족적인 동시에 무산계급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노풍은 계급의식을 힘껏 전취(戰取)하여 쓰러져 가는 민족의식을 회복하는 데 문예창작의 의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프로문학파쪽에서는 절충파의 제휴론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유는, 그것이 엄정한 중립파의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부 국민문학파의 변절론(變節論)이었기 때문이다. 국민문학파 즉 민족문학파의 문학이론은 그 후 이렇다 할 뚜렷한 형적(形迹)을 남기지 못하고 쇠퇴하여 버렸다가 1930년대의 ‘브나르도운동’에 귀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브나르도운동’은 시조부흥론과 회고적(懷古的)인 역사소설의 붐을 야기했을 뿐, 식민지하의 민족이 당한 박해와 그 역사적 현실을 바르게 반영하거나, 증언하는 일이 없었다. 그것은 기껏해서 계몽주의적이며, 시혜적(施惠的)인 소설, 즉 이광수의 <흙>, 심훈의 <상록수> 같은 작품을 낳았을 뿐이다.
【3】
1945년 8ㆍ15 해방과 더불어 민족문학 수립을 위한 운동이 문단의 집단적인 규모에서 일어났다. 이 현상은 정치ㆍ경제ㆍ문화의 모든 부문에 걸친 속박의 굴레가 일시에 철거된 것을 의미한다.
일제의 민족의식과 언어의 말살정책에 의해 타부가 되어 온 민족문화․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치열하게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해방된 민족의 당연한 역사적 과제였다. 이 시기에 민족 진영의 문인들과 좌익진영의 문인들 사이에 민족문학 수립의 문제를 놓고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격심했다. 민족문학 건설의 주장은, 민족진영에서 김광섭ㆍ이헌구ㆍ김동리ㆍ조연현ㆍ조지훈 등에 의해 제창되고, 좌익진영에서는 임화(林和)ㆍ김남천(金南天)ㆍ김동석(金東錫) 등에 의해 주장되었다.
그러나 양자간의 주장은 화해될 수 없는 이념의 대립이었다. 민족진영의 고유성, 계급의식에 앞선 민족의식의 고취, 문학ㆍ예술의 독자성을 부르짖은 데 반하여, 좌익진영은 유물사관(唯物史觀)을 통한 민족의 역사의식과 계급의식을 내세웠다. 두 계열의 문학적 주장은 결국 참된 민족문학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우파(右派)는 순수문학의 길을 택했고, 좌파(左派)는 문학의 지나친 정치편향에 닿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참된 민족문학의 건설은 다시 후일의 과제로 미루어지게 되지 않을 수 없었다.
【4】
1970년대 초기에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다시 제기되었다. 즉 [월간문학](1970.10)의 특집으로서 김상일(金相一)의 <민족문학의 기원>, 문덕수의 <고전문학과 민족의식>, 김현의 <민족문학 그 문자와 언어>, 이형기의 <민족문학이냐, 좋은 문학이냐> 등이 발표되었다. 그 후 임헌영(任軒永)의 <민족문학에의 길>(예술계.1970. 겨울호), 김용직(金容稷)의 <민족문학론>(현대문학.1971.6), 염무웅(廉武雄)의 <민족문학, 이 어둠 속의 행진>(월간중앙.1972.3), 백철(白鐵)의 <민족문학의 오늘과 내일>(세대.1972.6), 김병걸(金炳傑)의 <작가의 민족연대의식>(문학사상.1972.11), 이상섭(李商燮)의 <도식적 민족주의의 통폐(通弊)>(문학사상.1972.11) 등이 발표되었다.
이들 평론은 서로 간에 논쟁을 거래한 것이 아니고, 민족문학에 관한 각 평론가의 지기 나름의 견해를 밝힌 것이다. 김상일은 고고학적 측면에서 민족문학의 근원을 다루고 있고, 문덕수는 한국 고대문학 속에서 민족의식의 발원(發源)을 찾으려고 했다. 김현ㆍ임헌영ㆍ김용직ㆍ염무웅 등의 평론은 민족문학에 대한 논지의 핵심이 서로 방향을 달리하고 있으나, 일제 식민지하의 구호적(口號的)이었던 민족문학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있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되고 있다. 한편, 이형기와 백철은 민족문학에 대한 견해의 결론으로 민족의식과 미학(美學)의 결합을 요청하고 있다.
이와 같이 민족문학의 문제가 다시 일어나게 된 큰 원인은, 아마도 국제정치의 역학(力學)에 의하여 타율적으로 오랫동안 갈라진 민족의 재통합을 바라는 국민의 염원과, 이제는 외세(外勢)에 의존하지 않고 지주적이어야 하겠다는 민족의식의 당위성 때문인 것 같다.
참고문헌
「韓國 文學 大事典」, (서울: 敎育出版公社, 1981), “민족주의문학론”
첫댓글 고맙습니다